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 인류역사 종말론

2013. 2. 8. 22:15참사랑 영원까지/원리강론

제 3 장 인류역사 종말론

 


우리는 지금까지 인류역사(人類歷史)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또 이것이 어디를 향하여 흘러가고 있는 것인지를 모르고 살아왔다. 따라서 인류역사의 종말(終末)에 관한 문제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基督敎) 신도들은 다만 성서(聖書)에 기록되어 있는 문자 그대로, 말세(末世)에는 하늘과 땅이 모두 불에 타서 소멸(消滅)되고(벧후 3 : 12),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마 24 : 29), 천사장(天使長)의 나팔소리와 함께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 일어나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구름 속으로 끌어올리워 공중(空中)에서 예수님을 상봉(相逢)하리라고(살전 4 : 16∼17) 믿고 있다.

 

그러나 사실 성서의 문자 그대로 될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성서의 중요한 많은 부분이 그러하듯이 이 말씀도 무엇을 비유(比喩)하여 말씀하신 것인지, 이 문제를 해명하는 것은 기독교 신도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하여는 먼저 하나님이 피조세계(被造世界)를 창조(創造)하신 목적과 타락(墮落)의 의의, 그리고 구원섭리(救援攝理)의 목적 등 근본문제(根本問題)를 풀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제 1 절 하나님의 창조목적의 완성과 인간의 타락

 

 

Ⅰ. 하나님의 창조목적의 완성

 

이미 창조원리(創造原理)에서 상세히 논술한 바이지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인간을 보시고 기뻐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이 어떻게 되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그의 창조본연의 존재가치(存在價値)를 완전히 나타낼 수 있을 것인가?
인간 이외의 피조물(被造物)은 자연 그대로가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 되도록 창조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은 창조원리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자유의지(自由意志)와 그에 의한 행동을 통하여서 하나님께 기쁨을 돌려드리는 실체대상(實體對象)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스스로 노력하여서 그 뜻대로 생활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심정(心情)을 체휼하여 그 뜻을 알아 가지고 그 뜻대로 생활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던 것이다.

 

 

인간이 그러한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을 개성완성(個性完成)이라고 한다. 비록 부분적으로나마 타락 전의 아담 해와나 선지자(先知者)들이 하나님과 일문일답(一問一答)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인간에게 이와 같이 창조되었던 소성(素性)이 있었기 때문이다.

 

개성을 완성한 인간과 하나님과의 사이는 몸과 마음과의 관계로 비유할 수 있다. 몸은 마음이 거하는 하나의 전(殿)으로서 마음이 명령하는 대로 행동한다. 이와 같이 개성을 완성한 인간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거하시게 되므로, 결국 이러한 인간은 하나님의 성전(聖殿)이 되어 하나님의 뜻대로만 생활하게 된다. 따라서 몸과 마음이 일체를 이루는 것과 같이, 개성을 완성한 인간은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하셨고, 요한복음 14장 20절에는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개성(個性)을 완성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이룸으로써, 성령(聖靈)이 그 안에 거하게 되어 하나님과 일체를 이룬 인간은 신성(神性)을 갖게 되므로 죄를 지으려야 지을 수 없게 되고, 따라서 타락할 수도 없게 된다.

 

개성을 완성한 사람은 곧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이룬 선(善)의 완성체인데, 선의 완성체가 타락된다면 선 그 자체가 파멸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불합리(不合理)한 결과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전능(全能)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이 완성된 입장에서 타락되었다면 하나님의 전능성마저 부정될 수밖에 없다. 영원(永遠)한 주체로 계시는 절대자(絶對者)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도 영원성과 절대성을 가져야 하므로, 개성을 완성한 인간은 절대로 타락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개성을 완성하여 죄를 지을 수 없게 된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의 축복하신 말씀대로(창 1 : 28) 선의 자녀를 번식하여 죄 없는 가정과 사회를 이루었더라면, 이것이 바로 한 부모를 중심한 대가족(大家族)으로 이루어지는 천국(天國)이었을 것이다.
천국은 마치 개성을 완성한 사람 하나의 모양과 같은 세계여서, 인간에 있어 그 두뇌의 종적(縱的)인 명령에 의하여 그의 사지백체(四肢百體)가 서로 횡적(橫的)인 관계를 가지고 활동하듯이, 그 사회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종적인 명령에 의하여 서로 횡적인 유대(紐帶)를 맺어 생활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 있어서는, 어느 한 사람이라도 고통을 당하면 그것을 보시고 같이 서러워하시는 하나님의 심정(心情)을 사회 전체가 그대로 체휼하게 되기 때문에 이웃을 해치는 행위를 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아무리 죄 없는 인간들이 생활하는 사회라 하더라도, 인간이 원시인들과 마찬가지로 미개한 생활을 그대로 할 수밖에 없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바라시고 또 인간이 원하는 천국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만물을 주관하라고 하신 말씀대로(창 1 : 28), 개성을 완성한 인간들은 과학을 발달시켜 자연계(自然界)를 정복함으로써 극도로 안락한 사회환경을 이 지상에 이루어 놓아야 하는 것이니, 이러한 창조이상(創造理想)이 실현된 곳이 바로 지상천국(地上天國)인 것이다.

 

 

이처럼 인간이 완성되어 지상천국을 이루고 살다가 육신을 벗고 영계(靈界)로 가게 되면 바로 거기에 천상천국(天上天國)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은 어디까지나 먼저 이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시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Ⅱ. 인간의 타락

 

창조원리(創造原理)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인간은 아직도 성장기간(成長期間)에 있어서 미완성(未完成)한 입장에 있었을 때에 타락되었다. 인간에게는 왜 성장기간이 필요하였으며, 인간 시조가 미완성기에서 타락되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근거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들도 이미 창조원리에서 밝혔다.

 

인간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전(聖殿)을 이루지 못하고, 사탄이 우거(寓居)하는 전(殿)이 되어 그와 일체를 이룸으로써 신성(神性)을 갖지 못하고 악성(惡性)을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이 악성을 가진 인간이 악의 자녀를 번식하여 악의 가정과 사회와 세계를 이루었으니, 이것이 바로 타락인간이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는 지상지옥(地上地獄)이다. 지옥인간들은 하나님과의 종적인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인간들 사이의 횡적인 유대를 이룰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이웃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서 체휼할 수 없게 되어, 마침내는 이웃을 해치는 행위를 자행하게 된 것이다.

