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2. 8. 13:19ㆍ참사랑 영원까지/원리강론
제 2 장 모세와 예수님을 중심한 복귀섭리
아모스 3장 7절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고 기록되어 있는 말씀대로, 성서는 하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에 관한 수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원리를 몰랐기 때문에, 성서를 보아도 그 숨은 뜻을 알 길이 없었다. 성서에서는 하나의 선지자(先知者)의 생애에 대한 기록도 그것의 실상은 단순히 그의 역사에만 멎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 선지자의 생애를 통하여 타락인간(墮落人間)이 가야 할 길을 보여 준 것이다. 여기에서는 특히 하나님이 야곱과 모세를 세워 복귀섭리노정(復歸攝理路程)을 걷게 하시어, 그것으로써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걸으실 섭리노정을 어떻게 미리 보여 주셨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겠다.
제 1 절 사탄 굴복의 본보기노정
이삭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에 있어서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세우는 중심인물(中心人物)이었던 야곱이 아벨의 입장을 확립하여 가지고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사탄을 굴복시켜 나아가던 전노정은, 야곱에 의한 그 상징노정(象徵路程)을 형상적(形象的)으로 걸어야 할 모세노정이나, 또 그것을 실체적(實體的)으로 걸어야 할 예수님의 노정에 대한 전형노정(典型路程)이었다. 그리고 이 노정은 이스라엘 민족과 전인류가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사탄을 굴복시키면서 걸어가야 할 본보기노정이기도 하다.
Ⅰ. 예수님의 전형노정으로 야곱노정과 모세노정을 세우신 이유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인간 자신이 그의 책임분담(責任分擔)으로서 사탄을 자연굴복(自然屈伏)시키고 주관할 수 있게 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이 인간 조상으로서 메시아의 사명을 맡고 오신 것도, 사탄 굴복의 최종적인 노정을 개척하여 모든 성도(聖徒)들로 하여금 그 노정을 따라가게 함으로써 사탄을 자연굴복케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도 순종굴복(順從屈伏)하지 않았던 사탄이 인간 조상으로 오시는 예수님과 성도들에게 순종굴복할 리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원리적인 책임을 지시고 야곱을 세우심으로써, 그를 통하여 사탄을 굴복시키는 상징노정을 본보기로 보여 주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야곱을 세우시어 사탄을 굴복시키는 본보기노정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모세는 이 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그 형상노정(形象路程)을 걸음으로써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또 예수님은 야곱노정을 밟아 온 모세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그 실체노정(實體路程)을 걸음으로써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었으며, 한편 또 성도들도 그 노정을 따라 걸음으로써 사탄을 굴복시키고 주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모세가 자기와 같은 선지자(先知者) 한 사람을 하나님이 세우실 것이라고 한 것은(행 3 : 22), 모세와 같은 입장에서 모세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세계적 가나안 복귀의 섭리노정을 걸으셔야 할 예수님을 표시한 말이었다. 그리고 요한복음 5장 19절에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바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이미 모세를 세워서 보여 주신 본보기노정을 그대로 걷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다음에 오실 예수님의 모의자(模擬者)가 되는 것이다(행 3 : 22).
Ⅱ. 야곱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걸은 모세노정과 예수노정
야곱노정은 바로 사탄을 굴복시켜 나아간 노정이다. 그리고 사탄을 굴복시키는 노정은 사탄이 침범했던 그 경로를 되돌아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야곱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걸은 모세노정과 예수님의 노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① 인간은 원래 따먹지 말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할 것이었는데, 천사장(天使長)으로부터의 시련을 이겨내지 못함으로써 타락(墮落)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야곱이 하란에서 처자(妻子)와 재물(財物)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돌아와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復歸)하여 가정적인 가나안 복귀 완성자가 되기 위하여는, 사탄과 생명을 걸고 싸우는 시련에서 승리해야 했던 것이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천사(天使)와 생명을 걸고 싸워 승리함으로써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받은 것은(창 32 : 25~28) 바로 이러한 시련을 넘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천사를 사탄의 입장에 세워서 야곱을 시험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야곱을 불행하게 하시려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천사에 대한 주관성(主管性)을 복귀하는 시련을 넘게 함으로써 아벨의 입장을 확립케 하여 가정복귀 완성자로 세우시기 위함이었다. 천사가 이러한 시련의 주체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천사세계도 복귀되어 나아가는 것이다.
모세도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돌아와서 민족적 가나안 복귀 완성자가 되기 위하여는, 하나님이 그를 죽이려 하는 시련에서 생명을 걸고 극복해야 되었었다(출 4 : 24). 만일 인간이 이러한 시험을 하나님에게로부터 당하지 않고 사탄에게 당하다가 그 시험에 패하게 되면 사탄에게 끌려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편에서 시험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다.
예수님도 인류를 지상천국(地上天國)으로 인도함으로써 세계적 가나안 복귀 완성자가 되기 위하여는, 광야 40일 시험에서 생명을 걸고 사탄과 싸워 승리하셔야만 했던 것이다(마 4 : 1~11).
② 인간의 육(肉)과 영(靈)에 사탄이 침범하여 타락성(墮落性)이 생겼으므로, 야곱은 이것을 벗기 위한 조건을 세워야 하였다. 그러므로 야곱은 육과 영을 상징하는 떡과 팥죽을 주고 에서로부터 장자(長子)의 기업(基業)을 빼앗는 것으로써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는 데 있어서의 아벨의 입장을 복귀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창 25 : 34).
이 노정을 위하여 모세노정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육(肉)과 영(靈)을 상징하는 만나와 메추리를 내려 먹여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선민의식(選民意識)을 강하게 함으로써, 모세에게 순종하게 하여 ‘타락성을 벗기 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우게 하려 하셨던 것이다(출 16 : 13).
예수님이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 : 49~53)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도 이 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걸으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타락인간들이 세례 요한의 입장에 있는(본장 제3절 Ⅱ 1) 예수님을 신종(信從)함으로써 영육(靈肉) 아울러 그와 일체가 되어 ‘타락성을 벗기 위한 세계적인 탕감조건’을 세워 가지고 그를 메시아로 모시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창조본성(創造本性)을 복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③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의 시체까지 사탄의 침범을 당하였다. 그런데 야곱은 축복을 받아 성별(聖別)된 몸이었기 때문에 그의 시체도 사탄과 싸워 분립했다는 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그 시체에 40일간 방부제(防腐劑)를 발랐던 것이다(창 50 : 3). 따라서 이 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걸은 모세에 있어서도 그의 시체를 놓고 사탄과 싸웠으며(유 1 : 9), 또 예수님에 있어서도 그의 시체를 둘러싸고 문제가 일어났었던 것이다(마 28 : 12~13).
④ 인간 시조의 타락으로 인하여 그의 성장기간(成長期間)에 사탄이 침범하였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그 기간을 표시하는 수를 찾아 세우는 섭리를 하시는 것이다(후편 제3장 제2절 Ⅳ).
즉 야곱이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복귀할 때에 사탄 분립의 3일 기간이 있었고(창 31 : 22), 모세가 민족을 이끌고 애급(埃及)으로부터 가나안으로 복귀할 때에도 이러한 3일 기간이 있었으며(출 5 : 3), 또 여호수아도 이 3일 기간을 지난 후에야 비로소 요단강을 건넜었다(수 3 : 2). 그리고 예수님의 영적 세계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도 사탄 분립의 무덤 3일 기간이 있었던 것이다(눅 18 : 33).
사탄에게 내주었던 노아로부터 야곱에 이르는 12대의 종적인 탕감조건(蕩減條件)들을 야곱 1대에서 횡적으로 탕감복귀(蕩減復歸)하기 위하여 야곱에게 12자식이 있었던 것이다(창 35 : 22). 그렇기 때문에 모세 때에도 12지파가 있었고(출 24 : 4), 예수님의 노정에도 12제자가 있었던 것이다(마 10 : 1).
7일 창조기간(創造期間)에 침범한 사탄을 분립하는 탕감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야곱 때에는 70가족이(창 46 : 27), 모세 때에는 70장로가(출 24 : 1), 예수님 때에는 70문
도가 각각 그 노정의 중심역할을 하였었다(눅 10 : 1).
⑤ 지팡이는 불의(不義)를 치고 앞길을 인도하며 대신 의지하는 뜻의 표징물(表徵物)로서 장차 오실 메시아를 상징하였던 것이다(본장 제2절 Ⅱ 2 (2)). 따라서 야곱이 이러한 뜻을 가지고 있는 지팡이를 짚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는 것은(창 32 : 10), 장차 타락인간이 메시아를 받들어 불의를 치고 또 그의 인도를 받으며 그를 의지함으로써 죄악세계(罪惡世界)를 넘어 창조이상세계(創造理想世界)로 들어간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모세도 지팡이를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여 홍해(紅海)를 건넜으며(출 14 : 16), 예수님도 자신을 표징하는 철장(鐵杖)을 가지고 이 고해(苦海)의 세계를 건너 하나님의 창조이상세계에로 전인류를 인도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계 12 : 5, 계 2 : 27).
⑥ 해와의 범죄가 죄의 뿌리를 이루었고, 그의 자식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그 열매를 맺었다. 이와 같이 모자(母子)로 말미암아 사탄이 침범하여 죄의 열매를 맺었으므로, 탕감복귀(蕩減復歸)의 원칙에 의하여 모자로써 사탄을 분립해야만 된다. 따라서 야곱이 축복을 받고 사탄을 분립하였던 것도 그 모친(母親)의 적극적인 협조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창 27 : 43). 모세도 또한 그 모친의 협조가 없었으면 그가 사지(死地)에서 헤어나와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자리에 나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출 2 : 2). 그리고 예수님 때에도 역시 그를 죽이려던 헤롯왕을 피하여 그를 데리고 애급(埃及)으로 피난한 그 모친의 협조가 있었던 것이다(마 2 : 13).
⑦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뜻을 이루는 중심인물(中心人物)은 사탄세계에서 하늘세계에로 복귀하는 노정을 걷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러므로 야곱은 사탄세계인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복귀하는 노정을 걸었고(창 31~33장), 모세는 사탄세계인 애급에서 축복의 땅 가나안으로 복귀하는 노정을 걸었으며(출 3 : 8), 예수님도 이 노정을 걸으시기 위하여 출생하자마자 애급으로 피난갔다 돌아오셔야 했던 것이다(마 2 : 13).
⑧ 복귀섭리의 최종적인 목적은 사탄을 괴멸(壞滅)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야곱은 우상(偶像)을 상수리나무 아래 묻었고(창 35 : 4), 모세는 금송아지로 된 우상을 부수어 그 가루를 물에 뿌려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마시게 하였으며(출 32 : 20), 예수님은 그의 말씀과 권능으로 사탄을 굴복시킴으로써 이 죄악세계를 진멸(殄滅)하셔야 했던 것이다(전편 제3장 제3절 Ⅱ 2 참조).
제 2 절 모세를 중심한 복귀섭리
Ⅰ. 모세를 중심한 복귀섭리의 개관
모세를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는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에서 이미 세워진 ‘메시아를 위한 기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實體基臺)’를 탕감복귀하여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해야 된다는 원칙은 그에게 있어서도 다름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 섭리를 담당한 중심인물(中心人物)들이 달라졌으므로 그 인물들 자신도 또한 그러한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지 않고는 복귀섭리의 뜻을 계승할 수 없었으며, 또 그 섭리의 범위가 가정적인 것에서 민족적인 것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세를 중심한 복귀섭리에 있어서는 다음의 기록이 보이는 바와 같이, 이 기대의 조성을 위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의 내용이 전의 것에 비하여 많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1. 믿음의 기대
(1)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중심인물
아브라함의 상징헌제(象徵獻祭) 실수로 말미암은 그 후손의 애급고역(埃及苦役) 400년 기간이 끝난 다음,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복지(福地)로 복귀하는 노정에 있어서의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중심인물은 모세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모세가 이 ‘믿음의 기대’를 어떻게 세웠는가 하는 것을 알기 전에 복귀섭리로 본 모세의 위치를 상고(詳考)하여 모세 이전의 섭리노정(攝理路程)에 있어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려던 다른 인물들, 즉 아담이나 노아나 아브라함에 비하여 모세의 다른 점이 무엇이었던가 하는 것을 먼저 알아보기로 하자.
그것은 첫째로, 모세는 하나님 대신의 신(神)으로 세워졌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출애굽기 4장 16절을 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의 선지자 아론 앞에서 신과 같이 되리라고 하셨고, 또 출애굽기 7장 1절에는 그를 바로에게 있어 신이 되게 하셨다고 하였다.
둘째로, 모세는 장차 오실 예수님의 모의자(模擬者)였었다. 위에서 논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모세를 아론과 바로 앞에 신이 되게 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육신을 쓴 신은 예수님밖에 없으므로, 하나님이 모세를 신이 되게 하셨다는 말씀은 곧 모세를 출애급노정(出埃及路程)에 있어서 예수님의 모의자로 세우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세는 예수님의 모의자로서 예수님이 걸으실 노정을 그대로 앞서 걸음으로써, 마치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가실 길을 곧게 해야 했던 것과 같이(요 1 : 23) 모세도 예수님이 가실 길을 미리 개척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모세는 이 노정(路程)을 어떻게 걸었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모세는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였던 야곱의 후손으로서, 복귀섭리시대(復歸攝理時代)의 섭리역사를 담당한 중심인물일 뿐 아니라, 다음에 예수님이 오셔서 걸으셔야 할 야곱의 전형노정(典型路程)을 형상적으로 걸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모세는 야곱가정의 입애급노정(入埃及路程)에서 요셉이 세운 터전 위에 서 있었다. 그런데 요셉은 또 하나의 예수님의 모의자였다. 요셉은 야곱의 하늘편 처(妻)로 세워진 라헬이 낳은 아들로서, 야곱의 사탄편 처로 세워진 레아의 소생(所生)들의 동생이었다. 그러므로 요셉은 아벨의 입장으로서, 가인의 입장에 있었던 그의 형들이 죽이려 했던 가운데서 겨우 죽음을 모면하고 상인에게 팔린 바 되어 먼저 애급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30세에 애급의 총리대신(總理大臣)이 된 후에, 그가 어렸을 때 하늘에서 몽시(夢示)로써 교시한 대로(창 37 : 5~11) 그의 형들과 그의 부모가 애급으로 찾아와 굴복한 섭리노정의 터전 위에서 이스라엘의 사탄 분립을 위한 애급고역노정(埃及苦役路程)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요셉의 이러한 노정은 장차 예수님이 사탄세계에 오셔서 고난의 길을 통하여 30세에 만왕의 왕으로 군림한 후에, 전인류는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선조까지도 굴복시켜 가지고, 그들을 사탄세계로부터 분립하여 하늘편으로 복귀시킬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이처럼 요셉의 전생애는 바로 예수님의 모의자(模擬者)로서의 걸음이었던 것이다.
한편 또 모세의 생장(生長)과 서거(逝去)도 예수님의 그 본보기노정이었다.
모세는 출생시부터 바로왕의 손에 죽을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었으므로, 그 모친이 그를 숨겨서 키운 후에야 바로궁중에 들어가 원수들 가운데서 안전하게 성장하였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출생하자 헤롯왕의 손에 죽을 수밖에 없는 입장에 계셨었으므로, 그의 모친이 그를 데리고 애급에 들어가 숨겨 키운 후에야 헤롯왕의 통치권 내로 다시 돌아와 원수들 가운데서도 안전하게 성장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모세가 죽은 후 그 시체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었던 것도(신 34 : 6) 예수님의 시체의 그러한 것에 대한 하나의 모형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모세의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은 바로 그대로가 아래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걸으실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의 전형(典型)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모세가 예수님의 모의자(模擬者)였다는 사실은 신명기 18장 18절 내지 19절에 하나님이 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예수님)를 세우실 것을 예언하시면서,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은 벌하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요한복음 5장 19절을 보면,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도 역시 하나님이 모세를 시켜 장차 예수님이 행하실 것을 미리 보여 주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2)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조건물
모세는 위에서 논한 바와 같이, 모세 이전의 섭리노정(攝理路程)에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여 온 다른 중심인물들과는 다른 입장에 서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아벨이나 노아나 아브라함과 같이 ‘상징헌제(象徵獻祭)’를 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하고 ‘40일 사탄 분립기대’만을 세우면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할 수 있었다.
그 이유를 더 들어 보면 첫째, 모세는 아벨 노아 이삭 등 3차에 걸친 ‘상징헌제’에 성공함으로써 ‘상징헌제’에 의한 섭리를 완료한 기대 위에 섰었기 때문이다.
둘째, 인간 시조가 타락하여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리게 됨으로 말미암아, 타락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말씀 대신의 조건물로 세운 것이 제물이었다. 그런데 모세 때에 이르러서는 제물을 조건물로 세워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던 복귀기대섭리시대(復歸基臺攝理時代)는 지나가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대할 수 있는 복귀섭리시대(復歸攝理時代)로 들어왔기 때문에 ‘믿음의 기대’를 위한 ‘상징헌제’는 필요 없게 되었던 것이다.
셋째, 아담가정을 중심한 섭리가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연장되어 감에 따라 사탄이 침범하여 연장되었던 그 섭리적인 기간을 탕감복귀하는 조건을 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었다. 그리하여 노아가 방주(方舟)로써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하여는 ‘40일 사탄 분립기대’가 필요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아브라함도 400년 기간을 탕감복귀하여 ‘40일 사탄 분립기대’ 위에 선 후에야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한 ‘상징헌제’를 드리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400년 간 고역하게 되었던 것도 ‘40일 사탄 분립기대’를 탕감복귀함으로써 아브라함의 제물 실수로 인하여 사탄의 침범을 당하였던 그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되어 복귀섭리시대에 있어서는 ‘40일 사탄 분립기대’ 위에서 제물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하고 서기만 하면 ‘믿음의 기대’를 복귀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2. 실체기대
복귀기대섭리시대(復歸基臺攝理時代)에 있어서는 ‘가정적인 실체기대’를 세우는 섭리를 하셨었다. 그러나 복귀섭리시대(復歸攝理時代)에 들어와서는 ‘민족적인 실체기대’를 세우는 섭리를 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민족적인 믿음의 기대’를 복귀해야 할 모세는 하나님 대신이었으므로(출 4 : 16, 출 7 : 1) 예수님의 입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하여는 부모의 입장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모세는 예수님에 앞서서 그의 길을 개척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는 선지자(先知者)로서 자녀의 입장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는 ‘민족적인 실체기대’를 세워야 할 중심인물로서 아벨의 입장에도 설 수 있어야 하였다.
