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목

2014. 6. 13. 19:15삶이 깃든 이야기/문화유산

 

 

 

 

 

허목(許穆, 1595~1682)은 송시열과 예학(禮學)에 대해 논쟁한 남인의 핵심이자 남인이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분립되었을 때는 청남의 영수로서, 조선후기 정계와 사상계를 이끌어간 인물이다. 학문적으로도 독특한 개성을 보인 인물이었다. 주자성리학을 중시하던 17세기 당시의 시대 분위기와 달리, 원시유학(原始儒學)인 육경학(六經學)에 관심을 두면서 고학(古學)의 경지를 개척하였다. 도가적(道家的)인 성향도 깊이 드러냈으며, 불교에도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다. 조선후기 강성 정치인의 면모를 뚜렷이 갖추었으면서도 개성 있는 학문세계를 추구한 허목의 학문과 정치활동 속으로 들어가 본다.

 

북인과 남인의 기반 위에서 형성된 학문

 

조선 중기의 대표적 학자이자 남인의 영수인 허목의 초상. 그의 사후에 그려진 것으로, 이명기가 모사한 것이라 한다.

정 오른쪽에 채제공이 쓴 표제가 붙어 있다. 국립춘천박물관 소장. 보물 제 1509호.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허목은 1595년(선조 28) 한양 동부 창선방에서 현감 허교(許喬, 1567~1632)의 삼 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양천(陽川). 태어날 때 손바닥에 ‘문(文)’자가 새겨져 있어서 자를 문보(文甫)라 하였고, 눈을 덮을 정도로 눈썹이 길어서 호를 미수(眉叟)라 하였다.

허목 학문의 연원에는 16세기 개성(開城)을 무대로 특색 있는 학문 성향을 선보인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이 있었다. 허목의 부친 허교(許喬)의 묘비문에는 “공은 어려서 수암(守庵) 박지화 선생에게 수업하였는데, 수암 선생은 화담 서경덕 선생의 제자이다.”라고 기록하여 허교의 학문에 서경덕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서경덕의 학문은 성리학 이외에 다양한 학문과 사상을 절충하는 개방성과 포용성을 지닌 것이 특징인데, 이러한 성향은 허교에 이어 허목에게까지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허목의 학문 형성에는 경상우도라는 지역적 기반도 영향이 컸다. 허목은 젊은 시절 부친의 임지를 따라 창녕ㆍ의령 등 조식(曺植, 1501~1572)과 정인홍(鄭仁弘, 1535~1625)의 학문적 영향력이 남아 있는 경상우도 지역에 머무르면서, 남명학파(南冥學派)의 학문을 수용하였다. 그는 1610년(광해군 2)에서 1623년(인조 1)까지 13년을 경상우도에서 살았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다시 이곳으로 내려와 1645년까지 10년의 세월을 보냈다. 허목의 학문적 기반에 북인(北人)의 모집단을 이루는 화담학파와 남명학파의 사상적 영향력이 있었음은 주목할 만하다.

허목은 도가사상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73세에 저술한 [청사열전(淸士列傳)]이 대표적이다. 여기에는 김시습(金時習), 정희량(鄭希良), 정렴(鄭磏), 정작(鄭碏) 등 도가와 관련된 인물들이 실려 있다. 또한 허목이 삼척부사로 재임할 때, 해일 피해를 막기 위해 세운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에는 도가의 주술적인 비유들이 있어서 그의 도가적인 취향을 잘 반영해 준다. 이외에 허목의 학문에 영향을 준 인물은 이원익(李元翼, 1547~1634)과 정구(鄭逑, 1543~1620)였다. 허목은 1613년(광해군 5) 이원익의 손서(孫壻: 손녀사위)가 되었다. 이원익과 부친인 허교가 평소 절친했기 때문이었다. 이원익은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6번이나 영의정을 역임한 만큼 뛰어난 실무관료였는데, 허목은 이원익의 관료적 성향도 이어받은 것으로 이해된다. 이원익은 “뒷날 내 자리에 앉을 자는 반드시 이 사람이다1)”라고 하며 허목에게 특별한 기대를 보였다.

