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2. 7. 23:01ㆍ참사랑 영원까지/원리강론
제 4 장 섭리적 동시성으로 본 복귀섭리시대와 복귀섭리연장시대
앞에서 이미 논술한 바와 같이,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은 결국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하려는 데 있으므로 그 섭리가 연장됨에 따라서 그 기대를 복귀하려는 섭리가 반복되어 가는 것이다. 그런데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기 위하여는, 첫째로 복귀섭리를 담당한 어떠한 중심인물(中心人物)이 어느 기간을 두고 어떤 조건물(條件物)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상징헌제(象徵獻祭)’를 함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세워야 하고,
둘째로는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실체헌제(實體獻祭)’를 함으로써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이뤄야 한다. 그러므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하려는 섭리를 반복하여 온 복귀섭리의 노정은 결국 ‘상징헌제’와 ‘실체헌제’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려는 섭리의 반복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섭리노정의 반복으로 형성되는 섭리적 동시성(攝理的 同時性)의 시대는, 결국 위에서 말한 두 헌제를 탕감복귀하려 했던 섭리적인 사실로써 그 동시성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제 이러한 원칙하(原則下)에서 각 섭리시대의 성격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런데 그 시대적 성격을 파악하기 위하여는, 그 섭리를 담당했던 중심민족(中心民族)과 그 중심사료(中心史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복귀섭리를 이루어 나온 중심민족과 그 사료를 상고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인류역사는 수많은 민족사(民族史)로써 연결되어 왔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중에서 어떤 민족을 특별히 택하셔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는 전형적(典型的)인 복귀섭리노정(復歸攝理路程)을 걷게 하심으로써, 그 민족으로 하여금 천륜(天倫)의 중심이 되어 인류역사를 향도(嚮導)하도록 이끌어 나오신 것이다. 이러한 사명을 위하여 택함을 받은 민족을 하나님의 선민(選民)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선민은 본시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를 세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써 이루어졌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복귀섭리시대(復歸攝理時代)의 섭리를 이루어 나온 중심민족은 이스라엘 선민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사는 이 시대에 있어서의 복귀섭리역사의 사료(史料)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준 후부터 선민의 자격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것을 예견하신 예수님은 일찍이 포도원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그 결론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 : 43)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또 바울도, 아브라함의 혈통적인 후손이라고 해서 그들이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뜻을 받드는 백성이라야 이스라엘이 된다고 하였던 것이다(롬 9 : 6~8).
사실상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복귀섭리연장시대(復歸攝理延長時代)의 섭리를 이루어 나온 중심민족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그들이 다하지 못한 하나님의 복귀섭리를 계승한 기독교 신도들이었다. 따라서 기독교사가 이 시대의 복귀섭리역사의 사료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구약시대(舊約時代)의 아브라함의 혈통적인 후손을 제1 이스라엘이라고 한다면, 신약시대(新約時代)의 기독교 신도들은 제2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다.
구약과 신약의 성서를 대조해 보면, 구약성서의 율법서(律法書, 창세기에서 신명기까지의 5권), 역사서(歷史書, 여호수아에서 에스더까지의 12권), 시문서(詩文書, 욥기에서 아가까지의 5권), 예언서(豫言書, 이사야에서 말라기까지의 17권)는 각각 신약성서의 복음서(福音書), 사도행전(使徒行傳), 사도서한(使徒書翰), 요한계시록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런데 구약성서의 역사서에는 제1 이스라엘의 2천년 역사가 전부 기록되어 있지만, 신약성서의 사도행전에는 예수님 당시의 제2 이스라엘(기독교 신도)의 역사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신약성서의 사도행전이 구약성서의 역사서에 해당하는 내용이 되기 위하여는 예수님 이후 2천년 간의 기독교사(基督敎史)가 거기에 더 첨가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기독교사는 예수님 이후의 복귀섭리역사(復歸攝理歷史)를 꾸미는 사료(史料)가 되는 것이다.
상기(上記)한 제1 제2, 두 이스라엘의 역사를 중심하고 동시성으로 이루어진 복귀섭리시대와 복귀섭리연장시대를 이루고 있는 각 시대의 성격을 대조하여 봄으로써, 사실상 인류역사(人類歷史)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일관한 공식적인 섭리에 의하여 엮어져 왔다는 것을 더욱 명백히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제 1 절 애급고역시대와 로마제국 박해시대
노아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400년 사탄 분립기간은 아브라함의 헌제 실수로 말미암아 사탄의 침범을 당하였으므로, 이 400년 기간을 다시 탕감복귀(蕩減復歸)하기 위한 애급고역시대(埃及苦役時代)에는 야곱과 그의 12자식을 중심한 70가족이 애급(埃及)으로 들어간 이래 그 후손들이 400년 동안 애급인들에게 처참한 학대를 받았었다. 이 시대를 실체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로마제국 박해시대(迫害時代)에 있어서도 이스라엘 선민들이 예수님을 산 제물로 바치는 헌제(獻祭)에 실수하여 그를 십자가에 내줌으로써 사탄의 침범을 당하게 된 메시아 강림준비시대(降臨準備時代) 400년의 사탄 분립기간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중심한 12제자와 70문도 및 기독교신도들이 로마제국에서 400년 동안 처참한 박해를 당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애급고역시대(埃及苦役時代)에 있어서는 제1 이스라엘 선민들이 할례(割禮)를 하고(출 4 : 25), 희생(犧牲)을 드리며(출 5 : 3), 안식일(安息日)을 지키면서(출 16 : 23) 아브라함의 헌제 실수로 인하여 침범한 사탄을 분립하는 생활을 하였었다. 그러므로 로마제국 박해시대에도 제2 이스라엘 선민들이 성만찬(聖晩餐)과 세례(洗禮)를 베풀고, 성도 자신들을 생축(牲畜)의 제물로 드리며, 안식일을 지키는 것으로써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줌으로 인하여 침범한 사탄을 분립하는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애급고역시대에 있어서, 400년의 고역이 끝난 후에 모세는 3대 기적(三大奇蹟)과 10재앙(十災殃)의 권능으로 바로를 굴복시키고 제1 이스라엘 선민을 인도하여 애급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향하였다. 이와 같이 로마제국 박해시대에 있어서도, 제2 이스라엘 선민들에 대한 4세기 동안의 박해가 끝난 후에 예수님은 심령적인 기적과 권능으로써 많은 신도를 불러일으키셨고, 더 나아가 콘스탄티누스대제를 감화시켜서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하게 하셨으며, 392년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이르러서는 그처럼 극심한 박해를 하던 기독교를 국교(國敎)로 제정하게 하셨었다. 이리하여 기독교인들은 사탄세계에서 영적으로 가나안에 복귀하게 되었다.
그런데 율법(律法)에 의한 외적인 탕감조건(蕩減條件)으로써 섭리하시던 구약시대(舊約時代)에 있어서는 모세로 하여금 외적인 기사(奇事)와 권능으로써 바로를 굴복시키셨지만, 신약시대(新約時代)는 말씀에 의한 내적인 탕감조건으로 섭리하시는 시대이기 때문에 심령적인 감화로써 역사(役事)하셨다.
애급고역시대(埃及苦役時代)가 끝난 후 모세는 시내산에서 십계명(十誡命)과 말씀을 받음으로써 구약성서의 중심을 세웠고, 석판(石板)과 성막(聖幕)과 법궤(法櫃)를 받듦으로써 제1 이스라엘 선민들이 메시아를 맞기 위한 뜻을 세워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제2 이스라엘 선민들은 로마제국 박해시대가 끝난 후에 구약시대의 십계명과 성막이상(聖幕理想)을 영적으로 이루기 위한 말씀으로서 사도(使徒)들의 기록을 모아 신약성서를 결정하고, 그 말씀을 중심한 교회를 이룩하여 가지고 재림주(再臨主)를 맞기 위한 터전을 넓혀 나오게 된 것이다. 예수님 이후에는 예수님과 성신(聖神)이 직접 성도들을 인도하셨기 때문에, 그 이전 섭리시대와 같이 어느 한 사람을 하늘 대신 전체적인 섭리의 중심인물(中心人物)로 세우지는 않으셨다.
제 2 절 사사시대와 교구장제 기독교회시대
모세의 사명을 계승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선민을 인도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옷니엘 사사(士師)를 위시한 12사사에 이어 삼손, 엘리, 사무엘에 이르기까지 도합 15사사가 이스라엘을 지도하였던 400년 간을 사사시대(士師時代)라고 한다. 그들 사사는 다음 시대에 있어 분담된 예언자(豫言者)와 제사장(祭司長)과 국왕(國王)의 사명을 겸임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유대교의 봉건사회(封建社會)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사시대를 실체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시대였던 신약시대(新約時代)의 교구장제 기독교회시대(敎區長制基督敎會時代)에 있어서도, 역시 교구장들은 기독교 신도들을 영도(領導)하는 면에 있어 사사의 그것에 해당하는 직분을 띠고 있었다.
예수 이전의 시대에는 제1 이스라엘을 중심하고 영육(靈肉) 아울러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해 나아갔었기 때문에, 정치와 경제와 종교는 하나의 지도자 밑에 통솔되어 나아갔었다. 그러나 예수님 이후의 노정은 이미 조성된 ‘메시아를 위한 영적 기대’ 위에서 영적인 만왕의 왕 되신 예수님을 중심하고 영적인 왕국을 건설해 나아가게 되었기 때문에, 신약시대에 있어서의 제2 이스라엘에 의한 기독교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하나의 국토 없는 영적인 왕국인 것이다.