아벨은 아담 대신 부모의 입장에서 헌제(獻祭)를 하였기 때문에, 그 헌제에 성공함으로써 그는 아담이 세워야 할 ‘믿음의 기대’와 함께 ‘실체헌제(實體獻祭)’를 위한 아벨 자신의 입장도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과 동일한 원리에 의하여 이때에 있어서 모세도 부모와 자녀의 두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그도 역시 부모의 입장에서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게 되면 그와 동시에 자녀의 입장에서 ‘실체헌제’를 하기 위한 아벨의 위치도 확립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모세가 아벨의 위치를 확립한 후, 이스라엘 민족이 가인의 입장에서 모세를 통하여 ‘타락성을 벗기 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우면, 거기에 ‘민족적인 실체기대’는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었다.
3. 메시아를 위한 기대
모세가 ‘민족적인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고,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이 ‘민족적인 실체기대’를 탕감복귀하면 그것이 바로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그 기대 위에서 오시는 메시아로 말미암아 중생(重生)되어 원죄를 벗고 하나님과 심정적인 일체를 이룸으로써 창조본성(創造本性)을 복귀하면 ‘완성실체’가 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Ⅱ. 모세를 중심한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
모세가 사탄세계인 애급(埃及)에서 이스라엘 선민을 이적(異蹟)과 기사(奇事)로써 인도하여 홍해(紅海)를 건너고 광야를 돌아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노정은, 장차 예수님이 이 죄악세계(罪惡世界)에서 제2 이스라엘인 기독교 신도들을 이적과 기사로 인도하여 이 죄악세계의 고해(苦海)를 건너고 생명의 물이 마른 사막을 돌아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창조본연의 에덴으로 복귀케 될 그 노정을 미리 보여 준 것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한편 모세를 중심한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이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3차로 연장된 것과 같이, 예수님을 중심한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도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3차로 연장되었던 것이다.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하여 여기에서는 모세노정과 예수노정과의 세밀한 대조설명은 하지 않겠다. 그러나 이것은 본절과 다음 절을 대조함으로써 소상히 밝혀질 것이다.
1.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
(1) 믿음의 기대
이스라엘 민족이 400년 간을 애급에서 고역(苦役)함으로써 아브라함의 ‘상징헌제(象徵獻祭)’ 실수로 초래된 민족적인 탕감기간(蕩減期間)은 끝나게 되었었다. 여기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영도(領導)하여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인물이 되기 위하여는, 민족적 탕감기간인 400년을 다시 개인적으로 탕감함으로써 ‘40일 사탄 분립의 기대’를 세워야 했던 것이다. 모세는 이 목적과 함께 타락 전 아담이 ‘믿음의 기대’를 위하여 세워야 했던 40수를 탕감복귀하기 위하여(후편 제3장 제2절 Ⅳ) 사탄세계의 중심인 바로궁중에 들어가 40년을 지내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남 모르게 그의 유모(乳母)로 세워진 어머니로부터 선민의식(選民意識)에 불타는 교육을 받으면서 바로궁중생활 40년을 마친 후, 선민의 혈통에 대한 지조(志操)와 충절(忠節)을 변치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더불어 고난을 받기를 잠시 바로궁중에서 죄악의 낙(樂)을 누리는 것보다 기뻐하여 그 가운데서부터 뛰쳐나오게 되었던 것이다(히 11 : 24~25). 이와 같이 모세는 바로궁중생활 40년으로써 ‘40일 사탄 분립기대’를 세워서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였던 것이다.
(2) 실체기대
모세는 ‘믿음의 기대’를 세움으로써, 동시에 위에서 이미 논한 바와 같이 ‘타락성을 벗기 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우는 데 있어서의 아벨의 위치도 확립하게 되었었다. 이제 가인의 입장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의 부모의 입장인 동시에 자녀로서의 아벨의 입장에 있었던 모세에게 믿음으로 순종굴복(順從屈伏)하여 그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이어받음으로써 선(善)을 번식하게 되었더라면, 그때에 ‘타락성을 벗기 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워 가지고 ‘민족적인 실체기대’를 탕감복귀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와 같이 모세를 따라 애급을 출발하여 가나안 복지로 돌아가는 기간은 바로 그들이 이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세우기 위한 기간이 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모세가 애급인(埃及人)을 쳐죽이는 것으로써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다. 모세는 자기의 동포가 애급인에게 학대받는 것을 보고 불타는 동포애(同胞愛)를 이기지 못하여 그 애급인을 쳐죽였던 것이나(출 2 : 12), 실상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참경(慘景)을 보시고(출 3 : 7) 울분을 느끼신 그 심정의 표시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모세를 중심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가 되느냐 되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그들이 모세를 따라서 사막을 횡단하는 가나안 복귀노정을 성공적으로 출발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사실을 결정짓는 것이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택하신 모세가 이와 같이 애급인(埃及人)을 쳐죽인 것은, 첫째로 천사장(天使長)이 인간 시조를 타락시켰고 또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사탄이 장자(長子)의 입장에서 인류 죄악사(罪惡史)를 이루어 나오고 있으므로, 하늘편에서 장자의 입장에 있는 사탄편을 쳐서 탕감복귀하는 조건을 세우지 않고는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모세로 하여금 바로궁중에 대한 미련을 끊고 다시는 그곳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입장에 서게 하기 위함이었으며, 또 한편으로는 이것으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의 애국심을 보여 줌으로써 그를 믿게 하기 위함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서 하나님이 애급인의 장자와 그 가축의 맏것을 전부 쳐 버렸던 이유도 이러한 데 있었다.
모세의 이러한 행동을 목격하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과 같은 심정으로 모세의 애국심에 감동되어 그를 더 존경하고 더 믿고 모시며 따랐더라면, 그들은 모세를 중심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홍해(紅海)를 건너거나 시내광야를 도는 일이 없이 바로 블레셋으로 가는 곧은 길을 통하여 가나안 복지로 들어가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이루었을 것이었다.
그리고 이 노정은 야곱의 하란 21년노정을 탕감하는 21일노정이 되었을 것이었다.
출애굽기 13장 17절에는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을 보아서 하나님은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을 블레셋 땅의 곧은 길로 통하게 하려 하셨던 것인데,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를 불신함으로 말미암아 이 노정은 출발조차도 해보지 못하고 말았고,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 때는 제1차 때와 같이 그들이 다시 불신으로 돌아가 가나안 복귀의 도중에서 애급으로 되돌아갈까 염려하여 홍해(紅海)를 건너고 광야를 돌아서 가도록 인도하셨던 것임을 알 수 있다.
(3)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의 실패
가인의 입장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벨의 입장에 있는 모세에게 순종굴복(順從屈伏)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더라면, 그들은 ‘타락성을 벗기 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워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이루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가 애급인(埃及人)을 쳐죽이는 것을 보고 도리어 그를 오해하고 나쁘게 발설하였으므로, 바로는 이 소문을 듣고 모세를 죽이려 하였던 것이다(출 2 : 15).
이에 모세는 할수없이 바로의 눈을 피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떠나 미디안광야로 도망하게 되었으므로 그 ‘실체기대’는 이루지 못하고 말았으며, 따라서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복귀노정은 2차 내지 3차까지 연장되게 되었던 것이다.
2.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
(1) 믿음의 기대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不信)으로 말미암아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이 실패로 돌아가자, 모세가 그의 ‘믿음의 기대’를 위하여 세웠던 바로궁중 40년 기간은 사탄의 침범을 당한 결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러므로 모세가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을 출발하기 위하여는 사탄 침범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바로궁중생활 40년 기간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는 기간을 다시 찾아 세워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모세가 바로를 피하여 미디안광야로 들어가 다시 40년 기간을 보내게 되었던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 40년 기간에는 이스라엘 민족도 모세를 불신한 죄로 더욱더 비참한 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모세는 미디안광야 40년으로 ‘40일 사탄 분립기대’를 새로이 세웠기 때문에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를 위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할 수 있게 되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 3 : 7~10)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2) 실체기대
모세는 미디안광야 40년으로써 ‘40일 사탄 분립기대’를 재조성하여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동시에, 다시 ‘타락성을 벗기 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우는 데 있어서의 아벨의 위치도 확립하였다. 따라서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의 경우와 같이, 가인의 입장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벨의 입장에 있는 모세를 절대로 믿고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되므로, 여기에서 ‘타락성을 벗기 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워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조성할 수 있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하려 하였을 때에 모세가 애급인(埃及人)을 쳐죽였던 것과 같은 목적으로,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할 때에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3대 기적(三大奇蹟)과 10재앙(十災殃)의 권능을 주시어 애급인을 치게 하심으로써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다.
모세가 사탄편을 쳐야 하는 이유는 위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첫째 사탄이 침범한 장자(長子)의 입장을 탕감복귀하고, 둘째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애급에 대한 미련을 끊게 하고, 셋째 모세는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알리기 위함이었던 것이다(출 4 : 1~9).
그리고 모세가 애급인을 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으니,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아브라함의 ‘상징헌제(象徵獻祭)’ 실수로 인한 애급고역(埃及苦役) 400년 탕감기간을 다 채웠음에도 불구하고 30년이나 더 고역을 당함으로써(출 12 : 41), 그들의 탄식이 하나님에게 상달되어 하나님의 긍휼(矜恤)을 자아내게 되었었다는 사실이다(출 2 : 24~25).
3대 기적은 복귀섭리노정(復歸攝理路程)에 있어서 무엇을 예시하셨던가?
첫째 기적은, 하나님이 명령하시고 보여 주신 대로(출 4 : 3~9) 모세의 명령에 의하여 아론이 그의 손에 들려 있었던 지팡이를 바로 앞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되었다. 이것을 본 바로도 그의 술객(術客)들을 불러 지팡이를 던지게 하자 그것들도 역시 뱀이 되었다. 그러나 아론의 지팡이가 변하여서 된 뱀이 그들의 것을 모두 삼켜 버렸다(출 7 : 10~12).
그러면 이 기적(奇蹟)은 무엇을 예시한 것이었던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구주(救主)로 오셔서 사탄세계를 멸하실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것이다. 하나님 대신 신(神)으로 세워진 모세(출 7 : 1) 앞에서 기적을 나타냈던 그 지팡이는, 장차 하나님 앞에서 이렇듯 기적을 나타내실 권능적인 면에서의 예수님을 상징한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또 지팡이는 대신 의지자며 대신 보호자로서 불의(不義)를 쳐서 바른 길잡이의 사명을 하는 것이어서, 이것은 장차 예수님이 전인류 앞에 이러한 사명을 가지고 오실 것을 보여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 사명적인 면에서의 예수님을 상징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상징하는 지팡이가 뱀이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또한 뱀의 역할도 해야 된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예수님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 3 : 14)라고 자기를 뱀으로 비유하셨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뱀같이 지혜로우라(마 10 : 16)고도 하셨다.
이것은 원래 인간 조상이 악한 뱀에게 꼬임을 당하여 타락되었으니, 이것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선한 지혜의 뱀으로 오셔서 악한 인간들을 꼬여 선으로 인도해야 되기 때문에, 제자들도 선한 뱀으로 오신 예수님의 지혜를 본받아 악인(惡人)들을 선도(善導)해야 된다는 뜻에서 하신 말씀이다. 한편 또 모세의 뱀이 술객의 뱀을 삼켰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늘 뱀으로 오셔서 사탄 뱀을 삼켜 멸하신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것이었다.
둘째 기적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모세가 첫번 손을 품었을 때 그 손이 문둥병에 걸렸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그 손을 다시 품었을 때 그 병든 손이 깨끗이 나아 버렸던 것이다(출 4 : 6~7). 이 기적은 장차 예수님이 후아담으로 오셔서 후해와의 신성(神性)이신 성신(전편 제7장 제4절 Ⅰ)과 더불어 속죄(贖罪)의 역사(役事)를 하시게 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것이다.
첫번 손을 품음으로써 고칠 수 없는 문둥병에 걸렸다는 것은, 처음에 천사장(天使長)이 해와를 품음으로써 인간이 구원받을 수 없는 입장으로 타락해 버렸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손을 다시 품어서 병이 깨끗해졌다는 것은, 인류의 부성신(父聖神) 되신 예수님이 오셔서 인류의 모성신(母聖神) 되신 성신(전편 제7장 제4절 Ⅰ)을 복귀하여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이(마 23 : 37) 전인류를 다시 품어 중생(重生)시킴으로써 완전복귀한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었다.
셋째 기적은, 강물을 육지에 부어서 피가 되게 한 것이었다(출 4 : 9).
이것은 무기물(물)과 같은 생명 없는 존재가 유기물(피)과 같은 생명 있는 존재로 복귀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것이었다. 물은 타락되어 생명을 잃은 세상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므로(계 17 : 15), 이 기적은 장차 예수와 성신이 오셔서 생명을 잃어버린 타락인간들을 생명 있는 자녀로 복귀시킨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었다.
위와 같은 3권능을 나타내신 것은, 이스라엘 민족 앞에 장차 예수님과 성신이 인류의 참부모로 오셔서 전인류를 자녀로 복귀하고, 사탄에게 빼앗겼던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사위기대(四位基臺)를 복귀할 수 있는 상징적인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다음으로 모세가 하나님에게 자기의 말씀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을 요구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의 형 아론(출 4 : 14)과 아론의 누이가 되는 여선지(女先知) 미리암(출 15 : 20)을 주셨다. 이것은 장차 말씀의 실체이신 예수님(요 1 : 14)과 성신이 오셔서 타락으로 인하여 말씀을 잃어버린 인간을 말씀의 실체로 복귀하실 것을 형상적으로 보여 주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론과 미리암이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입장인 모세의 뜻을 받들고 그의 대신으로 영도(領導)의 사명을 했던 것은, 장차 예수님과 성신(聖神)이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대신 속죄(贖罪) 사명을 하실 것을 형상적으로 보여 준 것이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바로 앞으로 나아가는 도중에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 모세를 죽이려 하셨다. 그때에 모세는 그의 처(妻) 십보라가 그의 아들을 할례(割禮)함으로써 죽음을 모면하였던 것이다(출 4 : 24~26). 모세는 할례로써 그 시험을 이겼기 때문에 그의 가족이 살아났었고,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埃及)에서 나올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도 장차 예수님이 오실 때에 이스라엘 민족이 할례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하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미리 보여 준 것이었다.
그러면 할례는 어떠한 뜻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인간 조상은 사탄과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맺음에 따라 양부(陽部)를 통하여 사망의 피를 받았었다. 그러므로 타락된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로 복귀하기 위하여는, 그 탕감조건(蕩減條件)으로 양부를 쳐서 피를 냄으로써 그 사망의 피를 뽑았다는 표시의 조건으로 할례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할례의 근본 의의는 첫째로 사망의 피를 뽑는 표요, 둘째로는 남자의 주관성(主管性)을 다시 찾는 표이며, 셋째로는 본성(本性)의 자녀의 입장을 다시 찾는 약속의 표인 것이다.
그런데 할례의 종류에는 마음할례(신 10 : 16), 육신할례(창 17 : 10), 만물할례(레 19 : 23) 등 세 종류가 있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10재앙(十災殃)의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을 애급에서 구출하셨으니(출 7 : 10~12 : 36), 이것도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이적(異蹟)과 기사(奇事)로써 하나님의 선민(選民)을 구원하실 것을 보여 주신 것이었다.
야곱이 하란에서 21년 간의 고역(苦役)을 할 때에 라반이 응당 야곱에게 주어야 할 품삯을 주지 않고 열 번이나 그를 속였었다(창 31 : 7). 그렇기 때문에 야곱노정을 걷는 모세노정에 있어서도, 바로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한도에 넘는 고역을 시켰을 뿐 아니라 열 번이나 그들을 놓아 준다고 하면서 매번 속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탕감으로 10재앙을 내려 바로를 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 재앙(災殃)들은 또 무엇을 예시(豫示)하셨는가를 알아보자.
애급편에는 3일 간의 어둠이 있었고 이스라엘에게는 3일 간의 광명이 있었으니, 이것은 장차 예수님이 오시면 사탄편은 흑암이요, 하늘편은 광명으로 분기(分岐)된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애급(埃及)의 장자(長子)와 육축(育畜)의 맏것을 모조리 쳤으나 이스라엘은 양(羊)의 피로써 이것을 면할 수 있었다. 이것은 사탄편에 있어서의 장자는 가인의 입장이므로 이것을 쳐서 아벨의 입장인 차자(次子)로 하여금 장자의 입장을 복귀케 하기 위함이었다. 이 재앙도 역시 장차 예수님이 오시면 당초에 장자의 입장을 취함으로써 섭리노정(攝理路程)을 먼저 출발한 사탄편은 망하고, 차자의 입장인 하늘편은 예수님의 피의 대속(代贖)으로 인하여 구원(救援)을 받는다는 것을 미리 보여 준 것이었다.
모세는 또 애급에서 많은 재물을 취해 가지고 왔는데(출 12 : 35~ 36), 이것도 장차 있을 예수님의 만물복귀(萬物復歸)를 미리 보여 준 것이었다.
