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 메시아의 강림과 그 재림의 목적

2013. 2. 8. 19:09참사랑 영원까지/원리강론

제 4 장 메시아의 강림과 그 재림의 목적

 

 

메시아라는 낱말은 히브리 말로서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인데, 특히 왕(王)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스라엘 선민(選民)들은 그의 선지자(先知者)들의 예언에 의하여 장차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구세주(救世主)를 왕으로 보내마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있었으니, 이것이 곧 이스라엘의 메시아사상이다. 이러한 메시아로 오셨던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이 ‘그리스도’란 말은 메시아와 같은 뜻의 헬라어로서 보통 구세주로 통한다.

 

메시아는 하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셔야 한다. 이처럼 인간에게 구원이 필요하게 된 것은 인간이 타락(墮落)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는 먼저 타락에 관한 문제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타락은 곧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타락에 관한 문제를 논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창조목적에 관한 문제를 해명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은 먼저 지상에 천국이 건설됨으로써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지상천국(地上天國)은 이루어지지 않고 지상지옥(地上地獄)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 후 하나님은 이것을 복귀하시려는 섭리를 거듭해 내려오셨다. 따라서 인류역사는 복귀섭리역사(復歸攝理歷史)이기 때문에 이 역사의 목적은 먼저 지상에 천국을 복귀하려는 데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문제들을 이미 전편 제3장 제1절과 제2절에서 상세히 논술한 바 있는 것이다.

 

 

제 1 절 십자가에 의한 구원섭리

 

Ⅰ. 메시아로 강림하셨던 예수님의 목적

 

예수님이 메시아로 강림(降臨)하셨던 목적은 타락인간(墮落人間)을 완전히 구원(救援)하시려는 데 있었던 것이므로, 결국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을 이루시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천국을 이루셔야 했던 것이며, 따라서 지상천국(地上天國)을 먼저 이루셔야 했었다. 이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 : 48)고 하신 말씀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창조원리(創造原理)에 의하면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인간은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어 신성(神性)을 갖게 되므로 죄를 지을 수 없다. 따라서 그러한 인간은 창조목적을 두고 보면 하늘 아버지의 완전함같이 완전한 인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이 말씀은 바로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으로 복귀되어서 천국인(天國人)이 되라는 말씀이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타락인간을 천국인으로 복귀케 하여 지상천국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에,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셨고(마 6 : 10), 또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고 외치셨던 것이다(마 4 : 17). 그래서 그의 앞길을 예비하러 왔던 세례 요한도 역시 천국이 가까웠다고 부르짖었던 것이다(마 3 : 2).

 

그러면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으로 복귀되어 예수님이 하신 말씀대로 하늘 아버지의 완전함과 같이 완전하게 된 사람은 어떠한 사람일 것인가? 이러한 인간은 하나님과 일체가 되어 그의 심정(心情)을 체휼함으로써 신성(神性)을 갖게 되어 하나님과 불가분(不可分)의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은 원죄(原罪)가 없으므로 다시 속죄(贖罪)할 필요가 없고, 따라서 구주(救主)가 필요 없게 되며, 타락인간에게 요구되는 기도나 신앙의 생활도 역시 필요 없게 된다. 그뿐 아니라 이러한 인간들에게는 원죄가 없으므로 그들은 원죄 없는 선(善)의 자손을 번식하게 되며, 따라서 그 자손들에게도 속죄를 위한 구주가 필요 없게 된다.

 

 

Ⅱ. 십자가의 대속으로 인하여 구원섭리가 완성되었는가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代贖)으로 인하여 과연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이 완성되어 모든 성도들이 창조본성(創造本性)을 복귀함으로써 지상천국을 이루게 되었는가? 인류역사 이래 아무리 잘 믿는 성도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함으로써 신성을 갖게 되어 하나님과 일체불가분(一體不可分)의 생활을 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따라서 속죄가 필요 없고 기도나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도 되는 성도는 하나도 없는 것이다. 사실상 바울같이 훌륭한 신앙자에게 있어서도 눈물겨운 기도와 신앙생활은 없을 수 없었던 것이다(롬 7 : 18∼25).

 

 

뿐만 아니라 아무리 잘 믿는 부모라 할지라도 구주의 대속함이 없이 천국 갈 수 있는 원죄 없는 자식을 낳을 수는 없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그 부모가 여전히 자식에게 원죄를 유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기독교 신도들의 이러한 신앙생활의 실상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는가? 그것은 십자가에 의한 속죄(贖罪)가 우리의 원죄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인간의 창조본성을 완전히 복귀해 주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듯 십자가의 대속(代贖)으로써는 메시아로 강림하셨던 그의 목적을 완전히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재림(再臨)하실 것을 약속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지상천국을 복귀하시려는 뜻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이 절대적이어서 변할 수 없는 것임을 아셨기 때문에 다시 오셔서 그 뜻을 완성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면 십자가(十字架)의 희생은 전혀 무위(無爲)로 돌아간 것인가? 결코 그런 것은 아니다(요 3 : 16).

 

 

만일 그렇다면 오늘의 기독교(基督敎)의 역사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체험으로 보아도 십자가 대속의 은사가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대속의 역사(役事)를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원죄까지 완전히 벗겨 줌으로써 죄를 지으려 하여도 지을 수 없는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인간으로 복귀시켜서 지상천국(地上天國)을 이루어 놓지 못하고 있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십자가로 인한 속죄의 한계는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현대 지성인들의 신앙을 교도(敎導)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문제를 밝히 알아야겠다.

