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은 이색 영당

2016. 2. 9. 19:19삶이 깃든 이야기/힐링연천

 

 

고려 말의 삼은(三隱)중에 한분이 목은 이색 선생이지요.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선생과 더불어'여말삼은(麗末三隱)'이라 부릅니다. 포은 선생과 삼봉 정도전 등은 목은 선생의 제자입니다 영원한 고려 충신으로서의 그의 모습이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도 나오더군요.

바로 그 목은 선생의 영당이 우리 동네에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바이크를 타고 목은 이색선생의 영당을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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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사  휘 원증( 목은 공의 증손)의 신도비와 석관 

 은평구 신도시 개발로 이 곳으로 2005년에 이장 하였다 

 

 

 

이 시는 목은 이색이 남긴 회고가입니다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흘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 있어 갈 곳 몰라하노라"

 

무너져가는 고려왕조와 무력해지는 자신을 안타까워 하는 마음으로 쓴 이 시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전해지고 있는 노래입니다

 

 

 

 

 

 

 

 

소재지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노동리 316-1

  • 지정별 : 향토문화재 제16호

지정일 : 2012.04.20

지정면적 : 미상

유적 현황

 

왕징면 노동리에 위치하고 있는 이 영당(影堂)은 고려말의 대학자 목은 이색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1686년(숙종 12)에 창건되었다. 원래의 영당은 한국전쟁 중 전소되었는데, 1973년과 1993년 두 차례에 걸쳐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에 맞배지붕을 갖춘 목조건물이다.

사당 내에 모셔진 목은 선생의 영정은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있는 수송영당의 원본을 모사한 것이다. 영당 좌측에는 서울에서 조사된 석곽묘가 이전 복원 되어 있다. 목은 선생의 영당이 이곳에 세워진 연유는 2가지 인연 때문인데, 첫 번째는 고려 창왕을 옹립하여 왕위에 오르게 한 연유로 1389년 이성계 일파가 세력을 얻은 뒤에 長湍에 유배된 것이고, 두 번째는 그의 5대손인 이명은이 노동리 일대에 정착하여 한산이씨(韓山李氏)의 집성촌을 이루게 된 것이다.

영당의 건립은 이명은의 6대손 이극번 등의 발의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색(1328~1396)의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자는 영숙(潁叔)이고 호는 목은(牧隱)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이색은 15세에 부음(父陰)으로 별장(別將)의 직을 얻었고, 1341년(충혜왕 복위 2) 진사(進士)가 되어 1348년(충목왕 4)에는 원(元)의 국자감의 생원이 되었다. 1351년(충정왕 3) 부친상(父親喪)으로 귀국하였으며, 1353년 향시(鄕試)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에 장원 급제하였고, 1355년 다시 원의 한림원(翰林院)에 등용되었다. 1365년 신돈이 등용될 때, 그는 개혁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373년 한산군(韓山君)에 책봉된 후에는 신병으로 관직을 사퇴했으나 1375년(우왕 1)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였고, 1377년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의 사부가 되었다. 1389년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문하시중이 되었으나 우왕이 강화로 유배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昌을 즉위시켜 이성계(李成桂)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성계가 득세하자 장단(長湍)·함창(咸昌) 등지에 유배되었다.

1391년(공양왕 3)에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책봉되었으나 여흥(驪興) 등지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고, 조선 개국 후 태조가 1395년 한산백(韓山伯)에 책봉했으나 사양하였으며, 이듬해 여강(驪江)의 신륵사(神勒寺)로 가던 중 사망하였다.

  • 漣川文化院, 『鄕土史料集』, 1995
  •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연천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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