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리본체론 - 전편 - 제1장 창조원리 - 3

2013. 1. 6. 21:33참사랑 영원까지/원리 본체론

3) 신상과 신성의 구조(철학의 관점)

 

하나님에게는 신상(神相)과 신성(神性)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는 않지만 꼴, 다시 말해서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꼴을 신상이라고 합니다. 신성은 그 꼴 속에 있는 하나님의 기능·성질·능력 등을 말합니다. 신상은 외적인 것이고 신성은 내적인 것입니다.

 

신상과 신성이 관계성을 가지고 정분합작용(正分合作用)을 할 수 있는 구조가 사위기대(四位基臺)입니다. 정분합작용을 하기 위해서는 수수작용(授受作用)을 해야 합니다. 수수작용을 하지 않으면 정분합작용이 일어나지 않고 정분합작용이 일어나지 않으면 사위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체와 대상이 만유원력(萬有原力)에 의해 상대기준(相對基準)을 조성하여 잘 주고 잘 받으면, 거기에서 존재를 위한 모든 힘, 즉 생존과 번식과 작용 등을 위한 힘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발생하는 작용을 수수작용이라고 합니다.

 

수수작용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원리의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 원리의 힘이 바로 만유원력입니다. 만유원력은 종적인 힘이고, 수수작용은 횡적인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수작용과 만유원력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설명합니다.

 

(1) 신상

신상(神相)이란 하나님에 대한 꼴의 측면을 말합니다. 신상에는 보편상(普遍相)과 개별상(個別相)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보편상

보편상은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닮아서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질을 말합니다. 인간에서부터 소립자에 이르기까지 피조만물은 전부 하나님의 신상을 닮아 지어졌습니다. 신상의 보편상은 성상·형상, 양성·음성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성상과 형상, 양성과 음성의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피조물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속성이라서 보편상이라고 합니다.

 

개별상

한편 모든 피조물에는 독특한 개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개별상을 닮아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개별상은 저마다 다른 특성을 놓고 하는 말입니다. 그것을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라고 합니다. 피조만물은 하나님의 신상을 닮아서 나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편상과 개별상을 닮았습니다.

 

만물이 종별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개별상입니다. 동물은 종 그자체로 개별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나 말은 종별로 하나님의 개별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릅니다. 인간은 각각의 개체가 하나님의 무한한 개별상을 가진 독특한 개별체입니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녀라도 생김새가 다르고 개성도 다르고 취향도 다 다릅니다. 하다못해 쌍둥이도 뱃속에서부터 함께 자라서 태어났지만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존재가 이처럼 다른 개성을 가진 것은 하나님의 개별상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보편상이라고 하는 꼴을 닮았으면서도 개성은 전부 다릅니다. 인간은 개체가 개성진리체이지만, 다른 만물은 종별로 개별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개별상을 실체로 닮아서 완성해야 하는 인간에게 책임분담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제외한 만물 세계에는 책임분담(責任分擔)이라는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2) 신성                  

신성(神性)이란 하나님에 대한 기능·성질·능력의 측면을 말합니다. 인간은 보편상이든 개별상이든 하나님의 신상을 닮고 있으면서도 내적으로는 하나님의 신성을 닮았습니다. 심정·로고스·창조성 이 세 가지가 하나님의 신성의 기본적인 요소입니다. 그 중에서도 심정은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입니다.

 

심정

하나님 신성의 첫 번째 요소인 심정(心情)은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인 본성상의 핵입니다. 무한한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가장 근본된 속성이 심정입니다. 심정이 끊어지면 참사랑은 없습니다. 그래서 타락(타락론에서 밝힘)한 아담과 해와를 죽은 인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930세까지 살았지만,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죽은 인간이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과 본질적인 관계가 끊어졌다는 뜻입니다.