 

인간은 지상지옥(地上地獄)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육신을 벗은 후에는 천상지옥(天上地獄)으로 가게 된다. 이와 같이 인간은 하나님 주권의 세계를 이루지 못하고 사탄 주권의 세계를 이루게 되었다. 사탄을 세상 임금(요 12 : 31), 또는 세상의 신(고후 4 : 4)이라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제 2 절 구 원 섭 리

 

Ⅰ. 구원섭리는 곧 복귀섭리다

 

이 죄악(罪惡)의 세계는 인간이 서러워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도 서러워하시는 세계인 것이다(창 6 : 6).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설움의 세계를 그대로 방임하실 것인가? 기쁨을 누리시려고 창조하셨던 선(善)의 세계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설움이 가득한 죄악의 세계로 영속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면, 하나님은 창조에 실패한 무능한 하나님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기필코 이 죄악의 세계를 구원(救援)하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세계를 어느 정도로 구원하셔야 할 것인가? 두말할 것도 없이 그 구원은 완전한 구원이어야 하므로,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이 죄악의 세계에서 사탄의 악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냄으로써(행 26 : 18) 먼저 인간 시조(始祖)가 타락하기 전의 입장을 복귀(復歸)하는 데까지 구원하시고, 그 위에 선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하시어 하나님이 직접 주관하시는 데까지(행 3 : 21) 나아가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병든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은 병들기 전의 상태로 복귀시킨다는 뜻이요, 물에 빠진 자를 구원한다는 것은 곧 빠지기 전의 입장으로 복귀시킨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죄에 빠진 자를 구원한다는 것은 곧 죄가 없는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입장으로 복귀시킨다는 뜻이 아닐 것인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는 곧 복귀섭리(復歸攝理)인 것이다(행 1 : 6, 마 17 : 11).

 

타락(墮落)은 물론 인간 자신의 과오로 말미암아 되어진 결과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타락이란 결과도 있을 수 있었으므로, 하나님은 이 결과에 대하여 창조주(創造主)로서의 책임을 지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잘못된 결과를 창조본연의 것으로 복귀하시려는 섭리를 하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존(永存)하시는 주체이시므로, 그의 영원한 기쁨의 대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생명도 역시 영원성을 갖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인간에게는 이와 같이 영원성을 두고 창조하셨던 창조원리적인 기준이 있기 때문에, 타락된 인간이라고 해서 이를 아주 없애 버리어 창조원리(創造原理)를 무위로 돌려보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타락인간을 구원하시어 그를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입장으로 복귀하시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런데 원래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3대 축복(三大祝福)을 이루어 주실 것을 약속하셨던 것이므로(창 1 : 28), 이사야 46장 11절에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사탄 때문에 잃어버렸던 이 축복들을 복귀하는 섭리를 하심으로써 그는 약속의 뜻을 이루어 나오셨던 것이다. 마태복음 5장 48절에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도 곧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복귀하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창조본연의 인간은 하나님과 일체가 되어 신성(神性)을 갖게 됨으로써,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중심하고 보면 하나님과 같이 완전하기 때문이다.

 

 

Ⅱ. 복귀섭리의 목적

 

그러면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본래 하나님의 창조목적이었던 선의 대상인 천국을 이루는 것이다. 원래 하나님은 인간을 지상에 창조하시고, 그들을 중심하고 먼저 지상천국(地上天國)을 이루려 하셨다. 그러나 인간 시조(始祖)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셨던 것이기 때문에, 복귀섭리의 제1차적인 목적도 역시 지상천국을 복귀하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복귀섭리의 목적을 완성하기 위하여 오셨던 예수님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이나(마 6 : 10),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고 하신 말씀(마 4 : 17) 등은 모두 복귀섭리의 목적이 지상천국을 복귀하시려는 데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Ⅲ. 인류역사는 곧 복귀섭리역사다

 

우리는 위에서 하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는 바로 복귀섭리(復歸攝理)라는 것을 밝혔다. 그러므로 인류역사(人類歷史)는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여 그들로 하여금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선(善)의 세계를 복귀케 하시려는 섭리역사(攝理歷史)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류역사는 곧 복귀섭리의 역사라는 것을 여러 면으로 고찰해 보기로 하자.

 

첫째로, 문화권 발전사(文化圈發展史)의 입장에서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무리 악한 인간이라 하여도 악을 버리고 선을 따르려는 본심(本心)만은 누구나 공통하게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선이며 어떻게 해야 선을 이룰 것인가 하는 것은 지능에 속하는 것이어서 시대와 장소와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르기 때문에 서로 상충되어 투쟁의 역사를 엮어 내려온 것이 사실이지만, 선을 찾아 세우려는 그들의 근본목적만은 모두 동일하다.

 

그러면 어찌하여 인간의 본심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선을 지향하고 있는가? 그것은 선의 주체이신 하나님이 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한 선의 실체대상(實體對象)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으므로, 비록 타락인간은 사탄의 역사로 말미암아 선의 생활은 할 수 없게 되었으나 선을 추구하는 그 본심만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간들로써 엮어져 내려오는 역사의 갈 곳은 결국 선(善)의 세계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본심(本心)이 아무리 선을 지향하여 노력한다고 하여도, 이미 악주권하(惡主權下)에 놓여진 이 세계에서는 그 선의 실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시공을 초월한 세계에서 그 선의 주체를 찾으려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니, 이러한 필연적인 요구에 의하여 탄생한 것이 바로 종교(宗敎)인 것이다. 이와 같이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모르게 된 인간은 종교를 세워 부단히 선을 찾아 나아감으로써 하나님을 만나려고 한 것이었기 때문에, 설혹 종교를 받들고 있었던 개인이나 민족이나 국가는 망하였다 할지라도 종교 그 자체만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남아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국가 흥망사(國家興亡史)를 중심하고 더듬어 보기로 하자.

 

먼저 중국(中國)의 역사를 보면 춘추전국(春秋戰國)의 각 시대를 거치어 진(秦) 통일시대가 왔고, 전한(前漢), 신(新), 후한(後漢), 삼국(三國), 서진(西晋), 동진(東晋), 남북조(南北朝)의 각 시대를 거치어 수(隋) 당(唐) 통일시대가 왔으며, 오대(五代), 북송(北宋), 남송(南宋), 원(元), 명(明), 청(淸)의 시대를 거치어 오늘의 중화민국(中華民國)에 이르기까지 복잡다양한 국가의 흥망과 정권의 교체를 거듭하여 내려왔으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儒)·불(佛)·선(仙)의 극동종교(極東宗敎)만은 엄연히 그대로 남아져 있다.