교구장(敎區長)은 이러한 영적 왕국 건설에 있어서 사사(士師)와 같은 사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때로는 예언자도 되어야 했고, 때로는 제사장의 역할도 해야 했으며, 때로는 교구를 통치하는 국왕과 같은 사명도 해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봉건사회(基督敎封建社會)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사사시대에 있어서는, 사탄세계인 애급(埃及)에서 출발한 이스라엘 민족은 모두 광야에서 쓰러지고 거기에서 출생한 그들의 후손들만이 오직 남아진 여호수아와 갈렙의 인도함을 따라 가나안 복지(福地)에 들어간 후에, 각 지파에게 분배된 새 땅에서 사사를 중심하고 새로운 선민(選民)을 형성하여 이스라엘 봉건사회의 기틀을 잡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구장제 기독교회시대(敎區長制基督敎會時代)에 있어서도 기독교는 사탄세계인 로마제국에서 해방된 후, 4세기에 몽고족(蒙古族)의 일파인 훈족의 서침(西侵)에 의하여 서구로 이동된 게르만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서구의 새 땅에서 게르만 민족을 새로운 선민으로 세워 기독교봉건사회(基督敎封建社會)의 기틀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애급(埃及)을 떠난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복귀노정에서,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이루기 위하여 성막(聖幕)을 메시아의 상징체인 동시에 아벨 대신의 조건물로 세웠었다는 사실은 이미 모세를 중심한 복귀섭리에서 상론(詳論)한 바이다. 그러므로 사사시대(士師時代)에 있어서의 이스라엘 민족은 사사(士師)들의 지도를 따라 성막의 뜻만을 받들어야 할 것이었는데, 이들은 가나안 7족을 멸하지 않고 그대로 남겨 둠으로써 그들로부터 악습을 받아 우상(偶像)을 섬기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에 큰 혼란을 가져왔었다.
마찬가지로 교구장제 기독교회시대에 있어서도 기독교 신도들은 교구장의 지도를 따라 메시아의 형상체인 동시에 아벨 대신의 조건물인 교회의 뜻만을 받들어야 할 것이었는데, 그들은 게르만 민족으로부터 잡도(雜道)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에 큰 혼란을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제 3 절 통일왕국시대와 기독왕국시대
통일왕국시대(統一王國時代)에 들어서면서 사사가 제1 이스라엘을 영도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하나님의 명령을 직접 받는 예언자(豫言者)와 성막이나 성전을 받드는 제사장(祭司長)과 백성을 통치하는 국왕(國王)이 정립(鼎立)하여 복귀섭리의 목적을 중심하고 각자의 지도적인 사명을 수행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실체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기독왕국시대(基督王國時代)에 있어서도, 교구장이 제2 이스라엘을 영도해 나아가던 시대는 지나고, 예언자에 해당되는 수도원(修道院)과 제사장에 해당되는 교황(敎皇)과 백성을 통치하는 국왕이 복귀섭리의 목적을 중심하고 제2 이스라엘을 지도해 나아가야만 했던 것이다.
당시의 기독교는 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로마 등의 5대 교구(敎區)로 분립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우위에 있었던 로마교구장은 다른 교구를 통할(統轄)하는 위치에 있었으므로, 특히 그를 교황이라고 부르게 되었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埃及)에서 해방되어 나오던 때의 모세의 성막이상(聖幕理想)은 통일왕국시대(統一王國時代)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국왕을 중심한 성전이상으로 나타나 왕국을 이루었었는데, 이것은 장차 예수님이 실체성전으로 오셔서 만왕의 왕이 되어 왕국을 건설하실 것의 형상노정(形象路程)이었던 것이다(사 9 : 6).
그와 마찬가지로 기독왕국시대에 있어서도, 기독교 신도들이 로마제국에서 해방되던 때 성어거스틴에 의하여 그의 기독이상(基督理想)으로서 저술되었던 ‘신국론(神國論)’이 이때에 와서 카알대제에 의하여 기독왕국(카알대제 때부터의 프랑크왕국)으로 나타났던 것인데, 이것은 장차 예수님이 만왕의 왕으로 재림하시어 왕국을 건설하실 것의 형상노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는 국왕과 교황이 하나님의 뜻을 중심하고 완전히 하나가 되어 기독이상을 실현함으로써, 예수님 이후 ‘메시아를 위한 영적 기대’ 위에서 교황을 중심하고 이루어 나왔던 국토 없는 영적 왕국과 국왕을 중심한 실체적인 왕국이 기독이상을 중심하고 하나되어야 했던 것이다. 만일 그때 그렇게 되었더라면 종교와 정치와 경제는 일치되어 ‘재림하실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이루게 되었을 것이었다.
통일왕국시대(統一王國時代)에 있어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중심인물은 예언자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현해야 할 국왕(國王)이었다. 예언자(豫言者)나 제사장(祭司長)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여 나서기 때문에 그 시대에 있어서 아벨의 입장에 서게 된다. 그러나 복귀섭리노정(復歸攝理路程)에 있어서 그는 어디까지나 영계(靈界)를 대신하여 천사장(天使長)의 입장에서 실체세계를 복귀해야 되었기 때문에, 국왕이 설 수 있는 영적인 터전을 마련하고 왕을 축복(祝福)하여 세운 후에는 그 앞에 가인의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아니 된다. 따라서 국왕은 예언자의 말씀에 의하여 국가를 통치해야 되고, 예언자는 하나의 국민의 입장에서 국왕에게 순종해야 된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있어서의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중심인물은 국왕이었던 것이다.
사실상 아브라함으로부터 800년 되던 때에, 예언자 사무엘은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축복함으로써 그를 제1 이스라엘 선민의 첫 왕으로 세웠던 것이다(삼상 8 : 19~22, 10 : 1~24). 사울왕이 사사시대(士師時代) 400년 기대 위에서 그의 재위 40년을 뜻맞게 세웠더라면, 그는 애급고역(埃及苦役) 400년과 모세의 바로궁중 40년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한 입장에 설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40일 사탄 분립기대’ 위에서 ‘믿음의 기대’를 세울 수 있었을 것이었다. 따라서 사울왕이 이 기대 위에서 메시아의 형상체인 성전(聖殿)을 건축하고 그것을 받들었더라면, 그는 모세가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에 실패하지 않고 성공하여 성전을 건축하고 그것을 받든 것과 같은 입장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선민들이 사울왕을 중심한 그 ‘믿음의 기대’ 위에서 성전을 받들고 나아가는 이 국왕을 절대로 믿고 순종하였더라면, 그들은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조성하여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이루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사울왕은 선지자(先知者) 사무엘을 통하여 내리셨던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였기 때문에(삼상 15 : 1~23)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성전을 건축하지 못한 사울왕은 바로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에 실패한 모세와 같은 입장에 놓여졌었다. 그리하여 사울왕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도 모세 때와 같이, 다윗왕 40년을 거쳐 솔로몬왕 40년에 이르러서야 그 ‘믿음의 기대’는 이루어져서 성전을 건축할 수 있게 되었었다.
마치 아브라함의 뜻이 이삭을 거쳐 야곱 때에 이루어진 것과 같이, 아브라함의 입장이기도 하였던 사울왕의 성전 건축의 뜻은 다윗왕을 거쳐 솔로몬왕 때에 이르러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솔로몬왕이 음란(淫亂)으로 흘러서 ‘실체헌제(實體獻祭)’를 위한 아벨의 위치를 떠났기 때문에 ‘실체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따라서 통일왕국시대에 이루어져야 했던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기독왕국시대(基督王國時代)에 있어서는 통일왕국시대(統一王國時代)의 모든 것을 실체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해야 되었기 때문에, 이 시대의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는 중심인물은 수도원이나 교황의 기독이상(基督理想)을 실현시켜야 할 국왕이었다. 따라서 교황은 통일왕국시대에 있어서의 예언자의 뜻을 받드는 제사장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국왕이 기독이상을 실현해 나아갈 수 있는 영적인 터전을 마련하고, 그를 축복하여 왕으로 세운 후에는 하나의 국민의 입장에서 그에게 순종해야 되고, 한편 국왕은 교황의 이상(理想)을 받들어 국민을 통치해야 될 것이었다. 사실상 이러한 섭리의 목적을 위하여 교황 레오 3세는 기원 800년에 카알대제를 축복하여 금관(金冠)을 씌움으로써 그를 제2 이스라엘 선민의 첫 왕으로 세웠던 것이다.
카알대제는 사사시대(士師時代) 400년을 실체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한 교구장제 기독교회시대(敎區長制基督敎會時代) 400년 기대 위에 섰었기 때문에, 사울왕과 같이 ‘40일 사탄 분립기대’ 위에 서게 되었었다. 따라서 카알대제가 이 기대 위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들어 기독이상(基督理想)을 실천해 나아가면, 이 시대의 ‘믿음의 기대’는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었다.
