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4. 17. 18:52ㆍ카테고리 없음
송시열은 여든세살에 숙종에 의해 사사되었다. 조선시대에 대신은 역적이 아니면 사형당한 전례가 없었는데 송시열은 역적이 아니라, 죄인들의 수괴라는 애매한 죄명으로 사형을 당했고 그것도 국문을 당하기 위해서 제주도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도중에 정읍에서 서둘러 사약을 마신 점이 특이하다. 조선후기의 역사서,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는 송시열의 죽음에 대해 완전히 상반된 두 개의 기록이 실려있다.
김재구의 <조야회통>을 보면 송시열은 오직 바를 직자 한자로 후손들을 가르쳤다. 죽기 전날 밤 흰 기운이 하늘에 뻗치더니 죽는 날 밤에는 규성이 땅에 떨어지고 붉은 빛이 지붕 위에 뻗쳤다. 규성은 문운, 즉 학문을 상징하는 별이다. 그러나 나량좌의 <명촌잡록>을 보면, 사약을 받던 날 송시열은 효종과 명성왕후의 어찰을 빌어 목숨을 구걸했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다리를 뻗고 바로 드러누웠다. 종시 마시지 아니하니 약을 든 사람이 손으로 입을 벌리고 약을 부었는데 한 그릇 반이 지나지 못해 죽었다고 되어 있다. 죽음에 임한 그의 모습은 목숨을 구걸하는 소인배였다는 것이다
우암은 조선실록에 3000번이상이나 거론되는 인물이며, 당대에는 대로(大老)라는 존칭으로 죽어서는 송자라는 최고의 칭호를 받은 인물이다. 그러나 죽은에 관한 위 기록만큼이나 그 평가가 엇갈린다. 같은 당인 서인에게는 당대최고의 학자이자 충직하고 현명한 국가의 원로이나, 반대당인 남인에게는 간악한 무리의 수괴일뿐이었다.
흔히 조선 붕당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예송 논쟁을 둘수 있는데 우암은 그 예송 논쟁의 한가운데 있었던 인물이다.
예송논쟁이란, 효종이 승하하자, 효종의 어머니는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가 효종의 국상에 상복을 몇 년 입어야되는가에 대한 싸움였다. 장례를 맡은 빈청에서는 자의대비의 상복을 1년복으로 결정했다. 당시 조선은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 부자로 인해 예학이 극도로 강조되던 시기로 적장자 중심으로 대를 잇는 종법이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이 종법에 따르면 아들의 상에 부모가 상복을 입는 기간이 장자면 3년, 차남이하면 1년복으로 각각 달랐다. 사대부가에서 자리잡기 시작한 종법은 왕실의 계승문제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종법에 따르면 소현세자가 죽었을 때 소현세자의 아들, 즉 원손이 그 대를 이어야 했다. 그러나 인조는 자신의 둘째아들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다.
조정의 국상에 있어서 우암이 취한 입장이 효종이 왕위를 계승했지만 둘째이므로 1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 그러나 남인 허목이 취한 입장은 효종이 비록 둘째지만 왕위를 계승하였고 제왕가에서는 무엇보다도 왕위를 계승했다는 것이 중요하므로 마땅히 장자대접을 하여 3년복을 입어햐 한다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이다. 16세기에 완성된 조선의 국법, 경국대전과 국조오례의엔 아들이 죽었을 때 부모가 상복을 입는 기간이 장자와 차자 구분없이 1년으로 되어 있다. 17세기부터 통용된 의례에는 장자는 3년, 차자는 1년으로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장자가 죽었을 때 둘째아들을 장자로 삼는다는 예외조항이 있었다.
당시 남인을 대표하는 미수 허목. 그는 효종이 비록 둘째지만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장자로 대우해야 한다는 입장였다. 그러나 서인을 대표하는 송시열은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이때 송시열이 근거로 든 것은 체이부정, 즉 대를 이었어도 3년복을 입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서자로서 대를 이은 경우라는 것이다.즉 효종을 서자로 본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서자였다. 의례에는 이 서자의 개념이 두 가지로 쓰였던 것이다.
우암은 장자를 제외한 나머지 아들을 서자라고 보았다. 따라서 효종은 둘째아들이기 때문에 1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입장이였다. 그러나 허목은 서자를 첩의 아들이라고 봤다. 따라서 효종은 서자가 아니라 장자이므로 3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입장였다. 결국 허목과 송시열의 싸움은 효종을 장자로 볼 것인가, 차자로 볼 것인가의 싸움이였다. 송시열과 서인들은 효종을 차자로 봤는데 이것은 일반 사대부의 예를 왕가에 그대로 적용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대부의 지위를 왕권과 대등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대부 중심의 사회체계, 정치체계를 주장했던 것, 반면에 허목과 남인은 효종을 장자로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왕가의 예는 일반사가와 다르다. 말하자면 사대부 중심이 아니라 왕권 중심의 사회체제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서인과 남인의 정치 철학의 대비시켜주는 중요한 사건이다.. 왕이라는 존재에 대한 정의가 이처럼 달랐다. 서인은 "천하의 예는 모두 같다" 라는 입장에서 왕은 사대부중에서 최고의 사대부일뿐이었으나 남인은 " 왕가와 어염집은 다르다" 라는 입장에서 왕은 사대부와 같은 존재일수 없는 특별한 존재였다.
이런 예학과 정치 사상 논쟁이 파행적 당파론은 가는데에는 고산 윤선도의 상소가 원인이 되었다. 고산 윤선도는 만약 효종이 정을 잇지 않았다면 즉 장자가 아니라면 효종은 가짜 왕이요, 진짜왕은 소현세자의 아들인 원손이 되는것이다..
이 상소로 말미암아. 예송논쟁에 패하게 되면 왕을 부정하는 입장, 즉 역모로 몰리게 되었다. 효종이 장자가 아니라고 한 송시열의 주장에 따라 이제 이 논쟁은 서로 양보할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 여기서 대패한다는 것은 정치적 몰락을 의미했다. 예송은 당시 사회질서원칙으로 확립되어가던 장자계승원칙에 대한 학문논쟁였다. 그러나 이제 왕실의 정통성 문제로까지 연결되면서 서인과 남인 사이의 심각한 정치적 대립으로 발전하게 된다.
송시열은 이 2차에 걸친 예송논쟁에서 패하여 은거하게 되고, 숙종조에 이르러 그 제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사약을 마시게 된다. 우암의 학맥을 기록해 놓은 책, 화양연원록을 보면 그의 제자는 무려 900명에 달한다. 그의 제자 가운데는 당상관 이상 벼슬에 오른 이 만도 54명 이였다. 죄없다고 여겨지는 스승의 죽음을 바라보는 제자들..그들에게 이미 남인은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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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기타] [조선시대 당쟁사], 이성무著 - 동방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