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왜(降倭)

2011. 5. 27. 14:08삶이 깃든 이야기/문화유산

 

 

 

 

 

 

 

남풍이 건듯 부니/고향소식 가져 온가/황급히 일어나니 그 어인 광풍인가/홀연한 바람 소리 보이지 않네/허탈히 탄식하고 망연히 앉았으니/이내 생전에 골육지친(骨肉至親) 소식 알 길 없어/글로 설워하노라

 

『모하당문집(慕夏堂文集)』에 실려있는 남풍유감(南風有感)이라는 시다. 이 시를 쓴 주인공 김충선(1571∼1641)은 원래 사야카(沙也可)라는 일본인으로 임진왜란 당시 가토 키요마사의 선봉장으로 출정한 사람이다. 일본의 전진기지인 나고야성(名護屋城)을 출발할 때부터 명분 없는 전쟁에 뛰어드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 여기던 그는 군졸과 함께 동래성으로 상륙하여 조선의 문물과 예의범절이 뛰어남을 눈으로 확인한 그 다음날 부하들과 함께 경상도병마절도사 박진장군에게 투항한다.

 

투항한 사야카는 자신의 수하들과 함께 조선군에 합류하였고 이 후 자신이 소속되었던 왜군을 상대로 78회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당시의 조선육군이 왜군에게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밀린 것은 강력한 살상력을 가진 조총 같은 무기가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조선군의 조총보급에 앞장섰고, 이러한 성과는 전쟁후반기로 갈수록 조선군이 유리하게 되는 전황과도 일치한다.

 

선조는 이러한 그의 공로를 치하하여 사성(賜姓)을 내려 김해김씨로 정해 주었고 자헌대부라는 벼슬을 하사했다. 이후 김충선 이라는 이름으로 활약한 그는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에서도 큰 공을 세워 3란의 공신으로 정헌대부에 올랐다. 만년에는 조정에서 내린 벼슬과 전답을 반납하며 “당연히 신하로서 해야 할일을 했을 뿐”이라는 말을 남기고 대구의 달성에 내려와 자신의 거처를 우록동(友鹿洞)이라 칭하며 자연을 벗 삼아 문집을 쓰면서 소일하다 일생을 마감한다.

일본의 기록에는 사야카의 정확한 출생지나 소속부대를 추정할 수 있는 기록이 전무하다. 그가 남긴 모하당문집에도 그가 8형제의 막내이며 부인 2명을 두고 떠났다고만 했을 뿐, 자신의 신분에 관한 사항은 비밀에 붙였다. 만약 자신의 신분이 일본 측에 알려지면 반역자 가문으로 낙인찍혀 멸문지화를 당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최근 10여 년 전부터 일본에서는 양국의 친선을 이어주는 가교역할로서 모하당 김충선의 일생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915년 모하당문집이 재간되자 조선총독부에서는 대단히 불쾌한 반응을 보였고 ‘천황의 성스런 군대가 귀순할리가 없다’는 생각으로 무시되고 은폐했던 당시의 분위기에 비하면 상당한 변화라 할 것이다. 아직도 일본의 극우들은 ‘조선인의 조작극’ 이라는 생각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있지만 1992년 11월 NHK가 특집방송으로 사야카의 일대기를 방영함으로서 일본인들의 인식은 달라지기 시작했고 그들의 주장은 시대의 뒤편으로 물러나고 있다.

 

