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편 가정교회와 종족적 메시아 - 제3장 교회장의 길_ 4절
2013. 3. 6. 12:40ㆍ참사랑 영원까지/천성경
4절 교회장과 설교
1 책임자는 환경을 피하지 말고 그 환경을 소화해야 합니다. 환경을 소화할 수 있는 능동적인 사람이 되지 못하고 어떻게 하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꺾을 수 없는 확고한 자리에 세우기 위해 감옥에 넣어서라도 작전상 시련을 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고생하던 기준이 있기에 현재의 생활에서 고생이 있어도 그때의 입장을 생각하면서 참아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도 흥남감옥에 들어갔을 때, 거기서 해마다 모범노동자 상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과정을 거쳐서 선생님을 훈련시킨 것을 생각하면서 여러분을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어려운 처지에서 부모에게 무엇을 달라고 하면, 그것을 못 주는 부모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선생님은 고생의 노정을 밟아 왔기 때문에 어떤 일도 다 좋습니다. 가치 없이 고생한 것은 소용이 없지만, 크나큰 뜻을 품고 한 고생의 경력은 억천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귀중한 것입니다. 이것이 선생님의 재산입니다. 선생님은 설교를 위하여 준비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산 체험으로 사실을 말할 때는 모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설교준비를 위한 마음가짐
2 책임자는 전도지에서 자기의 뼈살이 녹아나는 감성을 지녀야 합니다. ‘아버지! 제가 이렇게 부족하옵니다. 그래도 제가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니 안타깝습니다.’라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단 위에 나서서 설교하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삼지 말고 참부모와 천지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통첩문을 들고 나선 하나님의 정병이라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설교하기 전에 설교를 위해서 기도하는 시간보다 식구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많이 갖습니다. ‘아버지! 이들을 이끌어 올려야 되겠사온데 어떻게 해야 하옵니까? 이것입니까, 저것입니까?’라고 정성을 모은 다음 마음의 명령대로 설교합니다. 심정을 떠나서는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심정의 골짜기 길은 고통스럽고 처참한 길입니다. 스승을 요구하되 지식의 스승을 요구하지 말고 심정의 스승을 요구해야 됩니다. 심정의 골짜기는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눈물이요 자기는 없어집니다. 목적지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목적과 뜻은 커지고 나는 작아집니다. 작아지는 나와 커지는 뜻을 대한 심정만 있으면 만사는 해결이 됩니다.
3 부모의 심정을 갖고 종의 몸으로 제물의 과정을 거침으로써 제사장이라고 자칭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사장이 되기 위해서는 제물 되는 자녀가 있어야 합니다. 직계의 자녀가 없으면 믿음의 자녀라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시간은 제사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자기 과거를 하나님에게 보고하고 속죄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예배시간은 자유가 없는 시간입니다.
4 일년 열두 달 돌아다니다가 그냥 그저 대충 해서 단에 올라서서 ‘여러분, 찬송합시다.’라고 하고는 아버지 뭐 어떻고 하며 기도하고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해서는 하늘나라가 이루어지지 않고 생명이 부활되지 않습니다. 엄마들이 아기 낳는 것을 보십시오. 육신으로 아기 하나 낳는데도 오장이 끊어지듯이 아프고, 얼굴에 그저 오만 가지 만물상을 만들고 이러지 않습니까? 그 이상 미쳐야 됩니다. 반드시 땀을 흘리면서 눈물을 짓고 나와야 됩니다.
5 영적 지도자는 체휼적 무엇이 없이는 일을 못합니다. 책을 봐서 설교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책을 봐서 하나님이 보입니까? 그 책 가운데 하나님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신령한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신령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체휼적인 신앙은 가장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통일교회에 들어온 식구라면 대개 체휼하게 됩니다. 반드시 체험을 합니다. 어떤 일까지 벌어지느냐 하면, 여러분의 현실적 생활권 내에 다 벌어집니다. 진정 뜻을 위해서 있는 정성을 다 들이면 하늘이 같이해 주는 것입니다.
