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세로 요절한 조선 중기 천재시인 백호 임제(1549~1587)|

2012. 1. 17. 05:00삶이 깃든 이야기/문화유산

 

본관 : 나주
호 : 백호·겸재
별칭 : 자 자순
활동분야 : 문학
주요저서 : 《화사》 《수성지》

조선 중기의 시인·문신. 39세로 요절한 조선 중기 천재 시인.

본관 나주. 자 자순(子順). 호 백호(白湖)·겸재(謙齋). 대곡(大谷) 성운(成運)의 문인. 8대조가 고려말 두문동 72현 중의 한 분인 탁(卓)이다. 이때부터 그의 집안은 나주 다시면 회진에서 은거했고, 그의 증조 대부터 벼슬길에 나아가기 시작해 임제와 5형제는 모두 당대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임제는 경주 김씨와 결혼하여 4남 3녀를 두었는데 그의 셋째 딸이 낳은 외손이 바로 훗날 남인의 영수가 되며 우암 송시열과 예송논쟁으로 유명한 미수 허목(許穆)이다.


임제는 병마절도사인 진(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고문을 줄줄 외운 데다 성격도 호탕하여 동네 사람들의 귀여움을 받았다 한다. 그는 16세까지 김흠(金欽)에게서 수학하였고, 16세때 당대의 명현인 대사헌 김만균의 사위가 되었다. 29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당시 동서붕당이 일어나자 벼슬에 환멸을 느껴 명산대첩을 찾아 유랑하면서 풍류를 즐기고 수많은 시와소설을 남겼다.

 

그의 시는 조선시대에 가장 뛰어난 것으로 언제나 민중과 자주독립사상에 뿌리를 두었다. 또한 그의 소설은 허균과 더불어 조선중기 소설의 쌍벽을 이루었고, 20살 때 이미 사회적 문제를 취급한 소설을 집필했다. 임제의 주요한 문학적 업적은 조선중기 소설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는 데 있다.

1575년 탕음부(蕩陰賦)와 유독시(留犢詩)로 진사 3등급에, 1576년(선조 9) 생원시(生員試)·진사시(進士試)에 급제, 1577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했다. 성격이 강직하고 고집이 세며, 아부하지 않는 천성으로 인해 벼슬운은 없었다. 예조정랑(禮曹正郞)과 지제교(知製敎)를 지내다가 동서(東西)의 당파 싸움을 개탄, 명산을 찾아 시문을 즐기며 호방하게 여생을 보냈다.

 

벼슬에는 뜻이 없어 전국을 노닐며 시와 술로 울분을 풀었다. 당대 명문장가로 명성을 떨쳤으며 시풍(詩風)이 호방하고 명쾌했다. 39세에 요절하였다.

황진이 무덤을 지나며 읊은 "청초 우거진 골에……"로 시작되는 시조와 기생 한우(寒雨)와 화답한 시조 〈한우가(寒雨歌)〉 등은 유명하다. 저서에 《화사(花史)》 《수성지(愁城誌)》 《임백호집(林白湖集)》 《부벽루상영록(浮碧樓觴詠錄)》이 있다.

그의 고향인 회진마을에는 그의 기념비와 사당, 그가 문학활동을 했던 영모정(永慕亭), 그가 마음을 수양했던 신걸산 복암사, 가운리 삼거리에 그의 묘와 묘비, 시비가 남아 있어 이 시대 문학인들의 고향이 되고 있다.

"중국의 5대 6조에 태어났더라면 나에게도 천자 차례가 한 번쯤 돌아왔을 것을"
"사해제국에서 황제를 칭해 보지 않은 나라라곤 없는데 우리만은 한 번도 그래보지 못했는니라. 이런 소국에서 태어났다가 가는데 무엇이 그리 아깝다는 것이냐. 울지마라" (성호사설)

문집 : [백호집], [수성지(愁城誌)],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花史] 등
유적지 : 백호임제선생시비 묘(전남 나주시)


선구적 사상이나 독창적인 개혁의지는 언제나 소외 당하게 마련인가. 조선 선비 모두 주자학이라는 강고한 사슬에 묶여있을 때 ‘이래서는 안된다’고 분명히 말했건만 4백년 지난 2천년대까지도 그 말이 되풀이 되어야 하는가.


