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장 : 기 독 론

2013. 2. 8. 18:39참사랑 영원까지/원리강론

제 7 장 기 독 론

 


구원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타락인간들에게는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이 있다. 그중에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중심한 예수와 성신(聖神)과의 관계, 예수와 성신과 타락인간과의 관계, 중생(重生)과 삼위일체(三位一體) 등 기독론(基督論)에 관한 제 문제(諸問題)이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이 문제에 관한 명확한 해답을 얻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문제에 대한 미해결로 말미암아 기독교의 교리와 신앙생활에 적지 않은 혼란을 일으켜 왔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는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인간의 가치가 어떠한가를 알아야 하므로, 이에 관하여 먼저 논한 다음에 위의 제 문제를 다루기로 하자.

 


제 1 절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의 가치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인간, 즉 완성한 아담의 가치를 우리는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논하여 보기로 하자.
첫째, 하나님과 완성한 인간과의 이성성상적(二性性相的)인 관계로서 논하여 보자. 창조원리(創造原理)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아서 마음과 몸으로 창조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과 완성한 인간 사이에도 이성성상적인 관계가 있으므로, 이 관계는 인간의 마음과 몸과의 관계로 비유할 수 있는 것이다. 무형(無形)의 마음을 닮게 하여 그의 실체대상(實體對象)으로 창조된 것이 몸인 것과 같이, 무형의 하나님을 닮게 하여 그의 실체대상으로 창조된 것이 인간이다.

 

그러므로 완성한 인간에 있어서의 마음과 몸이 하나님을 중심하고 하나가 될 때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과 같이, 하나님과 완성한 인간이 사위기대(四位基臺)를 이루어서 일체가 되면 인간은 하나님의 심정(心情)을 완전히 체휼하는 생활을 하게 되므로 그 관계는 분리하려야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인간은 하나님이 항상 거하실 수 있는 성전(聖殿)이 되어(고전 3 : 16) 신성(神性)을 가지게 된다(전편 제1장 제3절 Ⅱ).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인간은 하늘 아버지의 온전함과 같이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마 5 : 48). 그러므로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적인 가치를 가지게 된다.

둘째, 인간 창조의 목적을 중심하고 그 가치를 논하여 보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인간을 통하여 기쁨을 누리시고자 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인간은 누구나 딴 사람이 가질 수 없는 특성을 각각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수가 아무리 많이 번식된다 하더라도 개성이 똑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게 마련이다.

 

따라서 하나님에게 내재(內在)하고 있는 어떤 개성체(個性體)의 주체적인 이성성상(二性性相)에 대한 자극적인 기쁨을 상대적으로 일으켜 드릴 수 있는 실체대상은, 그 이성성상의 실체로서 전개된 그 한 개성체밖에는 없는 것이다(전편 제1장 제3절Ⅱ). 그러므로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이 우주간(宇宙間)에 있어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존재인 것이다. 석가가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원리로 보아서 타당한 것이다.

셋째, 인간과 피조세계(被造世界)와의 관계로 본 그 가치를 살펴보자. 우리는 창조원리에 의한 인간과 피조세계와의 관계를 앎으로써 완성한 인간의 가치가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인간은 영인체(靈人體)로는 무형세계(無形世界)를, 육신(肉身)으로는 유형세계(有形世界)를 각각 주관하도록 창조되어 있다. 그러므로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은 전피조세계의 주관자가 되는 것이다(창 1 : 28).

 

이와 같이 인간에게는 육신과 영인체가 있어서 유형 무형의 두 세계를 주관할 수 있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이 두 세계는 인간을 매개체로 하여 서로 수수작용(授受作用)을 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의 실체대상의 세계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창조원리(創造原理)에 의하여, 인간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을 실체로 전개한 것이 피조세계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영인체는 무형세계를 총합한 실체상(實體相)이요, 그 육신은 유형세계를 총합한 실체상이 된다. 그러므로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은 천주(天宙)를 총합한 실체상이 되는 것이다. 인간을 소우주(小宇宙)라고 하는 이유는 실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천주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16장 26절에 예수님이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말씀하신 것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천주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여기에 하나의 완전한 기계가 있다고 하자. 그리고 이 기계의 모든 부속품들이 이 세상에 단 하나씩밖에 없는 것이어서 더 이상 구할 수도 없고 만들 수도 없다고 하면, 그 하나하나의 부속품은 아무리 보잘것없이 작은 것이라도 전체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셈이 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완성한 인간의 개체는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미미(微微)한 것 같다 하더라도 실상 전천주적(全天宙的)인 가치와 대등하다고도 볼 수 있다.

