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리본체론 - 총서론

2013. 1. 6. 21:36참사랑 영원까지/원리 본체론

총서론

 

원리본체론을 공부하는 이유

역사상 인류에게는 많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각계의 지도자들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종교계를 비롯하여 정치·경제·언론계가 동원되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저질러진 사소한 문제가 확산되어 이제는 세계적인 문제가 되고, 천주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아는 사람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1. 현실세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은 누구나 본성이 소망하는 진정한 자유·평등·평화·행복을 누릴 수 있는 이상세계를 꿈꾸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개인을 비롯하여 가정·단체·국가·세계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현실세계에는 갈등과 대립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인간에게는 이상세계가 찾아오지 않습니다.

 

1) 현실세계의 문제

현실세계의 문제란, 최근에 일본이나 남미, 동남아 등지에서 발생한 지진과 해일, 지구 온난화 등 자연재해뿐만 아니라 종족·국가 간의 분쟁, 기아, 불균등한 분배, 질병 등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포함합니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이런 문제는 과거 우리의 조상들이 고통을 당하고 고민했던 문제이기도 하고, 더 나아가 우리 후손들이 겪을 수도 있는 문제들입니다. 그래서 ‘통일원리’는 인류역사상 최대 관심사인 ‘현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가정의 문제

현실의 문제 중에서 가장 큰 문제는 가정(家庭)의 문제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사랑으로 출발하는 것이 가정입니다. 그런 가정이 붕괴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부부의 갈등 때문입니다.

부부의 갈등은 개인에서부터 벌어집니다. 내 마음과 몸이 하나 되지 못하고 싸웁니다. 마음과 몸이 하나 되지 못한 채 대립하고 갈등하는 남성이 여성을 만나 같이 살게 될 때, 부부라는 이름을 갖지만 서로는 하나되지 못하고 대립과 갈등이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부부는 갈등과 대립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살게 되고, 거기서 태어난 아들딸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와 자식도 하나 되지 못하고 서로는 갈등하고 대립하는 속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에는 이혼이나 불륜, 가정의 붕괴를 초래합니다. 모두가 가정에서 사랑의 질서가 무너지면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현재 무질서한 성문화(性文化)는 세계 도처에서 만연하고 있습니다. 성(性)을 상품화하고, 동성애자가 늘어나고, 부부가 다른 배우자와 맞바꾸어 성관계를 갖는 등 무질서한 성행위가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근친상간(近親相姦)까지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실정입니다. 성을 향략의 도구로 삼는 것입니다.

 

한편 그것을 좋지 않게 보고 ‘결혼하지 않겠다.’며 독신주의를 주장하거나 ‘결혼해도 아들딸은 낳지 않겠다.’고 하는 젊은이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불건전한 성문화는 가정의 붕괴를 초래할 뿐만 아니라 건전한 생각을 지닌 사람들까지 가정과 자녀의 가치를 왜곡하도록 부추기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부모의 사랑에 의해서 태어나고 자랍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어머니는 그 아기를 안고 젖을 먹여 키웁니다. 아기는 젖만 먹고 크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사랑도 먹고 큽니다. 아기는 그렇게 성장하면서 부모의 사랑을 중심으로 가정에서 자신의 성장과 함께 사랑을 키워갑니다.

 

사랑의 뿌리가 되는 심정을 키우는 동시에 심정적인 생활을 하도록 하는 훈련장이 가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을 사랑의 학교라고 하며, 심정의 훈련장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갈등과 대립은 개인에서 끝나지 않고 곧 가정의 갈등과 대립으로 확대되고, 사회·국가·세계로 확대됩니다. 그것은 가정이 국가와 세계의 기본단위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현실세계에는 많은 문제가 있지만, 가장 심각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 가정의 문제입니다.

 

청소년의 문제

그 다음은 청소년(靑少年)의 문제입니다. 청소년은 가정에서는 사랑받는 자녀이며서 장차 사회와 국가와 세계를 책임질 미래의 희망입니다. 그런 청소년이 바로서지 않으면 그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는 미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청소년의 윤락(淪落)이 매우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청소년의 일부가 윤락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참된 사랑을 도외시합니다. 쉽게 말하면 사랑을 상품화합니다. 인체에서 가장 거룩하고 귀한 것이 생식기(生殖器)인데, 그것을 사고파는 상품으로 만든다면 그보다 더 비참한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청소년들의 윤락이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질서를 바르게 세우지 못해서 나타난 병이 에이즈(AIDS)인데, 에이즈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심각하게 다루는 질병 중의 하나입니다. 에이즈에 걸리면 치료할 방법이 없습니다. 약도 없습니다. 수혈로 인한 감염도 간혹 있긴 하지만 에이즈에 걸린 사람과 성적 관계를 맺은 사람은 100퍼센트 에이즈 보균자가 됩니다.

 

유엔의 보고에 따르면, 아프리카의 어떤 나라는 국민의 34퍼센트가 에이즈 보균자라고 합니다. 그대로 놔두면 그 나라는 얼마 못가서 멸망할 것입니다.

 

한국에도 보균자가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에이즈 문제를 방치한다면 인류는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이즈는 오늘날 땅 위의 음란을 정리하기 위해서 내린 하늘의 형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학원의 문제

그 다음은 학원(學園)의 문제입니다. 학교는 우리 아들딸들을 미래의 지도자로 기르고,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가르치는 신성한 장소입니다. 학교가 지식을 가르치는 장소인지는 모르지만 인성 교육을 하는 학교는 요즘 별로 없습니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정말 좋은 남자, 정말 좋은 여자, 정말 좋은 신랑감, 정말 좋은 신부감, 정말 좋은 아버지, 정말 좋은 어머니로서 좋은 가정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인간을 중심한 교육은 거의 받지 못합니다.

