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사상 - 제5장 교육론(敎育論) - 3

2010. 1. 6. 16:38참사랑 영원까지/통일사상

二. 교육(敎育)의 3형태(三形態)


이와 같은 이념(理念)을 기반으로 할 때, 인간에게는 어떤 형태의 교육이 필요할까. 개체완성(個體完成)을 위해서는 심정교육(心情敎育)이 필요하고, 가정완성을 위해서는 규범교육(規範敎育)이 필요하고, 주관성완성을 위해서는 기술교육(技術敎育), 지식교육(知識敎育), 체육(體育) 등의 주관교육(主管敎育)이 필요하다. 다음에 이 세 가지 교육의 형태에 대해서 살펴보자.


(1) 심정교육(心情敎育)


1) 개체완성(個體完成)을 위한 교육


하나님의 완전성을 닮게 하는 교육이 심정교육이다. 하나님의 완전성을 닮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통일성을 닮는다는 것으로서, 그것은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이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서 수수작용을 하여 하나된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에 있어서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은 심정을 중심하고 수수작용을 함으로써 통일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생심과 육심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심정과 같은 심정(心情)이 생심과 육심의 수수작용의 중심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심정(心情)이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의 중심이 되려면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해서, 개인의 중심이 되는 그 심정이 하나님의 심정과 일치(一致)되어야 한다. 개인의 심정이 하나님의 심정과 일치(一致)하도록 하는 교육을 심정교육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심정교육(心情敎育)은 개체완성(個體完成)을 위한 교육이 된다.


심정교육(心情敎育)이란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처럼, 피교육자(被敎育者)로 하여금 만민과 만물을 사랑할 수 있는 인간으로 기르는 교육이다. 그와 같은 인간으로 양육하기 위해서는 피교육자(被敎育者)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학생(피교육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2) 하나님의 심정(心情)의 표현 형태


하나님의 심정은 창조와 복귀섭리의 과정을 통하여 세 가지의 형태로 표현되었다. 즉 소망의 심정, 슬픔의 심정, 고통의 심정이 그것이다.


① 소망(所望)의 심정(心情)


소망의 심정이란, 우주 창조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심정으로서, 무한한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가장 사랑하는 최초의 자녀, 아담과 해와를 얻는다는 기대(期待)와 소망에 찬 기쁨의 감정을 말한다. 이 소망의 심정이 달성되었을 때 말할 수 없는 만족에 찬 기쁨을 느낀다. 실제로 아담과 해와가 태어났을 때 하나님의 기쁨은 표현할 길이 없는 만족에 찬 기쁨이었던 것이다.


최근 물리학에 의하면, 150~200억년이라는 오랜 기간 전에 우주가 생성(生成)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것은 통일원리로 볼 때 150~200억년 전에 우주가 창조(創造)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하나님이 이렇게 오랜 기간을 두고 우주를 창조하신 이유(理由)가 무엇일까. 그것은 가장 사랑하는 자녀인 아담과 해와를 창조하시기 위함이었다. 그 한 자녀를 얻기 위한 한 때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그와 같은 오랜 기간을 걸쳐서 우주를 창조하신 것이다. 희망에 찬 하나님은 우주 창조의 과정이 아무리 길고 어렵더라도 그것이 길다거나 괴롭다고는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경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즉 기쁜 결과를 바라보면서 일을 준비할 때는, 그 일이 아무리 어려운 것같이 예견(豫見)되더라도 실제로 부딪혀 보면 그렇게 괴로움을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시간은 속히 흘러간다. 그것은 머지않아 기쁨이 다가온다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기쁨의 결과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는 우리 인간들이 경험하는, 그와 같은 기쁨에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훨씬 큰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아담과 해와가 태어났을 때 하나님의 기쁨은 비할 바 없이 크고 깊은 것이었다.


