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리원본 - 第二編 創造原理와 墮落攝理 - 第二章 - 하나님은 나를 알므로 알 수 있음

2013. 1. 7. 11:28참사랑 영원까지/원리원본

第二 章 하나님은 나를 알므로 알 수 있음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根本에 對하여 까지 알아보려고 하고 있다. 果然 其 自體가 明白하여서 天宙의 全部를 圓滿하게 理解코저 함에서 始作이라고는 할 수 있는 事實은 自明하다. 사람은 하나님에서 始作하였으며 萬物도 亦是 하나님부터라고 是定할 수 있지만 根本되는 하나님은 如何하게 始作하였으며 그 前에는 무엇이 있었는가?라고 묻는 사람이 많다. 그러면 하나님의 存在의 根本보다도 實際問題는 第一 가까운데 있는 自己가 問題이다.

 

  現實 自己의 存在의 根本을 안 後에야 다음 問題 하나님으로 옮겨지여야 할 事實인데 自己의 存在의 根本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存在의 如何를 말한댓자 其 自體는 例를 들면 公式의 根本單位로 될 自體를 아지 못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면 單位數로 있는 自體의 問題를 確定하여야만이 其 公式의 第一步 應用의 始作을 繼續하여 廣大한 基本公式과 連結도 지을 수 있으면서 其 自體의 公式도 勿論 明白하여지는 事實이다. 그런고로 사람은 먼츰 한 單位體의 公式 根本과 같은 立場에 서 있는 自我의 한 存在만 確定하면은 其他의 存在決定은 如實한 結果로서도 推測하여 그로 미처주는 根本自體를 把握할 수 있다. 그런고로 사람들은 自己들이 有나 無나 하는 것을 먼츰 疑心하여야 할 事實이 根本으로 되어야 한다.

 

 그리하면 自己가 있다면 무엇 보아서 알 수 있는가. 良心보아서인가 그렇지 않으면 感覺을 보아서인가 그렇지 않으면 體型을 보아서인가 하는 데에서 問題는 始作되는데 良心과 感覺과 體型이 有라고 하면은 무엇을 標準잡고 말하는가를 다시금 吟味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有라고 하는 것과 無라고 하는 것은 最初의 分岐點을 무엇으로 잡고 있는가가 生覺할 重要問題이다. 有하다면 相對인 無하다는 것을 聯想시키는 事實인데 사람들이 有하다는 그 自體는 무엇을 標準하고 始作케 되며 그 始作은 어느 限度까지 擴大하고저 하는가. 또 그와 反面에 無하다는 것도 어느 限度의 無를 規定하고저 하는가가 問題이다. 無하다면 實體 無한 存在는 始作點을 잡아 주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고로 사람 自體들이 無하거니 有하거니 하는 것은 어느 한 存在를 벌써 有에 處케하든가. 無에 處케 하든가의 實在 存在를 規定지은 위에서 말하난 바를 아러야 한다. 내가 있다고 하는데는 無한 實體에 對하여서 成立되는 名詞이다.

 

 그렇다면 無는 어디에 한 可否存在의 根本決定을 지어주는 한 中心存在는 무엇인가가 要求되는 바인데 이 存在는 自己를 前提條件으로 規定한 基盤위에서 始作하였기에 有無의 決定的 判決을 내리는 行例가 只今 사람들이 말하는 凡例의 事實이다. 그러므로 이 事實은 自己를 中心하고 있는 事實을 生覺치 않고 他 自體에로부터의 始作點을 보고서 하는데에서 여러 가지 存在의 確定을 알 수 없게 하는 것이 事實이다. 그런고로 사람은 自己가 한 無限有와 無限無와의 中間存在이며 한 公式單位體型이라는 事實을 明白히 하는 것이 今日 사람들이 질머진 課業이다.