 

 

제 2 절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과 예수님

 

Ⅰ. 생명나무 복귀로 본 완성한 아담과 예수님

 

인류역사는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렸던 생명나무(창 3 : 24)를 역사의 종말의 세계에서 복귀하여(계 22 : 14) 지상천국(地上天國)을 이루려는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역사인 것이다. 우리는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창 2 : 9)와 종말의 세계에서 복귀되어질 생명나무(계 22 : 14)가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앎으로써, 완성한 아담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타락론(墮落論)에서 이미 상론(詳論)한 바이지만, 아담이 창조이상(創造理想)을 완성한 남성이 되었더라면 그가 바로 창세기 2장 9절의 생명나무가 되어, 그의 후손도 모두 생명나무가 되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하여 이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창 3 : 24), 타락인간의 소망은 바로 이 생명나무로 복귀되는 데 있었다(잠 13 : 12, 계 22 : 14). 그런데 타락된 인간은 그 자신의 힘으로써는 도저히 생명나무로 복귀할 수 없기 때문에, 여기에 반드시 창조이상을 완성한 한 남성이 생명나무로 오셔 가지고 만민으로 하여금 그에게 접붙임을 받도록 해야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남성으로 오실 분이 바로 요한계시록 22장 14절에 생명나무로 표상(表象)되어 있는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로 상징되어 있는 완성한 아담이나 요한계시록 22장 14절에 생명나무로 비유된 예수님은, 창조이상(創造理想)을 완성한 남성이라는 견지에서는 서로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따라서 창조본연(創造本然)의 가치에 있어서도 그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Ⅱ. 창조목적의 완성으로 본 인간과 예수님

우리는 이미 본장 제1절에서 완성한 인간의 가치가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설명하였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완성한 인간과 예수님과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하는 점을 고찰해 보기로 하자.

우리가 상술(上述)한 바에 의하여 아는 바와 같이, 완성한 인간은 창조목적(創造目的)을 두고 보면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여서(마 5 : 48) 하나님과 같은 신성(神性)을 가진 가치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의 실체대상(實體對象)으로 지음받은 인간도 역시 완성되면 영원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 위에 완성한 인간은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존재이며 전피조세계(全被造世界)의 주인이기 때문에, 그가 없이는 천주(天宙)의 존재가치도 온전해질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천주적인 가치의 존재인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가치를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 예수님이 지니신 가치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위에서 열거한 바와 같은 창조이상을 완성한 남성이 지니는 가치 이상의 것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으로 오신 분이심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원리(原理)는 이제까지 많은 신도들이 믿어 온 바,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믿는 신앙에 대하여 이의(異議)를 갖지 않는다. 왜 그러냐 하면 완성한 인간은 하나님과 일체임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 원리가 예수님을 말하여 그는 창조목적을 완성한 하나의 인간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그의 가치를 추호도 격하(格下)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창조원리(創造原理)는 완성된 창조본연의 인간의 가치를 예수님의 가치와 동등한 입장으로 끌어올리는 것뿐이다.

우리는 위에서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인간이라는 것을 논술하였다. 그러면 이제 이것을 입증할 수 있는 성서적 근거를 찾아보기로 하자.
디모데전서 2장 5절에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로마서 5장 19절에는 한 사람(아담)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예수님)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 고린도전서 15장 21절에는 사망이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예수님)으로 말미암는도다라고 표명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행전 17장 31절에는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라고 하였고, 누가복음 17장 26절에는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성서는 어디까지나 예수님은 인간이시라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더욱이 그는 인류를 중생(重生)하여 주실 참부모로 오시는 분이기 때문에 사람으로 오시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Ⅲ.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신가

 

