통일사상 - 제1장 원상론 (原相論) - 3

2010. 1. 6. 17:06참사랑 영원까지/통일사상

3)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이동성(異同性)


다음에는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이 本質的으로 동질적(同質的)인가 이질적(異質的)인가, 즉 성상과 형상의 이동성(異同性)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앞에서 말한 성상과 형상의 이성성상論이, 일반 철학상의 본체론(本體論)으로 볼 때 어떠한 입장이 될 것인가, 즉 성상(性相) 형상(形狀)의 이성성상(二性性相)論이 일원론(一元論)인가 이원론(二元論)인가, 또는 유물론(唯物論)인가 유심론(唯心論; 관념(觀念)論)인가. 여기의 일원론(一元論)이란 우주의 시원(始元)이 물질이라고 주장하는 일원론적(一元論的) 유물론(唯物論)이거나, 우주의 시원(始元)이 정신이라고 주장하는 일원론적(一元論的) 유심론(唯心論, 觀念論)을 말한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전자(前者)에 속하고 헤겔의 관념론은 후자(後者)에 속한다. 그리고 二元論은 물질과 정신이 각각 별개이면서 우주생성의 근원이 되고 있다고 보는 입장이며 사유(思惟; 精神)와 연장(延長; 물질)의 두 실체를 인정하는 데카르트(R. Descartes)의 유심이원론(物心二元論)이 그 예이다.


그러면 통일사상의 성상(性相)-형상(形狀)의 이성성상論은 一元論인가, 二元論인가, 즉 원상(原相)의 성상과 형상이 본래 동질적인 것인가 이질적인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만일 성상과 형상이 이질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이원적 존재(二元的 存在)가 되어 버린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성상(마음)과 형상(전에너지(前에너지, 에너지로 변환되기 전의 상태))이 이질적(異質的)인 두 요소인가, 동질적인 요소의 두 표현태(表現態)인가를 알아보면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은 동질적인 요소의 두 표현태(表現態)이다. 이것은 마치 수증기와 얼음(氷)이 물(水:H₂O)의 두 가지의 표현태(表現態)인 것과 같다. 물은 물分子(H₂O)의 引力과 斥力이 균형을 이룰 때이며, 열을 가하여 척력이 우세해지면 기화(氣化)하여 수증기(水蒸氣)가 되고, 기온(氣溫)이 下降하여 빙점 이하로 떨어져서 引力이 우세해지면 얼음이 된다. 수증기나 얼음은 모두 물의 표현태, 즉 물분자의 引力과 斥力의 상호관계의 표현양식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양자는 전혀 이질적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성상(性相) 형상(形狀)의 이성성상도 하나님의 절대속성의, 즉 동질적요소의 두 가지 표현태(表現態)인 것이다. 절대속성이란 에너지的 心이요, 心的에너지이다. 에너지와 마음은 별개가 아니라 본래 하나이다. 이 절대속성이 창조과정에서 分化된 것이 하나님의 마음으로서의 성상(性相)과 하나님의 몸으로서의 형상(形狀)이다.


성상과 형상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성상은 심적요소(心的要素)로 되어 있지만, 거기에는 에너지的 요소도 갖고 있으며, 단지 심적요소(心的要素)가 에너지적요소보다 많을 뿐이다. 또 형상은 에너지적 요소로 되어 있지만, 거기에는 심적요소도 갖춰져 있으며 에너지적 요소가 심적요소보다 많을 뿐이다. 그와 같이 성상과 형상은 전혀 이질적(異質的)인 것이 아니다. 양자 모두 공통적으로 心的요소와 에너지的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피조세계(被造世界)에 있어서 성상과 형상은 정신(마음)과 물질로서 서로 이질(異質)인 것으로 나타나지만 역시 거기에도 공통된 점이 있다. 그것을 표시하는 例로서 마음에도 에너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개구리 등에서 채취한, 신경이 달린 골격근(骨格筋; 신경근표본)에 대하여 신경(神經)에 전기적 자극을 주면 근육은 수축(收縮)한다. 한편 우리들은 마음으로써 손이나 발의 근육을 움직인다. 이것은 마음이 신경을 자극하여 근육을 움직이는 것이다. 즉 마음에도 물질적인 에너지(전기에너지)와 같은 에너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면술(催眠術)로 타인의 몸, 예컨대 팔이나 다리를 움직일 수 있는 것도, 마음에 에너지가 있음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에너지에도 성상적요소가 깃들어 있다. 최근의 과학에 의하면, 物理的 眞空狀態에서 에너지가 진동(振動)하여 소립자(素粒子)가 형성되는데, 이 때의 에너지의 진동은 연속적이 아니고 단계的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마치 음악에 음계(音階)가 있듯이 同에너지가 단계적으로 진동해서 그 결과 그 단계에 따라서 규격(規格)이 다른 소립자가 나타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것은 마치 음악에 있어서 음계(音階)의 차가 마음에 의해서 나타나듯이 에너지의 배후에도 마음(성상)이 있어서 진동단계를 나타낸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즉 이와 같이 성상(性相) 속에도 형상적요소가 있고 형상(形狀)속에도 성상적요소가 있지만 원상에 있어서의 성상과 형상은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본질적으로 동일한 절대속성에서 성상과 형상의 차이가 생기고, 창조를 통하여 그 속성이 피조물이 되어서 피조세계에 나타날때 이질의 두 요소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하나의 점에서 두 방향으로 두 개의 직선(直線)이 그어지는 것과 같다. 그 때 하나의 직선은 성상(精神)에 대응(對應)하고, 다른 직선은 형상(物質)에 대응하는 것이다(그림 1-1).