 

다음으로 인도(印度)의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마우리아, 안드라, 굽타, 바루다나, 사만, 가즈니, 무갈제국을 거쳐서 오늘의 인도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변천은 거듭되어 내려왔으나 힌두교만은 쇠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또 중동지역(中東地域)의 역사를 보면 사라센제국, 동·서 칼리프, 셀주크 터키, 오스만 터키 등 나라의 주권은 여러 차례 바뀌어 내려왔으나, 그들이 신봉하는 이슬람교만은 연면하게 그 명맥이 끊기지 않고 이어져 내려왔다.

 

나아가 유럽사의 주류에서 그 실증을 찾아보기로 하자. 유럽의 주도권은 그리스, 로마, 프랑크,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거쳐 일시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지나 영국으로 옮겨졌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미국과 소련으로 나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基督敎)만은 그대로 융흥(隆興)해 왔으며, 유물사관(唯物史觀) 위에 세워진 전제정체하(專制政體下)의 소련에서마저 기독교는 아직도 멸할 수 없는 것으로서 남아져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모든 국가 흥망의 발자취를 깊이 더듬어 보면, 종교를 박해하는 나라는 망하였고, 종교를 보호하고 육성시킨 나라는 흥하였으며, 그 나라의 주권은 보다 더 종교를 숭앙(崇仰)하는 나라에로 넘겨져 간 역사적인 사실을 우리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종교를 박해하고 있는 공산주의세계(共産主義世界)가 괴멸될 날이 기필코 오리라는 것은 종교사(宗敎史)가 실증적으로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역사상에는 많은 종교가 오고 갔다. 그 가운데서 영향력이 큰 종교는 반드시 문화권(文化圈)을 형성하여 왔는데, 문헌에 나타나 있는 문화권만 해도 21 내지 26개나 된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에 따라 점차로 열등한 것은 보다 우수한 것에 흡수되었거나 또는 융화되어 왔다. 그리하여 근세에 이르러서는 위에서 열거한 대로 수다한 국가 흥망의 굽이침 속에서 결국 극동문화권(極東文化圈), 인도교문화권(印度敎文化圈), 회회교문화권(回回敎文化圈), 기독교문화권(基督敎文化圈) 등의 4대 문화권이 남아지게 되었고, 이것들은 다시 기독교를 중심한 하나의 세계적인 문화권을 형성해 가는 추세를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선을 지향해 온 모든 종교의 목적을 함께 달성해야 할 최종적인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역사적인 귀추로 보아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문화권의 발전사가 수많은 종교의 소장(消長) 또는 융합(融合)에 따라 결국 하나의 종교를 중심한 세계적인 문화권을 형성해 가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은, 인류역사가 바로 하나의 통일된 세계에로 복귀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둘째로, 종교와 과학의 동향으로 보아도 우리는 인류역사가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역사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타락인간의 양면의 무지(無知)를 극복하기 위한 종교와 과학이 오늘에 이르러서는 통일된 하나의 과제로서 해결되어야 할 때가 되었다 함은 이미 총서(總序)에서 논술하였다.

 

 

이와 같이 역사 이래 서로 관련이 없이 독자적으로 발달해 온 종교와 과학이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각각 제 갈 곳을 다 가서 한 자리에서 서로 만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은, 인류역사가 이제까지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세계를 복귀하는 섭리노정을 걸어 나왔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타락(墮落)되지 않았더라면 인간의 지능이 영적인 면에서 최고도에까지 향상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육적인 면에서도 최고도로 발달되어 과학은 그때 극히 단시일 내에 놀라울 정도로 향상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과 같은 과학사회(科學社會)는 벌써 인간 시조 당시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무지에 빠지게 되면서 그러한 사회를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유구한 역사의 기간을 두고 과학으로써 그 무지를 타개하면서 창조본연의 이상적 과학사회를 복귀하여 나왔다.

 

그런데 오늘의 과학사회는 극도로 발달되어, 외적으로는 이상사회(理想社會)에로 전환될 수 있는 그 전 단계에까지 복귀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셋째로, 투쟁역사(鬪爭歷史)의 귀추로 보아도 인류역사는 복귀섭리역사(復歸攝理歷史)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재물을 빼앗고 땅을 빼앗으며 사람을 빼앗으려는 싸움은 인류사회의 발달과 더불어 벌어져,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구한 역사의 기간을 두고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되어 왔다.

 

 

그리고 이 싸움은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를 중심한 싸움으로 그 범위를 넓혀 나와, 오늘에 이르러는 민주(民主)와 공산(共産) 두 세계가 마지막 싸움을 겨루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제 인류역사의 종말을 고하는 이 마지막 때에 있어서, 천륜(天倫)은 드디어 재물이나 땅이나 사람을 빼앗아 가지고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해 온 역사적인 단계를 지나서, 민주주의(民主主義)라는 이름을 띠고 이 땅에 찾아왔다. 1차대전이 끝난 후에는 패전국가(敗戰國家)가 식민지를 내놓더니, 2차대전이 끝나고 나서는 전승국가(戰勝國家)들이 차례로 식민지를 내놓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한편 오늘의 강대국들은 그들의 일개 도시만도 못한 약소국가들을 유엔에 가입시키고, 그들을 먹여 살릴 뿐 아니라, 자기와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주어 모두 형제국가들을 만들고 있다.

 

그러면 이 마지막 싸움이란 어떠한 싸움일 것인가? 그것은 이념(理念)의 싸움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세계를 위협하고 있는 유물사관(唯物史觀)을 완전히 전복시킬 수 있는 진리가 나오지 않는 한, 민주와 공산의 두 세계의 싸움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와 과학을 통일된 하나의 과제로 해결할 수 있는 진리가 나올 때, 비로소 종교를 부인하고 과학 편중의 발달을 꾀해 나온 공산주의사상은 전복되고 두 세계는 하나의 이념 아래 완전히 통일될 것이다. 이와 같이 투쟁역사의 귀추로 보아도 인류역사는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세계를 복귀하는 섭리역사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넷째로, 우리는 성서(聖書)를 중심하고 좀더 이 문제를 알아보기로 하자. 인류역사의 목적은 ‘생명나무’(창 2 : 9)를 중심한 에덴동산을 복귀하려는 데 있다(전편 제2장 제1절 Ⅰ). 그런데 에덴동산은 아담과 해와가 창조된 어떤 국한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 전체를 의미한다. 만일 에덴동산이 인간 시조(始祖)가 창조되었던 그 어느 한정된 지역만을 말한다면, 땅에 충만하도록 번성하라 하신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창 1 : 28)에 의하여 번식될 그 숱한 인류가 어떻게 그 좁은 곳에서 다 살 수 있을 것인가?