 

과거에는 스승을 부모같이 여겼는데 오늘날에는 스승을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학생들이 의견이 맞지 않는다고 교수와 싸우려 하고, 연구실 문에 못을 박아 교수가 못 들어가게 하거나 학생들이 연합해서 교수를 구타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요즈음은 초등학생조차 선생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합니다. 선생은 선생대로 교육하고 학생은 학생대로 시간을 보낸다는 것입니다.

 

또 초등학생이 칼을 들고 친구를 죽이기도 하고, 거리에 나가서 잔혹한 범죄행위도 벌입니다. 경찰도 그것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청소년 문제뿐만 아니라 학교 교육의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교육 받을 수 있는 권리도 행복의 조건에 포함시켜야만 합니다. 머리가 좋고 품행이 단정해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젊은이가 돈이 없어서 공부를 못하고 있다면 사회적으로도 불행한 일입니다. 그 젊은이에게는 반드시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져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놓고 볼 때 오늘날 학교 교육의 문제가 심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사의 문제

다음으로 노사 문제(勞使問題)가 있습니다. 좋은 환경에서 일하고 많은 봉급을 받아 가정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 직장인의 소망입니다. 회사의 사정은 사원의 마음을 충족시켜 주려고 노력해야 하겠지만, 그 회사 사원들도 사장을 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서로 위하는 마음 없이 자기의 욕망과 이익만 채우려 한다면 노사끼리 분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물론 노동자가 자신의 인권과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합법적인 노동쟁의를 하는 것은 정당한 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법 투쟁이나 불법 파업은 경제적 손실도 크거니와 인명 피해도 날 수 있는 위험한 행위입니다. 노사 갈등이 벌어지면 처음에는 한 회사의 문제에 그치지만 파업이 지속되면 노사 붕괴가 일어나 그 지역의 문제로 변하고, 국가에 커다란 경제적 손실을 끼치기 때문에 결국에는 국가적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불법적인 노사 문제는 심각한 사회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종 차별

그 다음에 인종차별(人種差別)의 문제가 있습니다. 자유와 평등을 누려야 할 동일한 인간으로 태어났는데, 인종이 다르다는 점만으로 경제적 차별뿐만 아니라 인체에 상해를 입히는 등 많은 문제가 벌어지는 것을 볼 때 인종 차별도 대단히 심각한 현실의 문제입니다.

 

국경의 문제

그 다음에 국경의 문제도 있습니다. 국경선은 그저 막연하게 ‘어느 나라를 구분하기 위한 선이다.’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하나님을 중심한 본연의 세계에서 볼 때 이것은 크게 잘못됐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을 제외한 대부분의 존재에게는 국경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곤충도 국경이 없고, 새들도 국경이 없고, 짐승도 국경이 없습니다. 바다에 사는 물고기도 국경이 없습니다. 그런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국경선을 긋고 그것 때문에 서로 싸우고 상대를 죽이기도 합니다.

 

평화를 바라는 것은 인간의 본심이지만 이러한 현상을 놓고 볼 때 진정한 평화를 실현하기는 대단히 어렵다고 봅니다. 왜 이런 세상이 되었는가,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국경 문제는 현실세계의 또 하나의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종교의 문제

그 다음에 종교(宗敎)의 문제도 있습니다. 종교는 선(善)을 추구하는 인간의 양심을 지도합니다. 선에는 평화도 있고 자유도 있고 행복도 있고 기쁨도 포함됩니다. 진정한 평화의 세계, 진정한 행복의 세계, 진정한 자유의 세계를 구현하는 것이 인류의 꿈이지만, 오늘날 그런 세계를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세계 인구가 2011년 말로 70억이 되었는데 그 가운데 78퍼센트 정도가 종교인입니다. 그들은 차원은 다른지언정 한결같이 양심을 가지고 선(善)을 추구합니다. 인간을 양심대로 살게 만드는 것이 종교라면 그 세계는 행복한 세계가 되고, 평화로운 세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종교 때문에 싸우고 , 종교 때문에 피 흘리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 오늘날 종교는 종교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종파가 다르고 교파가 달라서 교회가 갈라집니다. 서로 반목하고 갈라지는 것은 종교의 목적이 아닙니다. 종교가 세계의 많은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오히려 문제를 만들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종교가 추가하는 것은 자유와 평화와 진정한 선(善), 싸움이 없는 행복의 세계인데 그러한 본질을 잃어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영계의 문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영계(靈界)의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인류는 영계에 대해서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영계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될 것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 반드시 죽습니다. 먼저 ‘죽으면 가게 된다는 영계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영계를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의 지상생활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 하는 문제는 인간이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성경 사도행전 2장 17절에도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남녀노소 모두 영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경우 하나님으로부터 온 은사인지 아닌지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면 인간의 삶이 비정상적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그보다 더 무서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영계에 대한 문제는 우리가 중요하고도 심각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입니다. 그래서 현실세계의 문제 중의 하나가 영계에 대한 문제입니다.

 

사상의 문제

그 다음은 사상(思想)의 문제입니다. ‘민주주의냐, 공산주의냐? 좌익이냐, 우익이냐? 유물론이냐, 유신론이냐?’ 이러한 싸움이 사상계에서 비롯된 인류의 마지막 싸움입니다.

이 지구상에 많은 사람이 살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따지면 둘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민주주의 편이요, 또 하나는 공산주의 편입니다. 물론 그 중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사람은 어느쪽으로든 기울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여튼 공산주의는 무신론(無神論: 초자연적인 것, 즉 각종 영혼, 선, 내세 등에 대한 신앙을 거부하는 견해)을 주장하고, 민주주의는 유신론(有神論)을 주장하면서 두 편으로 갈라져 싸우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지나간 인간의 역사 속에서 ‘정신이 먼저냐, 물질이 먼저냐?’를 놓고 수많이 논쟁을 벌여왔습니다. 민주주의나 공산주의는 어떤 철학이나 이론을 중심해서 집대성한 하나의 제도요 조직입니다. 그 중에서 민주주의는 제도의 집단이라 하고 공산주의는 사상의 집단이라 합니다.

