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리해설] 총서(2) : 행복을 찾아 나온 종교와 과학의 갈 길

2013. 1. 8. 11:06참사랑 영원까지/원리해설

인간의 타락은 무지에 떨어진 것
인간의 타락을 지적인 면으로 본다면 무지에 떨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악을 버리고 선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은 가지고 있지만 사실 ‘선과 악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역사를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선과 악의 개념은 시대와 장소와 주권자와 문화권마다 다르게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동일한 문화권에서도 수백년 전 마녀로 화형을 당한 사람이 세월이 지나면 성녀가 되기도 합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장소에 따라서 선과 악의 개념이 다른 것이 현실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반도의 현실에서도 같은 시대를 살아가면서 남쪽과 북쪽의 선의 개념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리고 대한민국 안에서도 각 종교를 가진 사람마다 부르짖는 선의 개념이 다름니다. 이는 진정한 선과 악의 개념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각자 자기가 가진 소신이 선의 기준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본심은 무엇이고 사심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하는 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이 악의 욕망을 물리치고 선의 욕망을 따라 본심이 지향하는 선의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이 무지를 완전히 극복하여 선악을 스스로 판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타락은 지적인 면에서 보면 무지에 떨어진 것을 말합니다.

종교와 과학은 양면의 무지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
그런데 타락한 인간의 무지를 대별한다면 두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마음과 몸의 내외양면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지적인 면에서도 내외 양면의 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무지에도 내적인 무지와 외적인 무지의 두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내적인 무지란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영적인 무지를 말합니다. 인간은 어디로부터 왔으며 , 생의 목적은 무엇이며, 사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내세와 하나님에 대한 존재 여부, 선과 악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 등에 대한 무지인 것입니다. 내적인 무지에 떨어진 모든 인간들은 본심의 요구에 따라 이 문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류역사 이래 수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깊은 고뇌를 하면서 근본적인 해답을 갈구해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외적인 무지란 인간의 육신을 비롯한 자연계에 대한 무지를 말합니다. 모든 물질세계의 근본은 무엇이며, 그 모든 현상은 각각 어떠한 법칙에 의해 일어나는가 하는 것 등에 대한 무지인 것입니다.

인간은 유사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고 무지에서 지에로 극복하기 위해 진리를 찾아 나왔습니다. 그 결과 내적인 무지이서 내적인 지에로 극복하기 위해 내적인 진리를 찾아 나온 것이 종교(宗敎)요, 외적인 무지에서 외적인 지에로 극복하기 위해 외적인 진리를 찾아 나온 것이 과학(科學)입니다. 그러므로 종교와 과학은 인생의 양면의 무지에서 양면의 지에로 극복하기 위해 양면의 진리를 찾아 나온 방편인 것입니다.

따라서 종교와 과학은 내외양면의 행복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무지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가지고 본심의 욕망이 지향하는 선한 방향으로만 나아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종교와 과학이 통일된 하나의 과제로서 해결되어 내외 양면의 진리가 상통하게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종교와 과학은 서로 배타적인 관계가 결코 아닙니다. 서로 부정해야할 상대가 아닙니다. 마음과 몸과의 조화로운 관계가 이루어져야 이상적인 인간이 되는 것처럼 이상세계는 종교와 과학이 최고도로 발달한 가운데 조화롭게 상통하는 세계를 말합니다.