허목은 1617년(광해군 9) 거창으로 갔다가 성주에 들러 정구에게 학문을 배웠다. 정구는 영남학파의 영수인 조식과 이황의 학풍을 함께 계승한 학자로서, 성리설이나 예학뿐만 아니라 제자백가ㆍ역사ㆍ의약ㆍ복서ㆍ풍수지리 등에 두루 능통한 면모를 보였다. 정구의 박학풍(博學風)은 허목에게도 계승되어 허목 스스로도 ‘박학불무택(博學不務擇: 여러 학문을 하여 선택에 힘쓰지 않음)’이라 하여 박학을 인정하였다.

허목의 학문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원시유학인 ‘고학(古學)’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허목은 [기언(記言)]의 서문 첫머리에서 “목(穆)은 독실하게 고서(古書)를 좋아하여, 늙어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穆篤好古書 老而不怠)2)”라 하여 고서에 대한 관심을 비췄다. 고서는 원시유학인 육경(六經), 즉 ‘시경ㆍ서경ㆍ역경ㆍ춘추ㆍ예경ㆍ악경’을 말하는데, 허목은 중국의 하(夏)ㆍ은(殷)ㆍ주(周)가 융성했던 것은 육경의 다스림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허목은 육경 가운데에서도 특히 [춘추(春秋)]를 중시했는데, [춘추]의 ‘존군비신(尊君卑臣)’의 이념을 강조하였다. 군주를 정점으로 위계질서를 확립하고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그의 입장은, 예송논쟁(禮訟論爭)에서 남인들의 이론적인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허목은 당색으로는 남인에 속하며, 지역적으로는 서울ㆍ경기 지역을 무대로 활동했기 때문에 근기남인(近畿南人) 학자라 칭한다. 근기남인의 학통에 대해서는 대체로 이황 → 정구 → 허목 → 이익(李瀷)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일반화 되어있는데, 최근에는 정구의 학문 형성에는 이황과 함께 조식이 큰 영향을 주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조식 → 정구 → 허목으로 계보가 연결되면 허목의 학문 형성에는 북인적인 기반도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럼 점을 고려하면 허목의 학문은 북인과 남인의 학문을 고루 수용한 기반 위에서 형성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정치적 패배,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로 달래다

 

허목이 삼척부사를 지내는 동안 만들었다는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그가 이 비를 새긴 후로는 바닷물이 잠잠해지고 강이 범람하거나 파도가 넘치는 일도 잦아들었다고 한다. 원래 정라항의 만리도에 있던 것을 풍랑으로 비석이 파손되어 바다에 잠기자 숙종 때에 이곳으로 옮겼다. 강원 삼척시 정상동 소재.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 38호.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1645년 근거지인 경기도 연천의 산림(山林)에 묻혀 학문에 열중하던 허목이 정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효종대부터였다. 1657년(효종 8) 효종은 산림을 정치에 참여시켜 시국을 타개하려고 하였다. 63세의 허목은 유일(遺逸: 초야에 은거하는 명망 높은 선비를 천거하는 인재 등용책)로 천거를 받아 지평에 임명되었고, 1659년(현종 즉위)부터 시작된 예송논쟁을 계기로 정치권에서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다.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의 상복(喪服) 문제가 발단이 된 1659년의 기해예송(己亥禮訟)에서, 허목은 조대비의 3년복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년복을 주장하는 송시열, 송준길 등 서인들에 맞서 허목이 3년복을 주장한 것은 차남이라는 효종의 가족적인 지위 보다는 왕이라는 지위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효종의 왕통(王統)을 인정하면, 효종의 장례에 조대비가 3년복을 입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였다. 허목의 논리는 철저히 존군(尊君) 의식에 바탕하고 있었으며, 왕의 예법은 사대부나 서민의 예법과는 다르다는 ‘왕자례(王者禮) 사서부동(士庶不同)’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현종이 조대비의 상복을 1년복으로 결정하면서 기해예송은 서인들의 승리로 끝났다.

