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사상 - 제10장 논리학 (論理學) - 4

2010. 1. 6. 16:04참사랑 영원까지/통일사상

三. 통일논리학(統一論理學)에서 본 종래의 논리학(論理學)


(1) 형식논리학(形式論理學)


형식논리학 그 자체에 대해서 통일논리학은 반대하지 않는다. 즉 형식논리학이 다루고 있는 사고의 법칙이나 형식에 관한 이론은 그대로 인정한다. 그러나 인간의 사고에는 형식의 측면 뿐 아니라 내용의 측면도 있다. 또 사고(思考)에는 이유(理由)나 목적이나 방향성이 있고 다른 분야와의 관련성도 있다. 즉 사고(思考)는 사고(思考)를 위한 사고가 아니고 인식이나 실천(주관)을 위한 사고이며, 창조목적 실현을 위한 사고이다. 즉 사고의 법칙이나 형식은 사고가 성립하고 유지되는데 필요한 조건에 불과한 것이다.


(2) 헤겔논리학(論理學)


헤겔논리학은 하나님이 어떻게 해서 우주를 창조하셨는가를 철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한 것이다. 헤겔은 하나님을 로고스 또는 개념(槪念)으로서 이해하고, 이 개념이 우주창조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하였다.


헤겔은 먼저 개념의 세계에 있어서의 有-無-成의 전개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有 그대로는 발전이 없으므로 有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無를 생각했다. 그리고 有와 無의 대립의 통일로서 成이 생긴다고 하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문제가 있다. 헤겔에 있어서 본래 無는, 有의 해석 즉 有의 의미(意味)에 지나지 않으며, 有와 無가 구분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13) 그런데 헤겔은 有와 無를 구별하여 마치 有와 無가 대립하고 있는 것같이 설명했다. 따라서 헤겔철학은 출발점에서부터 벌써 오류(誤謬)가 있었던 것이다. 그 다음에 문제가 되는 것은 개념(槪念)이 자기발전한다는 점이다. 통일사상에서 볼 때, 원상구조(原相構造)에 있어서의 개념은 내적형상에 속하고, 목적을 중심으로 하여 내적성상인 지정의(知情意)의 기능_특히 知의 기능중의 이성_이 내적형상에 작용함으로써 로고스(구상(構想))가 형성되어, 그것이 새로운 개념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로고스나 개념은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수수작용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결과, 신생체(新生體))이지, 그 자체가 자기발전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튜빙겐대학 총장 류메린은 헤겔이 주장하는 개념(槪念)의 자기발전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헤겔의 사변적방법(思辨的方法)이 소위 그 창시자 헤겔에 있어서 도대체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느냐 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들이 얼마나 고민했으며, 머리를 괴롭혔는가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사람들은 모두 주위를 돌아보고 머리를 흔들면서 이렇게 물을 것이다. 도대체 너는 알겠는가.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개념(槪念)은 너의 머리속에서 홀로 움직이는가라고.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사변적인 두뇌의 소유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람과 별개인 우리들은 유한(有限)한 오성적(悟性的) 카테고리에 있어서의 사고의 단계에 서 있는 데에 불과하다……… 우리들은 왜 이 방법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았는가 라는 이유를 우리들 자신의 재능의 우둔함에서 찾음으로써, 감히 방법 그 자체의 불명석(不明晳)이나 결여(缺陷)에 있다고 생각할 만한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또 헤겔변증법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도 제기된다. 헤겔은 자연을 이념의 자기소외(自己疎外) 또는 이념의 타재형식(他在形式)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원상론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범신론(汎神論)-자연을 神 자신의 출현으로 보고 양자에 구별을 두지 않는 견해-에 이를 수 있는 사고방식이다. 그것은 쉽게 유물론(唯物論)으로 전환될 수 있는 소지(素地)가 되는 것이다. 헤겔변증법에 있어서의 자연은 인간이 발생하기까지의 중간적 과정에 불과하였다. 건물이 완성된 뒤에는, 중간에 세워졌던 발판들이 제거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발생한 이후의 자연은 헤겔철학에 있어서 자연 그 자체로는 철학적으로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렸다.