당시대엔 기인이었던 외로운 선구자 임백호의 탯자리는 나주 회진. 조선 명종 4년(1549) 12월 20일 병마절도사 林晋과 모친 남원윤씨의 5남 중 장남. 백호라는 호 외에도 겸재·풍강·소치라 했다. 백호라는 호는 외가인 곡성 옥과
섬진강 무진동에서 얻은 것이고 풍강은 고향 마을 회진 풍호마을 앞 풍호강에서 얻은 호, 소치는 전국의 산하를 방랑하면서 술과 시로써 한줄기 외로운 회포를 달래며 지은 호다.

1576년 생원·진사에 합격, 이듬해 문과에 급제, 예조정랑을 지냈으나 당시 선비들이 동서로 나뉘어 다투는 것을 개탄하고 명산을 찾아 다니며 자연을 즐기고 한때 속리산에 들어가 성운에게 사사했다.

 

성운(1497~1579)은 나이 30에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그의 형이 을사사화로 화를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높은 학문을 지닌 채 속리산 기슭에 들어가 3년 숨어 살다가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짧은 옷을 즐겨 입고 시와 거문고를 벗삼아 그를 찾아온
서경덕·조식·토정 이지함 등에게 성리학을 가르쳤다.

성운 선생은 백호와의 대면 때 반성문을 써보라 했다. 이에 백호는 意馬賦(뜻이 정립되지 못하고 달리는 말과 같이 호협하게 방랑한다는 뜻)라는 시를 지었다고 전한 성운은 훗날 그의 문집에 백호에 대해 “소년 때 착실히 공부하였고 시를 지으매 땅에 떨어지면 쇠소리가 나더라. 이별한 후로도 서로 대면함과 같으니 좋은 밤 밝은 달이 마음 속에 이르는 것 같다”고 적었다.

당시 공명심에 불탔던 호남 선비들은 당대의 등용문이던 박순의 문하로 운집할 때 과학 위주의 글에는 뜻이 없었던 호쾌한 백호는 성운을 홀로 찾으니 그의 나이 26세 가을. 3년 동안 그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고향에 돌아와선
영모정·벽류정·소요정·창랑정 등 이른바 영산강 8정을 두루 돌아다니며 문우들과 만나 술과 시, 거문고 풍류로 세상 인심을 논했다.


27세. 임진왜란 발발 17년 전인 1575년 호남에 왜구가 침입, 백호는 박계현 막하에서 백의종군하여 공을 세우니 후에 병조판서가 된 박계현이 평했다.

“금석같은 목소리, 유창한 말솜씨, 노년에 그대 만나 사는 보람 크도다. 시단의
굳센 시운 세상을 압도하니….”

30세가 넘어선 영남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시를 남겼고 전국 각처를 돌아다니면서 민중 속에 뿌리 깊은 서민의식을 시로 표출했다. 39세를 일기로 요절할 때까지 생전에 그가 지은 시는 1천수가 넘는다. 호탕하고 기발한 그의
시는 항시 세상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당시의 대문호 신흠은 「백호문집」 서문에서 “내가 백사 이항복과 만나 임백호를 논하기가 여러 번인데 매양 기남아로 일컬었고 또 시에 있어서는 그에게 90리나 훨씬 뒤떨어져 양보할
수밖에 없다”고 털어놓을 정도다.

백호가 운명 직전에 남긴 유언은 이렇다.
“나라마다 독립국가를 자처하나 오직 우리나라만 중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구나.”

유언의 사실 여부를 떠나 마지막 남긴 서러운 말은 민중들의 가슴 속에 ‘독립심’과 ‘자주의식’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중화주의의 깊은 늪에 빠져 오랫동안 몰민족적 주자학적 세계관에 빠진 조선시대의 부패상을 통탄해하고 ‘민족적 자아의식’을 빨리 갖고자 외친 선비의 가슴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 가볼만한 곳 >

나주군 다시면 신풍리 귀래정(영모정)
나주시 다시면 구진포구
나주군 다시면 신걸산




■ 황진이 무덤에 잔을 붓고 시를 읊은 임제(林悌) 묘

나주시에서 목포로 가는 광주 목포간 1번 국도를 따라 약 4Km정도 가면 남도 휴게소를 지나 신걸산(368.1m) 끝자락에 백호(白湖) 임제(林悌) 선생 묘가 있다.

