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천군 백제 적석총과 온조왕

2013. 1. 28. 20:23삶이 깃든 이야기/문화유산

연천군 백제 적석총과 온조왕

“재미있어요. 어찌 그렇게 일정한 간격으로 강변에 붙어 있는지….”

한국국방문화재연구원의 이우형·김현준씨가 입을 모은다. 남방한계선 바로 밑인 연천 횡산리부터 임진강변을 따라 일의대수(一衣帶水)로 이어진 백제 적석총을 두고 하는 말이다.

“7㎞ 정도의 일정한 간격으로 임진강변 충적대지에 분포돼있잖아요.”

임진강변 충적대지 위에 있는 삼곶리 적석총.

홍수조절댐인 군남댐이 만들어지면 수몰의 운명을 걷게 되므로 학계가 머리를 싸매고 보존대책을 세우고 있다. 연천/박재찬기자

적석총은 개풍 장학리(북한)~연천 횡산리~삼곶리~삼거리~우정리 1·2호분~동이리~학곡리로 이어진다. 한탄강의 전곡리 적석총과도 지근거리다. 누구일까. 임진강·한탄강 변에 이렇듯 일정하게 무덤을 만들어 놓은 이들은 대체 누구인가.

# “우린 군더더기 살”(비류의 항변)

2002년 학곡리 적석총을 조사한 김성태씨(기전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실장)의 보고에서 실마리를 찾아보자.

“전형적인 고구려식 적석총입니다. 연대는 이르게 잡으면 AD 1세기, 늦게 잡아도 2세기 전반까지로 볼 수 있어요.”

김성태씨가 꼽는 근거는 많다. 우선 압록강 중하류 및 혼강 본·지류에 집중분포하는 고구려 적석총과 마찬가지로 임진강 상·중류, 그리고 북한강·남한강 본·지류에 분포한다는 점이다. 또한 기원전후에 낙랑에서 직수입한 낙랑유물이 보인다는 점, 매장주체부가 지하가 아닌 지상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 등….

“학곡리에는 최소 4기의 묘곽이 시차를 두고 조성된 다곽식 적석총입니다. 죽은 순서대로 매장했다면 최소 50~100년은 걸렸겠죠. 기원후 1세기라지만 처음 묻힌 이는 기원전후의 사람이 아닐까요?”

그의 말은 계속된다. “기원전후에는 낙랑유물을 직수입했고, 2세기쯤에는 그걸 토대로 모방제품(방제경·화살촉)을 만들었다는 증거들이 있어요. 학곡리에서 바로 기원전후 직수입한 낙랑유물이라는 걸 알 수 있죠.”

기원전후~기원후 1세기라. 백제시조 온조왕이 나라를 세운 것이 기원전 기원전 18년(삼국사기)이라니까 얼추 맞아 떨어지지 않는가. 그렇다면 고구려 추모왕의 태자 유리에 “용납되지 않을까 두려워” 어머니 소서노와 형 비류, 그리고 오간·마려 등 10명의 신하들과 함께 남으로 내려와 백제를 세운 온조 세력의 흔적이 아닐까. 추모왕을 도와 나라(고구려)를 세웠으나 끝내 ‘배신당한’ 이들의 피맺힌 사연이 삼국사기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비류의 항변을 들어보자.

“대왕(추모)이 부여에서 난을 피해 이곳으로 도망 오자 어머니(소서노)께서 재산을 기울여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왔다. 나라가 유류(孺留·유리왕)에게 속하게 되었으니, 우린 군더더기살(贅) 같다.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따로 도읍을 세우는 게 낫다.”

그러면 온조세력은 왜 남하했을까.

# “선왕의 위업이 땅에 떨어집니다”(협보의 반기)

기원전후부터 기원후 100년까지의 상황을 보자. 중국은 기원전 1세기부터 혼란에 빠져 왕망의 신(新·기원후 5~24년)~후한으로 이어지면서 세력을 잃어간다. 낙랑도 마찬가지였다. 왕조의 난(기원후 25~30년)이 일어날 정도로 통제력을 잃어갔다.

