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사상 - 제4장 가치론(價値論) - 9

2010. 1. 6. 16:40참사랑 영원까지/통일사상

八. 가치관의 역사적(歷史的) 변천(變遷)


종래의 서양 가치관의 변천을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자. 이것은 절대적가치를 탐구(探究)하던 그리스철학과 기독교가치관이 상대적인 가치관에 압도(壓倒)되어 결국은 무력화되어 버린 역사적인 과정을 파악(把握)하기 위해서이며, 새로운 가치관(절대적 가치관)에 의하지 않고서는 오늘날의 세계적인 혼란을 수습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1) 그리스시대의 가치관


1) 유물론적(唯物論的) 가치관


기원전 6세기경 그리스의 식민지(植民地)였던 이오니아지방에 유물론적(唯物論的)인 자연철학이 출현(出現)했다. 그 당시 그리스는 씨족사회로서 신화를 중심한 시대였으나, 이오니아의 철학자들은 자연현상에 대한 신화적인 설명에 만족하지 않고 세계와 인생을 자연법칙을 통하여 설명하고자 했다.


이오니아지방에는 밀레토스라는 도시가 있었으며, 그곳은 무역이 왕성하여 상인들은 지중해의 전역에 걸쳐 활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현실적이고 행동적이었다. 그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점차 신화적(神話的)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 무역도시 밀레토스에 기원전 6세기(世紀)경부터 유물론적(唯物論的)인 철학자들이 출현(出現)하였다. 이들을 밀레토스학파(學派)라 하며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등이 그 대표자였다. 이들은 주로 만물의 근원(根源; arche)에 대해서 물음을 던졌던 것이다.


만물(萬物, 자연)의 근원(根源)에 관하여 탈레스(Thales, 624~546 B. C.)는 그것을 물(水)이라고 설명하였고,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 611~547 B. C.)는 무한자(無限者, apeiron), 아낙시메네스(Anaximenes, 585~528 B. C.)는 공기(空氣)라고 하였으며, 그 외에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535~475 B. C.)는 불(火)이라고 하였고, 데모크리토스(Democritos, 460~370 B. C.)는 원자(原子)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연철학(유물론)과 더불어 객관적(客觀的), 합리적(合理的)인 사고방식이 발달하게 되었다.


2) 자의적가치관(恣意的價値觀, 궤변적가치관(詭辯的價値觀)


기원전(紀元前) 5세기경, 그리스에는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여 민주정치가 발달하였다. 청년들은 입신출세(立身出世)을 위하여 지식을 배우려 하였고, 그 때문에 특히 변론술(辯論術)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래서 청년들에게 변론술을 가르쳐서 일정한 보수를 받는 학자들이 나타났는데 사람들은 그들을 소피스트라고 불렀다.


그때까지 그리스철학은 자연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으나, 자연철학만으로는 인간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부터 인간사회의 여러 문제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런데 자연법칙은 객관성(客觀性)을 가지고 있는데 비하여 인간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법(法)이나 도덕(道德)은 나라에 따라 다르고, 또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법(法)이나 도덕에는 어떤 객관성(客觀性)이나 보편성(보편성(普遍性))이 없었으며, 그 때문에 사회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사람들은 주로 상대주의(相對主義) 혹은 회의주의적(懷疑主義的)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예컨대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481~411 B. C.)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尺度)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진리의 기준이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뜻이며, 따라서 이것은,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라는 상대주의를 표시하는 말이다.


소피스트들의 활동은 처음에는 민중(民衆)을 각성시키는 일종의 계몽적(啓蒙的)인 효과를 주었다. 그러나 점차로 회의론(懷疑論)의 입장을 취해가면서 진리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까지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그들은 변론(辯論)의 방법만을 중시하고, 궤변을 해서라도 논쟁에 이기려고만 하였기 때문에 나중에는 궤변가(詭辯家)라고도 불려지게 되었다.