 

 

Ⅲ.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우리는 먼저 성경상에 나타난 사도(使徒)들의 언행(言行)을 중심삼고 예수님의 십자가(十字架)의 죽음이 당연한 것이었던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사도들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공통적으로 느낀 뚜렷한 하나의 정념(情念)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억울하게 여김으로써 분개하고 서러워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준 유대인들의 무지와 불신을 통분히 여겼으며, 그들의 행위를 패역무도(悖逆無道)한 것으로 여겨 저주하였다(행 7 : 51∼53). 그뿐 아니라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기독교 신도들도 공통적으로 당시의 사도들과 같은 심정을 가지고 내려왔던 것이다.

 

 

만일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의 예정에서 온 필연적인 결과였다면 사도들이 그의 죽음을 서러워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인정이겠지만, 하나님의 예정대로 이루어진 그 섭리(攝理)의 결과에 대해서 그렇게도 분개하고 저주했을 리는 없는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예수님은 온당치 않은 죽음의 길을 걸어가셨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에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로 보아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과연 하나님의 예정(豫定)에서 되어진 필연적인 결과였던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에서 이스라엘 선민을 부르시어 저들을 보호 육성하시고, 때로는 그들을 고난과 시련으로써 인도하셨다.

 

 

그리고 많은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내시어 위로하시며 장차 메시아를 보내실 것을 굳게 약속하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성막(聖幕)과 성전(聖殿)을 지음으로써 메시아를 맞을 준비를 하게 하시고, 동방박사(東方博士), 시므온, 안나, 세례 요한 등을 보내시어 메시아의 탄생과 그의 현현을 널리 증거하셨던 것이다.
특히 세례 요한에 대해서는 그가 잉태(孕胎)될 때 천사(天使)가 나타나서 증거한 사실을 유대인들이 다 알고 있었고(눅 1 : 13), 그가 출생할 때에 되어진 기사(奇事)는 당시의 유대 성중(城中)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눅 1 : 63∼66). 뿐만 아니라 광야에 있어서의 그의 수도생활(修道生活)은 모든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가 메시아가 아닌가고 생각케 할 정도로 놀랄 만한 것이었다(눅 3 : 15).

 

 

하나님이 이렇듯 위대한 세례 요한까지 보내시어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거하게 하셨던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유대인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이 어디까지나 이스라엘로 하여금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게 하려는 데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이스라엘은 그를 메시아로 믿어야만 했었다. 만일 저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더라면,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고대해 왔던 그 메시아를 누가 십자가(十字架)에 내주었을 것인가?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길에 내준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반(反)하여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길을 가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음으로 우리는 예수님 자신의 언행(言行)으로 보아서, 그의 십자가의 죽음이 과연 메시아로 오셨던 그 전목적을 이루기 위한 길이었던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하나님의 모든 섭리가 그러했었던 것과 같이, 예수님도 유대인들로 하여금 자기를 메시아로 믿을 수 있도록 언행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성서를 통하여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고 물었을 때,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 : 29)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은 또 유대인들의 배신행위를 가슴 아프게 생각하시고 호소할 곳이 없어 성을 바라다보고 우시면서, 하나님이 2천년 동안이나 애쓰시며 사랑으로 이끌어 온 이스라엘 선민은 두말할 것도 없고 이 성마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겨지지 않을 정도로 멸망해 버리고 말 것이라고 저주하시면서, 이는 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눅 19 : 41∼44)고 명백히 그 무지를 지적하셨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 : 37)라고 하시어 그들의 완고와 불신을 한탄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를 위하여 증거하고 있는 성경을 보면서도 믿지 못하는 그들의 무지를 책망하시면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 : 39∼40)라고 슬퍼하셨다.

 

 

그는 또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라고 서러워하시면서, 이어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요 5 : 43∼46)고도 말씀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불신을 돌이키시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이적(異蹟)과 기사(奇事)를 보여 주셨던가. 그러나 그들은 그 놀라운 일들을 보면서도 예수님을 바알세불이 접한 자라고 비난하지 않았던가(마 12 : 24). 그리고 이러한 비참한 정경(情景)을 보시는 예수님은 때로는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 10 : 38)고도 말씀하셨다.

 

 

그런가 하면 때로는 그들에게 화가 있으라고 분노를 퍼붓기도 하셨던 것이다(마 23 : 13∼36).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를 믿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도 이와 같이 저들에게 자기를 믿을 수 있도록 언행을 하셨던 것이다. 만일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그리고 예수님이 원하신 대로 그를 메시아로 믿었더라면 누가 그를 십자가의 죽음길로 몰아냈을 것인가!

 

우리는 위에서 논증한 모든 사실로 보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그가 메시아로 오셨던 전목적을 완성하기 위한 예정에서 온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무지와 불신의 결과로 온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2장 8절의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는 성구는 바로 이 사실을 충분히 증거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라 하겠다.

 

만일 예수님의 십자가 노정이 하나님께서 본래부터 예정하신 길이었다면, 그는 당연히 가셔야 할 길을 걸어가시면서 무엇 때문에 할 만하면 그 죽음의 잔을 면케 해 달라고 세 번씩이나 기도를 올리셨을 것인가(마 26 : 39)? 실상 그것은 인간이 타락(墮落)된 이후 4천년 동안이나 하나님께서 이루시려고 애쓰셨던 지상천국이 유대인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지 않고, 예수님이 재림(再臨)하실 때까지 고난의 역사가 그대로 연장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요한복음 3장 1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埃及)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 광야(曠野)에서 모세를 믿지 않게 되자 불뱀이 나와서 그들을 물어 죽이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구리뱀을 장대 끝에 달게 하여 그것을 쳐다본 사람은 살게 하셨다. 마찬가지로 유대민족이 예수님을 믿지 않음으로써 만민이 지옥으로 가야만 하게 되었기 때문에, 장차 예수님이 구리뱀과 같이 십자가(十字架)에 달리신 후 그것을 쳐다보고 믿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을 예견(豫見)하시면서 예수님은 서글픈 심정으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었다.

