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사상 - 제4장 가치론(價値論) - 8

2010. 1. 6. 16:41참사랑 영원까지/통일사상

七.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定立)


새로운 가치관이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절대적인 가치관을 의미한다. 가치관이 붕괴되어 가고 있는 오늘날에 와서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나, 상대적 가치관을 가지고서 그 붕괴현상을 방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즉 절대적 가치관이 아니면 안 된다.

 

절대적 가치관은 절대자인 하나님이 어떤 속성(屬性)을 갖고 있으며, 또 어떤 목적(創造目的)과 법칙(法則, 로고스)를 가지고 인간과 우주를 창조하셨는가 하는 것을 명백히 밝힌 기반 위에서만 세워지는 가치관이다.


하나님은 사랑을 통하여 기쁨을 얻고자 사랑의 대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또 인간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그 인간의 사랑의 대상으로서 만물을 창조하셨다. 절대적가치(絶對的價値)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절대적 사랑)을 기반으로 하여 세워진 진(眞)-선(善)-미(美)의 가치, 즉 절대적인 진(眞), 절대적 선(善), 절대적 美를 말한다. 새로운 가치관이란, 이와 같이 절대적인 사랑을 기반으로 해서 성립한다는 견해(見解)이다.


그런데 가치관의 통일이란 가치(특히 善의 가치)의 판단기준(判斷基準)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종교의 덕목(德目)이 절대적가치의 여러 표현형태(表現形態)라는 것, 따라서 모든 덕목은 절대적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명백히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새로운 가치관(價値觀)은 종래의 기독교, 유교, 불교, 이슬람교 등의 가치관을 완전히 부정하고 새롭게 세우자는 것이 아니다. 종래의 가치관의 기반이 붕괴되었으므로, 다시는 붕괴되지 않는 확고한 것으로,

 

그리고 과거의 여러 가치관들을 다시 소생(蘇生)시킬 수 있는 것으로서 세워진 것이 새로운 가치관이다. 그런데 이러한 새로운 가치관이 그 절대성(絶對性)을 보증받기 위해서는 同가치관은 다음과 같은 신학적(神學的), 철학적(哲學的), 역사적(歷史的)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1) 신학적(神學的)근거(根據)의 제시


신학적(神學的)근거(根據)의 문제는 우주의 절대자, 즉 기독교의 하나님, 유교의 천(天), 불교의 진여(眞如), 이슬람교의 알라 등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그리고 그 상호간의 관계는 어떠한가 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가 풀리기 위해서는 절대자인 하나님이, 왜 인간과 우주를 창조하셨는가 하는, 종래의 종교에서 밝히지 못했던 미해결의 문제가 먼저 해명되지 않으면 안 된다. 원상론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이 하나님은 바로 심정(心情)의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심정이란 사랑을 통하여 기쁨을 얻고자 하는 정적(情的)인 충동(衝動)이었다. 그 충동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으로서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으로 우주를 만드신 것이다. 즉 하나님을 `심정의 하나님'으로 규정함으로써 하나님의 우주창조에 대한 필연적인 이유가 합리적(合理的)으로 설명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서 완성하기를 원하셨으며,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기쁨은 최고에 이르게 된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3대축복(三大祝福)을 내려주신 것이다. 즉 인간이 인격을 완성하고, 가정을 완성하고, 주관성을 완성하게 하신 것이며,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인간이 3대축복(三大祝福)을 완성함으로써 성취되게 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종교의 덕목(德目)은 삼대축복을 완성하고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실현하는 데에 그 덕목의 취지가 있음을 알게 된다.


(2) 철학적(哲學的)근거(根據)의 제시


다음은 철학적근거의 제시에 관해서 살펴보자. 기독교나 유교, 불교, 이슬람교의 가치관은 기원전 6세기경부터 기원후 7세기에 걸쳐 나타났다. 당시는 군주의 명령을 백성들이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였다. 살기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의 백성들에게는 이론적 비판력이라곤 태무(殆無)했기 때문에 권위(權威)앞에 무조건적인 순종은 당연지사(當然之事)였다.