② 슬픔의 심정(心情)


슬픔의 심정이란, 아담과 해와가 타락하여 사망권내(死亡圈內, 사탄의 지배하)에 떨어졌을 때의 하나님의 감정을 말하는 것으로서 자식(子息)을 잃고 슬퍼하는 부모(父母)의 감정과 같은 하나님의 감정을 뜻한다. 초창기때 선생님의 설교 말씀이 아담과 해와의 타락에 미치게 되면, 그 때의 하나님의 그 슬픈 심정을 소개하면서 슬피 통곡하시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였다.

 

그리고 아담과 해와의 타락 직후부터 복귀섭리를 시작한 후에도 장차 뜻이 이루어질 미래의 기쁨과 소망의 세계를 바라보며 하나님은 섭리를 진행시키셨지만,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의 그 섭리를 아랑곳 하지않고 퇴폐(退廢)와 난폭(亂暴)만을 일삼고 있었으니, 이 광경(光景)을 바라보시면서 그때마다 또 다시 탄식하시고 슬퍼하시곤 하셨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역사를 섭리해 오신 하나님은 슬픔의 하나님인 동시에 한(恨)의 하나님이 되신 것이다. 즉 창조할 때의 기대(期待)와 소망(所望)이 너무 컸기 때문에 타락에 의해 초래(招來)된 하나님의 실망의 슬픔은 그 만큼 더 컸던 것이다.


속세(俗世)에서도 사랑하는 자식이 죽었을 때 부모(父母) 특히 그 어미(母)는 심히도 애통(哀痛)해 한다. 비록 자식의 병이 위중해서 불치(不治)의 병이라고 선고되었더라도, 실제로 숨이 끊어지면 슬퍼서 어쩔 줄 모르는 모정(母情)이 적지 않다. 아담과 해와가 타락했을 때의 하나님의 슬픈 심정과, 감옥과 같은 사탄세계에서 고생하는 아담과 해와와 그 후손들의 모습을 보시는 하나님의 슬픔의 심정은, 자식을 잃은 세속적(世俗的)인 부모의 슬픔과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것이었다. 역사 이래 하나님처럼 슬픈 인간은 일찍이 이 세상(世上)에 없었다는 것이 문선생께서 알려주신 하나님의 심정의 모습의 하나였다.


③ 고통(苦痛)의 심정(心情)


고통의 심정이란 복귀섭리(復歸攝理)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섭리역사의 중심인물들이 사탄과 그 앞잡이들로부터 박해(迫害)를 당하면서 고통당하는 것을 보실 때의 하나님의 아픈 감정을 말한다. 즉 타락한 인간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되살리기 위해서 선지선열(先知先烈)과 성현(聖賢)들을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기는커녕 도리어 그들을 박해하고 때로는 학살(虐殺)까지 하는 광경을 바라보실 때마다 하나님의 가슴은 못이 박히고 창에 찔리는 듯이 아프셨던 것이다. 타락세계의 인간들을 기어이 살리시기 위해서 보내신 성현(聖賢)들이나 의인(義人)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당하는 멸시(蔑視)와 조소(嘲笑), 박해(迫害)와 천대(賤待)는 바로 하나님 자신에 대한 멸시와 조소로 느끼셨으며, 하나님 자신에 대한 박해와 천대로 느끼신 것이다. 이리하여 복귀섭리노정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또 하나의 심정은 고통의 심정이었다.


3) 하나님의 심정(心情)의 이해(理解)


심정교육(心情敎育)을 위해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세 가지 심정을 피교육자(被敎育者, 학생)들에게 이해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복귀노정에서의 하나님의 심정을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다. 참고로 아담가정(家庭), 노아가정(家庭), 아브라함가정(家庭), 모세노정(路程), 예수님노정(路程) 등의 복귀노정에 나타난 하나님의 심정을 소개하고자 한다. 다음은 문선생께서 소개하신 하나님의 심정(心情)에 관한 내용이다.