기해예송 후 남인들은 정치적 숙청을 당했고, 허목 역시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 비록 좌천되었지만 허목은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지방관으로서 삼척 주민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 삼척의 향교(鄕校)와 향약(鄕約) 제도를 정비하고 마을에서 공통적으로 지내는 제사인 이사제(理社制)를 실시하였다. 삼척의 연혁과 지리 정보를 정리한 [척주지(陟州誌)]를 편찬하기도 했다. 조류(潮流)가 심하고, 비가 많이 올 때는 오십천이 바다로 흘러가지 못하고 범람하는 삼척의 해수 피해를 막아보기 위한 노력도 기울였다. 그 결실이 바로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였다. 허목은 222자로 이루어진 동해송(東海訟)이라는 글을 짓고 직접 개발한 전서체를 비석에 새겨 넣었다. 강원도 삼척항이 잘 바라다보이는 육향산 정상에 화강석 기단 위에 새겨진 높이 170.5센티미터, 너비 76센티미터, 두께 23센티미터의 비석과 비석 앞면에 새겨진 전서체(篆書體)의 글씨는 현재에도 많은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비석은 조류를 물리쳤다고 해서 퇴조비(退潮碑)라고도 불린다.

허목이 척주동해비를 새긴 후로는 바닷물이 잠잠해지고 강이 범람하거나 파도가 넘치는 일도 잦아들었다고 한다. 동해송의 내용은 허목의 문집인 [기언]에 “척주(陟州)는 옛날 실직씨(悉直氏)의 땅으로 예허(獩墟: 예의 옛 땅)의 남쪽에 있어 서울과의 거리가 7백 리쯤 되는데 동으로 큰 바다에 임하고 있다. 다음과 같이 송(頌)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해송’은 동해 바다에 대한 찬양의 뜻을 전하고, 바다와 인간이 공존하는 세상을 희구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 동해송을 새긴 척주동해비는 원래 정라항의 만리도에 있었는데 풍랑으로 비석이 파손되어 바다에 잠기자, 1708년(숙종 34)에 다시 새겼다. 1709년에는 육향산 동쪽으로 옮겼다가, 1710년(숙종 36) 다시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척주동해비의 비문은 그 신묘한 능력과 기이한 글씨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탁본을 해서 나쁜 기운을 물리쳤다고 할 정도로 효험을 보였다. 중앙정계에서 상당한 명망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허목은 예송논쟁이라는 당쟁으로 말미암아 삼척으로 좌천되었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이 시기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았을 뿐 아니라, 삼척의 지방민들에게 깊은 애정을 갖고 자신이 배운 학문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주술적인 성격도 상당 부분 반영되어 있지만, 척주동해비에는 허목의 위민(爲民) 사상과 더불어 전서체라는 독특한 서체를 계발한 그의 예인적(藝人的)인 자질이 잘 구현되어 있다.

 

정치적 재기, 청남(淸南)의 영수가 되다

삼척부사로 재임하던 시절 지방민을 위해 헌신한 허목은 1662년 다시 경기도 연천으로 돌아왔다. 1674년(현종 15)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가 승하하면서, 조대비의 복제 문제가 다시 한번 정치 현안으로 떠오르자 허목은 정치의 전면에 나섰다. 2차 예송인 갑인예송(甲寅禮訟)이 전개되었고 허목은 또 다시 남인의 이론가로 활약했다. 집권 세력인 서인은 9개월복을, 남인은 1년복을 주장하면서 ‘신권 강화’와 ‘왕권 강화’라는 서로 대립되는 정파의 입장을 관철시키려고 하였다. 이제 어느 정도 왕권을 장악한 현종은 “임금에게 박하고 누구에게 후하게 하는가?”라고 서인들을 견제하였다. 갑인예송이 제기되던 당시 현종이 승하하고 숙종이 왕위에 올랐는데, 숙종 또한 송시열의 예론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면서 남인의 승리는 예견되어 있었다. 1674년 갑인예송의 승리로, 숙종 초반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대거 등용되었다. 이때 남인의 영수는 허적(許積, 1610~1680)이었으며, 허적은 허목과 윤휴를 후원하여 남인의 입지를 강화하였다. 허목은 대사헌, 이조판서에 이어 우의정에 임명되는 등 승승장구하였다.

