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리본체론 - 전편 - 제1장 창조원리 - 5|

2013. 1. 6. 21:32참사랑 영원까지/원리 본체론

2.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현실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존재와 관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우리 인간의 삶에 중대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미 밝힌 것처럼 하나님은 존재세계의 본체로서 구상과 설계에 따라 당신을 닮은 모습으로 인간과 만물을 포함한 피조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피조세계의 창조는 본체 되시는 하나님의 자기전개(自己展開)입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특히 인간은 하나님의 심정과 창조성까지 닮은 걸작품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참사랑을 실현할 상대를 찾아 세우고 그 사랑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관계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하나님과 만물의 관계, 인간과 만물의 관계가 현실세계의 중요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마음과 몸의 관계이며, 둘째는 부자의 관계입니다.

 

1) 마음과 몸의 관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마음과 몸의 관계와 같습니다. 마음은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무형의 실체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몸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은 몸을 통해서 그 뜻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몸은 마음을 닮은 제2의 마음입니다.

 

마음과 몸을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그렇다고 몸 자체가 마음은 아닙니다. 마음은 보이지 않는 부분이고 몸은 보이는 부분인데, 보이지 않는 마음이 주체요. 보이는 몸이 대상으로서 이 둘은 일체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하나님은 마음의 하나님이요, 보이는 실체의 인간은 몸의 하나님입니다. 내 안에서 마음과 몸이 일체가 되어 있듯이 하나님도 인간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일체입니다.

 

완성한 인간은 하나님적 가치를 지닙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적 가치를 지녔으므로 인간이 완성하면, 제2의 하나님이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분신과 같은 존재이므로 하나님이 신성하듯이 인간도 신성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절대·유일·불변·영원한 가치를 지니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면 인간도 절대·유일·불변·영원한 가치를 지닌 존재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남을 하나님같이 보고, 그 사람의 말을 하나님의 말로 듣고, 그 사람의 신성(神性)과 가치(價値)와 존엄성(尊嚴性)을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지식이 있어서 가치가 높고 권력이 있어서 위대한 것은 아닙니다. 지식이 없고 권력이 없어 거지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더라도 인간은 하나님적 가치를 지녔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부족한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그 가치는 존엄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닮은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몸이 없으면 보이지 않는 마음을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몸과 같은 인간이 없으면 당신의 뜻과 이상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는 인간이 가장 귀한 존재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이성성상이 만물을 통해서도 표현되지만 그것은 상징적이요 추상적인 표현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이성성상은 심정과 사랑이 교감되는 대등한 상대를 통해서만 실체적이고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1) 종적인 사랑, 횡적인 사랑      

 하나님은 참사랑을 통해서 모든 존재와 관계를 맺게 되는데, 하나님의 참사랑은 직단거리(直斷距離)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참사랑이 통할 수 있는 직단거리는 마음과 몸이 일체된 자리입니다.

본래 아담(남성)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하나님적 가치를 지닌 하나님의 몸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형상인 남성은 참사랑을 이루는 직단거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이 종적인 사랑입니다. 종적인 사랑은 부자의 관계, 마음과 몸의 관계에서 이 둘을 하나로 만드는 통일의 축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참사랑은 종적인 사랑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종적인 사랑으로는 부자의 관계를 지속시킬 수 없고 사랑의 터전을 넓힐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원성이 나타날 수 없고 절대성의 기반이 확대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유한한 실체의 사멸과 함께 하나님의 참사랑도 종식되고 맙니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이 횡적인 사랑입니다. 아담에게 사랑의 대상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대상은 여성인 해와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사랑의 대상으로 해와를 찾아줌으로써 창조목적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해와가 본연의 모습으로 성장하여 참사랑으로 하나 되면 하나님의 본성상과 본형상, 그리고 본양성과 본음석을 닮은 제2의 하나님이 출현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구상과 설계에 따른 자기전개가 실현되고, 인간에게는 비로소 하나님적 가치가 부여됩니다. 그래서 아담에게는 참사랑의 대상인 해와가 가장 귀한 존재입니다.