6 여러분이 하나님과 직접 밀접한 관계에 있다면 설교 준비를 하지 않았다고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훈련도 필요합니다. 선생님이 유명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하루에 열 번 이야기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는 장소에 따라 내용이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 준비해서 하겠습니까? 그럴 때 마음은 완전히 제물로서의 자각을 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존재의식이 없습니다. 소유관념도 없습니다. 완전히 바쳐지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엄숙한 자리입니다. 제물 앞에 선 제객들은 머리를 숙여야 되는 것이 천법입니다. 그 제단에는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간섭하는 것입니다. 심정적으로 오늘 이 제단 앞에 나는 정열과 모든 힘과 모든 노력을 다 바친다고 하게 될 때는, 자기의 일생에 없는 성심성의를 다해서 입을 열게 될 때는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제물은 심각한 자리에서 바쳐지는 것입니다.
7 설교는 주일날에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일날만 되면 ‘성경은 어디를 볼까? 찬송가 나오너라. 성가 나오너라.’ 이래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중심삼고, 산 재료를 중심삼고 성경에서 그와 같은 역사를 빼서 그 사람의 일과 성경의 내용을 대조해 가면서 재미있게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듣는 사람이 자기 일을 말하니까 홀딱 반하는 것입니다. 좋아합니다. 책을 보고 하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책도 나옵니다. 사람 자체가 책의 원본입니다.
8 선생님도 지금까지 인상에 남는 것이 있습니다. 강도와 함께 쇠고랑을 차고 흥남감옥으로 이송되어 갈 때, 산골짜기에 접어들어 개울 길을 따라 걷던 그때가 참으로 새롭게 느껴집니다. 굽이굽이 산골짜기 길을 걸어가던 그때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걸음은 새로운 세계를 향해 출발하던 걸음이었습니다. ‘앞으로 날마다 가야 할 나의 길은 어디일 것이냐? 형을 마치고 나가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라고 아주 궁금했습니다. ‘감옥 생활을 어떻게 해 나가느냐?’ 어렵지만 나는 간다는 것입니다. 그때가 새로운 자아를 각성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선생님에게 남아진 것은 그러한 것밖에 없습니다.
9 선생님은 흥남감옥 비료공장에서 일을 했습니다. 배가 너무 고픈 가운데 일을 하니 곡괭이를 움켜쥔 손이 올라가지 않고 기진맥진해 정신마저 혼미해졌습니다. 그러다가 ‘점심시간이다!’라는 소리를 들으면, 그 소리가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그때 밥을 먹기 위해 곡괭이를 땅에 박고 돌아서는 그 순간의 기분, 선생님에게 그와 같은 산 역사의 재료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어떠한 고생도 그러한 것에 비길 수 없습니다. 이런 비참했던 사연들이 선생님을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청사에 길이 빛날 수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간직한 보화를 끌어모을 수 있는 그날까지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수난의 사실을 세계 만민 앞에 털어놓고 이야기하면, 다른 내용으로 한 시간 설교하는 것보다 이 내용으로 10분만 이야기하면 통곡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좋은 설교 내용이 어디에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걱정하지 말고 30세 전까지는 고생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10 설교를 할 때는 여러분이 절대 제목을 정하고 나가서는 안 됩니다. 원래는 기도 가운데서 제목을 잡아야 합니다. 준비한 제목을 가지고는 절대 감동을 못 시킵니다. 남을 울리려면 내가 설교를 준비하고 기도하는 가운데에서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천태만상의 사람을 생각하면서, 오늘날 한국의 실정으로부터 쭉 생각하면서 ‘오늘 찾아오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겠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두고 눈물을 흘리며 단에 나서야 청중을 눈물 흘리게 하는 은혜를 줄 수 있습니다. 편지도 눈물 흘리고 쓴 편지라야 상대방을 울릴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주체적인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상대방이 그렇게 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단에 설 때는 그 단이 심판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전보다 더 잘하기를 바랐지만 못할 때는 회개해야 됩니다. 은혜를 못 주고 설교를 한 시간 했다면 세 시간 회개해야 됩니다. 설교를 잘하지 못해서 은혜 못 주고 그럴 때는 3배 이상 회개해야 됩니다.
