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로고루성

2012. 9. 29. 23:02삶이 깃든 이야기/문화유산

 

호로고루, 이름이 이채롭고 예쁘다.

사람들은 이 색다른 이름에 먼저 관심을 갖는다.

 

그 뜻은

강유역의 성이라는 의미로 북방계 여진족 어인 골고루가 연철되어

호로고루가 되었다고 전해지고 

그리고

부근 지형의 모습이 호로병과 같이 생겨 “호로”로 불리었다 는 설과

고을을 뜻하는 홀(忽)과 성을 뜻하는 구루가 합쳐졌다는 설이 있다.

 

 

귀가 하는 길에

장승처럼 서 있는 호로고루 성이라고 적힌 문화재 팻말이 눈에 띄어 

계획 하진 않았지만 순간 방향을 꺽었다.

 

금년에도 사실,

성은 여러차례 방문을 했지만 혼자 온 적은 없었다.

현장 학습을 위한 학생이든, 일반 관광객이든,

그들을 인솔하고 안내하는 해설사로서의 방문이었다.

 

혼자라야 사색과

옛 성의 정취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인기척이라곤 전혀 없는 성은 그 느낌이 달랐다.

그 고독한, 성 내부를 걸었다.

침묵이 흐르듯이 조용하다. 그 가운데 멀리서, 아련히, 

고구려 병사들의 함성과 말 발자욱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우리 역사가 시작 된지 어언 5천년!

얼마나 많은, 크고 작은 국난이 있어 왔든가.

 

그러나 우리민족은, 강인한 민족의식과 억센 저항정신

그리고 위대한 창조력을 발휘하여 어려움을 극복해 왔다.

 

요행이 아니었다. 우연도 아닐 것이다.

 

어디까지나 우리 민족의 불멸의 생명력이 간직해온 역사적 필연,

바로, 그것이었으리라.

고구려는 바로 우리 민족의 자존심이요 강인한 상징이리라.

 

 

상념에 잠겨, 성 아래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성위를 올라가 서쪽을 바라봤다.

세모 형태의 성 내부와 푸르고 길게 이어진 임진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강 북쪽의 주상절리의 절벽은 해 그림자가 드리워 어둡게 보였지만

오히려 그 선명한 명암이, 강 그림자와 함께 푸른 빛을 발하며 더욱 아름다웠다.

 

해는 서산에 가까워져 가는 시간,

이 둥근 해가 넘어가면 곧 어두워 질 것이라는 생각에 서둘러 사진을 찍었다.

 

호로고루성의 서쪽 임진강은

장마철을 제외하곤 그 깊이가 얕아 말을 타거나 걸어 건널 수 있어

서울과 개성을 잇는 최적의 경로가 되곤 했다.

따라서 삼국시대부터 이곳에서 많은 군사적 충돌이 있었고,

한국전쟁 당시에도 북한의 전차부대 등의 도하지점이 되었던 전략적 요충지이다.

 

 

 

호로고루는 임진강 북안의

넓은 벌판위에 우뚝 솟아 있어

마을 주민들은 '재미산' 또는 '재미성'으로 부르고 있다.

이 성이 접하고 있는 임진강의 명칭은

'표천'. '호로하' 또는  '표하' 로 불리웠으며 고구려와 신라,

당 사이에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전쟁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그것은 이 지역이 임진강 하류 방면에서

배를 타지않고 도하할 수 있는 최초의 여울목을 이루는데

장마철을 제외하고는 물의 깊이가 무릎 정도밖에 되지 않아

말을 타거나 걸어서 건널 수 있으며 이곳에서부터 임진강 하류쪽으로는

강폭이 넓고 강심이 깊어진다.

따라서 이 여울목을 통제할 수 있는 호로고루의 전략적 중요성은 매우 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호로고루 성은 경순왕릉 부근이다,

경순왕릉에 거의 다 이르면 안내판이 나온다.

이곳에서 성은 약 600m 정도

연천군 장남면 원당3리, 임진강 북쪽 강변 수직절벽위에 있는

삼각형 모양의 강안평지성으로 되어 있지만

산성을 능가하는 천혜의 자연 요새에 위치해 있다.

 

 

 

성으로 올라가는 계단이다.

평양성이 함락되고 고구려가 멸망했지만

아직 항복하지 않았던 고구려군의 마지막 전투가 이 성에서

벌어졌다.

