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 복귀기대섭리시대

2013. 2. 8. 14:43참사랑 영원까지/원리강론

제 1 장 복귀기대섭리시대

 


제 1 절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

 

 

타락(墮落)은 비록 인간 자신의 잘못으로 되어진 것이지만, 하나님이 그 타락인간을 구원(救援)하시지 않을 수 없다는 데 대하여는 이미 전편 제3장 제2절 Ⅰ에서 논한 바 있다. 그러므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워 타락인간을 복귀(復歸)하시려는 섭리는 일찍이 아담가정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미 서론(緖論)에서 논한 바와 같이, 아담은 사탄과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맺었기 때문에 하나님도 대할 수 있고 사탄도 대할 수 있는 중간 위치(中間位置)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이 중간 위치에 처해 있었던 타락인간(墮落人間)을 하늘편으로 분립(分立)하여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기 위하여는 타락인간 자신이 어떠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워야만 했었다. 그러므로 아담가정이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實體基臺)’를 복귀하는 탕감조건을 세우고, 그로써 이루어지는 ‘메시아를 위한 기대’ 위에서 메시아를 맞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복귀섭리(復歸攝理)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Ⅰ. 믿음의 기대

 

첫째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는 그것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기 위한 어떠한 조건물(條件物)이 있어야 한다. 원래 아담은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한 조건으로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을 수 없는 자리에 떨어진 타락한 아담이 그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는, 그가 믿음으로써 말씀 대신의 어떠한 조건물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세워야만 했던 것이다. 아담가정에서 세워야 했던 이 말씀 대신의 조건물은 제물(祭物)이었다.

 

둘째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는 그 기대를 복귀할 수 있는 중심인물(中心人物)이 있어야 한다. 아담가정에 있어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해야 했던 중심인물은 물론 아담 자신이었다. 그러므로 아담이 응당 제물을 바쳐야 하였던 것이고, 그가 이 제물을 합당하게 바치는가 바치지 못하는가에 따라 ‘믿음의 기대’의 조성 여부가 결정될 것이었다.

 

그러나 성서(聖書)의 기록을 보면, 아담이 제물을 바치지 못하고 가인과 아벨로부터 제물을 바쳤던 것이니 그 이유는 어디에 있었던가?
창조원리(創造原理)에 의하면 인간은 본래 한 주인을 대하도록 창조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주인을 대하는 입장에 있는 존재를 상대로 하여 창조원리적인 섭리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담과 그 제물을 대하신다면, 사탄도 또한 아담과 혈연관계(血緣關係)가 있음을 조건삼아 이것들을 대하려고 할 것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결국 아담은 하나님과 사탄의 두 주인을 대하는 비원리적(非原理的)인 입장에 서게 된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비원리적인 섭리를 하실 수 없으므로 선 악 두 성품의 모체가 된 아담을 선성품적(善性稟的)인 존재와 악성품적(惡性稟的)인 존재의 둘로 갈라 세우는 섭리를 하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은 아담의 두 아들을 각각 선악(善惡)의 표시체로 분립시킨 후에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사탄을 각각 대할 수 있는, 즉 한 주인 상대의 원리적인 입장에 세워 놓고 제각기 제물(祭物)을 바치게 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가인과 아벨은 다 같이 아담의 자식인데 누구를 선의 표시체로서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입장에 세우고, 또 누구를 악의 표시체로서 사탄을 대할 수 있는 입장에 세워야 할 것이었던가?

 

가인과 아벨은 다 함께 해와의 타락의 열매였다. 따라서 타락의 모체(母體)인 해와의 타락 경로에 의하여서 그것이 결정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해와의 타락은 두 가지의 불륜(不倫)한 사랑의 행동으로 인하여 성립되었었다. 즉 첫째 번은 천사장(天使長)과의 사랑으로 인한 영적 타락(靈的 墮落)이었으며, 둘째 번은 아담과의 사랑으로 인한 육적 타락(肉的 墮落)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들은 모두 똑같은 타락행위(墮落行爲)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 둘 가운데서 어느 것이 보다 원리적이며 보다 용서받을 수 있는 행위인가를 가려 본다면, 첫째 번의 사랑에 의한 타락행위보다는 둘째 번의 사랑에 의한 타락행위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 번의 타락행위가 하나님과 같이 눈이 밝아지려고 한, 즉 때 아닌 때에 때의 것을 바라는 과분한 욕망이 동기가 되어(창 3 : 5) 비원리적 상대인 천사장과 관계를 맺었던 것임에 비하여, 둘째 번의 타락행위는 첫째 번의 행위가 불륜한 것이었음을 깨닫고 다시 하나님편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던 심정이 동기가 되어, 아직 하나님이 허락하신 때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원리적 상대인 아담과 관계를 맺었던 것이기 때문이다(전편 제2장 제2절 Ⅱ).

 

그런데 가인과 아벨은 모두 해와의 불륜한 사랑의 열매인 것이다. 따라서 해와를 중심하고 맺어진 두 형의 불륜한 사랑의 행위들을 조건으로 가름하여 가인과 아벨을 각각 상이(相異)한 두 표시적 입장에 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즉 가인은 사랑의 첫 열매이므로 그 첫째 번 것이었던 천사장(天使長)과의 사랑으로 인한 타락행동을 표징(表徵)하는 악의 표시체로서 사탄을 대할 수 있는 입장에 세워졌고, 아벨은 사랑의 둘째 열매이므로 그 둘째 번 것이었던 아담과의 사랑으로 인한 타락행동을 표징하는 선의 표시체로서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입장에 세워졌던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리의 세계를 사탄이 먼저 점유하였었기 때문에 하나님에 앞서 사탄이 먼저 비원리적인 입장에서 그 원리형(原理型)의 세계를 이루어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원래 하나님이 맏이를 세워서 장자(長子)의 기업(基業)을 계승시키려고 하셨던 원리적인 기준이 있었기 때문에 사탄도 둘째 것에보다도 맏것에 대한 미련이 더욱 컸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사탄은 그때 이미 피조세계(被造世界)를 점유한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보다 미련이 컸던 장자 가인을 먼저 취하려 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탄이 미련을 갖고 대하는 가인보다도 아벨을 대하셨던 것이다.

 

이에 대한 실례를 우리는 성서에서 찾아보기로 하자.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사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창 4 : 7)고 말씀하셨다. 이것을 보면 가인은 사탄의 상대적인 입장에 세워져 있었던 것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급시(出埃及時)에 애급민족뿐만 아니라 그들의 모든 생축(牲畜)까지도 맏것은 모조리 쳤던 것이니(출 12 : 29), 그것들은 모두 가인의 입장으로서 사탄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으로 복귀할 때에는 차자 아벨의 입장이었던 레위의 손(孫)만이 법궤(法櫃)를 메고 갔었다(신 31 : 25).

 

그리고 창세기 25장 23절을 보면, 하나님은 아직도 출생 전 복중의 태아(胎兒)들이었던 장자(長子) 에서를 미워하고 차자(次子) 야곱을 사랑하셨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장·차자라는 명분만으로써 그들은 이미 각각 가인과 아벨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야곱이 그의 손자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동시에 축복할 때에, 차자 에브라임을 우선적으로 축복하기 위하여 손을 엇바꾸어서 축복하였던 것도(창 48 : 14) 역시 에브라임이 아벨의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리에 의하여서 하나님과 사탄을 각각 한 주인으로서 대할 수 있는 위치에 아벨과 가인을 세워 놓고 제물을 바치게 하셨던 것이다(창 4 : 3~5).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祭物)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으니, 그 이유는 어디 있었던가? 아벨은 하나님이 취하실 수 있는 상대적인 입장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제물을 바쳤기 때문에(히 11 : 4) 하나님은 그것을 받으셨다(창 4 : 4). 그리하여 아담가정이 세워야 할 ‘믿음의 기대’는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비록 타락인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취하실 수 있는 조건만 성립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용납(容納)하신다는 것을 교시(敎示)하시기 위함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던 것은 가인이 미워서가 아니었다. 다만 가인은 사탄이 취할 수 있는 상대적인 입장에 세워졌었으므로 하나님이 그 제물을 취하실 수 있는 어떠한 조건을 가인 자신이 세우지 않는 한 하나님은 그것을 취하실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이것으로써 사탄의 상대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편으로 돌아가려면 반드시 그 자신이 어떠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것을 교시하신 것이다.

 

그러면 가인은 어떠한 탕감조건을 세워야 하였던가? 그것은 바로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이었는데, 이에 관하여는 아래에서 자세히 밝히기로 하겠다.

 

 

 

Ⅱ. 실체기대

 

아담가정에 ‘실체기대(實體基臺)’가 세워지기 위하여는, 가인이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하나님이 그의 헌제(獻祭)를 기뻐 받으실 수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면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은 어떻게 세워야 하였던가?