 

성서에는 ‘하나님이 아담을 먼저 짓고 아담의 갈비뼈를 취해 해와를 지었다.’(창세기 2장 21~23절)고 했습니다. 그것은 해와의 가치가 아담의 다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 속에는 먼저 해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담을 지을 때 벌써 해와의 창조를 선유(先惟)했다 그 말입니다.

 

앞(1. 하나님의 이성성상)에서 ‘하나님은 이성성상의 중화적 통일체로 계시지만 격위(格位)로 볼 때는 남성격 주체.’라고 했습니다. 남성격 주체인 하나님에게는 그 대상인 여성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해와의 창조를 선유하고 거기에 맞도록 아담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해와의 결혼은 하나님의 결혼인 동시에 하나님이 실체적으로 현현하는 의식입니다. 그때까지는 하나님의 실상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없었지만, 아담과 해와가 완성하여 결혼을 하면 비로소 모든 사람이 영계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무형의 하나님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대신 제2의 하나님인 아담과 해와의 영인체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해와가 타락(타락론에서 밝힘)으로 인해 하나님의 몸과 같은 모습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누구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은 불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출애굽기 3장 2~4절), 우레나 번개나 나팔 소리나 연기가 나타나셨습니다(출애굽기 20장 18절). 인간이 하나님의 실체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만물의 형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간이 완성해서 결혼할 경우, 남성(아담)은 하나님의 몸과 같고 그 상대인 여성(해와)은 하나님의 아내와 같습니다. 해와는 하나님의 아내가 되는 동시에 아담의 아내도 되는 것입니다. 부부가 된 아담과 해와가 사랑을 나누면 그 사랑은 비록 아담과 해와 두 사람이 나누는 것이지만, 내적으로는 실체인 아담의 생식기와 무형인 하나님이 생식기가 일체를 이루어 해와와 사랑을 나누는 격이 됩니다. 그렇게 아담과 해와가 하나 되었을 때, 그 가정의 이상은 하나님의 가정 이상이요, 거기에서 태어난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2) 부자의 관계        

 존재세계에는 많은 법도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근본적인 법도는 부자(父子)의 법도입니다. 천지(天地)의 근본이 부자관계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녀를 낳아서 평생 동안 수고하여 길러주신 이상으로 그 부모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본연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연의 자리에서 본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부자의 관계입니다.

 

몸과 마음의 관계는 지체 내에서 벌어지는 내·외적인 관계이고, 부자의 관계는 보이지 않는 내부의 관계가 보이는 외부의 관계로 전개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심정에서 출발한 참사랑이 참생명으로 전개되고 다시 참혈통으로 연결되는 것이 부자의 관계입니다. 참사랑은 직단거리를 통합니다. 따라서 부모와 자녀는 직단거리를 통해 참사랑을 연결하는 존재세계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입니다.

 

(1) 자녀가 생기는 네 가지 원칙     

 첫째, 자녀는 부모의 사랑에 의해서 생겼습니다. 부모의 사랑이 동참한 자리에서 자녀가 생깁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랑하는 자리는 누구도 개입할 수 없습니다. 자녀도 개입할 수 없고, 부모도 개입할 수 없습니다. 부모가 절대적인 사랑을 하는 자리에서만 자녀가 생기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이 없는 자리에서는 자녀가 생기지 않습니다. 자녀는 부모의 사랑이 동참한 자리에서 탄생했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는 위대한 존재입니다. 생명이 부모의 사랑에서 왔으니 사랑만이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먼저냐, 생명이 먼저냐.’를 따진다면 사랑이 먼저입니다. 생명이 있기 때문에 사랑도 있다는 사람이 많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생명이 있게 된 근원은 사랑입니다. 사랑에 의해서 내가 생겼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은 다르지 않습니다. 근본을 찾아가면 아버지 사랑의 본체도 한 분입니다. 그 분은 존재의 본체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는 아버지·어머니의 요소와 속성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본성상과 본형상, 그리고 본양성과 본음성이라는 이성성상입니다. 그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분립해서 실체화한 것이 바로 아버지(남성)와 어머니(여성)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놓고 보면, 하나님의 자녀인 남자와 여자의 사랑은 소생적(蘇生的) 사랑이고, 거기서 태어난 아들딸에 대한 사랑은 장성적(長成的) 사랑입니다. 장성적 사랑을 통해 손자와 손녀가 태어났을 때, 그 손자와 손녀에 대한 사랑은 완성적(完成的)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본체이시지만 혼자서는 사랑의 결실을 이룰 수 없습니다. 자녀가 있어야 하고, 반드시 그 자녀가 결혼해서 아들딸(손자·손녀)을 낳아야 합니다.

