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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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노을
저녁을 먹고 운동하러 공원에 나왔다. ‘비 내리는 경성다방’ 음악을 튼 핸드폰을 자전거 핸들가방에 꽂아 넣고, 운동기구에 앉아 천천히 팔운동을 하다 무심코 바라본 서쪽 하늘.그 순간 나는 운동을 멈췄다.눈앞에 펼쳐진 하늘은 조금 전까지 내가 알고 있던 평범한 저녁 하늘이 아니었다. 구름 사이로 마지막 햇빛이 스며들며 온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검푸른 구름 아래에는 붉은빛이 마치 불꽃처럼 번지고 있었고, 그 위로는 노을빛을 머금은 구름이 층층이 겹쳐 있었다.‘참 곱다.’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음악에서는 오래된 다방에서 흘러나올 것 같은 애잔한 선율이 들려왔다. 그런데 그 음악과 눈앞의 풍경이 어쩌면 그렇게 잘 어울리는지, 나는 팔운동을 하던 것도 잊은 채 한동안 하늘만 바라보았다..
2026.08.23 -
별똥별을 기다리던 밤, 당포성
13일 밤 11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아내와 나는 별똥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13일 밤부터 14일 새벽까지 유성이 많이 나타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평소에도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에게는 그냥 지나치기 아까운 밤이었다.“지금 당포성에 가볼까?”아내와 나는 그렇게 집을 나섰다.목적지는 가까운 당포성.별똥별을 보기 위해 밤늦게 찾아가는 당포성은 평소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입구에 가까워질수록 자동차가 하나둘 늘어나더니, 이내 도로가 붐비기 시작했다. 교통경찰까지 나와 차량을 정리하고 있을 정도였다.‘별똥별이 뭐라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을까.’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우리 역시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당포성 잔디밭에 들어서니 더욱 놀라웠다.사람들은 저마다 ..
2026.08.14 -
유튜브에서 다시 만난 <소나기>
집에 머물던 날이었다. 특별히 할 일도 없이 휴대전화를 들고 유튜브를 이리저리 넘기고 있었다. 세상은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영상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대부분은 잠깐 눈길만 줄 뿐 금세 지나쳐 버리게 된다. 그런데 그날은 낯익은 제목 하나가 내 손가락을 멈추게 했다.황순원의 「소나기」.순간 반가움이 먼저 밀려왔다. 중학교 교과서에서 읽었던 작품. 시험을 위해 줄거리를 외우던 소설이 아니라, 읽고 난 뒤 이상하게도 가슴 한쪽이 먹먹했던 이야기였다. 오래전 잊고 지냈던 친구를 우연히 길에서 만난 것처럼 반가운 마음에 영상을 틀었다.영상이 시작되자 시골의 맑은 하늘과 개울, 징검다리, 풀잎 사이를 스치는 바람이 화면을 채웠다. 화려한 영상도 아니고 빠른 전개도 아니었다. 요즘 영상들과는 달리 천천히 흘러가는 풍..
2026.08.06 -
금강산으로 가던 길
오늘 우연히 유튜브에서 '이만갑 655회, 4대 세습에 반발하는 북한 MZ세대의 실체' 라는 영상을 보게 되었다.영상을 보는 내내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정말 지금도 저럴까?'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저토록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영상이 끝난 뒤에도 쉽게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다가 문득 오래전 기억 하나가 조용히 떠올랐다.현대가 추진했던 금강산 관광.그때 나는 직접 북한 땅을 밟았었다.기억의 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나는 책장 한쪽에 꽂혀 있던 오래된 사진 앨범을 꺼냈다. 먼지가 수북이 쌓인 앨범을 넘기다 보니 바랜 사진 몇 장이 손끝에 걸렸다. 지금처럼 휴대전화로 수백 장을 찍던 시절이 아니었다. 그때는 1회용 카..
2026.07.28 -
설이, 추억을 두고 떠나다
오늘 아침, 설이가 떠났다.어젯밤까지만 해도 짓고 현관까지 걸어왔었는데 그 모습이 마지막 인사였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이상하리만큼 조용해서 집 안을 들여다보니 설이는 자기 집 안에 몸을 웅크린 채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꼬리만 밖으로 살짝 내밀고 있었다. 마치 "이제 나는 여기까지예요." 하고 마지막 인사를 남긴 듯했다.사모예드 설이.열네 해를 우리와 함께 살았다. 어쩌면 자신의 시간을 다 채우고 조용히 길을 떠난 것인지도 모른다. '설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가족이 되었던 생명이 이제는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남았다.아내의 마음은 더 무거웠다. 함께했던 시간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다. 뒷산으로 운동을 갈 때면 언제나 설이가 앞장서거나 뒤를 따랐다. 사람 하나 없는 산길에서도 설이가 곁에 있으면 든든했다고 ..
2026.07.19 -
숭의전 -- "고려 종묘의 맥을 이어온 곳."
나는 오늘도 숭의전으로 출근한다.집을 나와 자전거 페달을 밟으면 임진강의 바람이 먼저 나를 맞아준다. 계절마다 다른 바람을 맞으며 숭의전으로 향하는 이 길도 어느새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상수리나무 숲길을 천천히 올라가면 천 년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처음 해설사가 되었을 때는 역사를 설명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깨달았다.사람들은 연도보다 이야기를 기억하고, 문화재보다 그 안에 담긴 사람의 삶을 기억한다는 것을.그래서 오늘도 나는 숭의전을 설명하지 않는다.숭의전이 품고 있는 고려의 시간을 들려줄 뿐이다.이 글은 어느 문화관광해설사의 해설 기록이 아니다.상수리숲을 오르내리며 내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그들과 함께 걸으며 다시 만난 고려의 이야기이다.오늘도 나는 그 길을 오른다.천 년의 ..
2026.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