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하나님 - 제3장 창조주이신 하나님_1절

2013. 3. 6. 15:26참사랑 영원까지/천성경

 1절 하나님의 창조

1 우주는 단순히 물질에 근원하였다거나 자연발생적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우주의 제1 원인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은 계십니다. 그분은 절대자요 영원불변하시고 선하십니다. 우주만상은 그분의 기본설계인 창조목적에 의하여 만들어진 피조물입니다. 정(情)의 본체이신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기쁨을 누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쁨은 혼자서는 느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주체가 기쁨을 느끼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의 대상 실체가 필요합니다. 기쁨 중에서도 최고의 기쁨은 주체와 대상이 사랑을 주고받을 때 느끼게 됩니다.


2 우주는 본래 하나의 뜻 가운데서 생겨났습니다. 이 우주를 중심삼은 하늘의 부모님이 계셔서 그 부모로부터 연유되어 오늘날 이 피조세계가 생겨났습니다. 우주의 부모 되는 중심존재가 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세계와 하나님, 나와 하나님은 둘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하나는 중심의 자리에 서기 위해서 위로부터 땅을 향해서 수직선으로 내려오고 있고, 또 한 면에서는 평면수준을 통해서 중심으로 연결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3 하나님이 맨 처음 천지를 창조하실 때, 이 천지와 당신의 내적 기준과 영원한 인연을 맺기 원하시는 우주관과 창조이상과 창조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것의 중심은 바로 하나님의 심정이었습니다. 우주의 근원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자체이지만 우주 창조라는 현상을 일으키게 한 최초의 근거는 하나님의 심정이었으며, 그 심정을 중심으로 일체화할 수 있는 이상권이 있었습니다.


 창조란 무엇인가

4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몸입니다. 아담 해와는 보이는 하나님입니다. 아담 해와는 보이는 하나님격입니다. 하나님은 에너지의 본체이기 때문에 영계에 가서도 볼 수 없습니다. 체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체세계를 지도하고 주관하기 위해서는 실체를 써야 됩니다. 아담 해와는 타락하지 않고 완성되어 지상에서 살다가 천상에 가게 되면 형상을 입은 하나님이 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보이는 아담 해와가 하나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담 해와가 ‘하하하’ 웃는 것은 하나님이 ‘하하하’ 웃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곧 우주가 ‘하하하’ 웃는 것입니다. 무형의 하나님이 실체를 쓴 하나님으로 등장하시기 위한 것이 피조세계 창조입니다. 이 세계를 창조한 것은 무형의 신이 실체의 하나님으로 등장하기 위한 것입니다.


5 하나님은 사람의 모체이며 만유의 핵입니다. 그런데 왜 모든 존재의 핵 되시는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하셔야만 했느냐? 그것은 핵 혼자만 있어서는 핵 자체가 망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전기로 말하면 아무리 완전한 플러스라 해도 플러스만 있고 마이너스가 없을 때는 없어지지 말라고 해도 없어집니다. 그 플러스가 없어지지 않으려면 없어지지 않을 수 있는 원칙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창조의 역사를 거쳐 완전한 마이너스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서로가 주고받아야 존재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6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 내적인 마음세계에서 느끼는 모든 것으로 외적인 세계에 완전한 대상의 실체를 세워 그와 더불어 주고받게 됩니다. 책임을 지고 거기에 감당할 수 있는 위치에서 완전히 주고받을 수 있는 대상을 만들어 놓자 해서 만든 것이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만물 중에 제일 좋아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또 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을 찾아가게 되고, 하나님은 사람을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7 ‘하나님이 주인이다. 천지를 창조한 창조주다.’라고 할 때, 그 창조주라는 말은 근원이라는 말이고, 주체라는 말입니다. 창조물은 대상이라는 말입니다. 화가로 말하면 자기의 걸작품을 만들겠다는 구상을 했다면 그 구상대로 그냥 전개시켜서 자기 마음에 쏙 들어야 합니다. 마음에 쏙 든다는 것은 눈에 들고 코에 들고 귀에 들고 입에 들고 오만가지 자기 세포까지 화합할 수 있게 마음에 든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마음에 드는 존재니 내 몸을 대신한 것입니다. 그렇게 보게 된다면 마음과 몸은 본래 하나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영인체가 영적인 오관을 가지고 있고 육체도 육적인 오관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서로서로 화합하여 이상적인 화동이 벌어져야 됩니다. 그것은 먹는 것으로 벌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몸과 마음의 화동은 참된 사랑으로 말미암아 시작되는 것입니다.