3) 절대적(絶對的) 가치관


① 소크라테스


이러한 상황하에 소크라테스(Socrates, 470~339 B. C.)가 나타나서 이같은 현상을 크게 개탄하였다. 그는 소피스트는 아는 척하나 실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인간은 먼저 자기가 무지(無知)하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지적하면서 인간은 먼저 자신이 무지함을 아는 것이 참다운 知에 이르는 출발점이라는 것을 역설했다. 그리고 도덕의 근거는 인간의 내면에 내재(內在)하는 신(神)(다이모니온)에서 구했으며 따라서 도덕은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덕(德)이란, 진실하게 살기 위한 知의 애구(愛求)를 의미하며 德이 知이다라는 것이 그의 핵심사상이었다. 또 그는 덕(德)을 안다면 반드시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했다.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해야 참다운 지(知)를 얻을 수 있을까. 참다운 知는 타인(他人)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며, 또 자기자신에 의해서 깨달아지는 것도 아니다. 타인과의 대화(문답)를 통해서만 자기와 타인이 함께 납득할 수 있는 보편적진리(普遍的眞理, 참다운 知)에 도달할 수 있다고 스크라테스는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덕(德)을 확립함으로써 아테네를 사회적 혼란에서 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② 플라톤


플라톤(Platon, 427~347 B. C.)은 변화(變化)하는 현상계(現象界, 感覺界)의 배후에 변치 않는 본질의 세계가 있다고 보고 그것을 이데아계(叡知界)라고 불렀다. 그런데 인간은 혼(魂)이 육체에 갇혀 있기 때문에 보통 감각계(感覺界)를 참된 실재(實在)의 세계라고 생각했다. 본래 인간의 혼이 육체에 깃들기 전에는 이데아界에 있었으나 육체에 깃들게 되면서 이데아界를 떠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인간의 혼(魂)은 항상 참된 실재인 이데아界를 동경(憧憬)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에 있어서 이데아의 인식(認識)이란 흔히 이전에 알고 있던 것을 상기(想起)하는 일에 불과(不過)하다. 윤리적(倫理的)인 이데아에는 정의(正義)의 이데아, 美의 이데아, 선(善)의 이데아가 있으나 그중에서 선(善)의 이데아가 최고의 이데아라는 것이다.


플라톤은 인간이 가져야 할 덕(德)으로서 지혜, 용기, 절제, 정의의 네 가지 덕(德)을 들었다. 특히, 국가를 통치하는 자는 지혜의 덕(德)을 가진 철학자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바로 선(善)의 이데아를 인식한 사람이다. 플라톤에 있어서 선의 이데아는 모든 가치의 근원이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정신을 계승하여 절대적인 가치를 탐구(探究)했던 것이다.


(2) 헬레니즘의 로마시대의 가치관


헬레니즘시대란 알렉산더대왕(Alexander the Great, 356~323 B. C.)이 페르시아제국을 멸한 후부터 로마군이 이집트을 정복하여 지중해 세계를 통일할 때까지의 약 3세기 간을 말한다. 이 시대는 오로지 개인의 안심입명(安心立命)을 구하는, 개인주의 풍조가 지배하던 때였다. 폴리스 국가의 붕괴로 국가를 중심으로 한 가치관은 소용이 없게 되었고 그리스人들은 불안정한 사회정세하(社會情勢下)에서 부득이 개인의 생활방식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국가의 틀을 넘어서는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 cosmopolitanism)가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사상은 스토아학파(學派), 에피쿠로스학파(學派), 회의학파(懷疑學派)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개인주의의 사조(思潮)속에서 인간은 자기의 무력성(無力性)을 통감(痛感)하게 된다. 그러다가 로마시대에 이르러 인간은 인간이상의 위치에 있는 어떤 존재에 의지하기를 원하게 되면서 점차로 종교적인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결과 드디어 신플라톤주의(主義)의 결실을 보게 되었다.


