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편 : 서론

2013. 2. 8. 15:26참사랑 영원까지/원리강론

후편

 

서 론

 

 

복귀섭리(復歸攝理)는 타락된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케 하기 위하여, 그들을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인간으로 복귀하여 나아가는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는 것이다.


전편에서 이미 논증한 바와 같이, 인간은 장성기 완성급(長成期完成級)에서 타락하여 사탄 주관하(主管下)에 머물게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을 복귀시키기 위하여는 먼저 사탄을 분립하는 섭리를 하셔야 하는 것이다.


이미 기독론(基督論)에서 상론(詳論)한 바와 같이, 타락인간이 사탄을 분립하고 타락 이전 본연(本然)의 인간으로 복귀하려면 원죄(原罪)를 벗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 원죄는 인간이 참부모로 오시는 메시아에 의하여 중생(重生)되지 않으면 벗을 수 없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은 사탄 분립의 노정을 통하여서 아담과 해와가 성장하였던 기준, 즉 장성기의 완성급까지 복귀한 형을 갖춘 터 위에서 메시아를 맞아 중생함으로써 아담과 해와의 타락 이전의 입장으로 복귀된 후에, 메시아를 따라 더욱 성장하여서 창조목적을 완성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복귀섭리는 창조목적을 다시 찾아 이루려는 재창조(再創造)의 섭리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원리(原理)에 의하여 섭리하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복귀원리(復歸原理)라고 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복귀섭리가 어떻게 하여서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Ⅰ. 탕감복귀원리

 

1. 탕감복귀

 

탕감복귀원리(蕩減復歸原理)에 관한 문제를 논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인간이 그의 타락(墮落)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서 어떠한 입장에 서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원래 인간 시조(始祖)가 타락하지 않고 완성되어서 하나님과 심정(心情)의 일체를 이루었더라면, 그들은 하나님만을 대하고 사는 입장에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하여서 사탄과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맺었기 때문에 사탄도 대해야 하는 입장에 서게 된 것이었다. 따라서 타락 직후 아직 원죄만이 있었을 뿐 다른 어떠한 선행(善行)도 악행(惡行)도 하지 않았던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도 대할 수 있고 사탄도 대할 수 있는 중간 위치에 처하게 되었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해와의 후손들도 역시 이와 같은 중간 위치에 놓여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타락사회에 있어서 예수는 믿지 않았어도 양심적인 생활을 한 사람이면, 그는 이렇듯 중간 위치에 있는 것이므로 사탄이 그를 지옥(地獄)으로 끌어갈 수는 없다.

 

그러나 아무리 양심적인 생활을 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예수를 믿지 않는 한 하나님도 그를 낙원(樂園)으로 보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인(靈人)은 영계(靈界)에 가서도 낙원도 지옥도 아닌 중간 영계에 머물러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와 같이 중간 위치에 있는 타락인간(墮落人間)을 하나님은 어떻게 사탄으로부터 분립하시는가?
사탄은 원래 혈통적인 인연을 가지고서 타락한 인간을 대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 자신이 하나님이 취할 수 있는 어떠한 조건을 세우지 않는 한 하나님은 무조건 그를 하늘편으로 복귀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한편 사탄도 역시 인간의 창조주(創造主)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타락인간 자신에게 다시 그가 침범할 수 있는 어떠한 조건이 성립되지 않는 한 이러한 인간을 무조건 취해 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인간은 그 자신이 선한 조건을 세울 때에는 하나님편으로, 악한 조건을 세울 때에는 사탄편으로 분립되는 것이다.

아담가정이 이러한 중간 위치에 있었을 때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제물(祭物)을 바치도록 하셨던 것은,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제물을 뜻맞게 바치는 것으로써 복귀섭리(復歸攝理)를 하실 수 있는 입장에 설 수 있도록 하시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을 살해함으로써 도리어 사탄이 그들에게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타락인간들에게 예수님을 보내셨던 것도,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하늘편에 서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때, 그대로 사탄편에 머물게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예수님이 구주(救主)이신 동시에 심판주(審判主)가 되신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탕감복귀(蕩減復歸)’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무엇이든지 그 본연의 위치와 상태 등을 상실하게 되었을 때, 그것들을 본래의 위치와 상태에로 복귀하려면 반드시 거기에 필요한 어떠한 조건을 세워야 한다.