 

따라서 석가, 예수, 마호멧 등 권위있는 분들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백성들은 무조건 따르는 사회였다. 그러므로 그 시대의 가치관을 현대의 합리적(合理的), 논리적(論理的)인 사고방식(思考方式)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대로 적용한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현대의 지성인(知性人)들이 수용할 수 있는 합리적인 설명 방식을 통하여 그들의 가치관을 현대인에게 전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현대인(現代人)이 수용할 수 있는 방식이란 어떠한 것일까? 그것도 자연과학적 방법이다. 아무리 윤리적(倫理的) 덕목(德目)이라 하더라도 그 덕목(德目)이 과학적인 법칙의 뒷받침을 받게 된다면 그러한 덕목은 현대의 지성인(知性人)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게 된다. 자연을 연구하여 거기에서 가치관이나 인생관을 발견하다는 것은, 古代 그리스에서나 동양에서 흔히 행해져 온 방법이었다.

 

예컨대 주자(朱子)는 자연법칙이 그대로 인간사회에 있어서 윤리법칙이 된다고 함으로써 자연법칙과 윤리법칙의 대응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현대에 들어와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연법칙을 잘못 인식하기는 했지만, 역시 주자(朱子)와 같이 자연법칙과 사회법칙(사회생활의 규범)의 동일성(同一性)을 고집하면서, 사회도 자연변증법에 의해서 발전해 왔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가치관을 세우는데 있어서도 자연이나 우주의 관찰을 통하여 거기에 작용하고 있는 근본적인 법칙을 발견한 후 거기에서 가치관(價値觀)을 도출(導出)하는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으며, 뿐만 아니라 우주를 꿰뚫고 있는 일관(一貫)된 법칙, 즉 천도(天道)가 인륜(人倫)의 도덕(道德)의 기준이 된다는 것을 명백히 밝혀야 한다. 이것이 곧 철학적근거의 제시이다.


여기서 자연법칙과 윤리법칙은 과연 대응(對應)하는가, 즉 자연법칙을 그대로 윤리법칙에 적용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통일사상에 의하면, 모든 존재는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양 측면을 통일적으로 구비하고 있다. 따라서 성상면의 법칙인 윤리법칙과 형상면의 법칙인 자연법칙에는 대응관계(對應關係)가 있다는 결론이 자동적으로 도출(導出)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연을 어떻게 올바르게 인식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이미 존재론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마르크스주의(主義)의 변증법은 대립물의 투쟁에 의하여 자연이 발전한다고 봄으로써 자연을 잘못 파악했다. 따라서 이러한 자연에 대한 잘못된 파악(把握)의 터 위에 세워진 투쟁(鬪爭)하는 인간상(像)은 그릇된 인간상이었다.


통일사상에서 보면, 우주(宇宙, 자연)에 작용하고 있는 근본법칙은 변증법(辨證法)이 아니고 수수법(授受法)(수수작용의 법칙)이다. 그리고 존재론에서 말한 바와 같이 수수법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즉 상대성(相對性), 목적성(目的性)과 중심성(中心性), 조화성(調和性), 질서성(秩序性)과 위치성(位置性), 개별성(個別性)과 관계성(關係性), 자기동일성(自己同一性)과 발전성(發展性), 원환운동성(圓環運動性) 등이다. 여기에서 우주의 법칙에 따라 새로운 가치관(統一價値觀)을 논하고자 한다.