하나님은 재앙의 이적을 내리실 때마다 바로의 마음을 강퍅(剛愎)하게 하셨으니(출 10 : 27), 그 이유는 첫째 바로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시어 하나님은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고(출 10 : 1~2), 둘째로는 바로로 하여금 있는 힘을 다하여서 이스라엘 민족을 붙잡다가 할수없이 단념하게 하심으로써, 자기의 무력함을 깨닫고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을 떠난 후에도 그들에 대한 미련을 가지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셋째로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바로에 대한 적개심을 품게 하여 애급에 대한 미련을 끊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는 모세가 애급인(埃及人)을 쳐죽이는 것으로써 그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었다. 그러나 그들이 모세를 도리어 불신하였기 때문에 이 노정은 출발도 해 보지 못한 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2차 노정에 있어서의 이스라엘 민족은 그 ‘출발을 위한 섭리’로서 보여 주신 3대 기적(三大奇蹟)과 10재앙(十災殃)을 보고, 모세야말로 하나님이 보내 주신 진정한 이스라엘의 영도자(領導者)라는 것을 믿게 되었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민족적인 믿음의 기대’ 위에서 아벨의 입장을 확립한 모세를 믿고 따르는 입장에 서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드디어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할 수 있게 되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일시적으로 이와 같이 모세에게 순종굴복(順從屈伏)하였다고 해서 그것으로 곧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이 세워진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는 섭리노정(攝理路程)에 사탄이 침범하여 오랜 섭리의 기간을 사탄에게 내주었던 것이므로, 모세에 대하여 가인의 입장이었던 이스라엘 민족은 이러한 기간을 민족적으로 탕감복귀(蕩減復歸)하기 위하여 이 광야노정의 전기간을 두고 순종과 굴복으로 모세를 믿고 따라가지 않고서는 ‘타락성을 벗기 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에게 순종하여 광야노정을 지나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는 ‘민족적인 실체기대’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제2차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에 있어서는 그 1차 때보다도 더 큰 은사로써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불신 때문이었으므로, 제2차 노정에 있어서의 이스라엘 민족이 세워야 할 탕감조건(蕩減條件)은 더 가중되었던 것이다. 즉 제1차 노정에 있어서는 그들이 모세를 믿고 따르기만 하였더라면, 블레셋의 곧은 길로 인도되어 야곱의 하란노정 기간 수인 21일 간이면 가나안 복지(福地)로 들어갔을 것이었다.
그런데 제2차 노정에 있어서는 출애굽기 13장 17절에 명시되어 있는 바와 같이, 만일 그들이 블레셋 땅의 곧은 길로 인도되면 전쟁을 보고 두려워함으로써 제1차 노정 때와 같이 다시 불신으로 돌아가 애급 땅으로 되돌아갈까 염려하시어, 하나님은 그들을 이 길로 인도하시지 않고 홍해(紅海)를 건너고 시내광야를 돌아 21개월 걸려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노정을 취하게 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되어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은 21개월 광야노정(曠野路程)을 출발하게 되었다.
그러면 이미 위에서 논술한 바와 같이, 이 노정이 어떻게 장차 오실 예수님을 중심한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의 본보기가 되었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모세에게 굴복한 바로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거기에서 희생(犧牲)을 드릴 것을 허락했을 때에, 모세는 그리함은 불가하나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것은 애굽 사람의 미워하는 바이온즉 우리가 만일 애굽 사람의 목전에서 희생을 드리면 그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되 우리에게 명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출 8 : 26~27)라는 말로써 바로를 속여 자유허여(自由許與)의 3일 간을 얻어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여 나왔다.
이 3일 기간은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 헌제를 위하여 사탄 분립에 요(要)한 기간이었기 때문에, 그 후 이것은 섭리노정(攝理路程)을 출발할 때마다 사탄 분립에 필요한 탕감기간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야곱이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하려 할 때에도 라반을 속이고 하란을 떠나 사탄을 분립한 3일 기간이 있었다(창 31 : 19~22). 이와 마찬가지로 모세에게도 그가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하기 위하여서는 바로를 속이고 자유행동을 취하여 사탄을 분립하는 3일 기간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은 후일 예수님에게 있어서도, 사탄 분립을 위한 부활 3일 기간이 있은 후에야 영적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출발을 하시게 된다는 것을 보여 준 것도 되었다.
이리하여 이스라엘의 장정(壯丁) 60만 명이 라암셋을 출발한 것은 정월 15일이었다(출 12 : 6~37, 민 33 : 3).
이스라엘 민족이 3일 기간을 뜻맞게 세워 숙곳에 이른 후에는, 하늘이 은사를 내리시어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의 앞길을 인도하셨다(출 13 : 21). 모세노정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한 낮(양)의 구름기둥은 장차 이스라엘 민족을 세계적인 가나안 복귀노정으로 인도할 예수님을 표시하였고, 밤(음)의 불기둥은 여성신(女性神)으로서 그들을 인도할 성신(聖神)을 상징했던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지팡이로 홍해(紅海)를 갈라 세워 이것을 육지와 같이 건넜으나 그들의 뒤를 추격해 오던 애급의 병거는 다 수장(水葬)되어 버리고 말았었다(출 14 : 21~28). 이미 위에서 논한 바와 같이 바로 앞에 선 모세는 하나님을 상징하였고 (출 7 : 1), 모세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는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실 예수님을 상징하였다. 그러므로 이 기적은 장차 예수님이 오실 때에 사탄은 예수님을 따라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걷는 신앙자들의 뒤를 추격할 것이지만, 지팡이의 사명자로 오시는 예수님이 철장(鐵杖)으로(계 2 : 27, 시 2 : 9) 그들 앞에 가로놓인 이 고해(苦海)의 세상을 치면 이 고해도 평탄한 길로 갈라질 것이기 때문에, 성도들의 갈 길은 열리고 추격하는 사탄은 멸망한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었다.
전편 말세론(末世論)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철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7장 15절에는 이 죄악세상을 물로 비유하였다. 우리가 이 세상을 고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러한 통념(通念)에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홍해를 건너서 애급(埃及)을 떠난 후 제2월 15일에 신광야에 이르렀다(출 16 : 1). 이때부터 하나님은 그들이 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만나와 메추리를 내려 먹이셨으니(출 16 : 13~ 35), 이것은 장차 예수님이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인간의 생명의 요소인 예수님의 살(만나)과 피(메추리)를 모든 인간에게 주실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6장 49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은 너희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신광야에서 떠나 르비딤에 장막(帳幕)을 쳤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하시어 호렙산의 반석(磐石)을 쳐서 물을 내어 그들에게 먹이셨다(출 17 : 6).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하였으니, 이 행사는 장차 메시아가 오셔서 생명수(生命水) 샘물로(요 4 : 14) 모든 사람을 살리신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었다.
모세가 다음에 시내산에서 받게 되는 두 석판(石板)도 예수와 성신(聖神)을 상징하지만, 반석(磐石)은 석판의 뿌리가 되므로 이것은 또한 하나님도 상징한다. 모세가 석판의 뿌리가 되는 반석을 쳐서 샘물을 내어 이스라엘 민족을 먹여 살린 터전이 있기 때문에, 이 터전 위에서 모세가 석판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따라서 법궤(法櫃)와 성막(聖幕)을 지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여호수아가 르비딤에서 아말렉과 싸울 때,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승리하고 손을 내리면 패하였다. 그러므로 아론과 훌은 돌을 쌓아 모세를 그 위에 앉히고, 그의 손이 내려지지 않도록 좌우에서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앞에서 싸운 여호수아는 아말렉 왕과 그 백성을 쳐서 승리하였다(출 17 : 10~13). 이것도 장차 예수께서 오실 때에 되어질 것을 미리 보여 주신 것이었으니, 여호수아는 예수를 믿는 신앙자를, 아말렉은 사탄세계를, 그리고 아론과 훌은 예수님과 성신을 각각 상징한 것이었다. 그리고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붙들고 서 있는 그 앞에서 여호수아가 아말렉을 쳐서 멸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을 중심한 예수님과 성신의 삼위신(三位神)을 모신 신앙자들은 그 앞에 오는 모든 사탄을 멸할 수 있다는 것을 예시하신 것이었다.
(3) 성막을 중심한 복귀섭리
우리는 먼저 석판과 성막과 법궤를 받게 된 경위를 알아야겠다. 이스라엘 민족은 아말렉과 싸워서 승리한 후 제3월 초에 시내광야에 이르렀다(출 19 : 1). 여기에서 모세는 장로(長老) 70인을 거느리고 시내산으로 올라가 하나님을 뵈었다(출 24 : 9~10). 하나님은 특별히 모세를 시내산정(山頂)으로 부르시사, 석판에 기록한 십계명(十誡命)을 받기 위하여 40주야의 금식(禁食)을 하라고 명하셨다(출 24 : 18). 모세는 시내산에서 금식을 하는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법궤와 성막에 대한 지시를 받았다(출 25~31장).
그리고 40일 간의 금식이 끝났을 때 모세는 십계명을 기록한 두 석판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것이다(출 31 : 18).
모세가 이 석판(石板)을 가지고 시내산에서 내려와 이스라엘 백성 앞으로 나아갔을 때, 그들은 아론을 시켜 금송아지를 만들어 가지고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을 애급(埃及)에서 인도한 신(神)이라고 섬기고 있었다(출 32 : 4). 이것을 본 모세는 대로(大怒)하여 손에 들었던 석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려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출 32 : 19).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모세에게 나타나시어, 처음 것과 같은 석판을 깎아 만들어 오면 거기에 다시 십계명의 말씀을 써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출 34 : 1).
이 말씀을 받은 모세가 다시 40주야를 금식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의 석판에 다시 십계명을 기록하여 주셨다(출 34 : 28). 모세가 이 석판을 가지고 다시 이스라엘 민족 앞에 나타났을 때 비로소 그들은 모세를 받들게 되어 법궤를 만들고 성막을 건축하였던 것이다(출 35~40장).
㉠ 석판 성막 법궤 등의 의의와 그 목적
석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모세가 말씀을 기록한 두 석판을 받았다는 것은, 타락으로 인하여 제물로만 하나님을 대해 오던 복귀기대섭리시대(復歸基臺攝理時代)는 지나가고, 타락인간이 말씀을 복귀하여 그것으로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복귀섭리시대(復歸攝理時代)에로 들어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후편 서론(緖論)에서 밝힌 바와 같이, 말씀으로 창조되었던 아담과 해와가 완성되었더라면 그들은 말씀의 ‘완성실체’가 되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됨으로 인하여 말씀을 잃어버린 존재가 되었다.
이제 모세가 ‘40일 사탄 분립기간’으로써 말씀을 기록한 두 석판(石板)을 찾았다는 것은, 사탄세계로부터 잃어버렸던 아담과 해와를 상징적인 말씀의 실체로 복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말씀을 기록한 두 석판은 복귀한 아담과 해와의 상징체로서 장차 말씀의 실체로 오실 예수님과 성신을 상징했던 것이다. 성경에 예수님을 흰 돌로 상징하였고(계 2 : 17), 또 반석은 곧 그리스도(고전 10 : 4)라고 하신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두 석판은 예수님과 성신을 상징하기 때문에, 결국 이것들은 또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다음으로, 성막(聖幕)의 의의는 무엇이었던가?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성전(聖殿)을 자기의 몸으로 비유하셨다(요 2 : 21). 그리고 또 예수님을 믿는 성도(聖徒)들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셨던 것이다(고전 3 : 16). 그러므로 성전은 예수님의 형상적인 표시체인 것이다.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이 제1차 가나안 복귀에 성공하였더라면,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 곧 성전을 짓고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준비를 하였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제1차 노정은 출발조차도 해 보지 못하였고, 제2차 노정에서는 홍해(紅海)를 건너 광야에서 표류하게 되었으므로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고 그 대신 성막을 지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막은 예수님의 상징적인 표시체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성막을 지을 것을 명하실 때에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출 25 : 8)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성막은 지성소(至聖所)와 성소(聖所)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지성소는 대제사장(大祭司長)만이 일년에 한 번씩 들어가 헌제(獻祭)를 하는 곳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법궤가 안치되어 있어서 하나님이 친히 임재하시는 곳이므로 이것은 예수님의 영인체(靈人體)를 상징한 것이었고, 성소는 보통 제사 때에 들어가는 곳으로서 이것은 예수님의 몸을 상징한 것이었다.
따라서 지성소는 무형실체세계(無形實體世界)를, 성소는 유형실체세계(有形實體世界)를 상징하기도 한다. 예수께서 십자가(十字架)에 달리실 때에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는 휘장이 위로부터 둘로 갈라졌다는 것은(마 27 : 51),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한 영적 구원섭리의 완성으로 말미암아 영인체와 육신 또는 하늘과 땅이 서로 교통(交通)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법궤(法櫃)는 무엇이었던가? 법궤는 지성소에 안치하는 언약궤(言約櫃)로서 그 속에는 예수님과 성신, 따라서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두 석판(石板)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또 거기에는 광야노정(曠野路程)에 있어서 이스라엘 민족의 생명의 양식이었고, 또한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만나가 하나님의 영광을 표상(表象)하는 금항아리에 담긴 것이 들어 있었으며, 또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었던 아론의 싹난 지팡이(히 9 : 4)가 거기에 들어 있었다. 이런 점으로 보아 법궤는 크게는 천주(天宙)의, 작게는 성막(聖幕)의 축소체였던 것이다.
그리고 법궤 위에는 속죄소(贖罪所)가 덮였었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금으로 두 그룹을 쳐서 만들어 속죄소의 좌우에 덮으면, 두 그룹 사이에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나타나시어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할 모든 말씀을 주시겠다고 하셨다(출 25 : 16~22). 이것은 장차 두 석판으로 표시된 예수님과 성신이 오시어 역사(役事)하시게 됨으로써 속죄(贖罪)가 성립되면 그 속죄소에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동시에,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생명나무에로 나아가는 길을 막았던 그룹(창 3 : 24)이 좌우로 갈라져서 누구든지 생명나무 되시는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석판(石板)과 성막(聖幕)과 법궤(法櫃)를 주신 목적은 어디 있는가? 이스라엘 민족은 아브라함의 상징헌제(象徵獻祭) 실수로 초래된 400년 탕감기간을 마치자 3대 기적과 10재앙으로 애급민족(埃及民族)을 치고, 추격해 오던 애급의 수많은 군사와 병거를 수장(水葬)하고서 홍해(紅海)를 건너 광야 길로 나섰다. 하나님의 뜻으로 보아서도 그러하지만, 이처럼 원수를 맺고 떠난 애급이었기에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입장에 있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가나안 복귀는 기필코 이루어져야 하는 노정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출발을 위한 섭리’를 그처럼 기사(奇事)와 이적(異蹟)으로 하셨고, 또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홍해를 건너게 하여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환경 가운데로 몰아넣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모두 불신으로 흘러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최후에는 모세마저 불신의 행동을 취할지도 모르는 터이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비록 사람은 변하여도 변할 수 없는 그 어떠한 신앙의 대상을 세워 놓으시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즉 언제나 단 한 사람이라도 이것을 절대로 신봉(信奉)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러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신앙의 대상을 마치 바통과 같이 이어받게 하면서 섭리(攝理)의 뜻을 이루어 나아가려 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신앙의 대상을 무엇으로 세워야 할 것이었던가? 석판이 들어 있는 법궤를 안치함으로써 메시아를 상징하였던 성막(聖幕)이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이 성막을 지었다는 것은 벌써 메시아가 상징적으로 강림(降臨)하셨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이, 이 성막을 메시아와 같이 충성으로 받들어 가나안 복지(福地)로 복귀하면, ‘민족적인 실체기대’는 그때에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모두 불신으로 돌아가더라도 모세 한 사람만이라도 남아서 그 성막을 지키면, 그 민족은 다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워 가지고 성막을 모시는 모세를 중심한 그 기대 위에 복귀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설혹 모세마저 불신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 민족 중의 어느 한 사람이라도 모세를 대신하여 끝까지 성막을 지킨다면 또 그를 중심삼고 불신으로 돌아간 나머지 전민족을 복귀하는 섭리를 다시 하실 수 있는 것이었다.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이스라엘 민족이 불신으로 돌아가지 않았더라면 모세의 가정은 성막 대신이요, 모세는 석판과 법궤 대신이며, 또 모세의 가법(家法)은 천법(天法) 대신이 되었을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석판이나 법궤나 성막이 필요 없이 가나안으로 들어가 성전(聖殿)을 지었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석판과 성막과 법궤는 이스라엘이 불신으로 돌아감에 따라 그들을 구원(救援)하시기 위한 방편으로 주신 것이었다. 성막은 예수님과 성신(聖神)의 상징적인 표시체로서 성전을 지을 때까지 필요한 것이었고, 성전은 예수님과 성신의 형상적 표시체로서 실체성전(實體聖殿)이신 메시아가 강림하실 때까지 필요했던 것이다.
㉡ 성막을 위한 기대
메시아를 맞기 위하여는 ‘메시아를 위한 기대’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처럼, 상징적 메시아인 성막을 맞기 위하여서도 ‘성막을 위한 기대’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기대를 세우기 위하여는,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와 성막을 위한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세워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면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은 어떻게 하여서 이 두 기대를 세울 수 있었던가?
모세가 성막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금식기도(禁食祈禱)로써 ‘40일 사탄 분립기간’을 뜻맞게 세우면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는 세워지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 민족이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 위에서 성막이상(聖幕理想)을 세워 나아가는 모세에게 믿음으로써 순종굴복(順從屈伏)하면 성막을 위한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이 세워지고, 따라서 성막을 위한 ‘실체기대’도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성막이라 함은 그 속에 들어 있는 석판과 법궤를 포함하여 말하는 것이었다.
ⓐ 제1차 성막을 위한 기대
인간은 6일 만에 창조된 말씀의 실체이다(요 1 : 3). 따라서 이와 같이 창조되었다가 타락된 인간을 복귀하시기 위한 재창조(再創造)의 말씀을 주시려는 섭리를 하시기 위하여는 사탄의 침범을 당한 창조기간(創造期間)의 6수를 성별(聖別)하시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 6일 동안 여호와의 영광의 구름으로 시내산을 덮으심으로써 성별하신 후, 제7일에 그 구름 가운데 나타나셔서 모세를 부르셨다(출 24 : 16).