 

 그러므로 有하고 하는 것은 自體가 良心으로나 感覺으로나 體型上으로나 實定할 수 있는 事實들을 否定 못함으로 有라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有自體인 自我는 至今 無의 始作을 결정짓는 基本行動으로 始作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런고로 無를 決定한다면 그 決定한 自體가 無의 最大値를 可決하였는가 無에 대한 程度는 如有인가가 疑問되니 그 無라고 하는 그 點은 有와는 어떤 距離를 갖고 있는지 大端한 重要問題다. 卽 無라고 하는데는 우리가 보고 보이지 않는 程度인지 또 感覺할 수 없는 程度인지 體型을 構成할 수 없는 程度인지 그 立場이 明白한 點은 如何한가 하면은 勿論 이 實在 感覺內에 屬하는 데서만이 有無의 出發點을 잡고 있다.

 

  그러면 사람이 有라든가 하는 것은 實體로서만이 問題하지말고 無하다고 하는데에 있어서 그 無는 우리가 無라고 하는 最大値가 아니고 有와 聯關을 가질 수 있는 存在의 繼續体로서 우리 感覺內로 感觸할 수 없는 範圍 外에 있는 存在라는 것을 말하여 주는 事實이다. 그러므로 이 無라고 하는 것은 더 적은 無에로 나 갈 수 있는 中間存在임을 알려준다. 나를 有로하는 自體를 數로 表示하면은 ① 이라고 할 수 있다면 無하다는 것은 零(0)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하나 ① 數字를 보아서 零이 있다고 至今 數學世界에서는 보고 있지만 이 零이라는 存在가 數字上으로는 表示되나 實際에 있어서는 零이 無가 아니고 無를 象徵하기 위한 抽象적 存在와 같은 것이라고 至今은 말할 수 있다. 卽 無에는 無限無를 限定 못하니 그 無의 中心이야 零가지고는 表示도 못한다. 그런고로 零을 잡아보면 零이라는 것은 數字上 理論上 存在라고는 認定할 수 있으나 數字上으로는 零이라고 하는 零點이 있는 位置에서 一般的으로 알려지고 있는 零과는 判異한 自體이다. 그런고로 零이라고 現社會에서 쓰고 있는 것은 有의 小形体의 것이며 더 小로써 無限大하여지는 存在의 中間自體임을 否定 못한다. 有와 無의 限界線은 즉 하나이다. 그런고로 이러한 나를 잘 알려면 無限有의 始作이면서 無限無의 始作의 基礎를 알어야 할 重大한 問題가 生起는 바이다. 하나와 零이 同一點이라고 보니 無限有와 無限無의 存在의 第一 中心 據點이 卽 하나와 零線의 境界點이다. 그러므로 나 하나는 無限有의 始作의 存在며 極小有의 存在를 알고 있는 바이면서 또 無限無의 最大 存在라는 其 立場을 取하고 있는 自體가 卽 ① 하나인 것이라는 존재다.

 

           하나와 零은 境界를 定치 못함.

  數字上으로는 零과 ①하나와의 相異 位置를 갖고 있지만 實際에 있어서는 同一點을 離脫 못하는 共通 路線上의 存在다. 그러므로 實際上으로는 1=零이라고 할 수 있는 存在들이다.

               1= 零

   1= 絶大値數의 基本數이며 有의 基本存在다.

   零= 無限無의 絶大値數면서 有의 無限小數의 中間存在다.

 그런고로 問題되는 바는 나 한 自體가 重大 問題인데 나는 至今 어디서부터 始作하여 잡은 存在라고 하고 싶은가? 그것은 各自의 自由로 맡기기로 하자. 卽 ①에서 始作하였으면은 그 하나가 갖고 있는 存在의 價値價를 全部 認識하여만이 되지 않겠는가가 先決問題다. 卽 無限大와 無限小의 問題보다도 其 中間自體인 하나의 存在의 規定이 큰 難關逢着이라 아니할 수 없는바다.