 

 

 

 

호로고 성은 남쪽 세력을 방어하기위해 고구려가 쌓은 성이다

따라서 북쪽으로 부터 침입해 온 당나라의 유인괘 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서기 673년에 고구려는 이 호로고루 성에서 마지막 패하고 만다.

 

 

 

호로고루 성 서쪽 끝 부분이다.

바라 보이는 강 북쪽으로 고랑포구가 있다.

고호팔경의 하나로 불리었던 성 앞 일대에는

강 곳곳에 절벽이 많고 경관이 빼어나서

고려 태조가 자주 놀았다는 곳으로 전해지기도 하는 곳

 

 

 

호로고루성 일대는

한국전쟁 당시에도 격전이 벌어졌을 만큼

지형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을 뿐 만 아니라

역사 지리적으로도 많은 사연을 안고 있다.

그러나 임진강은 예나 지금이나 말없이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보는 이의 가슴 한 모퉁이를 저리며 가로질러 흐르고 있을 뿐이다.

 

 

 

호로고루성에서 서쪽으로 바라보면

강북쪽에 고랑포구가 보인다

6.25 전쟁 전 까지

개성과 서울로 오가는 물자가 이곳에 모였다.

경기북부지역의 농 특산물과

서해안의 조기와 새우젓 소금 배들이 장사진을 쳤다.

임진강 주변의 상권이 번창하자

저잣거리와 3층 건물의 화신백화점이 들어섰다.

개성에서 장단에서 사람이 모였다. 자전거로 한 시간이면 닿았다.

 

 

1991년 문화재연구소가

군사보호구역내의 문화유적지표조사를 한 이래

성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고

2006년 1월에 이르러서

성 주변 2만 여 평방미터의 땅이 국가사적 제467호로 지정되었다.

전체성둘레가 401 미터정도

 

 

 

성벽은 '한들벌'로 이어지는 동쪽 부분만

남-북을 가로막는 지상 구조물을 쌓아 성벽을

조성 하였다.

지표에서의 높이가 10m이고 하단부 폭은 약 40m에 달하며 길이가 93m  정도다.

 

 

 

 

 

 

 

남벽은 임진강을 따라 길게 형성된 석벽을 활용하여

 암반층에서 부터 지상에 이르기까지 4-5m 두께의 점토 퇴적층을 돌아 가면서 편축방식으로

석축성벽을 축조 하였다.

북벽은 절벽은 아니지만 평균 약40도 정도의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전체적으로 토사에 덮혀 있으나 노출된 부분에서

약 30~40cm정도의 돌들이 성벽 내부에 가득 차 있음을 볼 수 있다.

 

 

 

평양의 대성산성과 당포성에서도 확인된 바 있는 수직 기둥홈과 확이 발견됐다.

기능에 대해서는 성의 방어기능과 관련이 있다는 견해가 있지만

당포성의 경우

석축 내부에서도 발견 되는 것으로 보아 축성과정과 관련되는 유구로 추정된다.

 

 

 

발굴된 유물은 토기와 자기 시대를 달리하는 많은 양의 와편들

오녀산성에서 발견한 것과 비슷한 화살촉, 그시대의 도량형을 이해할 수 있는 저울추.

호자, 그동안 문헌이나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서 그림으로만 존재 했던 상고라고하는 북,

많은 양의 탄화미와 동물의 뼈, 집수시설, 우물지, 고려시대의 건축흔적등 수많은 유물이 발굴됐다.

 

 

 

 

성벽 남쪽은 성으로 진입하는 도로를 개설 하면서

끊긴 곳을 마무리 쌓기 만 했다.

 

 

 

성의 정확한 축성 연대는 알 수 없지만

발견된 유물을 고려할 때 그리고 고구려가 이 지역을

진출한 시기를 놓고볼 때 대략 4세기 말부터

고구려가 멸망에 이르는 7세기 후반까지

고구려의 영역에 속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성은 발굴결과

성의 기단과 중심은 마사토로 판축을 하고

내ㆍ외부는 돌로 쌓아 올린 흙과

돌을 적절히 혼합한 형식의 토석 혼축성으로 만들어졌다.

이는 석성이 갖는 방어력과

흙의 내구성을 적절히 이용한 고구려성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평양의 대성산성에서도 동일한 축성기법을 활용했다고 한다.

 

 

 

 

 

 

 

 

 

 

성터 발굴조사 결과

네 차례에 걸쳐 보수한 흔적이 발견됐다.