허목은 허적의 천거를 받았지만, 선명한 정치 노선을 견지하지 못한 허적과 곧 대립하게 되었다. 1675년(숙종 1) 남인은 서인에 대한 처벌 문제를 둘러싸고 강경파인 청남(淸南)과 온건파인 탁남(濁南)으로 분열하였다.3) 기존에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허적ㆍ권대운 등을 따르는 탁남과 허목과 윤휴를 따르는 청남으로 갈린 것이다. 허목은 문인 이수경으로 하여금 허적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으나, 숙종은 국정 경험이 있는 허적을 보다 신뢰하였다. 탁남과 청남의 대립이 격화되던 중인 1679년(숙종 5) 허목은 숙종에게 직접 허적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허적이 위엄과 권세가 드세지자 척신(戚臣)과 결탁하여 형세를 만들고 환관과 측근들을 밀객(密客)으로 삼아서 임금의 동정을 엿보아 영합을 하고 있다.”는 것이 탄핵의 주된 이유였다. 그러나 숙종은 허적이 3대에 걸쳐 조정에 재상으로 있으면서 역할을 했다는 점을 들어 허적을 비호하였다. 자신의 요구가 좌절되자 허목은 사직을 하고 다시 연천으로 돌아왔다. 숙종은 허목에게 연천에 있는 7칸의 집을 하사하여 원로대신에 대한 예우를 다했다. 허목은 숙종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이 집을 은거당(恩居堂)이라 하고, 은거당 뒤쪽의 바위를 일월석(日月石), 용문석호(龍門石戶)라 이름하고 그의 글씨를 새겨 두었다.

허목이 낙향의 즐거움을 누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중앙 정계는 또 다시 정치적으로 요동쳤다. 1680년(숙종 6) 서인들의 정치적인 반격인 경신환국(庚申換局)이 일어난 것이다. 허적의 권력 남용과 허적의 아들 허견의 역모 혐의가 발단이 된 경신환국으로 권력은 다시 서인이 잡았다. 환국의 여파로 허적과 윤휴 등 남인의 핵심 인사들이 사사(賜死)되었고, 허목이 이끌었던 청남도 정치적으로 크게 위축되었다. 중앙 정계에서 남인이 실세(失勢)한 아픔을 달래면서 허목은 연천의 은거당에서 조용히 말년을 보냈고, 1682년 88세를 일기로 임종을 맞았다. 그의 묘소는 은거당 뒤쪽 100여 보 떨어진 곳에 조성되었다.

육경학(六經學)을 학문의 근거로 삼는 허목의 원시유학(原始儒學)적 고학풍(古學風)은 이후 이익이나 정약용과 같은 남인 실학자들의 학문 형성에도 깊은 영향을 주면서, 근기남인 실학이 시대의 흐름으로 자리를 잡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늦은 나이에 정계에 등장했지만 흰 수염을 휘날리며 자신의 소신과 원칙을 지킨 학자 허목. 허목을 떠올리며 연천을 찾아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참고문헌>
정옥자, <미수 허목 – 육경학에서 실학의 근거를 제시한 도덕주의자>,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선비], 현암사, 2002; 이종묵, <징파강의 여윈 선비 허목>, [조선의 문화공간 3], 휴머니스트, 2006; 신병주, <17세기 중, 후반 근기남인 학자의 학풍> [조선중, 후기 지성사 연구], 새문사, 2007.

 
글: 신병주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와 동 대학원 졸업.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역사의 대중화에 깊은 관심을 가져 KBS <역사추리>, <역사스페셜>, <한국사 傳> 등의 자문을 맡았고, 쓴 책으로는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 [조선 왕실 기록문화의 꽃 의궤] , [조선 중, 후기 지성사 연구] ,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 [이지함 평전] ,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이 있다. 최근에는 조선 시대 사학회 연구이사, 남명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 외교통상부 외규장각도서 자문포럼 위원으로 활동하며 조선 시대의 왕실 문화와 기록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관련글 보기> 미수기언 http://blog.daum.net/ybm0913/2025

 

 

 

 

 

 

 

 

 

 

 

 

 

 

 

 

 

민통선 내에 위치하는데 묘역은 안월천을 건너는 강서5교를 지나 북쪽으로 300m 정도 직진하면 좌측 능선의 해발 100m에 위치한다. 선조인 許磁의 묘와 약 100m의 거리를 두고 있다. 미수 허목묘는 東南向한 나지막한 구릉상에 6기의 묘 가운데 제일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바로 위는 貞敬夫人 全州李氏의 묘가 있다. 봉분은 원형으로 규모는 직경 670cm·높이 170 cm이며, 석물로는 봉분 전면에 묘비·상석·향로석·장명등이 있고 양쪽에 문인석과 망주석이 1기씩 있으며 제수석이 마련되어 있는데 백색 대리석재질의 묘비의 비신을 제외하고는 모든 석물이 각섬석운모편암으로 되어있다.