11 책임자는 누구든지 식구가 자기 사정을 얘기할 때 잘 듣고, 내용을 기록했다가 전체의 본이 될 수 있는 교재로 쓸 줄 알아야 됩니다. 거기에 감동을 받으면 일요일 설교 제목으로 정해 정성을 들여서 식구들에게 그 감동을 전해야 됩니다. 언제나 하늘을 모시고 살아야 됩니다. 하늘을 모시지 않고 자기중심으로 설교를 해서는 안 됩니다. 설교를 책 보고 참조하면 하늘이 역사를 안 합니다. 흘러가 버리는 것입니다. 생명의 씨는 하늘로부터 왔습니다. 인간으로부터가 아니고 지식으로부터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하기 전에는 반드시 눈물을 흘리고 가야 합니다. 눈물을 흘려야만 부모가 되는 입장에서 그 자식들의 모든 것을 회개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눈물을 짓기 위해서는 먼저 눈물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눈물의 문은 눈물로 열어야 됩니다. 눈물의 문을 열어야 비로소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통회의 눈물을 흘려야 통회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12 언제나 빚진 사람의 입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공인입니다. 자기가 책임을 못하면 다른 사람이 대신합니다. 주변을 보고 ‘이런 면은 내가 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에 우리 식구가 해주고 있구나!’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지금까지 통일교회 전체가 당해야 하는 것을 선생님이 당해 나왔지만, 이제는 개인과 가정·종족·민족을 넘어서 세계적인 모든 사건들은 다 식구들 앞에 일면씩 다가올 것입니다. 선생님도 물론 당했지만, 전 세계 식구들이 당하면서 고개를 넘어가는 과정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우리는 공동운명에 있습니다. 공적인 면에서 영계가 직접 지도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은 심각합니다. 이것을 키득거리면서 들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선생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말하는 것보다, 웃는 것보다 먼저 하늘을 생각해야 됩니다. 슬픔이 있어도 하늘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슬픔을 당해도 ‘내가 하늘 대신 당한다.’라고 할 때, 그 슬픔을 의연히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13 슬픔을 당하고 나면 반드시 대가가 따라옵니다. 땅 위에서 탕감하는 과정 중에 참 선한 입장에서 슬픈 눈물을 흘리면 반드시 선한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슬픔을 열만큼 당하면 기쁨이 천만큼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활을 느끼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계속해 오는 것입니다. 열만한 슬픔을 넘었어도 하나만한 기쁨밖에 찾아오지 않는다면, 그런 기쁨은 며칠 만에 내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진정으로 하늘을 따라 나가는 길은 진정한 슬픔을 당하면 진정한 기쁨이, 내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기쁨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내가 못 받고 내가 못 느끼면 자기 아내라든가, 자기 자녀라든가, 자기 조상에게 그런 기쁨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일을 경솔히 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모시고 의논하는 자세로 생활해야 됩니다. 답답하면 앉아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자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일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기도하는 것이 생활화되어야 합니다.