 

인간 시조(始祖)는 천사장(天使長)으로 말미암아 타락되어 그로부터 타락성(墮落性)을 계승하게 되었으므로, 타락인간이 그 타락성을 벗기 위하여는 탕감복귀원리(蕩減復歸原理)에 의하여 아래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그 타락성본성(墮落性本性)을 가지게 되었던 것과 반대의 경로를 취하는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천사장이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고 있던 아담을 사랑하지 못함으로써 타락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같은 입장을 취하지 못하는 타락성’이 생겼다. 그러므로 이 타락성을 벗기 위하여는 천사장의 입장에 있는 가인이 아담의 입장에 있는 아벨을 사랑하여서 하나님의 입장과 같은 입장을 취해야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천사장(天使長)이 하나님에게 더 가까웠던 아담을 중보(仲保)로 세워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 하지 않고, 도리어 아담의 위치를 취하려다가 타락되었기 때문에 ‘자기 위치를 떠나는 타락성’이 생겼다. 그러므로 이 타락성을 벗기 위하여는 천사장의 입장에 있는 가인이 아담의 입장에 있는 아벨을 중보로 세워,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자기 위치를 지켜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천사장은 자기를 주관해야 할 인간, 즉 해와와 아담을 역주관(逆主管)함으로써 타락되었기 때문에 ‘주관성을 전도(顚倒)하는 타락성’이 생겼다. 따라서 인간이 이 타락성을 벗기 위하여는 천사장의 입장에 있는 가인이 아담의 입장에 있는 아벨에게 순종굴복(順從屈伏)하여 그의 주관을 받는 입장에 섬으로써 주관성의 법도(法度)를 바로 세워야 했던 것이다.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지 말라는 선한 뜻을 하나님은 아담에게 전하고, 아담은 또 해와에게 전하고, 해와는 다시 천사장에게 전하여 선을 번식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천사장은 따먹어도 좋다는 불의(不義)의 뜻을 해와에게 전했고, 또 해와는 그것을 아담에게 전함으로써 타락되었기 때문에 ‘죄를 번식하는 타락성’이 생겼다. 그러므로 이 타락성을 벗기 위하여는, 천사장의 입장에 있는 가인이 자기보다도 하나님 앞에 더욱 가까이 서 있는 아벨의 상대적인 입장을 취하여 아벨로부터 선의 뜻을 전해 받음으로써 선을 번식하는 입장을 조성해야 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가인 아벨의 헌제(獻祭)와 상통되는 몇 가지의 실례(實例)를 들어 보기로 하자.
우리의 개체를 두고 생각해 볼 때, 선을 지향하는 마음(롬 7 : 22)은 아벨의 입장이요, 죄의 법을 섬기는 몸(롬 7 : 25)은 가인의 입장인 것이다. 따라서 몸은 마음의 명령에 순종굴복(順從屈伏)해야만 우리 개체는 선화(善化)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몸이 마음의 명령에 반역(反逆)하여 마치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과 같은 입장을 반복하기 때문에 개체는 악화(惡化)되는 것이다.
따라서 도(道)의 생활은 마치 아벨에게 가인이 순응해야 했듯이 하늘 뜻을 지향하는 마음의 명령에 몸을 순응케 하는 생활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은 타락(墮落)되어 만물보다도 거짓된(렘 17 : 9) 입장에 떨어졌으므로 만물을 아벨의 입장에 세워 놓고 그것을 통하여서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니, 이것이 바로 헌제(獻祭)였다. 인간이 항상 좋은 지도자나 친구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볼 때 보다 하늘편에 가까운 아벨형의 존재를 찾아 그와 하나됨으로써 하늘 앞에 가까이 서고자 하는 천심(天心)에서 일어나는 행위인 것이다.

 

그리고 온유겸손(溫柔謙遜)이 기독교 신앙의 강령이 된 것은, 일상생활 가운데서 자기도 모르게 아벨형의 인물을 만나 그를 통하여 하늘 앞에 설 수 있는 위치를 확보하게 하기 위함이다. 개인에서부터 가정, 사회, 민족, 국가, 세계에 이르기까지 거기에는 반드시 가인과 아벨의 두 형의 존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모든 것을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입장으로 복귀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가인형의 존재가 아벨형의 존재에게 순종굴복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전인류가 그에게 순종굴복해야 할 아벨적인 존재로서 이 세상에 오셨던 분이었다. 따라서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자가 없는 것이다(요 14 : 6).

 

만일 아담가정에서 가인이 아벨에게 순종굴복함으로써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웠더라면 그들은 이미 조성된 ‘믿음의 기대’ 위에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세워, 이 두 기대로써 이루어지는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 위에서 메시아를 맞음으로써 창조본연의 사위기대(四位基臺)를 복귀하였을 것이었다. 그런데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천사장(天使長)이 인간을 타락케 하였던 타락성본성(墮落性本性)을 반복하게 되어 아담가정이 세워야 했던 ‘실체기대’는 세워지지 않았다. 따라서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Ⅲ. 아담가정에 있어서의 메시아를 위한 기대와 그의 상실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한 터 위에서 ‘실체기대’를 세움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리고 헌제라는 관점에서 보면, ‘믿음의 기대’는 ‘상징헌제(象徵獻祭)’를 뜻맞게 드림으로써 복귀되고, ‘실체기대’는 ‘실체헌제(實體獻祭)’를 뜻맞게 드림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면 이제 ‘상징헌제’ 및 ‘실체헌제’의 의의와 그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인 3대 축복(三大祝福)은 아담과 해와가 각각 개성을 완성하여 부부를 이루어야 하고, 다음으로는 자녀를 번식하여 가정을 이루어야 하며, 더 나아가 그들이 만물을 주관하게 됨으로써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하여 그 3대 축복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그것을 복귀하기 위하여는 그와 반대의 경로를 따라 먼저 만물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蕩減條件)과 인간을 복귀하기 위한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동시에 세워 주는 ‘상징헌제’를 드림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세워야 한다.

 

 

다음으로는 자녀를 복귀하고 그 위에 부모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을 동시에 세워 주는 ‘실체헌제’를 드림으로써 ‘실체기대’를 세워 가지고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해야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징헌제’의 의의와 그 목적을 두 가지로 갈라서 생각할 수 있다.
이미 타락론(墮落論)에서 논술한 바와 같이, 사탄이 타락인간(墮落人間)을 주관하게 됨으로 인하여 그는 인간이 주관해야 할 만물세계(萬物世界)까지도 주관하게 되었던 것이다.

 

 

성서에 만물이 탄식한다고 기록되어 있는 원인은 여기에 있다(롬 8 : 22). 그러므로 만물로써 ‘상징헌제(象徵獻祭)’를 드리는 첫째 목적은 하나님의 상징적 실체대상인 만물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려는 데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서 만물보다도 거짓된 자리에 떨어졌으므로(렘 17 : 9), 이러한 인간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하여는 창조원리적(創造原理的)인 질서에 준하여 자기보다도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있는 존재인 만물을 통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따라서 ‘상징헌제’를 드리는 둘째의 목적은 실체 인간을 하나님 앞에 복귀하기 위한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세우려는 데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실체헌제(實體獻祭)’는 어디까지나 내적인 헌제이므로 만물과 인간의 창조의 순서가 그러했듯이 외적인 ‘상징헌제’를 뜻맞게 드린 기대(基臺) 위에서만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상징헌제’를 뜻맞게 드림으로써 만물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과 인간을 복귀하기 위한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동시에 세운 후에, 이 기대 위에서 다시 인간을 실체적으로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으로서 ‘실체헌제’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실체헌제(實體獻祭)’는 실체 인간을 복귀하기 위하여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가인적인 존재가 아벨적인 존재를 실체로 헌제하여 자녀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게 되면, 그것이 바로 아래에 해명되어 있는 바와 같이 부모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으로도 세워지게 되기 때문에 ‘실체헌제’는 뜻맞는 헌제가 되는 것이다.

 

아담가정이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이루기 위하여는 아담 자신이 먼저 ‘상징헌제(象徵獻祭)’를 하여 ‘믿음의 기대’를 세워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이미 논술한 바와 같이, 아담부터 헌제를 하지 못하였던 것은 아담이 헌제를 하면 그 제물은 하나님과 사탄의 두 주인이 대하게 되어 비원리적인 입장에 서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밖에도 여기에는 심정적인 면에서의 이유가 또 한 가지 있다. 타락한 아담은 사실상 하나님에게 천추만대(千秋萬代)에 이르는 슬픔을 안기어 드린 죄악의 장본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이 직접 대하시어 복귀섭리(復歸攝理)를 하실 수 있는 심정적인 대상이 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담 대신으로 그의 차자(次子) 아벨을 세워서 ‘상징헌제’를 드리게 하셨다. 이렇게 하여 먼저 만물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과 또 인간을 복귀하기 위한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동시에 세운 기대 위에서, 가인과 아벨이 ‘실체헌제’로써 자녀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웠더라면, 부모 된 아담은 그 ‘실체기대(實體基臺)’ 위에 서게 되어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그때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는 것으로써 ‘실체헌제’를 하기 위하여서는 그 헌제의 중심인물(中心人物)이 결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벨의 ‘상징헌제’에는 아담 대신으로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한 것과 또 아벨을 ‘실체헌제’의 중심인물로 결정하기 위한 것의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은 가인이 세워야 했었는데 이것이 어찌하여 아담가정 전체가 세우는 결과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것은 마치 인간 조상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을 것이었고, 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예수님의 뜻이 이루어졌을 것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가인이 아벨에게 순종굴복하여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가인과 아벨이 다 함께 자녀로서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운 입장에 서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편 또 가인과 아벨은 선악(善惡)의 모체인 아담을 분립한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 사탄을 분립하였더라면 그 부모 된 아담은 사탄을 분립한 그 입장에서 먼저 ‘실체기대(實體基臺)’ 위에 서게 되어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이루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부모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은 ‘상징헌제(象徵獻祭)’와 ‘실체헌제(實體獻祭)’로써 세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아벨이 뜻맞는 헌제를 함으로써 아담을 중심한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는 조건과 ‘실체헌제’를 드리기 위한 중심인물로서의 아벨의 입장은 세워졌었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 말미암아서 그들은 천사장(天使長)이 해와를 타락시킨 것과 같은 입장에 다시 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울 수 없게 됨으로써 ‘실체헌제’에 실패하여 ‘실체기대’를 세우지 못하게 됨에 따라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Ⅳ. 아담가정이 보여 준 교훈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실패는 결과적으로, 첫째 뜻 성사(成事)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책임분담(人間責任分擔)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가 어떠하셨던가 하는 것을 보여 주셨다. 원래 뜻 성사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은 반드시 하나님의 책임분담과 인간의 책임분담이 합하여서만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인이 아벨을 통하여 헌제(獻祭)하는 것은 그들의 책임분담에 해당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떻게 헌제해야 된다는 것을 교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둘째, 가인이 아벨을 죽였으나 그 후 하나님이 아벨 대신 셋을 세워 새로운 섭리를 하신 것으로써 뜻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은 절대적인 것이고 인간에 대한 그의 예정은 상대적이라는 것을 보여 주셨다.

 

 

하나님은 그의 책임분담에 대하여 아벨이 그 자신의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만 그가 ‘실체헌제(實體獻祭)’의 중심인물이 되도록 예정하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벨이 그의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한 입장에 서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 대신 셋을 세우시어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되어 있는 뜻을 이루어 나아가셨던 것이다.
셋째, 가인과 아벨의 헌제로써 타락인간은 항상 아벨적인 존재를 찾아 그에게 순종굴복해야만 하늘이 요구하는 뜻을 자기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이루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한편 아담가정을 중심하고 이루려 하셨던 것과 동일한 섭리(攝理)는 인간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그 후 계속 반복되어 내려왔다. 따라서 이 노정은 오늘날의 우리 자신들도 걸어야 할 탕감노정(蕩減路程)으로 그대로 남아져 있기 때문에,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는 오늘 우리들에게까지도 전형적(典型的)인 산 교훈이 되고 있는 것이다.