사실상 카알대제는 교황에게 축복을 받고 왕위(王位)에 오름으로써 이 기대를 이루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의 제2 이스라엘이 이러한 입장에 있는 국왕을 절대로 믿고 순종하였더라면 그때에 ‘실체기대(實體基臺)’는 세워졌을 것이요, 따라서 ‘재림하실 메시아를 위한 기대’도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이와 같이 되었어야만 ‘메시아를 위한 영적 기대’ 위에서 교황을 중심하고 세워진 영적인 왕국과 국왕을 중심한 실체적인 왕국이 하나되어, 그 터전 위에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메시아왕국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국왕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지 못함으로써 ‘실체헌제(實體獻祭)’를 하기 위한 아벨의 위치를 떠났었기 때문에 ‘실체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따라서 ‘재림하실 메시아를 위한 기대’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제 4 절 남북왕조분립시대와 동서왕조분립시대
사울왕에 의하여 시작되었던 통일왕국시대(統一王國時代)는 다윗왕을 거쳐 솔로몬왕에 이르러 그가 왕비들이 섬기는 이방인(異邦人)의 신을 섬겼으므로 (왕상 11 : 5~9), 3대 만에 가인의 입장인 10지파를 중심한 북조(北朝) 이스라엘과 아벨의 입장인 2지파를 중심한 남조(南朝) 유대로 분립되었었다. 그리하여 남북왕조분립시대(南北王朝分立時代)는 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카알대제에 의하여 시작되었던 기독왕국(基督王國)도 그 3대에 이르러 손자들 3인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 왕국은 동·서프랑크와 이태리로 3분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태리는 동프랑크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실제에 있어서는 동·서프랑크왕국으로 양분된 셈이었다. 한편 동프랑크는 오토 1세로 말미암아 크게 융흥(隆興)되어 신성로마제국이라 부르게 되었고, 로마황제의 이름으로 서구(西歐)를 통치하여 정교(政敎) 2권을 확보하려 하였었다. 이렇게 하여 동프랑크는 서프랑크에 대하여 아벨의 입장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솔로몬조(朝)의 망명객이었던 여로보암을 중심한 북조 이스라엘은 260년 간에 19왕이 경질되었고, 그들은 서로 살육하여 왕실(王室)이 9차나 변혁되었으며, 열왕(列王) 중에 선한 왕이 하나도 없었다. 따라서 남조 유대로부터 보내온 선지자(先知者) 엘리야를 통하여 갈멜산의 제단(祭壇)에 불을 내리심으로써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을 멸하셨으며(왕상 18 : 19~40), 그 외에도 엘리사, 요나, 호세아, 아모스 같은 선지자들을 보내시어 목숨을 걸고 전도(傳道)하게 하셨다. 그러나 북조 이스라엘왕국은 여전히 사신(邪神)을 숭배하며 회개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앗수르에 부쳐 멸망케 하심으로써 영원히 선민(選民)의 자격을 잃게 하셨던 것이다(왕하 17 : 17~ 23).
한편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을 중심한 남조 유대는 다윗으로부터 시드기야에 이르기까지 정통일계(正統一系)였으며, 394년 간에 걸친 20인의 왕 중에 선군(善君)이 많이 있었으나, 요시야왕 이후에는 악한 왕들이 속출하여 북조의 영향을 받음으로써 우상숭배(偶像崇拜)에 빠지게 되어 이들도 역시 바빌로니아에게 포로(捕虜)가 되고 말았었다.
이와 같이 남북왕조분립시대(南北王朝分立時代)에 있어서 이스라엘 민족이 성전이상(聖殿理想)에 배치(背馳)되는 입장에 서게 될 때마다 하나님은 계속 4대선지(四大先知)와 12소선지(十二小先知)를 보내시어 그들을 권고하여 내적 쇄신운동(刷新運動)을 일으키셨다. 그러나 그들은 선지자들의 권고에도 회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애급, 갈대아, 시리아,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등 이방인들에게 부쳐 외적 확청(廓淸)의 섭리를 하셨던 것이다.
이 시대를 실체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동서왕조분립시대(東西王朝分立時代)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교황청(敎皇廳)이 부패하매 토마스 아퀴나스, 성프란체스코 등 수도원(修道院)의 인물들이 그들을 권고하여 내적인 쇄신운동을 일으켰었다. 그러나 그들도 회개하지 않고 더욱 타락과 부패에 흘렀으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이방인들에게 부쳐 외적인 확청의 섭리를 하셨던 것이니 이것이 곧 십자군전쟁(十字軍戰爭)이었다.
예루살렘의 성지(聖地)가 칼리프제국에 속해 있었을 때에는 기독교의 순례자(巡禮者)들이 후대(厚待)를 받았었으나, 칼리프제국이 망하고 셀주크 터키가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그들은 순례자들을 학대하였으므로, 이에 분개한 역대 교황(敎皇)들은 이 성지를 회복하려고 십자군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1096년에 일어난 십자군(十字軍)은 그 후 약 200년 간에 걸쳐 7회의 원정(遠征)을 하였으나 그들은 끝내 패전을 거듭하였다.
남북왕조분립시대에 있어서 북조 이스라엘왕국과 남조 유대왕국의 백성들이 모두 이방인(異邦人)에게 포로가 되어 감으로써, 이스라엘의 군주사회는 붕괴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동서왕조분립시대(東西王朝分立時代)에 있어서도, 십자군이 이교도(異敎徒)에게 패하여 교황권이 그 권위와 신망(信望)을 완전히 잃게 되자 국민정신은 그 중심을 잃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봉건사회(封建社會)를 유지하던 영주(領主)들과 기사(騎士)들이 많이 전사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정치적인 기반을 잃고 말았으며, 또 거듭되는 패전으로 인하여 막대한 전비(戰費)를 소모하게 되어 그들은 여지없이 경제적인 곤궁에 빠지고 말았다. 여기에서 기독교군주사회(基督敎君主社會)는 드디어 붕괴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제 5 절 유대민족 포로 및 귀환시대와 교황 포로 및 귀환시대
유대민족이 불신으로 돌아가서 회개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성전이상(聖殿理想)을 복귀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시 이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마치 아브라함의 헌제(獻祭) 실수를 탕감복귀케 하시려고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사탄세계인 애급(埃及)으로 들어가서 고역(苦役)을 당하게 하셨던 것처럼, 유대민족도 사탄세계인 바빌론으로 포로 되어 가서 고역을 당하게 하셨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미 위에서 논한 바와 같이, 하나님이 기독왕국시대(基督王國時代)를 세우신 것은 교황(敎皇)과 국왕(國王)을 중심하고 ‘재림하실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여, 그 기대 위에 메시아로 재림(再臨)하시는 ‘만왕의 왕’에게 그 나라와 왕위(王位)를 인계해 드림으로써 메시아 왕국을 건설하기 위함이었다(사 9 : 6, 눅 1 : 33). 그러나 국왕과 그를 ‘실체기대(實體基臺)’의 중심인물로 세우기 위한 영적인 기대를 조성해야 할 교황들이 부패한 가운데서 끝내 회개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재림하실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지 못하였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이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새로운 섭리를 하시기 위하여 교황으로 하여금 포로가 되어 고역을 당하게 하셨던 것이다.
전에 여호야김왕을 비롯하여 다니엘과 기타 왕족들, 그리고 정부 대신(大臣)들과 관리(官吏)와 공장(工匠) 등 많은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의 왕 느부갓네살에게 포로로 잡혀 갔던 70년 기간이 있었고(렘 39 : 1~10, 왕하 24, 25장), 페르시아가 바빌로니아를 멸하고 고레스왕이 조서(詔書)를 내려 그들을 해방시킨 후 3차에 걸쳐 고향으로 귀환하여 선지자(先知者) 말라기를 중심하고 메시아를 위한 준비를 하는 민족으로 세워질 때까지의 140년 기간이 있었다. 이 시대를 실체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교황 포로 및 귀환시대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노정을 걸어야 했었다.
교황(敎皇)과 승려(僧侶)들은 그들의 부도덕(不道德)으로 말미암아 점차로 국민들의 신망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그 위에 십자군전쟁(十字軍戰爭)에 패함으로 인하여 교황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게 되었었다. 한편 십자군전쟁 이후 봉건제도(封建制度)가 몰락되고 근대국가가 성립되자 점차로 왕권(王權)이 신장되면서 교황과 국왕과의 충돌은 격화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불왕(佛王) 필립 4세와 충돌하여 일시 그에게 금고(禁錮)를 당하는 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그 후 1대를 지나서 1305년에 교황으로 피선된 클레멘스 5세는 1309년에 교황청(敎皇廳)을 로마로부터 남불(南佛)의 아비뇽으로 옮기었고, 거기에서 70년 간 역대의 교황들은 불왕의 구속을 받으면서 포로와 같은 생활을 하게 되었었다. 그 후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는 1377년 로마로 귀환하였다.
그가 서거(逝去)한 후에 추기경(樞機卿)들은 이태리의 바리의 감독(監督) 울바누스 6세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불인(佛人)이 다수였던 추기경들은 오래지 않아 울바누스를 배척하고, 따로이 클레멘스 7세를 교황으로 선출하여 남불 아비뇽에 또 하나의 교황청을 세우게 되었었다. 이 분리는 다음 세기에 이르러 개혁회의(改革會議)에서 해결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즉 1409년에 추기경들은 이태리의 피사에서 회의를 열어 분리되어 온 두 교황을 모두 폐위(廢位)시키고 알렉산더 5세를 정당한 교황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폐위된 두 교황이 이에 불복(不服)함으로써 일시 3인의 교황이 정립(鼎立)하게 되었었다.
그 후 다시 감독과 대감독(大監督) 외에 신학자(神學者), 왕후(王侯), 사절(使節) 등 많은 참석자로써 콘스탄트대회를 개최하여, 3인의 교황을 일제히 폐위시키고 다시 마루티누스 5세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교황 선출의 권한을 추기경들로부터 빼앗아 로마교회의 지상권(至上權)을 주장하던 이 회의에로 옮겼다(1418년). 이 회의는 그 후 스위스의 바젤에서 로마교회 기구를 입헌군주체(立憲君主體)로 할 목적으로 열렸었다.
그러나 교황은 회중(會衆)들의 이러한 주관성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유회(流會)시키려고까지 하였다. 그래도 교황당(敎皇黨) 이외의 의원들은 개회를 강행하였으나 1449년에 저절로 해산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로마교회 내에 입헌군주체를 수립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1309년 이래 잃어버렸던 교황전정(敎皇專政)의 기능을 회복하였다.