 

심정은 참사랑의 뿌리입니다. 그러므로 참사랑에서 참생명이 나오고 참생명이 연결된 생식기를 통해서 참혈통이 이어집니다. 심정이 끊어졌기 때문에 참사랑이 없어졌고, 참사랑이 없기 때문에 참생명과 참혈통도 나오지 못했습니다. 심정을 잃어버린 것이 거짓사랑입니다. 거짓사랑은 심정을 뿌리로 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로고스

하나님 신성의 두 번째 요소는 로고스(Logos)입니다. 로고스는 이법(理法)이라는 뜻입니다. 로고스는 헬라어로 이성(理性)과 법칙(法則)을 뜻하는데, 이성은 자율성(自律性)을 말하고 법칙은 필연성(必然性)을 말합니다. 법칙은 인간이 변경할 수 없습니다. 모든 자연계에는 법칙이 있는데 어떤 존재든 그 법칙에 순응해야 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인간에게는 가치법칙(價値法則)도 있습니다. 가치법칙은 우리 인간이 보다 가치 있는 것, 보다 선한 것을 추구하는 법칙입니다. 인간은 본성에 따라 욕망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가치를 이루고자 노력합니다. 본성에 따라 욕망을 추구하는 것을 가치추구욕(價値追求欲)이라 하고, 가치를 이루고자 노력하는 것을 가치실현욕(價値實現欲)이라 합니다.

 

이법(理法) 가운데는 이성(理性)인 자율성이 들어 있습니다. 봄이 오면 산에 꽃이 피고, 땅 속에서 새싹이 돋아나고, 나뭇가지에 새순이 나오는데 그것은 필연적인 자연의 법칙입니다.

 

그런 자연의 법칙이 있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육신을 가지고 자연의 법칙에 순응함과 동시에 이성으로 사물을 판단합니다. 이성은 다른 만물이 갖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이성은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으로서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는 인간의 본질적 특성입니다.

 

자율성은 자기 스스로의 원칙에 따라 어떤 일을 하거나 자기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고 절제하는 성질을 말합니다. 인간은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그 법칙을 준수하면서, 이성을 가지고 자율적으로 생활하는 존재입니다.

 

창조성

신성의 세 번째 요소는 창조성(創造性)입니다. 인간은 이성과 자율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뭔가를 만들고자 하는 창조성을 갖고 있습니다. 과학자가 과학기술을 통해서 새로운 제품을 발명하는 것만 창조성이 아닙니다.

 

창조성은 인간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주 왕복선을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볼펜심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손으로 뜨개질을 해서 예쁜 옷을 만드는 창조성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독특한 창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북한의 주체사상(主體思想)은 인간이 주체이며, 인간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이 모든 것의 주체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주체사상에서도 인간의 세 가지 본질을 거론합니다. 인간이 갖추고 있는 3대본질은 자주성(自主性)·의식성(意識性)·창조성(創造性)이라고 합니다.

 

그런 주체사상만 있으면 안 됩니다. 주체사상이 있다면 대상사상(對象思想)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북한은 대상사상을 규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북한을 비판하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해야 올바른 형제로서 같은 길을 갈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를 모신 자식으로서 해야 할 도리입니다.

 

의식성이나 창조성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생물이 가지고 있습니다. 새도 새끼를 낳아서 기를 수 있는 나름의 창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까치는 봄이 되면 집을 짓는데 그 까치집을 보면 그 해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많이 불지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면서도 그 해 바람이 어느 쪽에서 많이 불지 잘 모르는데, 까치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까치는 바람이 많이 부는 방향에 절대로 입구를 만들지 않습니다. 바람이 많이 부는 방향과 정반대 쪽에 입구를 만듭니다. 까치가 집을 지을 때 입구를 어느 쪽으로 내는 가를 잘 관찰하면 ‘금년에는 동남풍이 많이 불겠구나.’ 혹은 ‘북서풍이 많이 불겠구나.’하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배에 살고 있는 쥐는 그 배가 항해하다가 파선할 것 같으면 출항하기 전에 전부 밧줄을 타고 육지로 나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걸 모르고 항해하다가 죽습니다.

 

남미에 가면 개미가 많습니다. 개미들이 집을 짓는데, 지상 1미터쯤 되는 개미집도 있습니다. 남미의 개미집은 망치로 깨도 잘 안 부서집니다. 그 지역의 토질이 단단하기 때문입니다. 개미들이 지상 1미터 높이의 집을 지었으면 땅 속으로는 얼마만큼 깊이 파들어갔겠습니까? 개미가 그렇게 집을 높이 짓는 이유는 그 지역에는 홍수가 잦기 때문입니다. 1미터 되는 개미집이 물속에 잠겼다면 개미들은 벌써 나무 위로 다 올라 가버리고 난 뒤입니다.