8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한 주체입니다. 그 주체 되시는 하나님은 아들딸 된 인류를 대하여 계시는 분이지만 ‘인간을 위해서 나는 있다.’라고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이 원칙을 우리 인간이 본래 가져야 할 것이었는데, 못 가졌기 때문에 최고의 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최고의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9 창조는 상대적 존재를 지은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이 힘을 대량 투입한 것은 하나님 당신을 위해서, 하나님이 좋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내가 좋기 위한 것이 아니라 먼저 상대를 만들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먼저 투입해 이상상대 추구라는 표제 하에 모든 천지만물을 지어 나갔다는 것입니다.


10 존재와 생명 중에 어느 것이 먼저냐? 철학이라는 것은 존재에서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생명을 다루지 못합니다. 그러면 생명은 어디서부터 나오느냐? 생명은 혼자 스스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사랑으로부터 나옵니다. 생명의 세계와 사랑의 세계는 하나님이 관리하는 세계입니다. 그 이하의 것을 다뤄 나오는 것이 철학사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보다도 생명이 앞섭니다. 존재를 움직이는 것은 생명입니다. 생명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이냐? 사랑만이 생명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말미암아 출발했기 때문에 사랑의 인연을 따라서 움직이고 사랑의 결과를 찾아가는 것이 생명이 가는 길입니다. 이렇듯 정서적인 문제가 우주 창조의 근본입니다.


11 아무리 위대한 하나님이라 하더라도 사랑의 정서를 느낄 수 없는 입장이라면 고독한 하나님입니다. 그러니 고양이라도 품에 품고 ‘내가 고양이를 잘 만들었구나. 내가 귀를 이렇게 만들 때 기분이 참 좋았지. 이 발톱도 쥐를 잡아먹기 좋으라고 이렇게 만들었지. 허허허, 기분 좋다.’라고 해야 합니다. 그 좋다는 것은 정서적인 동기를 중심삼고 모든 것이 관계가 되어 있습니다.


12 하나님은 지금도 창조의 능력을 가지고 환경의 여건을 몰아서 새로운 환경을 만들려고 하십니다. 그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분입니다.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타락권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조건 제시가 성립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지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적 조건만 제시되게 될 때는, 하늘이 활동할 수 있는 내용만 제시되게 될 때는 새로운 역사는, 새로이 창조될 수 있는 환경은 어느 때나 어느 시대나 연결될 수 있습니다. 창조 당시의 하나님이나 역사과정을 지나온 오늘의 하나님이나 미래의 하나님이나 창조주로서의 권한은 언제나 갖고 있습니다.


13 하나님이 창조할 때에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더불어 계획이 있었습니다. 인간을 창조해서 이러이러한 인간세계를 만들겠다는 본래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인간이 타락했을지라도 오늘날 하나님의 구원섭리권의 인간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하나님의 뜻과 계획권 내에 서야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뜻과 계획권 내에 들어설 수 있게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그 뜻을 중심삼고 환경과 여건을 개척하면서 인간을 계획권 내에 세우기 위해 내세운 것이 역사시대에 나타난 수많은 종교입니다.