 

 

 

제 2 절 노아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변할 수 없는 것으로서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하시고 이루시는 것이므로, 하나님은 아벨이 하늘을 대하여 충성했던 그 심정(心情)의 터전 위에서 그의 대신으로 셋을 세우셨다(창 4 : 25). 그리하여 그 후손에서 노아의 가정을 택하시사 아담가정의 대신으로 세우시어 새로운 복귀섭리를 하셨던 것이다.

 

창세기 6장 13절에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홍수심판(洪水審判)을 하신 것을 보면 그때도 말세(末世)였던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홍수심판 후 노아가정을 터로 하여 메시아를 보내심으로써 창조목적을 완성하려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아가정도 먼저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고, 다음으로 그 기대 위에서 ‘실체기대(實體基臺)’를 복귀하는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아담가정이 복귀하지 못하였던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Ⅰ. 믿음의 기대

 

1.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중심인물

 

노아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에 있어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해야 할 중심인물(中心人物)은 노아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담으로 이루시려다 못 이루신 뜻을 대신 이루시기 위하여 아담으로부터 1600년을 지나 10대 만에 노아를 부르셨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일찍이 아담에게 축복하셨던 것(창 1 : 28)과 마찬가지로 노아에 대해서도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축복하셨던 것이다(창 9 : 7). 이러한 의미에서 노아는 제2 인간 조상이 된다.

 

노아는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悖壞)하여 강포(强暴)가 땅에 충만한 때에 부름을 받아 (창 6 : 11), 120년 간이나 갖은 조롱과 비소를 받아 가며 하나님의 명령에만 절대 순종하여 평지도 아닌 산꼭대기에 방주(方舟)를 지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이것을 조건삼아 노아가정을 중심하고 홍수심판(洪水審判)을 감행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노아는 제1 믿음의 조상인 것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알고 있지만, 원래는 노아가 되어야 할 것이었는데 아래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그의 아들 함의 범죄로 인하여 노아의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사명은 아브라함에게로 옮겨졌던 것이다.

 

아담은 ‘믿음의 기대’를 복귀해야 할 중심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은 이유로 말미암아 자기가 직접 헌제를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이미 아벨이 ‘상징헌제(象徵獻祭)’를 뜻맞게 드림으로써 하늘을 대하여 충성(忠誠)했던 그 심정(心情)의 터 위에서 부름을 받았고, 그는 또 혈통적으로 보더라도 아벨 대신 택함을 받은 셋(창 4 : 25)의 후손이었으며, 뿐만 아니라 그의 위인(爲人)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인(義人)이었기 때문에(창 6 : 9) 그는 방주를 지어 그것으로써 직접 하나님에게 ‘상징헌제’를 드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2.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조건물

 

노아가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조건물(條件物)은 방주(方舟)였다. 그러면 그 방주의 의의는 무엇이었던가? 노아가 아담 대신 제2 인간 조상의 입장에 서기 위하여는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사탄에게 내주었던 천주(天宙)를 탕감복귀하기 위한 조건을 세워야 한다. 따라서 신천주(新天宙)를 상징하는 어떠한 조건물을 제물로서 하나님 앞에 뜻맞게 바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조건물로 세웠던 것이 바로 방주였다.

 

방주는 3층으로 지었는데, 그 이유는 3단계의 성장과정을 통해서 창조된 천주를 상징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방주에 들어간 노아의 식구가 여덟이었던 것은, 노아가 아담 대신의 입장이었으므로 일찍이 사탄에게 내주었던 아담가정의 여덟 식구를 탕감복귀하기 위함이었다. 방주가 천주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안에 주인으로 들어간 노아는 하나님을 상징하였고, 그의 식구들은 전인류(全人類)를 상징하였으며, 그 안에 들어간 동물들은 만물세계 전체를 상징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방주가 완성된 후에 하나님께서 40일 간의 홍수심판(洪水審判)을 하셨는데, 이 심판의 목적은 무엇이었던가? 창조원리(創造原理)에 의하면 인간은 한 주인을 대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음란(淫亂)에 빠져서 이미 사탄을 대하고 있는 인류를 하나님이 또 하나의 주인의 입장에서 대하시어 비원리적인 섭리를 하실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대하시어 섭리하실 수 있는 대상을 세우시기 위하여 사탄의 상대가 되어 있는 전인류를 멸하시는 홍수심판의 섭리를 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심판기간(審判期間)을 40일로 정하신 이유는 어디 있었던가? 후편 제3장 제2절 Ⅳ에서 논술하는 바, 10수는 귀일수(歸一數)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담 이후 10대 만에 노아를 찾아 세우셨던 목적은, 아담을 중심하고 이루지 못하였던 뜻을 노아를 중심하고 탕감복귀하여 하나님에게로 재귀일(再歸一)시키기 위한 10수 복귀의 탕감기간(蕩減期間)을 세우시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위기대(四位基臺)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4수를 복귀하는 탕감기간으로써 각 대(代)를 세우시는 섭리를 노아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서 계속하여 오셨던 것이다. 따라서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의 기간은 40수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기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인간들의 음란으로 말미암아 이 40수 탕감기간이 사탄의 침범을 당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노아 방주(方舟)를 중심하고 사위기대를 완성하는 섭리를 다시 하시기 위하여, 사탄의 침범을 당한 이 40수를 복귀하는 탕감기간으로 40일 심판 기간을 세워 가지고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려 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되어 40수는 그 후의 탕감복귀섭리노정(蕩減復歸攝理路程)에 있어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사탄 분립수로 필요하게 되었다. 그 예를 들면, 노아 심판(審判) 40일을 비롯하여 노아에서 아브라함까지의 400년, 이스라엘 민족의 애급 고역(埃及苦役) 400년, 모세의 두 차례에 걸친 금식기도(禁食祈禱) 40일, 가나안 정탐기간(偵探期間) 40일,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 표류(曠野漂流) 40년, 사울왕 다윗왕 솔로몬왕의 재위기간(在位期間) 각 40년, 엘리야 금식 40일, 니느웨 멸망에 관한 요나의 예언(豫言) 40일, 예수님의 금식기도 40일과 부활기간(復活期間) 40일 등은 모두 사탄을 분립하는 탕감기간이었던 것이다.

 

한편 성경을 보면 그 심판이 끝날 때에 노아가 방주(方舟)에서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보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을 통하여서 하나님은 장차 이루실 어떠한 섭리를 예시(豫示)하셨던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왜냐하면 아모스 3장 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방주를 하나님의 뜻 앞에 합당한 것으로 세움으로써, 천주(天宙)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는 심판 40일 기간은 천지창조(天地創造)의 이상(理想)이 실현될 때까지의 혼돈기간(창 1 : 2)에 해당되는 기간이었다. 따라서 40일이 끝날 때에 방주를 중심하고 나타내 보이셨던 행사는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완료한 이후의 전역사노정(全歷史路程)을 상징적으로 표시하는 것이다.

 

그러면 까마귀를 방주에서 내보내어 물이 마를 때까지 왕래하게 하신 것은(창 8 : 6~7) 무엇을 예시하신 것이었던가?
이것은 마치 인간 창조 직후에 천사장(天使長)이 해와의 사랑을 노렸었고, 또 가인과 아벨이 헌제(獻祭)를 할 때에도 사탄이 그들에게 침범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과 같이(창 4 : 7), 홍수심판(洪水審判)이 끝날 무렵에도 사탄은 노아가정에 무슨 침범할 조건이 없는가 하고 엿보고 있었다는 것을 까마귀가 어디에 앉을 곳이 없는가 하고 물 위를 찾아 헤매는 모양으로써 표시하신 것이었다.

 

다음으로 노아가 비둘기를 방주(方舟) 밖으로 세 번 내보낸 것은 무엇을 예시하신 것이었던가?
성서에는 물이 준 것을 알아보기 위하여 비둘기를 내보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만이 목적이었다면 비둘기를 내보내지 않고 창문으로 직접 내다보아도 알 수 있었을 것이고, 설혹 그 문들이 모두 봉해져 있었다 하더라도 비둘기가 나갈 수 있는 구멍으로 내다보아서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비둘기를 내보냈던 목적은 물이 준 것을 알려고 했던 것보다 더욱 중요한 데 있었으리라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 숨겨 있는 하나님의 섭리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야겠다.

 

하나님이 노아를 통하여 홍수심판(洪水審判)이 있을 것을 선포하신지 7일 후에(창 7 : 10) 홍수가 시작되어 40일 심판기간이 지난 후에 첫번 비둘기를 내보냈다. 그런데 이 비둘기는 물 위를 왕래하다가 발붙일 곳이 없어서 다시 방주로 돌아가니, 노아가 그것을 받아들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창 8 : 9).

 

이 첫번 비둘기는 첫 아담을 상징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창세 전(創世前)부터 하나님 안에 있었던 그의 창조이상(創造理想)이 아담이라는 완성실체(完成實體)로 실현되기를 원하시어 그를 지상에 창조하셨던 것인데, 그가 타락(墮落)되었기 때문에 그를 중심하고는 지상에 그 창조이상을 실현할 수 없게 되어, 하나님은 할수없이 그의 뜻 성사를 후일로 미루시고 그 이상(理想)을 일시 지상으로부터 거두어 들이셨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었다.
그다음에 7일을 지나 노아는 다시 그 비둘기를 내보냈다.

 

 

그러나 그때에도 역시 물이 다 마르지 않았기 때문에 지상에 내려앉지를 못하고, 다음에는 앉을 수 있다는 표시로서 다만 감람나무 잎사귀를 입에 물고 다시 방주로 되돌아왔다는 것이다(창 8 : 10~11).

 

둘째 번으로 내보낸 이 비둘기는 창조이상(創造理想)의 ‘완성실체’로서 다시 오실 제2 아담 된 예수님을 상징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예수님이 복귀섭리(復歸攝理)를 완성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실 것이지만, 만일 유대인들이 불신(不信)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는 지상에 머무르실 수가 없게 되어 그 뜻을 완전히 이루지 못하실 것이기 때문에, 부득이 그는 재림(再臨)하셔야 할 것을 약속하시고 십자가에 달려서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게 될 것을 예시하신 것이었다.