 

사람은 자연재해가 닥치는 것을 모른 채 살고 있는데, 개미는 벌써 알고 이동합니다. 그래서 개미집으로 올라가면 ‘비가 이 정도 오겠구나.’ 하고, 만일 개미들이 대이동을 해서 나무 꼭대기로 올라가면 ‘이번엔 대홍수가 나겠구나.’하고 대피합니다. 그런 면에서는 개미가 인간보다 낫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창조성은 하나님의 심정이 동기가 됩니다. 사랑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고 억제할 수 없는 정(情)의 충동심인 심정이 동기가 되어서 창조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기 전에는 하나님도 성장해가는 것입니다. 성장해서 심정의 완성자, 참사랑과 인격의 완성자가 될 때 비로소 창조의 동기가 부여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것은 사랑하고 싶은데 사랑할 대상이 없고, 위하고 싶은데 위할 수 있는 대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고 기뻐하고 싶은 마음의 충동으로 창조가 벌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성을 가지고 직접 당신을 창조했습니다. 하나님에게도 심정의 완성기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정의 본체로 계시다.’는 말만으로는 ‘하나님이 커간다, 하나님이 당신을 창조한다.’는 말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에게도 자녀의 심정·형제의 심정·부부의 심정·부모의 심정이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심정 영역이 4대심정권(四大心情圈)입니다. 하나님이 4대심정권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대상이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도 당신 속에 스스로 완전한 창조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완전하게 실체로 느끼고 체휼하고 완성하기 위해서는 대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가 없는 사람이 부모의 심정을 어떻게 느낄 수 있겠습니까? 형제가 없으면 형제의 심정을 느낄 수 없습니다. 부모가 없는데 자녀의 심정을 어떻게 느끼고, 결혼하지 않아서 배우자가 없는데 부부의 심정을 어떻게 느끼겠습니까?

 

부부의 심정을 느끼려면 실체로 사랑할 수 있는 부부가 있어야 합니다. 부모 역시 자녀가 있어야 부모의 심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4대심정권에는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인 심정이 다 들어 있습니다.

 

심정은 바로 참사랑의 뿌리이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의 심정을 닮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닮은 것이 바로 창조성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닮아야만 인간도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창조할 때에도 심정이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심정이 동기가 되지 않는 창조물을 놓고 하나님이 기뻐할 수 없습니다. 사업을 하더라도 심정이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이윤을 얻는 것이 사업의 목적이지만 반드시 심정이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한 동기가 심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심정은 하나님의 성상에 해당하는 부분이고, 로고스는 하나님의 형상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로고스는 이법(理法)입니다. 원리와 질서와 법도가 로고스 속에 들어 있습니다. 창조성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심정에 대한 전체의 내용입니다. 그것이 절대성(절대적인 성)을 통해 혈통으로 연결됩니다. 그러니까 절대성과 심정은 일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속에 있는 원리는 다 연관성이 있습니다. 본체이신 한 분 속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창조성은 심정이 바탕이 되어 있으며, 심정은 절대성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본연의 혈통과 연결되려면 ‘위하는 생활’이 필수입니다. 위하여 사는 것이 바로 심정문화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혈통 자체는 위하여 살게 되어 있습니다. 혈통은 심정을 바탕으로 한 참사랑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참사랑은 위하여 살게 되어 있고 심정은 혈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를 지었지만, 아담·해와도 책임분담으로 스스로 성장·완성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속성을 자기의 책임분담으로 완숙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완숙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닮고, 몸을 닮고, 하나님의 절대성을 닮아야 합니다. 이러한 내용이 하나님의 신성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본체 속에 있는 속성은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호 관계성은 정분합작용(正分合作用)이라는 하나의 구조로 나타납니다. 정분합작용은 온전한 상태인 정(正)에서 분리된 상태인 분(分)이 되었다가 다시 본래의 모습, 즉 합성체인 합(合)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정분합작용은 수수작용을 통해서 벌어집니다.

 

하나인 정(正)에서 출발한 주체와 대상, 분(分)이 수수작용을 통해 새로운 합성체, 합(合)이 되면 삼대상목적(三對象目的)이 이루어지는데 존재위치를 놓고 보면 그것이 사위기대(四位基臺)입니다. 그래서 정분합작용이 없으면 삼대상목적이 이루어지지 않고 삼대상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위기대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결국 수수작용이 일어나지 않으면 번식이 없다는 뜻입니다.

 

(3) 신성의 내부

신성은 하나님의 마음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신성에는 내적 성상(內的性相) 내적 형상(內的形狀)이 있습니다. 내적 성상은 기능적 요소(機能的要素)이고, 내적 형상은 어떤 꼴에 해당하는 요소, 즉 형(形)의 요소(要素)입니다.