모세는 이때부터 40주야를 금식하였던 것이다(출 24 : 18). 그것은 이미 위에서 상론한 바와 같이,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紅海)를 건넌 후 다시 불신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신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40일 사탄 분립기간’을 세우게 하심으로써, 상징적 메시아인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를 세우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에 있어서의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은, 그들이 일시적으로 모세를 믿고 순종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 성전(聖殿)을 짓고 메시아를 맞을 때까지 계속하여 그러한 입장에 서 있어야만 그것이 성립될 수 있었다는 것은 이미 논한 바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막(聖幕)을 세우기 위하여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 성막을 위한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이루는 데 있어서도,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가 ‘40일 사탄 분립기간’을 지나서 성막을 세울 때까지 그를 믿고 모시고 순종해야 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가 금식기도(禁食祈禱)를 하는 기간에 모두 불신으로 돌아가서 아론을 시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이 이스라엘을 애급(埃及)에서 인도해 낸 신(神)이라고 섬겼던 것이다(출 32 : 4).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성막을 위하여 세워야 했던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성막을 위한 ‘실체기대’도 이룰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적과 기사로써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여 주셨다. 그러나 인간 자신이 말씀의 터를 잃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에, 인간 자신의 책임분담(責任分擔)으로 그것을 찾아야 할 이 기간에 있어서만은 하나님도 그들의 행동을 간섭하실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상(偶像)을 만들어 놓고 춤을 추는 백성들을 보자마자 대로(大怒)한 모세는 손에 들었던 두 석판(石板)을 산 아래로 던져서 깨뜨렸다(출 32 : 19). 그리하여 이것은 모세가 ‘40일 사탄 분립기간’으로 세웠던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에 사탄이 침범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두 석판(石板)은 이미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후아담과 후해와로서 복귀될 예수님과 성신(聖神)을 상징한다. 모세가 예수님과 성신을 상징하는 두 석판을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깨뜨렸다는 것은, 다음에 예수님이 오실 때도 만약 유대민족이 불신으로 돌아가면 예수님이 십자가(十字架)에 돌아가심으로써, 예수님과 성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본래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신 것이었다.
모세를 중심하고 행해진 이스라엘 민족의 이와 같은 불신은, 모세가 ‘40일 사탄 분립기간’을 세운 후, 백성들로 하여금 모세에게 순종케 하심으로써 ‘성막을 위한 기대’를 이루시려던 하나님의 섭리를 좌절시키고 말았다. 따라서 ‘성막을 위한 기대’를 이루시려는 섭리는 계속되는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2차 또는 3차까지 연장되어 나
아갔던 것이다.
ⓑ 제2차 성막을 위한 기대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은 모두 석판을 중심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불신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르비딤에서 석판의 뿌리 되는 반석(磐石)의 샘물을 마신 터전 위에 서 있었기 때문에(출 17 : 6), 모세가 석판을 깨뜨린 후 하나님은 다시 모세에게 나타나시어 석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어 오면 처음 석판에 써 주시었던 것과 같은 말씀을 다시 써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출 34 : 1).
그러나 여기에서 ‘40일 사탄 분립기대’를 다시 찾아 세워 성막(聖幕)을 위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지 않고서는 석판을 중심한 성막을 복귀할 수 없기 때문에, 모세는 다시 40주야를 금식한 후에 십계명(十誡命)의 말씀을 기록한 제2차 석판과 성막이상(聖幕理想)을 복귀하게 되었던 것이다(출 34 : 28).
한번 깨뜨린 석판을 40주야의 금식기도로써 복귀하였다는 것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도 그를 믿는 성도들이 ‘40일 사탄 분립기대’로써 그를 맞을 수 있는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면, 그 기대 위에 재림(再臨)하셔서 구원섭리(救援攝理)를 다시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모세가 제2차로 석판을 중심한 성막이상을 복귀하던 ‘40일 사탄 분립기간’에 있어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에게 순종굴복하였을 뿐 아니라, 그들은 모세의 지시를 따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성막을 건축하였던 것이니, 때는 제2년 정월(正月) 초하루였던 것이다(출 40 : 17). 이리하여 이스라엘 선민들은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 성막을 위한 ‘실체기대’를 이룸으로써, ‘성막을 위한 기대’를 조성한 터전 위에서 성막을 건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도 논한 바와 같이, 그들이 성막을 건축하는 것만으로는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의 ‘실체기대(實體基臺)’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가나안으로 들어가 성전(聖殿)을 짓고 메시아를 맞을 때까지 변치 않고 이 성막을 자기들의 생명보다 더 귀하게 모시고 받들어야 하였던 것이다.
제2년 2월 20일, 이스라엘 민족은 구름기둥의 인도를 따라 성막을 중심하고 시내광야에서 출발하였다(민 10 : 11~12). 그러나 그들은 다시 불신으로 흘러 모세를 원망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는 진노하시어 불로써 진(陣) 끝을 사르기도 하셨다(민 11 : 1). 이스라엘 민족은 그래도 깨닫지 못하고 통곡하며, 만나 외에는 생선도 외도 수박도 없다고 모세를 원망하며 애급 땅을 그리워하였다(민 11 : 4~6).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이 세우고 나아가야 할 ‘성막을 위한 기대’는 또다시 사탄의 침범을 당한 결과로 돌아가게 되어, 이 기대를 복귀하려는 섭리는 다시 제3차로의 연장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 제3차 성막을 위한 기대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불신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그들을 중심한 제2차 ‘성막을 위한 기대’는 또다시 사탄의 침범을 당하게 되었었다. 그러나 모세의 변함 없는 믿음과 충성으로 말미암아 그 성막은 여전히 모세를 중심한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 위에 서 있었고, 또 이스라엘 민족은 이미 르비딤에서 성막의 중심인 석판(石板)의 뿌리 되는 반석(磐石)의 샘물을 마신(출 17 : 6) 터전 위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터전 위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40일 사탄 분립기대’를 세우고, 성막을 중심한 모세에게 순종굴복하면 그들은 또다시 제3차의 ‘성막을 위한 기대’를 탕감복귀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위한 조건으로서 주신 것이 40일 정탐기간(偵探期間)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각 지파로부터 족장(族長) 한 사람씩을 모은 12명을 가나안 땅으로 보내어(민 13 : 1) 40일 동안을 정탐하게 하셨다(민 13 : 25). 그러나 정탐에서 돌아온 12명 중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신적인 보고를 하였다. 즉 그 땅의 거민(居民)은 강하고 성읍(城邑)이 견고할 뿐 아니라(민 13 : 28), 그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長大)하여 자기들은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와 같더라(민 13 : 32~33)고 하면서, 이스라엘은 그 성과 그 백성을 공격할 수 없다고 보고하였던 것이다.
이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를 원망하고 통곡하면서 새로이 한 장관을 세워 애급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떠들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 백성들은 이미 그 보호자가 떠났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밥이 될 수밖에 없으며, 그 반면에 자기들은 여호와가 보호자시니 두려워 말고 그들을 공격함으로써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자고 외쳤던 것이다(민 14 : 9).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도리어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치려고 하였다(민 14 : 10). 이때에 여호와께서 나타나시어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민 14 : 11)고 하시면서,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너희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너희가 그 땅을 탐지한 날수 사십일의 하루를 일년으로 환산하여 그 사십년간 너희가 너희의 죄악을 질지니 너희가 나의 싫어 버림을 알리라(민 14 : 31~34)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제3차 ‘성막을 위한 기대’도 복귀할 수 없게 되어, 제2차 21개월 광야노정(曠野路程)은 제3차 40년 광야노정으로 연장되었다.
(4)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의 실패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성막을 위한 기대’가 3차나 사탄의 침범을 당하게 되었으므로,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의 ‘타락성(墮落性)을 벗기 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蕩減條件)’은 세울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제2차로 세우려던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조성하지 못하게 되어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은 또다시 실패로 돌아가고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로 연장되었던 것이다.
3.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
(1) 믿음의 기대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이 실패로 돌아감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이 노정의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 세웠던 미디안광야 40년 기간은 다시 사탄의 침범을 당한 결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이 정탐(偵探) 40일 기간을 믿음과 순종으로 찾아 세우지 못함으로써 날을 해로 환산하여 광야를 표류하다가 가데스바네아로 돌아오는 40년 기간은, 모세에게 있어서는 제2차 노정의 ‘믿음의 기대’에 침범한 사탄을 분립하여 제3차 노정의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기 위한 기간이었다.
따라서 이 광야 40년 기간을 오직 믿음과 충성으로 성막(聖幕)을 모시고 표류하다가 가데스바네아로 다시 돌아온 모세는,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위한 ‘믿음의 기대’를 세울 수 있게 되었고, 그에 따라서 이 노정의 민족적인 실체헌제(實體獻祭)를 위한 아벨의 입장도 확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2) 실체기대
이스라엘 민족이 정탐 40일 노정을 믿음과 순종으로 찾아 세우지 못하고 불신과 반역(反逆)으로써 실패하였으므로 ‘성막을 위한 기대’는 여전히 사탄의 침범을 당한 것이 되었기 때문에, 제2차 노정을 위한 ‘실체기대(實體基臺)’는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성막을 충성으로 받들고 모셨던 모세의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는 여전히 남아져 있었기 때문에, 이 터전 위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표류(曠野漂流)의 40년 기간을 불변의 신앙으로 성막을 받들고 있는 모세에게 순종굴복함으로써 정탐 40일에 침범한 사탄을 분립하는 기대를 세우면, 그때에 성막을 위한 ‘실체기대’가 조성되는 동시에 ‘성막을 위한 기대’도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기대 위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믿음과 순종으로 성막을 중심한 모세를 받들고 가나안으로 들어가면, 그때에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에 있어서의 ‘실체기대’는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광야 40년 표류 기간은 모세에게 있어서는 제3차 노정에 있어서의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한 기간이었고, 이스라엘 민족에 있어서는 ‘성막을 위한 기대’를 세워 가지고 제2차 노정에서 그들이 모세를 받들고 성막을 건축하던 입장으로 돌아감으로써 제3차 노정의 ‘출발을 위한 섭리’를 이루기 위한 기간이었다.
㉠ 모세를 중심한 실체기대
석판(石板)과 성막(聖幕)과 법궤(法櫃)는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불신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받게 되었다는 것에 대하여는 이미 위에서 밝힌 바 있다. 즉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의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하나님이 그 ‘출발을 위한 섭리’로서 나타내셨던 3대 기적(三大奇蹟)을 불신하는 입장에 섰었기 때문에, 그것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40일 시련기간을 거치게 하신 후에, 석판과 성막과 법궤의 3대 은사(三大恩賜)를 주셨던 것이다.
그리고 또 야곱이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복귀하려 하였을 때 라반이 야곱을 열 번이나 속였던 것을(창 31 : 7)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10재앙(十災殃)을 내리셨던 것인데, 이스라엘이 또 이것을 불신하는 입장에 섰었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십계명(十誡命)의 말씀을 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석판과 성막과 법궤를 모심으로써 3대 은사와 십계명을 지키게 되면, 그들은 제2차 노정에서 3대 기적과 10재앙으로 애급(埃及)을 출발하던 입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이 믿음과 순종으로 모세를 따라 광야 40년의 탕감기간을 마치고 가데스바네아로 돌아온 후 모세와 함께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서 석판과 성막과 법궤를 모시고 받들었더라면, 그들은 제2차 노정에서 3대 기적과 10재앙으로 애급을 침으로써 ‘출발을 위한 섭리’의 목적을 이루었던 입장에 다시 설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석판은 법궤의 축소체요, 법궤는 성막의 축소체이므로 결국 석판은 성막의 축소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법궤나 성막은 석판이나 그의 뿌리 되는 반석(磐石)으로써 표시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은, 반석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섭리’에 의하여 가데스바네아를 출발하는 것으로써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믿음과 충성으로 성막을 받들고 모세를 따라 가나안으로 들어가면, 그때에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의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이 세워짐으로써 모세를 중심한 ‘실체기대(實體基臺)’가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반석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섭리’를 어떻게 이루려 하셨던가? 광야 40년 기간을 뜻 앞에 세우지 못하고 다시 불신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 민족을(민 20 : 4~5) 살리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회중(會衆) 앞에서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을 내게 하여 가지고 그들에게 마시게 하셨다(민 20 : 8).
만일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한 번 쳐서 샘물을 내어 먹임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권능을 새로이 깨달아 그를 중심하고 하나가 되었더라면, 그들은 모세와 함께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 서서 반석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섭리’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모세를 믿고 순종하여 그를 따라 가나안으로 들어갔더라면, 그들은 ‘타락성을 벗기 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우게 됨으로써, 제3차 노정의 모세를 중심한 ‘실체기대’를 이루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모세는 물이 없다고 불평을 하고 원망을 하는 백성을 보자 격분하여 치밀어 오르는 혈기(血氣)를 누르지 못하고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민 20 : 12)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모세는 이와 같이 한 번 쳐야 할 반석(磐石)을 두 번 침으로써 반석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섭리’도 이루지 못하게 되어, 드디어 약속받은 가나안 복지(福地)를 눈앞에 바라보면서 끝내 들어가지 못하고 말았다(민 20 : 24, 민 27 : 12~14).
우리는 이제 반석을 한 번 쳐야 하는 이유와, 두 번 친 것이 어떻게 되어 죄가 되었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겠다.
요한계시록 2장 17절에서는 예수님을 흰 돌로 상징하였고, 한편 또 고린도전서 10장 4절을 보면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고 하였다.
그런데 타락론(墮落論)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리스도는 생명나무로 오신 분이시므로(계 22 : 14), 반석은 곧 생명나무이기도 하다. 한편 창세기 2장 9절의 생명나무는 에덴동산에 있어서의 장래(將來)할 완성한 아담을 상징한 것으로서, 이 생명나무도 또한 반석이 아닐 수 없기 때문에 반석은 그 완성한 아담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런데 사탄은 에덴동산에서 장차 반석이 될 그 아담을 쳐서 타락시켰다. 따라서 아담은 생명나무가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창 3 : 24), 그는 또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생명수(生命水) 샘물을 영원히 그 자손들에게 나눠 줄 수 있는 반석도 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모세가 지팡이로 치기 이전, 샘물을 내지 못하던 반석(磐石)은 바로 타락된 아담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사탄이 장차 생명수를 낼 수 있는 반석으로 성장하고 있던 아담을 한 번 쳐서 타락시킴으로써 그를 ‘샘물을 내지 못하는 반석’으로서의 아담이 되게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샘물을 내지 못하는 아담의 표시체인 반석을 한 번 쳐서 샘물을 내게 함으로써, ‘샘물을 낼 수 있는 반석’으로서의 아담을 탕감복귀할 수 있는 조건을 세우려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가 한 번 쳐서 생명수 샘물을 내게 된 반석은 바로 생명나무로 오셔서 타락한 인간에게 생명수 샘물을 주실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 : 14)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모세가 반석을 한 번 치는 것은 타락된 제1 아담을 완성한 제2 아담 예수님으로 탕감복귀(蕩減復歸)할 수 있는 조건으로서 허락된 것이었다. 그러나 모세가 하늘편에서 한 번 쳐서 샘물을 내게 된 반석을 또 한 번 친 행동은 장차 복귀한 반석으로 오셔서 만민에게 생명수 샘물을 먹여 주실 예수님을 칠 수 있다는 표시적인 행동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의 불신과 그것을 목격한 모세가 혈기(血氣)로써 반석을 두 번 친 행동은, 장차 예수님이 오실 때에도 이스라엘이 불신으로 돌아가면 반석의 실체 되시는 예수님 앞에 사탄이 직접 나아갈 수 있다는 조건을 성립시킨 것이 되기 때문에 그것이 죄가 되었던 것이다.
모세가 석판(石板)을 한 번 깨뜨린 것은 복귀할 수 있었으나, 반석을 두 번 친 실수는 복귀할 수 없었으니 그 이유는 어디 있었던 것인가?
복귀섭리(復歸攝理)로 보아 석판과 반석은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십계명(十誡命)이 기록된 석판은 모세의 율법(律法)의 중심이요, 따라서 구약성서(舊約聖書)의 중심이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은 이 석판이상(石板理想)을 믿음으로써 그 시대의 구원권 내(救援圈內)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석판은 장차 오실 예수님에 대한 외적인 표시체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 반석(磐石)은 곧 그리스도라고 하신 말씀대로 반석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동시에 석판(石板)의 뿌리가 되기 때문에, 그것은 석판의 실체이신 예수님의 뿌리 곧 하나님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석판을 외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반석은 내적인 것이다. 또 석판을 몸으로 비유한다면 반석은 마음에 해당하며, 석판을 성소(聖所)라고 한다면 반석은 지성소(至聖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석판을 땅이라고 한다면 반석은 하늘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석은 석판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지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내적인 표시체인 것이다.
이와 같이 석판은 예수님에 대한 외적인 표시체였으므로, 그것은 또한 하나님을 상징하는 모세 앞에(출 4 : 16, 출 7 : 1) 예수님의 외적인 표시체로 세워졌던 아론을 상징했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아론을 시켜 금송아지를 만들었기 때문에(출 32 : 4), 아론이 깨어짐에 따라 석판도 깨어지게 되었었다. 그러나 아론이 르비딤에서 반석 샘물을 마신 터전 위에서(출 17 : 6) 회개함으로써 소생(蘇生)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론을 상징하는 석판도 반석 샘물의 내적인 터전 위에서 다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움으로써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석판의 뿌리가 되는 반석은 그리스도와 그의 뿌리 되신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므로, 이것을 친 행동은 만회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모세의 반석 2타(磐石二打)는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던가?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쳤던 것은 불신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에 대한 혈기(血氣)를 참지 못한 결과였기 때문에(시 106 : 32~33), 이 행동은 결국 사탄의 입장에서 행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반석으로 이루시려던 ‘출발을 위한 섭리’는 또다시 사탄의 침범을 당한 결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이렇듯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외적인 행동은 사탄의 행동으로 돌아갔으나, 내적인 실제에 있어서는 그 반석에서 샘물을 내어 이스라엘을 먹여 살렸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애급(埃及)에서 나온 외적인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두 하나님이 예정하신 가나안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모세도 120세를 일기로 소망의 땅을 눈앞에 바라보면서 죽고 말았다(신 34 : 4~5).