 

이러한 조건을 세우는 것을 ‘탕감(蕩減)’이라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상실된 명예나 직위나 건강 등을 원상대로 회복하려면, 반드시 거기에 필요한 노력이나 재력 등의 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 된다. 또 서로 사랑하던 두 사람이 어찌되어서 미워하는 사이가 되었다고 하자. 여기에서 이들이 다시 서로 사랑하던 원상태에로 복귀하려면, 그들은 반드시 서로 사과(謝過)를 하는 등의 어떠한 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이와 같이 타락으로 인하여서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위치와 상태를 떠나게 된 인간도 다시 그 위치와 상태에로 복귀하려면, 반드시 거기에 필요한 어떠한 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타락인간(墮落人間)이 이러한 조건을 세워서 창조본연의 위치와 상태에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탕감복귀(蕩減復歸)’라고 하며, ‘탕감복귀’를 위해서 세우는 조건을 ‘탕감조건(蕩減條件)’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처럼 탕감조건을 세워서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복귀해 나아가는 섭리를 탕감복귀섭리(蕩減復歸攝理)라고 말한다.
그러면 탕감조건은 어느 정도로 세워야 하는가? 이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들 수가 있다.

첫째는 동일(同一)한 것으로써의 탕감조건을 세우는 것이다. 이것은 본연의 위치와 상태에서 상실되었던 것과 동일한 가치의 조건을 세워서 원상(原狀)으로 복귀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보상(報償)이나 상환(償還)과 같은 것이 여기에 속하는 것이다. 출애굽기 21장 23절 내지 25절에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갚을지니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러한 탕감조건을 세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둘째는 보다 작은 것으로써 탕감조건을 세우는 경우다. 이것은 본연의 위치와 상태에서 상실되었던 것보다 작은 가치의 탕감조건을 세워 원상으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어떤 채무자가 빚을 많이 졌을 때, 그 채권자의 호의로 그중 일부 소액(少額)만을 반제(返濟)함으로써 부채(負債)의 전액(全額)을 청산한 것으로 매듭을 짓는 수가 있다. 이러한 경우가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원칙에 의하여, 우리는 십자가의 대속(代贖)을 ‘믿는다’는 극히 작은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예수님과 똑같은 죽음을 거쳐 다시 살았다는 구원(救援)의 큰 혜택을 받게 된다. 한편 또 우리는 몇 방울의 물을 머리에 떨어뜨려 세례(洗禮)를 받았다는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예수님과 성신(聖神)에 의하여 중생(重生)된 입장을 복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성만찬(聖晩餐)에서 한 조각의 떡과 한 잔의 포도주를 취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의 성체(聖體)를 먹었다는 커다란 가치의 혜택을 받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예는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

셋째는 보다 큰 것으로써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는 경우다. 이것은 작은 가치의 탕감조건을 세우는 데 실패하였을 때, 보다 더 큰 가치의 탕감조건을 다시 세워서 원상(原狀)으로 복귀하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은 비둘기와 양과 소를 바치는 헌제(獻祭)에서 실수하였기 때문에 그의 탕감조건은 가중되어서 독자(獨子) 이삭을 제물로 바치게 되었던 것이다. 또 모세 때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40일의 정탐기간(偵探期間)을 뜻맞게 세우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탕감조건이 가중되어, 그들은 날을 해로 계수(計數)한 40년을 광야에서 표류(漂流)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민 14 : 34).

그러면 어찌하여 탕감조건을 다시 세울 때에는 더 큰 조건을 세워야 하는가? 그것은 어떠한 섭리적 중심인물(中心人物)이 탕감조건을 다시 세울 때에는, 그가 세워야 할 본래의 탕감조건과 함께 그 앞선 인물들의 실수로 인한 탕감조건까지도 첨가하여 세우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어떠한 방법으로 세우느냐 하는 문제다. 무엇이든지 본래의 위치와 상태로부터 떠난 입장에서 원상(原狀)으로 복귀하려면, 그것들로부터 떠나게 된 경로와 반대의 경로를 취하는 탕감조건을 세워야만 한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선민(選民)들이 예수님을 미워하여 그를 십자가에 내줌으로써 벌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그 입장으로부터 다시 구원(救援)을 받아 선민의 입장으로 복귀하기 위하여는, 앞서와는 반대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를 위하여 스스로 십자가를 지는 자리에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눅 14 : 27). 기독교가 순교(殉敎)의 종교가 된 원인은 실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한편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고 타락함으로써 하나님을 서럽게 해 드렸으므로, 이것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는 그와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실천함으로써 창조본성(創造本性)의 인간으로 복귀하여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

