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사상 - 제5장 교육론(敎育論) - 6

2010. 1. 6. 16:36참사랑 영원까지/통일사상

五. 통일사상에서 본 종래의 교육관(敎育觀)


그러면 종래의 교육론을 통일사상의 입장에서 평가해 보자. 플라톤은 선(善)의 이데아를 인식(認識)한 철학자를 이상적 인간상이라 하고, 그와 같은 철학자가 국가를 통치하면 이상국가(理想國家)가 실현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리스시대에 있어서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철학자는 출현하지 않았고, 또 선(善)의 이데아는 국가(國家, 폴리스)에서 실현되지도 않았다.

 

그리고 헬레니즘시대에 이르러, 폴리스의 붕괴와 더불어 이데아의 사상도 붕괴되어 버렸다. 선(善)의 이데아사상(思想)이 막연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명백히 밝혀지지 않는 한, 선(善)의 기준은 정해질 수 없으며, 따라서 그 이상은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중세(中世)의 기독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인간이 되도록 교육한다고 했으나 그러한 사랑은 아가페的인 사랑으로서 십자가상(十字架上)의 예수님의 희생(犧牲)의 사랑이었다. 그러나 왜 하나님의 사랑은 이와 같은 희생의 사랑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도대체 인간은 왜 사랑해야 하는가가 밝혀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러한 기독교의 교육관으로는 인간성에 눈뜬 근대인(近代人)들을, 확신(確信)을 가지고 인도(引導)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르네상스시대(時代)의 교육은 억압(抑壓)되어 왔던 인간성을 해방한다는 점에서는 높이 평가될 만하지만, 16세기 중엽부터는 고전(古典)을 학습하는 일에 국한(局限)되면서 교육은 형식화되어 갔다. 또 인간중심에 치우쳤기 때문에 피교육자는 종교적(宗敎的)인 도덕성을 점차 잃게 되었던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인간에 내재(內在)하고 있는 소질(素質, 자연(自然))을 이끌어내는 것이 교육의 역할이라고 하였지만, 그 내재(內在)한다는 소질이 어떤 것인가가 명확하지 않았다. 또 참된 지식을 얻으면 그것이 그대로 덕(德)과 신앙으로 연결된다고 하는 범지주의(汎知主義)에 문제가 있다. 통일사상에서 보면, 참된 지식교육은 심정교육(心情敎育)과 규범교육(規範敎育)을 기반으로 할 때 비로소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코메니우스가 주장한 세 가지 교육은 통일교육론의 심정교육, 규범교육, 주관교육에 통하는 바 있다고 볼 수 있다.


루소도 인간을 자연 그대로 성장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나 그가 말하는 인간의 `자연(自然)'도 애매하였다. 인간의 성질을 무조건 선(善)으로 규정한 데도 문제가 있다. 하나님의 심정(心情, 사랑)을 중심으로 한 심정교육과 규범교육을 행하지 않는 한, 아무리 자연 그대로 기른다 하더라도 본래의 인간의 모습으로 성장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칸트는 도덕교육(道德敎育)에 중점을 두었으나 그의 도덕교육에는 확고한 기반이 없었다. 도덕(道德)의 기반이 되어야 할 하나님은 요청(要請)될 뿐인 존재(存在)에 불과해서 실존(實存)하고 있는지 없는지 애매했다. 또 칸트에 있어서는 개인적규범으로서의 도덕만이 문제가 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인간 상호간의 규범으로서의 윤리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페스탈로치는 지식교육, 도덕과 종교교육, 기술교육의 세 가지가 사랑에 의해 통일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통일사상에서 말하는 심정교육을 기반으로 한 규범교육, 주관교육의 사고방식(思考方式)을 닮고 있다. (페스탈로치의 지식교육과 기술교육은 통일사상의 주관교육에 해당하고, 도덕과 종교교육은 규범교육에 해당한다 하겠다).

 

또 전인격적(全人格的) 교육(敎育)이라는 생각과, 가정이 교육의 기반이라는 생각도 통일교육론과 일치한다. 그러나 교육의 목적이 3대축복(三大祝福)의 완성에 있다는 것을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또 도덕과 종교교육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에 관한 이해가 불충분(不充分)하였다. 그 때문에 페스탈로치의 교육이념(敎育理念)도 확고한 것이 되지는 못하였다.


페스탈로치의 교육론을 계승(繼承)한 프뢰벨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그런데 프뢰벨은 이상적(理想的) 인간상을 신성(神性)을 가진 인간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닮도록 인간을 성장시키는 것이 교육의 본질이라고 하는 통일교육론의 입장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헤르바르트는 관념(觀念, 표상)과 그 상호관계가 감정이나 의지 등의 모든 정신활동을 일으키는 근원(根源)이라고 생각하여 사상권(思想圈)을 도야함으로써 도덕적품성(道德的品性)이 실현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 볼 때, 사상의 도야로 도덕성이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심정(心情, 사랑)을 중심으로 하여 선(善)의 가치를 추구하고 규범(規範)을 지킴으로써 도덕성이 실현되는 것이다.


듀이는 교육(敎育)의 목적을 인정하지 않고 다만 성장과 진보를 강조했다. 그런데 목적을 명확히 설정하지 않은 채 성장이나 진보를 주장한다고 해서 인간 본성의 소외나 사회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실제로 과학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오늘날 듀이의 교육방법을 실시(實施)해 온 바로 그 미국사회에서, 많은 사회적인 병폐가 나타나고 있다. 듀이가 목표로 한 실천적(實踐的)인 기술교육은 심정교육과 규범교육이 뒷받침이 되지 않는 한(限), 건전한 인간과 사회를 형성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主義)가 말하는 부르주아지의 계급적 지배의 도구(道具)로서의 자본주의교육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도구(道具)로서의 사회주의교육은, 계급투쟁이라는 측면에서 사회를 본 교육관에 불과하다.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이나 유물사관(唯物史觀)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이 이론의 터 위에 세워진 공산주의 교육관도 잘못된 것이다.

 

또,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전면적(全面的)으로 발달한 인간을 목표로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지(知)-정(情)-의(意)의 기능이 균형적으로 발달한 인격(人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노동도 할 수 있도록 노동자의 노동의 능력을 전면적(全面的)으로 발달시킨다는 의미이다. 또 노동과 결부된 총합(總合)기술교육(技術敎育)을 주장했지만 노동에 중점을 두고 있는 교육이기 때문에 총합기술교육(總合技術敎育)은 단순한 노동기능의 교육이 되어버렸다. 또 집단주의교육(集團主義敎育)은 개성의 존엄성과 인간의 자유를 억압(抑壓)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끝으로 민주주의의 교육은 개인의 가치나 존엄성을 기본(基本)으로 한 것이긴 하지만, 개인의 권리를 존중한 나머지 개인주의(個人主義), 이기주의(利己主義)의 풍조를 낳았다. 또 인도주의(人道主義)에 입각하여 인간성을 주장함으로써 가치관이 상대화하게 되었다. 그 결과, 사회의 혼란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을 터로 한 심정교육(心情敎育)과 규범교육(規範敎育)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개인의 가치와 존엄성이 확고한 것이 되며, 사회의 조화(調和)와 질서가 유지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