1) 스토아학파(學派)


우주만물(宇宙萬物)에는 로고스(法則, 이성)가 깃들어 있으며 우주는 법칙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운행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사회에도 로고스가 깃들어 있다. 따라서 인간은 이성에 의해 우주의 법칙을 알고 자연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 스토아학파의 주장이었다.


스토아학파는 인간이 고통을 느끼는 것은 정욕(情欲)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정욕을 떠나 아파테이아(apatheia)-어떤 것에도 미혹되지 않는, 완전히 평정(平靜)한 마음의 상태(離欲狀態)-에 도달해야 한다고 하면서 금욕(禁欲)을 주장하였다.

 

즉 아파테이아가 최고의 덕(德)이었다. 그리스人이거나 동방인(東方人)이거나 전부 우주의 법칙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스토아학파에 있어서의 로고스는 신(神)이었다. 따라서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로서 동포인 것이다. 이리하여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 cosmopolitanism)가 세워지게 되었다. 스토아학파의 창시자는 키프로스의 제논(Zenon, 336~264 B. C.)이었다.


2) 에피쿠로스학파(學派)


금욕(禁欲)을주장한 스토아학파와는 반대로 쾌락(快樂)을 선(善)으로 설명한 사람들이 에피쿠로스(Epikuros, 341~270 B. C.)를 창시자(創始者)로 하는 에피쿠로스학파이다. 에피쿠로스는 현세에서의 개인적 쾌락만이 그대로 덕(德)과 일치한다고 생각했다. 이 쾌락은 육체적(肉體的)인 쾌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육체(肉體)에 있어서 고통이 없는 것과 영혼(靈魂)에 있어서 흐트러짐이 없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고통이 없는 평안(平安)한 마음의 상태를 아타락시아(ataraxia)-이고상태(離苦狀態)-라고 부르고, 이것을 최고의 경지로 삼았다.


3) 회의학파(懷疑學派)


인간은 사물에 대해서 이렇게 또는 저렇게, 즉 어떻게든지 판단(判斷)하려 하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다. 고로 마음의 平安을 얻으려면 일절(一切)의 판단(判斷)을 정지(停止)하라고 엘리스의 퓌론(Pyrrhon, 356~275 B. C.)은 말했다. 이것을 판단중지(判斷中止, 에포케, epoche)라고 한다. 인간에 있어서 진리(眞理)는 인식(認識)할 수 없으므로 일체의 판단을 그만두는 것이 소망스럽다고 회의학파(懷疑學派)는 주장했다. 스토아학파의 아파테이아도, 에피쿠로스학파의 아타락시아도, 회의학파(懷疑學派)의 에포케도 모두 개인적인 마음의 평안을 얻고자 하는 시도였다. 이때에 이르러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탐구(探求)했던 가치의 절대성은 의문시되기 시작한다.


4) 新플라톤주의(主義)


헬레니즘시대(時代)에 이어지는 로마시대에 있어서도 그리스철학(哲學)은 그대로 계승되었으나 헬레니즘의 로마시대의 철학이 궁극에는 플로티누스(Plotinus, 205?~270)의 新플라톤主義에 당도(當到, 도달)했던 것이다. 플로티누스는 일체의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유출(流出)되었다고 하는 유출설(流出說)을 주장했다.

 

즉 처음에는 하나님의 완전성에 가까운 누스(nous, 理性), 다음에 영혼(靈魂), 그리고 가장 불완전한 물질(物質)이라는 식으로, 단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유출(流出)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본래 그리스철학은 신(神)과 물질이 대립한다는 이원론(二元論)的인 입장이었으나 플로티누스는 하나님이 전체라고 함으로써 일원론(一元論)을 주장했다.