 

내적 성상

내적 성상(內的性狀)인 기능적 요소가 바로 지정의(知情意)입니다. 지정의는 마음의 3대작용요소(三大作用要素)입니다. 하나님은 지정의의 본체로 계십니다. 하나님에게는 지(知)와 정(情)과 의(意)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모두 융합되어 있습니다. 융합된 지정의를 갖춘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인격적인 신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지 속에는 정과 의가 있고, 정 속에는 지와 의가 있고, 의 속에는 지와 정이 있는 것입니다.

 

지(知)는 지적인 기능입니다. ‘지’는 아는 것을 통해서 인식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지에도 이성(理性)·오성(悟性)·감성(感性)의 세 가지가 있습니다. 지적인 기능이 고장 나면 인식능력이 마비됩니다.

 

철학은 인간 속에 이성과 오성과 감성이 있다고 밝히고 있지만, 그런 요소가 어디서 왔는지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통일원리’에서는 그러한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에 작용하는 기능이 지·정·의인데, 이는 하나님의 내적 성상을 닮아서 나온 것입니다.

 

이성(理性)은 보편적으로 진리를 탐구하는 능력으로, 냉철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오성(悟性)은 원인과 이유를 논리적으로 묻고 따지며 ‘옳다’ 또는 ‘그르다’고 판단합니다. 감성(感性)은 오감을 통해서 아는 능력인데, 직감적 인식능력입니다. 감성을 가진 사람은 정적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직감이 예민하게 발달한 사람이 있고 둔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감정들이 모두 감성에 해당합니다.

 

지적인 기능인 이성·오성·감성을 이해하기 쉽도록 구분해서 따로따로 설명하지만 그것들은 사실상 연합체로 되어 있습니다. 이성 속에는 이성과 감성 둘 다 있지만, 그 중심이 이성이며, 오성 속에도 오성과 감성 둘 다 있지만 오성이 더 강합니다.

 

정(情)은 정적인 기능, 정감성(情感性)을 말합니다. 정감성은 정적인 기능으로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도 기쁠 때는 기뻐하고, 슬플 때는 슬퍼하고, 노여울 때는 한없이 노여워하십니다. 하나님도 기쁠 때는 누구보다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춤을 춘다면 천주가 즐거워 춤을 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희로애락의 감정을 가지고 계신 것은 정감성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도 하나님처럼 희로애락의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과 더불어 화동(和同)하고 화목(和睦)하고자 하고, 하나 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노래할 때 자기도 모르게 노래가 나오고, 흥이 겨우면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 덩실덩실 춤을 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 희로애락의 감정인데 그런 감정은 하나님을 닮아서 갖게 된 것입니다.

 

의(意)는 의적인 기능, 의욕성(意慾性)입니다. 의욕성이 강하면 욕구·결심·결단능력이 강해집니다. 지·정·의의 기능을 조화롭게 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인격자입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 됩니다. 지적인 사람도 그것만 가지고는 정과 의를 소화할 수 없습니다. 지적인 사람끼리 만나면 늘 싸움만 합니다. 서로 잘났다고 싸움만 합니다. 그런 사람은 상대적으로 정적인 사람과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정으로 지를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정적인 사람은 정만 가지고 있으면 안 됩니다. 정적인 사람은 반드시 어떤 목적과 방향을 설정하고 갈 수 있는 의지적인 면, 지적인 면을 겸해야 합니다. 자신이 지와 정을 겸하면 좋은데 그렇지 못했을 때는 지적인 상대를 만나야 합니다. 한쪽이 불인데 상대방도 불이면 큰일이 납니다. 이쪽이 물인데 저쪽도 물이면 흐리멍덩해집니다. 높은 데가 있으면 낮은 데가 있습니다. 반드시 상대적입니다. 모든 것은 이와 같이 상대적 개념 속에 존재합니다.

 

제일 어려운 사람이 지적인 사람입니다. 의적인 사람이 바로 행동파인데, 그런 사람이 혁명을 일으킵니다. 지적이거나 정적인 사람은 혁명을 못합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절대로 혁명을 못 일으킵니다. 혁명은 모르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아는 사람은 먼저 계획을 세우더라도 행동은 반드시 다른 사람을 시킵니다. 무지한 사람은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자기 마음속에서 결심하면 가서 일을 저질러 버립니다.