상석의 규모는 너비 160cm·90cm·두께 높이 30cm이고 향로석은 높이 34cm·너비 29cm·두께 26cm, 장명등은 높이 160cm이다. 문인석의 높이는 좌측 180cm·우측 170cm이며, 망주석은 좌우측 모두 200cm인데 모든 석물에 탄흔이 있다.

 

묘비는 전·후 양면에 비문이 있으며, 전면에 종1열로 右議政文正公眉許先生之墓의 비문이 있으나 일부 글자는 파손되어 있는 상태이다. 비문은 후면에 許眉自銘으로 보아 생전에 自銘自撰한 것으로 보인다.

규모는 비신 높이 117cm·상단너비 51.5cm·하단너비 46.5cm·두께 21cm이다.

허목(1595~1682)은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陽川이다. 자는 文甫·和甫이고, 호는 ·臺嶺老人이다.

좌찬성 의 증손이며, 현감 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정랑 林悌의 딸이며, 부인은 영의정 李元翼孫女이다.

1615(광해군 7) 정언옹에게서 글을 배우고, 1617년 부친이 거창현감에 임명되자 부친을 따라가서 文緯를 사사하였으며, 그의 소개로 鄭逑를 찾아가 스승으로 섬겼다.

 

1624(인조 2) 廣州牛川에 살면서 紫峯山에 들어가 독서와 글씨에 전념하여 그의 독특한 篆書를 완성하였다. 관직에는 뜻이 없었던 듯 여러 번 관직에 나갈 기회가 있었으나 부임하지 않거나 곧 사임하였다.

1674(현종 15)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의 집권시 이조판서를 거쳐 右議政에 승진되어 과거를 거치지 않고 遺逸로서 三公에 올랐다.

1678년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인 연천으로 돌아왔으며, 나라에서 집을 지어주자 恩居堂이라 명명하였다.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다시 집권하자 관작을 삭탈당하고 고향에서 저술과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그는 그림·글씨·문장에 모두 능하였으며, 글씨는 특히 篆書에 뛰어나 동방 제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저서로는 東事·邦國王朝禮·經設·經禮類算· 記言이 있다.

1691년 그의 神位를 봉안하는 사액서원으로 嵋江書院이 마전군에 세워졌으며 나주의 眉川書院, 창원의 檜原書院에도 제향되었다.

88세로 돌아가니 시호는 文正이다.

 

京畿道,京畿人物誌, 1991

漣川文化院, 鄕土史料集, 1995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연천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2000

 

<묘비 앞면> 右議政文正公眉叟許先生之墓(우의정문정공미수허선생지묘)

 

묘비 뒷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허미수자명(許眉叟自銘)

늙은이는 허목(許穆)으로 자가 문보(文父)라는 사람이다. 본래는 공암(孔巖) 사람인데 한양(漢陽)의 동쪽 성곽 밑에서 살았다. 늙은이는 눈썹이 길어 눈을 덮으므로 스스로 호를 미수(眉叟)라 하고, 나면서부터 손에 ()’ 자 무늬가 있으므로 또한 스스로 자를 문보라고 했다. 늙은이는 평소에 고문(古文)을 독실하게 좋아하여 일찍이 자봉(紫峯) 산중에 들어가 고문으로 된 공자의 글을 읽었다. 늦게야 문장이 이루어졌는데, 그 글이 대단히 방사(放肆)하면서도 방탕하지는 않았다. 혼자 지내며 내키는 대로 즐기되 마음으로 옛사람들의 남긴 교훈을 추구하기 좋아하였고, 평소에 스스로를 지킴에는 몸에 허물이 적게 하려 하였지만 잘되지 않았다. 스스로 명()하기를,말은 행동을 덮지 못하고 / 言不掩其行 행동은 말을 실천하지 못하며 / 行不踐其言 한갓 요란하게 성현의 글을 읽기만 좋아했지 / 徒嘐嘐然說讀聖賢 하나도 과오를 보완해 가지 못했기에 / 無一補其諐 돌에다 새겨 뒷사람들이 경계 삼도록 하노라 / 書諸石以戒後之人