청계서원(淸溪書院)과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낸 아버지 임진(林晋) 신도비가 있는 곳의 산 정상에 자리하고 있다. 서원 옆 능선 아래에는 임제의 시비가 세워져 있고 위로는 돌층계가 놓여 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주변 산세에 비해 너무 높은 곳에 묘가 있어 과연 혈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묘 옆에는 두 개의 비가 세워져 있는데 하나는 임제의 외손자 허목이 찬(撰)한 것이고, 하나는 최근에 세운 것으로 자신의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유언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백호 임제 선생은 평안부사로 부임해 갈 때 개성 황진이 무덤에 들려 잔을 붓고 시를 읊은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설워하노라

사대부가 일개 기생의 묘를 참배하고 시까지 지었다하여 파직 당한 것으로 알려진 선생은 조선조 낡은 인습과 도덕률에 얽매인 양반들의 의식구조를 풀어 해친 문명(文名) 높은 대시인이었다. 가식과 위선에서 벗어나 마음껏 사상의 자유로움을 펼친 호방한 그는 평양 기생 일지매와 사랑에 빠진 일화로도 유명하다.

 

당시 지체 높은 사대부가 기생의 무덤에 시를 바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그러한 멋스러움은 임제가 아니고는 어느 누구도 흉내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활 지어 팔에 걸고 칼 갈아 옆에 차고
철옹성 변에 통개 베고 누웠으니
보완다 보왜라 소리에 잠 못 들어 하노라

라는 시조를 지었다. 임재의 시재(詩才)는 대대로 학덕있는 나주임씨 가문의 혈통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시를 잘 지어 주변 선비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고 한다.

 

여섯 살부터 길흠에게서 10년간 글공부를 하여 대문장의 틀을 닦았고, 스물 두 살 때는 속리산으로 낙향한 당대의 석학 대곡 성운의 문하로 들어가 큰 스승 밑에서 경학과 시문을 익혔다. 28세에 생원과 진사에 합격하고 29세에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탄탄한 벼슬길을 약속 받아 예조정랑겸 지제교를 지냈다.

 

그러나 동서 양당의 당파 싸움을 개탄하고 시인인 옥봉 백광훈과 허균의 스승인 손곡 이달 등과 어울려 백두에서 한라까지 이 나라의 명산대천을 주유하며 산과 물을 노래하고 다니다 여생을 마쳤다. 그의 사상은 호방하면서도 명쾌하고 드높은 기상을 지녔다. 나라의 자주성 회복과 강대한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고 세계를 호령하고 싶은 심정이 담긴 그의 시가 묘 아래 시비(詩碑)에 적혀있다.

세상에 태어나서 만주 땅을 못 삼켰으니
그 어느 날에나 서울 땅을 다시 밟을 것이냐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말을 재촉해 돌아가는데
눈이 시린 저 먼 하늘
짙은 안개가 걷히는구나

시상(詩想)이 풍부했던 백호는 그의 큰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한 것 같다. 오죽했으면 후손들에게 자신의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유언했을까? 높은 산봉우리에 있는 선생의 묘는 혈로 보기 힘들다.

 

비록 주변 산세는 아름답다고는 하지만 혈의 결지에 제일 중요한 주룡이 생왕룡(生旺龍)이 아니다. 군사기지가 있는 신걸산에서 내려온 능선이 크게 과협하고 아름다운 귀인봉을 기봉하였으나 주룡의 변화가 거의 없다. 단순히 큰 산 능선에 불과하고 묘 뒤 입수룡 역시 살아 움직이는 듯한 변화를 느낄 수 없다.

 

묘가 산 정상에 있다보니 이를 감싸주고 보호해주어야 할 청룡 백호를 비롯한 사격들이 상대적으로 낮아 외부의 바람을 막아주지 못한다. 전후좌우에서 부는 바람에 노출되었기 때문에 생기가 모일 수 없어 혈을 결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또 청룡과 백호가 감싸주지 못하고 밖으로 비주(飛走)하였으니 명당 역시 원만하지 못하고 반배(反背)하였다.

 

용과 음양교합을 하여야 할 물도 완벽하게 혈을 감싸주지 않고 등을 돌리고 달아났다. 우측에서 나온 물만이 간신히 묘 앞을 감싸주었을 뿐 모두 묘 앞에서 곧장 앞으로 빠져나간다. 외수(外水)인 영산강 역시 묘 앞을 등지고 굽었다. 이렇게 주변의 산과 물이 모두 외면하였으므로 산천 생기가 보호받지 못하고 모두 흩어지는 곳이다.