그러나 여호수아가 모세의 대신으로(민 27 : 18~20) 반석 샘물을 마시고 성막을 받드는 광야노정 가운데서 출생한 내적인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간 것이었다(민 32 : 11~12).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행동이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결과를 가져왔다면, 그 반석에서는 샘물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되어 거기에서 샘물이 나올 수 있었던가?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모세는 일찍이 르비딤에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여 반석을 쳐서 샘물을 내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마시게 함으로써 반석 샘물의 터전을 마련한 바 있었던 것이다(출 17 : 6).
그리고 이 터전 위에서 세워진 석판(石板)과 성막(聖幕)과 법궤(法櫃)는, 다른 모든 이스라엘인이 불신으로 돌아갔을 때에도, 40일 금식기도(禁食祈禱)로써 세운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 위에서 그것을 굳게 지켜 온 모세 한 사람의 믿음에 의하여,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에까지 계승되어 왔었다.
그 후에 모세마저 불신의 입장으로 돌아갔지만 하늘을 대한 그의 심정은 불변이었고, 또 여호수아가 그의 정탐(偵探) 40일로써 세운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서 불변의 신앙으로 석판과 성막과 법궤를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르비딤에서 세웠던 반석(磐石) 샘물의 터전도 여호수아를 중심하고 그대로 남아졌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모세의 외적인 불신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제2차 반석이 외적으로는 사탄의 침범을 당하게 되었으나, 그의 내적인 불변의 심정과 여호수아의 믿음과 충성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내적으로는 샘물을 내어 마시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것은 결과적으로 사탄의 입장에서 친 것이 되어 그 돌은 사탄이 소유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 돌의 실체로 오셨던 예수님은, 그의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에서 유대인들이 불신으로 돌아가자, 일찍이 저들이 광야(曠野)에서 잃어버렸던 이 돌을 몸소 찾으시려고 광야로 가셨었기 때문에, 사탄으로부터 돌로 떡이 되게 하라는 시험을 제일 먼저 받으셨던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외적으로는 혈기(血氣)를 내어 반석을 두 번 쳤기 때문에 그의 육신은 사탄의 침범을 당하여 광야에서 죽었으나, 내적으로는 그의 불변의 심정으로 인하여 반석의 샘물을 내어 먹였기 때문에 영적으로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장차 반석의 실체 되시는 예수님이 오실 때에도, 유대민족이 불신으로 돌아가게 되면 예수님도 그의 육신은 사탄의 침범을 받아 십자가에 달리시게 됨으로써 영육(靈肉) 아우른 세계적 가나안 복귀는 완수하지 못하시고, 부활(復活)하심으로써 영적으로만 그것을 완수하게 되시리라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었다.
모세가 반석(磐石)을 두 번 친 후, 하나님은 불신(不信)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에게 불뱀을 보내어 그들을 물어 죽이게 하셨다(민 21 : 6). 그러나 이스라엘이 회개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게 하여,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만은 구원을 받도록 하셨다(민 21 : 9). 이 불뱀은 해와를 타락시킨 옛 뱀 곧 사탄을 상징하였고(계 12 : 9), 장대 끝에 매단 구리뱀은 장차 하늘 뱀으로 오실 예수님을 상징했던 것이다(요 3 : 14).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불신으로 돌아갔을 때는 그들을 사탄 뱀에게 내주셨다가 그들이 회개하고 신앙을 돌이킬 때는 다시 구리뱀으로 살려 주셨던 것과 같이, 후일 예수님 때에 있어서도 유대인들이 불신으로 돌아가면 하나님은 그들을 사탄에게 내주시지 않을 수 없게 되리라는 것과, 그때에 예수님은 인류를 살리시기 위하여 부득이 하늘 뱀으로서 십자가(十字架)에 달리시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것과, 또 불신을 회개하고 그의 십자가로 인한 구속(救贖)을 믿는 자들은 누구나 구원해 주시게 된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 3 : 14)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 사실은 실상 예수님을 중심한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십자가로 인한 영적인 노정으로 출발하게 한 원인(遠因)이 되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인하여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쳤을 때, 하나님은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민 20 : 12). 이에 모세는 하나님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록 하여 달라고 간곡한 애원(哀願)의 기도를 올렸으나(신 3 : 25), 그는 종내 가나안 땅을 눈앞에 바라보면서 죽고 말았다.
이렇게 되어 그가 죽은 뒤에 시체를 장사(葬事)하였으나 그가 묻힌 곳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게 되었다(신 34 : 6). 이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도 유대인들이 불신으로 돌아가면 그는 십자가에 달리시게 될 것이고, 또 할 수만 있으면 죽음의 잔을 면하고 세계 가나안 복귀를 이루게 하여 달라고 애원의 기도를 하실 것이지만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시게 될 것과, 한편 그의 시체도 장사한 후에 간 곳을 아는 사람이 없게 될 것 등을 예시(豫示)하신 것이다.
㉡ 여호수아를 중심한 실체기대
모세가 반석(磐石)을 두 번 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민족이 반석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섭리’로써 가나안으로 복귀하려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침으로써(민 20 : 1~ 13) 사탄이 외적으로는 침범했지만, 르비딤 반석 샘물의 터전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는 그대로 샘물을 내어 이스라엘에게 먹일 수 있었다는 사실은, 위에서도 밝혀 온 바와 같이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섭리(攝理)에 대한 또 하나의 노정을 보여 주었다. 즉 이스라엘 민족 중 사탄세계인 애급(埃及)에서 출생하여 광야노정에서 불신으로 돌아갔던 외적인 이스라엘에 속하는 사람들은, 정탐(偵探) 40일을 믿음으로 세웠던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두 광야에서 쓰러지고, 반석 샘물을 마시고 성막(聖幕)을 받드는 광야생활 가운데서 출생한 내적 이스라엘만이 모세 대신의 여호수아를 중심하고 가나안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이다(민 32 : 11~12).
그리하여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주시면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신에 감동된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 그를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 세우고 그들의 목전에서 그에게 위탁하여 네 존귀를 그에게 돌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라(민 27 : 18~20)고 하셨다.
여호수아는 정탐(偵探) 40일 기간에 불신으로 돌아갔던 온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 모세가 세운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 위에 굳게 서서 변함없는 믿음과 충절(忠節)로써 ‘성막을 위한 기대’를 조성하고 끝까지 그것을 받들었던 오직 두 사람 중의 하나였다.
이와 같이 비록 모세는 불신으로 돌아갔으나, 석판(石板)과 성막(聖幕)과 법궤(法櫃)는 여전히 여호수아가 세운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모세의 대신으로 세우시고, 그 내적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에게 복종하여 그와 함께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 서게 하심으로써 반석 샘물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섭리’를 이루시고, 이 섭리에 의하여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감으로써 거기에서 ‘타락성을 벗기 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워 가지고, 제3차 노정의 여호수아를 중심한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이루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여호수아)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가나안으로) 건너가서 네(모세)가 볼 땅을 그들로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신 3 : 28)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도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수 1 : 5~6)고 말씀하셨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생활 40년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찾아 세웠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시어 이스라엘 민족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라고 명령하셨던 것과 같이(출 3 : 8~10), 하나님은 광야에서 표류(漂流)하는 40년을 오직 믿음과 충성으로 찾아 세운 여호수아를 모세 대신으로 부르시어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수 1 : 2)고 명령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이 명령을 받은 여호수아가 백성의 유사(有司)들을 불러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러한 뜻을 전하였을 때(수 1 : 10), 그들은 여호수아에게 당신이 우리에게 명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누구든지 당신의 명령을 거역하며 무릇 당신의 시키시는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는 자 그는 죽임을 당하리니 오직 당신은 마음을 강하게 하시며 담대히 하소서(수 1 : 16~18)라고 대답하면서, 그들은 죽기를 맹세하고 여호수아를 따라갈 것을 결의하였었다.
이와 같이 모세의 사명을 대신하고 나선 여호수아는 초림(初臨) 때의 사명을 계승 완성하러 재림(再臨)하실 예수님을 상징하였다. 따라서 모세노정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는 여호수아의 노정은, 예수님의 영적 복귀의 노정을 영육(靈肉) 아울러 탕감복귀해야 할 그의 재림노정(再臨路程)에 대한 표시적인 노정이 되는 것이다.
모세가 제2차 노정에서 가나안 땅에 정탐(偵探)으로 보냈던 열두 사람이 있었다(민 13 : 1~2). 그들 중 오직 충성으로 그 사명을 완수한 두 사람의 심정의 터전 위에서, 여호수아는 다시 두 사람의 정탐을 여리고성으로 보냈다(수 2 : 1). 그리하여 여리고성의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두 정탐인은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붙이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거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수 2 : 24)라고 믿음으로 보고하였던 것이다.
이때에 광야에서 출생한 이스라엘의 후손들은 모두 그 정탐인(偵探人)의 말을 믿었으므로, 이것으로써 과거에 40일 정탐을 뜻맞게 세우지 못한 선조들의 죄를 탕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내적 이스라엘이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 선 여호수아에게 순종할 것을 죽음으로써 맹세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여호수아와 함께 그 기대(基臺) 위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그들은 반석 샘물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섭리’로써, 제2차 노정에서 3대 기적(三大奇蹟)과 10재앙(十災殃)으로 ‘출발을 위한 섭리’를 이루었던 모세를 중심한 그들의 선조들과 같은 입장을 복귀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이 홍해(紅海)를 건너기 전에 3일노정을 찾아 세웠던 것과 같이, 여호수아를 중심한 이스라엘도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3일노정을 찾아 세웠던 것이다(수 3 : 2).
한편 제2차 노정에 있어서 3일노정을 지난 이스라엘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홍해까지 인도하였던 것과 같이, 여호수아를 중심한 이스라엘에 있어서도 그들이 3일노정을 마친 후에,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표상된 예수님과 성신(聖神)의 상징적 실체인 법궤가 그들을 요단강까지 인도하였던 것이다(수 3 : 3, 수 3 : 8).
그리고 모세를 인도하던 지팡이에 의해서 홍해가 갈라졌듯이, 여호수아를 인도하던 법궤가 요단강의 물 위에 서자 언덕에 넘치던 요단강의 흐름이 갈라져서(수 3 : 16), 따라온 이스라엘은 육지와 같이 강을 건너게 되었다(수 3 : 17).
지팡이는 장차 오실 예수님에 대한 하나의 표시체였고, 두 석판과 만나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 있는 법궤는 예수님과 성신의 상징적인 실체였었다. 그러므로 법궤 앞에서 요단강의 물이 갈라지고 이스라엘 민족이 평탄하게 가나안 땅으로 복귀하였다는 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과 성신 앞에 물로 표시된 이 죄악세상(계 17 : 15)이 선악으로 분립되어 심판을 받은 후, 모든 성도들이 세계적 가나안 복귀를 완성하게 될 것을 보여 준 것이다.
이때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명하여 백성의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사람을 택하고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요단 가운데 제사장들의 발이 굳게 선 그 곳에서 돌 열둘을 취하고 그것을 가져다가 오늘밤 너희의 유숙할 그 곳에 두라(수 4 : 2~3)고 하셨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정월(正月) 10일에 요단강에서 올라와서, 여리고의 동편 지경(地境)인 길갈에 진을 치고 요단강에서 가져온 열두 돌을 거기에 세웠었다(수 4 : 20).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예시(豫示)한 것인가? 이미 위에서 논한 바와 같이 돌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상징한다. 따라서 12지파를 대표한 열두 사람이 법궤로 인하여 물이 갈라진 요단강 가운데서 열두 돌을 받들었다고 하는 것은, 장차 12지파의 대표형으로 부름을 받을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이 죄악세상이 선악(善惡)으로 갈라질 때, 그곳에서 예수님을 받들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었다.
그들이 열두 돌을 받들어다가 가나안 땅의 안정된 진(陣)에 한데 모아 놓았을 때, 여호수아는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수 4 : 24)고 말하였다. 이것은 장차 돌로서 오시는 예수님을 모시는 열두 제자가 한마음 한뜻으로 한 곳에서 하나로 뭉쳐야만, 세계적인 가나안 복귀를 완성하여 하나님의 전능(全能)하심을 영원히 찬양할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을 예시한 것이었다.
야곱이 가는 곳마다 돌단을 쌓았던 것과 같이, 야곱의 열두 아들의 후손인 열두 지파(支派)의 대표들도 열두 돌을 합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祈禱)의 제단을 쌓아 앞으로 성전(聖殿)을 건축할 것을 보여 주었던 것이니,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弟子)가 힘을 합하여 예수님을 성전으로 받들어 모셔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후일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되지 못하였을 때에,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 : 19)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과연 12제자는 하나되지 못하였고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으므로, 성전 된 예수님이 십자가(十字架)로써 헐렸다가 3일 만에 부활(復活)하시어 흩어진 제자들을 다시 모은 후에야 그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받들어 영적인 성전으로 모시게 되었고, 또 재림(再臨)하신 후에야 실체성전(實體聖殿)으로 모실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埃及)을 떠나 가나안 땅을 향하여 제2차 노정을 출발할 때 그 해 정월(正月) 14일의 유월절(逾越節)을 지나고 진군하였던 것과 같이(출 12 : 17~18), 길갈에 진을 쳤던 여호수아를 중심한 이스라엘도 그 해 정월 14일에 유월절을 지키고 굳게 닫힌 여리고의 성벽을 향해 진군을 하였다. 땅의 소산(所産)을 먹기 시작하자 40년 간이나 내려 주시던 만나도 그쳤으므로 그때부터는 인간의 땀으로 된 곡식으로 생활해야만 되었으며, 사탄 도성의 최후의 관문을 뚫는 데 있어서도 인간으로서 할 책임을 다해야만 되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4만의 병사가 선두에 서고, 그 뒤를 따라 일곱 제사장(祭司長)이 일곱 나팔을 불면서 행진하고, 또 그 뒤에는 레위지파의 제사장들이 멘 법궤(수 3 : 3)가 따랐으며, 최후선에는 이스라엘 전군(全軍)이 연달아 진군하였던 것이다(수 6 : 8~9).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이스라엘은 이러한 행군으로 하루에 한 번씩 6일이나 성(城)을 돌았어도 그 성엔 아무런 변동도 없었다.
그들은 인내(忍耐)와 복종(服從)으로 사탄의 침범을 당한 6일의 창조기간(創造期間)을 탕감복귀해야 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순종으로 6일을 찾아 세운 후, 제7일에 일곱 나팔을 부는 7인의 제사장(祭司長)이 성벽을 일곱 번 돌면서 7회의 나팔소리를 끝내고, 여호수아가 백성을 향하여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고 호령하자 백성들이 이에 응하여 일제히 큰소리로 외치니 그 성이 곧 붕괴되었다(수 6장).
이러한 노정은 장차 예수님의 권능(權能)과 그의 성도(聖徒)들에 의하여 하늘과 땅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사탄의 장벽이 무너질 것을 보여 준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성벽은 다시 쌓아서는 아니 될 것이었으므로, 여호수아는 이 여리고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수 6 : 26)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적을 공격하게 된 여호수아는 벧호론 싸움에서의 19왕과 메롬 격전에서의 12왕을 합하여 모두 31왕을 멸하였으니(수 12 : 9~24), 이것도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오셔서 이방(異邦)의 왕들을 전부 굴복시키시고 그 백성들을 포섭하여 통일된 지상천국을 건설하실 것을 미리 보여 준 것이었다.
(3) 메시아를 위한 기대
이스라엘 민족은 정탐(偵探) 40일의 사탄 분립기간을 세우지 못하여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에 실패하고, 이 기간을 재탕감(再蕩減)하기 위하여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하여 광야에서 40년을 유리(流離)하고 다시 가데스바네아로 돌아왔다.
이때의 모세는 제3차 노정을 위한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였고, 이스라엘 민족은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불신과 그에 따르는 모세의 반석 2타(磐石二打)로 말미암아 이 두 기대는 모두 사탄의 침범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를 중심하고 애급(埃及)에서 떠난 외적 이스라엘은 모두 광야에서 섬멸(殲滅)되었으나,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은 모세가 세웠던 제2차 노정의 ‘믿음의 기대’와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 위에서, 정탐 40일의 사탄 분립기간을 믿음과 충성으로 찾아 세웠기 때문에 ‘성막을 위한 기대’를 조성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를 중심한 외적 이스라엘은 모두 광야에서 쓰러지고 말았으나, 성막을 받드는 광야생활 가운데서 출생한 내적 이스라엘은 모세를 대신한 여호수아를 중심하고 충성을 다하여 법궤를 모시고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성을 무찌르고 소망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되어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의 ‘실체기대(實體基臺)’가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서 이 노정의 ‘메시아를 위한 기대’가 조성됨으로써 아브라함 때에 이루어졌던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는 그의 제물 실수로 인하여 400년 애급고역(埃及苦役)의 탕감노정(蕩減路程)을 지나서야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를 조성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그러나 이미 후편 제1장 제3절 Ⅲ에서 상론(詳論)한 바와 같이, 그때는 이미 타락인간들이 사탄을 중심하고 애급왕국(埃及王國) 등의 굳건한 왕국을 건설하여 하늘편의 복귀섭리(復歸攝理)에 대결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호수아를 중심하고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는 세워졌을지라도 그 터전 위에 사탄에 대결할 수 있는 하늘편의 왕국이 건설되기까지는 메시아가 강림(降臨)하실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나안으로 들어간 내적 이스라엘도 또다시 불신으로 흘러 이 섭리는 다시 연장을 거듭하여 예수님 때까지 밀려 나왔던 것이다.