 

인간 조상이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생명나무’를 중심하고 세우려던 에덴동산은 사탄에게 내주게 되었었다(창 3 : 24). 그래서 알파로 시작된 인류 죄악역사(罪惡歷史)가 오메가로 끝날 때의 타락인간(墮落人間)의 소망은, 죄악으로 물든 옷을 깨끗이 빨아 입고 복귀된 에덴동산으로 다시 들어가 잃어버렸던 그 ‘생명나무’를 다시 찾아 나아가는 데 있다고 요한계시록 22장 13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 이 성서의 내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미 타락론(墮落論)에서 밝혀진 바이지만, ‘생명나무’는 완성한 아담 곧 인류의 참아버지를 말하는 것이다. 부모가 타락되어 그의 후손도 원죄(原罪)를 가진 자녀들이 되었으니, 이 죄악의 자녀들이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인간으로 복귀되기 위하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모두 거듭나지(重生) 않으면 아니 된다(중생론 참조). 그러므로 역사는 인류를 다시 낳아 주실 참아버지 되시는 예수님을 찾아 나온 것이니, 역사의 종말기(終末期)에 들어 성도(聖徒)들이 소망하고 찾아 나아가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요한계시록의 ‘생명나무’는 바로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성서의 기록을 보아도, 역사의 목적은 ‘생명나무’로 오실 예수님을 중심한 창조본연의 에덴동산을 복귀하려는 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한계시록 21장 1절 내지 7절에도 역사의 종말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바로 사탄의 주관하에 있던 옛 하늘과 옛 땅이 하나님을 중심한 예수님 주권하의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복귀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로마서 8장 19절 내지 22절에는 사탄 주관하에서 탄식하고 있는 만물(萬物)도 말세에 불에 타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입장으로 복귀함으로써 새롭게 되기 위하여(계 21 : 5) 자기를 주관해 줄 수 있는 창조본연의 하나님의 아들들이 복귀되어 나타나기를 고대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여러 면으로 고찰하여 볼 때, 인류역사는 창조본연의 세계에로 복귀하는 섭리역사(攝理歷史)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제 4 절 말세와 현세

 

예수님께서 장차 있을 베드로의 죽음에 관하여 말씀하실 때에, 이 말씀을 듣고 있던 베드로가 요한은 어떻게 될 것인가고 질문하였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요 21 : 22)고 대답하셨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들은 사도(使徒)들은 모두 요한의 생전에 예수께서 재림하실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마태복음 10장 23절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스라엘의 모든 동리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고 하셨고, 마태복음 16장 28절에는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말씀들에 의하여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러했거니와,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성도들은 저마다 자기 당대(當代)에 예수님이 오실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언제나 말세라는 절박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말세(末世)에 대한 근본 뜻을 몰랐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서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으로 세우고 이루어 나오시던 3대 축복(三大祝福)이 복귀되어 가는 현상으로 보아 현세가 바로 말세임을 입증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마 24 : 32)라고 하셨다.

 

 

Ⅰ. 제1축복 복귀의 현상

이미 창조원리(創造原理)에서 논술한 바,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에게 약속하셨던 제1축복(第一祝福)은 바로 그들이 개성(個性)을 완성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타락인간(墮落人間)을 개성을 완성한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인간으로 복귀해 나오신 하나님의 섭리가 그 최종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은, 아래와 같은 여러 현상으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이다.

 

첫째로, 타락인간의 심령(心靈)이 복귀되어 가는 것으로 보아 그러하다. 인간이 완성되면 하나님과 완전히 심정적인 일체를 이루어 서로 교통(交通)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함은 이미 위에서 논한 바와 같다. 그러므로 아담과 해와도 불완전한 상태이기는 하였지만 하나님과 일문일답하던 단계에서 타락되어, 그의 후손은 하나님을 모르는 데까지 떨어져 버린 것이다. 이렇게 타락된 인간이 복귀섭리의 시대적인 혜택을 받게 됨에 따라 점차 그 심령이 복귀됨으로써, 말세에 이르러서는 사도행전 2장 17절에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영통(靈通)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세에 이르러서는 영통하는 성도들이 우후(雨後)의 죽순(竹筍)같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아, 현세는 말세이기 때문에 인간이 개성을 완성하여 하나님의 제1축복(第一祝福)을 복귀할 수 있는 시대에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타락인간이 본심(本心)의 자유를 복귀해 가고 있는 역사적인 귀추가 더욱 그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사탄의 주관하에 들어 본심의 자유에 구속을 받게 됨으로써,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유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나 현세에 이르러서는 육신의 생명을 버리고라도 본심의 자유를 찾으려는 심정이 고조되고 있으니, 이것은 말세(末世)가 되어 개성을 완성함으로써 타락인간이 사탄에게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제1축복(第一祝福)을 복귀하여 하나님 앞으로 자유로이 나아갈 수 있는 시대에로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타락인간의 창조본연(創造本然)의 가치성이 복귀되어 가는 현상으로 보아 더욱 그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창조본연의 가치는 횡적으로 보면 누구나 동등하기 때문에 그 가치가 그다지 귀중한 것같이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하늘을 중심하고 종적으로 보면, 각 개성은 가장 존귀한 천주적인 가치를 제각기 띠고 있는 것이다(전편 제7장 제1절). 그러나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이러한 가치를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현세에 이르러 민주주의사상(民主主義思想)이 고조됨에 따라 인간이 노예 해방, 흑인 해방, 약소민족 해방 등을 주장하며 인권옹호(人權擁護)와 남녀평등(男女平等)과 만민평등(萬民平等)을 부르짖음으로써 창조본연의 개성의 가치를 최고도로 추구하는 데 이르렀으니, 이것은 바로 말세가 다 되어 타락인간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제1축복을 복귀할 수 있는 시대에로 들어가고 있음을 실증하는 것이다.