① 아담 가정(家庭)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심정(心情)


소망 가운데 아담과 해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한없는 소망과 기쁨으로 가득차 있었으나, 아담과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한없이 비통해 하셨다. 그래서 아담가정을 구하기 위하여 아담과 해와의 자식인 가인과 아벨에게 헌제(獻祭)를 시켰으며, 그 때 하나님은 그들의 헌제(獻祭)가 성공할 것이라는 큰 소망을 가지고 그 자리에 임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全知全能)하므로 아담과 해와나 가인?아벨이 실패한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것 아닌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한탄하고 슬퍼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비록 인간이 타락할 수도 있으리라는 가능성(可能性)을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심정의 하나님이요,

 

따라서 소망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타락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타락의 가능성(可能性)에 대한 예지(豫知)에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했던 것이다. 헌제(獻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헌제에 걸었던 하나님의 기대(期待)는 엄청나게 컸던 것이다. 헌제에 건 하나님의 소망이 이처럼 강했기 때문에 헌제의 실수(失手)의 가능성(可能性)에 대한 예지(豫知)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계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심정(心情)(사랑)과 이성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심정의 충동력 그 자체는 이성을 압도하리만큼 강력(强力)한 것이다.


이리하여 아담과 해와 때도 가인?아벨 때도 하나님의 심정은 성공만을 원하신 소망의 하나님이었다. 그런데 아담과 해와도, 가인?아벨도 실패하고 말았으므로 그 슬픔이 비길 데 없이 컸음은 상술한 바와 같다. 그런데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은 그 슬픔을 외부로 표현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런 장면(場面)마다 항상 사탄이 함께 있어서 주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즉 슬픔을 외부에 나타내면 슬픔에 젖은 그 하나님의 모습이 사탄에게는 위신도 권위도 없는, 하나님답지 않은 초라한 모습으로만 비쳐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북받쳐 오르는 슬픔을 누르면서 비장(悲壯)한 얼굴로 그곳을 떠나가신 것이다. 이것이 초창기에 문선생님께서 알려주신 아담가정에서의 하나님의 심정이었다.


② 노아 가정(家庭)에서의 하나님의 심정


아담가정을 떠난 하나님은 1600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광야(曠野)의 길을 걸으시면서 지상의 협력자를 찾아 헤매셨다. 그동안 인간들은 모두 하나님에게 등을 돌릴 뿐, 누구도 하나님을 맞이하는 자가 없었다. 이리하여 世上에는 하나님이 머물 수 있는 한 채의 집도, 설 수 있는 한치의 땅도, 상대할 수 있는 사람 하나도 없었다. 문자 그대로 천애(天涯)의 고독단신(孤獨單身)의 처량한 신세가 되어서 쓸쓸한 길을 걸으신 것이다.

 

그러다가 드디어 하나님은 한 사람의 협력자(協力者)인 노아를 만나셨다. 하나님의 기쁨은 비할 데가 없었다. 하나님은 그러한 섭리적 사정 때문에 사랑하는 노아에게 엄한 명령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바로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이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노아는 사람들에게 온갖 조롱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모든 정성을 다 바쳐서 120년간 방주를 지었다.


노아는 단지 하나님 앞에 세워진 종이요, 의인(義人)이었을 뿐, 하나님의 아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비록 종일지라도 그와 같은 노아를 만난 것이 그렇게도 기뻐서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종의 입장으로 내려와 노아와 함께 고난의 길을 걸으신 것이다. 그런데 홍수심판을 거친 뒤에 노아의 아들 함이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홍수(洪水)심판에서 살아남은 유일(唯一)한 가정이었던 노아가정에 다시 사탄이 침범한 결과가 되어 버렸다. 그 때 하나님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같은 아픔과 슬픔을 느끼면서 또 다시 쓸쓸한 모습으로 노아가정을 떠나신 것이다.