 

예수님이 예언하신 대로(눅 19 : 44) 그가 돌아가신 후 이스라엘 선민이 쇠망(衰亡)한 것을 보아도,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사야 9장 6절 이하에 한 아이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예수님이 다윗 왕의 위(位)를 가지고 오셔서 영원히 멸하지 않을 왕국을 세우실 것을 예언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잉태될 때에도,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 : 31∼33)는 말씀을 전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스라엘 선민을 불러 2천년간이나 고난 가운데서 이끌어 나오신 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내시어 영원히 존속할 왕국을 이룩하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메시아로 오셨다가 유대인들에게 몰려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저들은 선민의 자격을 잃어버리고 지리멸렬(支離滅裂)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민족적인 학대를 받아 나왔다.

 

 

이것은 그들이 신봉(信奉)해야 할 메시아를 도리어 살해함으로써 구원섭리(救援攝理)의 목적을 이루시지 못하게 하였던 그 범죄에 대한 벌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이후 수많은 성도들이 당하여 온 십자가의 고난도 예수님을 살해한 연대적 범죄(連帶的 犯罪)에 대한 형벌이었던 것이다.

 

 

Ⅳ. 십자가의 대속으로 인한 구원의 한계와 예수재림의 목적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十字架)로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예수님은 영육(靈肉) 양면의 구원섭리를 완수하셨을 것이다. 그리하여 선지자(先知者) 이사야의 예언(사 9 : 6∼7)과 마리아에게 나타났던 천사의 교시(눅 1 : 31∼33) 그대로, 또 예수께서 친히 천국이 가까웠다고 하신 말씀(마 4 : 17)과 같이 그는 영원토록 소멸되지 않는 지상천국을 건설하셨을 것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육신을 창조하시고 거기에 생기(生氣)를 불어넣어 생령(生靈)이 되게 하셨다(창 2 : 7). 이와 같이 영(靈)과 육(肉)으로 창조된 인간이므로, 타락도 역시 영육 아울러 된 것이었다. 따라서 구원도 영적 구원과 육적 구원을 아울러 하셔야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메시아로 강림하셨던 목적이 구원섭리를 완수하시려는 데 있었으므로, 그는 영적 구원과 육적 구원을 아울러 완성하셔야만 되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일체를 이룬다는 뜻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스스로를 포도나무로 신도들을 그 가지로 비유하셨고(요 15 : 5), 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 : 20)고도 하셨다.

 

 

이처럼 말씀하신 이유는 영육(靈肉) 아울러 타락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가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를 믿음으로써 영육 아울러 그와 하나가 되었더라면 타락인간도 영육 아울러 구원을 받았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불신하여 그를 십자가(十字架)에 내주었으므로 그의 육신은 사탄의 침범을 당하여 마침내 살해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에 사탄의 침범을 당한 예수님을 믿어 그와 한 몸을 이룬 신도들의 육신도 그대로 사탄의 침범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어 아무리 독실한 신앙자라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贖罪)로써는 육적 구원은 완성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혈통적인 원죄(原罪)가 청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잘 믿는 성도라 할지라도 그에게 원죄는 그대로 남아지게 되어 그는 또 원죄 있는 자식을 낳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육신을 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원죄로 말미암아 항상 육신을 통하여 들어오는 사탄 침범의 조건을 막기 위함이며,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 : 17)한 것도 이와 같이 십자가에 의한 구속(救贖)으로도 근절되지 않은 원죄로 인한 사탄 침범의 조건을 막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그의 육신이 사탄의 침범을 당함으로써 육적 구원섭리의 목적은 달성하시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의 피의 대속(代贖)으로 부활의 승리적인 기대를 조성함으로써 영적 구원의 기대를 완성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 부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신도들은 영적 구원섭리의 혜택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십자가의 대속(代贖)으로 인한 구원은 영적 구원뿐이므로 잘 믿는 신도들에게도 원죄(原罪)는 육적으로 여전히 남아 있어서 그것이 계속적으로 그 자손들에게 유전되어 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성도들은 그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죄와 더불어 더욱 치열한 싸움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십가가로써 청산하시지 못한 원죄를 속하고 육적 구원을 완성함으로써 영육(靈肉) 아우른 구원섭리의 목적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지상에 재림하시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십자가의 대속을 받은 성도들도 원죄와 싸워야 하기 때문에, 사도(使徒)들 중에서 신앙의 중심이 되었던 바울도 육적으로 들어오는 죄악의 길을 막을 수 없는 자신을 한탄하던 끝에,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 : 25)고 말하였다.