 

둘째, 자녀는 부모의 것으로 생겼습니다. 나의 것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머니는 사랑을 통해서 아버지로부터 생명의 씨인 0.1퍼센트의 정자를 받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로부터 정자를 받아서 99.9퍼센트의 뼈와 살과 피와 성격까지 전부를 투입하면서 열 달 동안 복중(腹中)에서 기릅니다. 모든 생명체는 어머니를 통하지 않고서는 절대 태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가 위대한 것입니다.

 

나는 부모로 인해 생기고 태어났습니다. 여기에는 나의 의사(뜻)가 개입되지 않았습니다. 나의 마음이 개입되어 내가 생긴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부모로 인해 태어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위주로 한 부모주의(父母主義)는 있을 수 있지만, 이기심과 개인을 위주로 한 개인주의(個人主義)는 있을 수 없습니다. 본연의 인간으로 돌아가려면 부모주의로 돌아가야 합니다.

 

모든 생명체는 부모로부터 탄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도 부모로부터 생기고 복중(腹中)에서부터 성숙해서 지상생활을 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태어납니다. 부모가 없다면 생명체는 태어나지 않습니다.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부모를 근본으로 해서 탄생했기 때문에 자식은 부모의 온전한 모습을 닮아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셋째, 상대를 위하여 생겼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위해 태어났고, 여자는 남자를 위해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남자는 여자를 위하여 살고, 여자는 남자를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복중에서 생길 때부터 남자는 여자를 위하여 생겼고, 여자는 남자를 위하여 생겼습니다. 또 자식은 부모를 위하여 생겼고, 부모는 자식을 위하여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이상, 하나님의 창조하신 설계도가 이미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생길 때부터 남자는 여자를 위해서, 여자는 남자를 위해서,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자식은 부모를 위해서 생겼습니다. 모든 것이 상대를 위해서 생겨난 것이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창조의 설계도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살기 위해서는 나도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야 합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한 요한복음 14장 20절의 말씀은 아버지가 내 안으로 찾아온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인류역사상 수많은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노력했지만, 실제로 그 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몰라서 그 자리까지 가지 못했습니다.

 

넷째, 영생을 위하여 생겼습니다. 영생을 위해 산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지상생활이 중요하게 느껴지니까 우리는 살기 위해서 몸부림칩니다. 사람들은 하나의 명예를 얻기 위해서도 일생 동안 수고합니다. 아무리 수고해서 명예를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100년이 지나면 다 이 지상에 두고 가야 합니다.

 

영원한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세계가 아닙니다. 영원한 세계는 존재하다가 없어지지도 않고 그 세계가 싫다고 도망갈 수도 없습니다. 힘들다고 해서 죽을 수 있는 그런 세계가 아닙니다. 피할 수도 없고, 없어지지도 않는 세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사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인간은 본래 영생을 위해 생겼습니다. 속사람인 영인체(靈人體)는 육신이 생기는 것과 동시에 형성됩니다. 인간은 영생을 위해서 생겼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 태어났으나 하나님을 모르니까 영계도 없고 하나님도 없다고 부정하다가, 신앙에 입문해 정신을 차리고 영계에 대한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영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준비해야 합니다.

 

참사랑은 구불구불 가는 것이 아니라 직단거리를 통합니다. 참사랑은 하나님의 본체 속에 있는 사랑인데, 그 사랑이 직단거리를 통한다는 것입니다. 그 점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아담도 한 점, 해와도 한 점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남성과 여성의 두 속성이 참아버지와 참어머니로서 실체화하는 자리가 아들딸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참사랑의 직단거리입니다.

 

아담과 해와가 완성하여 하나님을 닮은 절대성의 실체가 되면, 그 둘은 만나서 참사랑으로 하나가 됩니다. 거기에서부터 하나님을 닮은 실체의 재창조가 벌어집니다. 그때부터 한 점에서 두 점으로 연결되어 직선이 됩니다. 두 점만으로 연결된 선은 영원성을 띨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점인 하나님을 중심으로 형성된 두 점은 원을 형성하기 때문에 영원성을 갖게 됩니다.