③ 아브라함 가정(家庭)에서의 하나님의 심정


그 후, 4백년 만에 아브라함을 찾아 세웠다. 아브라함노정(路程)에 있어서 아브라함에게 가장 괴로웠던 것은 아브라함이 백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제물(祭物)로 바칠 때였다. 비둘기와 양과 암소를 바치는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실패한 아브라함에 대하여 하나님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도록 명령하신 것이다. 그 때 아들을 살릴 것인가, 천명(天命)에 따라 자식을 바칠 것인가, 즉 인륜(人倫)을 따를 것인가 천륜(天倫)을 따를 것인가를 두고 아브라함은 고민했다. 자기의 아들을 바치는 대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고 싶을 정도로, 이삭을 살리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로 했다. 인륜(人倫)을 끊고 천륜(天倫)을 따르기로 결심한 것이다. 모리아산(山)을 향해 가는 3일간의 기간은, 아브라함에 있어서 천륜(天倫)이냐, 인륜(人倫)이냐를 택일해야 하는 고뇌의 시간이었다. 그 때 하나님은 멀리서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아이를 바쳐라라는 엄한 명령을 내리시고는, 아브라함의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함께 아니 그 이상으로 괴로워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은 모리아山에서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자식 이삭을 제물(祭物)로 바치기 위해 칼을 들고 죽이려 했을때, 하나님은 드디어 그를 죽이지 말라고 황급히 말리시면서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내가 아노라(창세기 22:12)고 말씀하셨다. 그 때 하나님의 뜻을 대하는 아브라함의 심정과,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과 순종과 충성은 이미 그로 하여금 이삭을 죽였다는 입장에 서게 한 것이다. 따라서 이삭을 죽이지 않아도 죽인 것과 같은 조건(條件)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 죽이는 것을 中止시키고, 대신에 숫양을 번제로 드리게 했다. 여기에 이제야………라고 하신 말씀 속에는 그동안 아브라함에 대해 느끼셨던 하나님의 섭섭함과, 이삭헌제(獻祭)에서 보인 아브라함의 충성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이 함께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④ 모세노정(路程)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심정(心情)


애급의 왕자로서 성장하던 모세는 동족인 이스라엘민족이 받고 있는 고통의 현장을 목격한 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복귀(復歸)시키기로 작정하고 천신만고 끝에 그들을 광야로 인도했으나, 이스라엘백성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지도자인 모세에 대해 반역(反逆)을 하곤 했다. 한 번은 모세가 시내山에서 40일간의 금식(禁食, 단식)을 마친 후, 두 개의 석판을 받아 가지고 山에서 내려오면서 보니 이스라엘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빌고 있었다. 모세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 불신(不信)의 행위를 보고 크게 화를 내면서 석판(石板)을 던져버렸다. 그 때 하나님은 내가 이 백성(百姓)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애급 32:9~10)고 하셨다.


그 때의 모세의 심정(心情)은 어떠하였을까. 이스라엘백성들의 불신이 괘씸은 했으나 이 백성을 내가 진멸하겠다는 하나님의 진노를 대할 때, 순간적으로 그의 애족(愛族), 애국(愛國)의 심정이 솟구쳤다. 그리하여 그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다 해도 이 민족(民族)을 살리고 싶었으며, 할 수만 있으면 함께 가나안땅에 들어가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매달려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 (출세기 32:12)라고 하면서 민족을 살려달라고 간구했다. 하나님은 모세의 그 애족심(愛族心)어린 호소의 기도를 용납하셔서 드디어 이스라엘민족을 진멸코자 했던 뜻을 철회하신 것이다.


그런데 40년간 광야(曠野)를 유랑(流浪)한 후, 가데스바네아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이스라엘백성들은 마실 물조차 없다면서 모세를 또 원망하였다. 그 때 모세는 불신하는 이스라엘백성들에 대한 노여움 때문에 한 번 쳐야할 바위를 두 번 쳐버린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짓이었다. 그 후 하나님은 비스가 山上에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백성이 들어가게 될 가나안 땅을 보여 주면서 너는... ...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리라(신명기 32:52)라고 하신 것이었다. 80 노구를 이끌고 40일 금식을 두 번씩이나 했던 모세, 불신하는 민족을 붙들고 40년간이나 신광야에서 고생했던 모세였다. 사실상 출애급의 주역인 모세를 가나안 땅에 인도하고 싶은 하나님이었지만 사탄의 참소 때문에 할 수 없이 눈앞에 있는 그 곳을 환상으로만 보여 주시고는 그를 버릴 수 밖에 없었던 하나님이었다. 여기에 하나님의 깊은 슬픔과 아픔과 안타까움이 있었던 것이다.