인간의 혼(魂)은 한편으로는 감성적인 물질세계로 흘러감과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누스에서 하나님으로 되돌아 가고자 한다. 그래서 인간은 감성적인 것으로부터 떠난 후 하나님을 직관(直觀)함으로써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고 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최대의 덕(德)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무아(無我, 엑스타시스, ecstasy)의 상태에서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가 된다고 하면서 그것을 최고의 경지라고 하였다. 그리스풍의 철학은 플로티누스와 더불어 종언을 고했지만, 新플라톤주의(主義)는 다음에 나타나는 기독교철학(哲學)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3) 中世의 가치관(價値觀)


1) 아우구스티누스


기독교신앙을 철학적으로 기초를 세운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였다. 그에 있어서 하나님은 영원(永遠), 불변(不變), 전지(全知), 전능(全能)하고, 최고의 선(善), 최고의 사랑, 최고의 미적(美的) 존재이며 우주의 창조주였다. 플라톤에 있어서 이데아의 세계는 그 자체로서 독립된 세계였으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데아를 하나님의 정신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모든 것은 이데아를 원형(原型)으로 하여 창조되었다고 주장했다.

 

또 세계는 하나님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유출(流出)된 것이라고 하는 新플라톤主義에 대하여, 하나님은 어떠한 재료(材料)도 사용하지 않고 완전한 無에서 자유로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창조론(創造論)을 주장하였다. 그러면 인간은 왜 죄(罪)의 존재인가. 인간시조(人間始祖) 아담이 자유를 악(惡)用한 후 하나님을 배반(背反)하여 타락했기 때문이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恩寵)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참다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하여 믿음, 소망, 사랑의 세 가지 덕(德)을 권하였다.


2) 토마스 아퀴나스


기독교신학(基督敎神學)을 확립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덕(德)으로서 신학적인 것과 윤리적(倫理的)인 것을 들었다. 신학적인 덕은 기독교의 三元德, 즉 믿음, 소망, 사랑이며, 윤리적(倫理的)인 덕(德)은 그리스철학의 4원덕(四元德), 즉 지혜, 용기, 절제, 정의이다. 신학적인 덕은 인간을 지복(至福)으로 인도하는 바, 그 중에서도 사랑이 궁극적인 것이어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인간은 지복(至福)을 받기에 합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편 윤리적(倫理的)인 덕(德)은 이성의 질서에 복종하는 것이다. 윤리덕은 신학적(神學的)인 덕(德)에 이르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看做)되었다.


(4) 근세(近世)의 가치관(價値觀)


중세가 지나고 근세에 이르러서는 이렇다 할 새로운 가치관이 나타나지 않았다. 근세의 가치관은 그리스철학이나 기독교 가치관의 연장 또는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는 종래의 모든 가치관을 의심(疑心)하는 데서부터 출발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소위 회의주의(懷疑主義)는 아니며 회의(懷疑)를 통하여 보다 더 확실한 것을 알고자 하는 시도(試圖)였다. 그 결과 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근본원리(根本原理)에 도달하였다. 그는 인간이 이성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으며, 여기에 인간은 이성에 의해 정념(情念)을 지배하면서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행위해야 한다는 데카르트의 도덕관(道德觀)이 생겨났다.


파스칼(B. Pascal, 1623~1662)은 인간을 위대함도 갖고 있고, 어리석음도 갖고 있는 모순(矛盾)的 존재(存在)라고 보았다. 그것을 그는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표현했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는 가장 약하나 생각함으로써 가장 위대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참 행복은 이성에 의한 것이 아니며 신앙에 의해서, 즉 심정(心情)에 의해서 하나님께 이르는 데에 있다고 주장했다.13) p.337