정성이 듬뿍 담긴 설교
14 선생님은 될 수 있으면 원고를 안 쓰려고 합니다. 그래서 원고를 안 가지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원고를 가지고 하면 하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원고를 썼더라도 자기가 쓴 글을 기억하면 안 됩니다. 원고를 썼더라도 자기가 원고 쓸 때의 기억이 남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외웠더라도 그 줄을 보면서 외워서 한다는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명권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과 몸이, 그 은혜의 분위기라든가 하늘이 대하는 환경에 서로 화해 버리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자기주장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때는 내가 대상의 자리에 서기도 하고, 어떤 때는 주체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대상의 자리에 서야 할 텐데 주체의 자리에 서면 분위기가 깨져 나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가 필요합니다.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심정으로 척 나서면, 심정의 기준이 벌써 맨 밑창에 내려가서 대번에 압니다. 오늘 무슨 말을 해야 되겠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15 여러분은 설교하고 나서도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에 몸부림쳐야 됩니다. 그래야 발전합니다. 10년 전이나 10년 후나 그저 단에 서서 습관적으로 설교했다면 점점점 말라 가는 것입니다. 자기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리한 노트를 가지고서 10년 20년 우려먹으면 거기에 생명이 있을 리 없습니다. 언제나 자기 말을 하지 말고 새 말을, 하늘의 말을 해야 됩니다. 아는 말이라도 언제나 하늘의 말을 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고를 쓸 때에도, 자기가 쓴 원고를 잊어버려야 됩니다. 이러한 영적 활동이라는 것은 심각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12시가 아니라 3시, 4시에도 그런 예감이 들면 잠이 어디 있습니까? 휙 돌아갑니다. 영적 세계의 감응이라든가 촉감, 자극이라는 것은 잠을 초월합니다. 잠의 세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16 통일교회 책임자들은 설교를 할 때, 몸 마음을 다해서 하늘땅을 감동시키고, 청중을 감동시키고, 과거·현재·미래의 감동권을 움직일 수 있는 동기가 필요합니다. 그 동기가 없게 될 때는 대중화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점점 세속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늘을 대신해서 해야 됩니다. 또 주일 말씀은 책을 보고 연구해서는 안 됩니다. 깊은 기도 가운데서 제목을 알아야 됩니다. 제목을 잡기 위해 기도하고, 생명의 감동을 받은 자리에서 자기가 최후의 선언, 나라가 망하고 흥하는 모든 문제를 걸고 선언을 하는 마음이어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형장에 나서서 선포하는 마음이어야 됩니다. 그 말이 이뤄지느냐, 안 이뤄지느냐 하는 경계선에서 선포해야 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수대에 나가는 사형수와 같이 심각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가 가사나 음성이 다 같은 노래이지만, 감동을 주려면 그 모든 내용을 알아야 됩니다. 성대에서 나오는 말이 깊은 내용을 가지고 공명되게 해야 합니다. 공명, 산울림처럼 갔다가 와서 자기 가슴을 밀치고 내가 감동받아 자세를 옮길 수 있는 자리에 어떻게 들어가느냐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노래를 해야 대중에게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17 설교를 하든지 강의를 할 때, 새로운 것을 제시해야 됩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자극을 주어야 합니다. 기도를 해서라도 보충해야 됩니다. 그래도 안 되면 생명을 걸고서라도 보충해 주어야 됩니다. 여러분은 길을 가더라도 새로운 것을 찾는 마음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또한 교회에 간다고 하더라도 그냥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입장과 환경에 접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가야 새로운 것이 생겨납니다. 교회에 가는데도 직선 코스로만 가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기도 해야 됩니다. 남쪽으로 가야 되지만 북쪽으로도 가 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또 그런 실감이 안 나거든 집안 살림살이를 바꾸어 보라는 것입니다. 수개월이 되어도 그냥 그대로 놔두지 말고 거꾸로 뒤바꾸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기도를 할 때도 단 앞에서 기도를 하는 경우와 맨 뒤편에서 기도를 하는 경우 그 느낌이 각각 다릅니다. 청중 가운데에서 기도를 할 경우에 또 느낌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경적인 변화를 어떻게 모색하느냐, 이것이 필요합니다.
18 여러분이 설교할 때, 옛날에 했던 것을 다시 하게 되면 식구들이 알고 기분 나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원리강의를 할 때도 옛날식으로 하면 기분 나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춘하추동 사계절에 따라 변화를 느끼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아침이라고 해서 기분이 항상 좋은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걱정이 없는데도 유난히 우울한 날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침 햇살도 밝고 상쾌한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 우울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해결되느냐? 이것을 변동시키는 어떤 자극적인 것이 없다면 더 우울한 자리로 찾아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반대적일 수 있는 새로운 자극을 준다든가, 아니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직접적인 새로운 자극을 일으켜서 보충해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해결 방안을 세워서 하루하루의 생활을 조절해 나가지 못하면 앞으로 뭇 인간들의 심령을 지도할 수 없습니다.