 

제도의 집단은 그 체제가 흔들리면 아무런 힘도 없이 무너집니다. 그러나 사상의 집단은 그 체제가 무너지고 제도가 무너지더라도 개개인이 자신의 사상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여간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산주의가 무서운 것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남북으로 대치하고 있는데 북한은 공산주의체제요, 남한은 자유민주주의체제입니다. 남한은 북한과 통일하려고 하지만 사실은 남한이 더 문제입니다. 북한은 이미 하나의 사상으로 전 국민이 통일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한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 다양한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유가 있어서 좋지만 그 자유 때문에 문제가 많아진 것이 민주주의 세계입니다.

 

민주주의는 자유와 방종(放縱)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방종을 자유로 알고 제멋대로 행동하다가 민주주의는 망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의 본성을 지도할 수 있는 사상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 때문에 인간의 본성을 잃어버리고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로 치닫고 있는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나 공산주의는 모두 철학이 뒷받침되고 있다고 보는데, 공산주의는 자기 나름의 확고한 진리라고 주장하는 철학을 가지고 있지만, 민주주의는 그런 확고한 철학이 없습니다.

 

일부 정치권에서는 어떤 사상을 가지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공산주의처럼 그 나라의 국민 전체가 믿고 따를 만큼 확고한 철학을 지닌 체제는 없습니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제도의 집단이고, 공산주의는 사상의 집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공산주의자가 유물사상을 신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르지만 민주주의 세계에도 유물사상을 신봉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문제가 심각합니다.

 

공해의 문제

공해(公害)의 문제도 있습니다. 과학의 발달로 인해 오늘날의 인류는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로 환경오염(環境汚染), 지구의 온난화 현상(溫暖化現象) 등 공해의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한국에서도 그동안 동해에서 잡히던 물고기가 다른 바다로 이동해서 더 이상 잡을 수 없다고 합니다. 물고기가 다른 곳으로 옮겨간 이유는 온난화 현상으로 지구 환경에 변화가 왔기 때문입니다. 수온이 서서히 올라가기 때문에 찬물에서 사는 물고기가 그 자리를 떠나고 있는 것입니다. 바다를 연구하고, 물속의 환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것을 심각한 현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공해 문제 또한 심각하게 인류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대립의 문제

그 다음은 세계적인 대립의 문제입니다. 세계의 문제는 아시아의 문제와 중동(中東)의 문제로 집약됩니다. 아시아에는 한반도(韓半島)의 문제가 있습니다. 한반도에서는 조상의 뿌리도 같고 언어도 같은 한민족(韓民族)이 남과 북으로 갈라져 냉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치체제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질적인 사상으로 분립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뿌리는 아담·해와의 타락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아담·해와의 타락에 대해서는 ‘타락론’에서 밝힘).

 

인간의 조상인 아담·해와는 타락으로 참부모가 되지 못하고 거짓된 부모, 비원리적 존재(非原理的存在)인 선악(善惡)의 모체(母體)가 되었습니다. 선악의 모체로 비원리적인 존재가 된 아담·해와는 선과 악을 분립하여 악을 제거하지 않고는 원리적인 하나님을 직접 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상징적으로 그의 두 아들을 갈라 세웠습니다. 첫아들 가인을 사탄 편에, 둘째아들 아벨을 하나님 편에 각각 분별하여 세운 것입니다.

 

아담·해와 가정에서 비롯된 분별 사례는 역사와 함께 대립을 초래하는 주류사상을 이루어오다가 현세에 와서 하나는 공산주의로, 또 하나는 민주주의로 양분되었는데, 마지막에는 한반도가 민주체제와 공산체제로 분단된 대립의 축이 되었습니다.

한편 중동의 문제는 종교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동인들의 조상은 성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드릴 제물을 제대로 쪼개지 않았기 때문에 애급(지금의 이집트)으로 들어가 고역을 치르고 400년 만에 그의 후손이 고역을 끝내고 귀환하게 됩니다(출애굽기 15장 9~13장). 그 후손 중에서 예수님이 탄생했는데, 당시의 지배권을 행사하던 유대 민족과 유대교가 그 분을 돌아가시게 했기 때문에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중동은 오늘날까지 종교적 갈등을 겪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 유대교에서 가톨릭으로,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종교적 갈등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대로 다시 오시지 않으면 중동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철학의 문제

그 다음으로는 존재와 관계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철학(哲學)의 문제입니다. 철학은 인생과 우주의 근본문제를 밝히는 중요한 학문입니다. 오늘날 철학은 우리 존재와 관계의 문제를 분명하게 밝혀야 합니다.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가? 존재한다면 그것이 보이는 것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데 하나님은 계신가? 계시다면 하나님은 인간과 어떤 관계인가? 하나님과 만물은 어떤 관계인가? 인간과 만물은 어떤 관계인가? 남자와 여자는 왜 태어났으며 서로 어떤 관계로 살다가 또 어디로 가는가?’ 철학은 이런 근본 문제를 밝혀야 합니다. 그것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 철학작들이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평화와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행복도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종교·정치·경제계는 물론 학계·언론계·예술계 등 모든 방면의 지도자들이 동원되어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했습니다. 금방은 해결한 것 같지만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가 더 커졌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생관의 문제

그 다음은 인간이 어떻게 올바르게 사느냐 하는 인생관(人生觀)의 문제입니다. 인생관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미래가 달라집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존재이기 때문에 올바르게 살려면 하나님이 지으신 목적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삶입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과 눈에 보이는 몸이 공존하는 이중구조(二重構造)로 되어 있습니다. 관계성을 놓고 보면 마음이 주체(主體)이고, 몸은 대상(對象)입니다. 몸과 마음을 가진 사람의 구조는 과거나 현재에도 그랬고 미래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과 눈에 보이는 몸이 인간이라는 개체 속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겉으로는 하나로 통일된 것 같지만 사실은 내부에서 마음과 몸이 서로 갈라져 많은 갈등과 대립과 투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장 22~24절)하며 탄식했습니다.