 

넷째로, 타락인간의 본성(本性)의 사랑이 복귀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이상(創造理想)을 완성한 세계는 완성한 사람 하나 모양의 세계로서, 그 세계의 인간은 모두 하나님과 종적으로 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인간 상호간에 있어서도 횡적으로 일체를 이루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계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써 종횡(縱橫)으로 얽히어 한 몸같이 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종적인 사랑이 끊어졌기 때문에 인간들 사이의 횡적인 사랑도 따라서 끊어지게 되어 인류역사는 투쟁으로써 엮어져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현세(現世)에 이르러서는 박애주의사상(博愛主義思想)이 고조되면서 인간이 점점 그 본성애(本性愛)를 찾아 들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아, 현세는 하나님의 제1축복(第一祝福)을 복귀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하고 개성을 완성할 수 있는 말세(末世)에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Ⅱ. 제2축복 복귀의 현상

 

하나님의 제2축복(第二祝福)은 아담과 해와가 참부모로 완성되어 선의 자녀를 번식함으로써 선주권(善主權)의 가정과 사회와 세계를 이루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아담과 해와는 타락되어 악의 부모가 되었기 때문에, 전인류는 악의 자녀들이 되어 악주권(惡主權)에 구속된 세계를 이루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편으로 종교를 세워 역사하심으로써 내적인 사탄 분립에 의한 심령복귀(心靈復歸)의 섭리를 하시고, 또 한편으로는 투쟁과 전쟁으로 외적인 사탄 분립을 하심으로써 내외 양면에 걸친 주권복귀(主權復歸)의 섭리를 해 내려오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인류역사는 내외(內外) 양면의 사탄 분립에 의한 복귀섭리(復歸攝理)로서 장차 참부모 되신 예수님을 모실 수 있는 자녀를 찾아 하나님의 제2축복(第二祝福)을 복귀해 온 것이므로, 종교를 중심한 문화권의 발전사와 국가 흥망사에 의해 나타난 내외 양면에 걸친 하나님의 주권복귀의 현상으로 보아 현세가 바로 말세(末世)임을 알 수 있다.

 

먼저 우리는 문화권 발전사가 어떻게 흘러 내려와서 현세를 말세에로 이끌어 가고 있는가를 알아보자.
문화권 발전사에 관한 문제는 이미 여러 차례 논술한 바이지만, 하나님은 타락인간에게 성현(聖賢)들을 보내시어 선을 지향하는 인간의 본심을 따라 종교를 세우게 하심으로써 그 종교를 중심한 문화권을 일으키셨다. 그러므로 역사상에는 많은 문화권이 일어났던 것이었으나,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이것들은 서로 융합 또는 흡수되어 현세에 이르러서는 기독교(基督敎)를 중심한 하나의 세계적인 문화권을 형성해 가는 추세를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인 추세는 기독교의 중심인 예수님을 중심하고 모든 민족이 같은 형제의 입장에 서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제2축복(第二祝福)이 복귀되어 간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것은, 전인류(全人類)의 참부모를 찾아 세워 가지고 그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중생(重生)하여 선의 자녀가 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본연(創造本然)의 대가족의 세계를 복귀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곧 기독교가 복귀섭리의 목적을 완성할 중심 종교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세에 이르러서는 세계가 기독교를 중심하고 하나의 문화권으로 형성되어, 인류의 참부모 되신 예수와 성신(전편 제7장 참조)을 중심하고 모든 인간이 선의 자녀의 입장에 서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제2축복(第二祝福) 복귀의 현상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우리는 현세가 바로 말세(末世)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국가 흥망사는 어떻게 주권복귀(主權復歸)의 목적을 향하여 흘러와서, 현세를 말세에로 이끌어 가고 있는가를 알아보자.
투쟁이나 전쟁을 단순히 어떠한 이해관계나 이념의 상충에서 빚어지는 결과라고 보는 것은 하나님의 근본섭리(根本攝理)를 모르는 데서 일어나는 잘못이다. 인류역사는 인간 시조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사탄을 중심한 악주권(惡主權)으로 출발하여 죄악의 역사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이 남아 있는 한, 그 역사의 목적도 어디까지나 사탄을 분립하여 하나님의 선주권(善主權)을 복귀하는 데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악주권의 세계에 전쟁도 분열도 없다면 그 세계는 그대로 영속(永續)할 것이요, 따라서 선주권은 영원히 복귀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타락인간에게 성현(聖賢)들을 보내시어 선을 세우고 종교를 일으키심으로써, 보다 선한 주권으로 하여금 보다 악한 주권을 멸하게 하시면서 점차적으로 하늘편 주권을 복귀하시는 섭리를 해 오신 것이다. 따라서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는 투쟁과 전쟁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하여는 후편에서 더욱 상세히 논하겠거니와, 인류역사는 탕감복귀(蕩減復歸)의 섭리노정을 밟아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국한된 시간권 내에서만 보면 악이 승세(勝勢)한 때도 없지 않았으나, 결국 그것은 패망하여 보다 선한 판도 내에 흡수되곤 하였다. 그러므로 전쟁으로 인한 국가의 흥망성쇠(興亡盛衰)는 선주권을 복귀하기 위한 섭리노정에서 일어나는 불가피한 결과인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세워 가나안 7족을 멸하셨던 것이고, 사울은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아말렉족과 그에 속한 짐승들을 전멸시키지 않았다가 엄벌을 받았던 것이다(삼상 15 : 18∼23). 하나님은 이와 같이 직접 이민족(異民族)들을 멸할 것을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선민(選民)이었던 북조 이스라엘도 악으로 돌아갈 때 아낌없이 그들을 앗시리아에 내주시어 멸망케 하셨던 것이다(왕하 17 : 23). 하나님이 이와 같이 하셨던 것은 오직 악주권(惡主權)을 멸하시고 선주권(善主權)을 복귀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같은 하늘편 안에서의 개인적인 투쟁은 선주권 자체를 파괴하는 결과가 되므로 악이 되지만, 선주권이 악주권을 멸하는 것은 하나님의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므로 이것은 선이 된다.
이와 같이 사탄 분립을 위한 투쟁의 역사는 점차적으로 땅과 재물을 세계적으로 빼앗아 하늘편 주권으로 복귀하는 데 이르렀고, 인간에 있어서도 개인으로부터 가정과 사회와 국가에로 하늘편 기대를 넓혀, 오늘날에는 이것을 세계적으로 복귀하는 데 이르렀다. 이렇듯 사탄 분립을 위한 섭리가 씨족주의시대(氏族主義時代)에서 출발하여 봉건주의시대(封建主義時代)와 군주주의시대(君主主義時代)를 거치어 민주주의시대(民主主義時代)로 들어오게 된 오늘날에 와서는, 이 인간세계를 하늘편 주권을 세우는 민주주의세계와 사탄편 주권을 세우는 공산주의세계의 두 세계로 분립하여 놓았다.