빌립이 예수님에게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였을 때, 예수님은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요 14 : 9∼10)라고 대답하셨다. 또 성경의 다른 곳에 세상은 그(예수님)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요 1 : 10)라고 한 말씀도 있고, 또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예수님)가 있느니라(요 8 : 58)고도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성구 등을 근거로 하여서 이제까지의 많은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창조주(創造主)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위에서 논증한 바와 같이, 예수님은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인간으로서 하나님과 일체이시기 때문에 그의 신성(神性)으로 보아 그를 하나님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하나님 자신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는 마음과 몸과의 관계로 비유하여 생각할 수 있다. 몸은 마음을 닮아 난 실체대상(實體對象)으로서 마음과 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제2의 마음이라고는 할 수 있을망정, 몸이 마음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제2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는 있으나 하나님 자신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요한복음 14장 9절 내지 10절의 말씀대로 그를 본 것은 곧 하나님을 본 것이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 말씀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뜻에서 하신 것은 아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는 예수님을 말하여 말씀이 육신을 이루신 분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의 실체로서 도성인신(道成人身)하신 분이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 3절을 보면 만물세계는 말씀으로 창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나아가 요한복음 1장 10절에는 이 세상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 예수님을 창조주(創造主)라고도 볼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창조원리에 의하면, 피조세계(被造世界)는 개성을 완성한 인간의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을 실체로 전개한 것이기 때문에,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은 피조세계를 총합한 실체상(實體相)이요, 또한 그의 화동(和動)의 중심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미에서 이 세상은 완성한 인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님은 인간이 그 자신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여 완성되면 그 인간에게 하나님의 창조성을 부여하시어 그로 하여금 만물세계에 대한 창조주의 입장에 설 수 있도록 해 주시고자 하셨던 것이었다.

 

이러한 각도에서 볼 때, 요한복음 1장 10절의 기록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은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밝힌 것뿐이요, 그가 곧 창조주 자신임을 의미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혈통적으로 보면 아브라함의 후손이지만, 그는 전인류를 중생(重生)하여 주실 인간 조상으로 오셨기 때문에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브라함의 선조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 8장 58절에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계셨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도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의미에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지상에 있어서도 원죄(原罪)가 없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그는 우리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인간이었고, 또 부활 후 영계에 있어서도 제자들과 다름없이 영인체로서 계신다. 다만 제자들은 생명체급(生命體級)의 영인으로서 빛의 반사체(反射體)로 있는 데 비하여, 예수님은 생령체급(生靈體級)의 영인으로서 찬란한 빛을 발하는 발광체(發光體)로 계시는 것이 다른 점이라 하겠다.

한편 또 예수님은 부활 후에도 영계에서 지상에 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하고 계신다(롬 8 : 34).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이라면 자신에게 어떻게 기도할 수 있겠는가? 이 문제에 있어서는 예수님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시어 스스로 하나님이 아니심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마 27 : 46, 요 17 : 1).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이라면, 어떻게 하나님이 사탄의 시험을 받고 또 사탄에 몰려 십자가에 달리는 등의 일이 있을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또 예수님이 십자가상(十字架上)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 : 46)라고 하신 말씀을 보더라도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이 아님은 분명한 것이다.

 

 

제 3 절 타락인간과 예수님

 

타락한 인간은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자기보다 저급하게 창조된 천사(天使)를 우러러볼 정도로 천한 자리에 떨어져 버렸다. 그러나 예수님은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모두 갖추고 계셨기 때문에 천사를 비롯한 모든 피조세계(被造世界)를 주관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고전 15 : 27). 한편 타락인간에게는 원죄가 있으므로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원죄가 없기 때문에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아무런 조건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타락인간은 하나님의 뜻과 그의 심정(心情)을 알 수 없다. 혹시 그것을 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극히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을 완전히 아시고 또 그 심정을 체휼하는 입장에서 생활하고 계시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타락된 상태에 머물러 있는 한 아무 가치도 없는 존재이지만, 참부모 되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중생(重生)하여 원죄를 벗고 선의 자녀가 되면, 예수님과 같이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으로 복귀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 인간 사회의 부자간(父子間)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서차(序次)가 있을 뿐 그 본연의 가치에는 추호의 차이도 있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고(엡 1 : 22), 우리는 그의 몸이 되며 지체(肢體)가 된다(고전 12 : 27). 따라서 예수님은 본성전(本聖殿)이요 우리는 분성전(分聖殿)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그의 가지이며(요 15 : 5), 한편 돌감람나무인 우리는 참감람나무 되시는 예수님에게 접붙임으로써 참감람나무가 될 수 있는 것이다(롬 11 : 17).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 하셨고(요 15 : 14), 또 그(예수님)가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와 같을 줄을 안다(요일 3 : 2)고 한 성구도 있다. 그리고 성경은 오직 예수님은 처음 익은 열매요 우리는 다음 익은 열매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고전 15 :

 

 

제 4 절 중생론과 삼위일체론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신학계에서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로 논란되어 왔다. 그리고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실상 그 근본적인 뜻을 모르는 채 그대로 지내 왔던 문제 중의 하나가 역시 본항에서 다루려는 중생론(重生論)인 것이다.