 

신관의 문제

현실세계에서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을 어떻게 아느냐, 하나님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신관(神觀)입니다. 신관을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까지 인류는 시대마다 자기들이 아록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당면한 현실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명쾌한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세계의 문제를 해결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근원적 존재인 하나님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인류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해결 방향이 좌우됩니다. 성경에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잠언 1장 7절)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면 모든 것을 알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인생관이 다릅니다. 인생관뿐만 아니라 국가관도 다르고 세계관과 역사관과 우주관도 다릅니다. 좁게는 결혼관과 교육관도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 한 집에 살고 있는 부모와 자식도 그 관점이 다르고 부부간에도 관점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같은 교회에 나가는 신앙인이라도 하나님을 얼마나 정확하게 알고 있느냐에 따라 각자의 인생관과 결혼관, 그리고 역사관과 국가관과 세계관과 우주관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2) 왜 문제가 생겼는가?

문제의 발단은 인간 조상 아담·해와의 타락입니다. 타락으로 인해 현실만이 아니라 역사상에도 크고 작은 문제가 이어졌습니다.

타락으로 인간은 마음과 몸이 갈라져 개체 내에서 갈등과 대립과 투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런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살더라도 서로는 갈등과 대립과 투쟁을 벌이고 그것이 가정의 붕괴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나도 타락한 아담과 해와의 후손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갈등과 대립, 투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순을 지닌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본래부터 마음은 주체이고 몸은 대상입니다. 몸은 마음의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지으신 본연의 모습인데, 몸이 그렇게 따라주지를 않아 늘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타락으로 본심(本心)을 잃어버린 결과입니다.

 

본심은 최고의 선(善)입니다. 인간은 본심에 따라 생활할 때 기쁨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간은 그 본심을 잃어버리고 사심(邪心)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아담·해와가 사탄과 관계를 맺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사심은 자기중심으로 살려고 하는 마음인데, 그것이 사탄으로부터 온 악(惡)의 뿌리입니다. 사심을 따라 행동하면 악행이 되고 악행은 슬픔을 초래합니다. 성경에도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야고보서 1장 15절)고 했습니다. 본심의 욕망을 추구하며 행복해지고, 사심의 욕망을 추구하면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본심과 사심은 모두 인간의 마음속에서 출발하지만, 이 둘은 서로 동기와 목적과 방향이 다릅니다. 그래서 인간은 모순된 존재요, 선악의 모체입니다. 바울도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로마서 7장 22~24절)하고 한탄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선의 본체이기 때문에 선악의 모체가 된 타락인간을 직접 상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한 주인만 상대하도록 한 원리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으로 두 주인을 상대해야 하는 비원리적(非原理的) 존재가 되었습니다. 인간에게 타락성(墮落性)이 생긴 것입니다.

 

타락성은 인간의 원죄를 만든 사탄의 악성입니다. 시기와 질투·혈기·교만·고집·증오 등이 타락성입니다. 하나님에게는 그런 성품이 없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는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의 나라, 천국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원리의 본체 되시는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입니다.

 

3) 타락이 초래한 인생의 문제

인간은 타락으로 참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창조 당시부터 하나님이 부여한 인간의 본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까지 상실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녀를 통해 이루려고 하신 참사랑의 이상가정을 잃어버렸습니다. 먼저 본성을 찾은 인간을 통해 이상가정이 세워질 때, 이상국가가 나오고 이상세계가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지상천국과 천상천국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 다음에 인간은 영육(靈肉)의 무지로 떨어졌습니다. 심령(心靈)과 지능(知能)의 무지상태, 즉 영적(靈的)인 무지와 육적(肉的)인 무지를 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놓고 보면 보이지 않는 마음은 영적이고, 보이는 몸은 육적입니다.

 

영적인 무지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믿고 있는 사람조차도 하나님을 이성적이요 관념적으로 막연히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본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정과 사정을 모릅니다.

 

또 영적인 무지는 인생에 대한 무지입니다.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어떤 목적으로 창조되었는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정체성을 놓고 족보를 들추지만, 근본을 따지다 보면 하나님에게로 올라갑니다. 누구나 존재의 시원(始原)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인간을 창조한 뜻, 즉 창조목적이 있습니다. 창조목적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가치가 부여되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의 가치는 영계에까지 이어집니다. 인간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지상생활은 길어야 100년입니다. 인간이 죽으면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나님에게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영혼은 영계로 가는 것입니다. 영계는 무한하고 영원한 세계입니다. 그 세계는 시간과 공간으로 측정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타락으로 자기의 가치를 상실한 인간에게 선악의 문제도 야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문제들을 바로잡으려고 종교를 세우셨습니다. 타락이 없는 본연의 세계에는 종교가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본질 속에는 종교가 없습니다. 타락으로 본연의 모습을 잃고 무지로 떨어진 인간이 제자리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살도록 하기 위해 종교가 필요한 것입니다.

 

한편 육적인 무지는 물질세계의 근본을 모르는 것입니다. 물질은 원자 또는 분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원자나 분자의 구성요소는 에너지입니다. 그렇다면 에너지의 근본은 무엇인가? 과학자들도 물질세계의 근본을 모르고 있습니다. 물질로 이루어진 우리의 몸도 분석해 보면 에너지체입니다. 물질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마음도 에너지체입니다. 그 에너지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육적인 무지입니다.

 

자연의 법칙을 모르는 것도 육적인 무지에 속합니다. 자연의 법칙은 인간이 어떤 힘을 가해도 변경할 수 없고 막을 수도 없습니다. 인간도 그 법칙에 순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밖에 눈이 쌓이고 찬바람이 불어 사람들이 털옷을 입고 다니더라도 이미 입춘이 지난 절기라면 봄이 오고 있는 중입니다.