우주(宇宙)에는 종적(縱的)인 질서와 횡적(橫的)인 질서가 있다. 달은 지구의 주위를 돌고,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으며, 태양계는 은하계의 중심핵을 중심으로 돌고, 은하계는 우주의 중심을 중심하고 돌고 있다. 이것이 우주에 있어서의 종적인 질서이다. 한편 태양을 중심으로 하여 수성(水星), 금성(金星), 지구(地球), 화성(火星), 수성(水星), 토성(土星), 천왕성(天王星), 해왕성(海王星), 명왕성(冥王星)이 일정한 궤도(軌道)를 그리며 돌고 있다. 이것이 우주에서의 횡적인 질서체계의 하나이다. 이것들은 모두 조화(調和)로운 질서체계이며 모순(矛盾)이나 투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우주의 질서체계를 축소한 것이 가정질서이다. 따라서 가정에도 종적질서와 횡적질서가 성립된다.


가정의 종적질서에서 종적가치관이 성립된다. 가정에 있어서 부모는 자녀에게 자애(慈愛)를 베풀고 자녀는 부모에게 효도한다. 이것이 가정에서의 종적(縱的)가치관(價値觀)이다. 이것을 사회, 국가에 적용하면 여러 가지의 종적 가치가 도출된다. 군주의 국민 또는 신하에 대한 긍휼(矜恤)이나 선정(善政), 국민 또는 신하의 군주에 대한 충성(忠誠), 스승의 제자에 대한 사도(師道), 제자의 스승에 대한 존경과 복종, 연장자(年長者)와 연소자(年少者)에 대한 애호(愛護), 연소자(年少者)의 연장자(年長者)에 대한 존경(尊敬), 상관(上官)의 부하(部下)에 대한 권위와 명령, 부하의 상관에 대한 복종 등이 그것이다.


가정의 횡적질서에서 횡적(橫的)가치관(價値觀)이 성립된다. 가정에는 부부간(夫婦間)에 화애(和愛), 형제자매간에는 우애(友愛)가 있다. 그리고 이것이 동료, 이웃, 동포, 사회, 인류 등에 대한 가치관으로 확대하고 전개된다. 그리하여 화해, 관용, 의리, 신의, 예의, 겸양(謙讓), 연민(憐憫), 협조, 봉사, 동정 등의 덕목이 횡적가치로서 성립(成立)하게 된다.


이와 같은 종적(縱的) 및 횡적(橫的)인 가치가 잘 지켜지면 사회는 평화를 유지(維持)하고 건전하게 발전하나, 그렇지 못할 때 사회는 혼란에 빠진다. 이러한 가치관은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봉건사회의 유물이나 잔재가 결코 아니며 인간이 영원히 지키지 않으면 안될 보편적인 인간 행위의 규범인 것이다. 왜냐하면 우주의 법칙이 영원하듯이 인간사회의 법칙도 이 우주의 법칙에 대응(對應)해서 영원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주의 법칙에는 개별성의 법칙이 있는데 이에 대응한 것이 개인적 가치관이다. 우주의 모든 개체는 각자의 특성을 지니면서 우주의 질서에 참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사회에 있어서도 각 개인은 고유한 인격을 형성하면서 상호 관계를 맺고 있다. 개인적 가치관에는 순수(純粹), 정직(正直), 정의(正義), 절제(節制), 용기(勇氣), 지혜(智慧), 극기(克己), 인내(忍耐), 자립(自立), 자조(自助), 자주(自主), 공정(公正), 권면(勤勉), 청결(淸潔)등이 있다. 이것들은 전부 개인으로서 자기를 수양하기 위한 덕목(德目)들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종적가치관(縱的價値觀), 횡적가치관(橫的價値觀), 개인적 가치관이 덕목으로서는 특별히 새로운 것들이 아니다. 공자, 석가, 예수, 마호멧 등이 이미 가르쳤던 내용들이다. 단지 종래의 가치관은 철학적 근거가 막연함으로 인하여 오늘날에 와서는 그 설득력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확고한 철학적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전통적인 가치관까지도 소생될 수 있게 된다.