⑤ 예수 노정(路程)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심정(心情)


구약성서에 기록된 대로(이사야 9:6) 예수님은 지상(地上)에 메시아로 오셨다. 온 땅이 쌍수를 들고 환영하지 않으면 안될 구세주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릴 때부터 배척(排斥)당하였다. 가족들이 예수를 몰랐고 유대교가 예수를 불신했으며, 결국 이스라엘백성들이 예수님을 쫓아낸 것이다. 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던 예수님이었다.


예수님은 3년간의 공생애노정을 포함해서 33년간 쓸쓸하고 고독(孤獨)한 생애를 보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人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누가 9:58)라고 하면서 그 고독한 심정을 토로(吐露)했으며,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고 눈물지으시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받은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누가 19:41~44)고 하면서 저주하기도 했다. 때로는 갈릴리 해변을 거닐면서 또는 선민(選民)이 아닌 사마리아여인(女人)과 말을 나누면서(요한 4:7~26) 외로움을 달랬으며, 유대인의 지도자들보다 세리(稅吏)들과 창녀(娼妓)들이 먼저 천국에 들어간다(마태 21:31)고 하면서 구세주이신 자신을 몰라주는 교단들에 대한 섭섭함을 고백하기도 하셨다. 이 때 하나님도 고독한 예수님과 더불어 고독한 길을 걸으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십자가(十字架)에 달리신 독생자(獨生子) 예수님의 그 처참한 모습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하셨겠는가. 너무나 참혹한 모습을 하나님은 차마 볼 수 없어서,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독생자를 내려 놓을 수 없는 사정을 한탄하시면서 얼굴을 돌리셨다. 그 장면이 세 시간의 어둠이었다. 예수님의 십자가형(十字架刑)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고통은 예수님의 고통 이상의 것이었다.


4) 하나님의 심정(心情)의 소개


이상은 모두 초창기에 선생님께서 설교때마다 흐느껴 우시면서 소개하신 내용들이다. 곧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의 노정(路程)을 통하여 보여준 하나님의 심정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나 이민족(異民族)에 있어서의 성현(聖賢), 의인(義人)들의 수난의 노정 배후에도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심정이 있었다는 것이다. 심정교육에 있어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심정을 부모(父母) 혹은 교사(敎師)들이 학생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직접 말씀으로써 들려줄 뿐만 아니라 텔레비전, 라디오, 영화, 비디오 등의 매스컴이나 소설, 연극, 회화 등의 작품을 통해서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5) 실천(實踐)을 통한 심정교육(心情敎育)


하나님의 심정을 말로 알릴뿐 아니라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직접 보이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가정에서 부모가 자식에게 진실로 사랑을 베풀지 않으면 안 된다. 먹이고 입히고 거처를 제공하고, 잠을 재우고 하는 일, 예절을 가르치는 일 등 가정에서 자식(子女)들을 보살핌에 있어서 항상 지성어린 따뜻한 사랑을 베풀어 주어야 한다.

 

이것이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참사랑이다. 이런 사랑을 부모가 계속해서 자식들에게 보인다면, 자식들은 그 부모를 진심으로 존경하면서 효도하게 되는 것은 물론 자식들 상호간에도 사랑을 실천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심정이 부모의 참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자식들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학교교육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교사는 말과 행동의 실천을 통하여 하나님의 참사랑을 보여야 한다. 매 학과마다 정성을 다해서 가르치는 것은 물론이고, 아동 하나 하나에 대해서 부모의 심정을 가지고 내 자식처럼 정성을 다하여 보살펴 주어야 한다. 학교교육은 가정교육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일상의 言語와 행동(行動)에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어야 한다.