 

 

이것은 영적 구원의 완성에 대한 기쁨과 동시에 육적 구원의 미완성에 대한 비탄을 표명한 것이라 하겠다. 또 요한일서 1장 8절 내지 10절에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라고 한 요한의 고백대로, 예수님의 십가가의 구원을 받고 있는 우리들도 여전히 원죄 때문에 범죄자임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Ⅴ. 십자가에 대한 예언의 양면

 

예수님의 십자가(十字架)의 죽음이 그가 메시아로 오셨던 전목적을 완성하기 위한 예정에서 온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면, 이사야 53장에 그가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실 것으로 예언되어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실 것을 예언한 말씀만이 성경에 있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원리(原理)를 알고 성서를 다시 읽어 보면, 구약시대(舊約時代)에 이미 선지자(先知者) 이사야에 의하여 예언된 이사야 9장, 11장, 60장 등의 말씀 그대로, 하나님께서 마리아에게 천사(天使)를 보내시어 장차 잉태될 예수님이 생전에 유대인의 왕이 되어 영영세세(永永世世)토록 소멸되지 않는 왕국을 지상에 건설하실 것을 예언케 하셨던 사실을 알게 된다(눅 1 : 31∼33). 그러면 어찌하여 이와 같이 예수님에 대한 예언을 양면으로 하게 되었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인간 자신이 그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완수함으로써만 완성할 수 있도록 창조하셨다(전편 제1장 제5절 Ⅱ 2). 그런데 실제에 있어서 인간 시조(始祖)는 그들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고 타락되었다. 이와 같이 인간은 하나님의 뜻대로 자기의 책임분담을 완수할 수도 있었던 것이지만,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뜻에 반(反)하여 그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를 성서에서 들어 보면,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지 않아야 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분담이었기 때문에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것을 안 따먹고 완성될 수도 있는 반면에 결과적으로 나타난 사실과 같이 따먹고 죽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한편 또 하나님은 구약시대의 구원섭리(救援攝理)를 위한 인간책임분담(人間責任分擔)의 조건으로 십계명(十誡命)을 주셨던 것인데, 여기에서도 인간은 그것을 지키어 구원을 받을 수도 있었고, 혹은 그것을 지키지 않고 멸망을 당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애급(埃及)에서 가나안 복지(福地)를 향하여 떠난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세워야 할 책임분담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모세의 명령에 순종하여 가나안 복지로 들어갈 수도 있었고, 혹은 불순종(不順從)하여 못 들어가게 될 수도 있었다. 사실상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가나안 복지로 들어가게 하실 것을 예정하시고(출 3 : 8) 그에게 이를 명령하셨었으나, 불신으로 인하여 그들은 모두 광야(曠野)에서 쓰러지고 그 후손들만이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에게는 인간 자신이 수행해야 될 책임분담(責任分擔)이 있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그것을 이루어 드릴 수도 있고, 혹은 그 뜻에 반하여 이루어 드리지 못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인간은 그 자신의 책임분담 수행 여부에 따라 그 어느 한 면의 결과를 이루어 놓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뜻 성사에 대한 예언을 양면으로 하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메시아를 보내시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분담이지만, 오시는 메시아를 믿고 안 믿는 것은 인간의 책임분담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내시는 메시아를 유대민족이 하나님의 뜻대로 믿을 수도 있었던 것이고, 혹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믿지 않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책임분담 수행 여부에 따라 나타날 양면의 결과에 대비하여 하나님은 예수님의 뜻 성사에 대한 예언을 양면으로 하시지 않을 수 없으셨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사야 53장의 기록과 같이 유대민족이 불신으로 돌아가는 경우에 대한 예언도 하셨지만, 한편 이사야 9장, 11장, 60장과 누가복음 1장 31절 이하의 기록과 같이 저들이 메시아를 믿고 모심으로써 영광으로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는 경우에 대한 예언도 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사야 53장의 예언만이 이루어지고, 이사야 9장, 11장, 60장 및 누가복음 1장 31절 이하의 예언은 모두 재림하셔서 이루어질 말씀으로 남아진 것이다.

 

 

Ⅵ. 십자가의 죽음이 필연적인 것처럼 기록되어있는 성구

 

복음서(福音書)를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필연적인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 데가 많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을 들어 보면, 예수께서 자신이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실 것을 예언하실 때, 이것을 만류하는 베드로를 보시고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마 16 : 23)고 하신 책망으로 미루어 그의 십자가의 죽음이 필연적이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지 않고서야 예수님이 어찌하여 베드로를 대해 그토록 책망하셨을 것인가? 그러나 실에 있어 예수님은 그때 이미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인하여 어차피 영육(靈肉) 아우른 구원섭리(救援攝理)를 완성하실 수 없게 되자, 영적 구원만이라도 이루시려고 그 탕감조건(蕩減條件)으로서 부득이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로 결정하고 계시던 때였다(눅 9 : 31). 그런 때에 베드로가 이 길을 만류한 것은 결국 십자가로 인한 영적 구원섭리의 길마저 방해하는 것이 되었기 때문에 그처럼 책망하셨던 것이다.

 