 

의욕성은 욕구와 결심과 결단을 실행할 수 있는 마음과 같은 요소입니다. 의욕성이 매우 약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의욕성이 강한 사람이 선두에서 끌고 가야 합니다. 조직 세계도 그런 마음의 작용을 알아야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이든 심정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심정을 떠난 사람은 잘못된 행동을 하기 쉽습니다. 자기 욕구를 위해서 남을 미워하기도 하고 남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정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심정이 뿌리가 되지 않은 정은 자기를 중심한 정이 되어 버립니다.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정이 신성의 근본입니다.

 

내적 형상       

하나님에게는 내적 형상(內的形狀)이 있습니다. 형상은 어떤 형태를 가진 꼴을 말합니다. 이는 형(形)의 요소(要素)라고 하며, 관념(觀念)과 개념(槪念)과 원칙(原則)과 수리(數理)가 이에 해당합니다.

 

관념(觀念)은 구체적 표상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놓고 보면, 하나님은 먼저 구상을 하신 후 모든 것을 창조했습니다. 우리가 집을 지으려면 먼저 머릿속에 구상을 합니다. 하나님도 존재세계를 만들어갈 때 먼저 하나하나 구상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체적인 표상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구체적으로 구상해서 창조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모든 기능은 같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생식기입니다. 생식기를 어디에 만들 것인지 구체적으로 구상했습니다. 눈과 코를 어디에 붙일 것인지 구상했습니다. 초점이 맞지 않으면 사물을 정확히 볼 수 없기 때문에 앞에 눈 두 개를 붙였습니다. 그리고 코를 한 가운데에 종적으로 세웠습니다. 그 다음에 귀를 양쪽에 달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체 하나 하나를 구상했습니다. 그냥 창조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내적 형상 속에 있는 하나의 꼴, 즉 형상이 구체적인 표상인데, 그것을 관념이라고 합니다.

 

개념(槪念)은 추상적 표상입니다. 예들 들어 ‘동물이다.’ 하면 그것은 추상적인 표현입니다. ‘개’라는 이름 자체는 추상입니다. 개는 개인데 진돗개인지 삽살개인지, 어떤 종류의 개인지를 밝히는 것은 구체적 표상입니다. 사람이라고 하면 추상적이지만 남자 또는 여자라고 하면 좀 더 구체적이 됩니다. 개념은 이러한 구체적인 표상을 갖기 전에 나타나는 추상적인 표상입니다.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했을 때 개념이 관념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원칙(原則)은 법칙을 말하는 것인데, 원칙에는 자연법칙(自然法則)과 가치법칙(價値法則),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자연법칙은 우주의 모든 질서와 법칙을 말합니다. 예들 들어서 태양계를 보면, 태양을 중심해서 지구가 돌고 있습니다. 지구도 태양 주위를 돌면서 자전을 하고 있습니다. 지구 이외에도 아홉 개의 행성이 태양을 중심해서 돌고 있습니다. 지구 이외에도 아홉 개의 행성이 태양을 중심해서 돌고 있습니다. 또 지구를 중심으로 달이 돌고 있습니다. 수억만 년이 지났어도 태양계가 돌아가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주의 질서와 법도는 어김이 없습니다. 모든 존재의 질서와 법도는 하나님이 지으신 원리와 법도대로 운행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연법칙입니다.

 

우리 인간도 그러한 법칙에 의해 살아갑니다. 가정에서도 부모와 자식에 대한 생활의 법칙, 규범이 있습니다. 부부 사이에도 규범이 있습니다. 형제 사이에도 규범이 있고, 친구 사이에도 규범이 있습니다. 이웃과 이웃 간에도 규범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와 같은 외적 환경을 만들어놓으시고 그 존재세계의 주인으로 인간을 지었습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법도를 무시하고 살도록 지은 것이 아닙니다. 인간도 자연환경의 법칙에 순응해야 할 육신이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도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인간에게는 가치법칙이 있습니다. 상품의 가치를 논하는 것도 가치지만 여기서는 윤리적 가치를 말합니다. 사람이 윤리적 가치를 잃어버리면 가치 없는 인간이 됩니다. “저 사람 쓸모없는 사람이야, 저 사람 형편없어, 쓰레기 같은 사람이야, 가치 없는 사람이니 상대하지 마라.”는 등의 욕설을 듣는 것은 인간으로서 윤리적으로 인간답게 살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윤리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면 비록 휠체어를 타고 다니더라도 “저 사람 참 좋은 사람이다, 저 사람 참 안됐구나, 저 사람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윤리의 토대가 하나님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도 그 원칙을 지키면서 존재합니다. 하나님은 질서와 법칙과 원칙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내가 그 법칙과 원칙에 따라 살면 하나님은 자동적으로 나와 함께하십니다. 내가 아무리 “하나님 오십시오. 나를 도와주십시오.”해도 내가 원칙에 따라 생활하지 않을 때는 하나님은 도와주실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환경이 밀어내버립니다. 우리 인간에게 왜 고통이 오느냐? 창조주의 원칙에 위배되었을 때 그 원칙이 인간을 배척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서부터 고통이 옵니다.