 

물론 이 예시는, 만일 그때에 땅에 물이 말라서 비둘기가 내려앉아 먹을 것을 찾을 수 있었다면 그 비둘기는 결코 방주(方舟)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을 것인데, 물이 채 마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로 다시 돌아갔던 것과 같이, 장차 유대민족이 예수님을 잘 믿고 모시면 그는 결코 죽지 않고 지상천국(地上天國)을 이루실 것이지만, 만일 그들이 불신으로 흐르게 되면 예수님은 부득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재림하시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을 보여 주신 것이었다.

 

그런 후 또다시 7일이 지나서 노아는 세 번째로 비둘기를 내보냈다. 그런데 이때는 이미 물이 말랐었기 때문에 다시는 비둘기가 방주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창 8 : 12).

 

이 셋째 번의 비둘기는 제3 아담으로 오실 재림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반드시 지상에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실현할 수 있게 되어 다시는 그 이상이 지상에서 거두어지는 일이 없게 된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제3차의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았을 때 노아는 비로소 방주에서 땅으로 내려와 신천지(新天地)를 맞이하였다.

 

 

이것은 제3 아담으로 인하여 창조이상이 지상에서 이루어질 때, 비로소 요한계시록 21장 1절 이하의 말씀대로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고 하나님의 장막(帳幕)이 사람들과 함께 있게 될 것을 예시하신 것이었다.
이 비둘기를 세 번 내보낸 실례(實例)로써, 예정론(豫定論)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하나님의 복귀섭리(復歸攝理)는 그 섭리의 대상인 인간이 그 자신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지 못하면 반드시 연장된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아담이 불신으로 인하여 그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후아담으로 오셔야 할 것과, 만일 유대인들도 불신으로 돌아가서 그들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부득이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되어 제3 아담으로 재림(再臨)하셔야 할 것을 예시하신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7일이라고 하는 기간은, 천지(天地)를 창조하실 때에 7일이라는 기간이 있었던 것과 같이 그것을 다시 찾아 세우는 데에도 섭리적인 어떠한 기간이 지난 후가 아니면 아니 된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서 노아가정은 심판 40일로써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조건물인 방주(方舟)를 뜻맞게 찾아 세워 그 기대(基臺)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할 수 있었던 것이다.

 

 

 

Ⅱ. 실체기대

 

노아는 방주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제물로 바쳐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성공함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였다. 이로써 노아는 만물(萬物)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는 동시에 인간을 복귀하기 위한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세웠던 것이다. 다음엔 이 기대 위에서 노아의 아들 셈과 함이 각각 가인과 아벨의 입장에서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서 ‘실체헌제(實體獻祭)’에 성공하면 ‘실체기대(實體基臺)’가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다.

 

노아가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성공한 후에 이 가정의 ‘실체헌제(實體獻祭)’가 뜻맞는 것으로 바쳐지기 위하여서는, 먼저 ‘실체헌제’의 중심이 되어야 할 차자(次子) 함이 아담가정의 ‘실체헌제’의 중심이었던 차자 아벨의 입장을 복귀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었다. 아담 때에는 아벨 자신이 아담의 대신으로 ‘상징헌제’를 하였기 때문에, 아벨이 그 헌제에 성공함으로써 그는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는 동시에 ‘실체헌제’의 중심으로도 결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아 때는 함이 아니고 노아 자신이 ‘상징헌제’를 하였기 때문에, 함이 ‘상징헌제’에 성공한 아벨의 입장에 서기 위하여는 ‘상징헌제’에 성공한 노아와 심정적으로 일체불가분(一體不可分)의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이 함으로 하여금 노아와 심정적으로 일체적인 입장에 서게 하시기 위하여 어떠한 섭리(攝理)를 하셨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창세기 9장 20절 내지 26절에 씌어 있는 기록을 보면, 함은 그의 부친 노아가 장막(帳幕) 안에서 나체(裸體)로 누워 있는 것을 보고 부끄럽게 여겼을 뿐 아니라,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그 형제 셈과 야벳을 선동(煽動)하였다. 이때에 그들도 함의 선동에 뇌동(雷同)되어 그의 부친의 나체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그것을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돌이키고 뒷걸음으로 들어가 그 부친의 몸에 옷을 덮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죄가 되어 노아는 함을 저주하여 이르기를 그 형제의 종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찌하여 이러한 섭리를 하셨으며, 또 나체를 부끄러워한 것이 어찌하여 죄가 되었는가?
이러한 내용을 알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어떻게 되면 죄가 되는가 하는 문제부터 알아보기로 하자
. 사탄도 어떤 대상을 세워 그와 상대기준(相對基準)을 조성하여 수수(授受)의 관계를 맺지 않으면 그 존재 및 활동의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든지 그에게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어 사탄의 상대가 됨으로써 사탄이 활동할 수 있게 될 때 거기에 죄가 성립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어찌하여 노아의 나체(裸體)로써 함을 시험하셨던가 하는 것이다. 방주(方舟)는 천주(天宙)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심판 40일로써 방주를 뜻 가운데 세운 직후에 되어진 모든 사실들은 천주창조(天宙創造) 이후에 되어지는 모든 사실들을 상징한 것이었다 함은 이미 논술한 바와 같다. 그러므로 40일 심판이 끝난 직후의 노아의 입장은 천지창조 후의 아담의 입장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창조된 아담과 해와가 서로 얼마나 가깝고 허물할 것이 없는 사이였으며, 또한 얼마나 하나님 앞에 숨길 것이 없었던가 하는 것은, 창세기 2장 25절에 그들이 서로 나체로 있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墮落)한 후에 스스로 하체(下體)를 부끄럽게 생각하여 나뭇잎으로 가렸었고, 또 하나님이 보실 것을 두려워하여 나무 사이에 숨었었다(창 3 : 7). 그러므로 그들이 하체를 부끄러워했던 행위는 하체로 범죄하여 사탄과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맺었다는 정념(情念)의 표시요, 하체를 가리고 숨었던 행동은 사탄과 혈연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없다는 범죄의식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40일 심판으로 사탄을 분립(分立)한 입장에 있었던 노아는 천지창조 직후의 아담의 입장에 섰어야 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노아가 나체(裸體)로 있어도 그 가족들이 그것을 보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또 숨으려 하지도 않는 모습을 바라보시는 것으로써, 일찍이 죄를 짓기 전 어디도 가린 데 없이 드러낸 나체 그대로의 인간을 보시면서 기뻐하셨던 그 심정을 탕감복귀하려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큰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노아로 하여금 나체로 누워 있게 하셨었다. 따라서 함도 하나님과 같은 입장에서 하나님과 같은 심정(心情)으로 아무 부끄러움 없이 노아를 대했어야 노아와 일체불가분(一體不可分)의 뜻 가운데서 죄짓기 전 부끄러움을 몰랐던 아담가정의 입장으로 복귀하는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아의 아들들은 이와 반대로 그 부친의 나체를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 이를 가렸으므로, 이로써 그들은 타락 후의 아담가정과 같이 사탄과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맺은 부끄러운 몸들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없다는 사실을 자증(自證)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미 까마귀로써 보여 주신 것과 같이, 노아가정에 침범할 수 있는 무슨 조건이 없는가 하고 엿보고 있었던 사탄은 자기의 혈연적인 후손임을 자증하고 나선 노아의 아들들을 대상으로 하여 그 가정에 다시 침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함이 그 부친의 나체를 부끄러워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었기 때문에 그 행동은 범죄가 된 것이다. 이렇게 되어 함은 ‘실체헌제’를 하기 위한 아벨의 입장을 탕감복귀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이룰 수 없었으므로, 노아를 중심한 복귀섭리도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 나체를 부끄러워하는 것이 누구에게나 죄가 되는가? 노아는 아담의 대신으로서 아담으로 인하여 사탄이 침범한 모든 조건들을 제거해야 될 사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아가정은 나체를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또 그것을 가리지도 않는다는 감성과 행동을 보이는 것으로써, 사탄과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맺기 전 아담가정의 입장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나체를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또 그것을 가리지도 않는 것으로 세워야 할 탕감조건은, 아담가정 대신으로 세워졌던 노아가정만이 세워야 할 조건이었던 것이다.

 

 

Ⅲ. 노아가정이 보여 준 교훈

 

노아가 120년 간이나 걸려서 산꼭대기에다 배를 지었던 것은 누구나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극심한 비난과 조소를 받은 그 일로 말미암아서 노아가정이 구원(救援)을 받았다는 사실은 함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과거의 사실로 미루어 보아서, 함은 설혹 노아가 나체로 누워 있는 것이 못마땅하게 생각되었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그것을 좋게만 볼 수 있었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함은 자기를 중심하고 하늘 앞에 선 노아를 비판하고 또 그것을 행동으로 표시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담으로부터 1600년이나 지나 40일 홍수심판(洪水審判)을 행사하심으로써 찾아 세우셨던 노아가정을 중심한 섭리는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늘 가는 길은 겸허(謙虛)와 순종(順從)과 인내(忍耐)를 요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또 노아가정을 중심한 섭리는 뜻 성사(成事)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책임분담(責任分擔) 수행 여부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우리들에게 보여 주셨다. 노아가정은 하나님이 1600년이나 걸려 찾아오셨고, 또 노아가 방주(方舟)를 짓기까지 120년이나 이끌어 오셨으며, 뿐만 아니라 40일의 홍수(洪水)로써 전인류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세우신 가정이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함의 작은 실수로 말미암아서 사탄이 침범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대상이었던 그 가정 전부를 아낌없이 쓸어 버리시어 노아가정을 중심한 섭리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다음으로 노아가정을 중심한 섭리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豫定)이 어떠한가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하나님은 노아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려고 오랜 기간을 두고 애써 찾아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정이 일단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를 아낌없이 버리시고 그 대신 아브라함을 택하셨던 사실을 우리들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제 3 절 아브라함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

 

함의 타락행위(墮落行爲)로 말미암아 노아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하시려는 뜻을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하시고 이루시는 것이므로, 노아가 하늘을 대하여 충성했던 그 심정(心情)의 터전 위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그 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를 다시 하시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노아가정이 이루려다 못 이루었던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하여 그 기대 위에서 메시아를 맞아야만 하였다. 따라서 아브라함도 먼저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고 그 기대 위에서 ‘실체기대’를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Ⅰ. 믿음의 기대

 

1.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중심인물

 

아브라함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에 있어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해야 할 중심인물(中心人物)은 바로 아브라함이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노아를 중심하고 이루려 하셨던 뜻을 계승하여 이루기 위한 중심인물로 세워졌던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노아의 노정을 위하여 세워졌다가 함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탄에게 내주게 되었던 모든 조건들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한 입장에 서지 않으면 노아를 중심한 뜻을 계승할 수 없었던 것이다.