최고도의 종교적 진리를 가지고 있지만 과학적 진리가 미개하다면 결코 이상적인 환경을 이룰 수가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최고의 과학적 진리를 중심하고 안락한 사회환경을 이루었다고 하여도 최고도의 종교적 진리를 갖지 못하고 생활한다면 진정으로 행복한 생활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과학적 환경을 갖춘 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지옥의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십시오. 잘살아 보세! 우리도 한 번 잘살아보세! 새마을 노래를 부르면서 잘사는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세계 자살률 1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수십억의 재산을 가진 노인들 중에는 극도의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강다리 위해서는 매일 같이 투신자살하는 사람이 생깁니다. 서울경찰청 한강경찰대에 따르면 올 들어 매일 1.3명꼴로 한강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살을 방지하고 자살하려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경찰대를 따로 운영해야할 형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쪽의 무지를 극복한다고 해서 진정한 이상세계를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이 걸어온 두가지의 길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밟아온 두 가지 길
첫째는 물질로 된 결과세계에서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길을 지상으로 생각하고 걸어왔습니다. 그 결과 과학의 만능과 물질적인 행복을 이루면서 자랑해 왔습니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이 아무리 안락한 사회환경을 이루고 그 속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린다고 해도 속사람의 정신적인 욕구까지 충족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도리어 육신의 낙을 즐기기 위해 안락한 주거환경을 모두 갖춘 속세인의 기쁨은 청빈을 즐기는 도인의 기쁨에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석가모니께서는 왕궁의 영화를 버리고 마음의 보금자리를 찾아 정처 없는 구도의 길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 뒤를 이어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안락한 생활환경을 버리고 수도의 길로 떠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마음과 몸이 있기 때문에 마음의 기쁨이 있음으로 비로소 몸에 기쁨도 온전한 기쁨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과학이 갈 길은 종교적인 세계로 차원을 높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밟아온 과정의 둘째는 결과적인 현상세계를 초월하여 원인적인 본질세계에서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길을 밟아온 이제까지의 철학이나 종교가 많은 공헌을 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 반면에 인류에게 너무나 많은 짐을 지워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냉철하게 생각해볼 때 어떤 철인이나 성현도 인생과 우주의 근본문제를 뚜렷이 해결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제시한 주의나 사상이란 것이 도리어 우리가 해결하고 가야할 수많은 과제들을 제기해 놓은 데 지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랜 역사를 가진 기성종교들은 새 시대를 향해 가려는 개혁종교인들에게 이단의 굴레를 씌워 핍박하고 반대함으로 섭리역사의 발전을 가로막는 범죄를 저질렀고 많은 철학 사상들이 이념이라는 이름으로 처참한 살육행위가 저질러졌습니다. 인류역사를 죄악사라고 할 때에 종교와 철학도 죄악역사의 한 부분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적진리를 찾아 나온 종교인들이나 도인들이 사명을 다 했다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종교인이 사명을 하지 못하는 이유
그렇다면 종교인이 사명을 다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본질세계와 현상세계와의 관계는 사람으로 비유하면 마음과 몸과의 관계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마음과 몸이 완전히 합해야만 완전한 인격을 이루는 것과 같이 본질과 현상의 두 세계도 완전히 합치되어야만 이상세계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육신의 행복이 없이 진정한 심령의 기쁨이 있을 수 없고 진정한 심령의 기쁨이 없이 진정한 육신의 행복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종교는 내세의 행복을 찾기 위해 현실세계를 부정하기에 몸부림쳐 왔습니다. 더 나아가 심령적인 기쁨을 위하여 육신의 행복을 멸시하기에 필사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육신의 행복욕은 집요하게 도인들을 붙들어 파멸의 골짜기로 내몰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 종교인들은 진정한 심령의 기쁨을 얻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언제나 육신의 행복욕과의 전쟁터에 서 있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주요한 원인은 구태의연한 종교의 교리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과학의 발달에 따라 인간의 지성이 최고도로 계발되었습니다. 그 결과 현대인들은 모든 사물에 대하여 과학적인 인식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교리는 과학적인 해명이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음으로 과학이 발달됨에 따라 서로 상충되어 왔습니다.

예를들면 니콜라이 코페르니쿠스(1473~1543)는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가 우주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하면서 하나님은 태초에 지구를 창조했고 지구가 우주공간의 중심이라는 종래의 개념을 일시에 무너뜨려 인간을 비과학적 종교 도그마로부터 과학세계로 넘어갈 수 있게 했던 인물입니다.

코페르니쿠스가 살던 16세기는 종교재판의 무서운 칼날이 온 유럽의 머리 위에 드리워져 있던 때였습니다.그 당시에는 지구가 평면이며 태양과 달과 별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떠돌고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종교재판에 부쳐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사상인 지동설을 주장하기는 했지만 당시 교단의 분위기에 눌려 공개적인 과학강의는 하지 못하다가 자신의 지동설 저서를 그가 사망할 당시에야 자비를 들여 책을 출발하였습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가르친 이탈리아 천문학자 지오르다노 브루노는 종교재판을 받아 서기 1600년에 화형에 처해졌고 갈릴레이 갈릴레오는 같은 재판을 받았으나 지동설을 믿지 않겠다고 거짓 선언한 후 일생을 가택연금 신세로 살았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이 때 벌어진 지동설문제에 대해 수백년동안 침묵해왔습니다.그러다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종교재판에서 파문된 갈릴레오를 1992년 복권시켜 겨우 이 문제를 풀기 시작했습니다.조국방문 길에 올랐던 교황이 지난 7일 코페르니쿠스의 고향 토루노를 방문해 “지동설은 뛰어난 업적”임을 공식 인정함으로써 코페르니쿠스 사후 456년 만에야 지동설문제가 해소되었습니다.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먼저 마음으로 믿고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달성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앎이 없이는 생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경서를 연구하는 것도 결국은 진리를 알아서 믿음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안다는 것은 곧 인식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인간은 논리적인 것 즉 과학적인 것이 아니면 그것을 알아가지고 믿는 데까지 이를 수 없게 되어 종교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적인 진리에도 논증적 해명이 필요함으로 종교는 오랜 역사의 기간을 통해 과학적으로 해명될 수 있는 시대를 추구해 나왔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종교와 과학은 인생의 양면의 무지를 타개하기 위한 사명을 각각 분담하여 나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과정에 있어서는 그것들이 상충하여 서로 타협할 수 없을 것 같은 양상을 보여 왔지만 결국은 하나로 조화롭게 통일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그 양면의 무지를 완전히 극복하여 본심이 요구하는 선의 목적을 완전히 이루자면 과학을 찾아 나온 종교와 종교를 찾아 나온 과학을 통일된 하나의 과제로 해결해 주는 새로운 진리가 필요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