 완전 투입을 통한 창조

14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왜 인간을 지었느냐? 상대가 없는 하나님으로서는 자극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상대를 만들어 이상의 사랑과 생명과 희망의 자극을 느끼기 위해서 지었습니다. 성경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이 인간을 지을 때 ‘야! 사람아, 나타나라.’라고 해서 간단하게 지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과 사랑과 희망을 걸고 인간을 지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는 투입이라는 말, 무조건 투입이라는 말, 전체 투입이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참된 사랑을 이루기 위한 방향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상대에게 백 퍼센트 투입했습니다. 투입하는 과정은 하나님 자체의 소모입니다. 그렇지만 완전 투입했다고 하는 날에는 문제가 다릅니다. 백 퍼센트 투입을 해서 완성하는 날에는 백만큼 투입한 것은 백만큼 완성해서 거기에 상대적인 사랑이 플러스되어 하나님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상대적인 사랑의 권한이, 상대적인 특권의 가치가, 자기가 투입한 모든 내용이 플러스되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은 비로소 자극적인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15 부모는 사랑하는 자식에 대해서 전체를 투입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서 투입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위해서 있겠다는, 상대를 위한 하나님의 자리에 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위해서 있겠다고 하면 그것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자기를 전부 자식한테 투입해서 그 자식과 더불어 있겠다고 하는 데서 사랑이, 생명이, 희망이 이루어집니다. 결국 참된 하나님, 참된 사랑과 참된 생명과 참된 희망을 가진 그분이 맨 처음 인간에게 주고 싶어하는 것은 참된 사랑과 참된 생명과 참된 희망입니다. 그것을 주는데 자기 입장에서 준 것이 아니라 상대 입장에 들어가서 주었다는 것입니다.


16 참된 하나님은 상대를 만드는 데 있어서 완전히 투입함으로 말미암아 보다 가치 있고 이상적인 완전형으로 전개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지어 놓고는 아담 해와를 위해서 있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기를 위하던 때에서 상대를 위하는 때로 전개되는 것입니다. 이상적 존재라는 것은 자기를 위주로 하지 않습니다. 이상적 존재는 남을 위하는 데에, 대상을 위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 원칙이 우주의 근본입니다.


17 성경에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한마디로 ‘이러한 천지가 되라.’라고 해서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안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투입했다는 것입니다. 있는 정력을 다 투입했습니다. 있는 사랑의 힘을 다 투입해서 미래에 자기 사랑하는 아들딸, 자기 사랑하는 가정을 위한 예물로, 선물로 지었다는 것입니다.


18 창조라는 말은 힘의 투입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 예술가가 있으면 그 예술가는 걸작품을 만들기를 원합니다. 예술가가 걸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온 정신과 모든 일체의 정성을 다 투입합니다. 다 투입하는 데서만이 완전한 걸작품이 나옵니다. 불완전 투입이 아닙니다. 완전 투입, 그 이상 될 수 없다 할 수 있는 여기에서 비로소 걸작품이 생겨납니다. 정성을 안 들이고, 피와 살을 투입하지 않은 것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요, 내 사상 중의 사상이요, 내 전체 중의 전체를 투입했기 때문에 희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 자체가 투입에서부터 시작됐다는 것입니다. 힘을 투입해야 됩니다. 힘을 투입하지 않고는 무슨 물건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완전한 투입을 하는 데서 완전한 대상이 성립한다는 원칙을 두고 볼 때, 하나님은 주체로서 대상을 대해서 완전히 투입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자신을 위해서 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대상을 위해서 있는 운동을 시작한 것이 창조역사입니다.


19 만물을 창조한다는 것은 자기 본질을 빼내는 것입니다. 결국은 에너지를 투입했다는 것이고, 에너지를 투입했다는 것은 자기 본질의 삭감을 말하는 것입니다. 손해 보는 것입니다. 대상 창조의 이념의 세계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되었기 때문에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은 투입하신 것입니다. 투입하는 것은 그것이 자기에게 열매맺히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에게 열매가 맺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지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투입해서 하나님이 소원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만족을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원칙이 됨으로써 사랑의 전통에 있어서는 부모의 사랑의 본질이 남아졌습니다. 자기를 투입해서 자기의식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식을 망각해서 보다 상대적인 목적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치 추구에 자기 전체가 흡수돼 들어가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도 창조한 사람을 위하는 자리에 서겠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창조원칙입니다.