 

 이 하나되는 自我를 알면 無限大에 對한 位置부터 無限小의 위치가 갖고있는 中間存在에 對한 全部를 알어야만이 自己에 대한 確實한 規定을 할 수 있을 것인데 그렇다면 그 存在를 全部 밝혀서만이 其보다 더 큰 存在에 대한 根據를 解決할 資格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고로 사람들은 自己가 있다고 하여 놓고 無한 事實이니 無하다느니 하는바는 卽 數世界에 있어서 零이라하여 絶對無의 存在를 決定한 듯이 하고 있는 바와 同一한 生覺으로 되어 있는 바와 한가지라. 없다할진댄 無限小에 까지 倒着한 其 世界가 自己의 決定 範圍 內에 들어서게 될 때에는 無에 對한 結論은 價할것인데 그것 조차 生覺도 못하고서 그저 無라면 自己가 無라고 하는 바가 그냥 無로서 萬事를 解決하여주는 中心 存在로 되는가. 그것은 至極히 어리석은 行動이다. 有라할진대 其 存在의 價値는 絶對有까지 繼續 存在하고 있는 바를 알 수 있다.

 

  그런고로 有로 하는 自己와 無의 中心 立場의 自己에 대하여서 알려고 할적에 第一 큰 問題의 中心點이다. 卽 有로 내가 있어야 되며, 無로 내가 있어야 된다. 問題의 決定的 存在는 卽 自己이다. 이 自己가 至今 解決의 수수께기가 되는 根本問題다. 그런고로 먼츰 天宙의 基本單位라고도 할 수 있는 自己를 解得하여라. 그렇게 하므로써 딴 存在가 問題로 되는 바이다. 自己를 明白하게 解決하면은 其 以上에 대한 聯關的 事實에 對하여서는 認識할 수 있는 事實이다. 問題는 自己 하나 알고보면 하나님의 存在 有無에 대한 問題는 크게 논할 問題도 아니다. 그런고로 알어야 한다는 하나님에 對한 根據의 如何는 먼츰 被造体인 自己의 根據에 대한 實感性을 먼츰 알고 나아가면서 探究하면은 第一存在의 確實性은 自然的 意識存在로 계시는 것이다. 그것의 明白한 體驗을 實行하여 찾아보면은 其 自體를 알 수 있다.

 

 왜냐하면은 하나님은 絶對有에서 絶對無의 基本存在이므로 어느 面에서도 單位的 路線에서만 서서 存在를 찾으면 그 存在는 自然的으로 體感된다. 그 體感으로써 하나님의 存在에 對하여 確實한 根本問題를 解決할 수 있는 바이다. 왜냐하면 無限大에서 無限小에 通한 共通路線으로 흐르는 無限大에서 無限小의 힘을 보아 이 힘은 公式과 같은 原理를 通하여 連結되고 있으며 其 어떤 中間立場에서라도 自己만이 그 힘과 感應할 수 있는 聯体로 平衡線上에 서게 되면 無限大에서 無限小에 흐르는 그 感智를 통하여서만 알 수 있는바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無限大에서부터 無限小에까지 聯關하는 中心 動力体이다. 그러면서 永遠을 標準하고 始作하며 나아간다. 그런고로 사람은 其 中間存在다. 이 中心存在가 完成하여야만이 天宙的 基本原理는 圓滿化를 가져오게 된다. 卽 하나님은 無에서 有에로 作用하고 사람은 有에서 無에로 授受作用 圓滿化를 取하여만이 圓滿存在으로 되는 것이 天理이며 創造原理다.        