다음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상(十字架上)에서 다 이루었다(요 19 : 30)고 최후의 말씀을 하신 것은 십자가로써 구원섭리의 전목적이 완성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유대인들의 불신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아시게 된 후부터 예수님은 육적 구원은 재림(再臨) 후의 섭리로 미루시고, 영적 구원섭리의 기대만이라도 조성하시려고 십자가의 노정을 걸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하신 그 말씀은,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인하여 제2차적인 구원섭리의 목적으로 세우셨던 십자가에 의한 영적 구원섭리의 기대를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바른 신앙을 갖기 위하여는, 첫째로 기도에 의한 신령(神靈)으로 하나님과 직접 영교(靈交)해야 되고, 다음으로는 성서를 바르게 읽음으로써 진리(眞理)를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이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라(요 4 : 24)고 말씀하신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예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도(聖徒)들은 예수님은 죽음의 길을 가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던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이 메시아로 오셨던 근본목적을 알지 못하고 영적 구원이 예수님이 띠고 오셨던 사명의 전부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살아서 뜻을 이루시려고 오셨다가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원치 않는 죽음의 길을 가신 예수님의 억울하고도 비통한 심정을 풀어 드리고 그의 뜻을 맞추어 드리는 신부가 지상에 생겨나기 전에, 예수님이 누구와 더불어 그 뜻을 이루시겠다고 재림(再臨)하실 것인가!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 : 8)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무지를 예상하시고 개탄하신 말씀이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성서를 중심하고,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죽음의 길을 가시려고 오신 분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밝혔지만, 영교로써 예수님에게 직접 물어 보면 더욱 명백하게 이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자기가 영통(靈通)을 하지 못하면 영통하는 딴 사람의 증언을 통하여서라도 바른 신앙을 가져야만 끝날에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신부의 자격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제 2 절 엘리야의 재림과 세례 요한

 

 

엘리야가 재림(再臨)하리라는 것은 이미 말라기 선지(先知)가 예언했던 바였고(말 4 : 5), 세례 요한이 바로 재림한 엘리야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증언이었다(마 17 : 13, 마 11 : 14). 그러나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재림자(再臨者)였다는 사실은 일반 유대인은 물론 세례 요한 자신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요 1 : 21), 이로부터 예수님에 대한 세례 요한의 의혹(마 11 : 3)과 그에 따르는 유대인들의 불신은 날로 더하여지게 되어, 마침내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Ⅰ. 엘리야의 재림을 중심한 유대인들의 심적 동향

 

통일왕국시대(統一王國時代)에 있어서 솔로몬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의 성전이상(聖殿理想)은 사탄의 침범을 당하게 되었었다. 그리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던 성전이상을 다시 찾아 세워 실체성전 된 메시아를 맞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4대선지(四大先知)와 12소선지(十二小先知)를 보내시어 사탄 분립의 역사를 하셨다. 또 하나님께서 특별선지(特別先知) 엘리야를 보내시어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케 하여 바알신을 멸하신 것도 이러한 이상실현(理想實現)의 뜻을 가로막는 사탄을 멸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의 천적인 사명을 다 이루지 못하고 승천(昇天)하였기 때문에(왕하 2 : 11), 메시아를 맞기 위하여 사탄을 분립해 가는 노정에 다시 사탄이 횡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실체성전이상이 이루어지기 위하여는, 이에 앞서 엘리야가 지상에서 다 이루지 못하고 간 사탄 분립의 사명을 계승 완수하게 하는 섭리가 있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이러한 섭리적인 필연성에 의하여 선지자(先知者) 말라기는 엘리야가 재림해야 할 것을 예언했던 것이다(말 4 : 5).

 

선지자들의 예언을 믿고 있던 유대인들의 간곡한 소망은 물론 메시아의 강림(降臨)이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유대인들이 갈망해 왔던 것은 엘리야의 재림(再臨)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이 말라기 선지를 통하여 메시아의 강림에 앞서 그의 앞길을 예비하게 하시기 위하여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마고 분명히 약속하셨었기 때문이다(말 4 : 5). 그런데 엘리야는 이미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900여년 전에 승천한 선지자로서(왕하 2 : 11), 그는 분명히 영계(靈界)에 있다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나타나 보인 사실이 있다(눅 9 : 31).

 

 

이와 같이 되어 유대민족은 하늘에 머물고 있는 엘리야가 다시 올 때에는 전에 승천하던 모양으로 반드시 하늘로부터 내려오리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마치 오늘날의 기독교 신도들이 예수께서 구름을 타고 재림하시리라고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듯이, 당시의 유대인들도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엘리야가 다시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선지자 말라기의 예언대로 엘리야가 다시 왔다는 소식은 없고 예수님께서 느닷없이 메시아를 자처하고 나섰을 때, 예루살렘에는 일대 혼란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7장 10절을 보면, 제자들은 가는 곳마다 만일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그보다 먼저 오기로 약속되어 있는(말 4 : 5) 엘리야는 어디 와 있는가 하는 공박(攻駁)을 받게 되었다. 제자들은 그 답변에 궁하여 예수님께 직접 문의한 결과(마 17 : 10), 예수님은 바로 세례 요한이 그들이 고대하고 있는 엘리야라고 대답해 주셨다(마 11 : 14, 마 17 : 13).

 

제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이 바로 엘리야라고 하신 예수님의 증언을 그대로 믿을 수 있었겠지만, 아직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고 있는 다른 유대인들이야 어떻게 예수님의 이러한 증언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인가? 예수님 자신도 유대인들이 자기의 증언을 즐겨 받지 않을 것을 아셨기 때문에,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마 11 : 14)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세례 요한이 엘리야라고 하신 예수님의 증언을 더욱 믿을 수 없었던 것은, 요한복음 1장 21절의 기록에 보이는 바 이미 세례 요한 자신이 자기는 엘리야가 아니라고 명백히 부인한 뒤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Ⅱ. 유대민족의 갈 길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가리켜서 그가 바로 유대인들이 고대하고 있는 엘리야라 하셨고(마 11 : 14), 이와 반대로 장본인인 세례 요한 자신은 이미 이 사실을 부인하여 버렸으니 유대민족은 누구의 말을 곧이듣고 따라갈 수 있었을 것인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당시의 유대인들의 눈에 예수님과 세례 요한 두 분 가운데서 누가 더 믿을 수 있는 인물로 비쳐졌던가 하는 데 따라서 좌우될 문제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먼저 당시 유대민족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한 것으로 보여졌을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보자.
예수님은 빈천(貧賤)한 목수(木手)의 가정에서 생장(生長)한 하나의 배우지 못한 청년이었다. 이러한 청년이 이름 없이 일어나 스스로 안식일(安息日)의 주인이라 칭하면서 유대인들이 생명과 같이 여기는 안식일을 범하였다(마 12 : 1∼8).