19 말씀·실체·영으로 되어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먼저 말씀을 세우고, 인격을 세우고, 신령역사를 해야 됩니다. 그래야 정상적입니다. 만약 먼저 신령을 앞세우면 단계를 뛰어넘은 것이 되기 때문에 탕감이 큽니다. 설교는 우선 자기가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자기 기도가 자기를 감동시켜야 합니다. 설교는 동정받는 입장에서 해야 됩니다. 나를 통해 생명의 인연을 맺어야 할 사람들의 불쌍함을 하나님에게 호소하고 동정을 받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동정을 받는 입장에 서기 위해서는 자기가 고생을 하면서 하늘길을 찾던 입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수가 없어야 합니다.
20 정성이란 한꺼번에 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를 할 때에도 대중을 앞에 놓고 설교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한 사람을 놓고 설교한다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은혜를 받아 눈물을 흘리면 그것이 전체로 퍼져 나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교회를 발전시키지 못한 이유는 뿌리도 없이 공중에 떠 있는 설교를 했기 때문입니다. 흡수될 수 있는 터전이 없으니 전도가 될 리 없습니다. 교회장 자신도 자기 발판은 자기가 닦아야 됩니다. 선생님이 어떤 지시를 했을 때 교회장들이 생명을 걸고 움직이는 본을 보여야 일반 식구들도 움직이는 것입니다.
21 세상만사가 전부 설교 자료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가 고생한 것이 있으면 내가 어느 때 이렇게 했다는 것을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역자는 고생을 많이 해야 됩니다. 인생 수련을 많이 해야 됩니다. 불쌍한 노동자로부터 거지, 혹은 고급관리, 혹은 권세권 내에 있는 자리까지 한때 경험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을 중심삼고 그런 때에 공적 입장에서 어느 한때 슬펐던 사실, 그런 것을 놓고 자기가 체험한 얘기가 실감이 나는 것입니다.
22 여러분이 설교를 하고 강의를 할 때에 원리책을 많이 보는 것보다는, 원리책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기준이 되어 있으면 원리책 내용을 중심삼고 기도할 때 여러분 자신이 그 말씀 가운데 스며들어 가야 됩니다. 이 말씀이 얼마만큼 어려운 말씀인가, 이것이 얼마만큼의 희생의 과정을 통해서 발견되었는가 하는 것을 체험해야 됩니다. 그것을 느끼게 되면 반드시 통곡이 나오게 돼 있습니다. 하나님 복귀의 심정권 내에 들어가게 되면, 거기에는 기가 막힌 사연이 뿌리가 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안갯속에 말려들어가 혼자 뒤넘기치는 일이 벌어집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대신한 주체성을 확정지어야 됩니다. 거기서부터 자기가 주체가 되어 역사가 벌어집니다. 영적인 협조 기반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지에 못 들어가면 기도를 해야 됩니다. 정성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23 원리강의를 하는데 있어서 원리를 완전히 몰라서는 상대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심적 기반을 갖출 수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됩니다. ‘아버지, 오늘은 이런 제목을 가지고 강의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하고 해야 됩니다. 기도 가운데 강의를 하면서 하나님이 이런 심정을 가졌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과 논의하면서 강의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이 말씀을 중심삼고 당신이 필요로 하는 대상으로서 오늘 부활시킬 사람이 누구입니까? 당신이 바라고 고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 있는 힘을 다해서 그 사람을 놓치지 않겠습니다.’라고 해야 됩니다. ‘내가 하는 식대로 언제나 강의하면 되지.’라고 하는 것은 전달은 되지만 사람의 생명을 부활시킬 수는 없습니다. 절대 생명을 소생시킬 수 없습니다.
24 여러분이 공적인 단에 서게 될 때, 그 마음은 형장에 나가는 심정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공판정에서 판사의 준엄한 판결을 바라는 순간에 선 사나이와 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즉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생명을 이 시간에 내가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 잘하면 살릴 수도 있는 것이요, 한마디 잘못하면 죽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의사가 주사를 잘못 놓으면 그 생명을 희생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제일 무서운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는 하늘이 같이하는 것입니다.