 

공사간(公私間)의 생활에 있어서의 선생의 말 한마디, 행동의 일거수(一擧手) 일투족(一投足)이 피교육자(被敎育者)에게는 모두 배움의 교재가 되고 인격 형성의 소재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랑에 넘친 학교교육을 받는 동안 아동들은 깊은 감동을 받게 되며, 그 스승을 존경하고 따르게 될 뿐 아니라, 드디어 그 스승을 닮게 됨으로써 참사랑의 실천자가 되는 것이다. 이상이 가정과 학교에 있어서의 실천을 통한 심정교육이다.


(2) 규범교육(規範敎育)


1) 가정완성(家庭完成)을 위한 교육(敎育)


가정완성을 위한 교육이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부부(夫婦)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양음(陽?陰)의 조화를 닮을 수 있게 하는 교육으로서 본연의 부부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도록 하는 교육이 다. 인간타락이 규범(規範)(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은데 있었으므로, 이 교육은 우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하는 규범교육인 것이다. 남성(男性)은 남편으로서의 도리(道理)가, 여성(女性)은 아내로서의 도리(道理)가 몸에 배도록 배워 익히게 한다. 또 가정에서의 부모와 자녀의 본연적(本然的) 자세나 형제자매(兄弟姉妹)의 자세도 규범교육에 포함된다.


규범교육에 있어서 특히 중요한 것은 性의 신성성(神聖性), 신비성(神秘性)에 대하여 가르치는 일이다. 性은 결혼을 통하여 비로소 체험하는 것이므로 그 때까지는 결코 범해서는 안 된다는 규범을 일깨우는 일이다. 성서에 의하면,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에게 선악(善惡)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는 따 먹어서는 안 된다(창세기 2:17)고 하셨다. 선악과는 해와의 성적(性的)사랑(원리강론 1987, p. 85)을 의미하기 때문에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지 말라는 것은, 性(性的器官)은 신성한 것이므로 성적영역(性的領域)을 범함으로써 성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계명은 아담과 해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유효(有效)하다. 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영원히 유효(有效)한 하늘의 지상명령(至上命令)인 것이다. 이것은 또 남녀가 결혼(結婚)한 뒤에도, 다른 이성(異性)과의 탈선(脫線)행위가 결코 허락되지 않는 지상명령이기도 하다. 따라서 규범교육(規範敎育)이란 첫째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양음(陽陰)의 조화를 닮도록 하는 교육, 즉 부부의 자격을 갖추도록 하는 부부(夫婦) 자격교육인 것이다.


2) 이법적(理法的) 존재(存在)가 되게 하는 교육(敎育)


인간은 logos(이법(理法))로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규범교육(規範敎育)은 또한 인간으로 하여금 로고스的 존재, 이법적(理法的) 존재(存在)가 되도록, 즉 천도(天道)를 따를 수 있게 하는 교육으로서 이법(理法)교육(敎育)이라고도 한다. 천도(天道)란 우주를 꿰뚫고 작용하고 있는 법칙으로서 수수작용의 법칙을 말한다.

 

그런데 이 천도에서 두 종류의 법칙, 즉 자연법칙(自然法則)과 가치법칙(價値法則)이 도출되는데 이 중의 가치법칙이 바로 규범이다. 우주에 종적질서와 횡적질서가 있는 것처럼 가정에도 종적질서와 횡적질서가 있다. 그리하여 가정에는 이 두 질서에 대응하는 가치관이 성립한다. 즉 종적가치관과 횡적가치관이 그것이다. 그 밖에 개인적 가치관이 있는 바, 그것들에 대해서는 이미 가치론(價値論)에서 언급한 대로이다.