첫아담이 하나님을 버림으로 말미암아서 그 후손들이 사탄의 품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따라서 후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이 인류를 사탄의 품속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복귀시키려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입장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받들어 모시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버리셨던 것은 이러한 곡절에 기인하였던 것이다(마 27 : 46).

이러한 각도에서 보면, 한 국가의 형법도 죄를 지은 사람에게 벌을 주어서 그 국가의 안녕과 질서를 원상대로 유지하게 하기 위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는 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탕감조건은 누가 세워야 하는가? 이미 창조원리(創造原理)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인간은 자신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여 완성되어 가지고 천사(天使)까지도 주관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 시조는 그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여 도리어 사탄의 주관을 받아야 할 입장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인간이 사탄의 주관을 벗어나 사탄을 주관할 수 있는 입장으로 복귀하기 위하여는, 인간책임분담(人間責任分擔)으로써 그에 필요한 탕감조건을 인간 자신이 세우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2. 메시아를 위한 기대

 

메시아는 인류의 참부모로 오셔야 한다. 그가 인류의 참부모로 오셔야 하는 이유는, 타락한 부모로부터 태어난 인류를 거듭나게 하여 그 원죄를 속(贖)해 주셔야 하기 때문이다(전편 제7장 제4절 Ⅰ 1). 그러므로 타락인간이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인간으로 복귀하기 위하여는,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완성한 터 위에서 메시아를 맞아 원죄를 벗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그러면 타락인간이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려면 어떠한 탕감조건을 세워야 하는가? 이것을 알기 위하여는, 원래 아담이 어떠한 경로에 의하여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던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탕감조건은 본연의 위치와 상태를 상실하게 된 것과 반대의 경로에 의하여 세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아담이 창조목적을 완성하기 위하여서는 두 가지의 조건을 갖추어야 했던 것이다.

 

첫째는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는 것이었는데, 물론 아담이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는 인물이 되어야 했었고, 그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기 위한 조건으로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지 말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담은 이 믿음의 조건을 세우는 것으로서 그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수행하기 위한 성장기간(成長期間)을 거쳐야만 했었다. 그런데 이 성장기간은 수(數)로써 된 것이므로 결국 이 기간은 수를 완성하는 기간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아담이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하기 위하여 세워야 했던 두번째의 조건은 그가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그의 성장기간을 다 거침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세웠더라면, 그는 그 기대 위에서 하나님과 일체가 되어 ‘실체기대’를 조성함으로써 창조본성(創造本性)을 완성한 말씀의 완성실체(完成實體)가 되었을 것이었다(요 1 : 14).

 

아담이 이와 같은 완성실체가 되었을 때, 그는 비로소 하나님의 제1축복이었던 개성완성자(個性完成者)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위와 같은 경로에 의하여서 창조목적을 완성하였을 것이므로, 타락인간도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기 위하여는 그 경로에 의하여 아래와 같이 ‘믿음의 기대’를 세운 터전 위에서 ‘실체기대’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1) 믿음의 기대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타락하였기 때문에 ‘믿음의 기대’를 세우지 못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는 말씀의 완성실체가 되지 못하여 창조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인간이 창조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기준을 복귀하기 위하여서는, 먼저 인간 조상이 세우지 못하였던 그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리고 그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탕감조건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첫째는 그를 위한 ‘중심인물(中心人物)’이 있어야 한다. 아담이 ‘믿음의 기대’를 세우는 인물이 되지 못하고 타락(墮落)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믿음의 기대’를 복귀할 수 있는 중심인물을 찾아 나오셨다. 타락한 아담가정에서 가인과 아벨로 하여금 제물(祭物)을 바치게 하셨던 것도 이러한 중심인물을 찾아 세우기 위함이었고,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그리고 열왕(列王)들과 세례 요한 등을 부르셨던 것도 그들을 이러한 중심인물로 세우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둘째는 그것을 위한 ‘조건물(條件物)’을 세워야 한다. 아담은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한 조건으로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함으로 인하여 잃어버렸던 것이다. 이렇게 되어 타락된 인간은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을 수 없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 말씀을 대신하는 조건물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타락된 인간은 만물보다 거짓된 입장에 떨어지게 되었기 때문에(렘 17 : 9), 구약 이전시대(舊約以前時代)에 있어서는 제물 또는 그 제물을 대신한 방주(方舟) 등의 만물을 조건물로 세워 가지고 ‘믿음의 기대’를 세우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기대’는 인간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침범을 당한 만물을 복귀하는 기대도 되는 것이다.