 

땅속에서 새싹들은 대지를 뚫고 나올 준비를 하고 나뭇가지에서도 움을 틔울 준비를 합니다. 봄이 되면 식물들은 어김없이 싹이 트고 여름에는 무성해져 열매도 맺습니다. 또 가을이면 낙엽이 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습니다. 그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그런 법칙이 어디서 왔는지, 누가 그런 법칙을 세웠는지를 모릅니다. 그것을 육적인 무지라고 합니다.

 

인간은 이와 같은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종교와 과학의 두 분야로 나뉘어 영적인 세계와 육적인 세계를 규명해 왔습니다. 종교는 영적인 세계의 본질을 추구하고, 과학은 물질세계의 본질을 추구해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와 과학이 통일된 목표를 지향할 때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실현되고 행복의 세계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가치관을 추구하는 종교와 보이는 목적관을 추구하는 과학이 하나 되어야 우리 인간은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와 과학은 통일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종교는 정신세계를 추구하고 과학은 물질세계를 추구하는데, 정신과 물질이 어떻게 하나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종교는 마음의 무지를 깨우치는 역할을 하고 과학은 몸의 무지를 깨우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 두 분야는 상충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마음의 명령과 뜻에 몸이 잘 따라줄 때 행복하지만, 몸이 마음의 뜻과 명령에 역행하면 불행해집니다.

 

종교가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바로 알고, 과학이 물질세계의 참모습을 확실히 밝힌다면 서로는 공감하고 일치된 목표를 지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마음은 주체이고 보이는 몸이 대상인 것처럼 영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종교는 주체가 되고 보이는 물질의 세계를 추가하는 과학이 대상이 됩니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인 종교와 과학이 통일을 이루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4)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이유

역사상 인류에게는 많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각계의 지도자들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종교계를 비롯하여 정치·경제·언론계가 동원되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했습니다.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지엽적으로 대처하다 보니 문제의 근본이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해결된 것 같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문제가 더 커지고 확산되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저질러진 사소한 문제가 확산되어 이제는 세계적인 문제가 되고 천주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아는 사람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창조주 하나님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타락으로 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하나님 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을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도록 바르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길을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 인류는 제3차 세계대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마지막 전쟁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인류의 갈등을 집약하여 사상전(思想戰)으로 끝을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갈등이 발생하면 물질을 통해 무력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이용되어야 할 첨단과학이 전쟁에 동원되어 인명을 앗아갔습니다. 지구상은 누가 더 성능이 좋은 무기를 가지고 더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느냐 하는 첨단무기의 전시장이 된 것입니다. 그런 방법으로는 전쟁에서 진정한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누가 하나님을 올바르게 가르쳐주느냐 하는 사상의 경쟁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을 제쳐놓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믿고 가르치는 성직자가 많지만, 현실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있는 성직자는 많지 않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지식과 생활의 경험을 가지고 자기중심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인간이 자신의 처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만드는 것도 사람이고 문제를 해결해야 할 존재도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를 해결해야 할 당사자가 문제의 근원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인간의 타락입니다.

 

타락으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을 잃어버렸고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근본을 모르는 무지한 인간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인간에게까지 전수된 타락성(墮落性)입니다. 인간이 그런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문제의 해결 방안

모든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통일원리 본체론이 절대 필요합니다. 통일원리 본체론이 출현한 데에는 필연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이 머무는 성전(聖殿)이 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인간 조상 아담과 해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원리권(原理圈)에서 자라고 살도록 하셨습니다. 원칙에 따라 살도록 한 것입니다. 아담·해와는 창조 당시부터 완성된 인간으로 지은 것이 아닙니다. 소생기(蘇生期)·장성기(長成期)·완성기(完成期)라는 성장기간(成長期間)을 거쳐 완성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성장기간은 인간 조상이 하나님의 자녀요, 성전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는 기간입니다. 인간이 완성하여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本質的屬性)인 심정을 닮고 하나님의 절대성 본체(絶對性本體)를 닮으면 그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인간이 자격을 갖추면 하나님과 부자관계가 되고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장성기 완성급(長成期完成級)에서 타락했습니다. 무원리권(無原理圈)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타락으로 인해 본래의 원리권을 이탈하여 한줌의 흙만도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줌의 흙도 하나님의 창조원칙이 적용되어 나타난 결과물입니다. 타락한 인간이 그런 만물보다 못한 자리로 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만물을 앞세워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담을 비롯하여 노아와 아브라함까지의 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입니다.

 

성경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은 아담·해와가 타락한 후 1600년 만에 노아를 중심인물로 세우셨습니다.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창세기 6장 13절)는 말씀과 함께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노아는 그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고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제1의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할 때는 순식간에 떨어졌지만 올라갈 때는 타락하기 전의 자리로 바로 올라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담부터 노아를 세울 때까지 1600년이라는 기간이 걸렸고, 노아 때에는 방주를 중심한 섭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사탄을 중심한 인간은 모두 홍수 심판을 받았고 노아가정의 여덟 식구만 방주에 들어가 심판을 면했습니다. 그런데 노아가정의 여덟 식구만 방주에 들어가 심판을 면했습니다. 그런데 노아의 둘째아들 함의 실수로 인해 노아가정의 방주 중심한 복귀섭리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노아 이후 400년 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3대 제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 시대의 인간들은 노아 때보다 심령이 더 발달했습니다. 또다시 방주를 중심한 섭리를 할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제물을 통해 하나님 앞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제물은 비둘기·양·암소인데 그것을 쪼개서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