기원전후 임진강·한강유역엔 기존의 진국세력이 한사군의 통제 밖인 소백산맥 이남으로 이주했다. 따라서 임진강 유역은 정치적인 공지로 남게 되었다. 기원후 3년엔 고구려가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긴다. 도읍지를 옮긴다는 것은 정치적 변혁기임을 뜻한다. 또한 도읍지를 옮긴 뒤 두 달만에 왕(유리왕)이 사냥을 나가 5일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대보 협보가 간한다.

“도읍을 옮겨 백성들이 아직 안정되지 못하는데…(사냥이나 즐기고 있다니) 선왕의 위업이 땅에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협보가 누구인가. 선왕(추모왕)의 친구이자 창업공신 아닌가. 그렇지만 유리왕은 협보의 관직을 빼앗고 관원(官園·정원지기)으로 좌천시킨다. 협보는 분을 감추지 못하고 남한(南韓)으로 가버린다. 창업세력과 유리왕을 중심으로한 신진세력간 알력이 있지 않았을까. 유리왕은 또 기원후 5년 본인 스스로 세운 태자(해명)를 불과 4년만에 석연치 않은 이유로 윽박질러 자살하게 만든다.

유리왕의 등장과 천도, 온조세력의 남하, 그리고 창업공신 협보의 반발과 축출, 태자의 책봉과 죽음 등은 기원전후의 복잡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온조세력은 이런 정치적 갈등을 피해 남하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낙랑군의 혼란을 틈타 임진강·한강유역으로 정착했을 가능성이 있다.

어머니(소서노), 형(비류), 10신(臣)과 함께 내려온 온조세력은 어느 길로 왔을까. 고대 교통로를 강계~함흥 길이라고 보고, 원산만 지역에서 광주산맥과 마식령 산맥 사이에 있는 추가령지구대를 통한 동북지방 경유설이 대세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동북에 아닌 서북, 즉 온조세력의 근거지였던 환인(졸본지역·서북쪽)~낙랑지역 우회~패수(예성강)~대수(임진강)를 건넜을 것이라는 견해도 나온다. “왕(온조)이 강역을 구획했는데,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임진강)를, 남쪽으로는 웅천(熊川·남한강 상류?)을 경계로 하였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고,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춘천)에 이르렀다.”

기원전 6년 삼국사기(온조왕) 기록이다. 백제가 기원후 100년도 안되어 고대국가가 아니면 엄두도 못냈을 풍납토성을 쌓았다.

그런 점을 감안한다면 터무니 없는 기록이 아닐 것이다. 삼국사기는 이미 “기원전 4년, 봄 정월에 새 궁실을 지었는데 검소하되 누추하지 아니하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았다”고 기록해 놓았다.

# 임진강·한강은 2000년전 고속도로

어쨌든 남하한 온조세력은 임진강을 따라 남한강과 북한강 등 강을 매개로 세력을 넓힌 것 같다. 유태용 한국국방문화재연구원 학예실장은 “백제 적석총은 임진강 9기, 북한강 7기, 남한강 19기 등 주로 강변에서 발견된다”면서 “당시엔 강이 지금의 고속도로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적석총의 분포는 곧 초기백제의 강역임을 알 수 있다. 온조왕의 강역과도 다르지 않다.

물론 온조세력의 남하와 백제의 건국연대와 관련, 이종욱 서강대 교수는 기원전 2세기로 본다. 풍납토성에 대한 탄소측정연대가 기원전 2세기(199년·184년·109년±50년)으로 나온 것을 근거로 든다.