20 역학세계에서는 입력이 출력보다 큽니다. 그러나 참사랑의 세계는 입력이 출력보다 작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평면으로 해서 영원한 우주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소모하면 모두 없어집니다. 운동하기 때문에, 무한히 투입하는 사랑의 힘이 작용하기 때문에 소모 없이 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을 중심삼고 존속하는 입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반복작용에 의하여 순환작용을 계속하는 형태를 가지고 영원히 존속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에서 종족, 종족에서 민족, 민족에서 세계까지 동위, 등가의 기준으로 확대하여 한 사람의 머리로서 우주를 구성하는 것과 같이 인류를, 우주를 합성체와 마찬가지로 이상세계, 통일세계, 평화의 일체권, 통일권으로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원칙과 법칙에 따른 창조

21 하나님이 아담에게는 상대적 입장에서 명령하셨고, 상대적인 입장에서 믿음의 조건을 보고 그를 대하셨지만, 앞으로는 실체를 찾으시게 됩니다. 그래서 상대적인 입장이 아니라 내 마음과 몸이 일체 됨으로써 내 한 실체를 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러한 실체를 찾기 위해서는 창조의 법칙을 통하여야 합니다.


22 성경을 보면 천지 창조한 것을 간단히 말했습니다.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야, 아무개야!’ 하고 부르면 ‘예.’ 하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별이 생겨라.’ 하면 별이 생겨났고, ‘이 지구성이 생겨나라.’ 하면 생겨났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무한한 질서와 법도를 따라 전진적인 원칙을 계승시켜서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으로 발전시켜 나온 것입니다.


23 인간생활 속에서 ‘위해 주는’ 참사랑이 모든 상관관계의 기본인데, 이는 부모의 참사랑을 동기로 하여 체휼하는 것입니다. 신의 참사랑을 뿌리로 한 부모의 참사랑은 인간 개체를 완성시키게 됩니다. 완성된 개체들이 참사랑의 이상적인 부부를 이룬 가정에서 그들의 자녀에게 참사랑을 전수하게 되는 것이 창조의 질서입니다. 지상의 이상세계는 완전한 한 사람으로부터 참사랑에 의한 가정‧사회‧국가‧세계로 확대되어 나갑니다. 현 세계는 이러한 이상세계와는 그 출발을 달리한 세계입니다. 인간이 신의 창조원칙 중 가장 귀한 참사랑의 질서를 떠난 타락의 결과가 확대되어 온 세계입니다. 신의 창조 질서를 도외시한 채 인위적인 조직 형태나 법칙 질서만을 중시하는 현 세계는 이상적인 개인·가정, 그리고 민족을 양성해 내지 못합니다.


24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만물을 지으시고 사람을 하나님의 대상으로 지으셨습니다. 대상으로 지으신 것인데 주고받는 수수작용의 원칙이 천지의 작용으로, 운동과 법칙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완전히 다 주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원칙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완전히 사랑하려면 남편으로부터 완전히 사랑받았다고 하는 그날에 가서야 ‘남편을 진짜 사랑하겠다.’ 이렇게 됩니다. 완전히 사랑받게 될 때에 완전히 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천지의 원칙입니다. 주체로부터 완전히 받아야만 완전히 돌려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기 전에 돌려주기 시작하면 완전한 것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것이 사랑을 중심한 수수작용, 원리원칙을 중심삼은 우주의 원칙입니다.