Ⅲ. 모세노정이 보여 준 교훈
모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구(悠久)한 역사노정에 있어서, 하늘 뜻을 받드는 수많은 성도(聖徒)들이 모세에 관한 성서(聖書)의 기록을 읽어 왔다. 그러나 이것은 한낱 모세의 역사에 관한 기록인 줄만 알았고,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복귀섭리(復歸攝理)에 관한 어떠한 비밀을 가르쳐 주시려 하셨다는 사실을 안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5장 19절에서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정도로 말씀하셨을 뿐 모세노정의 근본 의의를 밝히지 않고 돌아가셨던 것이다(요 16 : 12).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모세가 어떻게 복귀섭리를 위한 공식적인, 또는 전형적(典型的)인 노정을 걸었는가 하는 것을 밝혔다. 이것이 장차 예수님께서 걸으실 길을 그대로 예시(豫示)하신 것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본장 제3절을 대조함으로써 더욱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모세를 중심한 섭리 하나만을 보아도, 하나님이 계셔서 하나의 절대적인 목적을 지향하여 인류역사를 이끌어 나오신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모세노정은 인간의 책임분담(責任分擔) 수행 여부에 따라서, 그 인간을 중심한 하나님의 예정의 성사 여부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하나님의 예정도 그 예정을 위하여 세워진 인물 자신이 그의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하면 그 인물을 중심하고는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것을 예정하시고 그에게 이것을 명령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애급(埃及)에서 출발한 이스라엘 민족 중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으로 들어갔을 뿐 나머지는 모두 다 광야에서 쓰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책임분담(人間責任分擔)에 대해서는 간섭치 않으시고 그 결과만을 보시고 주관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하나님이 그렇게도 놀라운 이적(異蹟)과 기사(奇事)로써 이스라엘을 이끌어 주셨으나, 모세가 석판을 받는 동안 백성들이 금송아지의 우상(偶像)을 만드는 행동에 대해서나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치는 행동에 대해서는 아무 간섭도 하지 않으시고 다만 그 결과만을 보시고 주관하셨으니,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들 자신이 독자적으로 걸어야 할 책임분담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뜻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豫定)의 절대성을 보여 주셨다. 하나님이 뜻을 예정하시고 이루시려는 것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모세가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을 때 그의 대신으로 여호수아를 세워서라도 한번 예정하신 뜻은 기필코 이루시고야 마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늘이 세우신 아벨적 인물이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 가인의 입장에서 충성(忠誠)을 다한 사람이 그를 대신하여 아벨의 사명을 계승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 : 12)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이다.
또 한편 큰 사명을 진 사람일수록 그에게 주어지는 시험도 그만큼 크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인간 시조(始祖)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배반함으로써 타락되었기 때문에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인물은 하나님이 돌보지 않으시고 버리시는 시험을 이기고 나서야 했다. 그러므로 모세는 하나님이 그를 죽이려 하셨던 시험을 이기고 난 후에야(출 4 : 24) 이스라엘 민족의 인도자로 설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원래 사탄이 타락(墮落)을 조건으로 하여 인간을 대하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도 무조건하고 인간에게 은사를 내리실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탄이 참소(讒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은사를 내리시려 할 때에는 그 은사를 전후하여 사탄의 참소를 막기 위한 시험을 반드시 하시는 것이다.
모세노정에서 그 예를 들어 보면, 모세에게는 바로궁중 40년의 시련을 거친 후에야 제1차 출애급(出埃及)의 은사가 허락되었던 것이고, 또 미디안광야 40년의 시련이 있은 후에야 하나님은 제2차 출애급의 은사를 내리셨던 것이다(출 4 : 2~9).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는 시험이 있은 후에야(출 4 : 25) 3대 기적과 10재앙의 이적을 내려 주셨고(출 7 : 10~), 3일노정의 시련이 있은 후에야(출 10 : 22)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은사가 있었다(출 13 : 21).
한편 홍해의 시련을 지난 후에야(출 14 : 21~22) 만나와 메추리의 은사(출 16 : 13)가 있었고, 아말렉과의 싸움으로 인한 시련(출 17 : 10)이 있은 후에야 석판과 성막과 법궤의 은사(출 31 : 18)가 있었다. 그리고 40년 간 광야에서 표류한 시련(민 14 : 33)이 있은 후에 반석 샘물의 은사(민 20 : 8)가 있었고, 불뱀의 시련을 거친 후에야(민 21 : 6) 구리뱀의 은사(민 21 : 9)가 있었던 것이다.
모세노정은 위와 같이 여러 가지의 교훈(敎訓)을 우리에게 남겨 놓았던 것이다.
제 3 절 예수님을 중심한 복귀섭리
천사(天使)를 주관해야 할 아담(고전 6 : 3)이 타락됨으로 인하여 도리어 사탄의 주관을 받아서 지옥을 이루었기 때문에, 이것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기 위하여 후아담으로 오시는 예수님은 그 자신이 사탄을 굴복시켜 천국을 복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제1절에서 상술(詳述)한 바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았던 사탄이 예수님과 성도들에게 순종굴복할 리가 없으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원리적인 책임을 지시고 야곱과 모세를 세워 장차 예수님이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는 본보기노정을 보여 주셨던 것이다.
야곱은 사탄을 굴복시키는 상징적(象徵的)인 노정을 걸었고, 모세는 사탄을 굴복시키는 형상적(形象的)인 노정을 걸었으며, 예수님은 그 실체적(實體的)인 노정을 걸으셔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세가 사탄을 굴복시켜 나아갔던 민족적인 가나안 복귀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사탄을 굴복시킴으로써, 세계적인 가나안 복귀노정을 완수하셔야 했던 것이다.
신명기 18장 18절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고 하신 말씀 중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先知者) 하나라고 하신 것은 바로 모세와 같은 노정을 걸으셔야 할 예수님을 말씀하신 것이었다. 그리고 요한복음 5장 19절을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세워 보여 주신 본보기노정을 그대로 걷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었다.
상세한 것은 이미 모세를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에서 논하였지만, 모세를 중심한 3차의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과 예수님을 중심한 3차의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의 전체적인 윤곽을 비교 대조하면서 예수님을 중심한 복귀섭리를 논하여 보기로 하자.
Ⅰ. 제1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
1. 믿음의 기대
제1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해야 할 중심인물(中心人物)은 세례 요한이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어떠한 입장에서 그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이었던가?
모세를 중심한 민족적인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모세가 석판(石板)을 깨뜨린 것과 또 반석(磐石)을 두 번 친 것은, 장차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그를 중심한 유대민족이 불신(不信)으로 돌아가면 석판과 반석의 실체인 예수님의 몸도 칠 수 있다는 조건을 사탄에게 허락하는 표시적인 행동이 되었다는 데 대해서는 이미 모세노정에서 논급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조건을 피하시게 되려면, 그의 강림(降臨)을 위한 터전을 닦아 나아가는 선민(選民)들이 장차 오실 메시아의 형상체인 성전(聖殿)을 중심하고 하나가 되어야 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항상 불신의 길을 걷게 되어 장차 오실 예수님 앞에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을 성립시켜 왔으므로, 이러한 조건을 막기 위하여 선지자(先知者) 엘리야가 와서 바알의 선지자와 아세라의 선지자를 합하여 850명을 멸하는 등(왕상 18 : 19) 사탄 분립의 역사(役事)를 하고 승천하였던 것이다(왕하 2 : 11). 그러나 엘리야의 전체적인 사명이 다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그는 재림해야 했던 것이다(말 4 : 5).
이와 같이 엘리야가 다하지 못한 사탄 분립의 사명을 맡아 완수하고, 메시아의 길을 곧게 하기 위하여(요 1 : 23) 엘리야로 왔던 선지자가 바로 세례 요한이었다(마 11 : 14, 마 17 : 13).
이스라엘 민족은 애급(埃及)에서 400년 동안 그들을 인도해 주는 선지자도 없이 고역(苦役)을 당하여 오다가, 그들을 민족적으로 가나안 땅에 인도하여 메시아를 맞게 해 줄 수 있는 인물로서 모세 한 분을 만나게 되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도 말라기 선지(先知) 이후 메시아 강림준비시대(降臨準備時代) 400년 간 그들을 인도해 주는 선지자도 없이 페르시아, 헬라, 애급, 시리아, 로마 등의 이방(異邦)들에게 고역을 당하여 오다가, 마침내 세계적 가나안 복귀를 위하여 오시는 메시아 앞으로 그들을 인도해 줄 수 있는 인물로서 세례 요한을 만났던 것이다.
애급고역(埃及苦役) 400년 간의 ‘사탄 분립기대’ 위에 섰던 모세가 바로궁중에서 충효(忠孝)의 도를 배웠던 것과 같이, 메시아 강림준비시대 400년 간의 ‘사탄 분립기대’ 위에 섰던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石淸)을 먹으면서 메시아를 맞기 위하여 하늘 대한 충효(忠孝)의 도를 세웠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장(祭司長)을 비롯한(요 1 : 19) 유대인들은 모두 세례 요한이 메시아가 아닌가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눅 3 : 15). 세례 요한은 이와 같이 ‘40일 사탄 분립기대’를 세웠으므로, 제1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를 위한 ‘믿음의 기대’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2. 실체기대
세례 요한은 모세와 같은 입장에 세워졌었기 때문에 유대민족에게 있어 부모와 자녀의 두 입장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부모의 입장에서 제1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를 위한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였기 때문에, 동시에 자녀의 입장에서 ‘타락성을 벗기 위한 세계적인 탕감조건’을 세우는 데 있어서의 아벨의 입장도 확립할 수 있었다(본장 제2절 Ⅰ 2).
따라서 세례 요한은 모세가 바로궁중에서 40년 간의 탕감기간(蕩減期間)을 지나고,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를 위하여 ‘믿음의 기대’를 세웠던 입장을 세계적으로 찾아 세운 터 위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모세 때에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모세가 애급인(埃及人)을 쳐죽이는 것을 보고 그를 믿게 함으로써 ‘출발을 위한 섭리’를 이루시려 하였었다. 그때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사탄국가인 애급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야 했던 것이지만, 세례 요한을 중심한 유대민족은 로마제국을 떠나 다른 땅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권하(政權下)에 있으면서 그들을 굴복시켜 그 제국(帝國)을 하늘 것으로 복귀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세례 요한을 중심한 기사이적(奇事異蹟)을 보여 주시어,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를 믿게 함으로써 ‘출발을 위한 섭리’를 이루시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잉태(孕胎)에 관한 천사의 놀라운 예고와, 또 그 부친이 이것을 믿지 않았을 때 벙어리가 되었던 기사, 그리고 그가 출생할 때에 보여 주신 이적 등으로 말미암아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중에 두루 퍼지매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가로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꼬 하니 이는 주의 손이 저와 함께 하심이러라(눅 1 : 65~66)고 하신 성경의 말씀대로, 이스라엘 민족은 세례 요한의 출생시부터 그를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石淸)으로 연명하면서 기도의 생활을 한 그의 빛나는 수도(修道)의 생애로 인하여, 제사장들과(요 1 : 19) 일반 유대인들이(눅 3 : 15) 그를 메시아로 오인할 정도로 그의 신망이 높았던 것이다.
모세가 바로궁중 40년의 탕감기간(蕩減期間)을 마치고 애급인(埃及人)을 살해하였을 때 이스라엘 민족이 그의 애국심에 감동되어 그를 믿고 따랐더라면, 그들은 홍해(紅海)를 건너거나 광야를 돌지 않고 또 석판(石板)이나 성막(聖幕)이나 법궤(法櫃)도 필요 없이 블레셋의 곧은 길을 통하여서 곧 가나안으로 들어갔을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하나님이 기사 이적(奇事異蹟)으로써 믿음의 대상자로 세워 주신 세례 요한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그들은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 ‘실체기대’를 복귀함으로써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제1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의 실패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이 세운 ‘믿음의 기대’ 위에서 그를 메시아와 같이 믿고 따르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요 1 : 19, 눅 3 : 15), 그들은 구약시대(舊約時代)를 청산하고 세계적 가나안 복귀의 새로운 노정을 출발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전편 제4장 제2절에서 상술(詳述)한 바와 같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거하고서도 그를 의심하는 데 이르렀고(마 11 : 3), 또 자기가 엘리야로 왔으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부인하여(요 1 : 21) 유대인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막았을 뿐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배반하는 입장에 서게까지 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세례 요한은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세우는 데 있어서의 아벨의 위치를 떠나게 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타락성을 벗기 위한 세계적인 탕감조건’을 세울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이 ‘실체기대’를 이루지 못하게 됨에 따라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제1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어 이것도 모세 때와 같이 2차 내지 3차까지 연장되게 되었던 것이다.
Ⅱ. 제2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
1. 믿음의 기대
(1) 예수님이 세례 요한의 사명을 대신하심
세례 요한은 완성한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 앞에 복귀한 아담형의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그때까지의 섭리역사상(攝理歷史上)에서,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 왔다 간 모든 중심인물들이 다하지 못하였던 사명을 완전히 이루어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워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기대 위에서 믿고 따르는 유대민족을 인도하여, 전체적인 섭리의 기대와 함께 예수님께 인계해 드린 후 믿음과 충성으로 그를 따르고 모셔야 했던 것이다.
세례 요한은 자기도 모르고 행한 일이었지만, 요단강에서 예수님에게 세례를 준 것은(마 3 : 16)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쌓아 온 모든 것을 예수님 앞에 인계하는 하나의 의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 세례 요한은 점점 예수님을 의심하고 배신하는 데 이르렀으므로, 세례 요한을 메시아와 같이 믿고 따르던(눅 3 : 15) 유대인들은 자연히 예수님을 불신하는 입장에 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전편 제4장 제2절). 따라서 세례 요한이 제1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을 위하여 세웠던 ‘믿음의 기대’는 사탄의 침범을 당하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할수없이 예수님 자신이 세례 요한의 사명을 대신하여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함으로써 제2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 간 금식(禁食)을 하시면서 사탄을 분립하신 것은, 바로 세례 요한의 대신 입장에서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獨生子)로서 영광의 주(主)로 오셨으므로 원칙적으로 고난의 길을 걸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고전 2 : 8).
그러나 그의 앞길을 곧게 하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던 세례 요한(요 1 : 23, 눅 1 : 75)이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세례 요한이 당했어야 할 고난을 예수님 자신이 당하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메시아이시면서도 세례 요한 대신으로 복귀섭리노정(復歸攝理路程)을 출발하셨던 것이기 때문에, 베드로에게 자기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유대인들에게 밝히지 말라고 당부하셨던 것이다(마 16 : 20).
(2) 예수님의 광야 40일 금식기도와 3대 시험
우리는 먼저 예수님의 40일 금식기도(禁食祈禱)와 3대 시험(三大試驗)에 대한 원인(遠因)과 근인(近因)을 알아야겠다.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반석(磐石) 앞에 섰던 모세가 불신(不信)으로 돌아가 그것을 두 번 쳤기 때문에, 예수님을 상징하는 그 반석(고전 10 : 4)은 사탄의 침범을 당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후일 메시아로 오셔서 모세노정을 본보기로 걸어야 할 예수님의 노정에 있어서도, 예수님의 앞길을 곧게 하기 위하여 오게 될 세례 요한이 불신으로 돌아가게 되면 반석 되시는 예수님 앞에도 사탄이 침범할 수 있다는 표시적인 행동이 되었다. 따라서 이 행동은 메시아에 앞서 올 세례 요한을 중심한 ‘믿음의 기대’에 사탄이 침범할 수 있다는 표시적인 행동이기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반석을 두 번 친 모세의 행동은, 바로 세례 요한이 불신으로 돌아가게 될 때에 그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 예수님 자신이 세례 요한의 대신 입장에서 광야로 나아가 40일 금식과 3대 시험(三大試驗)을 치르지 않을 수 없게 한 원인(遠因)이 되었다.
사실상 세례 요한이 불신으로 돌아갔기 때문에(전편 제4장 제2절 Ⅲ) 그가 세웠던 ‘믿음의 기대’에는 사탄이 침범하였던 것이니, 이것이 근인(近因)이 되어 예수님은 몸소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 ‘40일 사탄 분립의 기대’를 세움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기 위하여 광야에서의 40일 금식과 3대 시험을 겪지 않을 수 없으셨던 것이다.
그러면 사탄이 3대 시험을 하게 된 목적은 어디 있는가? 마태복음 4장 1절 내지 10절을 보면, 사탄은 예수님에게 돌을 보이면서 그것으로써 떡이 되게 하라고 하였고, 또 그를 성전(聖殿) 꼭대기에 세우고 거기서 뛰어내리라고 하였으며, 더 나아가 그를 산꼭대기에 세우고 자기에게 경배하면 온 세상을 다 주겠다는 등 세 가지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하였다.
태초에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서 그 개성의 완성, 자녀의 번식, 그리고 피조세계(被造世界)에 대한 주관 등 세 가지의 축복(祝福)을 하셨다(창 1 : 28). 그러므로 인간이 이것을 완성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인 것이다.
그런데 사탄이 인간을 타락시킴으로써 이 세 가지 축복을 이루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그 창조목적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이 세 가지의 축복을 복귀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시려고 오셨기 때문에, 사탄은 축복 복귀의 길을 막기 위한 그 세 가지의 시험으로써 창조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 3대 시험(三大試驗)을 어떻게 받으시고 어떻게 이기셨는가?