 

그리고 구약시대(舊約時代)에 있어서는 율법(律法)의 말씀 또는 그 말씀을 대신한 법궤(法櫃)나 성전(聖殿)이나 중심인물 등이 이 기대를 조성하기 위한 조건물이었다. 또 신약시대(新約時代)에 있어서는 복음(福音)의 말씀, 따라서 그 말씀의 실체이신 예수님이 이 ‘믿음의 기대’ 조성을 위한 조건물이었던 것이다.
인간이 타락된 후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조건물(條件物)은 인간편에서 보면 그것은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것이지만, 하나님편에서 볼 때에는 어디까지나 소유를 결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셋째는 그를 위하여 ‘수리적(數理的)인 탕감기간(蕩減期間)’을 세워야 한다. 그러면 이 섭리적인 수에 의한 탕감기간이 왜 있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떠한 섭리적인 수의 탕감기간을 세워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편의상 후편 제3장 제2절 Ⅳ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2) 실체기대

 


타락인간(墮落人間)이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하기 위하여는 ‘믿음의 기대’를 복귀한 터전 위에서 일찍이 인간 조상이 이루지 못하였던 완성실체(完成實體)를 이루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러나 타락인간은 어디까지나 메시아를 통하여 원죄(原罪)를 벗지 않고서는 완성실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타락인간은 위에서 말한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한 터전 위에서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세움으로써 이루어지는 ‘메시아를 위한 기대’ 위에 서야 비로소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것이다. 타락인간은 이와 같이 메시아를 맞아 원죄를 벗어 가지고 인간 조상의 타락 전 입장으로 복귀된 후에,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하고 메시아와 일체가 되어 인간 조상이 타락됨으로써 걷지 못하고 남아졌던 성장기간(成長期間)을 다 지나서야 완성실체가 되는 것이다.

한편 ‘실체기대’를 세우는 데 있어서도 타락인간이 세워야 할 어떠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이 필요하다. 그것이 곧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인 것이다. 인간 조상은 타락하여 원죄를 지니게 됨에 따라서 창조본성(創造本性)을 이루지 못하고 타락성본성(墮落性本性)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인간이 메시아를 맞아서 원죄를 벗고 창조본성을 복귀하기 위한 ‘실체기대’를 세우기 위하여는, 먼저 그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이 조건을 어떻게 세우는가 하는 것은 후편 제1장 제1절 Ⅱ에서 논하기로 하자.

 

 

Ⅱ. 복귀섭리노정

 

1. 복귀섭리노정의 시대적 단계

 