세 가지 제물은 아담·해와가 완성해야 할 소생·장성·완성의 3단계를 상징합니다. 그것은 아담가정에서 잃어버린 것과 노아가정에서 잃어버린 것을 아브라함가정에서 다시 찾는 3단계의 복귀과정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비둘기를 쪼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복귀섭리가 원점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삭·야곱을 거쳐 비로소 메시아가 올 수 있는 기대를 세웠지만 사탄세계에는 이미 민족적인 기대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가정적인 기대밖에 세우지 못했는데 사탄세계는 이미 민족을 중심해서 왕이 세워진 것입니다. 거기에 메시아를 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메시아를 보내면 민족의 형태를 갖춘 사탄 편에서 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아브라함의 제물 실수로 그의 후손들이 애급에서 400년 동안 고역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런 기간이 남아 있기 때문에 메시아를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애급에서 400년 고역을 마치고 난 후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애급에서 나오게 됩니다. 애급을 벗어난 모세가 시내산에서 비로소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이 새겨진 석판을 받아서 율법을 중심한 새로운 섭리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섭리역사의 시대를 거쳐 하나님이 1600년 만에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보내주셨는데 이번에는 유대 민족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주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으로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는데 유대인들이 그 복음(福音)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돌아가셨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의 섭리는 2000년을 주기로 반복됩니다. 아담부터 아브라함까지 2000년,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2000년이 걸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가 돌아가신 지 2000년이 되는 때입니다. 다시 오겠다고 했던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라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섭리의 때가 되면 반드시 중심인물을 세우고 그 중심인물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시대에 따라 새로이 선포되는 말씀을 따라가면 구원을 얻고 불신하면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새로운 중심인물이 세워지는 때는 지난 역사를 정리하고 새 역사를 출발하는 전환점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시기를 기점으로 인류역사를 기원전(BC : Before Christ ; 그리스도 이전시대)과 기원후 (AD : Anno Domini, 서기)로 구분합니다.

 

마찬가지로 재림시대에도 재림주님을 중심으로 인류의 타락 역사가 완전히 정리되고 새 말씀과 더불어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하나님 섭리의 시대성으로 봐서 반드시 새 말씀이 나와야 합니다. 새 시대에 주어진 새 말씀으로 감춰진 역사의 비밀이 밝혀질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성서의 예언으로 보아도 새 말씀이 나와야 합니다. 요한복음 16장 25절에 보면,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했고, 요한복음 16장 12절에는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고 싶은 말씀이 많지만 인간이 감당하지 못해서 아직 못 주신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 16장 13절을 보면,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성령이 오시면 장차 이루어질 일들을 보여주신다는 말입니다.

 

재림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때에 유대교인들이 불신해서 뜻을 다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그 뜻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재림주님은 하나님의 비밀을 가지고 오셔서,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말씀하시며 미래에 이루어질 일을 예언하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 10장 11절을 보면,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새 시대가 오면 땅위에 있는 모든 나라의 백성과 그 나라의 주권자에게 가르쳐준다는 뜻입니다.

 

그 새로운 말씀이 바로 ‘통일원리(統一原理)’입니다. 통일원리를 더 새롭게 가르쳐 주는 것이 이 ‘원리본체론(原理本體論)’입니다. 누가복음 5장38절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만일 낡은 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으면 그 맛이 변하거나 부대가 찢어져 다 쏟아지게 됩니다.

 

더러운 타락의 옷을 벗고 깨끗한 본성으로 말씀을 받아야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바로 들을 수 있습니다. 타락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의 새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주시는 말씀을 놓고 자기 생각대로 이러쿵저러쿵 비판하면 그 말씀은 자기 것이 못 됩니다.

 

3. 통일원리의 구조와 중심 내용

‘통일원리(統一原理)’는 참부모님이 밝히신 ‘원리원본(原理原本)’에서 출발합니다. ‘원리원본’을 해설하고 강의하도록 체계화한 것이 ‘원리해설(原理解說)’과 ‘원리강론(原理講論)’입니다. 그 다음에 나온 것이 ‘원리본체론(原理本體論)’입니다.

‘원리해설’과 ‘원리강론’에서 밝히지 못한 내용을 새롭게 가르쳐 주는 것이 ‘원리본체론’입니다. ‘원리본체론’이라 하니까 새로운 이론을 만든 것으로 아는 사람도 있지만 원리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통일원리’는 때가 되어야 밝힐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말씀을 통해 단계적으로 밝혀왔는데, ‘원리본체론’은 참부모님이 마지막으로 밝힌 원리에 대한 말씀입니다.

‘원리해설’과 ‘원리강론’, 그리고 ‘원리본체론’은 모두가 ‘원리원본’을 토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들을 통틀어 ‘통일원리’라고 합니다. ‘통일원리’는 모두 같은 체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통일원리’의 구조와 중심 내용을 알아보겠습니다.

 

‘통일원리’는 전편과 후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편의 중심 내용은 창조원리(創造原理)입니다. 창조원리는 하나님이 이 모든 존재세계를 창조하신 설계도입니다. 창조원리에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룹니다. 하나님이 창조이상을 이루시기 위하여 자기를 전개한 정밀한 설계도에 의해 이 세상을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문제부터 다루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으로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잃어버렸습니다. 성경에는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인류의 죄의 뿌리가 되는 선악과가 무엇인지, 그 선악과를 따먹도록 꾀었던 뱀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밝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타락에 대한 내용을 밝히는 것이 바로 타락론(墮落論)입니다. 잘못된 채로 살고 있기 때문에 바로 가르치는 이론이 타락론입니다. 그러나 타락론은 원리가 아닙니다. 타락의 원인과 결과를 구체적으로 밝힘으로써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길잡이입니다.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유일·불변·영원하신 분으로서 그 분이 세우신 원리도 절대·유일·영원·불변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인간은 타락해서 원리의 실체가 못 되었다 하더라도 그 원리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세우신 원리는 없애거나 변경할 수 없습니다. 그런 원리를 중심으로 인간을 본연의 위치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구원섭리(救援攝理)입니다.