규범교육(規範敎育)은 심정교육과 병행하여 실시(實施)되어야 한다. 규범교육 그 자체는 의무만을 강요하기 쉽기 때문이다. 규범(規範)이란, ... ... 해서는 안 된다 라든가, ... ...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식으로 행위를 규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사랑이 없으면 그 규범은 형식화(形式化)되거나 율법적(律法的)인 것이 되기 쉽다. 따라서 규범교육은 사랑의 분위기속에서 실시(實施)되어야 한다. 심정교육이 병행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규범(規範)없이 무턱대고 하는 사랑을 일반적으로 익애(溺愛)라고 한다. 그와 같은 사랑으로 자식을 대하면 자식은 마침내 분별력이 없어지고 부모나 교사를 경시(輕視)하게 된다. 부모의 사랑이나 교사의 사랑에는 어딘지 모르게 권위(權威)가 있어야 한다. 그러한 사랑은 로고스를 터로 한 사랑이 아니면 안되며, 또 사랑은 적게 베풀고 규범만을 강조하면, 아동들은 구속감(拘束感)을 느껴서 부모나 교사를 싫어하게 된다. 사랑은 규범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그 위에 있어야 한다. 따라서 자식이나 아동이 비록 규범을 한 두번 지키지 않았더라도 따뜻한 사랑을 가지고 용서해 주어야 한다.


사랑과 규범(規範)은 통일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랑은 원만하고(둥글고) 규범은 직선적(直線的)이기 때문에 사랑과 규범이 통일된 인간은 원(圓)과 직선(直線)을 통일적으로 지닌 인격자가 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용서하고 모든 것을 수용(受容)하려 하지만, 규범은 엄하게 규제(規制)하고자 하기 때문에 규범교육은 심정교육과 통일되어야 한다.

 

즉 가정과 학교내에 사랑의 분위기가 충만된 가운데서 아동의 규범교육이 실시되어야 한다. 규범 때문에 사랑이 냉각되면 그 규범은 형식화(形式化)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격자란 가장 원만하면서도 엄격한 면을 갖춘 사람, 즉 양면성(兩面性)을 통일적으로 구비한 사람을 말한다. 이와 같은 인격을 가진 인간은 어떤 때는 대단히 엄하고, 또 어느 때는 매우 온화(溫和)하며, 때와 장소에 따라 언제든지 어울리는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된다.


(3) 주관교육(主管敎育) : (지식교육(知識敎育), 기술교육(技術敎育), 체육(體育))


1) 주관성(主管性) 완성(完成)을 위한 교육


마지막으로 주관교육은 주관성완성을 위한 교육이다. 주관성완성을 위해서는, 먼저 주관의 대상에 대한 정보(情報), 즉 지식(知識)을 습득(習得)해야 하는 바, 이것을 위해서 첫째로 지식교육(知識敎育; 知育)이 필요하다. 다음은 대상을 주관하는데 필요한 창조성을 개발하기 위해서 기술을 습득(習得)하는 교육도 필요하다. 이러한 교육이 기술교육(技術敎育; 技育)이다.

 

그리고 주관(主管)을 잘 하려면 주관의 주체인 인간은 체력을 증진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위한 교육이 체육(體育)이다. 이상(以上)의 지육(知育), 기육(技育), 체육(體育)을 합해서 주관교육(主管敎育)이라고 한다. 한편 지육(知育)에 있어서 주관에 필요한 지식과 학문은 주관(主管)의 대상의 영역(領域)에 따라서 자연과학을 위시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광범위한 分野에 걸치게 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분야 등의 활동도 모두 만물주관의 개념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기육(技育)에 있어서의 기술은 만물주관의 직접적인 수법(手法)으로서 주관교육의 중심이 되며, 체육(體育)에 있어서의 체위(體位)의 향상과 체력의 증진도 만물주관에 긴요함은 물론이다. 그리고 기술교육(技術敎育)이나 체육에도 다시 세분된 전문분야가 있다. 그리고 예술에 관한 교육, 즉 예능교육(藝能敎育)도 일종의 기술교육으로 볼 수 있다. 요컨대 주관교육은 창조성을 발휘하기 위한 수단 배우는 것이다. 창조성은 천부적(天賦的)인 것으로서 인간에게는 누구나 선천적(先天的)인 가능성으로서 구비하고 있지만 이것을 현실적으로 발휘(發揮)하기 위해서는 주관교육이 필요하다.