이제 아담 이후 오늘에 이르는 전역사노정(全歷史路程)에 있어서의 시대적 단계에 대하여 개관(槪觀)해 보기로 하자.
타락인간(墮落人間)으로 하여금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우게 하고, 그 기대 위에서 메시아를 맞게 함으로써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하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섭리는 일찍이 아담가정으로부터 시작되었었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을 살해함으로써 그 섭리의 뜻은 좌절되었고, 그 후 10대를 지나 그 뜻은 다시 노아의 가정으로 옮겨졌던 것이다. 40일의 홍수(洪水)로써 악한 세대를 심판하셨던 것은, 노아가정을 중심하고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를 세우게 하고 그 기대 위에 메시아를 보내심으로써 복귀섭리(復歸攝理)를 완수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아의 차자(次子) 함의 타락행위로 인하여, 노아가정과 방주(方舟)를 찾아 세우기 위하여 세웠던 10대와 40일을 사탄에게 내주고 말았다. 그러나 이것들을 다시 하늘편으로 탕감복귀하는 기간 즉 4백년이 지난 후에 뜻은 다시 아브라함에게 옮겨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아브라함이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를 뜻맞게 세웠더라면, 이 기대(基臺)를 중심하고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를 이루어 가지고 그 터 위에서 메시아를 맞았을 것이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실수함으로써 그 뜻은 또다시 좌절되고 말았다. 이에 메시아를 맞기 위한 믿음의 조상을 찾아 내려왔던 아담가정으로부터의 2천년 기간은 일단 사탄에게 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노아의 입장과 다른 것은, 비록 아브라함이 ‘상징헌제’에는 실수하였지만 이삭 야곱의 3대에 걸쳐 연장하면서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를 세움으로써, 이 기대를 중심하고 애급(埃及)에서 하나님의 선민(選民)을 번식하여 후일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민족적으로 넓힐 수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보면,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2천년 기간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한 사람을 찾아 세워 장차 복귀섭리(復歸攝理)를 시작할 수 있는 그 기대를 조성하는 기간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복귀섭리의 역사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상징헌제’ 실수로 인하여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의 2천년 기간을 사탄에게 내주었으므로, 이 기간을 다시 하늘편으로 탕감복귀(蕩減復歸)하는 기간이 있어야 할 것이니, 그 기간이 바로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의 2천년 기간이다.

아브라함이 ‘상징헌제’에 실수하지 않았더라면 그 후손들에 의하여 세워졌을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 위에 메시아가 오셨을 것이므로, 그때에 복귀섭리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일 유대민족이 예수님을 믿고 모시어서 그를 하나님 앞에 민족적인 산 제물로서 뜻맞게 세워 드렸더라면, 그때에도 그들이 세운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 위에서 오신 바 메시아를 중심하고 복귀섭리는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상징헌제’에 실수한 것과 같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함으로써 그 민족적인 헌제(獻祭)에 실수하였기 때문에, 아브라함 이후 예수님까지의 2천년 기간은 또다시 사탄에게 내준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사탄에게 내준 이 2천년 기간을 또다시 하늘편으로 탕감복귀(蕩減復歸)하는 2천년 기간이 필요하게 된 것이니, 이 기간이 바로 예수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2천년 기간인 것이다. 이 기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한 복귀섭리로써 기독교 신도들이 ‘재림주님을 위한 세계적인 기대’를 세우지 않으면 아니 된다.

 

 

2. 복귀섭리노정의 시대 구분

 

(1) 말씀에 의한 섭리로 본 시대 구분

㉠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2천년 기간은, 인간이 아직 복귀섭리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을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우지 못한 시대였다. 그러므로 이 시대는 다만 타락인간이 헌제에 의한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말씀에 의한 섭리를 하실 수 있는 다음 시대를 위한 기대(基臺)를 조성한 시대였기 때문에, 이 시대를 ‘말씀기대섭리시대(基臺攝理時代)’라고 한다.

㉡ 또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까지의 2천년 기간은, 구약(舊約)의 말씀에 의하여 인간의 심령(心靈)과 지능(知能)의 정도가 소생급(蘇生級)까지 성장한 시대였으므로, 이 시대를 ‘소생 구약시대(蘇生 舊約時代)’라고 한다.

㉢ 한편 예수님으로부터 재림기(再臨期)까지의 2천년 기간은, 신약(新約)의 말씀에 의하여 인간의 심령과 지능의 정도가 장성급(長成級)까지 성장하는 시대이므로, 이 시대를 ‘장성 신약시대(長成 新約時代)’라고 한다.

㉣ 예수님 재림 이후의 복귀섭리완성시대(復歸攝理完成時代)는, 복귀섭리의 완성을 위하여 주시는 성약(成約)의 말씀에 의하여 인간의 심령과 지능의 정도가 완성급(完成級)까지 성장하는 시대이므로, 이 시대를 ‘완성 성약시대(完成 成約時代)’라고 한다.

 

 

(2) 부활섭리로 본 시대 구분

㉠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2천년 기간은, 인간이 헌제(獻祭)로써 장차 부활섭리(復活攝理)를 하실 수 있는 구약시대(舊約時代)를 위한 기대를 조성한 시대였으므로, 이 시대를 ‘부활기대섭리시대(復活基臺攝理時代)’라고 한다.