 

언제, 어디든 중심이 있는데, 그 중심은 늘 하나입니다. 중심은 둘이 될 수 없습니다. 아담의 중심도 하나, 해와의 중심도 하나, 그 둘이 만나도 중심은 하나뿐입니다. 그 한 중심이 영원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모입니다. 부자의 관계는 절대적인 종적 관계이기 때문에 그 관계는 누구도 뗄 수 없고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천지는 변하더라도 부모는 변경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라는 자리는 천지가 변하더라도 변경할 수 없습니다. 참사랑은 횡적으로 보더라도 직단거리를 통합니다. 그래서 참사랑에는 잘못된 사랑이나 거짓된 사랑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완성한 아담은 하나님의 몸이면서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완성한 해와는 하나님의 딸이면서 하나님의 부인도 되기 때문에 완성한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과 함께 영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담과 해와의 결혼은 하나님의 결혼이 되고, 아담과 해와가 결혼하는 시간은 실체 하나님이 현현하는 순간입니다. 또 아담·해와의 첫사랑은 하나님의 첫사랑이 됩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지금까지 체(體)를 쓰고 실체로 한번도 사랑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정자의 먼 여행길이 시작된 것입니다.

 

남자가 태어나서 생식기를 통해 씨를 심어 영원히 계대(繼代)를 번식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다면 영원히 한을 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당신의 체를 쓰고 정자를 심어서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딸이라 할 수 있는 실체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참부모님이 현현하심으로써 한스러운 역사가 마감되고 비로소 하나님의 이상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2) 인간 최고의 소망           

 모든 자녀는 부모가 있어야 존재합니다. 부모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한편 부모도 자녀가 있어야 존재합니다.

사람은 반드시 누군가의 자녀로 태어납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소망하는 것이 많지만 그 중에서 제일 중요한 소망은 좋은 신랑, 또는 좋은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식을, 어떤 사람은 돈을, 어떤 사람은 권력을, 어떤 사람은 명예를 자기 나름대로 소망할 수 있습니다.

 

부모도 자식을 대해 ‘이 아이는 용모가 단정하고, 말을 잘하고, 내놓고 자랑할 수 있는 인품을 갖추었으니 훌륭한 대통령이나 장관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런 소망을 갖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외적인 소망에 불과합니다. 자녀는 먼저 좋은 신랑감, 또는 좋은 신붓감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는 아들이 태어나면 좋은 신랑감으로 키워야 하고, 딸이 태어나면 좋은 신붓감으로 키워야 합니다. 그 자녀는 아들로 태어났으면 좋은 신랑감이 되어야 하고, 딸로 태어났으면 좋은 신붓감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좋은 학벌을 갖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좋은 신랑감, 좋은 신붓감으로 자라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렇게 자란 남성과 여성이 만나면 참된 부부가 되고 나중에는 참된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자녀가 ‘나는 커서 우리 아빠·엄마 같은 사람이 되어야지.’ 하는 푯대가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가 하는 것을 보고 딸이 ‘아빠 같은 사람을 남편으로 만나면 나는 평생 행복하겠구나.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 만나서 우리 어머니가 행복하시구나.’하고 또 아들은 ‘우리 어머니 같은 사람을 만나면 내 평생 행복한 가정을 가질 수 있겠구나! 우리 어머니 같은 사람을 만나서 우리 아버지도 행복하시구나.’ 하는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길러야 합니다.

 

사람이 다 컸다고 해서 모두 다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다워야 올바른 사람입니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좋은 신랑감, 좋은 신붓감이 되고, 그 다음 좋은 남편, 좋은 아내가 되는 것입니다. 좋은 남편, 좋은 아내가 사랑을 하여 아들딸을 낳게 되면 좋은 아버지가 되고 좋은 어머니가 됩니다. 그것이 인생길입니다.