 

이와 같이 사탄을 중심한 악주권(惡主權)으로써 출발한 인류역사는, 한편으로 종교와 철학과 윤리에 의하여 선을 지향하는 인간의 창조본성(創造本性)이 환기됨에 따라 점차 악주권에서 선주권(善主權)을 위한 세력이 분립되어, 마침내 세계적으로 대립되는 두 주권을 형성하는 데 이르른 것이다. 그런데 목적이 상반되는 이 두 주권이 결코 공존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인류역사의 종말에 이르르면 이것들은 반드시 한 점에서 교차(交叉)되어 이념을 중심하고 내적으로 상충하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군사력을 중심하고 외적으로 전쟁을 하여, 결국 사탄주권은 영원히 파멸되고 하늘편 주권만이 영원한 하나님의 단일주권(單一主權)으로서 복귀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세는 선주권을 지향하는 하늘편 세계와 사탄을 중심한 악주권의 세계가 대결하여 서로 교차되고 있는 때이므로 또한 말세인 것이다.

 

이와 같이 악주권에서 선주권을 분립하여 나온 인류역사는, 마치 흐르는 흙물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흙은 가라앉고 물은 위에 뜨게 되어 나중에는 흙과 물이 완전히 분리되는 것과 같이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악주권은 점차 쇠망(衰亡)의 길로 내려오고 선주권은 융흥(隆興)의 길로 올라가게 되어, 역사의 종말에 이르러 이 두 주권은 얼마동안 교차되었다가 결국 전자는 영원히 멸망하고 후자는 하나님의 주권으로서 영원히 남아지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선(善) 악(惡) 두 주권의 역사노정(歷史路程)이 교차되는 때가 말세(末世)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때는 아담과 해와가 타락된 장성기 완성급(長成期 完成級)의 시기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는 때이므로, 마치 에덴동산의 인간 시조가 어디에다 중심을 두어야 할지 모르고 혼돈되었던 것과 같이 모든 인간들도 사상의 혼돈을 일으키어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복귀섭리노정(復歸攝理路程)에 있어 이와 같이 말세가 되어 선악의 두 주권이 교차되었던 때는 여러 차례 있었다. 위에서 이미 논술한 바와 같이, 노아 때나 예수님 때도 말세여서 이 두 주권은 서로 교차되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인간이 그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지 못하여 악주권을 멸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주권 분립(主權分立)의 섭리를 다시 하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 재림기(再臨期)에 있어 다시 한 번 두 주권의 교차가 있게 되는 것이다. 복귀섭리노정은 이렇듯 주기적으로 상사(相似)의 나선상(螺線狀)을 반복하면서 원형과정(圓形過程)을 거쳐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지향하여 내려왔기 때문에, 역사상에는 필연적으로 동시성의 시대가 형성되었던 것이다(후편 제3장 제1절 참조).

 

 

Ⅲ. 제3축복 복귀의 현상

 

하나님의 제3축복(第三祝福)은 아담과 해와가 완성되어 피조세계(被造世界)에 대한 주관성(主管性)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피조세계에 대한 인간의 주관성은 내외(內外) 양면의 주관성이 있다.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이 양면의 주관성을 상실하였던 것인데, 현세(現世)에 이르러 이것이 복귀되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아 현세는 말세(末世)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내적 주관성이라는 것은 심정적 주관성을 의미한다. 인간이 개성을 완성하면 하나님과 심정적인 일체를 이루어 하나님의 심정(心情)을 그대로 체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완성됨으로써 피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심정과 동일한 심정을 가지고 피조세계에 대하여 사랑을 주고 그로부터 미(美)를 돌려 받게 될 때, 인간은 피조세계에 대한 심정적인 주관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타락되어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심정으로써 피조세계를 대할 수 없게 되었었다. 그러나 종교(宗敎), 철학(哲學), 윤리(倫理) 등에 의한 하나님의 복귀섭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대한 타락인간의 심령(心靈)이 점차로 밝아지게 되어, 현세에 이르러서는 피조세계(被造世界)에 대한 심정적인 주관자의 자격을 복귀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외적 주관성은 과학(科學)에 의한 주관성을 의미한다. 만일 인간이 완성되어 피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의 심정과 동일한 심정을 가지고 피조세계를 대하여 내적 주관을 할 수 있었더라면, 인간의 영감(靈感)은 고차적으로 발달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과학의 발달도 극히 단시일에 최고도에 달하게 되었을 것이었다. 인간은 그렇게 됨으로써 피조물(被造物)에 대한 외적인 주관을 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따라서 인간은 일찍이 천체(天體)를 비롯한 자연계(自然界) 전체를 완전히 정복하였을 뿐만 아니라, 과학의 발달에 따르는 경제발전으로 말미암아 지극히 안락한 생활환경을 이루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墮落)으로 인하여 심령이 어두워짐으로써 피조물에 대한 내적인 주관성을 상실하게 되어 동물과 같이 영감이 둔한 미개인으로 영락(零落)되었기 때문에, 피조물에 대한 외적인 주관성도 상실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복귀섭리(復歸攝理)에 의하여 심령이 밝아짐에 따라 피조물에 대한 내적인 주관성도 복귀되어 왔고, 그에 따라 피조물에 대한 외적인 주관성도 점차로 복귀되어 왔기 때문에 현세에 이르러서는 과학의 발달도 최고도에 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과학의 발달에 따르는 경제발전으로 말미암아 현대인은 극도로 안락한 생활환경을 이룩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타락인간의 피조세계에 대한 주관성을 복귀함에 따라 하나님의 제3축복(第三祝福)이 복귀되어 가는 현상을 볼 때, 우리는 현세가 말세(末世)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이미 위에서 여러 번 보아 온 바와 같이, 문화권(文化圈)의 발전도 하나의 종교를 중심하고 하나의 세계적인 문화권을 형성해 가고 있고, 국가 형태도 하나의 세계적인 주권기구를 지향하여 국제연맹(國際聯盟)에서 국제연합(國際聯合)으로,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세계정부(世界政府)를 모색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경제발전을 놓고 보더라도 세계는 하나의 공동시장(共同市場)을 이루어 가는 추세에 있으며, 극도로 발달된 교통기관과 통신기관은 시간과 공간을 단축시켜서 인간으로 하여금 지구를 하나의 정원과 같이 거닐고 또 교통할 수 있게 하였으며, 동서(東西)의 이색민족(異色民族)들을 한 가족처럼 접촉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리하여 인류는 사해동포(四海同胞)의 형제애(兄弟愛)를 부르짖고 있다. 그러나 가정은 부모가 있음으로써만 이루어지며, 또 거기에서만 진정한 형제애는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인류의 부모 되신 예수님만 재림하시면 전인류는 하나의 정원에서 하나의 대가족(大家族)을 이루어 가지고 단란하게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것을 보더라도 현세는 말세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흘러온 역사가 인류에게 주어야 할 최후의 선물이 한 가지 있으니, 그것은 목적 없이 한 정원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는 낯선 이 나그네들을 한 부모를 중심한 한 식구로 묶어 줄 수 있는 천주적(天宙的)인 이념인 것이다.