 

노아가 첫째로 사탄에게 내주었던 조건은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의 10대와 심판 40일 기간이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그 10대와 함께, 그 10대가 각각 심판 40수를 탕감복귀한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1대를 40일 기간으로써는 탕감복귀할 수 없었기 때문에, 후일 모세노정에 있어서 정탐(偵探) 40일의 실수를 광야 표류 40년 기간으로써 탕감복귀한 것과 같이(민 14 : 34), 여기에서도 각 대(代)가 심판 40일의 실수를 40년 기간으로써 탕감복귀하는 통산년수(通算年數)를 세우게 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노아로부터 10대에 걸친 400년 탕감기간을 경과한 후에야 비로소 노아 대신으로 아브라함을 세우셨다.

 

 

이와 같이, 아담에서 노아에 이르는 1600년 간에 10대를 복귀하였던 시대에서 400년 간에 10대를 복귀하는 시대로 넘어왔기 때문에 노아 이후 인간의 수명(壽命)은 갑자기 짧아지게 되었다.
노아가 둘째로 사탄에게 내주었던 조건은 믿음의 조상의 입장과 아벨 대신이었던 함의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과 함의 입장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지 않고는 노아의 입장에 설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노아 대신 믿음의 조상의 입장에 서기 위하여는, 노아가 믿음과 충성으로 방주(方舟)를 지었던 것과 같이 아브라함도 믿음과 충성으로 ‘상징헌제(象徵獻祭)’를 드려야만 했었다.

 

 

한편 또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아벨의 대신이었던 함(그들은 모두 둘째 아들로서 실체헌제의 중심이었다)을 사탄에게 내주셨으므로, 탕감복귀원칙에 의하여 하나님도 그 대신으로 사탄이 가장 사랑하는 입장에 있는 존재를 빼앗아 오셔야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상(偶像) 장수인 데라로부터 그 아들 아브라함을 이끌어 내셨던 것이다(수 24 : 2~3).

 

아브라함은 노아의 대신이요 따라서 아담의 대신이기 때문에 복귀(復歸)한 아담형의 인물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담과 노아에게 축복(祝福)하셨던 것과 같이, 아브라함에게도 자녀를 번식하여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의 근원이 되라고 축복하셨던 것이다(창 12 : 2). 아브라함은 이러한 축복을 받은 후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하란에서 그 아버지의 집을 떠나, 아내 사라와 조카 롯 그리고 거기에서 취한 모든 재물과 사람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들어갔었다(창 12 : 4~5).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노정으로써, 장차 야곱과 모세가 사탄세계인 하란과 애급(埃及)에서 각각 그 처자(妻子)를 데리고 재물을 취하여, 그 어려운 환경을 박차고 떠나 가나안으로 복귀해야 할 전형노정(典型路程)으로 삼게 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이 노정은 또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사탄세계의 모든 인간과 만물세계를 하나님의 세계에로 복귀해야 할 전형노정을 예시(豫示)한 것이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후편 제2장 제1절 Ⅱ 참조).

 

 

 

2.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조건물

 

(1) 아브라함의 상징헌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비둘기와 양과 암소로써 제사(祭祀)를 드릴 것을 명하셨던 것이니, 이것들은 바로 아브라함이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조건물(條件物)들이었던 것이다(창 15 : 9). 따라서 마치 노아가 ‘상징헌제(象徵獻祭)’로서 방주(方舟)를 지어 바치려 하였을 때 그 헌제를 위한 믿음을 세웠던 것과 같이, 아브라함도 이 ‘상징헌제’를 하기 위하여는 그것을 위한 믿음을 세워야만 했었다.

 

성서에는 노아가 어떠한 방법으로 그 믿음을 세웠는가 하는 것은 명기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창세기 6장 9절에 노아가 당세의 의인(義人)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방주(方舟)를 지으라시는 명령을 받기에 합당한 의인이 되기까지에는 필시 어떠한 믿음을 세웠음에 틀림없다. 기실 복귀섭리(復歸攝理)는 이와 같이 믿음에서 믿음을 세워 나아가게 하는 것이었다(롬 1 : 17).

 

그러면 아브라함은 ‘상징헌제’를 하기 위하여 어떠한 믿음을 세웠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아브라함은 제2 인간 조상 노아의 입장을 복귀해야 했었다. 따라서 그는 또 아담의 입장에도 서야 했기 때문에, 그는 ‘상징헌제’를 하기 전에 아담가정의 입장을 복귀하는 상징적인 탕감조건(蕩減條件)을 먼저 세워야 했던 것이다.

 

창세기 12장 10절 이하의 성구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기근(饑饉)으로 인하여 애급(埃及)으로 내려갔던 일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애급 왕 바로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취하고자 하였을 때, 아브라함은 그와 부부관계(夫婦關係)라고 하면 자기를 죽일까 두려워하여 미리 짠 바 계책대로 자기의 아내인 사라를 누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아브라함은 그의 처(妻) 사라를 남매(男妹)의 입장에서 바로의 아내로 빼앗겼다가 하나님이 바로를 징계하시어 다시 그 아내를 찾아오는 동시에, 데리고 갔던 조카 롯과 함께 많은 재물을 취해 가지고 나왔었다.

 

 

아브라함은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서, 아담가정의 입장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는 상징적인 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이러한 섭리노정(攝理路程)을 걸어야만 했던 것이다.
아담과 해와가 미완성기(未完成期)에서 아직 남매와 같은 입장에 있었을 때에 천사장(天使長)이 해와를 빼앗아 감으로 인하여, 그의 자녀들과 만물세계까지 사탄의 주관하에 속하게 되었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이것을 탕감복귀하기 위한 조건을 세우려면,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남매와 같은 입장에서 처 사라를 사탄의 실체인 바로에게 빼앗기었다가 그의 처의 입장에서 다시 그녀를 찾아옴과 동시에, 전인류(全人類)를 상징하는 롯과 만물세계를 상징하는 재물을 찾아오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창 14 : 16). 아브라함의 이러한 노정은 후일에 예수님이 오셔서 걸어야 할 전형노정(典型路程)이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와 같은 탕감조건을 세운 후에야 비로소 비둘기와 양과 암소로써 ‘상징헌제’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상징헌제(象徵獻祭)’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하여는, 원래 하나님이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려 하셨던 노아와 그 가정의 입장을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아담과 그 가정의 입장에도 서야 했었기 때문에, 아담가정에서 가인 아벨의 헌제를 중심하고 복귀하려 했던 모든 것을 탕감복귀할 수 있는 상징적인 조건물(條件物)을 바쳐야 했던 것이다. 나아가 그는 또 노아가정이 방주를 중심하고 복귀하려 했던 모든 것을 탕감복귀할 수 있는 상징적인 조건물을 하나님 앞에 합당한 제물로 바쳐야 했었다.

 

 

이러한 상징적인 조건물로 바친 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상징제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상징제물(象徵祭物)로 바쳤던 비둘기와 양과 암소는 과연 무엇을 상징하였던가?
이 세 가지의 상징제물은 3단계의 성장과정을 통하여 완성되는 천주(天宙)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즉 그중의 비둘기는 소생(蘇生)을 상징하였던 것이다
. 예수님은 구약섭리(舊約攝理) 완성자, 곧 소생섭리(蘇生攝理) 완성자로 오셨었다. 즉 예수님은 비둘기로 표시된 소생섭리 완성자로 오셨기 때문에, 그에 대한 표징(表徵)으로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나님의 신(神)이 비둘기 모양으로 그 위에 임하셨던 것이다(마 3 : 16).

 

 

한편 또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제물 실수를 복귀하려고 오신 분으로서 먼저 사탄이 침범했던 그 비둘기를 복귀한 입장에 서야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비둘기로써 그가 소생 구약섭리 완성자로 오셨음을 보여 주셨던 것이다.

 