 

하나님은 수리(數理)의 하나님입니다. 나타나는 것은 모두 수리적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고도의 수학자이자 고도의 과학자이며 고도의 예술가입니다. 하나님을 닮아 지어놓은 모든 존재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미(美)의 대상이고, 사랑의 대상이고, 기쁨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우주선을 만들거나 인공위성을 만드는 기술도 수리적으로 표현됩니다. 그것이 이미 하나님의 성상적인 내부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피조만물은 모두 수리적으로 존재합니다.

 

창조하려면 먼저 구상을 해야 합니다. 구상은 추상적이지만 그것이 점점 구체화되어 나타납니다. 구체화된 것이 실체로 나타날 때는 수리적인 법칙을 따릅니다. 창조에는 반드시 이런 고도의 법칙이 있습니다.

 

(4) 하나님의 정체(正體)   


첫째, 하나님은 심정과 참사랑의 본체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인 본성상의 본질적 요소가 심정과 참사랑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정체를 말하려면 맨 먼저 심정과 참사랑이 나옵니다.

 

둘째, 하나님은 지정의(知情意)와 진미선(眞美善)의 본체입니다. 일반적으로 마음의 3대기능은 지정의라고 보고 있습니다. 원리의 본체 되시는 하나님 안에 지정의가 있습니다. 그 지정의는 하나님의 본성상을 이루는 요소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원리와 법도와 질서의 근원이신 원리(原理)의 본체(本體)입니다.

 

넷째, 하나님은 참사랑과 참생명과 참혈통의 근원이신 절대성(絶對性)의 본체로 계십니다. 하나님이 절대성의 본체로 계신 이유는 하나님은 참사랑·참생명·참혈통의 본체요, 근원 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참사랑과 참생명은 절대성을 통해서 참혈통으로 이어집니다. 참아버지의 절대성 정자는 참사랑의 씨이고, 참어머니의 절대성 난자는 참생명의 몸입니다. 참생명의 몸인 참어머니의 절대성 난자는 참아버지의 절대성 정자인 참사랑의 씨를 받아서 비로소 혈통을 잇게 되는데, 그 혈통은 참사랑과 참생명이 결합된 곳에서 출발합니다. 그곳이 남자와 여자의 생식기입니다. 그래서 생식기는 절대성을 가져야 하고 순결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이 참사랑과 참생명과 참혈통의 본체요 근원으로 계신 하님을 닮은 자리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허락을 받으면 참사랑·참생명·참혈통을 실체로 번식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절대성 본체를 닮은 절대성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 하나님은 양심(良心)의 주체입니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선을 추구하는 양심이 있습니다. 그 양심의 주체가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에서 선으로 작용합니다. 절대적인 양심의 본체가 하나님인 것입니다.

 

여섯째, 하나님은 생명의 본체요, 근원자(根源者)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과학과 의술이 발달해도 생명을 창조하지 못합니다.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입니다. 줄기세포로 환자를 치료한다고 하지만 결국 그 자체도 인체의 생명단위인 세포를 증식해서 치료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생명체의 요소를 번식하거나 증식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전혀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서 생명체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본체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사랑에 의해서 새로운 생명체인 자녀가 나오지만 그 남자와 여자도 하나님 안에서 나온 것입니다. 또 그 속에 잠재되어 있는 생명의 씨인 정자와 생명의 몸인 난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본체 속에 있던 두 요소가 실체를 통해 나오기 때문에 결국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일곱째, 하나님은 절대·유일·불변·영원하신 자존자(自存者)이시고,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분입니다. 절대라는 말은 유일하기 때문에 나왔고, 영원이라는 말은 불변하기 때문에 나왔습니다. 모든 분야에서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유일·불변·영원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절대자요, 스스로 계시는 자존자입니다.