14세기의 제회의(諸會議)의 지도자들은 평신도들을 대표로 세우고, 이 회의에 최고의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부패한 교황과 승려들을 제거하려 하였었다. 그러나 교황권(敎皇權)은 그들의 유수(幽囚) 전과 같은 입장으로 돌아갔을 뿐 아니라, 위클리프나 후스 같은 개혁정신(改革精神)을 가진 지도자들을 극형에 처하게 되었으므로, 이때부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운동(宗敎改革運動)은 싹트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교황이 1309년으로부터 70년 간 남불(南佛) 아비뇽에 유수되었다가 3교황으로 분립되었던 노정을 거쳐 다시 로마교회를 중심한 교황전정(敎皇專政)으로 복귀된 후, 1517년에 루터를 중심하고 종교개혁(宗敎改革)이 일어날 때까지의 약 210년 간은, 유대민족이 바빌론에 70년 간 포로 되었다가 3차에 걸쳐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말라기를 중심하고 정교(政敎)의 쇄신(刷新)을 일으킬 때까지의 210년 간을 실체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蕩減復歸)하는 기간이었던 것이다.
제 6 절 메시아 강림준비시대와 메시아 재강림준비시대
이스라엘 민족은 바빌론 포로(捕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후, 메시아 강림준비시대(降臨準備時代) 400년을 지나서야 예수님을 맞았다. 그러므로 이것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는 기독교 신도들도 교황이 아비뇽의 포로생활에서 로마로 돌아온 후 메시아 재강림준비시대(再降臨準備時代) 400년을 지나서야 재림 예수님을 맞을 수 있는 것이다.
40일 사탄 분립기간(分立期間)으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섭리가 계속적인 사탄의 침범으로 인하여 연장을 거듭하여 내려왔던 아담 이후 4천년 복귀섭리역사(復歸攝理歷史)의 종적인 탕감조건을, 이 역사의 최종적인 한 시대에 횡적으로 탕감복귀(蕩減復歸)하기 위하여 메시아 강림준비시대(降臨準備時代)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실체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는, 아담으로부터 6천년 복귀섭리역사의 종적인 탕감조건들을 이 역사의 최종적인 한 시대에 횡적으로 탕감복귀하기 위한 메시아 재강림준비시대(再降臨準備時代)가 없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은 느부갓네살왕에 의하여 파괴되었던 성전(聖殿)을 신축하고, 또 말라기 선지(先知)의 영도에 의하여 사신(邪神)을 숭배하던 과거의 죄를 회개하면서 율법(律法)을 공부하고 신앙의 쇄신운동을 일으킴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복귀해 나왔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황이 로마로 귀환한 후의 중세 기독교인들은, 루터 등을 중심하고 종교의 개혁운동을 일으키어 중세 암흑시대의 암운(暗雲)을 뚫고 새로운 복음(福音)의 빛을 따라 신앙의 새로운 길을 개척함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복귀해 나왔던 것이다.
야곱이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귀환하여 애급(埃及)으로 들어갈 때까지의 약 40년 준비기간(準備期間)을 형상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시대가 메시아 강림준비시대였다. 그리고 이 시대를 다시 실체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하는 시대가 메시아 재강림준비시대인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의 모든 기독교 신도들은 마치 애급에서 요셉을 만날 때까지의 야곱가정이나 또 예수님을 맞을 때까지의 이스라엘 민족과 같이 갖은 파란과 고난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아니 된다.
복귀섭리시대(復歸攝理時代)는 율법(律法)과 제사(祭祀) 등의 외적인 조건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세워 내려오던 시대였으므로, 메시아 강림준비시대(降臨準備時代)에 있어서의 제1 이스라엘은 페르시아, 희랍(希臘), 애급, 시리아, 로마 등의 이방(異邦)에 속방되어 외적인 고난의 길을 밟았던 것이다.
그러나 복귀섭리연장시대(復歸攝理延長時代)는 예수님의 말씀을 중심한 기도와 신앙의 내적인 조건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세워 나온 시대이므로, 메시아 재강림준비시대(再降臨準備時代)에 있어서의 제2 이스라엘은 내적인 수난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아니 된다. 곧 이 시대에는 문예부흥(文藝復興)의 주도이념인 인문주의(人文主義)와 그에 따라 일어나는 계몽사조(啓蒙思潮), 그리고 종교개혁(宗敎改革)에 따라 부르짖게 된 신앙의 자유 등에 의한 영향으로 말미암아 종교와 사상에 일대 혼란을 일으키게 되어 기독교 신도들은 말할 수 없는 내적인 시련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강림(降臨)을 위한 400년 준비시대를 실체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蕩減復歸)하기 위하여 그의 재림(再臨)을 위한 400년 준비기간이 있게 된 것인데, 우리는 여기에서 메시아를 맞기 위한 준비기간인 이 두 시대에 대해서 각각 그 시대적인 배경과 환경이 어떻게 조성되었던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초림(初臨) 때에는 하나님이 그의 선민(選民)을 위하여 메시아가 강림하시기 430년 전에 선지자(先知者) 말라기를 보내시어 메시아가 강림하실 것을 예언케 하시고, 한편으로는 유대교를 쇄신하여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선민으로서의 준비를 갖추도록 하셨다.
한편 이방인들간에 있어서는 이와 거의 동시대에 인도의 석가모니(B.C. 565~ 485)로 하여금 인도교를 발전시켜 불도(佛道)의 새로운 터전을 개척케 하셨고, 희랍에서는 소크라테스(B.C. 470~399)로 하여금 헬라문화시대를 개척케 하셨으며, 또 동양에서는 공자(B.C. 552~479)로 하여금 유교(儒敎)로써 인륜도덕(人倫道德)을 세우게 하시는 등, 각각 그 지방과 그 민족에 적응되는 문화와 종교를 세우시어 장차 오실 메시아를 맞이하는 데 필요한 심령적인 준비를 하게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와 같이 준비된 터 위에 오셔서 기독교를 중심하고 유대교(Hebraism)를 수습하고 헬라문화(Hellenism) 및 불교(Buddhism) 유교(Confucianism) 등의 종교를 포섭함으로써, 그 종교와 문화의 전역(全域)을 하나의 기독교문화권 내(基督敎文化圈內)에 통합하려 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초림(初臨)을 앞두고 메시아 강림에 대한 준비를 위하여 섭리하셨던 그 환경 조성의 시대를 실체적인 동시성으로 탕감복귀(蕩減復歸)하기 위하여 오게 된 시대가 문예부흥시대(文藝復興時代)였다. 그러므로 문예부흥시대는 메시아 재강림(再降臨)을 위한 그 시대적인 배경과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시대였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은 정치, 경제, 문화, 과학 등 모든 면에 걸친 비약적인 발전은 모두 이 문예부흥시대로부터 급격히 시작되어 재림(再臨) 예수님을 맞을 수 있는 오늘날의 시대적인 배경과 환경을 성숙시켜 나온 것이다. 즉 예수님 때에는 로마제국의 발흥(勃興)으로 인하여 지중해(地中海)를 중심하고 형성되었던 광대한 정치적 판도와, 사통팔달(四通八達)한 교통편과, 헬라어를 중심하고 형성되었던 광범한 문화적 판도 등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중심한 이스라엘, 이스라엘을 중심한 로마, 로마를 중심한 세계에로 메시아의 사상이 급속히 확대되어 갈 수 있는 평면적인 기대(基臺)가 이미 조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의 재림(再臨) 때인 오늘날에 있어서도 열강(列强)들의 융흥으로 말미암아 자유를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民主主義)의 정치적인 판도는 전세계에 펼쳐졌고, 교통 및 통신의 비약적인 발달로 인하여 동서(東西)의 거리는 극도로 단축되었으며, 언어와 문화는 세계적으로 교류되어 메시아 재강림을 위한 사조(思潮)가 자유롭고도 신속하게 전인류의 가슴속에 흘러 들어갈 수 있도록 이미 그 평면적인 판도가 완전히 조성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메시아가 재림하시면, 그의 진리와 사상을 급속도로 전파하여 단시일 내에 세계화시키는 데 이것이 그대로 적호(適好)한 평면적 기대가 되리라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다.
제 7 절 복귀섭리로 본 역사 발전
창조원리(創造原理)에서 이미 논한 바와 같이, 지상천국(地上天國)은 완성한 사람 하나의 모양과 같은 세계인 것이다. 따라서 타락된 세계는 타락한 사람 하나의 모양을 닮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락한 사람 하나의 생활을 살펴봄으로써 인류죄악사(人類罪惡史)의 전체적인 움직임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타락(墮落)한 인간에게는 선을 지향하는 본심(本心)과 이 본심의 명령을 배반하고 악을 지향하는 사심(邪心)이 있어서, 이 두 마음이 항상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본심의 명령을 따르는 선행(善行)과 사심의 명령을 따르는 악행(惡行)이 우리들의 한 몸에서 상충되고 있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 자체 내에서 투쟁을 일으키고 있는 개체들이 횡적(橫的)으로 얽혀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사회이기 때문에 거기에도 역시 투쟁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이와 같이 투쟁으로 얽히어진 사회생활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 종적(縱的)으로 변전(變轉)하여 내려온 것이 바로 인류역사이므로, 이 역사는 필연적으로 투쟁과 전쟁으로 엮어지는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본심(本心)과 사심(邪心)의 집요한 싸움 가운데서 악을 물리치고 선을 따르려고 부단히 노력을 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행동도 점차 악행을 버리고 선을 행해 나아가는 방향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타락된 인간에게도 이와 같이 선을 지향하는 본심의 작용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복귀섭리(復歸攝理)에 대응하여 선의 목적을 이루어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들에 의하여 엮어져 내려온 역사는, 선악(善惡)이 교착(交錯)되는 와중에서도 악을 물리치고 선을 지향해 내려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역사가 지향하는 종국적인 세계는 바로 선의 목적이 이루어진 천국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투쟁이나 전쟁은 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선과 악을 분립해 나온 하나의 과정적인 현상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싸움의 결과가 일시 악의 승리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그 악의 결과로 인하여 역사는 보다 더 큰 선의 목적을 이루어 나아가는 섭리노정(攝理路程)으로 바꿔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우리는 인류역사가 하나님의 복귀섭리에 의하여 부단히 선과 악의 분립역사(分立役事)를 되풀이하면서 선을 지향하고 발전하여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인간이 사탄과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맺음으로 말미암아 사탄은 타락된 인간을 중심하고 장차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것과 같은 형의 세계를 앞장서 이루어 나왔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인류역사는 원리형(原理型)의 비원리세계(非原理世界)를 형성하여 나온 것이다.