다음으로 양(羊)은 장성(長成)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제물(祭物) 실수를 복귀하려고 오신 분으로서, 비둘기로서 표시된 모든 것을 복귀한 구약섭리의 기대(基臺) 위에서 양으로서 표시된 모든 것을 복귀해야 할 장성 신약섭리(長成 新約攝理)의 출발자이기도 하셨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 의하여 비둘기로 표시된 소생섭리의 완성자라는 증거를 받으신 후, 어느 날 세례 요한은 또 예수님이 걸어오시는 모습을 보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 : 29)라고 함으로써 예수님이 장성 사명 출발자이심을 증거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암소는 완성(完成)을 상징하였다. 사사기 14장 18절을 보면, 삼손이 수수께끼의 문제를 냈을 때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아내로 하여금 삼손을 꼬여 그 내용을 탐지해 내게 함으로써 그것을 푼 일이 있었는데, 그때 삼손은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갈지 아니하였더라면 내 수수께끼를 능히 풀지 못하였으리라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삼손은 아내를 암소로 비유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전인류의 신랑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가 재림(再臨)하실 때까지의 성도(聖徒)들은 오시는 신랑 앞에 신부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신부 된 성도들이 다시 오시는 신랑 된 예수님과 어린양잔치를 치른 후에는 신부가 아니고 아내가 되어 남편 된 예수님과 더불어 천국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재림 이후의 완성 성약시대(完成 成約時代)는 아내의 시대요, 따라서 암소의 시대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암소는 곧 완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많은 영통인(靈通人)들이 이때가 소의 시대라고 계시받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3제물은 또 무엇을 탕감복귀하는 것인가? 아브라함은 그의 ‘상징헌제(象徵獻祭)’로써, 일찍이 아담과 노아의 각 가정을 중심한 섭리에서 그들이 ‘상징헌제’로써 탕감복귀하려다가 사탄에게 내주었던 모든 것을 재탕감복귀(再蕩減復歸)하는 동시에, 또 그들이 ‘실체헌제(實體獻祭)’로써 탕감복귀하려다가 실패하여 사탄에게 내주었던 모든 것을 재탕감복귀할 수 있는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세워야 하였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상징헌제’는 아담으로부터 노아 아브라함, 이렇게 3대에 걸친 종적인 섭리의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그 3제물로써 일시에 횡적으로 복귀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소생(蘇生)·장성(長成)·완성(完成)의 3단계를 상징하는 비둘기와 양과 암소를 한 제단에 벌여 놓고 헌제한 것은, 마치 아담의 당대에서 3단계의 성장기간(成長期間)을 완성하려 했던 것과 같이 아담의 입장인 아브라함을 중심하고 소생 아담, 장성 노아, 완성 아브라함의, 뜻으로 본 3대에 걸쳐서 탕감복귀(蕩減復歸)하시려던 종적인 섭리를 일시에 횡적으로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헌제는 사탄이 침범하였던 3수로 표시된 모든 조건들을 일시에 탕감복귀함으로써, 전복귀섭리(全復歸攝理)를 단번에 이루시려는 뜻을 상징적으로 표시한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 ‘상징헌제(象徵獻祭)’를 어떻게 드렸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겠다.
창세기 15장 10절 내지 13절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은 다른 제물은 모두 둘로 쪼개서 제단의 좌우에 놓았으나 비둘기만은 쪼개지 않고 그대로 놓았기 때문에, 솔개가 그 고기 위에 내려왔으므로 아브라함이 이것을 쫓았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그 날 해질 때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창 15 : 13)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쪼개야 할 비둘기를 쪼개지 않았기 때문에 그 위에 솔개가 내렸었고,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 들어가서 400년 간을 고역(苦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것이 어찌하여 죄가 되었는가? 이 문제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해결(未解決)의 문제로서 남아져 왔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원리(原理)를 통하여서만 명확히 해결되는 것이다. 그러면 제물을 쪼개야 하는 이유는 어디 있는가 하는 것을 먼저 알아보기로 하자.

 

구원섭리(救援攝理)의 목적은 선과 악을 분립하여 악을 멸하고 선을 세움으로써 선주권(善主權)을 복귀하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아담 한 존재를 가인과 아벨로 분립한 후에 헌제(獻祭)해야 했던 것이나, 또 노아 때에 홍수(洪水)로써 악을 치고 선을 분립했던 것 등의 목적은 모두 선주권을 복귀하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제물을 쪼개 바치게 함으로써, 아담이나 노아로써 이루지 못하였던 선악 분립의 상징역사(象徵役事)를 이루려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제물을 쪼개는 것은, 첫째로 아담가정에 있어서 선악(善惡)의 모체(母體)인 아담을 선과 악의 두 표시체로 분립하기 위하여 아벨과 가인으로 갈라 세운 것과 같은 입장을 복귀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둘째로는 노아가 홍수 40일로써 선과 악을 갈라 세웠던 입장을 복귀하기 위함이었으며, 셋째로는 사탄 주관하(主管下)에 있는 피조세계(被造世界)에서 선주권(善主權)의 세계를 갈라 세우는 상징적인 조건을 세우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넷째로는 사탄과의 혈연관계(血緣關係)를 통하여 들어온 사망의 피를 뽑아 성별(聖別)하는 조건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그러면 쪼개지 않은 것이 어찌하여 죄가 되는가? 쪼개지 않은 것은 첫째로 가인과 아벨을 분립하지 않은 입장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대할 수 있는 아벨적인 대상이 없었고,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에게 합당한 헌제가 되지 못하였으므로 결국 가인 아벨의 헌제 실패는 탕감복귀(蕩減復歸)되지 않았다. 둘째로 그것은 노아를 중심한 복귀섭리에 있어서의 홍수심판(洪水審判)에서 선악을 분립하지 못하였던 상태 그대로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이 상대하여 섭리하실 수 있는 선의 대상이 없게 되어 홍수심판에서 실패한 입장으로 되돌아간 결과가 되었다. 셋째로 그것은 사탄 주관하에 있는 피조세계에서 하나님이 상대하실 수 있는 선주권의 세계를 분립하는 상징적인 조건을 세우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넷째로 그것은 사망의 피를 뽑아 성별(聖別)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상대하여 섭리하실 수 있는 성물(聖物)이 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이 비둘기를 쪼개지 않고 바침으로 인하여 그것은 사탄 것 그대로를 바친 것이 되어, 결국 그것은 사탄의 소유물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여 준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소생(蘇生)을 상징하는 제물인 비둘기가 사탄의 소유물로 남아지게 되었으므로, 소생의 기대 위에 세워져야 할 장성(長成)과 완성(完成)을 상징하는 양과 암소에게도 역시 사탄이 침범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상징제물(象徵祭物)은 모두 사탄에게 바친 결과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에 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것이 범죄가 된 것이다.
그러면 다음에는 상징제물에 솔개가 내렸다는 것은(창 15 : 11)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보기로 하겠다.

 

인간 시조(始祖)가 타락한 이후 하나님이 세우시려는 뜻 앞에는 반드시 사탄이 따르게 되는 것이다. 즉 창세기 4장 7절을 보면 가인과 아벨이 헌제를 할 때에도 사탄이 그들을 엿보고 있었고, 뿐만 아니라 노아 때에도 심판 직후에 사탄이 노아가정에 침범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는 것을 까마귀로써 보여 주셨다(창 8 : 7).
이와 같이 아브라함이 ‘상징헌제(象徵獻祭)’를 할 때에도, 그 제물에 침범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던 사탄은 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것을 보고 곧 그 제물에 침범하였었다. 그리하여 성경은 이 사실을 솔개가 제물 위에 내린 것으로 표상(表象)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헌제’의 실수는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는가? 아브라함의 ‘상징헌제’ 실수로 말미암아 그 ‘상징헌제’로써 탕감복귀하려던 모든 것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결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이방(異邦)인 애급에서 400년 간 고역(苦役)을 하게 되었던 것이니, 그 이유는 어디에 있었던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하나님은 노아 때에 함의 실수로 말미암아 사탄에게 내주셨던 10대와 심판 40수를 동시에 탕감복귀(蕩減復歸)하시기 위하여 400년이란 사탄 분립기간을 세우시고, 그 분립기대(分立基臺) 위에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상징헌제(象徵獻祭)’를 하게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실수로 말미암아 그 제물을 또 사탄에게 바친 것이 되었기 때문에, ‘상징헌제’로써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기 위한 탕감기간(蕩減期間)이었던 노아 이후의 400년 기간도 역시 사탄에게 내주시게 되었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상징헌제’에 실수하기 전의 입장이며, 따라서 노아가 방주(方舟)를 짓기 위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입장을 민족적으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서는 이 400년이란 사탄 분립기간을 다시 찾아 세우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고역하는 400년 기간은, 노아나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출발하려 했었던 그 입장을 민족적으로 탕감복귀하여 모세를 그 터전 위에 세우시기 위한 기간이었다. 따라서 이 고역기간(苦役期間)은 아브라함의 헌제 실수로 인한 벌을 받는 기간인 동시에, 하나님의 새로운 섭리를 위하여 사탄 분립의 터를 닦는 기간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한 제단에 3제물을 동시에 드리는 ‘상징헌제’에 성공케 하심으로써 소생(蘇生)·장성(長成)·완성(完成)으로 표시된 모든 섭리를 동시에 이루려 하셨다는 것은 이미 위에서 논술하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에 실패함으로 말미암아서 그를 중심한 섭리는 다시 이삭을 거쳐 야곱까지 3대에 걸친 연장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상징헌제’ 실패는 노아의 방주(方舟)를 중심한 ‘상징헌제’와 가인 아벨을 중심한 ‘상징헌제’ 등의 실패를 반복한 것이 되어 버렸다.

 

 

 

(2) 아브라함의 이삭 헌제

아브라함이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실패한 후 다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燔祭)로 드리라고 명하시어(창 22 : 2), 그로써 ‘상징헌제’의 실패를 탕감복귀하시려는 새로운 섭리를 하셨다. 예정론(豫定論)에 의하면, 하나님은 어떠한 뜻을 위하여 예정되었던 인물이 그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지 못하였을 때 그 장본인을 다시 세워 쓰실 수 없게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상징헌제’에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그 헌제로써 찾아 세우려던 모든 뜻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는데, 어떻게 하나님은 그 아브라함을 다시 세우시어 이삭 헌제로써 그의 ‘상징헌제’의 실패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시려는 섭리를 하실 수 있었던 것인가?

 

첫째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는 아담가정을 중심한 섭리가 제1차였고, 노아가정을 중심한 섭리가 제2차였으며, 아브라함가정을 중심한 섭리가 제3차였다. 그런데 3수는 완성수(후편 제3장 제2절 Ⅳ)이기 때문에,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하시려는 섭리가 연장되기 제3차 만이었던 아브라함 때에는 이 섭리를 완성해야 할 원리적인 조건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삭을 실체로 헌제하여 보다 큰 것으로써의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움으로써, ‘상징헌제’ 실수로 인하여 상징적으로 잃어버린 모든 것을 다시 찾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로는, 위에서 상술(詳述)한 바와 같이 헌제를 드리는 아브라함의 입장은 곧 아담의 입장이었다. 그런데 사탄은 아담과 그의 자식 가인에게 침범함으로써 2대에 걸쳐 그들을 빼앗아 갔었기 때문에, 탕감복귀원칙(蕩減復歸原則)에 의하여 하늘편에서도 아브라함과 그 자식의 2대에 걸쳐서 빼앗아 올 수 있는 섭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로,
아담은 직접 헌제를 하지 못하였으나, 섭리적으로 보아 노아는 아담과 같은 입장에 있으면서도 소생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성공한 아벨의 심정의 터 위에 있었기 때문에 방주(方舟)로써 직접 ‘상징헌제’를 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은 소생 ‘상징헌제’에 성공한 아벨의 터전과 장성 ‘상징헌제’에 성공한 노아의 기대 위에 부름받아 완성 ‘상징헌제’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그렇듯 ‘상징헌제’에 실수하였지만, 하나님은 아벨이나 노아가 ‘상징헌제’에 성공한 역사적인 심정의 기대를 조건으로 그를 다시 세워 한 번 더 헌제를 하게 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드릴 때에도 ‘상징헌제’를 하던 때와 같이 먼저 아담가정을 복귀하는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이삭헌제를 위한 믿음을 세워야 했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다시 자기의 처(妻) 사라와 남매(男妹)의 입장에 서 가지고 사라를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빼앗기어 일단 그의 처가 되어진 처지에서 다시 찾아오는 역사(役事)를 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때에도 사라와 함께 인류를 상징하는 노비와 만물세계를 상징하는 재물을 찾아 가지고 나왔던 것이다(창 20 : 1~16).