                                                                                         

      +(無限有實體世界)   +

                                                   

           사람

      ①                  ①

                            사람

      ⓞ                  ⓞ

 

                  하나님

     -  (無限無 無形世界)   -          

 

 이 表示圖를 보면 사람은 單位的 位置에 居한다. 사람을 通하여만이 宇宙와 天宙理想이 完成하게끔 지으셨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몸으로 지은 特有의 存在로 되어있다. 有(+) 無(-)라고 表示하면 사람은 (+)(-)의 中和体로 되었다. (-)는 靈으로 (+)는 肉體로서 合體되어 있다. 사람은 靈과 肉의 境界線을 定치 못한다. 그런고로 사람은 靈과 肉身이 合하여야만이 完全한 사람이다. 우리는 靈을 長成시켜서 靈人体를 完全 造成하면은 無의 世界까지 通할 수 있는 中間存在体다. 그런고로 本來 사람은 靈人体를 完成하여야 한다. 그러면 靈人体라면은 어떠한 構造로 되어 있는가 하면은 靈體, 生命體, 生靈體로 되어있다. 肉身에는 肉體와 肉心으로 되어 있는것과 마찬가지로 靈人体에는 生心을 中心하고 靈體를 附殖할 수 있는 基本 터를 이루며 長成하여서 生命體로 나아가 그 生命體가 되어만이 하날에 한 長成體를 가진 自體로서 生活할 수 있는 것이다. 其 生命體에다 生靈體를 이루어야 本創造理想인 靈人体로 된다.

 

 그런데 至今까지 墮落되니 人間들은 靈體의 根本되는 生心까지 保有하는 存在가 없다하리만큼 墮落되었다. 이 人間들에게 靈體를 構成시켜서 長成하여 生命體까지로 目的하고 歷史하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信, 信仰生活을 培養하는 目的으로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 오셔서 生靈體까지 完成코저 하였으나 不信하고보니 未完成하여 生命體級까지 全人間을 長成시켜야 할 責任使命 部境이다. 그 후 生靈體는 完成體인데 再臨時부터 始作코저 함이 目的으로 남아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墮落치 아니하였으면 肉身의 完成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 中心하고 生心은 그 本路程으로 靈人体 構成을 同一時에 聯合하여 完成에로 나아갈 人間들이 墮落으로 因하여 全人間에게(하날人도) 區分하여 長成시켜서 完成의 模樣으로 되었다. 第二次 예수는 長成 生命體까지 第三次 再臨하여서 完成體 生靈體를 注入시켜서 理想 靈人体를 造成하고자 함이 根本으로 되었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其 始作 할터를 닦도저 하니 舊約役事가 있고 新約은 그 터위에 長成하여 全世界에 터를 닦고 드 위에다 다시금 完成의 理想 生靈體를 땅과 함께 하날까지 聯殖시켜 理想天宙 完成 目的으로 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舊約時期부터 絶對 뜻을 中心하고 人間들이 侍奉하였으면 直接 뜻을 中心하고 터를 세우면서 理想 展開코저 함이었으나 不信으로 因하여 그 目的 未達成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要求와 其 救援要求가 남아지는 뜻으로 되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救援攝理는 사람을 찾아서 原理想 靈人体를 恢歸하여 本 創造理想을 成事코저 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絶對有의 存在이며 絶對無의 主人公이 卽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人間은 어느 方面으로든지 極을 찾어 가면은 갈수록 하나님에 對한 各要性을 切實하게 感覺되게 하는 것이 現天宙 萬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全部가 天宙의 公路를 正當하게 설수 있는 自我를 찾으면 全體에 對한 中心問題까지 解決을 가져오는 事實은 創造하신 萬相을 共同한 中心에 屬하여 있기에 어느 곳으로 通하든지 其 中心은 其 結局의 終點을 찾으면 同一한 其 根本原理를 通하여서 作用이 始作되어 있기에 自我 自身의 根本原理로 설 수 있는 基本을 찾으면은 全部의 中心인 하나님에 對한 問題는 自然的으로 알게된다. 또한 하나님이 根本存在 하심은 實感的으로 自覺할수 있게된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自己가 없다고 하면은 自己 自體로서 自己도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自己 自體에 對하여 有라하면 自然的 有하신 그 根本存在 有를 豫定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고로 自己가 有하면은 自己가 有하기 前에 父母의 有가 찾아지며 父母가 有하면은 先祖의 數 十, 數百代에 繼續하여서 至今 自我가 存在함을 알 수 있다. 이렇듯이 有에서만이 有가 시작된다. 無에서 無이지 有할 수 없는 것이 天理다. 現科學은 이 天理를 떠너서는 始作과 發展을 못한다. 그리고 自我 이후에는 有할 수 있는 後孫에 대한 有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至今 보이지 않는 後孫 無라고 말할 수 없다. 말할 수 있다면 其 自體는 原理의 合格體로 完成格의 存在 못됨을 말하는 것이다. 原理的으로 보면 其 後孫은 있게끔 有에서부터 모두 萬相이 지어지였기 때문에 後孫은 必要적 한 公理路程으로 有함을 알 것이다. 보지 못하였다고 其 있어야 할 其 存在들을 否定하면은 其 自體의 否定함에 根本原理的 解決을 주는 否定이 되는가? 그렇지 않음은 누구나 다 잘안다.