따라서 인류역사의 종말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지상천국(地上天國)을 복귀하시기 전에 사탄을 중심으로 한 그와 같은 형의 비원리세계가 먼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공산주의세계(共産主義世界)인 것이다. 사탄은 이처럼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뜻을 항상 앞질러 비원리적으로 이루어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복귀섭리노정(復歸攝理路程)에서는 참것이 나타나기 전에 거짓 것이 먼저 참것과 같은 모양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앞서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을 예언하신 성서의 말씀은 이러한 원리로써만 해명될 수 있는 것이다.
Ⅰ. 복귀섭리시대에 있어서의 역사 발전
타락된 인간들에 의하여 처음으로 이루어진 사회는 원시공동사회(原始共同社會)였다. 이 사회는 사탄을 중심하고 서로가 유무상통(有無相通)하던 사회로서, 원래 하나님이 완성한 인간을 중심하고 이루려 하셨던 공생공영공의주의사회(共生共榮共義主義社會)를 사탄이 앞질러 비원리적으로 이루어 놓은 것이었다. 만약 이 사회에 투쟁도 분열도 없었다면 이 사회는 그대로 영속(永續)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타락인간은 그 개체에 있어 두 마음이 서로 싸우고, 또 이 마음의 싸움이 행동으로 나타나서 개체와 개체가 서로 싸우게 되므로, 원시공동사회가 그대로 평화로이 유지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 사회가 경제적인 이해관계를 서로 달리하는 사회에로 발전함에 따라서, 그 싸움이 더욱 크게 전개되어 온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복귀섭리(復歸攝理)에 대응하려는 인간의 본심(本心)의 작용에 의하여 사탄을 중심하고 조성되었던 원시공동사회에는 일찍부터 싸움에 의한 분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사탄을 중심한 인류 죄악사의 발전과정을 보면, 원시공동사회(原始共同社會)에서 분열된 인간을 중심하고 씨족사회(氏族社會)가 형성되었고, 그것이 더 성장하여 봉건사회(封建社會)를 이루었으며, 그 판도와 주권을 더욱 확장하여 군주사회(君主社會)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것은 장차 하나님이 이 죄악세계에서 선한 개체를 부르시어 그들을 중심하고 선의 씨족사회를 세우고, 나아가 선의 봉건사회를 이루어 가지고 선의 왕국을 건설함으로써 메시아를 맞기 위한 선의 판도와 주권을 수립하려 하셨기 때문에, 사탄이 또한 이것을 먼저 알아 가지고 그러한 형의 노정을 앞질러 걸어 나온 것이었다.
실상 하나님은 이러한 죄악세계에서 선의 중심으로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그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받들 수 있는 자녀를 번식케 함으로써 이스라엘 씨족사회를 세우셨던 것이다. 그 후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애급(埃及)에 들어가서 씨족으로부터 부족으로 발전되었으며, 그들이 가나안으로 돌아온 후에는 사사시대(士師時代)를 이루었던 것인데, 이 사사를 중심한 사회가 바로 이스라엘 봉건사회였다.
그러면 이 사회를 어찌하여 봉건사회라고 하는가? 봉건사회의 특성은 봉사와 복종을 전제로 하는 주종관계(主從關係)에 의한 정치제도와 봉토(封土)를 중심한 봉쇄적인 자급자족의 경제체제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사시대는 바로 이러한 성격의 사회였던 것이다. 즉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의 각 지파(支派)에게는 땅이 분배되었고, 그 지파들은 대영주(大領主)와 같은 위치에 있었던 사사(士師)를 중심하고 봉건사회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를 이스라엘 봉건사회라고 한다.
봉건사회(封建社會)의 백성들은 그 사회의 성격상 그 영주(領主)의 사상(思想)과 영도(領導)에 절대 순종굴복하였다. 따라서 그 영주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서 있는 한 그 백성들은 자연히 그를 따라서 하늘편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또 그들은 이와 같이 주종관계에 의한 봉쇄적인 정치와 경제의 사회제도하에 있었기 때문에, 사탄의 외침(外侵)을 당하지 않는 환경 가운데서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따라서 씨족사회(氏族社會)가 봉건사회로 발전하게 된 것은, 사탄의 소유를 하늘편으로 빼앗아 넘김으로써 하늘편 주권에 속하는 보다 큰 판도를 형성하여 가지고 사탄의 침범을 막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기 때문에, 또 그것을 안 사탄은 여기에 대비하여 한 걸음 앞질러서 먼저 사탄편 봉건사회를 이룸으로써 사탄주권을 유지하려 하였던 것이다.
또 한편 봉건사회는 보다 더 큰 주권과 판도의 군주사회(君主社會)를 이루기 위한 기대를 조성하기 위하여 오게 되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 봉건사회로써 사탄편의 침범을 막을 수 있는 소단위의 하늘편 주권과 백성과 경제적인 판도를 형성한 후에, 다시 이것들을 통합하여 보다 더 큰 주권과 백성과 경제적인 판도로 확장하고 강화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군주사회가 오게 되었던 것이니, 이것이 바로 사울왕으로 시작된 통일왕국시대(統一王國時代)였다.
이미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만왕의 왕으로 오신 분이었다(계 11 : 15).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의 군주사회를 형성하신 것은, 장차 메시아가 오셔서 만왕의 왕으로 군림하실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이러한 섭리 밑에서 이스라엘 군주사회를 세우려 하셨었기 때문에, 사탄편에서는 또다시 이것을 앞질러 먼저 사탄을 중심한 군주사회(君主社會)를 형성함으로써 하늘의 섭리를 막아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통일왕국시대(統一王國時代)가 오기 전에 이미 사탄세계에서는 애급왕국(埃及王國)이 기원전 수십 세기에 제1왕조를 세워 그후 30왕조나 계승되었었고, 고 바빌로니아왕국은 기원전 18세기 함무라비왕 때 벌써 전메소포타미아를 통일하였던 것이며, 힛타이트왕국은 기원전 14세기에 시리아를 중심으로 동방(東方)의 최강국(最强國)이 되었었다. 그리하여 사탄편 세계에서도 역시 하나님의 복귀섭리(復歸攝理)에 대응하는 인간 본심의 작용에 의하여 보다 선한 왕국과 보다 악한 왕국이 서로 싸우면서 왕국을 단위로 한 분립역사(分立役事)를 일으켜 나왔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솔로몬왕이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받들었더라면, 그는 애급, 메소포타미아, 크레타(혹은 미노아) 등 3대 문명(三大文明)을 흡수한 문화적인 사회환경에서 그의 탁월한 정치능력을 발휘하여 동방제국(東方諸國)을 통일하였을 것이었고, 나아가서는 메시아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세계적인 판도를 형성하였을 것이었다. 그러나 솔로몬왕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이 군주사회를 붕괴시키는 섭리를 하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통일왕국시대의 왕들이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워 하나님의 주권을 복귀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은 이 왕국을 남북(南北) 두 왕조로 분립하셨다. 그리하여 하늘 뜻을 배반하였던 북조(北朝)는 이방인 앗시리아(애급, 바빌로니아, 힛타이트 등의 왕국이 쇠미해짐에 따라 이 앗시리아왕국이 강대해져서 기원전 8세기에 애급을 포함한 오리엔트의 중심부를 정복하여 최초의 세계제국을 건설하였었다)에 부쳐 멸망하게 하셨고, 하늘 뜻을 받들던 남조(南朝) 유대도 얼마 안 가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게 되자 신바빌로니아(앗시리아제국이 멸망한 후 갈대아인에 의하여 바빌론을 수도로 하여 신바빌로니아왕국(혹은 갈대아왕국)이 창건되었었다)에 부쳐서 멸망하게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유대왕국을 멸하신 후, 메시아가 강림하실 때까지 유대민족을 여러 이방(異邦)들에게 속하게 하심으로써 이 민족의 왕위를 비워 두셨다. 특히 유대민족을 민주주의(民主主義)의 기틀이 될 헬라문명권 내에 속방(屬邦)이 되게 하심으로써, 장차 메시아가 강림하실 때 유대민족이 그를 환영하기만 하면 민의(民意)에 의하여서 언제든지 메시아가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민주주의형의 사회를 이루어 놓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민의는 예수님을 왕위에 올려 세우지 못하고 그를 십자가에 살해하고 말았으므로, 이것으로써 아브라함의 혈통적인 후손을 중심하고 이루려 하셨던 2천년의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은 영적으로만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Ⅱ. 복귀섭리연장시대에 있어서의 역사 발전
1. 복귀섭리와 서양사
기독교(基督敎)를 박해하던 로마제국은 4세기 말에 이르러 드디어 돌아가신 예수님 앞에 굴복하고, 기독교를 국교(國敎)로 정하게 되었었다. 그러나 당초에 유대민족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모시어 하나가 되었더라면, 로마제국을 중심하고 지중해를 기반으로 한 고대 통일세계는 응당 살아 계신 예수님에게 감화되어, 그를 왕으로 모시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왕국을 이루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유대민족은 불신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멸망하였고, 메시아왕국을 위한 터전이 되었어야 했던 로마제국도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여 서기 476년에는 서로마가 게르만의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하여 패망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원한의 땅 유대에서 서로마의 판도였던 서구(西歐)로 옮겨지게 되었다.