(3) 역사적(歷史的)근거(根據)의 제시


다음은 역사적근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앞에서 언급한 새로운 가치관은 역사적(歷史的)으로도 실증될 수 있어야 한다. 공산주의는 자연현상이 투쟁에 의해 발전하듯이 인류(人類)역사도 역시 투쟁(계급투쟁)에 의해서 발전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역사론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역사는 투쟁에 의해서 발전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역사의 발전은 어디까지나 주체와 대상(지도자와 대중)의 조화적인 수수작용에 의해 이루어져온 것이다.


역사상에 투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계급투쟁은 아니었다. 보다 선(善)한 세력과 보다 악(惡)한 세력과의 싸움이었다. 가치관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가치관과 가치관의 싸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천도(天道)에 보다 가까운 편의 가치관(선(善)편)과, 천도(天道)에서 보다 먼 편의 가치관(악(惡)편)과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일시적(一時的)으로는 선(善)편이 악(惡)편에 패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결국은 천도(天道)에 가까운 선(善)편이 승리해 왔다. 맹자(孟子)도 순천자(順天者)는 존(存)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한다고 했다. 그런데 선악의 투쟁은 역사를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고 역사를 보다 선의 방향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것이었다(제8장 歷史論을 참조).


역사를 돌이켜 보면, 국가의 여러 주권들이 흥망(興亡)을 반복해온데 비하여 선(善)을 표방했던 종교는 계속하여 오늘날까지 존속(存續)해 왔다. 또 성인(聖人)이나 의인(義人)들이 비록 악(惡)의 세력들에 의하여 희생되는 수가 많았지만 그 대신 그 성인(聖人)이나 의인(義人)들의 가르침과 업적은 후세 사람들의 삶에 교훈(敎訓)과 귀감(龜鑑)이 되곤 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은 천도가 그대로 살아서 역사에 작용해왔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즉 역사는 어떤 주권자라도 이 천도(天道)를 거역할 수 없다는 것과 만일 천도(天道)를 거역하게 되면 그 거역한 자가 비운(悲運)에 쓰러지고 만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역사의 법칙은 역사의 출발점에서 이미 목표가 세워져 있었다는 점이다. 우주(宇宙)는 목적(創造目的)을 중심하고 이법(理法, 로고스)에 따라 창조되었다. 생물의 성장을 보아도 종자(種子, 또는 알)속에 이미 이법(理法)이 내재(內在)해 있고, 그 이법(理法)에 따라 종자는 성장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민족의 역사,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도 역시 출발점에 일정한 이념이 있었고, 그것을 목표로 하여 역사는 발전해 온 것이다. 즉 역사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역사의 출발점에 이미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신화(神話)나 설화(說話) 등에 상징적으로 표시된 인류나 민족의 이상(理想), 건국(建國)의 이상(理想)이었다.


인간시조의 타락으로 인류역사는 죄악사(罪惡史)로서 출발했으나, 하나님은 복귀해야 할 창조이상의 세계상을 상징(象徵)과 비유(比喩)가 섞인 일종(一種)의 신화형식으로 인간에게 알리곤 하셨다. 창세기의 에덴동산에서의 사건의 내용이나, 이사야서나 계시록 내의 예언적(豫言的) 기사, 그리고 한민족(韓民族)의 경우의 단군신화(檀君神話) 등이 그 예이다.

 

대개 오늘날까지의 인류의 이상(理想), 민족의 이상(理想)이란 선(善)하고 밝고 평화로운 세계, 행복한 세계의 실현이었다. 그것이 바로 천도(天道)에 맞는 세계의 구현인 것이다. 이와 같이 역사의 출발점에 이미 역사의 목표(目標, 天道 세계의 실현)가 세워져 있음을 하나님은 신화(神話)나 예언(豫言)의 형식으로 가르쳐 주곤 하셨다. 따라서 역사가 목표로 삼고 있는 미래의 세계는 천도에 부합된 세계이며 가치관이 확립된 세계이다. 이상으로 신학적, 철학적, 역사적 근거의 제시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