 

  그런데 無라고 否定한다면 그 存在는 天理根本을 反逆하는 行動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고로 天宙萬物은 全部가 原理的 有에서 始作함으로 有라고 하는 基本點에서만이 萬原理와 理致의 符合을 볼 수 있으나 無라고 하면은 其 根本을 有에서 展開키 難한 原理的 結論으로 된다. 그런고로 至今 自我라는 自體는 有無의 한 中心의 存在면서 그의 作用的 目的으로 有를 全的으로 相對物로 하기 위한 行動으로 生活하는 바는 잘 體得하는바의 事實이다.

 

 그러므로 나 自身이 有라는 原理的 存在라는 것은 根本的으로 是定하는 바이다. 無라고 하는 存在는 事實體 有의 世界에서는 自我로부터 表示로 되어 있다. 그 自我가 卽 有無의 根據點으로 하고야 有無라는 말을 할 수 있는바이다. 그런고로 나는 有에 屬하는 同時에 無에도 찾어가는 中間存在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中間存在로서 되어 있는 나에게 有無의 根本되는 하나님의 存在에 對하여 疑心하는 것과 동일하다. 그런고로 自己가 有無의 根本의 位置이니 卽 創造的 原理로 보아 하나님과 直接 同一點線에 有하난 存在임을 體得하여야 된다. 自我는 有無의 中和体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中心하고 계실 神性은 나와 中和性的 關係로써 有에서 無의 世界에 展開의 路程을 通하게 되어있다.

 

 우리가 萬一 無하다고 하는 곳에 處하여 있어서 認識한다면 나에게 有에 對한 認識은 勿論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認識할 수 있는 環境과 그 位置를 갖고 있다는 그것 스스로가 벌써 인식시켜주는 有에서부터만이 始作되는 바는 至今, 누구나 잘 알 것이다. 卽 至今 科學世界에 있어서 모든 原理와 公式을 利用하여 應用 有에로 展開케 하는 것도 즉 根本 有가 있는 原理가 存在함이 有하다는 原則위에서 만이 始作하여 目的達成으로 進級됨을 알 수 있다. 그런고로 科學이 發展할 수 있는바도 前 有的 그 原理的 保有가 基本되어 그 基本上에서만이 그 目的 表示的인 發達된 存在를 볼 수 있는 것은 事實이다. 그런고로 無에서 有라는 原理는 本來부터 우리가 세울 서 없다. 無라면 無이지 有가 되겠는가? 그러니 唯物論的 原理도 自然 그 末路는 未解決로 되는 것이 原理다. 無가 되는 까닭이다. 卽 始作이 無니 末도 無로 結果한다. 無하고하는 存在를 세우기 위하여는 前有 存在를 세워 놓고야인데 이 先有存在는 卽 主觀的으로 보면은 自己, 或 客觀的으로 보면은 他物이나가 벌써 先有한 事實을 決定지어 놓고 말하는 바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의 根本은 有에서 始作하였다는 바를 아러야 한다.