 

Ⅰ. 중 생 론

 

1. 중생의 사명으로 본 예수님과 성신

 

예수님은 자기를 찾아온 유대관원 니고데모에게 중생(重生)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요 3 : 3). 중생이라는 말은 두 번 태어난다는 뜻이다. 그러면 인간은 왜 중생해야 되는 것인가? 우리는 여기에서 타락인간(墮落人間)이 중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알아보기로 하자.

아담과 해와가 창조이상(創造理想)을 완성하여 인류의 참부모가 되었더라면, 그로부터 태어난 자녀들은 원죄가 없는 선의 자녀가 되어 지상천국(地上天國)을 이루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하여 인류의 악의 부모가 되었기 때문에 악한 자녀들을 번식하여 지상지옥(地上地獄)을 이룬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대로, 타락한 인간들은 원죄가 없는 자녀로서 두 번 태어나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를 낳아 주는 것은 부모가 아니면 아니 된다. 그러면 타락한 우리들을 원죄(原罪)가 없는 자녀로 다시 낳아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해 줄 수 있는 선의 부모는 누구일 것인가?

원죄 있는 악의 부모가 원죄 없는 선의 자녀를 낳을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선의 부모가 타락인간들 가운데에 있을 리는 만무한 일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부모는 하늘로부터 강림(降臨)하셔야 하는데, 그렇게 오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다. 따라서 그는 타락한 자녀들을 원죄가 없는 선의 자녀로 다시 낳아 지상천국을 이룩하시기 위하여 참아버지로 오셨던 분이시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 1장 3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중생)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는 말씀이 있다.

예수님은 아담으로써 못 이루셨던 참아버지로 오셨기 때문에 성경은 그를 후아담이라 하였고(고전 15 : 45), 영존(永存)하신 아버지라 하였으며(사 9 : 6), 또 하나님은 선지자(先知者) 엘리야를 다시 보내시어 그로 하여금 타락한 인간들의 마음을 부모로 오시는 예수님 앞으로 돌이키게 함으로써 그들로 자녀가 되게 하시겠다고도 말씀하셨다(말 4 : 6). 그리고 예수님은 다시 오실 때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시리라(마 16 : 27)고 하셨다.

그런데 아버지 혼자서 어떻게 자녀를 낳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타락한 자녀들을 선의 자녀로 다시 낳아 주시기 위하여는 참아버지와 함께 참어머니도 계셔야 하는 것이다. 죄악(罪惡)의 자녀들을 다시 낳아 주시기 위하여 그 참어머니로 오신 분이 바로 성신(聖神)이시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성신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 3 : 5)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성신은 참어머니로서 후해와로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를 여성신(女性神)으로 계시받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성신이 여성신이시기 때문에 성신을 받지 않고서는 예수님 앞에 신부로 설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신은 여성신이시기 때문에 위로와 감동의 역사(役事)를 하시는 것이며(고전 12 : 3), 또 해와가 지은 죄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시기 위하여 죄를 씻는 역사를 하시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남성이시므로 하늘(양)에서, 성신은 여성이시므로 땅(음)에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2. 로고스의 이성성상으로 본 예수님과 성신

 