 

하나님이 무소부재하시다는 말은 안 계신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 인간을 놓고 보면 몸은 보이지만 마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은 꼴이 있지만 실체가 없습니다. 마음은 꼴을 가진 요소로서 몸 안에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마음이 어디에 있다고 규정은 못하지만 마음은 있습니다. 마음은 몸 안에서 무소부재한 존재입니다. 마음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언제 언디에서나 작용합니다.

 

그렇다고 마음이 육신 안에만 국한되어 존재하지 않습니다. 육신을 벗어난 우주 공간 어디서든지 활동할 수 있는 속성이 있습니다. 마음은 육신에서 무소부재하지만 육신을 벗어나서도 어디서든 활동하고 운행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몸 안에서 무소부재하고 몸 밖에 나가서도 원리본체가 지어놓은 우주 공간 어디서든지 작용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 요소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천주를 지으신 하나님은 천주의 어디든지 운행하고 작용하십니다. 한곳에만 계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성경 마태복음 6장 9절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 했습니다. 하늘이라는 개념은 무형세계를 뜻하고, 땅은 지상세계를 말합니다. 우주 공간과 무형세계를 합쳐서 천주(天宙)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천주 가운데 안 계신 곳이 없는 무소부재하신 분입니다.

 

여덟째, 하나님은 밤의 하나님이요, 낮의 하나님으로 계십니다. 또 하나님은 만왕(萬王)의 왕이요, 참부모입니다. 또 하나님은 예수님의 조상이시고, 참부모님의 조상이십니다.

본성상과 본형상을 달리 표현하면 밤의 하나님과 낮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밤에는 보이지 않던 형체가 낮이면 드러나는 것을 비유한 표현입니다. 그것이 마음의 하나님, 몸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되는 성상적인 밤의 하나님을 실체화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몸이 되는 형상적인 낮의 하나님을 창조하셨습니다. 스스로 몸의 하나님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 동기는 밤의 하나님입니다. 밤의 하나님 속에 정해진 구상, 즉 추상적인 관념이 하나의 원칙과 수리에 의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낮의 하나님입니다.

 

몸의 하나님도 무형이기 때문에 실체를 지녀야 합니다. 그래서 당신의 몸이 되도록 아담과 해와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몸인 아담과 해와는 계대(繼代)로 보면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은 마음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4대심정권을 닮아서, 하나님과 일체를 이룬 심정의 자리에 나아가야 하고, 몸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절대성을 닮아야 합니다. 마음과 몸을 통해서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창조된 아담과 해와가 완성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성전, 즉 몸이 됩니다. 낮의 하나님, 몸의 하나님의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실체인 아담과 해와가 완성하여 개인적으로 마음과 몸이 통일되고 그런 남자와 여자가 통일체가 되면, 하나님도 두 속성의 본체로 계시기 때문에 마음의 하나님인 밤의 하나님과 몸의 하나님인 낮의 하나님이 통일체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무한소(無限小) 또는 무한대(無限大)의 영(靈)으로 계십니다. 힘으로 볼 때도 무한소 또는 무한대의 힘으로 계십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천주의 핵이고 모든 존재의 핵입니다. 그 핵은 한점과 같습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수천·수만·수억 킬로미터를 가더라도 그 점은 존속합니다. 하나님은 무한대의 영으로 계시지만 무한소의 영으로도 계십니다. 또 무한대의 힘으로 계시지만 무한소의 힘으로도 계십니다. 그만큼 존재의 폭이 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폭을 지닌 무한대의 영과 무한대의 힘으로 계십니다. 힘의 본체로 계시고 존재세계의 핵으로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힘의 본체이신데 그 힘이 심정과 참사랑, 지정의와 진미선, 원리와 법도의 질서, 영원·불변·절대·유일·무소부재의 자존성, 참사랑·참생명·참혈통의 뿌리가 되는 절대성 등 하나님의 본성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양심의 주체요,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무한대의 힘은 순수한 물질적 요소이지만, 중심이 되고 주체가 되는 영은 마음의 요소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요, 나의 부모입니다. 심정의 아버지요, 참사랑의 아버지요, 인격의 아버지요, 절대성의 본체로 계신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나의 아버지임과 동시에 나의 참된 부모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참자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정을 닮고, 참사랑을 닮고, 인격을 닮고, 절대성을 닮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