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과 허목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두 인물이 대립하게 된 이유

2012. 1. 17. 18:07삶이 깃든 이야기/문화유산

※송시열, 허목※

17세기 중후반 조선 조정에서는 에 대한 논쟁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그 논쟁의 두 축을 이끄는 핵심 인물이 바로 허목과 송시열이었다.
허목과 송시열은 성리학의 이상이 현실 사회에 구현된 것이 바로 라고 생각했다.
를 바로잡는 것이 세상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특히 국가의 최고 권위의 상징이었던 왕실에서 상복을 어떻게 입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전체 국가 운영의 문제와 직결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자신의 학문적 근거와 원칙에 맞게 를 행하려고 했던 송시열과 허목은..
지금 보면 하찮게 보일지 모르는 복제의 무제를 둘러싸고 목숨을 내걸고 싸웠던 것이다.
아마도 이들에게 있어 올바른 이념은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우암 송시열과 미수 허목이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전개했던 예송논쟁 은..
단순한 당파사움이 아니라 국가 비상시기에 자신의 학문적 이념과 원칙을 통해..
국론의 통일을 실천하려는 정치적 노력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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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1607~1689)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노론의 영수.
본관 은진. 자 영보. 호 우암·화양동주. 시호 문정. 아명 성뢰.
1633년(인조 11)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여 최명길의 천거로 경릉참봉이 되었으나 곧 사직.
1635년 봉림대군(효종)의 사부가 되었다.
이듬해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고..
1637년 화의가 성립되자 낙향, 49년 효종이 보위에 오르자 장령에 등용..
세자시강원진선을 거쳐 집의가 되었으나..
당시 집권당인 서인의 청서파에 속한 그는 공서파의 김자점이 영의정이 되자 사직하고 다시 낙향하였다.
이듬해 김자점이 파직된 뒤 진선에 재임명되었으나..
1651년(효종 2) 그가 찬술한 《장릉지문》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고..
김자점이 청나라에 밀고함으로써 청의 압력을 받아 사직하고 또 낙향..
충주목사·집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후진 양성에 전심하였다.
1658년(효종 9) 찬선에 등용, 이조판서로 승진,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이듬해 효종이 죽자 그 계획은 중지되었다.
그 뒤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자 기년설(만 1년)을 주장하여 관철시키고..
3년설을 주장하는 남인을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
좌참찬 등을 역임하면서 서인의 지도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1660년(현종 1) 우찬성에 올랐을 때, 앞서 효종의 장지를 잘못 옮겼다는 규탄을 받고 낙향하였고..
1668년 우의정이 되었으나 좌의정 허적과의 불화로 사직했다가..
1671년 다시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1674년 인선왕후의 별세로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어 대공설(9개월)을 주장하였으나..
남인 쪽이 내세운 기년설이 채택됨으로써 실각..
제1차 복상문제 때 기년설을 채택하게 한 죄로 이듬해 덕원으로 유배..
그 뒤 여러 곳으로 유배장소가 옮겨졌다.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게 되자 중추부영사로 기용되었다가..
1683년 벼슬에서 물러나 봉조하가 되었다.
이 무렵 남인에 대한 과격한 처벌을 주장한 김석주를 지지함으로써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제자 윤증과의 감정대립이 악화되어..
마침내 서인은 윤증 등 소장파를 중심의 소론과 그를 영수로 한 노장파의 노론으로 다시 분열되었다.
그 뒤 정계에서 은퇴하고 청주 화양동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는데..
1689년 왕세자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제주에 안치되고..
이어 국문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오는 도중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 뒤에 신원되었다.