 

타락론 다음으로 이어지는 종말론(終末論), 구주론(救主論), 부활론(復活論), 예정론(豫定論), 기독론(基督論)도 구원의 길잡이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세상의 끝날, 말세(末世)가 온다고 합니다. 말세가 되면 이 타락세계는 불로 다 심판해버리고, 땅을 다 깨버려 하늘에 있는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잘 믿는 성도들은 공중으로 들어올려져 주를 만난다고 합니다. 또 주가 땅에 재림하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땅을 깨버리고 불로 심판하고 사람들이 공중으로 들려 올라가고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떨어진다는 등의 말씀은 비유(譬喩)와 상징(象徵)입니다. 오늘의 기독교가 그것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있지만, 종말론(終末論)에서는 말세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구원섭리는 본연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에 복귀섭리(復歸攝理)라고 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구원받았다는 것은 물에 빠지기 전의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병든 자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병이 깨끗이 나아서 건강한 상태로 회복되었음을 말하며, 죄인이 구원받았다는 것은 죄 없는 본연의 인간으로 돌아간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구원(救援)을 복귀(復歸)라고 하는 것입니다. 두 단어는 똑같이 타락인간이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통일원리’에서는 구원섭리는 곧 복귀섭리라고 합니다.

 

타락한 이 세계의 모든 것은 정리해야 합니다. 잘못된 역사이기 때문에 종말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역사는 준비된 메시아가 와야 정리할 수 있습니다.

구주론(救主論)에서는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이 왜 돌아가셨는지, 왜 다시 오실 수밖에 없는지, 재림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자세히 설명합니다.

 

메시아가 재림하면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섭리(復活攝理)가 있게 됩니다.

기독교인들은 성서의 내용을 글자 그대로 믿고 마지막 재림주가 오실 때 죽었던 성도들이 무덤에서 일어나서 거룩한 성으로 들어가는 줄 압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활은 성도들이 무덤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타락한 인간은 모두 죽었기 때문에 메시아를 통해 접붙여서 다시 살아난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밝힌 것이 부활론(復活論)입니다.

 

죽고 사는 문제, 구원을 받거나 못 받는 문제는 하나님이 다 예정했다고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예정설이 신앙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혼돈을 줍니다. 아무리 열심히 믿어도 태어날 때부터 이 사람은 지옥으로 갈 사람, 저 사람은 천국으로 갈 사람, 이렇게 다 예정되어 있다면 인간에게 무슨 노력이 필요하겠습니까? 혼돈을 주는 이런 문제들을 모두 정리한 것이 예정론(豫定論)입니다.

전편의 마지막 결론은 기독론(基督論)입니다. 기독론은 예수님이 누구이고, 예수님의 사명(使命)은 무엇이며, 중생(重生)이 무엇이며, 삼위일체(三位一體)가 무엇인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강령(綱領)입니다. 기독교에서는 강령이 가장 중요한데, 기독교인들도 기독론을 잘 모릅니다. 중생은 거듭나는 것을 말하는데, 어떻게 거듭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삼위일체는 성부(聖父)·성자(聖子)·성신(聖神)의 세 위격이 하나의 실체인 하나님 안에 존재한다는 교의(敎義)를 말합니다. 그러나 성부·성자·성신이 왜 있으며, 삼위일체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통일원리’를 알고 있는 식구들도 잘 모릅니다. 지도자들이 이 강의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지 잘 안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필요한 내용이기 때문에 ‘원리강론’에서 해석해 놓았습니다. 기독론이 전편의 결론입니다.

 

그리고 후편에서는 먼저 복귀원리를 통해 복귀를 하기 위한 공식 노정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섭리를 하시면서 인간이 원리에 따라 복귀하도록 하십니다. 그것이 복귀섭리입니다. 복귀섭리를 통해서 마지막에 재림주가 오십니다. 하나님께서 재림주를 보내시기 위해서 400년 간 어떤 준비를 하셨는지를 가르치는 것이 복귀원리의 핵심 내용입니다.

 

복귀원리는 재림주가 언제, 어떻게, 어디로 오시는지를 확실하게 가르쳐 줍니다. 지금까지 기독교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말을 그저 막연하게 사용해왔습니다. 그래서 구원이 무엇이며, 주님이 구름 타고 오시는데 언제 올 것인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어디로 오시는지도 잘 모릅니다. 그러니까 하늘을 쳐다보고 구름만 쳐다보다가 결국에 다 지쳐서 이제는 주님을 기다릴 생각도 안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도적같이 오는데 바로 그 때가 지금이라고 봐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이 언제 어디로 어떻게 오실 것인가 하는 것을 확실하게 가르쳐주기 때문에 희망이 있습니다.

복귀원리의 결론은 실체로 오시는 메시아·구세주·재림주·참부모가 언제, 어떻게, 어디로 오시는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통일원리’에 대해 기독교의 ‘성경’이나 불교의 ‘불경’처럼 일종의 교리로 여겨왔습니다. 그 때문에 통일교인을 제외한 일반 사람들은 ‘통일원리’는 통일교인이 되기 위해 공부해야 할 교리로 알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통일원리’에는 온 인류가 고민하고 있는 현실세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4. 통일원리 출현의 배경

‘통일원리’는 참부모님(이하 단수인 참아버님, 또는 아버님으로 지칭함)이 밝히셨습니다. 참아버님은 1920년 1월 6일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2221번지에서 탄생했습니다. 참아버님은 16세인 1935년 4월 17일, 부활절 새벽에 기도하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대명(大命)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아담·해와의 타락으로 이루지 못한 창조이상을 이루시려고 2000년 전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셨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예수님을 통해 이루지 못한 뜻을 완수할 사명자로 참아버님을 세우셨습니다.