 

그러므로 예수님은 유대인의 구원의 푯대인 율법(律法)을 폐하는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마 5 : 17). 따라서 예수님은 유대인의 지도자들에게 몰린 바 되어 하는 수 없이 어부(漁夫)를 불러 제자를 삼았으며 세리(稅吏)와 창기(娼妓)와 죄인(罪人)들의 친구가 되어 함께 먹고 마셨다(마 11 : 19).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유대인의 지도자들보다도 세리들과 창기들이 먼저 천국에 들어간다고(마 21 : 31) 주장하셨던 것이다.

 

한 여인이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털로 씻은 후에 그의 발에 입을 맞추고 값진 기름을 부은 일이 있었다(눅 7 : 37∼38). 이러한 행동은 오늘날의 사회에 있어서도 용납(容納)되기 어려운 일이어든, 하물며 음행(淫行)하는 여인을 돌로 쳐 죽여도 말 못 하던 유대인의 엄격한 윤리사회(倫理社會)에 있어서 어떻게 허용될 수 있었을 것인가?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용납하셨을 뿐 아니라, 여인의 태도를 비난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시고 도리어 그 여인을 칭찬하셨던 것이다(눅 7 : 44∼50, 마 26 : 7∼13).

 

한편 또 예수님은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한 입장에 세우시고(요 14 : 9), 자기로 말미암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자가 없다고 주장하시면서(요 14 : 6), 자기를 그들의 부모나 형제나 처자나 무엇보다도 더 사랑해야 된다고 강조하셨다(마 10 : 37, 눅 14 : 26). 예수님의 모습이 이러하였으므로,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그를 마귀의 왕 바알세불이 접한 사람이라고 비난하며 조소(嘲笑)하였던 것이다(마 12 : 24).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전후 사정을 종합하여 볼 때 당시의 유대인들의 눈에 비친 예수님은 결코 믿겨운 존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당시의 유대민족의 입장에서 본 세례 요한의 모습은 어떠했을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보자.
세례 요한은 당시의 명문가인 제사장(祭司長) 사가랴의 아들로 태어났다(눅 1 : 13). 그의 부친이 지성소(至聖所)에서 분향할 때에 그 아내가 아들을 잉태하리라는 천사의 말을 곧이듣지 아니함으로써 벙어리가 되었다가, 요한이 출생하자마자 그 입이 열린 기사이적(奇事異蹟) 등으로 인하여 온 유대 고을 사람들이 크게 놀랐던 것이다(눅 1 : 9∼66).

 

 

뿐만 아니라 광야(曠野)에서 메뚜기와 석청(石淸)으로 연명하면서 수도(修道)하던 그의 빛나는 신앙생활을 보고, 일반 유대인들은 물론 제사장들까지도 그에게 혹 당신이 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물어 볼 정도로 그는 유대인들에게 훌륭하게 보였던 것이다(눅 3 : 15, 요 1 : 20).
위에서 밝힌 바 그 당시의 사정을 놓고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모습과 세례 요한의 모습을 비교해 볼 때, 과연 그들이 누구의 말을 더 믿을 수 있었을 것인가? 그것이 세례 요한의 말이었을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의 사실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을 엘리야라고 하신 예수님의 증언보다도 자기는 엘리야가 아니라고 부인한 세례 요한의 말을 더 믿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세례 요한의 말을 믿게 되자, 예수님의 이 증언은 메시아로 자처하기 위한 일종의 위증(僞證)이 되고 말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연히 망언자(妄言者)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망언자로 몰리게 될 때, 위에서 논급한 바와 같은 예수님의 모습은 모두가 유대인들에게 있어 거리끼는 것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불신의 도는 점점 더 높아지기만 하였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불신하고 세례 요한의 말을 믿고 보니 엘리야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메시아가 오셨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유대인들은 말라기의 예언(豫言)을 믿는 입장에 서면 아직 엘리야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메시아로 자처하는 예수님을 버릴 수밖에 없었고, 이와 반대로 예수님을 믿는 입장에 서면 엘리야가 온 다음에야 메시아가 오시리라고 예언한 성경을 버릴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었다. 거기에서 도저히 하나님의 예언을 저버릴 수는 없었던 유대인들은 부득이 예수님을 불신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Ⅲ. 세례 요한의 불신

 