따라서 예수님 이후에 있어서의 기독교에 의한 영적 복귀섭리는 서구를 발판으로 하고 이루어 나왔기 때문에, 이 시대의 복귀섭리역사는 서구에서만 전형노정(典型路程)을 따라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유물사관(唯物史觀)에서 논하고 있는 역사발전 과정도 서구의 역사에서만 적응되고 있는 바, 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되어 서구를 중심한 기독교사는 복귀섭리연장시대(復歸攝理延長時代)를 형성한 중심사료(中心史料)가 된 것이다.
2. 종교사와 경제사와 정치사의 상호관계
하나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유형(有形) 무형(無形)의 두 세계를 주관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육신(肉身)과 영인체(靈人體)의 두 부분으로써 인간을 창조하셨다 함은 이미 창조원리(創造原理)에서 논술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이 타락되지 않았더라면 그의 영인체와 육신이 함께 성장하여 완성됨으로써 영육 양면의 지성(知性)이 동시에 지상의 육신생활 가운데서 완전한 조화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됨으로 인하여 영육 양면의 무지에 빠지게 되었었다. 여기에서 인간의 영적인 무지는 종교에 의하여, 그 육적인 무지는 과학에 의하여 계발(啓發)되어 나왔던 것이니, 이에 관해서는 이미 전편 제3장 제5절 Ⅰ에서 논하였다.
그런데 영적인 무지는 종교로써 타락인간 가운데 잠재해 있는 그 본심(本心)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그들이 보이지 않는 원인적인 세계를 찾아 나아감에 따라 점차 계발되어 왔다. 그러나 종교는 누구나 다 긴절(緊切)한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적인 면의 계발은 어느 특수한 인간에 있어서는 비약적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대단히 완만한 것이다. 이것은 종교가 세계적으로 보편화되어 있는 오늘에 있어서도 영적인 면에서는 고대인(古代人)이나 대차(大差)없는 인간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로써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육적인 무지는 누구나 인식할 수 있는 결과의 세계, 즉 자연계(육계)에 대한 것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것으로써 계발되어 왔다. 그리고 과학은 현실을 타개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긴요하다. 그러므로 육적인 무지에 대한 계발은 급진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
이렇듯 찾아가는 대상이 종교에 있어서는 보이지 않는 원인(原因)의 세계이므로 초현실적(超現實的)인 것인 데 반하여 과학에 있어서는 보이는 결과(結果)의 세계, 즉 물질세계(物質世界)로서 현실적인 것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종교와 과학은 이론적으로 타협할 수 없는 것으로 상충되어 왔다. 그뿐 아니라 피조세계(被造世界)의 주권을 갖고 있는 사탄이 현실생활을 통하여 인간에게 침범하는 관계로, 지금까지 종교의 길은 현실을 버리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기 때문에, 현실을 추구하는 과학과 서로 조화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다음 장 제1절에서 상세히 논급하겠거니와, 하나님이 원래 인간의 외적인 육신(肉身)을 먼저 창조하시고 다음으로 내적인 영인체(靈人體)를 창조하셨기 때문에(창 2 : 7), 재창조 원칙(再創造原則)에 의한 복귀섭리(復歸攝理)도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복귀해 가는 과정을 밟게 된다. 이러한 섭리적 원칙으로 보더라도 과학과 종교가 서로 조화될 수 없는 발전과정을 밟아 나온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부조화(不調和)는 종교와 경제의 관계에 있어서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경제도 역시 과학과 같이 현실세계에 속하는 것으로서, 더욱이 과학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로 인하여 하나님의 내적인 섭리에 의한 종교사(宗敎史)와 그 외적인 섭리에 의한 경제사(經濟史)는 그 발전에 있어서 서로 방향과 진도를 달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전형노정(典型路程)을 밟아 온 서구에 있어서의 역사발전을 섭리적인 면에서 파악하기 위하여는 기독교사(基督敎史)와 경제사를 따로 갈라 가지고 고찰해 보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런데 종교와 과학이 그러하듯이, 종교와 경제도 타락인간(墮落人間)의 내외 양면의 생활을 각각 분담하여 복귀해야 될 사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전혀 관계없이 발전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와 과학, 따라서 종교와 경제는 그 발전과정에 있어서 서로 상충적인 면을 지니면서도, 우리의 사회생활과 결부되어 각각 기독교사와 경제사를 형성해 온 것이다.
그러면 그것들은 우리의 사회생활과 어떻게 결뉴(結紐)될 수 있었던가? 그것은 바로 정치에 의해서였다. 기독교화했던 서구(西歐)에서였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서구에 있어서의 정치는 급진적인 과학의 발달에 따르는 경제발전과, 복귀섭리의 뚜렷한 방향을 잡지 못하고 헤맸던 기독교의 움직임을 사회생활 가운데서 조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정치사(政治史)는 종교와 경제를 조화시키려는 또 하나의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복귀섭리를 위한 역사의 발전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하여는 정치사도 역시 별도로 고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에 대한 실례로서, 17세기 말엽에 있어서의 서구(西歐)의 역사를 놓고 그 발전과정을 고찰해 보자.
먼저 종교사(宗敎史)의 면에서 살펴보면, 이 시대에는 이미 기독교민주주의사회(基督敎民主主義社會)가 형성되어 있었다. 즉 1517년의 종교개혁(宗敎改革)으로 인하여 교황이 독재하던 영적인 왕국이 붕괴됨으로써 중세인들은 교황에 예속되어 있던 신앙생활에서 해방되어 누구나 성서를 중심하고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었다.
그러나 정치사(政治史)의 면에서 보면 이 시대에는 전제군주사회(專制君主社會)가 대두되어 있었고, 경제사(經濟史)의 면에서는 아직도 장원제도(莊園制度)에 의한 봉건사회(封建社會)가 엄존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동시대의 동사회가 종교면에서는 민주주의사회가 되고, 정치면에서는 군주주의사회가 되며, 경제면에서는 봉건주의사회가 되기 때문에 복귀섭리의 입장에서 이 시대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하여는 그 발전과정을 각각 별도로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복귀섭리시대(구약시대)에 있어서의 역사 발전은 어찌하여 그러한 과정을 밟아 나오지 않았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고대사회(古代社會)에 있어서는 과학의 발달이 거의 정돈상태(停頓狀態)에 있었기 때문에 경제발전도 역시 그러하였다.
아직도 생활양식이 분화되기 전인 구약시대(舊約時代)의 이스라엘 민족은 지도자들의 명령에 의하여 엄격한 율법(律法)에 추종하는 주종관계(主從關係)의 사회제도하에서 단순한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종교생활은 곧 그들의 사회생활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에는 종교와 정치와 경제가 분립된 발전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3. 씨족사회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복귀섭리연장시대(신약시대)에 있어서의 종교와 정치와 경제 등의 각 부면으로 본 역사발전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사탄을 중심한 원시공동사회(原始共同社會)는 하나님의 복귀섭리(復歸攝理)에 대응하는 인간의 본심(本心)의 작용에 의하여 분열되어, 그중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인간이 분립됨으로써 하늘편 씨족사회(氏族社會)가 형성되었다 함은 이미 위에서 밝힌 바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살해한 유대민족은 이미 사탄편 계열로 전락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사회를 그대로 두시고는 복귀섭리를 할 수 없으셨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 사회를 분열시켜 그 가운데서 독실한 기독교 신도들을 부르시어 그들을 중심하고 기독교씨족사회(基督敎氏族社會)를 세우셨던 것이다.
구약시대에 있어서 야곱의 12자식을 중심한 70가족이 이스라엘 씨족사회를 형성하여 섭리노정(攝理路程)을 출발했던 것과 같이, 신약시대에 있어서는 예수님을 중심한 12제자와 70문도가 기독교씨족사회를 형성하여 섭리노정을 출발했던 것이다. 기독교씨족사회는 원시기독교사회(原始基督敎社會)였기 때문에 그때는 아직도 정치나 경제에 있어서의 어떠한 제도가 필요하지 않았던 시대였다. 따라서 이 시대에는 종교와 정치와 경제가 분립된 발전을 할 수 없었다.
기독교씨족사회(基督敎氏族社會)는 지중해를 기반으로 한 고대 통일세계 안에서 로마제국의 극심한 박해를 받아 가면서 번성하여 기독교부족사회(基督敎部族社會)를 형성하는 데 이르렀었다. 그리고 4세기 후반으로부터 시작되었던 민족들의 대이동에 의하여 서로마제국은 드디어 476년에 쇠망(衰亡)하였고, 그 판도 안으로 이동해 온 게르만 민족에게 기독교가 침투됨으로써 그들을 중심하고 광범한 기독교사회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4. 봉건사회
역사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씨족사회(氏族社會) 다음에 오는 것은 봉건사회(封建社會)인 것이다. 그리하여 서로마제국의 멸망을 전후하여 왕권(王權)이 쇠미해지고 국가가 무질서한 상태에 빠졌을 때 봉건사회는 형성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서구의 기독교사회는 종교와 정치와 경제가 분화되어 각각 상이(相異)한 발전을 해 나아가게 되었다.
봉건사회는 대·중·소의 영주(領主)와 기사(騎士)들 사이에 복종과 봉사를 전제로 하고 맺어진 주종관계에 의한 정치제도(政治制度)와 장원제도(莊園制度)에 의한 봉쇄적인 자급자족의 경제제도로써 형성되었었다. 국토는 많은 영주들에 의하여 분할되었고, 국왕은 사실상 영주 중의 하나였으므로 국왕의 권력도 지방분권적이었다. 영주들은 상부로부터 은대지(恩貸地)로 토지를 분배받아 그들의 독립 영지(領地)를 이루고 그 안에서 재판권까지 행사하였었다. 따라서 이 영지는 거의 국가권력을 떠난 사령(私領)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되어진 사령을 장원(莊園)이라고 한다.