그는 또 역사의 발전에 있어서, 인간은 이성의 궤계(詭計)에 조종을 받고 있다고 했는데, 이 때문에 인간은 마치 절대정신에 의해 조종받는 인형(人形)과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 보면 하나님이 일방적(一方的)으로 역사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책임분담과 하나님의 책임분담이 합해짐으로써 역사가 꾸며져온 것이다.


또 헤겔의 正-反-合의 변증법은 원환성(圓環性)이며, 귀환성(歸還性)이어서 최종적으로는 완결점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하여 헤겔에 있어서 프러시아는 역사의 마지막 완결점(完結點)으로서 나타나는 이성국가(理性國家)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프러시아는 이성국가(國家)가 되지 못하고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리하여 프러시아의 종말과 더불어 헤겔철학도 종언을 고하고 말았다고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이 헤겔철학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는데, 그와같은 잘못을 일으킨 원인은 그의 논리학에 있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다음에 검토해 보고자 한다. 헤겔은 개념(槪念)의 발전을 정반합(正反合)의 변증법적발전으로 파악했다. 개념(槪念, 理念)은 자기를 소외시켜서 자연이 되고, 그 후 인간을 통하여 정신(精神)이 되어서 본래의 자신을 회복한다고 말한다. 한스 라이제강크에 의하면, 이와 같은 헤겔의 사고방식(思考方式)은 그의 성서연구(聖書硏究)에서 연유된 특유한 방식이라고 했다. 즉 높은 총합(總合)속에 지양되는 헤겔의 대립(對立)의 철학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나는 부활(復活)이요 생명(生命)이니, 나를 믿는 者는 죽어도 산다라는 요한복음의 성구(聖句)를 테마로 한 것이라고 한다.15) p.649


이러한 입장에서 헤겔은 하나님을 로고스 또는 개념(槪念)으로 파악하였으며, 그러한 하나님이 마치 땅에 뿌려진 씨앗의 생명이 외부(外部)로 자신을 나타내듯이, 자기를 외부(外部)의 세계로 소외시켰다고 보았다. 여기에 헤겔이 범한 오류의 근본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통일사상에서 보면 하나님은 심정(心情, 사랑)의 하나님이며, 사랑을 통하여 기뻐하고자 하는 정적(情的)인 충동에 의해서 창조목적을 세워놓고, 로고스로써 우주를 창조하신 것이다. 이 때의 로고스는 하나님의 마음속에 형성된 창조의 구상일 뿐, 하나님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러나 헤겔의 개념변증법에 있어서, 그의 하나님에서는 심정(心情)(사랑)이나 창조목적이 발견되지 않았으며, 뿐만 아니라 그의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 아니라 發芽하여 성장하는 일종의 생명체(生命體)였던 것이다.


여기서 헤겔논리학과 통일논리학의 주요개념들을 비교해 보면 그 뜻하는 바는 서로 다르지만, 서로 상응(相應)하는 관계에 있음을 알게 된다. 헤겔에 있어서의 로고스는 통일사상에서는 하나님의 구상에 해당된다. 헤겔의 로고스의 변증법이 통일사상에서는 원상(原相)의 수수작용에 해당(該當)한다. 그리고 헤겔의 정반합(正反合)의 형식은 통일사상의 정분합(正分合)의 형식에 대응한다. 헤겔의 귀환적, 완결적인 변증법이 통일사상에서는, 자연계에 있어서 창조목적을 중심으로한 수수작용에 의한 나선형의 발전운동에 해당하며, 역사에 있어서는 재창조와 복귀의 법칙에 해당된다. 헤겔은 자연을 통하여 이념을 찾으려고 했으나, 통일사상은 만물을 통하여 상징적(象徵的)으로 원상(신상과 신성(神性))을 발견한다. 따라서 헤겔의 범신론적(汎神論的)인 성격은 통일사상에 있어서 범신상론(汎神相論)-모든 피조물속에 신상이 나타나 있다는 견해-을 가지고 극복할 수가 있는 것이다.


