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이사, 그리고 사라진 극장들

2026. 2. 15. 08:17삶이 깃든 이야기/나의 이야기


새벽녘, 이상한 꿈을 꾸었다.
깨자마자 잊히기 전에 서둘러 적어 둔다. 이상했지만, 어쩐지 신기했고, 무엇보다 묘한 감정이 오래 남았다.
두 누님네와 우리 가족이 함께 이사하기로 한 집을 보러 가는 꿈이었다.
그곳은 산골 같은 풍경이었다. 공기는 눅눅했고, 하늘은 잿빛이었다. 날씨 탓인지, 아니면 내 마음 탓인지, 조금은 을씨년스러웠다.
멀리 단일 건물 하나가 길게 뻗어 있었다. 다섯 층쯤 되어 보이는 거대한 공장. 휴식시간이었는지 수많은 여공들이 일제히 창밖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없이, 한 방향으로. 그 시선이 이상하게도 또렷하게 기억난다.
공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우리가 이사할 집이 있었다.
낡은 2층짜리 상가 건물. 아내와 누님들과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세 세대가 살아도 충분할 만큼 넓은 공간이었지만, 벽과 바닥, 공기까지 모두 오래된 시간의 색을 띠고 있었다.
지붕은 판잣집처럼 느껴졌으나 자세히 보니 두꺼운 콘크리트 슬라브였다. 겉은 허술해 보이는데 속은 단단한, 어쩌면 사람과도 같은 집이었다. 잠시 그곳에 앉아 있다가 나는 혼자 밖으로 나왔다.
마침 심재복 씨가 있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건물 아래 왼편으로 커다란 돌계단이 지하로 이어지고 있었다. 음침하고 기괴한 느낌이 스쳤다. 그럼에도 우리는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아래에는 깊은 물이 가득했다. 마치 대형 목욕탕 욕조처럼 넓은 공간에 물이 고여 있었다. 맑아 보이지는 않았다. 주변에는 기묘한 자연석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지금은 관리되지 않는 폐허 같았지만, 한때는 입장료를 받고 사람들이 찾던 명소였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시간에 밀려 잊힌 장소.
다시 밖으로 나오는데, 급히 따라오던 심재복 씨가 소변이 급했는지 그 자리에서 실례를 하고 말았다. 나는 조용히 밖으로 걸어 나왔다.
집과 붙어 있는 좁은 골목에는 이발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남자 이발사는 머리를 깎고, 여자는 면도를 하고 있었다. 낯설지만 또 어딘가 익숙한 장면.
‘이사 오면 나도 저기서 머리를 깎겠지.’
꿈속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는 그 골목을 벗어나 넓은 들판으로 나왔다.

그런데 이상했다.
방금 전 이발소들이 줄지어 있던 것처럼, 이번에는 거대한 극장들이 줄지어 펼쳐져 있었다. 열 개도 넘는 극장 건물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모두 문을 닫은 채 낡아 있었지만, 극장 외벽의 화려한 포스터 그림들은 여전히 생생했다. 빛바랜 듯하면서도 선명한 색채. 잊고 지냈던 추억이 한꺼번에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그 장면을 찍었다.
처음엔 우리 둘뿐이었는데, 어느새 사람들이 몰려들어 저마다 휴대폰을 들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마치 사라지기 전에 붙잡아 두려는 것처럼.
그리고 그 이후의 장면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언가 더 있었던 것 같은데, 거기까지가 꿈이었다.
나는 자주 꿈을 꾼다. 그러나 대부분은 눈을 뜨면 흩어진다.
그런데 오늘은 다르다. 장면 하나하나가 또렷하다. 무엇보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남아 있다.
낡았지만 단단했던 집, 잊힌 지하 공간의 물, 다닥다닥 붙은 이발소, 그리고 폐허가 된 극장들.
이사라는 것은 어쩌면 장소를 옮기는 일이 아니라, 시간과 기억 속을 옮겨 다니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오늘 아침, 나는 잠에서 깨어
한 편의 오래된 영화처럼 남은 꿈의 장면들을 조용히 기록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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