우리는 먼저 여기에서 사탄이 어떻게 되어 예수님을 시험하는 주체로 설 수 있었던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모세를 중심한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불신과 모세의 실수로 말미암아 사탄이 예수님과 성신(聖神)을 상징하는 두 석판(石板)과 반석(磐石)을 취함으로써, 그는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의 주체적인 입장에 서게 되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위에서 밝혔다.
그런데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이르러, 사탄을 분립하여 메시아의 갈 길을 곧게 하기 위한 사명자로 왔던 세례 요한(요 1 : 23)이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게 되자 모세 때와 같이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불신(不信)과 불순종(不順從)으로 돌아가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미 모세노정에서 예시(豫示)하신 대로 사탄은 예수님을 시험하는 주체적인 입장에 서게 된 것이었다.
그러면 여기에서 그 시험(試驗)의 경위를 좀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예수님이 광야에서 밤낮 40일을 금식(禁食)하시고 난 뒤, 사탄이 예수님 앞에 나타나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 4 : 3)는 시험을 하였다.
그런데 모세가 광야에서 ‘40일 사탄 분립기대’ 위에 섰던 석판(石板)을 깨뜨리고 반석(磐石)을 두 번 쳤던 행동과 세례 요한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그 돌을 사탄이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찾기 위하여 예수님도 광야로 나아가 40일을 금식하여 사탄을 분립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사탄은 예수님이 돌을 찾기 위하여 광야에 나오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옛날 민족적 가나안 복귀를 위한 광야노정(曠野路程)에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불신으로 흘러 돌을 사탄이 가지게 되었던 것과 같이, 이제 세계적 가나안 복귀의 광야노정에 있는 예수님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굶주린 가운데 있으니, 어서 불신으로 돌아가 그 돌을 찾으려 하지 말고 그것으로 떡이나 되게 하여 주린 배를 채우면, 그 돌은 사탄이 영원히 가지겠다 하는 뜻이었다.
이 시험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 : 4)고 하셨다.
원래 사람은 두 가지의 영양소로써 살아가도록 창조되었다. 즉 자연계로부터 섭취하는 영양소로써는 육신(肉身)이 살아가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는 영인체(靈人體)가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타락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요한복음 1장 14절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지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써 그 영인체들이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 6장 48절을 보면 예수님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고 말씀하시면서, 계속하여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 : 53)고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이 떡을 먹고 그 육신이 살아 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서 온전한 삶이라고는 할 수 없다. 거기에 더하여, 하나님의 입으로 나온 말씀이 육신으로 화하여 모든 사람의 생명의 양식으로 오신 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지 않으면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모세가 석판(石板)의 뿌리 되는 반석(磐石)을 두 번 침으로써 그 돌은 사탄의 소유로 돌아갔었다. 이렇게 사탄의 것이 되어진 그 돌은 바로 모세가 잃어버린 그 반석이었고 또 그 석판이었으므로, 그 돌은 결국 사탄의 시험을 받고 있는 예수님 자신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2장 17절에 돌을 그리스도로 상징하였고,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한 것을 보아서도 분명하다. 그러므로 사탄의 첫째 시험에 응한 예수님의 대답은 결국 내가 지금 아무리 굶주린 가운데 있을지라도 육신(肉身)을 살리는 떡이 문제가 아니라, 내 자신이 너로부터 시험을 받고 있는 자리에서 승리하고 나서 온 인류의 영인체(靈人體)를 살려 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양식이 되어야 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이 시험은 예수님이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 시험을 받아 이김으로써 개성을 완성한 메시아의 입장을 찾아 세우는 시험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원리적인 입장에서 뜻을 대하는 예수님의 언행(言行)에 사탄은 패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첫번 시험에 승리하여 개성(個性)을 복귀할 수 있는 조건을 세움으로써, 하나님의 제1축복(第一祝福) 복귀의 기대를 조성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사탄은 예수님을 성전(聖殿)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마 4 : 6)고 하였다.
그런데 요한복음 2장 19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성전이라 하셨고, 또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는 성도(聖徒)들을 일러 하나님의 성전이라고도 하였으며, 고린도전서 12장 27절에는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지체(肢體)라고 하였다.
따라서 예수님은 본성전(本聖殿)이요 성도들은 그 분성전(分聖殿)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성전의 주인공으로 오셨으므로 사탄도 그 격위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웠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뛰어내리라고 한 것은, 주인공의 위치에서 떨어져 타락한 인간의 입장으로 돌아가면 자기가 예수님 대신으로 성전 주관자(主管者)의 위치를 점령하겠다는 뜻이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마 4 : 7)고 대답하셨다.
원래 천사(天使)는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인간의 주관을 받도록 창조된 것이므로 타락한 천사는 응당 예수님의 주관을 받아야 한다. 따라서 천사가 예수님 대신으로 성전 주관자의 입장에 서려 하는 것은 비원리적(非原理的)인 행동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비원리적인 행동으로, 원리적인 섭리를 하시는 하나님의 몸 되신 예수님을 시험함으로써 하나님을 시험하는 입장에 서서는 안 된다. 더구나 예수님은 제1차 시험에 승리하여 개성을 복귀한 실체성전(實體聖殿)으로서 성전의 주인공의 입장을 확립하셨기 때문에, 사탄의 시험을 받을 만한 아무런 조건도 없으니 이제는 예수님 자신을 시험하지 말고 물러가라는 뜻이었다.
이렇게 하여 둘째 시험에 승리함으로써 본성전이시고 신랑이시며 또한 인류의 참부모로 오신 예수님은, 모든 성도들을 분성전과 신부와 참자녀의 입장으로 복귀할 수 있는 조건을 세워 하나님의 제2축복(第二祝福) 복귀의 기대를 조성하셨던 것이다.
다음으로 사탄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은 산으로 이끌고 가서 천하만국(天下萬國)과 그 영광을 보여 주며,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 4 : 9)고 시험하였다.
원래 아담이 타락됨으로 인하여 만물세계(萬物世界)에 대한 주인공의 자격을 상실하고 사탄의 주관을 받게 됨에 따라, 사탄이 아담의 대신으로 만물세계의 주관자로 서게 되었다(롬 8 : 20).
그런데 완성한 아담격으로 오신 예수님은 고린도전서 15장 27절에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두셨다고 기록되어 있는 말씀대로 피조세계(被造世界)의 주관자이시었다. 따라서 사탄도 이러한 원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산 위로 인도하여 만물의 주인공의 입장에 세워 놓고, 태초에 아담이 사탄에게 굴복한 것과 같이 제2 아담 된 예수님도 사탄에게 굴복하라고 시험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 4 : 10)고 대답하셨다.
천사(天使)는 원래 부리는 신(神)으로서(히 1 : 14),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경배(敬拜)하고 섬기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타락한 천사인 사탄도 그에게 경배하고 섬기는 것이 원리요, 따라서 사탄은 마땅히 창조주 하나님의 몸으로 나타난 예수님에게도 굴복하고 경배하며 섬기는 것이 원리라는 것으로 예수님은 대답하셨던 것이다. 더구나 예수님은 이미 두 번의 시험에 승리하여 하나님의 제1, 제2축복을 복귀할 수 있는 기대(基臺)를 조성하셨으므로 그 기대 위에서 하나님의 제3축복을 복귀하여 만물세계를 주관해야 할 것은 당연한 일이니, 이미 승리의 기대 위에 선 만물세계를 걸어 놓고는 더 이상 시험받을 여지가 없다는 뜻으로 원리적인 대답을 하셨다.
이렇듯 예수님은 셋째 시험에도 승리하시어, 피조세계(被造世界)에 대한 주관성을 복귀할 수 있는 조건을 세움으로써 하나님의 제3축복(第三祝福) 복귀의 기대를 조성하셨다.
(3) 40일 금식과 3대 시험으로 사탄을 분립한 결과
창조원리(創造原理)에 의하면, 인간이 정(正)·분(分)·합(合) 3단계의 과정을 거치어 사위기대(四位基臺)를 이루어야만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사위기대를 이루어 나오는 과정에서 사탄의 침범을 당하여 창조목적을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제까지의 복귀섭리노정(復歸攝理路程)도 역시 3단계까지 연장되어 내려오면서 ‘40일 사탄 분립기대’를 세워 가지고, 상실되었던 모든 것을 탕감복귀(蕩減復歸)코자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메시아이시면서도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 3단계의 시험에 승리하여 ‘40일 사탄 분립기대’를 세우셨다. 이것으로써 예수님은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역사노정에서, 3단계로 연장하시면서 ‘40일 사탄 분립기대’로써 찾으시려 했던, 다음과 같은 모든 조건들을 일시에 탕감복귀하셨던 것이다.
즉 첫째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 제2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를 위한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셨으므로, 그때까지의 섭리노정(攝理路程)에 있어서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하여 찾아 세우려던 모든 것을 탕감복귀하셨던 것이다. 즉 가인 아벨의 헌제, 노아의 방주, 아브라함의 헌제, 모세의 성막, 솔로몬의 성전 등을 탕감복귀하셨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아담 이후 4천년 간의 종적인 역사노정에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중심인물(中心人物)들의 실수로 말미암아 잃어버렸던 모든 ‘40일 사탄 분립기대’를 횡적으로 일시에 탕감복귀하시었다.
즉 노아의 심판 40일, 모세의 3차의 40년 기간과 2차의 40일 금식, 정탐 40일, 이스라엘의 광야노정 40년, 그리고 노아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400년, 애급고역 400년, 그리고 그 후 예수님 때까지에 있어졌던 모든 40수의 기간을 전부 탕감복귀하셨던 것이다.
둘째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 메시아의 입장에 서게 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3대 축복(三大祝福)을 이루어 사위기대(四位基臺)를 탕감복귀할 수 있는 조건을 세우셨다. 따라서 예수님은 헌제(獻祭)를 이룬 실체시요, 또한 석판(石板)과 성막(聖幕)과 법궤(法櫃)와 반석(磐石)과 성전(聖殿)의 실체로 설 수 있게 되셨던 것이다.
2. 실체기대
예수님은 인류의 참부모로 오셔서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 ‘40일 사탄 분립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셨기 때문에, 부모의 입장에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동시에, 자녀의 입장에서 ‘타락성을 벗기 위한 세계적인 탕감조건’을 세우는 데 있어서의 아벨의 위치도 확립하셨다.
따라서 예수님은 모세가 미디안광야에서 40년 탕감기간(蕩減期間)을 지남으로써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를 위한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였던 입장을 세계적으로 탕감복귀한 입장에 서게 되셨던 것이다.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는 3대 기적(三大奇蹟)과 10재앙(十災殃)으로 그의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다. 그런데 그 후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인하여 무위(無爲)로 돌아간 애급에서의 3대 기적과 10재앙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 석판·성막·법궤의 3대 은사와 십계명(十誡命)을 세우는 것으로서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다는 것은 이미 모세노정에서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석판·성막·법궤의 3대 은사와 십계명의 실체이시기 때문에 제2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는, 예수님 자신이 말씀과 기사 이적(奇事異蹟)으로써 그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가인의 입장에 있었던 유대민족이 이 ‘출발을 위한 섭리’에 의하여 세례 요한의 사명을 가지고 아벨의 입장에 서 있는 예수님을 믿고 모시고 따르면,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 가지고 ‘실체기대(實體基臺)’를 복귀하게 됨으로써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었더라면 예수님은 이 기대 위에서 세례 요한의 입장으로부터 메시아로 서게 되고, 온 인류는 그에게 접붙임을 받아(롬 11 : 17) 중생(重生)되어 원죄를 벗고 하나님과 심정의 일체를 이룸으로써 창조본성(創造本性)을 복귀하여 지상천국(地上天國)을 이루게 되었을 것이었다.
3. 제2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의 실패
세례 요한의 불신(不信)으로 말미암아 제1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섭리가 실패로 돌아갔을 때,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사명을 대신하여 몸소 광야 40일의 고난을 당하시면서 제2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를 위한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앞서 논술한 바 3대 시험(三大試驗)에서 예수님에게 패배한 사탄은 예수님 앞을 얼마 동안 떠났다고 하였다(눅 4 : 13). 사탄이 얼마 동안 떠났다는 말은, 아주 떠난 것이 아니라 다시 예수님 앞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었다. 과연 사탄은 불신으로 돌아간 제사장(祭司長)과 교법사(敎法師) 등을 중심한 유대민족, 특히 예수님을 판 제자 가룟 유다를 통하여 다시 예수님 앞에 대립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와 같이 유대민족의 불신으로 인하여 제2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섭리를 위한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이룰 수 없게 되었고, 그에 따라 이 섭리를 위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할 수 없게 되어 제2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Ⅲ.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
1. 예수님을 중심한 영적 가나안 복귀노정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에 관한 문제를 논함에 있어서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이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이다.
이미 위에서 상세히 논급한 바와 같이,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의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의 대상은 메시아의 상징체인 성막(聖幕)이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모두 불신으로 흘러갔을 때에도 이 성막만은 모세가 금식 40일 기간으로 세웠던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 위에 서 있었고, 모세마저 불신으로 돌아갔을 때에도 그것은 모세가 세운 ‘믿음의 기대’ 위에 여호수아에 의한 정탐 40일 사탄 분립기간으로 조성되었던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서 계속 그 뜻을 받들어 나온 여호수아를 중심하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나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의 유대민족의 신앙의 대상은 성막의 실체로 오신 예수님이었는데 그의 제자들마저 불신으로 돌아갔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 3 : 14)라고 하신 말씀대로 그의 육신을 십자가(十字架)에 내주시어 죽음의 길을 가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유대민족은 영육(靈肉) 아울러 신앙의 대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은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과 같이 직접 실체노정으로써 출발하지 못하고, 제2 이스라엘인 기독교 신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신앙의 대상으로 세워 가지고 먼저 영적 노정으로써 출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성전(예수님)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 : 19)고 말씀하신 이유는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마치 여호수아가 모세의 사명을 계승하여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를 완성하였던 것과 같이, 예수님은 재림(再臨)하셔서 초림(初臨) 때의 사명을 계승하시어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영육 아울러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복귀섭리노정(復歸攝理路程)을 보더라도 예수님께서 초림 때와 같이 육신을 쓰시고 재림하시지 않으면, 초림 때에 이루려 하셨던 복귀섭리의 목적을 계승 완수하실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1) 영적인 믿음의 기대
유대민족이 예수님을 배반함으로 인하여 제2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이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서, 예수님이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 40일 금식으로 세웠던 ‘믿음의 기대’는 사탄에게 내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의하여 그 육신을 사탄에게 내주신 후에는, 영적인 세례 요한 사명자의 입장에서 40일 부활기간(復活期間)으로 사탄 분립의 영적 기대를 세우심으로써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의 영적 노정을 위한 영적인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40일의 부활기간(復活期間)을 세우시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는 것을 안 사람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영적인 ‘믿음의 기대’를 어떻게 세우셨던가? 예수님이 메시아로 나타나실 때까지는 하나님은 유대 선민(選民)들과 함께 계셨다. 그러나 그들이 메시아로 나타나신 예수님을 배반한 순간부터 하나님은 그들 선민을 사탄에게 내주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로부터 배척당한 독생자(獨生子) 예수님과 함께 선민을 버리고 돌아설 수밖에 없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내신 목적은 선민을 비롯한 전인류(全人類)를 구원(救援)하시려는 데 있었으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탄에게 내주시고서라도 전인류를 구원하려 하셨던 것이다.
한편 또 사탄은 자기편에 서게 된 선민을 비롯한 전인류를 모두 하나님에게 내놓게 되더라도 메시아인 예수님 한 분을 죽이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4천년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제1목적이 메시아 한 분을 세우시려는 데 있었으므로, 사탄은 그 메시아를 죽임으로써 하나님의 전섭리(全攝理)의 목적을 파탄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되어 하나님은 예수님을 반대하고 사탄편으로 돌아간 유대민족을 비롯한 전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탕감조건(蕩減條件)으로 예수님을 사탄에게 내주시게 되었다.
사탄은 자기의 최대의 실권을 행사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살해함으로써, 그가 4천년 역사노정을 두고 목적해 왔던 바를 달성한 것이 되었다. 이처럼 예수님을 사탄에게 내주신 하나님은 그 대가로서 이스라엘을 비롯한 전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조건을 세우시게 되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여서 죄악 인간(罪惡人間)들을 구원하실 수 있게 되었는가?
사탄이 이미 그의 최대의 실권을 행사하여 예수님을 살해하였기 때문에, 탕감복귀원칙(蕩減復歸原則)에 의하여 하나님에게도 최대의 실권을 행사하실 수 있는 입장이 성립되었다.
그런데 사탄의 최대 실권행사(實權行使)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최대 실권행사는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탄이 그의 최대 실권행사로서 예수님을 살해한 것에 대한 탕감조건으로 하나님도 최대의 실권을 행사하시어 죽은 예수님을 부활(復活)시키시고, 온 인류로 하여금 그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접붙이어(롬 11 : 24) 중생(重生)케 하심으로써 구원을 받도록 하신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잘 아는 바와 같이, 부활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제자들과 같이 생활하시던 그러한 예수님은 아니시었다. 그는 이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자리에 계셨기 때문에 육안(肉眼)으로는 볼 수 없는 분이었다.
그는 제자들이 문을 닫고 있는 방 안에도 문득 나타나셨는가 하면(요 20 : 19),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홀연히 나타나시어 오랫동안 동행하기도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나타나신 예수님을 보면서도 그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보지 못하였으며(눅 24 : 15~16), 이와 같이 나타나셨던 예수님은 또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져 버리기도 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의 육신을 제물(祭物)로 십자가에 내주신 후, 이렇듯 부활 40일의 사탄 분립기간으로 영적인 ‘믿음의 기대’를 세우심으로써 만민의 죄를 대속(代贖)할 수 있는 길을 개척하셨다.