바깥에 돌을 쌓고 안쪽으로는 잡석과 진흙으로 다진

고구려의 성벽,

그리고 외벽하단에 석제를 덧붙인 신라의 축성법...

초기의 성인 목책과 토성 석성이 적절하게 결합된 축성술을 보여주고 있다.

 

 

 

 

 

 

전봇대는 성의 공사를 위해서 임시로 세운 것인지?

보기가 좋지 않다.

 

 

 

 

 

 

 

 

 

 

 

강을 사이에 두고 북쪽(호로고루성)과 남쪽(이잔미성)에 성이 마주보고 있다.

 

 

 

 

 

 

 

 

 

 

 

 

우리나라 강중에서

일곱 번째로 큰 임진강,

함경남도 덕원 두류산에서 흐르는 물줄기가

한반도 허리를 가로질러

굽이굽이 치며 파주 탄현에서 한강과 만나 서해로 나간다.

 

 

 

 

 

 

 

 

임진강과 한탄강 지역은

고구려가 남진 할 때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곳이다.

그 강을 건너기에

가장 안전하고 짧은 거리에 그들은 연천군의 고랑포를 택했다.

김유신 장군이 당나라에 군량미를 운송 할때도 이곳을 건넜다.

 

 

 

서기 551년

백제의 성왕은 신라의 진흥왕과 더불어

북진을 감행 하므로 고구려는 한강 일대의 방어망을 상실 했다.

 

 

 

그래서 임진강이 그후 고구려가 멸망 할때까지 약120년간

국경선의 강이 되었다.

목책위주의 방어 시설이었던 성을 

튼튼하게 석축성벽을 쌓고 기와 건물을 짓는 등

고구려는 이곳에 대대적인 토목공사에 들어 갔었다.

 

 

 

 

생각해 보면 백제의 성왕이

신라의 진흥왕을 끌어넣은 것은 커다란 실책이었다.

당시 고구려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이 일기도 하는 등

국력이 크게 떨어져 있어서 성왕 단독으로도 북진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있었다.

 

 

 

 

신라는 국교 단절을 무릎쓰고도

백제가 차지한 한강유역을 급습했다.

 

북변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한강유역을

백제의 손에 둔 채 바라 본다는 것은

더 이상의 북진을

포기하는 것과 같으며 백제와 겨뤄도

승산이 있다고 판단 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오랫동안 지속 되었던 양국과의 화친은 그만 깨어지고 말았다.

 

 

 

 

 

 

 

배를 타지 않고도 건널 수 있는 최초의 여울목...

그곳을 한 눈에 관찰할 수 있는 곳에 고구려군은 성을 쌓았다.

 

 

 

 

 

 

 

 

2003년도, 중국의 동북공정 이후

우리는 고구려사와 고구려 유적에대한 관심이 커졌다.

그것은 중국이 한반도의 통일을 대비해서

고구려사를 왜곡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구려는, 그 수도를 반도에 평양에 둔 한민족의 국가였고

발해는 그 고구려인들이 건설한 국가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발해가 망한이후

그들 지역은 한국사의 기록에서 중단 되었기 때문에

한국사는 결국 반도의 역사로 귀납 된다는 편리한 논리였다.

 

 

 

 

이러한 반도론은 일제의 어용 학자들에 의해 더욱 조장됐다.

한국사의 기반이 반도에 국한하지 않는다는 실례가 다름아닌

고구려, 발해의 존재로 웅변되기 때문이다.

 

 

 

고구려 발해의 역사가 거의, 천년에 걸치는 장구한 연륜임을 감안할 때,

이후 고려 조선의 또한 천년의 걸친 연륜과 비교한다면

어느 한쪽만을 취해서 한국사의 무대를 반도로 축소 시킬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해 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선인들이 천년동안!

나라를 건설하고 민족의 역사를 형성해온 저 만주 대륙은

언제까지나

우리 한민족의 판도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중국이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고구려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소중히하고

그런 얼토당토않는 반도론의 마수에서 벗어나

한국사의 무대를 새로운 각도에서 파악되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삶이 깃든 이야기 > 문화유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교의 역사와 사상  (0) 2013.05.15
연천군 백제 적석총과 온조왕   (0) 2013.01.28
인간의 최초 조상은 누굴까  (0) 2012.08.23
고려8대 현종의 능  (0) 2012.07.28
공양왕릉  (0) 2012.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