 

 

제 5 절 말세와 새 말씀과 우리의 자세

 

Ⅰ. 말세와 새 진리

 

타락인간(墮落人間)은 종교에 의하여 신령(神靈)과 진리(眞理)로써(요 4 : 23) 그의 심령(心靈)과 지능(知能)을 깨우쳐서 그의 내적인 무지를 타개하여 나아간다. 그런데 진리에 있어서도 내적인 무지를 타개하는 종교에 의한 내적인 진리와 외적인 무지를 타개하는 과학에 의한 외적인 진리의 두 면이 있다. 따라서 지능에도 내적인 진리에 의하여 깨우쳐지는 내적인 지능과 외적인 진리에 의하여 깨우쳐지는 외적인 지능의 두 면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적인 지능은 내적인 진리를 찾아 종교를 세워 나아가고, 외적인 지능은 외적인 진리를 찾아서 과학을 세워 나아가는 것이다.

 

신령은 무형세계(無形世界)에 관한 사실들이 영적 오관(五官)에 의하여 영인체(靈人體)에 영적으로 인식되었다가 이것이 다시 육적 오관에 공명되어 생리적으로 인식되는 것이며, 진리는 유형세계(有形世界)로부터 직접 인간의 생리적인 감각기관에 의하여 인식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식도 영육(靈肉) 양면의 과정을 거쳐서 오게 된다. 인간은 영인체와 육신이 합해야만 완전한 인간이 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영적 과정에 의한 신령과 육적 과정에 의한 진리가 완전히 조화되어 심령과 지능이 아울러 깨우쳐짐으로써, 이 두 과정을 통해 온 양면의 인식이 완전히 일치될 때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과 전피조세계(全被造世界)에 관하여 완전한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무지에 빠진 인간으로 하여금 신령과 진리에 의하여 심령과 지능을 아울러 깨우치게 함으로써,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복귀하여 나아가는 섭리를 하신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이러한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시대적인 혜택을 받아서 그의 심령과 지능의 정도가 역사의 흐름에 따라 점차로 높아지게 되는 것이므로, 그를 깨우치기 위한 신령(神靈)과 진리(眞理)도 또한 점차로 그 정도를 높이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령과 진리는 유일(唯一)하고 영원 불변(永遠不變)하지만, 무지한 상태로부터 점차적으로 복귀되어 나아가는 인간에게 그것을 가르치시기 위한 범위나 그것을 표현하는 정도나 방법은 시대를 따라 달리하시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예를 들면, 인간이 아직도 몽매하여 진리를 직접 받을 수 없었던 구약 전 시대(舊約前時代)에는 진리 대신으로 제물(祭物)을 드리게 하셨고, 인간의 심령과 지능의 정도가 높아짐에 따라 모세 때는 율법(律法)을, 예수님 때는 복음(福音)을 주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의 말씀을 진리라고 하시지 않고, 그 자신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다(요 14 : 6). 왜냐하면 그의 말씀은 어디까지나 진리 되신 자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어서 그 말씀을 받는 대상에 따라서 그 범위와 정도와 방법을 달리하시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서의 문자는 진리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요, 진리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이러한 견지에 입각해 볼 때, 신약성서(新約聖書)는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있어 심령과 지능의 정도가 대단히 저급(低級)하였을 때의 인간들로 하여금 진리를 알게 하기 위해 주셨던 하나의 과정적인 교과서(敎科書)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당시의 사람들을 깨우치기에 알맞도록 주셨던, 한정된 범위 내에서의 비유 또는 상징적인 표현 방법 그대로를 가지고 현대과학 문명인(文明人)들의 진리 욕구(眞理慾求)를 완전히 충족시킨다는 것은 결정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지성인(知性人)들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는 보다 고차적인 내용과 과학적인 표현 방법에 의한 것이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우리는 새 진리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새 진리는 이미 총서(總序)에서 논한 바, 인간의 내외 양면의 무지를 타개하기 위하여 종교와 과학을 하나의 통일된 과제로 완전히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새 진리가 나와야 할 이유를 또 다른 면에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성서(聖書)는 진리 자체가 아니라 그 진리를 가르쳐 주는 하나의 교과서인 것이다. 그런데 이 교과서에는 그 진리의 중요한 부분이 거의 상징과 비유로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을 해석하는 방법에는 사람에 따라 서로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 차이로 말미암아 많은 교파(敎派)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교파 분열의 제1원인은 인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성서 자체에 있기 때문에, 그 분열과 싸움은 계속 확대되어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 진리가 나와서 상징과 비유로 되어 있는 성경의 근본내용을 누구나 공인(公認)할 수 있도록 해명하지 않는 한 교파분열과 그 싸움의 길은 막을 수 없을 것이며, 따라서 기독교의 통일에 의한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요 16 : 25)는 말씀으로써 끝날이 이르면 다시 새로운 진리의 말씀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 3 : 12)고 하신 말씀대로,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하실 말씀을 못다 하시고 십자가(十字架)에 돌아가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까지도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 16 : 12)고 하심으로써, 속에 있는 말씀을 다 하시지 못하는 서러운 심정을 토로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못다 하시고 돌아가셨던 그 말씀은 영원히 비밀로 남아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 : 13)고 계속하여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 말씀은 반드시 성령(聖靈)에 의하여 새로운 진리로써 가르쳐 주시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계 5 : 1)고도 기록되어 있는 바로 그 책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신 그 말씀이 인봉(印封)되어 있는 것이다. 이에 계속하여 기록되어 있는 말씀을 보면,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 능히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여 요한이 애곡(哀哭)할 때에, 유대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계 5 : 5)고 말씀하셨다. 여기의 다윗의 뿌리에서 탄생한 사자(獅子)는 바로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가 인류 앞에 오랫동안 일곱 인(印)으로 봉하여 비밀로 남겨 두셨던 그 말씀의 인봉을 떼시어 성도들에게 새로운 진리의 말씀으로 주실 때가 와야 할 것이기 때문에,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계 10 : 11)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러기에 또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행 2 : 17∼18)라고도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여러모로 보아서 말세(末世)에는 반드시 새 진리가 나와야 하는 것이다.