<!--[if !supportEmptyParas]--> <!--[endif]-->

자명비음기(自銘碑陰記)

공암(孔巖)의 허씨(許氏)는 본래 가락국(駕洛國) 수로왕(首露王)의 자손이다. 외사(外史 야사(野史))임금이 나라를 통치해 온 지 158년인 신라 말엽에 허선문(許宣文)이란 분이 있었는데, 나이 90여 세에 고려 태조(太祖)를 섬기면서 견훤(甄萱)을 칠 때 특히 군량을 조달한 공이 많았기 때문에 공암의 촌주(村主)가 되었으며, 자손이 그대로 공암의 씨족이 되었다.’고 했다.

촌주가 된 이후에, 상의국 봉어(尙衣局奉御) (), 내사사인(內史舍人) (), 예부 시랑(禮部侍郞) (), 치사(致仕)한 태위(太尉) (), 공부 상서(工部尙書) (), 직사관(直史館) 이섭(利涉), 예빈성 소경(禮賓省少卿) (), 예부 상서(禮部尙書) (), 첨의중찬(僉議中贊) (), 판조 좌랑(版曹佐郞) (), 도첨의 찬성(都僉議贊成) (), 지신사(知申事) (), 전리사 판서(典理司判書) (),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 양양 도호부사(襄陽都護府使) (), 합천 군수(陜川郡守) (), 의영고 영(義盈庫令) (), 좌찬성(左贊成) (), 전함사 별제(典艦司別提) (橿), 포천 현감(抱川縣監) ()가 있었다.

()까지 23대가 되는데, 효종(孝宗) 8년에 63세로 소명(召命)을 받아 지평(持平)에 제배되고 이듬해에 장령(掌令)으로 전임했으며, 현종(顯宗)이 즉위하여서는 예 논쟁 때문에 실직 부사(悉直府使)로 좌천되었는데, 실직은 옛 동해 변 궁벽한 곳으로서 옛적 예맥(穢貊)의 땅이었다. 2년 뒤에는 또 염사(廉使 지방 장관인 안렴의 약칭)에게 쫓기었고, 12년 만인 금상(今上) 원년에 이르러 다시 부름을 받아 대사헌이 되었다가, 한 해 동안에 다섯 번이나 전임하여 삼공(三公)이 되었는데 나이 81세였다. 4년째 되던 해에 사직하고 떠났다가, 3년째 되던 해에 죄를 얻었고 따라서 방출(放黜)되어 다시는 부르지 않았으니, 이때 나이 86세였는데, 지난날에 용사(用事)하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다시 들어오게 되었다.

이제는 내가 늙었기에 자서(自序)를 짓는다. 또한 태공 망(太公望), 관이오(管夷吾), 연주래(延州來)의 계자(季子), 거백옥(蘧伯玉), 백리해(百里亥)와 중니(中尼) 및 그 제자 안자(顔子)증자(曾子) 및 자사자(子思子) 같은 성현들의 출처(出處 세상에 나오는 것과 집에 있는 것)와 사수(辭受 벼슬을 사양하거나 받는 일)에 관한 일을 추구(追究)하여 기술한 것이 무릇 13편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소치 허련(許鍊; 1,809 - 1,892)이 그린 옛 은거당 옛집 십청원도

 

忠孝堂

아름다운 미수 허목의 미수체 글씨

청암수석(靑巖水石)

東溪亭


'삶이 깃든 이야기 > 문화유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금 아닌 임금, 덕종  (0) 2015.04.10
여왕이여! 망하리라!  (0) 2015.04.05
국사와 세계사 연표  (0) 2013.05.21
역대 왕실 연대표  (0) 2013.05.21
유교의 역사와 사상  (0) 2013.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