 

성서에는 피조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질을 알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로마서 1:20). 피조물을 보면 마음(정신)과 육신, 본능과 肉, 생명과 세포?조직 등의 양면성(兩面性)이 있기 때문에 귀납적(歸納的)으로 볼 때, 절대원인자인 하나님의 속성을 하나님의 이성성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에 있어서 이성성상은 실은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원리강론에서는 하나님은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의 이성성상의 중화적 주체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은 관점을 본체론(本體論)에서 볼 때는 統一論'5)이 되게 된다. 그리고 창조를 구상하기 전의, 절대속성 그 자체만을 표현할 때의 본체론은 유일론(唯一論)'6)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84~322 B. C.)에 의하면 실체(實體)는 형상(形相; eidos)과 질료(hyle)로 되어 있다. 형상(形相)이란 실체로 하여금 바로 그것이 되게 하는 본질을 말하며, 질료는 실체를 이루고 있는 소재를 말한다. 서양철학의 기본적인 개념이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形相)과 질료(質料)는 통일사상에서 말하는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에 해당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형상(形相)과 질료(質料)를 구극(究極)에까지 소급(遡及)해 올라가면 순수형상(純粹形相; 第一形相)과 제1질료(第一質料)에 도달한다. 여기의 순수형상이 곧 하나님이지만 그것은 질료가 없는 순수한 활동이며, 사유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는 순수한 思惟 또는 사유의 사유(노에시스, 노에세오스)였던 것이다. 그런데 제1질료(第一質料)는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체론(本體論)은 이원론(二元論)이다. 또 제1질료(第一質料)를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본체론은 하나님을 모든 존재의 창조주로 보고 있는 기독교의 신관(神觀)과도 다르다.


토마스 아퀴나스(T. Aquinas, 1225~1274)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思惟)를 근거로 하여, 그와 마찬가지로 순수형상 또는 사유의 사유를 하나님으로 보았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A. Augustinus, 354~430)와 마찬가지로 그는 하나님이 無에서 세계를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질료를 포함한 일체의 창조주시며 게다가 하나님에게는 질료적요소가 없으므로 그는 無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를 주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無에서 물질이 생긴다는 교의(敎義)는, 우주가 에너지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보는 현대과학의 입장에서 볼 때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이다.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는 하나님과 정신과 物體(물질)를 세 가지의 실체라고 하였다. 구극적(究極的)으로는 신이 유일(唯一)한 실체이나 피조세계에 있어서의 정신과 물체는 각각 하나님에 의존하면서도 상호간에는 완전히 독립되어 있는 실체라고 하여 이원론(二元論)을 주장했다. 그 결과, 정신과 물체는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는지 그 설명이 곤란(困難)하게 되었다. 데카르트의 이원론(二元論)을 이어받은 게엘링크스(A. Geulincx, 1624~1669)는, 서로 독립한 이질적인 정신과 신체 사이에 어떻게 해서 상호작용이 가능한가 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양자 사이를 매개(媒介)한다고 설명했다. 즉 정신이나 신체의 한편에서 일어나는 운동을 계기(契機)로 하여 그에 대응하는 운동을 신(神)이 다른 한편에도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이것을 기회원인론(機會原因論; occasionalism)7)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것은 방편적(方便的)인 설명에 불과할 뿐 오늘날에는 아무도 이것을 거들떠 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즉 정신과 물질을 완전히 이질적인 존재라고 본 데카르트의 관점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서양사상이 포착한 형상(形相)과 질료(質料) 혹은 정신과 물질의 개념에는 설명하기 곤란한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난점을 해결한 것이 통일사상의 성상과 형상의 개념, 즉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은 동일한 본질적 요소의 두 가지의 표현태(表現態)이다라는 이론이다. 이상으로 신상에 있어서 성상과 형상에 관한 설명을 전부 마친다. 다음은 또 하나의 신상인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에 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