㉡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까지의 2천년 기간은, 부활섭리의 시대적인 혜택과 구약의 말씀에 의하여 인간이 영형체급(靈形體級)까지 부활하는 시대였으므로, 이 시대를 ‘소생부활섭리시대(蘇生復活攝理時代)’라고 한다.

㉢ 예수님으로부터 그의 재림기까지의 2천년 기간은, 복귀섭리의 시대적인 혜택과 신약의 말씀에 의하여 인간이 생명체급(生命體級)까지 부활하는 시대이므로, 이 시대를 ‘장성부활섭리시대(長成復活攝理時代)’라고 한다.

㉣ 예수님 재림 이후의 복귀섭리완성시대(復歸攝理完成時代)는, 복귀섭리의 시대적인 혜택과 성약의 말씀에 의하여 인간이 생령체급(生靈體級)으로 완전 부활하는 시대이므로, 이 시대를 ‘완성부활섭리시대(完成復活攝理時代)’라고 한다.

 

 

(3) 믿음의 기간을 탕감복귀하는 섭리로 본 시대 구분

㉠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2천년 기간은, 사탄에게 내주었던 이 기간을 아브라함 한 분을 찾아 세움으로써 하늘 것으로 탕감복귀할 수 있는 구약시대를 위한 기대를 조성한 시대였으므로, 이 시대를 ‘탕감복귀기대섭리시대(蕩減復歸基臺攝理時代)’라고 한다.

㉡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까지의 2천년 기간은, 아브라함의 헌제 실수로 인하여 사탄에게 내주었던 아담으로부터의 2천년 기간을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하고 다시 하늘 것으로 탕감복귀하는 시대였으므로, 이 시대를 ‘탕감복귀섭리시대(蕩減復歸攝理時代)’라고 한다.

㉢ 예수님으로부터 그의 재림기(再臨期)까지의 2천년 기간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서 사탄에게 내주었던 구약시대의 2천년 기간을 기독교 신도들을 중심하고 하늘 것으로 재탕감복귀(再蕩減復歸)하는 시대이므로, 이 시대를 ‘탕감복귀섭리연장시대(蕩減復歸攝理延長時代)’라고 한다.

㉣ 예수님 재림 이후의 복귀섭리완성시대(復歸攝理完成時代)는, 사탄에게 내주었던 복귀섭리의 전노정을 하늘 것으로 완전히 탕감복귀하는 시대이므로, 이 시대를 ‘탕감복귀섭리완성시대(蕩減復歸攝理完成時代)’라고 하는 것이다.

 

 

(4) 메시아를 위한 기대의 범위로 본 시대 구분

㉠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2천년 기간은, 헌제(獻祭)에 의하여 아브라함가정 하나를 찾아 세움으로써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를 조성한 시대였으므로, 이 시대를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家庭的)인 기대섭리시대(基臺攝理時代)’라고 한다.

㉡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까지의 2천년 기간은, 구약(舊約)의 말씀에 의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찾아 세움으로써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를 조성하는 시대였으므로, 이 시대를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民族的)인 기대섭리시대(基臺攝理時代)’라고 한다.

㉢ 예수님으로부터 그의 재림기(再臨期)까지의 2천년 기간은, 신약(新約)의 말씀에 의하여 기독교 신도들을 세계적으로 찾아 세움으로써 ‘메시아를 위한 세계적인 기대’를 조성하는 시대이므로, 이 시대를 ‘메시아를 위한 세계적(世界的)인 기대섭리시대(基臺攝理時代)’라고 한다.

㉣ 예수님 재림 이후의 복귀섭리완성시대(復歸攝理完成時代)는, 성약(成約)의 말씀에 의하여 천주적인 섭리를 하심으로써 ‘메시아를 위한 천주적인 기대’를 완성해야 할 시대이므로, 이 시대를 ‘메시아를 위한 천주적(天宙的)인 기대섭리완성시대(基臺攝理完成時代)’라고 한다.

 

 

(5) 책임분담으로 본 시대 구분

㉠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2천년 기간은, 다음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책임분담섭리(責任分擔攝理)를 하시기 위한 기대를 조성한 시대였으므로, 이 시대를 ‘책임분담기대섭리시대(責任分擔基臺攝理時代)’라고 한다.