그는 온조세력은 삼국사기 초기기록에 나온 십제(什濟)의 건국세력이라고 주장한다. 평양고조선이 망하고, 위만조선이 형성된 시기 또는 위만조선 시기(기원전 2세기)에 온조의 십제가 형성됐다는 것이다. 그후 기원전 1세기쯤엔 경기도 일원의 소국을 병합한 왕국으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풍납토성과 함께 백제의 건국 비밀을 담고 있는 백제 적석총. 그러나 세월의 더께에 무너지고, 흩어지고 아무렇게나 방치됐다. 누가 알랴. 천하의 여걸 소서노와 백제시조 온조왕, 비운의 비류왕 등의 흔적이 어딘가 묻혀있을지….

2000년 뒤 못난 후손들 때문에 그 흔적조차 사라질 운명에 놓였다. 무슨 홍수조절 댐을 만든단다. 그 운명이 비운의 왕국 백제를 닮았다.

〈이기환 선임기자/연천에서〉


한많은 백제역사 수몰위기에

필자는 1991년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진행한 민통선 이북의 군사지역 문화재 지표조사에 참여했다.

조사기간 내내 감동 그 자체였다. 어느 날에는 반나절 동안 산성 3개를 새로 찾아내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모두 굽이굽이 한많은 역사의 사연을 담고 있는 임진강·한탄강 덕분이었다.

삼곶리 적석총은 삼곶리 괴미소가 고향인 고 김상희씨의 제보에 의해 처음 확인된 유적이다. 귀룽나무·뽕나무·스무나무가 운치 있게 우거진 강변의 쉼터로만 여겨지던 ‘소산이둥치’. 그곳이 하루 만에 백제초기 적석총으로 그 팔자가 바뀐 것이다.

학곡리 적석총은 어떠한가? 늦가을 비가 내리는 임진강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조사단이 찾아든 강변 식당의 뒤편 숲속. 그저 그렇게 호박돌로 쌓여 있던 ‘활짝각담’이 또 하나의 백제 적석총으로 고고학 족보에 올랐다. 이어 필자 개인적인 조사에 의해 우정리 적석총 1·2호, 전곡리 적석총, 횡산리 적석총, 화천의 위라리 적석총 등이 세상에 선보였다.

그러나 발견만 하면 무엇하나. 이미 무지의 세월 당시 새마을사업과 농지 개간으로 파괴된 우정리와 전곡리, 삼거리 적석총은 그렇다 치자. 95년 소유주의 식당 증설로 매장주체부 보호시설이 잘려나간 학곡리 적석총….

삼곶리 적석총도 비슷한 운명의 길을 걸었다. 도 문화재로 지정되었지만 이 역시 96년 임진강 홍수로 적석부 하부층인 사질충적층이 무너져 내렸다. 그건 ‘약과’다.

이제 여기에 더하여 삼곶리와 횡산리 적석총이 임진강댐 건설로 수몰의 운명에 처해 있다. 설계대로라면 해발 40m 최대홍수위인 수몰선에 두 개의 적석총은 꼭대기 매장주체부를 빼고는 걸려 수장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

어떤 홍수에도 원형이 훼손되지 않고 2000년을 버텨온 문화재가 남북 분단, 그리고 ‘인간의 헛된 손’ 때문에 사라질 위기에 빠진 것이다. 두 기의 적석총이 마치 모래성과 같은 운명에 처해버린 것이다.


홍수 조절능력과 갈수기 북한의 임진강댐으로 인한 수방대책을 위해 건설한단다. 남북 분단으로 홍수 조절능력의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으면서도 추진되는 임진강 군남댐. 임진강·한탄강이 훤히 보이는 곳에 올라가 보면…. 그리고 임진강과 한탄강이 펼치는 절경을 한번이라도 감상해보면…. 쉽게 우리의 구불구불한 역사를 담고 있는 저 임진강·한탄강을 사람의 손으로 왜곡시키려는 헛된 마음을 품지 못할 것이다.

〈이우형|한국국방문화재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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