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기시대에 관하여

2012. 1. 15. 12:00삶이 깃든 이야기/문화유산

구석기시대는 말 그대로 오래된 석기시대를 일컫는 용어로 영국의 고고학자 존 러복이 최초로 사용하였습니다. 고고학의 시기구분은 19세기 중엽 덴마크의 고고학자 톰센이 제시한 3시기법(석기-청동기-철기)이 오늘날까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구석기시대는 신석기시대와 더불어 석기시대에 포함되는 시기입니다.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시기구분은 석기 제작기술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구석기시대는 직접 타격에 의한 타제석기(뗀석기)를 신석기시대는 대상을 갈아 만드는 마제석기(간석기)가 사용된 차이에 기인해 시대를 구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두 시대의 시기구분은 매우 복잡한 문제로서 대체로 최후 빙하기가 종료되는 약 1만년을 전후한 시점에서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 전이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문제는 인류문화사의 발전에 있어 환경의 변화와 이에 따른 생계경제의 혁신, 사회 복합도의 증가, 농경과 목축의 발생 등 매우 복잡한 메커니즘이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차후에 다시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구석기시대는 인류에 의해 제작되어 사용, 폐기된 것으로 판명된 가장 오래된 석기가 발견된 시점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따라서 이 연대는 매우 유동적일 수 있는데, 더 오래된 지층에서 새로운 석기 자료가 발견된다면 구석기시대의 개시 연대는 더욱 올라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까지 발견된 자료로서 가장 오래된 석기의 연대는 대략 250만년 전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구석기시대의 시작은 이 때 쯤 부터다 할 수 있겠습니다. 구석기시대는 다시 전기-중기-후기 구석기시대로 시기가 나누어 지는데, 각 시기는 그 시기를 대표하는 석기 제작 기술과 이를 제작 사용한 주체인 고인류의 진화 과정들이 복합적으로 결합된 개념입니다. 전기구석기시대는 대체로 호모 하빌리스와 호모 에렉투스 단계에 해당하며 대표적인 석기들로는 찍개와 단순 박편이 주를 이루는 올드완 석기와 주먹도끼를 비롯한 가로날도끼, 다각면원구 등 대형 석기와 단순한 긁개류의 석기들이 포함된 아슐리안 석기가 해당됩니다. 중기구석기시대의 고인류는 고 호모 사피엔스와 유럽-서남아시아, 북아프리카 지역에 한정되어 발견되는 네안데르탈이 포함되며 석기는 작아지고 형태가 다양해 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석기를 제작함에 있어 최종 형태를 염두해 둔 르발르와 기법이 적용되기 시작하며 각 종 찌르개, 다양해진 긁개와 밀개, 뚫개, 조각기 등이 주를 이루며 주먹도끼와 같은 대형 석기의 수는 크게 줄어 들게 됩니다. 후기 구석기시대는 현생 인류, 즉 호모 사피엔스와 연관되어 있으며 호모 사피엔스의 전 세계적인 방산의 결과 거의 모든 지역에서 돌날이라고 부르는 얇고 긴 박편을 제작하는 기술이 보편화됩니다. 돌을 재료로 한 도구 뿐만이 아니라 동물의 뿔, 뼈 등을 이용한 연모가 매우 정교하게 제작되며 본격적인 예술 활동의 증거들이 나타나고 뚜렷한 야외 주거지의 흔적들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1960년대 석장리 유적 발굴로 본격화된 우리나라 구석기 연구는 1978년 전곡리유적의 발견을 계기로 양적, 질적 성장을 이루게 됩니다. 연구사 초기의 전곡리유적의 연대 결정은 발견된 석기의 형태적 특성에 기초하여 지역적 거리 차에도 불구하고 유럽-아프리카 자료와 1대1 대응을 통해 추증되었습니다. 즉, 전곡리에서 출토된 주먹도끼는 전형적인 아슐리안 계통의 석기로 유럽-아프리카 연대를 비교해 본다면 중기 홍적세(약 50만년 전후)에 해당하는 연대를 가지는 것으로 발표된 것입니다(김원용-정영화, 1979, "전곡리 아슐리안 양면핵석기 문화예보"). 언론보도를 통해 70만년 전 유적으로 과대 포장되어 소개되기 시작한 전곡리유적은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전기 구석기시대의 유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세간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게 되었으며 한민족의 역사에 큰(?) 관심을 가지고 계셨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관심 하에 당시에는 유래가 없던 비교적 체계적인 학술 조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이 때 발견된 주먹도끼는 의심의 여지 없이 유럽-아프리카 지역의 전기구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아슐리안 석기로 여겨졌으며 미국의 저명한 구석기 고고학자였던, 데이비드 클락 교수가 전곡리 출토 주먹도끼는 아슐리안 석기로 유적의 연대는 약 25만년 전으로 추정된다는 사실을 공증함으로써 세계적인 주목을 끌게 되었습니다. 그 후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연대 측정 자료들이 축적되면서 전곡리 유적의 연대에 대한 비밀이 풀리기 시작하였는데, 현재까지 약 30만년전의 유적이라는 설(배기동 등)과 후기 홍적세(약 6만년~4만년)에 해당하는 유적이라는 설(이선복 등)이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하고 있습니다. 전곡리유적의 연대 문제는 석기를 포함한 퇴적층의 연대를 직접 측정할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연대 측정법이 현재까지는 부정확하기 때문에 다양한 지질학적 접근을 통해 유적의 형성과정을 복원하고 퇴적층의 형성 기원에 대한 퇴적학적 접근이 종합적으로 고려되어 이루어져야 해결할 수 있을 진데, 조만간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유적의 연대와 관련된 세부적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전곡리 주먹도끼 "아슐리안??"