25 하나님의 창조과정을 중심삼고 보면, 3단계의 원칙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생각이 있고, 그다음에 마음을 통해서 그 생각을 나타내고, 그다음에 그것의 실현이 벌어집니다. 그러한 3단계를 거쳐서 창조물이 형성된 것입니다. 물론 말씀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도 마음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거기에서도 역시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몸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이렇게 되어라. 이렇게 창조되는 것이다.’라고 할 때, 비로소 창조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26 하나님의 창조과정을 보면 맨 처음에는 지극히 작은 것을 만드는 그 동기로부터 상대적 관념을 가지고, 목적을 이룬 그 목적체에 새로운 동기를 가해 보다 큰 것으로 발전시켜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그 단계를 높여서 목적에 동기를 가하고, 상대적 관념을 가해 목적을 이루고, 또 그 목적이 동기가 되고 점점 차원을 높여 인간까지 창조하여 나왔습니다.


27 하나님이 창조주로서 역사적 내정적인 원칙을 중심삼고 존재의 기원으로부터 지금까지 성장한 과정을 실체적으로 전개해 나오는 과정이 아담 해와 창조과정입니다. 그러면 어디서부터 연결되느냐? 세포가 합해져서 큰 것과 마찬가지로 아기가 열 달 동안에 자라는 과정을 거쳐 나가면서 남자 여자의 형태로 갈라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생명 유전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논리에 대해 해석할 방법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체 앞에 상대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뜻으로 말하면 성상 앞에 형상이 필요합니다. 


28 내적 성상은 외적 형상과 모든 근원적인 면에서 영합도 되고 통할 수 있는 내연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태어나서 자라는 그 과정은 보이지 않는 무형의 신이 실체를 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내적인 모든 존재가 표현되어서 나타나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입니다. 내가 나타난 실체입니다. 무형의 실체가 유형의 실체로 전개되니만큼 거기에 모든 전부를 투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현현

29 하나님은 어디에 머물고 싶어하시겠습니까? 아담과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완성해서 참사랑을 중심하고 하나가 될 때 하나님은 거기에 임하십니다. 결혼한 날 첫사랑이 심어지는 거기에 중심이 되어서 만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피와 사랑과 생명을 어디에 심겠습니까?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동화 일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사랑이 가장 귀한 것입니다. 종적인 영원한 사랑의 주인이 하나님이요, 횡적인 영원한 사랑의 주인이 부부입니다.


30 하나님은 하나님과 인간이 주체와 대상으로서 종적인 사랑의 관계를 완성하는 것만을 목표로 하지는 않았습니다. 종적인 사랑을 완성하여 아담 해와 자신들의 횡적 사랑의 결실을 가져오고자 하셨습니다. 그 순간이 바로 내적 부모이신 하나님이 외적 부모인 아담 해와와 완전 일체를 이루기 위해 임재하시는 사랑이상의 성취의 순간입니다. 무형의 부모이신 하나님이 아담 해와의 형상을 쓰고 유형세계에 영존하시는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이때 아담 해와는 참부모·참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31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는 복귀가 필요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본연의 세계에서 아담을 중심삼고 소망했던 것은 오늘날 복귀해야 할 세상에서 고대하는 소망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아담 해와를 창조한 전적인 소망은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 자신을 현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담 해와를 통하여 하나님의 내적인 요소를 외적 실체로서 전개시켜 하나님이 소망하시는 원대한 희망과 인간의 소망이 일치된 한때를 맞을 수 있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32 하나님이 피조세계를 지으신 목적은 ‘같이 사는 것’인데 오늘날 인간과 만물, 모든 존재물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권내에 있지 않습니다. 타락으로 인해 그렇게 되었습니다. 타락한 까닭으로 하나님이 임재하실 수 있는 터전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잃어버린 그날부터 오늘날까지 인간을 찾아 헤매시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인간이 하나님의 전(殿)이 되고, 하나님의 몸이 되고,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어 하늘과 땅을 대신한 하나의 실체 존재가 되면 인간이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하나님의 기쁨이 인간을 통하여 만물에게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이 하나님과 만물을 연결시키는 중간 매개체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