 

대통령도 낮에는 나라의 직무를 보지만 밤이 되면 가정으로 돌아갑니다. 한 여인 앞에 남편으로 돌아가고, 아들딸 앞에 아버지로 돌아가고, 손자 손녀 앞에 할아버지로 돌아갑니다. 그게 가정입니다. 누구나 가정에서 태어나 가정에서 성장합니다. 거기에 행복과 기쁨과 소망이 있습니다.

 

인간은 어두워지면 가정으로 돌아가고, 날이 새면 다시 일터로 가서 일하고 밤이 되면 또 가정으로 돌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터에서 피로가 쌓이더라도 가정에 돌아가면 그 피로가 풀어져 다음날 또 일하러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거기에 심정이 있어야 하고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자식은 어머니의 젖을 먹고 성장합니다. 젖만 먹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사랑을 먹고 큽니다. 어머니의 심정, 어머니의 사랑, 어머니의 인격을 아이를 키울 때에는 심정과 사랑과 인격을 주어야 합니다. 아기가 오줌똥을 싸도 좋은 자리 나쁜 자리, 진자리 마른자리 다 가려서 키워야 합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충성과 효성과 열성을 다해 아기에게 쏟아부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아기들도 부모 앞에 충효의 도리를 다합니다. 먼저 보여주고 행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런 자식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충·효·열로 자식을 심었다면 충·효·열을 실천하는 자식이 나옵니다. 똑같은 열매가 나오는 것입니다. ‘부모가 나를 위해서 이렇게 사셨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될 때 그 자식의 마음속에 부모가 정착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부모에게 충·효·열을 돌리게 됩니다.

 

충(忠)은 마음(心)의 중심(中)이 부모라는 뜻입니다. ‘내가 부모로부터 생겼고 부모가 희생하면서 나를 길러주었구나, 부모가 나를 위해 봉사하면서 모든 것을 다 바쳐 길러주었구나, 나를 가르쳐 주시고 좋은 아들딸이 되게 하기 위해서 부모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방패가 되어 주었구나.’ 하고 깨달을 때 그 자녀에게는 부모가 마음의 중심이 됩니다.

 

친구나 스승이 마음의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의 중심은 부모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중심을 세우는 것이 충(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효충(孝忠)이라 하지 않고 충을 앞세워 충효(忠孝)라고 합니다.

 

마음의 중심이 부모인데, 부모를 확실히 알지 못하면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천주의 핵이 가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정에서 내가 생겼습니다. 가정의 질서가 바로 세계의 질서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낳아준 부모가 그런 자리에 있지만 사실 그 부모의 근본은 하나님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낳아준 부모가 하나님 대신이므로 자신의 부모를 모시고 섬기면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나를 낳아준 부모가 내 마음의 중심이라면 그 중심의 근본은 하나님입니다.

 

효(孝)는 내 마음과 뜻과 성품과 생명까지 다해서 내 마음의 중심되는 부모를 위해 살겠다고 하는 마음입니다. 그것이 횡적으로 연결되면 열(烈)이 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체를 투입해서 부모를 섬기려는 마음이 충과 효와 열인데, 그 충·효·열은 부모를 아는 데서부터 본성으로 싹트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알고 모시는 심정적 인간이 됨으로써 비로소 충·효·열을 지니게 된다는 말입니다. 충·효·열을 지녀야 비로소 자녀로서 자격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녀가 자격을 갖추게 되면 부모는 그 자녀를 통해서 부모의 이름을 갖고 부모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자리는 영광의 자리요, 안식의 자리요, 평화의 자리요, 기쁨의 자리요, 행복의 자리입니다. 부모가 그 자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식이 먼저 자식의 자격을 갖추어 그 부모를 모시고 섬겨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인간이 완성하지 않으면 부모의 자리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기 이전부터 부모의 이상을 지니셨지만, 인간이 본연의 가치를 완성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은 이름만 부모일 뿐 부모의 자리에 들어가서 안식할 수 없습니다.

 

인간 조상 아담·해와의 타락으로 그런 하나님의 자리에 사탄이 들어갔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에게 슬픔의 대상이 되었고, 고통과 눈물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한 세계에는 하나님이 머무르실 수 없습니다. 타락한 세계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서러워하시고, 탄식하시고, 눈물 흘리시고, 괴로워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타락론’에서 밝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