이러한 곳을 풍수지리 혈기론(穴忌論)에서는 단한지(單寒地)라고 한다.
용의 기세가 희미하고 사면이 공허하여 바람을 막아주지 못하는 고로불장지(孤露不藏地)다. 또 사방팔방의 바람을 받는다는 팔풍취혈(八風吹穴)의 외로운 혈지라는 뜻이다.

이를 일명 고한지혈(孤寒地穴)이라고도 하는데 이러한 곳에 장사지내면 가난과 고독을 면하기 어렵다고 한다. 학문이 뛰어났던 선생이 왜 이러한 곳에 묻혔을까 의아했지만 한편으로는 선생이 이러한 곳을 원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한 평생 시와 풍류를 즐기다 간 선생이 어찌 부귀영화를 탐하였겠는가. 선생 스스로 후손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고 유언하지 않았을까?

숨막힐 듯이 엄격한 유교이념과 당파의 기득권을 위해 처절하게 투쟁하는 시대에 한줄기 멋과 여유를 가져다 준 선생이었다. 각박한 생활에 쫓기는 현대인들이 한번쯤 선생의 시를 읊으면서 멋과 여유를 가져봄직 하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 임제의 시

1577년 알성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예조정랑(禮曹正郞) 겸 지제교(知製敎)를 지내다가 동서양당의 싸움을 개탄하고 명산을 찾아다니며 여생을 마쳤다. 평양 감사로 제수되어 부임 도중 황진이의 무덤에서 하룻밤을 지새다 파직되는 등 호탕한 면모가 많은 인물로 전해진다. 당대 최고의 풍류남아로 알려진 임제는 그의 여성편력의 시조와 자연에 대한 시 이외에도 우국충절을 노래한 時調와 漢詩, 愁成誌 元生夢遊錄 같은 소설을 남겼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임제-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엇난다.
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무텻는다.
잔(盞) 잡아 권할리 업스니 그를 슬허하노라.


북창이 맑다커늘 -임제-

북창(北窓)이 맑다거늘 우장 없이 길을 난이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잘가 하노라.


< 현대에 있어서 임제의 시가 주는 감동 및 역할 >

 
① 자유로운 연애사상. 無碍 거침없음.

여인에게 변사또가 춘향을 수청들게 하듯 하는 강요가 아니라 여인 스스로 그를 맞아들이게 하는 그의 여성에 대한 태도가 이 시대의 남성들이 배워야 할 태도라고 생각된다.


② 버림의 미학

명예, 지위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날 수 있음. 황진이가 기생의 신분임에도 무덤에 찾아가서 잔 잡아 술을 권할 수 있는 마음. 그가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하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기생의 무덤을 쁹았다는 것은 그의 시대가 비록 기생과의 풍류를 용인하는 시대라고 했더라도 이는 조정의 비난을 샀을 것이다.


③ 재치와 조크의 능란한 구사

오늘날 남녀의 매력의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그가 유머가 있는 사람인가 이다 . 그는 여성의 심리를 깊이 있게 파악하고 있으며, 시의 유머와 재치로 여성을 사로잡았다.


④ 능동성과 적극성

사랑하는 사람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음. 사랑에 있어서 적어도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김추인의 실습(부제: 때로는 오작동을 하십시오)에서는 훔쳐만 보다가 멀어지고, 바라만 보다가 포기하는, 혼자서 사랑하다가 버리는, 아픈 사랑의 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사랑은 수동적인 사랑의 모습, 아픔마저 감미롭게 느끼는 사랑의 모습은 보여 줄 수 있을 지 모르나, 같이 행복할 수 있는, 더불어 즐거울 수 있는, 함께 쾌감에 전율할 수 있는 사랑이 되지 못한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자존심에 약간의 상처를 받더라도, 유혹해 보는 사랑이 필요하지 않을까?
적어도 임제의 사랑은 적극적인 사랑, 유혹하는 사랑의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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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 출처 (너무 많아서 옮기지 못한 부분도 있으니 직접 방문해보시길~)

http://munsu.new21.org/munin/%C0%D3%C1%A6.htm
http://www.poem27.pe.kr/imje.htm
http://yoontacki.hihome.com/page-103.html
http://www.sogang.ac.kr/~phil/res/kyk.htm
http://ipcp.edunet4u.net/~koreannote/1/1-임제.htm
http://members.tripod.lycos.co.kr/lychosu/students/nj-human/imje.htm

 

 

출처:네이버지식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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