 

그러면 아브라함은 이삭 헌제(獻祭)를 어떻게 하였는가? 아브라함이 그의 절대적인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축복(祝福)의 자식으로 받았던 이삭을 번제(燔祭)로 드리기 위하여 죽이려 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를 죽이지 말라고 명령하시면서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 : 12)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대하는 아브라함의 심정이나 그 절대적인 믿음과 순종과 충성에서 나온 행동은, 벌써 그로 하여금 이삭을 죽였다는 입장에 서게 하였기 때문에 이삭으로부터 사탄을 분리하게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사탄이 분리된 이삭은 벌써 하늘편에 서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죽이지 말라고 하셨던 것이다. ‘이제야’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는 아브라함의 ‘상징헌제(象徵獻祭)’ 실수에 대한 책망과 이삭 헌제의 성공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이 아울러 강조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이 이삭 헌제에 성공함으로써 아브라함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는 이삭을 통하여 이루어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와 같이 이삭을 다시 하늘편으로 분립함으로써 새로운 섭리노정(攝理路程)을 출발하기 위하여, 모리아산상에서 그를 번제로 드리는 데 3일 기간을 소비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3일 기간은 그 이후에도 계속하여 새로운 섭리노정을 출발하는 데 있어서의 사탄을 분립하는 기준으로 필요한 것이 되었다. 야곱도 하란에서 그 가족을 이끌고 가정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을 출발할 때에 사탄 분립의 3일 기간이 있었고(창 31 : 20~22), 모세도 역시 애급(埃及)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할 때에 사탄 분립의 3일 기간을 지난 후에야 홍해(紅海)를 향해 출발하였었다(출 8 : 27~29). 예수님도 영적으로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하실 때 사탄 분립의 무덤 3일 기간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호수아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으로 복귀할 때에도, 본진에 앞서 그들을 인도한 법궤가 사탄분립의 3일노정을 걸었던 것이다(수 3 : 1~6).

 

 

 

(3) 뜻으로 본 이삭의 위치와 그의 상징헌제

아브라함은 일단 그의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실패하였지만, 그를 중심하고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이룰 수 있는 원리적인 조건이 있었다는 데 관해서는 이미 위에서 상론(詳論)한 바 있다. 그러나 예정론(豫定論)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자기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지 못하고 실패한 장본인인 아브라함을 중심하고 또다시 같은 섭리를 되풀이할 수는 없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상징헌제에서 실패한 아브라함을 실패하지 않은 것과 같은 입장에 세워야 했던 것이고, 또 그로부터 연장된 복귀섭리(復歸攝理)를 연장되지 않은 것과 같은 입장에 세워야 했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燔祭)로 드리라고 명령하셨던 것이다(창 22 : 2).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몸에서 날 자(이삭)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 : 4~5)고 하심으로써 이삭을 통하여 선민(選民)을 부르실 것을 약속하셨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그 약속의 자식인 이삭을 죽이려 했던 충성은, ‘상징헌제’에 실수함으로 인하여 사탄의 침범을 당한 자기 자신을 죽이려고 한 것과 같은 입장을 조성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이삭을 죽음의 자리에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은, 아브라함 자신도 이삭과 같이 죽은 입장에서, 침범하였던 사탄을 분립함과 동시에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삭 헌제에 성공함으로써 ‘상징헌제’의 실패로 침범했던 사탄을 분립하였고, 더 나아가서 뜻을 중심하고 이삭과 일체불가분(一體不可分)의 입장에 서게 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죽음의 자리에서 같이 살아난 이삭과 아브라함은 서로 그 개체는 다르면서도 뜻을 중심하고 보면 한 몸이 되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중심한 섭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이삭을 중심한 섭리에로 연장되더라도 그 섭리에서 이삭이 성공만 하면 이 성공은 바로 이삭과 한 몸 된 아브라함의 성공도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그 섭리는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연장되었어도, 뜻을 중심하고 보면 아브라함이 실패도 하지 않았고 또 그 섭리가 연장도 되지 않은 것과 같이 되었던 것이다.

 

이삭 헌제 때의 그의 연령은 분명치 않다. 그러나 그가 번제(燔祭)에 쓸 나무를 지고 갔을 뿐만 아니라(창 22 : 6), 번제에 쓰일 양(羊)이 없는 것을 염려하여 그것이 어디에 있는가 하고 그의 부친(父親)에게 물어 봤던 것(창 22 : 7)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이미 뜻을 이해할 수 있는 연령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번제를 드릴 때에 이삭 자신이 그것을 협조하였으리라는 사실도 또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뜻에 대한 사리(事理)를 분별할 수 있을 정도의 상당한 연령에 도달해 있었던 이삭이, 만일 번제를 위하여 자기를 죽이려는 부친에게 반항하였다면 하나님이 그 이삭 헌제를 받으셨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충성과 그에 못지않은 이삭의 충성이 합동하여 이삭 헌제에 성공함으로써 사탄을 분립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헌제를 중심하고 이삭과 아브라함이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으로써, 첫째로 아브라함은 ‘상징헌제’ 실수로 인하여 침범한 사탄을 분립하여 그 실수 이전의 입장으로 탕감복귀(蕩減復歸)해 가지고 그 입장에서 자기의 섭리적인 사명을 이삭에게 인계할 수 있게 되었고, 둘째로 이삭으로서는 그가 뜻 앞에 순종굴복(順從屈伏)함으로써 아브라함으로부터 하늘의 사명을 이어받아, 다음에 ‘상징헌제’를 드리기 위한 믿음을 세울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의 뜻이 이삭에게로 옮겨진 후,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창 22 : 13)고 기록되어 있는 말씀대로 아브라함은 이삭 대신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수양으로 번제(燔祭)를 드렸으니, 이것은 그대로 이삭을 중심하고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 세워진 ‘상징헌제(象徵獻祭)’가 된 것이었다.

 

이삭이 번제에 쓸 나무를 지고 갔던 사실로 보아 아브라함이 수양을 번제로 드리는 데 있어서도 이삭이 그를 협조하였으리라는 것은 추측하기에 어렵지 않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수양으로 ‘상징헌제’를 드렸다 하였지만, 뜻으로 보면 그와 한 몸 되어 그의 사명을 계승한 이삭 자신이 헌제한 결과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삭은 아브라함의 사명을 인계하고 그를 대신한 입장에서 ‘상징헌제’에 성공함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였던 것이다.

 

 

 

Ⅱ. 실체기대

 

이와 같이 이삭은 아브라함을 대신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중심인물(中心人物)로서, 수양으로 ‘상징헌제’를 뜻맞게 드렸으므로 ‘믿음의 기대’를 세울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삭을 중심하고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우려면, 여기에서 또다시 그의 자식 에서와 야곱을 가인과 아벨의 입장에 분립하여 놓고 ‘실체헌제(實體獻祭)’를 함으로써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이루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실수하지 않았더라면 이삭과 그의 이복형(異腹兄)이 되는 이스마엘이 각각 아벨과 가인의 입장에 서 가지고 가인과 아벨이 이루지 못하였던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 헌제에 실패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입장에 이삭을 대신 세우시고 이스마엘과 이삭의 입장에는 각각 에서와 야곱을 대신 세우시어 그들로 하여금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게 하는 섭리를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삭을 중심한 에서와 야곱은 아담을 중심한 가인과 아벨의 입장인 동시에 노아를 중심한 셈과 함의 입장이기도 하였다.

 

맏아들 에서와 둘째 아들 야곱은 각각 사탄이 침범한 아브라함의 첫째 번 ‘상징헌제’와 사탄을 분립한 둘째 번 이삭 헌제의 상징이었으며, 또 그들은 각각 가인과 아벨의 입장에서 ‘실체헌제(實體獻祭)’를 해야 될 악(惡)과 선(善)의 표시체들이었다. 에서와 야곱이 태중(胎中)에서부터 싸운 것은(창 25 : 22~23) 이와 같이 그들이 각각 악과 선의 표시체로 분립되었던 가인과 아벨의 입장으로서 상충적인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태중에서부터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를 미워하신 것도(롬 9 : 11~13), 그들은 각각 아벨과 가인의 입장에서 저들의 헌제 실패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해야 할 선악의 표시적인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에서와 야곱이 ‘실체헌제’로써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기 위하여는 먼저 야곱이 아벨의 입장을 탕감복귀하는 조건을 세워야 하였다. 그런데 야곱은 다음과 같이 ‘실체헌제’의 중심인물이었던 아벨의 입장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고 ‘실체헌제’를 거친 후에, 아브라함의 ‘상징헌제’ 실수로 말미암은 400년 간의 탕감노정(蕩減路程)을 걷기 위하여 애급(埃及)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첫째로, 야곱은 장자(長子)의 기업(基業)을 개인적으로 복귀하는 싸움에서 승리의 조건을 세워야 하였다. 사탄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被造世界)를 장자의 입장에서 점유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차자(次子)의 입장에서 그 장자의 기업을 빼앗아 나오는 섭리를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장자를 미워하고 차자를 사랑하셨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말 1 : 2~3). 그런데 장자의 기업을 복귀해야 할 사명을 띠고 복중에서부터 부름을 받은 야곱은 차자의 입장에서 지혜롭게 떡과 팥죽으로써 에서로부터 그 장자의 기업을 빼앗았던 것이다(창 25 : 34). 야곱은 장자의 기업을 중히 여기어 그것을 복귀하려는 입장에 섰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삭으로 하여금 그를 축복하게 하셨고(창 27 : 27), 이에 반하여 에서는 그것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 버릴 정도로 경홀(輕忽)히 여겼기 때문에 그를 축복하시지 않았다.