사야카에 대한 우리나라의 명확한 자료에 비하여 일본의 자료는 전무하기에 그의 귀순을 둘러싸고 일본학계에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 그 학설들을 대체로 정리하여 살펴보면 일본학계의 움직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국통일과정에서 멸망한 반 히데요시 세력의 한 사람이었기에 귀순했다는 설을 제기하는 학자들이다. 이의 근거로 들 수 있는 것은 사야카 일족이 전국시대를 통해 규슈에 대규모의 영지를 가진 영주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규슈정벌로 일족이 몰락하고 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자 반감을 가지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참에 기요마사의 군대에 편입되어 조선침략전쟁에 동원되게 되었고, 명분 없는 전쟁에 참여하느니 보다 차라리 조선에 귀순하는 게 낫다는 생각을 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둘째, 히데요시군에 의해 멸망당한 조총부대였기에 귀순했다는 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이다. 사야카는 전국시대최강의 조총부대로서 영주에 예속되지 아니한 독립부대의 하나인 사이카슈(雜賀衆)의 일원이었다. 사이카와 사야카의 발음이 닮은 점도 이를 증명하는 것이다. 사이카슈가 혼간지(本願寺)와 함께 오다 노부나가에게 저항했으므로 히데요시는 사이카슈의 본거지를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이 후 살아남은 사이카슈의 구성원들은 일본전국으로 흩어졌고, 방랑 중에 사야카 일행은 히데요시군에 흡수되어 조선침략의 선봉장이 되었다는 설이다. 이 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그 근거로 사야카가 조총과 화약의 제조법을 조선에 전해 주어 전쟁에 승리하도록 기여한 점을 들고 있다.

 

셋째, 조선의 유교문화와 예의범절의 바름을 동경하여 귀순했다는 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이다. 이들은 사야카가 조선에 도착하자마자 박진장군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그 근거로 들고 있다. 모하당문집에 실려 있는 내용그대로 옮겨보면 당시의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기요마사의 명분 없는 전쟁에 본의 아니게 선봉으로 나서 3천의 병력을 이끌고 조선 땅에 왔습니다. 처음으로 이 나라 백성들의 민심과 동정을 살펴보니 의관과 문물이 들은 대로이고 예의가 중하(中夏, 중국)와 같음을 알았습니다. 인의의 나라를 토벌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으므로 저는 전의를 상실하였습니다.

저는 어찌하면 좋을까요? 기요마사의 휘하에 들어가면 기요마사에 대적할 수도 없고, 이 나라의 문물을 본다면 군자의 편에서고 싶어지니 진퇴양난입니다. 이 나라에 저가 귀순하려는 뜻은 지혜가 부족해서도 아니며 용기가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그리고 무기사용법을 몰라서도 아닙니다. 저가 이끄는 병력은 백만 대군도 상대할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싸우지 아니하고 화의를 청하는 것은 이 나라 예의문물의 아름다움에 감동하여 성인의 백성이 되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의 문집 곳곳에 이러한 근거가 보이며 조선에 귀화한 다음에도 고향의 보모형제가 그리워 남긴 고뇌의 시들이 많다.

 

 

의중에 결단하고 선산에 하직하고/친척과 이별하며 일곱 형제 두 아내 일시에 다 떠나니/슬픈 마음 설운 뜻 없다하면 빈말이라 (술회가)

 

 

임진왜란을 통하여 항왜(降倭)로 기록되어 있는 일본군귀순자들은 1만 명을 넘는다. 초기에 일본에서 출발한 군대가 모두 15만 명인 점을 감안한다면 적지 않은 숫자이다.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에서도 항왜를 조선수군에 재편하여 일본군과 싸웠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특히 정유재란 말기의 울산 성 전투에서는 조·명연합군의 포위망에 갇혀 수많은 일본군이 굶어죽거나 귀순했다는 기록을 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학창시절 내내 임진왜란 시 우리 나라가 당한 이야기만 들어왔다. 아직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학사관이 남아있던 시기였기에 그러했을까? 아니면 자료부족으로 역사고증을 할 수 없어서였을까? 우리 자신들의 역사인식에 상당한 의문을 갖게 한다.

 

이제 일본에서는 조선통신사 재개 400주년을 기점으로 하여 임진왜란을 재조명하고 사야카 김충선의 이야기를 책으로, 방송으로 특집을 엮어 내 보냈다. 이러한 영향에 힘입어 매년 우록동을 찾는 일본인 관광객은 1천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양국의 우호친선과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라는 측면에서 김충선의 일대기는 대단히 바람직하며 더할 나위없는 좋은 소재가 될 것이다. 일본의 배반자 사야카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양국의 친선사절로 거듭나는 지금의 평화가 서로의 신뢰를 바탕으로 길게 이어지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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