㉡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까지의 2천년 기간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바 원리적인 책임을 지심으로써 친히 사탄을 굴복시키는 제1차의 책임을 담당하시고 선지자(先知者)들을 대하시어 소생적(蘇生的)인 복귀섭리를 해 나오신 시대였으므로, 이 시대를 ‘하나님의 책임분담섭리시대(責任分擔攝理時代)’라고 한다.

㉢ 예수님으로부터 그의 재림기(再臨期)까지의 2천년 기간은, 타락의 장본인인 아담과 해와의 사명을 대신 완성해야 되었던 예수님과 성신(聖神)이 사탄을 굴복시키는 제2차의 책임을 지시고 타락인간을 대하시어 장성적(長成的)인 복귀섭리를 해 나오신 시대이므로, 이 시대를 ‘예수와 성신의 책임분담섭리시대(責任分擔攝理時代)’라고 하는 것이다.

㉣ 예수님 재림 이후의 복귀섭리완성시대(復歸攝理完成時代)는, 인간이 본래 천사까지도 주관하게 되어 있는 창조원리(創造原理)에 입각하여 지상과 천상에 있는 성도들이 타락한 천사인 사탄을 굴복시키는 제3차의 책임을 지고 복귀섭리를 완성해야 하는 시대이므로, 이 시대를 ‘성도(聖徒)의 책임분담섭리시대(責任分擔攝理時代)’라고 한다.

 

 

(6) 섭리적 동시성으로 본 시대 구분

㉠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2천년 기간은,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하는 탕감조건들을 상징적으로 세워 나온 시대였으므로, 이 시대를 ‘상징적 동시성(象徵的 同時性)의 시대’라고 한다.

㉡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까지의 2천년 기간은,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하는 탕감조건들을 형상적으로 세워 나온 시대였으므로, 이 시대를 ‘형상적 동시성(形象的 同時性)의 시대’라고 한다.

㉢ 예수님으로부터 그의 재림기까지의 2천년 기간은,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하는 탕감조건들을 실체적으로 세워 나온 시대이므로, 이 시대를 ‘실체적 동시성(實體的 同時性)의 시대’라고 한다.

 

 

 

Ⅲ. 복귀섭리역사와 나

 

 

나’라는 개성체(個性體)는 어디까지나 복귀섭리역사(復歸攝理歷史)의 소산(所産)이다. 따라서 나는 이 역사가 요구하는 목적을 이루어야 할 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역사의 뜻 가운데 서야 하며, 그러기 위하여는 복귀섭리역사가 오랜 기간을 두고 종적으로 요구하여 나오고 있는 탕감조건(蕩減條件)들을 나 자신을 중심하고 횡적으로 찾아 세워야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나’는 복귀섭리역사가 바라는 결실체로서 설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까지의 역사노정에서 복귀섭리의 목적을 위하여 부름받았던 선지선열(先知先烈)들이 이루지 못한 시대적인 사명들을 이제 나를 중심하고 일대에서 횡적으로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러지 않고서는 복귀섭리의 목적을 완수한 개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역사적인 승리자가 되기 위하여는, 선지선열들을 대하시던 하나님의 심정과 그들을 부르셨던 하나님의 근본 뜻, 그리고 그들에게 맡겨졌던 섭리적인 사명들이 과연 어떠한 것이었던가 하는 것을 상세히 알아야 한다. 그러나 타락인간(墮落人間)은 그 자신으로서 이러한 입장에 설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완성자로 오시는 재림주님을 통하여 그 모든 것들을 알고 또 그를 믿고 모시어 그와 하나가 됨으로써, 그와 함께 복귀섭리역사의 종적인 탕감조건들을 횡적으로 찾아 세운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왔다 간 모든 선인(先人)들이 걸었던 길은 오늘날의 우리들이 다시 되풀이하여서 걸어야 할 길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들이 다 걷지 못하고 남기고 간 길까지도 모두 걸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인간은 복귀섭리의 내용을 모르고서는 결코 생명의 길을 찾아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우리들이 복귀섭리(復歸攝理)를 자세히 알아야 하는 이유는 실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