최근 학계의 연구 동향에서 주목되는 점은 전곡리 출토 주먹도끼에 대한 성격 규정 문제일 것입니다. 그간 외국 연구자들에 의해 주도되어 온 전곡리 주먹도끼에 대한 아슐리안 논쟁은 지난 제2회 세계 주먹도끼 학회를 통해 다시 한 번 논의되었습니다. 과연 전곡리 출토 주먹도끼는 아슐리안일까요? 아슐리안 주먹도끼는 앞서 얘기 했듯이 전기구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석기이며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도구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인류 진화과정과 결부해 보았을 때, 최종 석기의 형태를 염두해 두고 석기 제작에 임한, 즉 공간에 대한 인지 능력과 형태를 발현해 내기 위한 뛰어난 손재주가 없을 경우 만들어 낼 수 없는 석기로 볼 수 있습니다. 아슐리안 주먹도끼는 고전적 정의로 본다면, 눈물 방울 모양을 하고 있는 석기로서 끝이 뾰족하고 아래부분이 둥글게 처리되어 있으며 석기의 양 측면에 위 아래로 가공하여(이를 biface, 즉 양면 가공이라 합니다) 날을 형성하고 좌우 대칭적이며 석기의 몸통부의 단면이 렌즈 모양을 하고 있는 석기입니다. 석기의 모든 부분에 배고 찌르고, 자르고 긁을 수 있는 복합적인 날이 형성되어 있어 만능도구 혹은 맥가이버칼로 부릅니다. 주먹도끼의 등장 배경에 대해서는 사실 고고학적으로 증명하기가 매우 난해한 문제인데, 아프리카의 대표적인 구석기 유적인 올드바이 고지 유적에서 올드완 석기와 함께 양면 가공된 찍개류의 석기들이 발견되고 있어 석기의 날이 무뎌지면 재가공을 통해 석기는 재탄생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양면 가공 기술이 고인류의 인식체계에 자리잡았을 것이라고 추측되어 집니다. 본격적인 주먹도끼의 사용은 기온 하강으로 인해 대륙 빙하가 증가하게 되면 한냉하고 건조한 기후가 지속되었는데, 기후 변동에 따른 주변 환경 변화로 식량 획득을 위한 인간의 이동 거리가 확장되면서 베이스 캠프로 부터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생산활동을 해야 했던 고인류에게 있어 활동에 필요한 많은 도구(특히 석기) 제작을 위한 재료(돌) 혹은 다양한 날을 가진 석기들을 몸에 지니고 다니기에는 그 무게로 인해 힘들었기 때문에 한 도구에 복합적인 기능을 갖춘 주먹도끼의 필요성이 증가했을 것이라는 가설이 제시되도 하였습니다. 주먹도끼는 기본적으로 다목적 도구로 여겨지고 있으며 특히, 대형 동물의 도살에 매우 유용한 도구로 알려져 있습니다. 석기의 양 측면에 모두 날이 있기 때문에 동물 사체에 깊이 찔러 넣어 가죽과 살을 발라내고 뼈에 붙어 있는 살점을 제거하는데 있어 매우 유용하다는 실험적인 결과들이 나오고 있어 일견 타당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또 다른 연구들에서는 굳이 주먹도끼를 사용하지 않고 날카롭게 박리된 박편만으로도 동물 도살이 가능하기 때문에 주먹도끼는 그 자체로 자르고 베는 용도의 도구라고 볼 수 없으며 복제된 주먹도끼를 투척해 보았을 때 항상 비슷한 궤도를 그리며 날아감으로 사냥도구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특히, 호소성 퇴적물(고인 물에 쌓이게 되는 퇴적층)에서 다수의 주먹도끼가 발견되는 사례를 통해 건기에 거의 물 밖으로 노출된 물고기들(마치 호수 물을 빼고 나면 붕어, 잉어 등이 낮은 물에 오가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을 주먹도끼를 던져 잡았을 것이라는 가설이 제기되기도 하였습니다. 