자작농(自作農)의 하민(下民)들이 주권자들의 보호를 받기 위하여 자기의 소유지를 영주 또는 사원(寺院)에 기증하고, 그 토지를 다시 은대지로 대여받아서 된 장원도 있었다. 이와 같이 되어 장원은 전국에 퍼져 있었던 것이다. 최하급의 기사는 하나의 장원을 할여받아 영주에게 사병(私兵)으로서 종사하였지만, 국왕이나 영주는 수백 수천의 장원을 소유했던 것이다.
종교면에서도 그것은 기독교를 중심하고 위에서 논한 봉건사회(封建社會)와 동일한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니, 이것을 기독교봉건사회(基督敎封建社會)라고 한다. 즉 교구장(敎區長), 대주교(大主敎), 주교(主敎)는 대·중·소의 영주에 해당되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국왕이 영주 중의 하나였던 것과 같이 교황도 교구장 중의 하나였다. 거기에도 절대적인 주종관계에 의한 종교적인 정치제도가 있었고, 주교들은 신자들로부터 기증된 봉토(封土)를 가지게 되어 그들은 봉건적 계급층들 중에서 유력한 지위를 가지고 있던 영주들이기도 하였다.
다음으로 경제면에서 이 시대를 고찰하여 본다면, 이 시대는 고대 노예제도(奴隸制度)에서 장원제도(莊園制度)로 옮겨진 시대였다. 따라서 평민들이 이때부터 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시대의 토지제도에 의한 신분은 대체로 지주, 자작농, 농노(반자유 신분), 노예(부자유 신분) 등의 4계급으로 갈라져 있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게르만 민족을 새로운 선민(選民)으로 교화(敎化)하여 봉건사회를 수립함으로써 쇠망한 서로마의 터전에다 종교와 정치와 경제의 3면으로 소단위의 하늘편 판도들을 강화하여, 장차 하늘편 왕국을 건설하기 위한 터전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5. 군주사회와 제국주의사회
역사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봉건사회 다음에 오는 것은 군주사회(君主社會)인 것이다. 그러면 이때의 서구(西歐)에 있어서의 정치면에서 본 군주사회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서구에 이동된 게르만 민족이 세웠던 국가들은 모두 그 존립기간(存立期間)이 짧았었으나, 프랑크왕국만은 오래도록 존속되었다. 프랑크는 서게르만의 한 부족이었는데, 그가 메로빙왕조를 세운 후 기독교(基督敎)와 결합하고 로마문명을 흡수하여 서구에다 게르만적인 로마풍의 세계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 왕조(王朝)가 몰락한 후 카알 마르텔은 서침(西侵)한 아라비아인을 물리쳐 세력을 폈고, 그의 아들 피핀은 카롤링왕조를 세웠다. 피핀의 아들 카알대제는 일찍부터 성어거스틴의 ‘신국론(神國論)’을 숭상하였었는데, 왕위(王位)에 오르자 그는 어거스틴의 ‘신국론’을 국가이념으로 하는 군주국가(君主國家)를 세우려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카알대제는 중부유럽을 통일하고, 민족 대이동으로 혼란된 서구를 안정시켜서 강력한 프랑크왕국을 확립하였었다.
다음으로 종교면에 있어서 기독교봉건사회(基督敎封建社會)에 뒤따라 온 기독교군주사회(基督敎君主社會)는 ‘메시아를 위한 영적 기대’ 위에서 교황(敎皇)을 중심하고 세워졌던 국토 없는 영적 왕국사회였다. 그리고 교황 레오 3세가 기원 800년에 카알대제를 축복하고, 그에게 황제(皇帝)의 관을 수여하여 천적(天的)인 기업을 상속함으로써, 교황을 중심하고 이루어진 영적인 왕국과 정치적으로 형성된 프랑크왕국이 하나되어 기독왕국(基督王國)을 이루었던 것이다.
기독왕국시대(基督王國時代)는 구약시대의 통일왕국시대(統一王國時代)와 동시성의 시대였다. 이처럼 봉건시대(封建時代)에 뒤따라 왕국시대가 왔던 것은 봉건사회를 통합함으로써 더욱 큰 하늘편의 주권과 백성과 판도를 형성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위에서 이미 논한 바와 같이, 천사장(天使長)의 입장에서 실체세계(實體世界)를 복귀하기 위한 터전을 마련해 온 교황은 국왕을 축복한 후에 가인의 입장에서 그에게 순종하고, 또 국왕은 교황의 이념에 따라 메시아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를 하여 기독왕국을 완전히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세웠더라면, 이 시대가 바로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말세(末世)가 될 것이었다. 이렇게 되어 그때까지 서로 타협을 보지 못하고 상충되어 왔던 종교와 과학을 하나의 과제로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진리가 나왔더라면, 그때 바로 종교와 정치와 경제가 하나의 이념을 중심하고 완전히 일치된 방향으로 발전함으로써, 이 터전 위에서 ‘재림하실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왕국시대가 옴으로써 봉건시대는 그때에 완전히 끝나야만 할 것이었다. 그러나 교황이나 국왕들이 모두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게 됨에 따라서, 카알대제의 본래의 이상(理想)을 실현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완강한 봉건제도(封建制度)의 기틀은 무너지지 않고 그 후 오래도록 존속하게 되었었다.
따라서 종교와 정치와 경제가 여전히 서로 분립됨으로써, 교황을 중심한 영적인 왕국과 국왕을 중심한 실체적인 왕국도 여전히 분립되어 상충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었다.
이와 같이 되어 카알대제는 원숙한 봉건제도의 터전 위에 왕국을 건설하였으나 그 장벽을 무너뜨릴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실상 일개 대영주(大領主)의 입장에 불과하였다. 기독왕국(基督王國)이 이렇듯 재림하시는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왕국을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봉건제도는 점점 더 강화되어 정치면에서의 봉건계급사회(封建階級社會)는 전제군주사회(專制君主社會)가 일어날 때까지 전성(全盛)하였다.
17세기 중엽부터 봉건계급이 몰락됨에 따라 지방으로 분할되었던 영주들의 권력은 국왕을 중심하고 중앙으로 집중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을 정치이념으로 하고 군림한 국왕은 절대의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국왕이 봉건계급사회의 영주의 입장을 벗어나 정치면에서의 군주사회(君主社會)를 사실상 형성하였던 것은 17세기 중엽으로부터 1789년 불란서혁명(佛蘭西革命)이 일어날 때까지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종교사의 입장에서 본 기독교군주사회(基督敎君主社會)의 귀추는 어떠하였던가? 이 시대의 교황들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서지 못하고 세속화(世俗化)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심령적인 면에서 쇠퇴의 길을 밟아 가게 되었었다. 더구나 십자군전쟁(十字軍戰爭)에 패함으로 말미암아 교황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고, 한편 또 교황이 남불(南佛) 아비뇽에 유수(幽囚)됨으로써 그들은 허명무실(虛名無實)한 입장에 떨어지게 되었었다. 그리하여 교황을 중심한 영적인 왕국이었던 기독교군주사회는 1517년 종교개혁(宗敎改革)이 일어날 때까지 존속되었던 것이다.
이 시대의 경제면에서의 발전과정을 보면, 봉건적 경제제도는 봉건적인 정치제도가 몰락되고 중앙집권화한 전제군주사회에 있어서도 의연히 존속되어 불란서혁명 때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농업경제(農業經濟)의 면에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자본주의화해 가던 다른 경제면에 있어서도 봉건제도의 영역을 넘을 수 없었다.
즉 자영농민(自營農民)들도 봉건 영주의 지배에 대항하기 위하여 국왕의 권력에 의뢰하였으나 그들도 봉건제도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또 매뉴팩처(manufacture)의 경영자들도 봉건적인 분열이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중앙집권의 국왕과 결탁하였으나 결국 그들도 역시 봉건화한 상업자본가(商業資本家)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봉건사회(封建社會)에 뒤이어 오는 것이 군주사회(君主社會)라면, 경제면에 있어서의 봉건사회에 뒤이어 오는 것은 무엇일 것인가?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사회(資本主義社會)와 그 뒤에 따라오는 제국주의사회(帝國主義社會)인 것이다. 국정(國政)에 대한 독재가 군주주의의 특색인 것같이, 금융자본(金融資本)에 대한 독점이 자본주의 특히 제국주의의 특색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17세기 중엽 전제군주사회(專制君主社會)가 시작될 무렵부터 싹이 터 영국의 산업혁명기(産業革命期)로부터는 점차 원숙기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자본주의사회가 오게 된 것은 봉건적인 경제제도에 의하여 확보된 소단위의 경제기대(經濟基臺)를 더 큰 기대로 확립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세계적인 경제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 자본주의는 제국주의 단계로 이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기억해야 될 것은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전형노정(典型路程)은 서구(西歐)를 중심하고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논하는 제국주의도 서구를 중심하고 전개된 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서구에서 팽창된 제국주의사상(帝國主義思想)은 서구의 각 기독교국가로 하여금 제1차 세계대전(第一次世界大戰)을 전후하여 지구의 전역에 걸쳐 식민지를 획득하게 하였다. 이렇게 되어 세계는 급진적으로 기독교문화권(基督敎文化圈)으로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6.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군주주의시대(君主主義時代)에 뒤이어 온 것은 민주주의시대(民主主義時代)였다. 그런데 군주주의시대가 오게 되었던 이유는 이미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장차 메시아를 왕으로 모실 수 있는 왕국을 건설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 시대가 그러한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으므로, 하나님은 이 사회를 깨뜨리고 메시아의 왕국을 재건하기 위한 새로운 섭리를 하시기 위하여 민주주의를 세우신 것이다.