 

참아버님은 그 때부터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해방을 위해서, 인류를 죄악 가운데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주인을 잃어버리고 탄식하는 만물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뜻길을 가시게 되었습니다. 1935년 4월 17일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될 때까지 만 9년, 햇수로 10년 동안 하나님의 원리를 구명(究明)하는 일에 몰두하셨습니다.

 

1945년 전까지는 일제치하였기 때문에 원리를 발표할 수 없었습니다. 이 말씀을 발표하면 사탄이 그냥 두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신앙의 자유도 없었습니다. 마음대로 기도할 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해방되기 전까지 10년 안에 이 말씀을 찾아서 완전히 정리해놓지 않으면 해방과 더불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참아버님은 원리를 다 찾아놓고 해방의 날을 기다렸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책임분담입니다. 그러니까 원리는 우연히 찾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계시로 나온 말씀입니다. 어떤 문헌이나 인간의 두뇌에서 나온 말씀이 아닙니다.

 

원리를 찾는 일은 태평양 바다에서 모래알을 주워 꿰어 맞추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고 합니다. 태평양 바다 깊은 곳은 수심 10,000미터가 넘습니다. 그 깊은 곳에 모래알이 흩어져 있습니다. 거기에서 흩어져 있는 모래알을 하나하나 찾아가지고 꿰어 맞추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통일원리’를 찾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찾기 위해서 억만 사탄과 혈투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참아버님은 1952년 5월 10일, 부산에서 ‘원리원본’의 정리를 마치고, 부산에서 원리를 전파하기 시작하여 대구를 거쳐 서울에 이른 다음 1954년 5월 1일, 서울에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世界基督敎統一神靈協會)’를 창립했습니다. 협회를 창립한 지 40년이 지난 후 통일교회 간판을 떼어내고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을 세웠습니다. 참아버님은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창립하면서 “40년이 되면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의 간판을 떼어야 한다. 지금 교회는 개인의 구원을 위해 선교하지만 그때에는 가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상은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1957년 8월 15일, ‘원리해설’을 발표한 것입니다. ‘원리원본’을 해설하는 데 5년이 걸린 것입니다. 그리고 1960년 5월 1일, 만 9년 만에 ‘원리강론’을 세상에 내어 놓았습니다.

1966년 ‘원리강론’을 쓴 후 42년이 걸려서 ‘원리본체론’을 세웠습니다. 2008년 9월 1일 참아버님께서 “원리본체론 교육을 말씀하시고 10월 10일, 하와이 킹 가든(KING GARDEN)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날짜와 장소까지 정해주셨습니다.

 

‘원리본체론’은 ‘통일원리’를 근본으로 세워졌습니다. ‘통일사상’과 ‘승공이론’도 ‘통일원리’를 근본으로 해서 쓰여진 것입니다. 발표 연도나 내용의 구체적인 면에서 볼 때, ‘원리해설’은 상징원리(象徵原理)라 할 수 있고, ‘원리강론’은 형상원리(形象原理)라 할 수 있습니다.

 

참고

영광의 면류관

내가 사람을 의심할 때, 나는 고통을 느낍니다.

내가 사람을 심판할 때, 나는 견딜 수 없어집니다.

내가 사람을 미워할 때, 나는 존재가치를 잃습니다.

그러나 만일 믿으면 나는 속임을 당하고 맙니다.

이 저녁 머리를 손바닥에 두고 고통과 슬픔에 떨고 있습니다.

내가 틀린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틀린 것입니다.

비록 속임을 당할지라도 믿어야 합니다.

비록 배신을 당할지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미워하는 사람까지도 송두리째 사랑하십시오.

눈물을 닦아내고 미소로 맞이하십시오.

남을 속이는 일밖에 모르는 자를, 배신을 하고도

뉘우칠 줄 모르는 자들까지도···

오, 주여! 사랑하는 아픔이여.

저의 이 고통을 보소서. 불타는 이 가슴에 주의 손을 얹어 주소서.

저의 심장은 깊은 고뇌로 터질 듯만 하옵니다.

그러나 배신한 자들을 사랑했을 때 나는 섭리를 쟁취했습니다.

만일 당신도 나와 같은 사랑을 한다면 나는 그대에게

‘영광의 면류관’을 드리오리다.

-1935년 문선명-

 

‘영광의 면류관’은 참아버님께서 16세 되시는 1935년 하나님의 분부를 받고 이 뜻길을 출발하실 때 기도문 형식의 시입니다. 참아버님께서는 그 때를 회상하시면서 “나는 16세 되는 해 부활절 날, 주일 아침에 하나님을 만났다. 그날로부터 나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명하시는 대로 뜻길을 걸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는 1950년 대 말, 미국에 파송된 선교사에 의해서 전해졌습니다. 다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2001년 미국 식구 한 사람이 이 시를 읽고 은혜를 받아서, 세계에서 가장 명망 있는 국제시인협회에 보냈다고 합니다. 거기에서 이 시가 최우수작으로서 선정되어 국제시인협회 연보에 소개되었습니다.

2002년 미국 플로리다주 올렌도에서 개최된 국제시인협회 컨퍼런스에서 본 시가 낭송되었고, 컨퍼런스 기간 동안 이 시가 전시되었다고 합니다. 그 때 받은 트로피와 최우수상 메달은 현재 천정궁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국제시인협회의 심사기준은 아홉가지입니다.

첫째가 창조성입니다. 두 번째는 근원성입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로 보는 것이 문체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로 주제를 봅니다. 다섯 번째로 언어의 구사와 단어 선정 능력을 봅니다. 또 여섯 번째는 응집성과 결합력이 있는가를 보고, 일곱 번째로 일관성이 있는가, 여덟 번째로 논리성이 있는가를 봅니다. 그 다음에 아홉 번째로 해석력이 있는가를 봅니다.

이 아홉 가지의 엄격한 기준을 놓고 세계의 명망 있는 심사위원들이 심사해서 최우수상을 받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