위에서 상론(詳論)한 바와 같이, 당시의 제사장(祭司長)이나 전유대인들이 세례 요한을 숭경(崇敬)하던 마음은 그를 메시아로 생각하는 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눅 3 : 15, 요 1 : 20). 따라서 만일 세례 요한이 자기가 바로 예수님이 증언하신 그대로의 엘리야라는 것을 선포하고 나섰더라면, 메시아를 맞기 위하여 엘리야를 고대하고 있었던 전유대인들은 이러한 세례 요한의 증언을 믿게 되어 모두 예수님 앞으로 나왔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끝내 자기는 엘리야가 아니라고 주장한 세례 요한의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무지는 유대인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던 주요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세례 요한은 일찍이 자기는 물로 세례(洗禮)를 주지만, 자기 뒤에 오시는 이(예수님)는 불과 성령(聖靈)으로 세례를 주시기 때문에 자기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증거하였다(마 3 : 11).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1장 33절을 보면,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하나님)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그리스도)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고 한 세례 요한의 고백이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세례 요한에게 직접 교시(敎示)하셨고, 세례 요한 자신도 또 그렇게 증거하였으며, 한편 요한복음 1장 23절을 보면 자기는 그의 길을 곧게 하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왔다고까지 말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3장 28절에는 자신이 그리스도에 앞서 보내심을 받은 자임을 언명(言明)한 기록이 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응당 자기가 엘리야라고 하는 사실을 스스로의 지혜로써도 알았어야 할 것이었다. 설혹 세례 요한이 그 사실을 미처 자각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이미 하늘로부터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증거받아 알고 있는 위에(요 1 : 33∼34) 예수님이 친히 자기를 엘리야라고 증언하셨으니, 자기도 그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가 바로 엘리야라고 하는 것을 뒤늦게라도 선포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 앞에 무지하여(마 11 : 19) 이미 예수님의 증언을 부인했을 뿐만 아니라(요 1 : 21) 그 후에도 섭리의 방향과 길을 달리하고 있었으니, 이러한 세례 요한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이나 또 이렇듯 난처한 입장에 놓인 예수님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서러우셨을 것인가!
사실상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洗禮)를 주고 그를 증거함으로써 그의 증거자로서의 사명은 다 끝난 것이었다. 그러면 그 후에 있어서의 그의 사명은 무엇이었을 것인가?

 

그의 부친 사가랴는 성령(聖靈)에 감동되어 아직 복중(腹中)에 있었던 세례 요한을 두고서,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눅 1 : 75)고 그의 사명을 분명히 예언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증거한 후에는 그 앞에 하나의 제자의 입장에서 그를 모시고 섬겨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후에 예수님과 분리되어서 따로 세례를 주고 다녔기 때문에 누가복음 3장 15절을 보면 유대인들은 도리어 세례 요한을 메시아로 혼동하였고, 한편 또 요한복음 1장 20절을 보면 제사장까지도 그렇게 혼동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과 세례 요한의 제자가 서로 자기의 선생이 세례를 많이 준다고 결례(潔禮)를 중심하고 싸운 일까지 있었다(요 3 : 25).
그리고 요한복음 3장 30절에 세례 요한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한 것을 보더라도, 그는 예수님과 흥망성쇠(興亡盛衰)의 운명을 같이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 전적으로 예수님과 운명을 같이할 수 있는 입장에 섰었다면 어찌하여 예수님이 흥(興)할 때에 그가 쇠(衰)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상 예수님의 복음(福音)은 누구보다도 먼저 세례 요한 자신이 전해야만 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지로 인하여 이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고, 마침내는 예수님을 위하여 바쳐야 할 그의 목숨마저 별로 가치도 없는 일에 희생하고 말았던 것이다.
세례 요한은 그 중심이 하늘편에 있었을 때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증거하였다. 그러나 그에게서 영적인 역사(役事)가 끊어지고 인간 세례 요한으로 돌아오게 되자, 그의 무지는 더욱더 예수님에 대한 불신을 자아내게 하였던 것이다.

 

 

자기가 엘리야라고 하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세례 요한은 특히 옥중(獄中)에 들어가게 된 후부터 다른 유대인들과 같은 입장에서 예수님을 대하게 되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모든 언행(言行)은 인간 세례 요한의 눈에 하나같이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비쳐질 뿐이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도 역시 엘리야가 오기 전에 나타난 예수를 메시아로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 11 : 3) 하고 질문하여 그 의심을 풀어 보려 하였다. 이러한 세례 요한의 질문을 받게 된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 3절 내지 19절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분개심에 격한 경고의 내용을 가지고 대답하셨던 것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섬기기 위하여 복중(腹中)에서부터 택함을 받았고(눅 1 : 75), 그의 앞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광야에서 고난어린 수도생활(修道生活)을 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이 공생애노정(公生涯路程)을 출발하실 때에 하늘은 누구보다도 먼저 그에게 예수님이 누구시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고, 또 그것을 증거하게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늘의 은사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그러한 질문을 받으셨을 때, 예수님은 새삼스럽게 자기가 바로 메시아라는 대답을 하시지는 않았다.

 

 

그는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 : 4∼5)고 완곡한 대답을 하셨다. 물론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이러한 기사와 이적을 모르고 있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이와 같이 구구하게 말씀하신 것은, 자신이 하시는 일을 세례 요한으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상기케 하심으로써 자기가 누구시라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함이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한다고(마 11 : 5) 하신 말씀에는, 세례 요한과 유대인들의 불신에 대한 예수님의 비감한 심정이 어리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다. 선민(選民)으로 부름을 받았던 유대 민족, 그중에서도 특히 세례 요한은 하늘의 사랑을 넘치도록 받은 부요(富饒)한 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예수님은 부득이 갈릴리 바닷가를 헤매시고 사마리아 땅을 두루 도시면서 가난한 자 가운데서 복음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을 찾으셨던 것이다. 불학무식(不學無識)한 어부들과 세리와 창녀들은 모두 이처럼 가난한 자들이었다.

 

사실상 예수님이 찾고자 하셨던 제자들은 그러한 자들이 아니었다. 지상천국(地上天國)을 건설하러 오신 예수님이었으니 그에게는 따라 다니는 천 명보다도 먼저 천 명을 영도(領導)할 수 있는 한 사람이 더욱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늘이 예비한 능력 있는 무리들을 찾으시려고 제일 먼저 성전으로 들어가 제사장(祭司長)과 교법사(敎法師)들에게 복음의 말씀을 전하시지 않았던가!