 

둘째로, 야곱은 사탄세계인 하란으로 들어가 21년 간을 고역(苦役)하면서 가정과 재물을 중심하고 장자의 기업을 복귀하는 싸움에서 승리해 가지고 가나안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셋째로, 야곱은 하란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 얍복강에서 천사(天使)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실체로써 천사에 대한 주관성(主管性)을 복귀하였던 것이다. 야곱은 이와 같이 하여 드디어 아벨의 입장을 탕감복귀함으로써 ‘실체헌제(實體獻祭)’를 위한 중심인물이 되었었다.

 

이로써 에서와 야곱은 하나님이 아벨의 헌제를 받으셨을 때의 가인과 아벨의 입장을 확립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려면 에서는 야곱을 사랑하고, 그를 중보(仲保)로 세우며, 그의 주관을 받는 입장에서 순종굴복(順從屈伏)하여 축복을 받은 야곱으로부터 선(善)을 이어받음으로써 선을 번식하는 입장에 서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실제에 있어 에서는 야곱이 하란에서 21년 간의 고역(苦役)을 마치고 하늘편 처자(妻子)와 재물을 취하여 가지고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 그대로 그를 사랑하고 환영하였기 때문에(창 33 : 4) 그들은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아담가정의 가인과 아벨, 또 노아가정의 셈과 함이 ‘실체헌제(實體獻祭)’에 실패하였던 것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할 수 있게 되었었다.

 

이와 같이 에서와 야곱이 ‘실체헌제’에 성공함으로써, 일찍이 아담가정으로부터 ‘실체기대(實體基臺)’를 탕감복귀하여 나온 종적인 역사노정을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노정 중 이삭가정에서 비로소 횡적으로 탕감복귀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에서를 태중(胎中)에서부터 미워하셨다고 로마서 9장 11절 내지 13절에 기록되어 있으나, 이와 같이 그는 야곱에게 굴복하여 자기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였기 때문에 복귀한 가인의 입장에 설 수 있게 되어 드디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그를 미워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다만 그가 복귀섭리(復歸攝理)의 탕감조건(蕩減條件)을 맞추어 나아가는 데 있어서 사탄편인 가인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미움을 받을 수 있었던 그 입장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Ⅲ. 메시아를 위한 기대

 

아담가정에서부터 세우려던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복귀섭리의 중심인물들이 그들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3시대에 걸쳐 연장되어 아브라함에까지 이르렀었다. 그러나 이 뜻을 완성해야 할 아브라함이 또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실수함으로 인하여 이 뜻은 다시 이삭에게로 연장되었었다. 그런데 이삭가정을 중심하고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實體基臺)’가 이루어짐으로써 이때에 비로소 ‘메시아를 위한 기대’가 조성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메시아는 응당 이때에 강림(降臨)하셔야 될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중심하고 볼 때, 메시아를 맞기 위한 이 기대의 사회적인 배경은 어떠해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타락인간(墮落人間)이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워야 하는 것은 이미 사탄을 중심하고 이루어진 세계를 메시아를 위한 왕국으로 복귀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아담가정이나 노아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에 있어서는 그 가정을 침범할 수 있는 다른 가정이 없었기 때문에,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만 이루어지면 그 기대(基臺) 위에 메시아는 오시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브라함 때에는 이미 타락인간들이 사탄을 중심한 민족을 형성하여 아브라함가정에 대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에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가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그 기대 위에 바로 메시아가 강림하실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이 기대가 사탄세계와 대결할 수 있는 민족적인 판도 위에 세워진 후에야 비로소 메시아를 맞을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상징헌제’에 실수하지 않고 ‘실체헌제(實體獻祭)’에 성공하여 그때에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가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그 기대를 중심하고 그 후손이 가나안 땅에서 번성하여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를 조성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고서는 메시아를 맞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상징헌제’에 실수하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벌로서,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를 조성한 이삭의 후손들은 고향을 떠나 이방(異邦)에 들어가서 400년 간을 고역(苦役)하면서 민족적인 기대를 세워 가지고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온 후에야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를 조성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상징헌제(象徵獻祭)’ 실수로 말미암아 그 후손에게 남아진 탕감노정(蕩減路程)은 누구로부터 시작되어야 하였던가? 그것은 이삭이 아니고 야곱으로부터였다. 왜냐하면 위에서 이미 상론(詳論)한 바와 같이, 모든 탕감노정을 중심적으로 걸어야 할 인물은 ‘실체헌제(實體獻祭)’의 중심인 아벨형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담가정에서는 아벨, 노아가정에서는 함, 아브라함가정에서는 이삭, 그리고 이삭가정에서는 야곱이 각각 그 가정의 탕감노정을 중심적으로 걸어야 했던 것이다.

 

 

특히 야곱은 ‘메시아를 위한 기대’ 위에 선 아벨형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다음에 메시아가 걸으셔야 할 사탄 분립의 전형노정(典型路程)을 먼저 본보기로 걸어야 했던 것이다(후편 제2장 제1절).
그리하여 야곱가정은 이삭가정을 중심하고 세워진 ‘메시아를 위한 기대’ 위에서, 아브라함이 지은 죄를 담당하고 400년 간의 탕감노정을 걸음으로써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을 이루어야 했기 때문에, 이삭가정과 같은 입장에서 이 탕감노정을 출발하게 되어 있었다.

 

즉 이삭가정에 있어서 아벨의 입장인 야곱이 모든 탕감노정을 걸었던 것과 같이, 야곱가정에 있어서는 야곱의 하늘편 처(妻) 라헬의 소생인 요셉이 먼저 애급(埃及)으로 들어가 그 탕감노정을 걸음으로써 아벨의 입장을 확립해야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요셉이 그의 형들에 의하여 애급으로 팔려 가서 30세에 애급의 총리대신(總理大臣)이 된 후에 그가 어렸을 때 하늘에서 몽시(夢示)로써 예시해 주셨던 대로(창 37 : 5~11), 먼저 야곱의 사탄편 처 레아의 소생인 이복형(異腹兄)들이 그에게 가서 굴복함으로써 자녀들이 먼저 입애급노정(入埃及路程)을 걷게 되었고, 다음으로는 그의 부모가 같은 노정으로 인도되었었다.

 

 

그리하여 야곱가정은 장차 메시아를 민족적으로 맞기 위한 탕감노정을 출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이삭을 중심한 섭리는 또 야곱을 중심한 섭리노정(攝理路程)으로 연장되었다. 그러나 마치 아브라함과 이삭이 개체는 다르지만 뜻으로 볼 때 한 몸이었던 것과 같이, 야곱은 이삭가정을 중심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운 ‘실체기대(實體基臺)’의 중심인물로서 아브라함이 지은 죄를 담당하고, 장차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를 세워 가지고 이삭의 뜻을 민족적으로 이루어야 할 탕감노정을 출발하였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서로 개체는 다르나 뜻으로 보면 모두 한 몸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야곱의 성공은 곧 이삭의 성공이요, 이삭의 성공은 곧 아브라함의 성공이 되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는 이삭과 야곱에로 연장되었으나 뜻을 중심하고 보면 연장되지 않고 그 당대에 이루어진 것과 같은 것이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 3 : 6)고 한 말씀은 바로 이러한 섭리노정에 입각해 볼 때, 그들은 3대이면서도 뜻으로 보면 하나의 ‘뜻’을 공동으로 이룩한 선조들로서 1대와 같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실상 하나님은 야곱가정으로 하여금 사탄세계인 애급(埃及)에 들어가 400년 고역의 길을 걷게 하시면서,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신 말씀대로 선민(選民)을 세워 가지고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한 후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를 세우게 하심으로써, 이 기대 위에 메시아를 보내시어 복귀섭리를 완수하려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삭가정을 중심하고 세워진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결과적으로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를 조성하기 위한 탕감노정(蕩減路程)의 출발기대(出發基臺)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의 2천년 기간은 결과적으로 다음 시대에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를 세우기 위한 출발기대를 조성하는 기간이 되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상징헌제(象徵獻祭)’ 실수로 인한 탕감노정을 담당한 야곱은 하늘 뜻을 위한 지혜로써 에서로부터 장자(長子)의 기업(基業)을 빼앗는 개인적인 싸움에서 성공하였고, 사탄세계인 하란으로 들어가 그의 외숙부(外叔父) 라반으로부터 장자의 기업을 가정적으로 빼앗는 21년 간의 싸움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그가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는 또 천사(天使)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인간 조상이 타락된 이후 타락인간으로서는 처음으로 천사에 대한 주관성을 복귀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음으로써 선민(選民) 형성의 기틀을 잡았던 것이다.

 

야곱은 이러한 노정을 걸어서 가나안으로 돌아온 후 비로소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웠으므로, 그는 사탄을 굴복시키는 전형노정(典型路程)을 성공적으로 걷게 되었던 것이다. 이 전형노정을 따라서 모세도 걸었고 예수님도 걸으셨으며 이스라엘 민족도 또한 걸어야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사는 사탄을 민족적으로 굴복시켜 온 그 전형노정의 사료(史料)가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사가 복귀섭리역사(復歸攝理歷史)의 중심사료가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Ⅳ.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가 우리에게 보여준 교훈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첫째로 우리에게 ‘뜻 성사’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豫定)이 어떠하신가를 보여 주셨다. 복귀섭리는 하나님의 힘만으로써는 이루어질 수 없고, 인간책임분담(人間責任分擔)이 합해져서만 비로소 이루어진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려 하셨으나, 그가 자기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둘째로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이 어떠하신가를 보여 주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예정하셨으나, 아브라함이 그 자신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의 사명은 이삭을 거쳐 야곱에로 옮겨졌던 것이다.

 

셋째로 복귀섭리는 인간이 그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할 때에 그 뜻은 필연적으로 연장되고, 동시에 그것을 복귀하려면 보다 큰 것으로써의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워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으로서는 동물을 제물(祭物)로 바쳐서 이루어질 수 있었던 뜻이, 그의 실수로 말미암아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쳐서야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넷째로는 제물을 쪼개는 것으로써, 우리들도 각자를 제물로서 쪼개어 선과 악으로 분립해야 된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신앙생활은 자신을 제물의 입장에 세워 놓고 선과 악으로 쪼개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축(牲畜)의 제물로 바치는 생활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뜻을 중심하고 자신을 쪼개지 않을 때에는 거기에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