2) 창조성(創造性)의 개발과 2단구조(構造)의 형성


창조성의 개발이란, 요컨대 하나님의 창조의 2단구조(構造)를 본받아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 형성(形成)의 능력을 증진시키고 외적사위기대(四位基臺) 형성(形成)의 숙련도를 높인다는 뜻이다.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 형성(形成)의 능력이란 로고스의 형성 능력, 즉 구상(構想)의 능력을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식교육(知識敎育)을 통하여 지식을 많이 獲得하여 내적형상(觀念, 槪念) 등)의 내용을 질적, 양적으로 높이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얻은 지식(情報)이 많을수록 구상이 풍부(豊富)해진다. 로고스를 형성(구상(構想))한다는 것은 소위 아이디어의 개발을 뜻하며, 산업(産業)에 있어서의 기술혁신(innovation)도 부단(不斷)한 로고스형성(구상(構想))의 반복(反復)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된다.


다음에 외적사위기대(四位基臺) 형성(形成)의 능력을 양성한다는 것은 일정한 구상에 따라 도구나 재료를 사용하여 구상을 실체화하는 능력을 높이는 것, 즉 외적수수작용(授受作用, 手技)의 숙련도를 높이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술교육이 필요하다. 또 신체적 조건이 필요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따라서 체육에 의한 체력의 증진도 필요하다.


3) 보편교육(普遍敎育)을 기반으로 한 주관교육(主管敎育)


주관교육은 심정교육 및 규범교육을 기반으로 하되 그것들과 병행하여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식교육(知識敎育)이나 기술교육이나 체육은 심정(心情, 사랑)과 규범에 근거해야 비로소 건전한 것이 되고 창조성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정교육과 규범교육은 전인류가 모두 공통적으로 받아야 할 교육이므로 보편교육(普遍敎育)이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주관교육은 개인(個人)의 자질에 따라 배우는 영역으로서 어떤 사람은 자연과학(自然科學), 어떤 사람은 文學, 또 어떤 사람은 경제학을 전공하는 등 원칙적으로 개별교육(個別敎育)이 된다.


여기에서 보편교육(普遍敎育)과 개별교육(個別敎育)은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심정교육과 규범교육은 정신적 교육, 즉 마음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이며, 주관교육은 만물을 주관하는 교육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편교육(普遍敎育, 심정교육(心情敎育), 규범교육(規範敎育))과 개별교육(個別敎育, 주관교육(主管敎育))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서 병행하여 실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균형교육(均衡敎育; balanced education)이다.

 


그리스시대나 중세(中世), 근세(近世)에도 비록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사랑의 교육이 있었고, 윤리?도덕(道德)교육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것들이 거의 무시(無視)되기에 이르렀으며, 교육은 거의 전부가 지식편중(知識偏重), 기술편중(技術偏重)의 소위 불균형교육(不均衡敎育)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 인간성의 건전한 성장이 지장을 받기에 이르렀으며 따라서 여기에 새로운 교육론이 나타나서 새로운 차원에서 참된 사랑의 교육 특히 윤리?도덕교육을 실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기반 위에서 지식교육(知識敎育)과 기술교육(技術敎育)이 행해져야 하며 이러한 균형교육(均衡敎育)이 시행될 때 비로소 과학기술(科學技術)이 보다 선한 방향으로 지향(指向)해 나아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공해문제(公害問題)나 자연의 파괴 등의 문제도 자연히 해결되어 갈 것이며 교사들도 이와 같은 교육을 통하여 교사로서의 권위를 되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여기서 다시 부언(附言)하거니와 교육의 원점(原點)은 가정교육(家庭敎育)에 있다. 가정교육이 연장, 확대, 발전한 것이 학교교육이다. 따라서 가정교육과 학교교육이 일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보편교육으로서의 심정교육(心情敎育)과 규범교육(規範敎育)이 제대로 시행(施行)되기 어렵게 되며, 따라서 교육의 통일성은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