25 강의할 때는 반드시 원리 말씀 자체를 말씀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선생님의 역사를 말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말한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결국 내가 그 역사를 상속받고 그 역사와 일치되기 위해서 말한다는 뜻입니다. 열 번 하면 열 번 함으로써 깊어지니, 깊어진 만큼 내가 심정적으로 가까워지기 위해서 말한다는 것입니다. 남을 구하는 것보다도 내가 가까워지기 위해서 말한다는 것입니다. 열 번 하면 열 번 하는 것만큼 가까워지고, 열 번 하면 열 번 하는 것만큼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면 기도하는 것만큼 그것이 깊고 넓어집니다. 높아집니다. 높아지니 심정 기준에 있어서 자기가 발전하고, 심정일체를 중심삼은 발전의 도수를 강화할 수 있는 기회가 생깁니다. 그런 때가 말씀을 전하는 시간이요, 식구를 가르치는 시간입니다.
26 선생님은 기도할 때 무릎에 굳은살이 박힐 정도로 했습니다. 기도하게 되면 하루에 열두 시간 이상 하는 것입니다. 문제를 걸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담판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경험을 통해 습관화된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척 문제를 대할 때 그것이 어떻게 될지 벌써 결과를 압니다. 느껴집니다. 설교도 책을 봐서 하면 안 됩니다. 영계라는 그 자체가, 본연의 상태가 책을 중심삼고 움직이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랑을 중심삼은 세계에 들어가서 주관받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리고 복귀는 사랑을 중심삼은 인격 완성을 말합니다. 사랑을 중심삼고 감동하고, 사랑을 중심삼고 인격을 하늘 편에 접붙이는 일입니다. 지식이 아닙니다. 책 보고 따서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 가지고는 생명의 부활이 안 됩니다.
27 설교 제목을 정하기 위해서는 싸워야 됩니다. 일대 싸움입니다. 제목을 일주일 전에 책을 봐서 잡으면 하늘이 역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하고 관계가 없습니다. 그래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 제목을 잡을 때까지는 죽느냐 사느냐 해야 됩니다. 오늘 내가 단에 서게 될 때 청중 가운데서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를 갖고 하늘이 분별시킬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벌써 어떤 사람이 올 것인지 다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맞으면 영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언제나 설교 제목을 며칠 전에 준비하지 않습니다. 대개 나오기 10분 이내에 설교 제목을 정합니다. 그 설교 내용에 내가 살아야 됩니다. 그렇게 체험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당당하다는 것입니다. 딱 잡고 서면 자세가 잡힙니다. 그리고 상대기준이 잡히기 시작합니다. 한꺼번에 전부 안 잡힙니다. 처음에는 한두 사람입니다. 그 상대기준을 중심삼고 그 사람이 감동받고 휙 돌아가면 퍼져 나가는 것입니다.
감동을 주는 설교
28 수십만 청중을 감동시키려면 원고를 써 가지고는 안 됩니다. 영감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 지도자는 언제나 눈물이 그쳐서는 안 됩니다. 깊은 심정의 말을 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가슴을 통해서 눈물이 폭발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 심정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것을 잃어버리면 생명을 부활시키지 못합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여러분 자신들이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얼마만큼 심각해 봤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의사와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칼을 든 의사가 수술대에 들어가게 될 때는 칼끝 하나에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심각한 의사의 입장과 뭇 생명을 책임진 책임자로서의 자기를 비교해 보면, 내가 한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보다 더 심각한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통 말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기꾼이 되는 것입니다.
29 청중에게 감동을 주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설교 가운데서 먼저 감동받아야 합니다. 말하는 그 자체의 내용을 중심삼고 나 자신이 은혜가 돼야 합니다. 나에게 설교하는 것입니다. 내가 감동받을 수 있으면, 영적 기준이 높은 사람이 감동받을 수 있으면 청중은 은혜의 도가니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자기 계발입니다. 설교는 상대를 계발해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내 계발입니다. 될 수 있으면 선생님 말씀을 많이 인용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는 것보다도 선생님 설교집을 봐야 됩니다. 은혜 되는 것을 한 번, 두 번, 세 번 읽어 골자를 중심삼고 얘기하게 되면, 그것이 여러분이 몇 주일 공부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방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 기도 가운데에는 여러분이 미치지 못할 높은 경지의 내용이 있습니다.
