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 실학 허목

2012. 1. 15. 21:45삶이 깃든 이야기/문화유산

 

許穆(1595~1682)의 호는 미수이다.

(하얀) 눈썹이 눈을 덮고 있는(미수) 그의 모습에서도 알 수 있듯 ,

道人的 풍모로 한 세대를 살아간 인물이다.

 

그는 56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처음으로 관직에 나갔다.

그리고 81세에 좌의정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항상 대립의 선봉에 서면서도 90에 가까운 천수를 누렸던 것을 보면 처세에도 능란하였던 인물인 것 같다.  그가 활동했던 시기는 서인, 남인의 예론이 첨예하게 맞서던 시기요,  환국의 피바람에 송시열과 같은 거목도 쓰러져 갔던 시기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가 남인의 강경파인 청남의 영수로써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다는 것은, 세속을 초탈한 그의 성품 덕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주로 예송에서 윤휴와 함께 남인의 입장을 대변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가 관직에 나갔을 때는 ( - 주자성리학이 조선성리학이라는 형태로 이론이 정비되고, 붕당이 형성  - ) 각 당파 간에 公論이 정립되어, 곧 예송이라는 형태로 논쟁을 불러 일으키던 때이다.

이때 허목은 대통을 바로 세워 국왕권을 강화하자고 주장하였다. 왕권의 강화야말로 진정한 왕도 정치의 추구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는 국왕보다 사족의 정치 주도권을 강조하던 서인과 이념적으로 대조를 이루었다. 

 

 

허목은 정통주자학자다.  그는 퇴계로부터 이어지는 영남학파의 학통을  정구와 장현광으로부터 이었고 , 학문의 깊이로 세상에 알려졌던 산림이었으며,  관직에 나가서는 강경파로써 청남을  이끌었던 영수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이단과 다름없는 "실학파"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무슨 연유에서일까?

 

더구나 그는 주자학의 이념이 종교에 가까웠던 시기를 살았다.

송시열과 같은 열성신자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주자학자에게 주자는 성인을 넘어선, 신적인 존재와 다름없었다. 주자의 말씀은 진리였으며 그  말씀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사문난적이요, 이단이요, 이는 곧 사회에서의 매장을 의미했다. 

 

이러한 시기에 허목이 후세 남인 실학파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그가 다른 학자와는 다른 독특한 학문적 성향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가진 독특한 성향이란 바로 중국 고전에의 복귀였다. 그는 당시의 경향인 주자 주석의 四書나 七書의 연구보다는 중국의 고전인 六經(시경, 서경, 易經, 춘추, 禮經, 樂經)에 더 관심을 두었다.  모든 학문은 그 근원인 요순시대로 돌아가 그 시대를 배우고, 육경에 나타난 삼대(은, 하, 주)를 현실에 구현해 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주자의 주석으로 古文이 폐했다"는 과감한 말로 주자를 부정하기에 이르고, 세상에 육경과 제자백가의 학문이 없어졌기에  도는 땅에 떨어지고, 문학은 옹졸해졌으며, 시대가 어지러워졌다고 확신했다. 

 

그의 주장은 모두 육경의 고전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즉,

 

서인들과 접전을 벌였던 예론에서는 서인들이  주자의 <주자가례>에 근원을 둔 것에 비해  <주례>,  <예기> 등의 고전에 비중을 두었고, 

 

세상을 이끌어 나가는 경세론에서는 과감히 북벌론의 반대를 주장하였다.

사실 그 당시 북벌론은 중요한 정치 코드였다. 사대부들에게 북벌은 생명줄과 같은 것이었다. 오랑캐라 업신 여기던 청에 패배한 후, 북벌은 망신창이가 된 자존심을 지켜나갈 수 잇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러나 허목은 그  같은 헛된 공론을 과감히 버릴 것을 종용하였다. 북벌은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것에 힘을 기울일 바에야 차라리 백성의 삶을 돌아보아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왜냐면 공자님도 그리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공자님은  백성들을 정치의 근본이라 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그의 원시 유학적 성향은 드러난다.

 

문학에서의 고전적 일면은 그가 남긴 <미수기언>이란 저서에 나타난다. 이 책 역시 육경을 근본으로 삼았음을 스스로 밝히고 있는데 , 좀 독특한 체제를 갖고 있어 후세에도 구설에 오르는 책이라 한다.

아뭏튼 당시 일반 사대부의 문집과는 다른  고전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박학함을 보이는 백과사전식 기술을 하고 있다.  때문에 이는 다음 세대에 물밀듯 나오는 남인 실학파의 백과사전식 저술의 전조가 아닌가 한다.

 

그에게서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동방의 제 1인자라는 독특한 그의 전서체이다.  중국 진한 이전의 문물에 대한 탐구가 문자에 적용된 경우인데 그 아름다운 글자체는 바닷물도 물러나게 하는(그가 쓴 척주동해비를 말한다. 그가 삼척 - 척주 - 의 부사로 있으면서 바닷물이 자꾸 넘쳐나는 것을 전서로 쓴 비석을 세워 물리쳤다는 일화가 있다.) 힘이 있다고 할 정도로 신기가 어려있다. 이는 다른 사람이 이를 수 없는 독보적 경지였다.

 

허목은 주자학자이면서도 원시유학을 경모하는 독특한 학문적인 경향으로  주자학 일색의 경직된 학문계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그의 이러한 학문 경향은 허목 - 이익 -  이가환 -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기호 남인 실학자들에게 이어져, 그가 남인 실학자의 비조라 칭함을 받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물론 그는 실학자가 아니다. 또 그를 실학자의 원조라 평가하는 것 역시 위험한 발상인지 모른다.

그러나  다산의 예론이  허목이 인용했던 바, <주례>,  <예기> 등 고례의 연구에 치우치는 것과 주자가 쓸모 없다 버린 大學 古文을 인용한 것 등은,  허목의 학풍에서 연원한 것임도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미수 허목의 위치는,  영남 성리학의 학통을 이은 주자성리학자이면서 한편으로는 근기지방에 근거를 둔 기호 남인에게 영향을 미친, 남인 실학파의 초석을 놓은 사람이라 규정할 수 있겠다.

출처 : [직접 서술] 직접 서술 - 참고 - 조선후기지성사 - 정옥자

 

 

출처:네이버지식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