 

 

Ⅱ. 말세에 처한 우리들이 취할 자세

 

복귀섭리역사(復歸攝理歷史)의 흐름을 보면, 낡은 것이 끝나려 할 때 새로운 것은 시작된다. 따라서 낡은 것이 끝나는 점이 바로 새로운 것이 시작되는 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낡은 역사의 종말기(終末期)는 바로 새 역사의 시창기(始創期)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시기는 같은 점에서 출발하여 각각 그 목적을 달리하여 가지고 세계적인 결실을 하게 된 선(善)과 악(惡)의 두 주권이 서로 교차되는 시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처한 인간들은 내적으로는 이념(理念)과 사상(思想)의 결핍으로 인한 불안과 공포와 혼돈 속에 빠지게 되며, 외적으로는 무기로 인한 알력과 투쟁 속에서 떨게 될 것이다. 따라서 말세에는 나라가 나라를 치고, 민족과 민족이 상쟁하며, 가족들이 서로 결투를 하리라(마 24 : 4∼9)는 성서의 기록대로 온갖 비참한 현상이 실제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말세에 있어서 이와 같은 참상(慘狀)이 일어나는 것은 악주권(惡主權)을 청산하고 선주권(善主權)을 세우기 위한 필연적인 현상이므로, 하나님은 이러한 참상 속에서 새 시대를 이룩하기 위한 선주권의 중심을 반드시 세우시는 것이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 그리고 예수님 같은 분들은 모두 그러한 새 시대의 중심으로 세워졌던 분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역사적인 전환기(轉換期)에 있어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새 역사의 동참자가 되기 위하여는, 하나님이 세우신 새 역사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 시대의 섭리(攝理)는 낡은 시대를 완전히 청산한 터 위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낡은 시대의 종말기의 환경 속에서 싹이 트고 자라나는 것이므로 그 시대에 대하여는 상충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 섭리는 낡은 시대의 인습(因習)에 젖은 사람에게는 좀처럼 납득되지 않는다. 새 시대의 섭리를 담당하고 나왔던 성현(聖賢)들이 모두 그 시대의 희생자가 되어 버렸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 실례로서, 아직도 구약시대(舊約時代)의 종말기였을 때에 신약시대(新約時代)의 새로운 섭리의 중심으로 오셨던 예수님은 구약 율법주의자(律法主義者)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이단자(異端者)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었기 때문에 종내 유대인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살해당하고 마셨다.

 

 

예수님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눅 5 : 38)고 말씀하셨던 이유도 또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제 예수님은 다시 신약시대의 종말기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한 새로운 섭리의 중심으로 오셔서, 새 시대의 건설을 위한(계 21 : 1∼7) 새 진리를 주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초림(初臨) 때에 유대인들로부터 바알세불이 접한 사람으로 몰렸듯이(마 12 : 24), 재림(再臨) 때도 틀림없이 기독교 신도들에게 몰림을 당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장차 재림하시면 자기가 많은 고난을 받으며 그 세대에 버린 바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던 것이다(눅 17 : 25). 그러므로 역사의 전환기에 있어서 그대로 낡은 시대의 환경에 집착되어 안도하려는 사람들은 낡은 시대와 더불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타락된 인간은 신령(神靈)에 대한 감성이 극히 둔하기 때문에, 대개 진리면에 치중하여 복귀섭리노정(復歸攝理路程)을 따라 나가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들은 흔히 낡은 시대의 진리관(眞理觀)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에, 복귀섭리가 새로운 섭리의 시대에로 전환하고 있어도 그들은 이 새 시대의 섭리에 쉽게 감응하여 따라갈 수는 없는 것이다. 구약성서(舊約聖書)에 집착되었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따라 신약시대(新約時代)의 섭리에 호응할 수 없었던 사실은 이것을 입증하는 좋은 예라 하겠다.
그러나 기도로써 신령한 것을 감득할 수 있는 성도들은 새 시대의 섭리를 심령적으로 알게 되므로, 낡은 시대의 진리면에서는 상충적인 입장에 서면서도 신령을 따라 새 시대의 섭리에 호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 중에는 구약성서에 집착된 인물은 하나도 없었고 오직 마음에 느껴지는 신령을 따라간 사람들뿐이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나 양심적인 사람들이 말세(末世)에 있어서 극심한 심적인 초조감을 면할 수 없게 되는 이유는, 그들이 막연하나마 신령을 감득하여서 마음으로는 새 시대의 섭리를 따르려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이 방향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새 진리에 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령적으로 이러한 상태에 처한 신도들이, 그들을 새 시대의 섭리에로 이끌어 주는 새 진리를 듣기만 하면 신령과 진리가 동시에 그들의 심령(心靈)과 지능(知能)을 깨우쳐서, 새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적인 요구를 완전히 인식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그에 호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세에 처한 현세인(現世人)은 무엇보다도 먼저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를 통하여 신령(神靈)한 것을 감득하도록 힘써야 한다.
다음으로는 인습적인 관념에 집착되지 말고 우리의 몸을 신령에 호응하게 함으로써, 새 시대의 섭리에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새 진리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찾아진 그 진리가 완전히 자기의 몸에서 신령과 하나되어 진정한 천적(天的)인 기쁨이 심령의 깊은 곳에서 용솟음치게 하여 주는가를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만 끝날의 성도들은 참된 구원(救援)의 길을 찾아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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