30 청중 앞에 나설 때는 먼저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되겠다는 것을 생각하고 단에 나서야 합니다. 그다음에 5분, 10분 내에 어떻게 하든지 청중 앞에 자기 인상을 남길 수 있는 것을 준비해야 됩니다. 이 5분에서 10분 내에 청중이 자기 앞에 기울어지지 않고는 힘듭니다. 그러니 처음에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데, 전체가 관심 있는 말부터 시작하고, 만약 그것이 불가능할 때는 전연 관계없고 흔치 않은 모르는 말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말에 대해 무슨 말이냐 하고 끌려오게 하는 작전을 펴서 자기 작전권 내에 집어넣지 않으면 안 됩니다.
31 사람이 타협심이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꽁생원인지 그것을 잡아내야 됩니다. 사람이 심리적으로 어떤 타입의 사람인지 잡아내 그 사람에게 맞는 말을 연구해 놓아야 합니다. ‘아, 저 사람은 내 친구 가운데 어떤 타입의 사람과 같다. 저 사람은 내가 아는 백 사람 가운데 어떤 타입의 사람이구나.’라는 것을 비교 연구해야 됩니다. 그래서 서너 타입의 사람을 골라서 시험해 보는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이냐, 교만한 사람이냐, 강렬한 사람이냐, 우물쭈물하는 사람이냐? 그래서 극적인 장면을 가지고 눈물을 흘려야 되는 자리에서는 눈물을 흘리는 입장에 서야 되고, 용서해 주는 입장에서는 용서해 주는 표정과 감정을 갖고 그 사람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엔 그 사람에게 시적인 감정이 있으면 시를 읊어 나가는 것입니다. 연설해 나가는 도중에 생각해 내서 한 1분 동안 자기가 시정에 잠겨 그런 제목을 쓱 읊어 내 보는 것입니다. 문학적인 감정이 있으면 다정하게 속삭이는 감정으로 말해 보는 것입니다.
32 여러분을 어디에 갖다 세우더라도, 원리의 전편을 강의하든 후편을 강의하든 탁 트여서 막히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 자체가 하나의 공식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모든 현상세계에 공식으로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얼마나 방대한 지식권을 갖출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원리가 재미있어서 밤을 새워 가며 책을 보고, 거기에 취하여 내재적인 면에서도 발전을 가져와야 하며, 생활면에서도 발전을 가져와야 합니다. 자신이 없으면 발전이 없습니다.
33 명강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전국의 유명한 강사들이 강의한 것을 녹음해서 그것을 듣고 평가해서 좋은 것들만 빼 가지고 자기의 노트를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녹음한 테이프가 항상 쌓여 있어야 됩니다. 참 재치 있는 내용, 수십 명 혹은 수백 명이 재치 있게 강의한 것을 빼서, 자기가 강의할 때에 활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명강사가 될 수 있습니다. 매일같이 여덟 시간 이상 강의해야 됩니다. 새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데려다가 해야 됩니다.
34 여러분이 청중을 감동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원리책을 붙들고 눈물을 흘려야 됩니다. 그 원리책을 붙들고 밤을 새워 읽으면서 시간이 가는 것을 아까워하고, 페이지마다 신비로움을 체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느낀 후 청중에게 감동의 역사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원리에 취해서 설교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틀림없이 새로운 감동의 역사가 벌어집니다. 죽은 것, 곧 생명력을 잃은 것은 퇴화하고, 산 것은 반드시 발전하는 것입니다. 발전하면 새로운 것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원칙이 그렇습니다.
35 강의할 때는 강의 시간에 내가 무엇을 남길 것이냐? 또 말을 할 때에는 그 말을 통해서 무엇을 남길 것이냐? 손이 갈 때에는 내 손이 가서 무엇을 남길 것이냐? 내가 행동할 때에는 무엇을 남길 것이냐? 이러한 것을 다짐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힘든 길을 가면서도 무엇을 남길 것이냐를 궁리해야 됩니다. 힘들고 지치는 길을 자꾸 걸어가면서도 무엇을 남길 것이냐를 생각해야 됩니다. 흥미가 진진해야 됩니다. 지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런 생각에 몰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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