로고스라는 낱말은 헬라어로서 ‘말씀’ 혹은 ‘이법(理法)’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요한복음 1장 1절 이하를 보면, 로고스는 하나님의 대상(對象)으로서 하나님과 수수적(授受的)인 관계의 위치를 취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로고스의 주체(主體)이신 하나님이 이성성상(二性性相)으로 계시므로, 그의 대상인 로고스도 역시 이성성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만일 로고스가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지 않다면, 로고스로 창조된 피조물(요 1 : 3)이 또한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을 수가 없다. 이러한 로고스의 이성성상이 하나님의 형상적인 실체대상(實體對象)으로 분립된 것이 아담과 해와였던 것이다(전편 제1장 제1절 Ⅰ).
아담이 창조이상(創造理想)을 완성한 남성 즉 ‘생명나무’가 되고, 해와가 창조이상을 완성한 여성 즉 ‘선악(善惡)을 알게 하는 나무’가 되어 인류의 참부모가 되었더라면, 그때에 하나님의 3대 축복(三大祝福)이 완성되어 지상천국(地上天國)이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타락되었기 때문에 반대로 지상지옥(地上地獄)이 되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인간들을 다시 낳아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후아담(고전 15 : 45)으로서 ‘생명나무’의 사명을 가지고(계 22 : 14) 인류의 참아버지로 오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또한 여기에 후해와로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사명을 가진 인류의 참어머니가(계 22 : 17) 마땅히 계셔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이와 같이 타락인간을 다시 낳아 주실 참어머니로 오신 분이 성신(聖神)인 것이다.

 

3. 예수님과 성신에 의한 영적 중생

 

부모의 사랑이 없이는 새 생명이 태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기록된 말씀과 같이, 성신의 감동에 의하여 예수님을 구주(救主)로 믿게 되면, 영적 참아버지이신 예수님과 영적 참어머니이신 성신과의 수수작용(授受作用)에 의하여 나타나는 영적 참부모의 사랑을 받게 된다. 그러면 여기에서 그를 믿는 성도들은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이 주입되어 새로운 영적 자아로 중생(重生)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을 영적 중생이라고 한다.

 

그런데 인간은 영육(靈肉) 아울러 타락되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더 나아가 육적 중생을 함으로써 원죄(原罪)를 청산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간의 육적 중생에 의한 육적 구원을 위하여 필연적으로 재림(再臨)하시게 되는 것이다.

 

 

Ⅱ. 삼위일체론

창조원리에 의하면, 정분합작용(正分合作用)에 의하여 삼대상목적(三對象目的)을 이룬 사위기대(四位基臺)의 터전이 없이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는, 예수님과 성신도 하나님의 이성성상(二性性相)으로부터 실체로 분립된 대상으로 서 가지고 서로 수수작용을 하여 합성일체화(合性一體化)함으로써, 하나님을 중심한 사위기대를 이루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에 예수님과 성신은 하나님을 중심하고 일체가 되는 것이니, 이것이 곧 삼위일체(三位一體)이다.

원래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를 창조하신 목적은, 그들을 인류의 참부모로 세워 합성일체화시켜 가지고 하나님을 중심한 사위기대를 이루어 삼위일체가 되게 하시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만일 그들이 타락되지 않고 완성되어 하나님을 중심하고 참부모로서의 삼위일체를 이루어서 선의 자녀를 번식하였더라면, 그의 후손들도 역시 하나님을 중심한 선의 부부를 이루어 각각 삼위일체가 되었을 것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3대 축복(三大祝福) 완성에 의한 지상천국은 그때에 이미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아담과 해와가 타락하여 사탄을 중심하고 사위기대를 이루었기 때문에, 사탄을 중심한 삼위일체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도 역시 사탄을 중심한 삼위일체를 형성하여 타락한 인간사회를 이루어 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님과 성신(聖神)을 후아담과 후해와로 세워 인류의 참부모가 되게 하심으로써, 타락인간을 중생(重生)케 하여 가지고 그들도 역시 하나님을 중심한 삼위일체가 되게 하셔야만 한다.

 

그러나 예수님과 성신은 하나님을 중심한 영적인 삼위일체를 이룸으로써 영적 참부모의 사명만을 하시었다. 따라서 예수님과 성신은 영적 중생의 사명만을 하고 계시기 때문에, 성도들도 역시 영적인 삼위일체로만 복귀되어 아직도 영적 자녀의 입장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스스로 하나님을 중심한 실체적인 삼위일체를 이루어서 영육(靈肉) 아우른 참부모가 되심으로써, 타락인간을 영육 아울러 중생케 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원죄를 청산하고 하나님을 중심한 실체적인 삼위일체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재림하시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타락인간이 하나님을 중심하고 창조본연의 사위기대를 조성하면,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3대 축복(三大祝福)을 이룬 지상천국이 복귀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