칸트(I. Kant, 1724~1804)는 순수이성비판(純粹理性批判), 실천이성비판(實踐理性비판批判), 판단력비판(判斷力批判)에서 각각 진(眞)-선(善)-미(美)가 어떻게 해서 성립하는가를 논하였다. 동시에 그는 이 3개의 비판에서, 인간은 이러한 각각의 가치를 실현해야 한다고 설파하였다. 특히 선(善), 즉 도덕에 있어서 인간은 실천(實踐)이성으로부터 오는 무엇 무엇을 하라라는 무조건적인 명령-정언명법(定言命法)-에 따라 행위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벤담(J. Bentham, 1748~1832)은 고통이 없는 쾌락의 상태를 행복이라 하면서 최대다수(最大多數)의 최대행복(最大幸福)이라는 원리를 세웠다. 이것이 그의 공리주의(功利主義)이다. 그는 쾌(快)와 고(苦)를 양적(量的)으로 계산함으로써 인간 행위의 가치를 결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벤담의 공리주의(功利主義)는 산업혁명을 배경으로 하여 생긴 가치관으로서 형상적(形狀的)인 가치관이라 할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 1813~1855)는 인간은 미적(美的) 실존(實存)단계, 윤리적(倫理的)실존(實存)단계를 거쳐서 종교적실존단계(宗敎的實存段階)에 이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실존의 3단계를 주장했다. 즉 인간은 쾌락속에서만 사는 것(美的단계)은 아니며, 또 윤리를 지키면서 양심적으로 사는 것(윤리적 단계)만으로도 불충분하며,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종교적 단계)고 역설(力說)했다. 키에르케고르는 참다운 기독교의 가치관을 부흥시키려고 애썼던 것이다.


니체(F. Nietzsche, 1844~1900)는 19세기말의 유럽을 모든 가치(價値)가 붕괴되어 가는 니힐리즘의 시대라고 보았다. 그에 있어서, 기독교는 강자를 물리치고 인간을 평균화한 노예도덕(奴隷道德)이며, 니힐리즘을 초래한 최대의 원인자였다. 그래서 그는 권력(權力)에의 의지(意志)를 기준으로 한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한 것이다. 하나님이 없는 세계에서 강력(强力)하게 살자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었다.


진(眞)-선(善)-미(美)의 가치를 통일적으로 다루면서 가치를 철학의 중심문제로 취급한 사람은 新칸트학파(學派)의 빈델반트(W. Windelband 1948~1915)였다. 칸트는 사실문제와 권리문제를 구별하였으나 이것을 이어 받은 빈델반트는 사실판단(事實判斷)과 가치판단(價値判斷)을 구별하였다. 그리고 철학의 임무는 가치판단을 취급하는데 있다고 주장하였다.


사실판단(事實判斷)은 사실을 개관적으로 인식한 명제(命題)이며, 가치판단(價値判斷)은 사실에 대하여 주관적인 평가를 내린 명제(命題)이다. 예컨대, 이 꽃은 붉다라든가, 그는……… 을 하였다라는 것은 사실판단이며, 이 꽃은 아름답다라든가, 그 행위는 선(善)이다라고 하는 것은 가치판단이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자연과학이 다루어 온 것은 사실판단(事實判斷)이고, 철학이 다루어 온 것은 가치판단(價値判斷)이라고 하면서 사실과 가치를 완전히 분리해서 다루었던 것이다.


금세기에 이르러 언어(言語)의 논리적(論理的) 분석(分析)을 철학의 방법으로 사용하는 분석철학이 생겨났다. 분석철학은 가치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입장을 취하였다. ① 가치는 직각(直覺)에 의해 알 수밖에 없다. ② 가치판단이란 발언자의 도덕적인 찬성(贊成)이나 혹은 불찬성(不贊成)이라는 감정의 표명에 불과하다. ③ 가치론(價値論)은 가치언어의 분석에만 의의(意義)가 있다. 이리하여 분석철학은 대체적으로 철학에서 가치관을 배제하려고 하였다.


듀이(J. Dewey, 1859~1952)에 의해 대표되는 프래그머티즘은 생활에 대한 유용성(有用性)을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다. 따라서, 진(眞)-선(善)-미(美)와 같은 가치(價値)개념(槪念)도 사물을 유효하게 처리하기 위한 수단이요, 도구밖에 되지 않는다고 보게 되었다. 이와 같은 입장에 있어서, 무엇이 가치있는 것인가는 사람에 따라 다르며 비록 동일인물(同一人物)에 있어서도 때에 따라 달라진다. 이같은 듀이의 입장은 상대적(相對的)인 가치다원론(價値多元論)이었다. 마지막으로 공산주의의 가치관(價値觀)을 살펴보자.