 

 그런고로 사람은 根本有라는 存在부터며 萬物의 有도 亦是 同一한 바이다. 어떤 作用의 始作은 有의 始作으로만이 始作된다. 認識할 수 있는 모든 關係的 感覺性도 存在하여 나에게 미치고 있다. 作用은 根本的 有의 作用이 延長化된 存在임을 알 수 있다. 無라는 占有位置는 視覺또는 感覺性 外의 存在를 두고 말하는 바이다. 그런고로 우리 自我인 有가 感覺하는 그 感覺的 作用은 卽 有에서부터 波及이 되는 바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視覺으로 볼수 있는 圈外의 有의 存在하는 그 自體와 卽, 하나님과 우리는 聯關的 한 位에 속하여 있는 良心의 旣存有의 存在로부터 우리에게 作用되는 感覺을 알 수있는바이다.

 

 그런고로 사람 한 나는 有無의 中和物로 되어 있다. 그런고로 우리가 즉, 無我라는 位置를 찾아 들어가면은 中和体에서 陰陽分도 같은 作用을 이르키는 것과 한가지로 無認識에로 나가면 相對的 絶對有에 比例되는 絶對有의 힘과 作用의 相逢을 본다하는 것도 아러야 한다. 사람이 無我에게 찾아들어 가면은( 즉 感覺無와 認識無에로) 相距的 無의 位置에 對比되는 有의 感覺과 認識의 境地는 타나난다. 이것은 修養探中에서도 많이 體驗하는 事實이다. 그런고로 사람은 고요하다는 그곳을 찾으면 本心의 作用舞臺를 딴 無境에로 存在하는 絶對有의 感覺을 體驗하여 새로운 神奇한 認識權을 찾는 것이 自然的으로 表示되는 듯이 되나 그 原理는 내 自身들의 理想覺性을 取할 수 있으며 그 滿足感을 取할 수 있는 根本理想이 有할 수 있는 根本에 屬하여 있는 存在이기 때문에 새로운 快感이 나와 기쁨의 表示로 展開시킨 것 밖에 지나지 않는 事實이다. 그런고로 이런 것을 볼 적에 우리는 有에서 處하여 있으니 有의 對한 感性이 各面에 感化되어 있는 것과 같은 理由로 되어 있기에 對 有에서부터 接하여 주는 減力에 대하여 振動感을 느낄 수 없고 또 外力 減力에 對하여 銳敏하게 使用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修養이니 祈禱니 하는 것이 미처주는 外力 減力에 대비하여 振動할 수 있는 對 減力의 存在의 位置를 取코저 하는바가 原理로 되어있다. 그러기에 無의 境, 고요한 곳을 要求한다. 그런고로 누구나 하나님이 有하다면은 無我의 境地에 찾아 들어가면 超自然 減力 絶對有의 境地가 있다는 것을 体證한다. 그것은 卽 하나님이 有하다는 것을 아는 同時에 그 根本 有의 作用과 合致한 點에 내가 서면은 내 自體에는 超自然 作用의 減力과 實感이 내 現自我와 連結됨을 알 수 있다.

 