(2) 영적인 실체기대
예수님은 영적(靈的)인 세례 요한 사명자의 입장에서 영적인 부활 ‘40일 사탄 분립기대’를 조성하심으로써 영적 참부모의 입장에서 영적인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동시에, 또 영적인 자녀의 입장에서 ‘타락성을 벗기 위한 세계적인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는 데 있어서의 영적인 아벨의 위치도 확립하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광야 표류(曠野漂流) 40년의 탕감기간(蕩減期間)을 지남으로써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를 위한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였던 것과 같이,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를 위한 영적인 ‘믿음의 기대’를 조성할 수 있게 되었다.
모세 때에는 ‘성막을 위한 기대’를 세우게 함으로써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다. 그러나 부활(復活)하신 예수님은 갈릴리에 흩어졌던 제자들을 거두어 모으시고, 자신이 석판과 성막과 법궤의 영적인 실체가 되어 제자들에게 기사(奇事)와 이적(異蹟)의 권능을 주심으로써(마 28 : 16~18)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던 것이다.
여기에서 가인의 입장에 선 성도(聖徒)들은, 이 ‘출발을 위한 섭리’에 의하여 영적인 세례 요한 사명자로서 영적인 아벨의 입장에 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모시고 따라 ‘타락성을 벗기 위한 영적인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영적인 실체기대’를 복귀하게 된 것이다.
(3) 메시아를 위한 영적인 기대
예수님이 십자가(十字架)에 돌아가신 후에 남은 열한 제자는 모두 힘없이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그들을 다시 한 곳으로 거두어 모으시고, 영적 가나안 복귀의 새로운 섭리를 시작하셨던 것이다. 제자들은 가룟 유다 대신으로 맛디아를 택하여 12제자의 수를 채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숨을 바쳐 믿고 모시고 따름으로써 ‘영적인 실체기대’를 조성함에 따라 ‘메시아를 위한 영적인 기대’를 복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이 기대 위에서 영적인 세례 요한 사명자의 입장으로부터 영적인 메시아의 입장을 확립하고 성신(聖神)을 복귀하심으로써 영적인 참부모가 되어 중생(重生)의 역사를 하시게 되었다.
즉 사도행전 2장 1절 내지 4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오순절(五旬節)에 성신이 강림하신 후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적인 참아버지로서 영적 참어머니 되신 성신과 합하여 역사하심으로써 성도들로 하여금 영적으로 접붙이게 하시어 영적 중생의 역사를 하셨기 때문에, 영적 구원섭리만을 이루시게 되었다(전편 제4장 제1절 Ⅳ). 따라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권내에는 사탄의 영적 참소조건(讒訴條件)이 청산되어 있으므로, 그것은 영적인 면에 있어서의 사탄의 불가침권(不可侵圈)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타락인간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그와 하나가 되어도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그의 몸은 여전히 사탄의 침범을 당한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에, 육적 구원은 의연(依然)히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면 그와 함께 영적으로 사탄 불가침권 내에 있게 됨으로써, 사탄의 영적인 참소조건을 면하고 영적 구원만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4) 영적 가나안 복귀
기독교 신도들은 ‘메시아를 위한 영적인 기대’ 위에서 영적인 메시아로 서게 된 예수님을 믿고 모심으로써 영적 가나안 복귀만을 완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영적 가나안 복귀의 혜택권 내에 있는 성도들의 육신은 십자가(十字架)에 의하여 사탄의 침범을 당한 예수님의 육신과 같은 입장에 서게 됨으로써,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나 다름없이 사탄의 침범을 당하여 원죄(原罪)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롬 7 : 25), 성도들도 또한 예수 재림을 위한 사탄 재분립(再分立)의 노정을 걷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전편 제4장 제1절 Ⅳ).
모세를 중심하고 섭리하셨던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의 성막이상(聖幕理想)은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적 실체성전(實體聖殿)을 중심하고 세계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지성소(至聖所)와 성소(聖所)는 그것들이 상징한 바 예수님과 성신(聖神), 예수님의 영인체와 육신이 영적 실체로 이루어졌고, 속죄소(贖罪所)의 이상(理想)은 예수님과 성신의 역사에 의하여 이루어짐으로써 거기에 하나님이 나타나시어 말씀하시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는 그 속죄소에서, 인간 시조가 타락된 후에 그 앞을 가로막았던 그룹을 좌우로 갈라 세우고 법궤 안으로 들어가 생명나무 되신 예수님을 맞이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를 먹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로 보여 주셨던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히 9 : 4~5). 이와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의 재림은 모세노정을 통하여 보더라도 그것이 기정적(旣定的)인 섭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2. 재림주님을 중심한 실체적 가나안 복귀노정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이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과 같이 실체노정(實體路程)으로 출발하지 못하고 영적 노정으로 출발하게 된 이유에 대하여는 이미 위에서 논술한 바이다.
‘메시아를 위한 영적인 기대’ 위에서 영적 메시아로 계시는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으로 출발한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의 영적 섭리는, 2천년의 유구한 역사노정(歷史路程)을 지나서 오늘날 세계적으로 그 영적 판도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치 모세의 영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여호수아가 대신하여 실체노정으로 걸어서 민족적 가나안 복귀를 완수하였던 것과 같이, 예수님은 지금까지의 영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재림(再臨)하셔서 실체노정으로 걸으시어 세계적 가나안 복귀를 완수하심으로써 지상천국을 이루셔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재림주님은 초림(初臨) 때에 실체로써 이루시려던 지상천국을 그대로 이루셔야 하기 때문에, 실체인간으로 지상에서 탄생하셔야 되는 것이다(후편 제6장 제2절 Ⅱ 참조).
그러나 재림주님은 초림 때의 복귀섭리노정(復歸攝理路程)을 탕감복귀하셔야 하기 때문에, 마치 그의 초림 때에 유대민족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영적 복귀섭리의 고난(苦難)의 노정을 걸으셨던 것과 같이, 재림 때에 있어서도 만일 제2 이스라엘인 기독교 신도들이 불신으로 돌아가면 그 영적인 고난의 노정을 다시 실체로써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러나 그(예수님)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눅 17 : 25)고 말씀하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초림 때에 그를 위하여 소명(召命)되었던 제1 이스라엘 선민을 버리시고 기독교 신도들을 제2 이스라엘 선민으로 세워 가지고 새로이 영적인 섭리노정을 이루어 나올 수밖에 없으셨던 것과 같이, 재림 때에도 기독교 신도들이 불신으로 돌아가면 그들을 버리시고 새로이 제3 이스라엘을 세우시어 실체적인 섭리노정을 이루어 나아가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재림 때에도 초림 때와 같이 그의 길을 곧게 하기 위한 세례 요한의 사명(요 1 : 23)을 가지고 올 선구자(先驅者)들이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되면, 재림주님 자신이 또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섭리를 위한 ‘믿음의 기대’를 실체적으로 조성하셔야 하기 때문에 고난의 길을 걷지 않으실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재림주님은 아무리 고난의 길을 걸으신다 하여도 초림(初臨) 때와 같이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시게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류의 참부모님을 세우시어(전편 제7장 제4절 Ⅰ 1)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이루시려는 섭리는, 아담에서 예수님을 거치어 재림주님에 이르기까지 세번째인 재림 때에는 의당 그 섭리를 이루시게 되어 있으며, 더구나 후편 제4장 제7절에 논술되어 있는 바와 같이 예수님 이후 2천년 간의 영적 복귀섭리는 그를 위한 사회 조성을 위하여 민주주의시대(民主主義時代)를 이루어 놓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 초림 때에는 유대교의 반역자(反逆者)로 몰려서 돌아가셨지만, 그가 재림하시는 민주주의 사회에 있어서는 설혹 그가 이단자(異端者)로 몰리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로 인하여 죽음의 자리에까지 나아가게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림주님이 아무리 고난의 길을 걸으신다 할지라도, 그가 세우시는 실체적인 ‘믿음의 기대’ 위에 그를 절대로 믿고 따라 모시는 성도들이 모여서,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의 실체노정(實體路程)을 위한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조성함으로써 ‘메시아를 위한 실체적인 기대’를 이루게 될 것만은 확실하다.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모세 때에는 반석(磐石)을 중심하고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게 되어 있었고, 여호수아 때에는 반석보다 더 내적인 그 샘물을 중심하고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초림 때에는 기사 이적(奇事異蹟)으로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지만, 재림 때에는 그의 내적인 ‘말씀’을 중심하고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전편 제3장 제3절 Ⅱ에서 논급한 바와 같이, ‘말씀’으로 창조된 인간이(요 1 : 3) 타락으로 인하여 ‘말씀’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은 이 목적을 다시 이루시기 위하여 ‘말씀’의 외적인 조건을 세우시어 복귀섭리(復歸攝理)를 이루어 나오시다가, 섭리역사의 종말에 이르러는 ‘말씀’의 실체 되신 예수님(요 1 : 14)을 다시 보내시어 ‘말씀’을 중심하고 구원섭리(救援攝理)를 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심정의 인연을 중심하고 보면, 하나님은 영적인 부모로서 인간을 실체의 자녀로 창조하셨다. 그리고 최초로 하나님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의 형상적 실체대상(實體對象)으로 창조된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의 제1 실체대상으로서 인류의 부모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부부를 이루고 자녀를 번식하여 부모의 사랑과 부부의 사랑과 자녀의 사랑을 나타내는, 부모의 심정과 부부의 심정과 자녀의 심정으로 결뉴(結紐)된 가정을 이루게 되어 있었던 것이니, 그것이 바로 삼대상목적(三對象目的)을 이룬 사위기대(四位基臺)인 것이다(전편 제1장 제2절 Ⅲ 참조).
이와 같이 하나님은 하늘의 혈통을 이어받은 직계(直系)의 자녀들로써 지상천국을 이루시려 하셨다. 그러나 이미 타락론(墮落論)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인간 시조가 천사장(天使長)과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맺음으로 인하여 온 인류는 사탄의 혈통을 이어받아서 모두 마귀의 자식이 되고 말았다(마 3 : 7, 마 23 : 32, 요 8 : 44). 그리하여 인간 시조는 하나님과 혈통관계가 끊어진 입장에 떨어지고 말았으니 이것이 바로 타락이다(전편 제2장 참조).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은 이와 같이 하나님과 혈통관계가 끊어진 타락인간을 복귀시켜 가지고, 하나님 직계의 혈통적 자녀로 세우시려는 데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비밀을 성서(聖書)에서 찾아보기로 하자.
위에서 논한 바와 같이, 타락되어 살육행위(殺戮行爲)를 자행하였던 아담가정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노아 때에 이르러, 그의 둘째 아들로서 아벨의 입장이었던 함은 그의 실수로 인하여 비록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하였으나, 노아가 충성을 다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종들의 종’(창 9 : 25)의 입장에 서게 됨으로써 하나님과 간접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약 전 시대(舊約前時代)에 있어서의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였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이르러 그는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를 이루어서 하나님의 선민(選民)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들은 비로소 하나님의 종의 입장으로 복귀하게 되었던 것이니(레 25 : 55), 이것이 바로 구약시대(舊約時代)에 있어서의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였다.
예수님이 오신 후,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 세우신 그의 ‘믿음의 기대’ 위에 섰던 제자들은 비로소 구약시대의 종 된 입장에서 양자(養子)의 입장으로 복귀되었었다. 그들이 하늘의 직계의 혈통적 자녀가 되기 위하여는 예수님에게 절대로 순종하여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이룸으로써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여, 그 기대 위에 선 예수님에게 영육(靈肉) 아울러 접붙임을 받아서(롬 11 : 17) 그와 일체를 이루어야 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혈통적 직계의 원죄(原罪) 없는 독생자(獨生子)로 오셔서, 타락한 온 인류를 그에게 접붙이어 한 몸이 되게 하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원죄를 벗고 하나님 직계의 혈통적 자녀로 복귀케 하시기 위하여 오셨던 것이다. 예수님과 성신(聖神)이 인류의 참부모로서 이와 같이 타락인간을 접붙이어 원죄를 벗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과 창조본연(創造本然)의 혈통적인 인연을 맺게 하시는 역사를 우리는 중생(重生)이라고 한다(전편 제7장 제4절 참조).
그러므로 예수님은 돌감람나무 된 타락인간으로 하여금 접붙이게 하시기 위하여 참감람나무의 중심으로 오셨던 분이심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제자들마저 불신으로 돌아갔으므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 메시아의 입장에 서 보지도 못하고 십자가(十字架)에 돌아가셨다. 그리하여 부활(復活)하신 예수님이 영적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 부활 40일 사탄 분립기간으로써 영적인 ‘믿음의 기대’를 세우신 후, 회개하고 돌아온 제자들의 신앙(信仰)과 충절(忠節)로 말미암아 영적인 ‘실체기대(實體基臺)’가 세워짐으로써 비로소 ‘메시아를 위한 영적인 기대’가 조성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 영적인 기대 위에 영적인 메시아로 서신 예수님에게 영적인 접붙임을 받음으로써 비로소 성도(聖徒)들은 영적인 자녀로서만 설 수 있게 된 것이니, 이것이 바로 예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영적 복귀섭리에 의한 하나님과 타락인간과의 관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이후의 영적 복귀섭리는 마치 하나님이 영계(靈界)를 먼저 창조하셨던 것과 같이 그러한 형의 영적 세계를 먼저 복귀하여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타락인간은 아직 영적으로만 하나님의 대상으로 설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잘 믿는 기독교 신도라 할지라도 육적으로 내려오는 원죄(原罪)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사탄의 혈통을 벗어나지 못한 점에서는 구약시대(舊約時代)의 성도들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전편 제4장 제1절 Ⅳ).
이와 같이 기독교 신도들은 하나님 앞에 혈통이 다른 자녀이기 때문에 양자(養子)가 되는 것이다. 일찍이 바울이, 성령(聖靈)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도 탄식하여 양자 되기를 기다린다고 한 이유는 실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롬 8 : 23).
그러므로 예수님은 온 인류를 하나님의 혈통적 직계의 자녀로 복귀케 하시기 위하여 재림(再臨)하셔야 한다. 따라서 그는 초림(初臨) 때와 같이 육신을 쓰시고 지상에서 탄생하셔서 초림 때의 노정을 다시 걸으심으로써 그것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위에서 이미 논술한 바와 같이, 재림 예수님은 ‘말씀’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섭리’에 의하여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실체적으로 조성하시어, 그 기대 위에서 온 인류를 영육(靈肉) 아울러 접붙이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원죄를 벗고 하나님의 혈통적 직계의 자녀로 복귀케 하셔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초림 때에,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의 중심인물이었던 야곱의 입장을 탕감복귀하시기 위하여 3제자를 중심한 12제자를 세우심으로써 가정적인 기대를 세우셨고, 다시 70문도를 세우심으로써 그 기대를 종족적인 기대에로 넓히려 하셨던 것과 같이, 그는 재림하셔서도 그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실체적으로 가정적인 것에서 출발하여 종족적, 민족적, 국가적, 세계적, 천주적인 것으로 복귀하시어 그 기대 위에 천국을 이루는 데까지 나아가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장차 예수님이 탄생하시어 천국 건설의 목적을 빨리 이루게 하시기 위하여 제1 이스라엘 선민을 세우심으로써 그 터전을 예비하셨었으나 그들이 배반함으로 인하여 기독교 신도들을 제2 이스라엘로 세우셨던 것과 같이, 만일 재림(再臨) 예수님의 천국 건설 이상을 위하여 제2 이스라엘로 세워진 기독교 신도들이 또 그를 배반하면 하나님은 부득이 그 제2 이스라엘 선민을 버리시고 새로이 제3 이스라엘 선민을 택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세(末世)에 처한 기독교 신도들은 예수님 초림(初臨) 당시의 유대민족들과 같이 가장 행복한 환경 가운데 있으면서도 한편 가장 불행하게 될 수 있는 처지에 놓여 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Ⅳ. 예수님의 노정이 보여 준 교훈
첫째로, 여기에서도 뜻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豫定)이 어떠한가를 보여 주셨다. 하나님은 언제나 뜻을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하시고 이루시기 때문에, 세례 요한이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을 때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 자신이 그의 사명을 대신하시면서까지 기필코 그 뜻을 이루려 하셨고, 또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지상천국(地上天國)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예수님은 재림하셔서까지 이 뜻을 절대적으로 이루려 하시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택함받은 어느 개인이나 민족을 중심한 뜻 성사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은 절대적이 아니고 상대적이라는 것을 보여 주셨다. 즉 하나님은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어떤 인물이나 어떤 민족을 세우셨을지라도, 그들이 자기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완수하지 못하게 되면 반드시 새로운 사명자를 세우시어 그 일을 잇게 하셨던 것이다.
즉 예수님은 그의 수제자(首弟子)로 세례 요한을 택하셨었으나 그가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대신으로 베드로를 택하셨고, 또 가룟 유다를 12제자의 하나로 택하셨던 것이었으나 그가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을 때 그의 대신으로 맛디아를 택하셨던 것이다(행 1 : 25). 한편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유대민족을 택하셨으나 그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게 되자 그 사명을 이방인(異邦人)들에게로 옮기셨던 것이다(행 13 : 46, 마 21 : 33~43). 이처럼 아무리 뜻 성사를 위하여 택함을 받은 존재라 할지라도, 그를 중심한 뜻의 성사는 결코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하실 수는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인간책임분담(人間責任分擔)에 대해서는 간섭치 않으시고 그 결과만을 보시고 주관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세례 요한이나 가룟 유다가 불신으로 돌아갈 때 하나님은 그것을 모르시지 않았을 것이며, 또 그것을 못 하게 하실 수 없는 것도 아니었으나, 그의 신앙에 대하여는 일절 간섭치 않으시고 그 결과만을 보고 주관하셨던 것이다.
다음으로, 큰 사명을 맡은 인물일수록 그에게 오는 시련도 그만큼 크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아담이 하나님을 불신으로 버렸기 때문에, 후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이 그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는 아담 대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입장에서 오히려 믿음을 세워 그의 타락 전 입장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셔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까지도 받으셔야 했었고, 또 십자가상(十字架上)에서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 일까지 겪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마 27 :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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