공산주의의 가치관으로서는 예컨대 투가리노프(B. P. Tugarinov, 1898~)의 다음과 같은 정의(定義)가 있다. 가치(價値)란 역사적으로 특정한 사회 또는 계급에 속한 사람들에게, 현실의 것으로서 또는 목적 내지 이상으로서 유용하고 필요한, 자연 및 사회의 현상이다."14) 즉 공산주의에 있어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유용하다는 것이 가치의 기준이었다. 여기에서 부르주아的 가치관이라고 일컬어지는 기존의 종교적 가치관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이, 공산주의 가치관의 전제(前提)가 되고 있다. 그리고 공산주의에 있어서의 도덕이란 공산주의사회를 건설하는데 있어서 집단생활을 추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헌신, 복종(服從), 성실, 동지애, 상호부조 등이 그 내용이다.


(5) 새로운 가치관(價値觀)의 출현(出現)의 필요성(必要性)


이와 같이 역사상에 많은 가치관들이 나타났으나, 그것은 절대적 가치를 수립하려고한 시도들이 모두 붕괴되어 온 역사였다고 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에 있어서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은 참다운 지(知)를 추구함으로써 절대적인 가치(價値)를 수립코자 하였다. 그러나 폴리스사회의 붕괴와 더불어 그리스철학의 가치관도 붕괴되어 버렸다. 다음에 기독교가 하나님의 사랑(아가페)을 중심으로 하여 절대적인 가치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결국 기독교의 가치관은 중세사회를 지배하였으나, 중세사회의 붕괴와 더불어 점차 힘을 잃고 말았다.


근대에 이르러 데카르트나 칸트는 그리스철학과 마찬가지로 이성을 중심으로 한 가치관을 수립했으나 가치관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파악이 애매함으로 인하여 그 가치관은 절대적인 것이 되지 못하였다. 한편 파스칼이나 키에르케고르는 참다운 기독교의 가치관을 부흥시키려 했지만, 확고한 가치관을 수립하지는 못하였다.


新칸트학파(學派)는 가치의 문제를 철학상의 주요문제로서 다루었으나 가치를 취급하는 철학(哲學)과 사실을 취급하는 자연과학(自然科學)을 완전히 분리시켜 버렸다. 그 결과, 오늘날 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과학자들이 가치를 도외시하고 사실만을 연구한 결과, 인류를 대량으로 살육(殺戮)하는 병기의 개발, 자연환경의 파괴, 공해문제 등을 초래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공리주의(功利主義)나 프래그머티즘은 물질적인 가치관으로서 완전히 상대적인 가치관이 되었으며, 분석철학(分析哲學)은 가치부재(價値不在)의 철학이었다. 그리고 니체의 철학이나 공산주의는 전통적 가치관에 대한 반가치(反價値)의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철학이나 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전통적인 가치관은, 오늘날 더 이상 효력이 없는 것으로 보여지게 되었으며, 전통적인 가치관은 취약화(脆弱化)되면서 자연과학에서 분리(分離)되어 드디어는 철학의 영역(領域)에서도 배제(排除)되기에 이르렀다. 그럼으로써 오늘의 사회(社會)혼란(混亂)은 극도에 달하게 되었다. 여기에 전통적인 가치를 소생시키면서 절대적 가치를 수립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관의 출현이 절실히 요청된다.

 

따라서 새로운 가치관은 유물론(唯物論)을 극복하고, 올바른 가치관으로 과학을 인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치(價値)와 사실(事實)은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관계에 있는 것이어서 사물에 있어서 성상과 형상이 통일되어 있는 것과 같이, 가치와 사실도 본래 하나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시대적 요청에 응답하고자 출현한 것이 本가치론(價値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