주자학의 대가로서 이이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황의 이원론적인 이기호발설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을 지지..
사단칠정이 모두 이(理)라 하여 일원론적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예론에도 밝았다.
성격이 과격하여 정적을 많이 가졌으나..
그의 문하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으며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문묘·효종묘를 비롯하여 청주의 화양서원, 여주의 대로사, 수원의 매곡서원 등..
전국 각지의 많은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송자대전·우암집·송서습유·주자대전차의·정서분류·주자어류소분·
논맹문의통고·심경석의·사계선생행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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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목/1595~1682)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본관 양천. 자 문보·화보. 호 미수. 시호 문정. 현감 교의 아들이며 이원익의 손녀사위이다.
경기도 연천이 향리이고 서울에서 성장하였지만 영남 남인의 거두 정구에게 배웠다.
1626년(인조 4) 유생으로서 동학의 재임을 맡고 있을 때..
생부 정원대원군을 왕으로 추숭해 나가려는 인조의 뜻을 지지한 박지계에게..
그 이름을 유생 명부에서 지우는 벌을 가했다가 과거 응시를 금지당하는 처벌을 받았다.
그 일을 계기로 과거와 벼슬에 뜻을 끊고 광주 자봉산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으며..
여러 곳을 이주한 끝에 46년 연천에 돌아왔다.
1650년(효종 1) 이후 정릉참봉·내시교관·조지서별좌·공조좌랑·용궁현감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거나 곧 사직하였다.
1657년 공조정랑·사복시주부를 거쳐..
1659년에 장령에 임명되자 상소를 올려 송시열·송준길 등의 정책에 반대하는 등..
중앙 정부에서의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1659년에 현종이 즉위한 후 경연에 참여하였으며..
이듬해 다시 장령이 되었다.
이때 효종에 대한 인조 계비 조대비의 복상 기간을..
서인 송시열 등이 주도하여 1년으로 한 것은 잘못이므로 3년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예송논쟁을 시작하였다.
이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삼척부사로 축출되었으며, 그곳에서 향약을 실시하고 읍지를 편찬하였다.

1674년 효종비가 죽었을 때..
조대비의 복제를 송시열 등이 주장한 9개월복 대신..
기년복으로 늘려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승리하고..
남인이 집권함에 따라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75년(숙종 1)에 산림직인 성균관좨주를 비롯하여..
이조참판·우참찬·이조판서 등을 거치고 우의정에 임명됨으로써..
과거를 거치지 않고 진출한 산림 중에서 정승까지 승진한 흔하지 않은 인물이 되었다.
이때 왕통을 문란하게 했다는 송시열의 죄를 엄하게 다스릴 것을 주장하여..
온건론자인 허적이 이끄는 탁남)에 대비되는 청남의 영수가 되었다.
1676년에 사직하고..
특명으로 기로소에 들어간 후로는 허적의 전횡을 비판하는 격렬한 상소를 올렸을 뿐..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할 때 관작을 삭탈당하고 학문과 후진양성에 몰두하였다.
죽은 후 1688년에 관작이 회복되고 경기도 마전에 있는 미강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사상적으로 이황·정구의 학통을 이어받아 이익에게 연결시킴으로써..
기호 남인의 선구이며 남인 실학파의 기반이 되었다.
사서(四書)나 주희(朱熹)의 저술보다는..
시·서·역·춘추·예의 오경(五經) 속에 담겨 있는 원시 유학의 세계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중국 진한 이전의 문물에 대한 탐구는 문자에도 적용되어 특히 전서에 독보적 경지를 이루었다.
그러한 사상은 단순한 복고주의가 아니고..
당시의 모순들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활로의 개척을 의미하였다.
그의 예설은 정치적으로 왕권강화와 벌열 세력 억제를 통하여 왕조 질서를 확립하고..
일반 사대부의 기회 균등을 찾으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며..
서인들이 왕실에 대해서 유교적 예를 보편적으로 적용하여..
상대적으로 집권 사대부의 권위를 높이려는 움직임에 대립되었다.
또한 막강한 권위를 지닌 북벌론에 대해서도 현실에 기반을 두지 않은 허구임을 비판하였다.
한편 당시의 국정에 많은 의견을 개진하였으나..
호포제를 반대하고 중세 신분제의 수호에 나타나듯 보수적인 입장에 선 경우도 적지 않았다.

저서에 편집한 문집 기언·역사서인 동사를 비롯하여 예서인 경례유찬·방국왕조례·정체전중설..
삼척 읍지인 척주지 등이 있다.

 

 

출처:네이버지식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