주먹도끼는 약 180만년 전부터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곡리출토 주먹도끼는 기본적으로 제작 기법 상 유럽-아프리카에서 발견되는 석기들과 동일한 기술적 수준(양면 가공)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형태적으로 전곡리 주먹도끼는 서양-아프리카 주먹도끼에 비해 몸체가 두텁고 자연면이 많이 남아 있으며 형태적 정형성이 떨어져 매우 다양하고 고졸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또 서양-아프리카의 경우 주먹도끼와 그 아류 격인 가로날 도끼 등이 한 유적에서 수십, 혹은 수백점씩 한 곳에 모여 출토되는 사례가 많은데 반해 전곡리 주먹도끼의 경우 현재까지 전곡리 유적에서 발견된 구석기 유물의 총 수량을 대략 1만여점으로 본다면 채 30점이 되지 않기 때문에 전체 석기복합체에서 주먹도끼와 가로날도끼가 차지하는 비율이 매우 낮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유럽-아프리카의 주먹도끼들이 기본적으로 측면을 가공하여 기능적인 자르는 날에 초점을 맞춘 석기라면 전곡리 주먹도끼는 측면 가공을 통해 형성된 날은 자르는 날로 보기 힘들 정도로 둔탁하며 앞 뒤로 번갈아가며 박리하는 과정에서 석기의 날 모양이 지그재그로 형성된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유럽-아프리카의 주먹도끼들이 적극적인 2차 가공(섬세한 모양과 날을 만들기 위해 모양을 다듬는 행위)을 통해 날을 형성한 반면 전곡리 주먹도끼는 2차 가공을 베푼 사례가 거의 없이 제작되었습니다. 오히려 전곡리 주먹도끼는 측면날의 가공보다는 뾰족한 끝의 가공에 보다 집중한 경향이 있기 때문에 대상을 찍거나 찌르는 도구로서의 기능이 우월합니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일부 연구자들은 전곡리 주먹도끼를 주먹도끼라 부르기 보다는 주먹찌르개로 분류하길 선호하며 기본적으로 전곡리주먹도끼를 비아슐리안 주먹도끼로 보기도 합니다.

정리하자면 전곡리 주먹도끼는 기술적인 면에 있어 유럽-아프리카에서 발견된 전형적인 아슐리안 주먹도끼의 제작 전통을 보여주고 있으나 형태적으로 고졸하고 후자와는 다른 기능적 속성을 가지고 있는 석기로 볼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연구사 초기에는 그 고졸한 인상으로 인해 비교적 연대가 올라가는, 즉 오래된 주먹도끼로 분류되었으며 전형적인 아슐리안 주먹도끼로 모비우스 이론을 반박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최근 이런 연구 결과에 반박하는 의견이 개진되고 있으며 전곡리 주먹도끼를 비아슐리안 계열로 보고자 하는 연구자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아프리카에도 반드시 고전적 정의에 부합하는 소위 잘 만들어진 주먹도끼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전곡리 주먹도끼와 같이 고졸한 인상의 주먹도끼들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에 전곡리 주먹도끼에 대한 성격 규명은 여전히 논란의 여지를 두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오래된 석기로서 전기구석기시대에 해당하는 유물로 주먹도끼가 주목받아 왔으나 실재 전곡리 유적에서 출토되는 대다수의 주먹도끼들은 퇴적층의 최상부 적색점토층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AT화산재가 검출되는 첫번째 토양 쇄기면 바로 아래에서 주먹도끼가 온전한 층위 맥락을 갖춘 채 발견된 사례가 있기 때문에 적어도 전곡리에서 주먹도끼는 생각보다 훨씬 늦은 홍적세 후반기까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는 전세계적인 고인류의 진화와 확산 과정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시해 주고 있는데, 동아시아의 호모 에렉투스가 호모 사피엔스로 대체되는 과정의 일모를 밝혀 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글: 강상식 학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