민주주의(民主主義)는 주권을 인민(人民)에게 둠으로써, 인민이 그 민의(民意)를 따라 인민을 위한 정치를 하는 주의를 말한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메시아왕국을 건설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군주주의(君主主義)의 독재를 깨뜨리고, 메시아를 왕으로 모시기 위한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제도를 세우려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인간은 역사가 흐름에 따라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시대적인 혜택을 받아서 그 심령(心靈)이 점차 밝아지게 되므로, 이 섭리에 대응하는 인간의 본심(本心)은 자기도 모르게 종교를 찾게 되고, 또 종교를 찾는 그 본심은 결국 하나님이 최종적인 종교로 세우시고 섭리하시는 기독교를 찾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가 하나의 기독교문화권(基督敎文化圈)을 형성해 가고 있는 원인은 실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역사가 종말에 가까워 갈수록 민의는 점차 기독교적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민의에 따르는 민주정체(民主政體)도 또한 기독교적으로 변이(變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와 같이 되어 기독정신(基督精神)으로 원숙한 민주정체의 사회로 메시아가 재림(再臨)하시면, 그는 민의에 의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지상에 세워 지상천국(地上天國)을 복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결국 사탄편의 독재를 없이 하고,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중심한 하나님의 주권을 민의에 의하여 복귀하시려는 최종적인 섭리에서 나온 주의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18세기 말엽에 이르러 전제군주주의(專制君主主義)에 대항하여 일어난 민주주의(民主主義)는 영(英)·미(美)와 불란서(佛蘭西)에서 민주주의 혁명을 일으키어 군주사회(君主社會)를 붕괴하고 민주사회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우리는 위에서 역사발전의 관점에서 민주주의를 고찰하였거니와, 히브리사상과 헬라사상의 섭리적인 흐름으로 본 민주주의에 대하여는 다음 장으로 미루기로 한다.
다음으로 종교면에서의 역사발전 과정에 있어서도, 1517년 종교개혁(宗敎改革)으로 인하여 교황을 중심한 국토 없는 영적인 왕국이 붕괴된 후에 기독교민주주의시대(基督敎民主主義時代)가 왔다. 기독교민주주의는 종교개혁을 일으킴으로써 교황이 독재하여 내려오던 영적인 왕국을 붕괴시켰다.
원래 교황을 중심한 이 왕국은 위에서 이미 논한 바와 같이 교황이 국왕과 하나가 되어 재림하실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왕국을 이루어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교황이 이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마치 전제군주사회(專制君主社會)의 독재적인 주권을 깨뜨리기 위하여 민주주의가 나오게 되었던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교황의 독재적인 주권을 깨뜨리기 위하여 기독교민주주의가 나오게 된 것이다.
따라서 종교개혁 이후에는 교황이나 승려를 통하지 않고 각자가 성서를 중심하고 자유롭게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는 기독교민주주의시대가 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종교면에 있어서도 신도들이 어디에도 예속되지 않고 자유의지(自由意志)에 의하여 신앙길을 찾아갈 수 있는 시대에로 들어왔다. 이리하여 기독교민주주의(基督敎民主主義)는 장차 메시아가 어떠한 형태로 재림(再臨)하신다 하더라도 그를 자유롭게 찾아갈 수 있는 기독교적인 사회환경을 조성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경제사(經濟史)의 발전과정에 있어서도 그 발전법칙에 의하여 제국주의(帝國主義)를 깨뜨리고 민주주의적인 경제사회(經濟社會)를 이룩하기 위하여 사회주의(社會主義)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국가들의 식민지 획득을 위한 전쟁이라고도 볼 수 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부터는 제국주의의 식민정책(植民政策)을 타파하기 위한 국가적 민주주의가 대두하여 열강(列强)들은 식민정책을 포기하고 약소국가(弱小國家)들을 해방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경제시대는 제국주의의 붕괴를 전기로 하여 사회주의적인 경제시대에로 전이(轉移)하게 되는 것이다.
공산주의사회(共産主義社會)를 지향하는 사탄편의 세계에서 이 사회주의를 부르짖게 되는 것은 당연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방향과 내용은 전혀 다르나 사회주의적인 경제체제에로 나아가려는 하늘편의 노정을 사탄편에서 앞질러 먼저 이루려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이상(創造理想)으로 보면, 인간에게 부여된 창조본연(創造本然)의 가치에 있어서는 그들 사이에 서로 어떠한 차이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은 마치 우리 인간의 부모가 그 자식을 대하듯이, 누구에게나 균등한 환경과 평등한 생활조건을 주시려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산(生産)과 분배(分配)와 소비(消費)는 마치 인체에 있어서의 위장(胃腸)과 심장(心臟)과 폐장(肺臟)과 같이 유기적인 관계를 가져야 하므로, 생산과잉(生産過剩)에 의한 판로경쟁이나 편파적인 분배로 인하여 전체적인 생활목적에 지장을 가져오는 축적이나 소비가 있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필요하고도 충분한 생산과 공평하고도 과부족(過不足) 없는 분배와 전체적인 목적을 위한 합리적인 소비를 할 수 있어야 하며, 마치 인체에 있어서의 간장(肝臟)과 같이 기능 전체의 원활한 활동을 위한 적의(適宜)한 저축(貯蓄)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이상(理想)으로써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 이상을 복귀할 수 있는 섭리역사(攝理歷史)의 종말기에 이르러 민주주의적인 자유를 찾아 인간의 본성을 더듬어 나아가게 되면, 결국 누구나 이러한 사회주의적인 생활체제를 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민의(民意)가 이러한 것을 요구하게 되면 민의에 의한 정치도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최후에 가서는 하나님을 중심한 사회주의사회가 오고야 마는 것이다.
고대 기독교사회(古代基督敎社會)에서도 우리는 사회주의적인 사상을 찾아볼 수 있고, 16세기 영국의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사상도 이러한 사회주의적인 것이었으며, 한편 또 영국의 산업혁명기(産業革命期)에 일어났던 오웬의 인도주의(人道主義)에 입각한 사상도 그러했으며, 또는 19세기로 들어오면서 영국의 킹슬리의 기독교사상에 의하여 가톨릭사회주의와 프로테스탄트사회주의 등이 나오게 되었던 것은 모두 창조이상(創造理想)을 지향하는 인간 본성의 자연적인 발로에서 일어났던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7. 공생공영공의주의와 공산주의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시대적인 혜택은 사탄의 침범으로 말미암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던 인간의 창조본성(創造本性)을 계발하여 나아가므로, 인간은 이와 같은 창조본성의 욕구에 의하여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창조이상(創造理想)의 세계를 동경하고 그것을 찾아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늘편의 사회주의사회(社會主義社會)를 지향하는 인간의 본심은 마침내 공생공영공의주의(共生共榮共義主義)를 부르짖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완성한 이상세계(理想世界)를 이루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이 세계가 바로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중심한 지상천국(地上天國)인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섭리를 앞질러 먼저 이루어 나아가는 것이므로, 사탄편에서는 먼저 유물사관(唯物史觀)에 입각한 소위 과학적 사회주의를 부르짖어 공산주의세계(共産主義世界)에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역사발전관(歷史發展觀)에 입각하여 인류역사는 원시공산사회(原始共産社會)에서 다시 공산주의사회에로 돌아간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 원인은 전혀 모르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에게 지상천국(地上天國)의 실현을 약속하셨던 것이므로, 인간과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먼저 맺은 사탄이 타락인간을 중심하고 원리형(原理型)의 비원리세계(非原理世界)를 먼저 이루어 나아가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복귀하시려는 지상천국을 사탄이 앞질러 이루어 놓은 원리형의 비원리세계가 바로 공산세계인 것이다.
마치 군주주의(君主主義)의 정치적인 독재를 막고 그 주권을 인민의 것으로 돌리려는 데서 민주주의(民主主義)가 나오게 된 것과 같이, 국가의 재산이 어느 특수한 개인이나 계급에 독점을 당하는 제국주의적(帝國主義的)인 경제체제를 타파하고 인민들이 그것을 균등하게 향유(享有)할 수 있는 경제체제를 수립하기 위하여 사회주의(社會主義)를 거쳐서 하늘편에서는 공생공영공의주의(共生共榮共義主義)를 지향하고, 사탄편에서는 그것을 앞질러 먼저 공산주의(共産主義)를 지향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는 진정한 민주주의적 경제사회를 이루기 위하여 나오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위에서 서구(西歐)를 중심하고 이루어진 복귀섭리역사(復歸攝理歷史)가 종교사와 정치사와 경제사의 3면으로 분립되어 각각 공식적인 노정을 통하여 발전하여 나왔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러면 이것들이 어떻게 하여서 서로 동일한 역사노정에서 융합되는 섭리역사로 종결을 지어, 재림이상(再臨理想)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게 될 것인가?
이미 위에서 우리는 인간의 영육(靈肉) 양면의 무지(無知)를 타개하기 위한 종교와 과학이 하나의 과제로서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발전이 3분되어 발전하여 왔다는 것을 밝혔다. 따라서 이렇게 3부면(三部面)으로 발전해 온 역사가 하나의 이상(理想)을 실현하는 초점으로 귀결되기 위하여서는, 종교와 과학을 완전히 통일된 하나의 과제로서 해결해 줄 수 있는 새로운 진리(眞理)가 나와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진리에 입각한 종교에 의하여 온 인류가 하나님의 심정(心情)에 귀일(歸一)함으로써 하나의 이념을 중심한 경제의 기대 위에 창조이상(創造理想)을 실현하는 정치사회가 이루어질 것이니, 이것이 바로 공생공영공의주의에 입각한 메시아왕국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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