 그런고로 佛敎의 無我境이라고 하여 찾는 一理도 여기에 있는 바이다. 例를들면 科學世界에도 公理나 公式같은 것도 間接的으로 그 自體를 接하게 하는 것과 같은 바로 되는 것을 알어야 한다. 그런고로 이와같이 된 것은 墮落性 받은 人間임으로 이것이 要求되게 되었다. 그러므로 良心과 生心의 基本은 하나님이니 하나님은 萬物의 絶對單位의 根本이면서 原理의 中心이며 根本이며 모든 萬相의 單位體 中心이니 이 中心點인 하나님과 直接 通하게 되면은 絶對單位力에서 支配받고 存在함으로 生心의 長成体인 靈體를 가지면 其 單位를 直接 所有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 單位야 絶對單位 하나님의 單位에 한 部分的 基本으로 있기 때문에 萬物의 모든 根本을 알 수 있는 곳으로 展開시킬 수 있는 存在가 즉 사람이다. 그런고로 道通이라고 하는 것이 이러한 根本사람의 創造本境을 體得할때에 느끼는 體驗이다. 이 創造本境을 體得하는 同時에 하나님이 하시고저 하시는 未來의 모든 事實도 알어야 할 사람이었는데 墮落으로 因하여 未知의 存在로 處하게 되었으나 그 根本 本性心은 墮落性을 받은 肉身을 넘어서 創造本境을 隋時로 體得하려함이 根本 要求로 되어있다. 사람이 이 目的을 可能하게 못된 墮落의 存在임으로 肉身의 活動의 減力이 停止狀態에 處하는 때를 타서 本性心은 無限大의 創造本境을 찾아 活動하려고 한다. 이 事實에의 表現이 사람에게 夢示로 나타나 未來의 事實을 豫告하는 것이 卽 夢示라 한다. 그러기에 本來, 사람은 自己들이 生함의 目的과 해야 할 目的과 살어야 할 目的을 알어야 할 것이었는데 未知에 處하여 있기에 本性心은 이 어느 部分을 夢示를 通하여 알게하여 주는 것이다. 墮落이 없었드라면 우리 人間은 根本的으로 알고 살수 있는 存在들이었다. 그 肉身減力이 활동할 때에는 例를 들면 흙물을 그릇에 담았는데 그것을 휘저어 놓을 때와 한가지 理由다. 그러기에 肉身活動의 減力이 寢中에는 흙물이 까라앉어 맑은 물이 위로 떠 오르는 것과 같이 우리의 本性心도 肉身減力을 넘어서 本性路程에 活動이 始作됨으로 夢示가 보여지는 것이다. 이와같이 우리 本心은 創造本境 世界를 通하고저 하는 것이 本 創造性品이다.

 

 그런고로 사람은 實體 有의 世界에서 無形의 世界로 連結을 가져야만이 되게 지음받았다. 그러기에 나를 有로하면은 有의 끝은 하나님이며 無의 끝도 하나님이다. 다시말하면 無의 끝은 有요, 有의 끝은 無이다. 그리하여 사람을 中心삼고 지음받은 天宙는 한 同路를 갖고 있다. 例를들면 우리 血管을 보면 動脈이 心臟에서부터 漸漸 작아져 細管까지 屬한다. 끝은 없어지는 程度를 向하여 世紛되어진다. 그러면 細管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끝은 딴 同路인 反對作用 路程으로 通하여 根本으로 돌아간다. 그리하여 한 作用体를 構成하여 한 回路를 造成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도 亦是, 이 表示와 같은 것이다. 血管이 작아진다고 하여서 無하여진다고 結論하는 것과 같은 行動의 사람들이 有無의 結論을 말하는 것과 同一하다. 그런고로 끝 部分 그 自體는 中和의 點이다. 血管도 毛細管에서 돌아오는 靜脈部分이 有하여서만이 圓滿하지 않는가. 그와 마찬가지로 動脈을 有라 하는 것과 靜脈을 無라하는 結論的 事實을 體得할 수 있다. 그런고로 有無는 하나의 有에서 始作한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有無의 根本体이다. 靈은 有에서 無에로 通할 수 있는 自體다. 그런고로 靈은 有라고 하는 感覺範圍 內 存在에 屬하지 않고 感覺 外 範圍에 屬하여 有의 權位까지 自由로 通할 수 있는 特有存在다. 이 性品이 卽, 하나님이 賦與하여 준 一體가 될 수 있는 特有性品이다. 卽 하나님의 性品이다.   그러니 우리 理想世界는 참 自由世界이다. 卽 距離支配를 받지 않는 世界며 空間의 支配도 받지 않으며 時間의 支配도 받지 않는 世界이다. 그저 生覺과 同時에 結果가 現立되는 自由理想世界다. 이 世界가 하나님을 中心한 世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