 

그러나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예비한 잔치에 청함을 받은 객들은 하나도 응해 오지 않았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거리에 나가 방황하는 거지떼를 불러 모아야만 하셨다. 이처럼 불청객(不請客)들을 맞으러 나선 예수님의 서러운 심정은 드디어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 11 : 6)라고 하는 심판(審判)의 말씀을 토하시고 말았다.

 

세례 요한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혹은 메시아, 혹은 엘리야, 혹은 선지자라고 생각할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었다(눅 3 : 15, 요 1 : 20∼21).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구든지 자기(예수)로 인하여 실족(失足)하면 무슨 복이 있겠느냐고 하는 간접적인 표현을 통하여서 세례 요한의 운명을 심판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어떠한 실족을 하였던가?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종신토록 예수님을 모시고 섬겨야 할 사명을 다하지 못했던 것이다.

 

질문하러 왔던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떠나간 후에 예수님은, 사명적인 면에서 보아 세례 요한이 본시 가장 위대한 선지자(先知者)로 왔으나 이제 맡겨진 바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시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마 11 : 11)고 말씀하셨다.

 

 

천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일찍이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 지상생활을 거쳐간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여인이 낳은 사람 중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면 천국에서도 가장 큰 자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인데, 역사상 가장 큰 자로 지상에 태어난 세례 요한이 어찌하여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만도 못할 것인가?
과거에 왔다 간 수많은 선지자들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며 시간적인 먼 거리를 두고 간접적으로 이를 증거하였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메시아를 직접적으로 증거할 사명을 띠고 왔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메시아를 증거하는 것이 선지자의 사명일진대, 증거적인 입장에서 보아 메시아를 직접적으로 증거하는 세례 요한은 간접적으로 증거한 그 어떠한 선지자보다도 위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메시아를 모신다는 점에서 볼 때에는 그는 가장 작은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아무리 작은 자라도 이미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모시고 있는데, 누구보다도 메시아를 가까이 모셔야 할 자리에 부름을 받은 세례 요한은(눅 1 : 75) 도리어 예수님과 엇갈린 길을 걷고 있었으니, 이로써 그는 천국의 지극히 작은 자보다도 예수님을 모시지 못하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그 다음 절에는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메시아를 위하여 복중에서부터 택함을 받았고, 광야에서 그렇게 어려운 수도생활(修道生活)을 하여 온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잘 모시기만 했더라면 그는 틀림없이 예수님의 수제자(首弟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시는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으므로 예수님의 수제자의 위(位)는 침노한 베드로에게 빼앗긴 바 되었다. 여기에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라고 시간적인 한계를 지은 것을 보면, 그 아래 기록되어 있는 말씀은 일반인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바로 세례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세례 요한이 지혜가 있어서 지혜롭게 행동하였더라면 예수님의 무릎 밑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요, 따라서 그의 행적은 영원히 의(義)로서 남아질 것이었는데, 불행히도 그는 무지하였기 때문에 자신은 물론이어니와 유대인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마저 모두 막아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는 이로써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길을 가게 된 큰 요인이 세례 요한에게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또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2장 8절에서,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 하여 세례 요한을 비롯한 모든 유대인들이 지혜가 없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다고 한탄한 사실을 볼 수 있다.

 

 

Ⅳ. 세례 요한이 엘리야가 된 이유

우리는 상술(上述)한 바(제2절 Ⅰ)에 의하여, 엘리야가 지상에서 다하지 못한 사명을 계승 완성하기 위하여 세례 요한이 왔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누가복음 1장 17절에 기록된 대로, 엘리야의 심령(心靈)과 능력(能力)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義人)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기 위하여 출생한 인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명적인 입장에서 엘리야의 재림자(再臨者)가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상세한 것은 부활론(復活論)에서 밝혀질 것이지만, 엘리야는 땅에 있는 세례 요한에게 재림하여 그가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그를 협조함으로써, 자기가 지상 육신생활에서 다하지 못한 사명을 세례 요한의 육신을 세워 그를 통하여서 완수하려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세례 요한은 엘리야의 육신을 대신하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사명을 중심하고 보면 그는 엘리야와 동일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Ⅴ. 성서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

 

우리는 위에서 성서의 말씀에 의하여 예수님에 대한 세례 요한의 무지와 불신은 유대인들의 불신을 초래하였고, 유대인들의 불신은 마침내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十字架)의 길을 가시게 하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예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천적(天的)인 비밀을 밝힌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을 무조건 위대한 선지자라고 단정하는 입장에서만 성서를 보아 왔던 까닭이다.

 

우리는 인습적인 신앙 관념과 구태(舊態)를 벗어 버리기를 두려워하는 고루한 신앙태도를 단연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이 세례 요한의 문제를 중심하고 배웠다. 사명을 다하고 간 세례 요한을 사명을 다하지 못한 것으로 믿는 것도 부당하겠거니와, 사실상 사명을 다하지 못한 세례 요한을 잘못 알고 다한 것으로 믿는 것도 잘못된 신앙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신령면(神靈面)으로나 진리면(眞理面)으로나 항상 바른 신앙을 가지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성서의 말씀에 의하여 세례 요한의 진상을 밝혀 왔지만, 누구든지 영통(靈通)하여서 영계(靈界)에 있는 세례 요한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는 성도들은 여기에 기록된 말씀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더욱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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