(3) 마르크스주의(主義) 논리학(論理學)


전술한 바와 같이 구(舊)소련의 사상계에서 야기된 언어학논쟁을 수습하기 위해서 스탈린은 마르크스주의와 언어학(言語學)의 제문제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同 논문에서 스탈린은 언어는 상부구조(上部構造)에 속하지 않고 계급적인 것도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이리하여 형식논리학의 동일률(同一律), 모순율(矛盾律)이 드디어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형식논리학의 동일률(同一律), 모순율(矛盾律)은 사고의 법칙일 뿐, 객관세계의 발전법칙은 아니었다. 따라서 사고가 동일률(同一律), 모순율(矛盾律)을 따른다는 것은 인정하더라도 객관세계에 관한 한, 발전이 모순의 법칙(대립물(對立物)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을 따른다는 논리가 여전히 성립(成立)된다. 왜냐하면 형식논리학은 자연계를 다루지 않고 사고만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고보니, 사고는 객관세계의 반영(反映)이라는 유물변증법의 본래의 주장은 무너지고 만다고 하는 아포리아(a poria)가 발생하게 된다.16) 즉 스탈린의 논문(論文)이 발표된 뒤 유물변증법에 있어서는, 객관세계의 법칙(모순(矛盾)의 법칙)과 사고(思考)의 법칙(同一律)이 상반(相反)되고 말았는데, 이에 대하여 객관세계에 있어서나 사고에 있어서 발전성(發展性); 변화성(變化性)과 불변성(不變性)은 통일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통일사상의 주장이다.


오성적(悟性的)단계의 사고(또는 인식)는 주로 자기동일적이다. 왜냐하면 외계에서 들어온 감성적(感性的)내용과 내부의 원형이 조합(照合)함으로써 인식은 일단 완료(完了)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성적(理性的)단계에 있어서의 사고는 발전적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사고는 단계적으로 발전하므로 각각의 단계에서 완결적인(즉 자기동일적인) 측면을 또한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통일사상은 동일률(同一律), 모순율(矛盾律)도 당연히 인정하는 입장이다.


아무튼 유물변증법에 있어서 형식논리학 즉 동일률(同一律), 모순율(矛盾律)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본래 유물변증법의 기본적인 주장은 사물을 부단히 변화하고, 발전하는 것으로만 보고 있다가 나중에 동일률(同一律), 모순율(矛盾律)을 인정하였다는 것은 비록 사고에 관한 것이기는 하나, 불변성(不變性)을 긍정한 것이 되어서 유물변증법의 변질(變質)을 가져왔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것은 변증법의 수정(修正) 내지 붕괴(崩壞)를 의미한다. 동시에 사물을 자기동일성(自己同一性)과 발전성의 통일로서 파악하는 통일사상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4) 기호논리학(記號論理學)


사고의 정확성(正確性) 또는 엄밀성을 기한다는 것은 의의(意義)있는 일로서, 기호논리학(記號論理學)에 반대할 이유는 전연 없다. 그러나 수학적 엄밀성만으로는 인간의 사고를 충분히 파악할 수가 없다. 원상(原相)에 있어서 내적성상과 내적형상이 수수작용을 하면 로고스가 형성(形成)되는데, 이 때 내적형상(內的形狀)은 원칙과 수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수수작용을 통해서 형성된 로고스도 수리성(數理性)을 띠게 되며, 따라서 로고스에 의해 창조된 만물에는 수리성이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자연을 수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사고는 로고스를 기준으로 한다. 따라서 인간의 사고에도 당연히 수리성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고는 수리적 정확성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기에 기호논리학(記號論理學)이 사고를 수리적으로 연구하는 의의(意義)가 인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유의하지 않으면 안되는 점이 있다. 그것은 내적성상(內的性相)과 내적형상(內的形狀)과의 수수작용에 있어서, 심정(心情)이 중심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로고스(말씀)의 형성에 있어서 심정이 이성이나 수리보다 상위(上位)에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은 본래 로고스的 존재(存在)(이성적(理性的), 법칙적(法則的) 존재(存在))일 뿐만 아니라 보다 더 본질적으로는 파토스的 존재(存在)(심정적, 감정적존재)이다. 즉 사고에 비록 수학적 엄밀성이 없다 하더라도 거기에 사랑 또는 감정이 담겨 있기만 한다면, 발언자의 의향(意向)이 충분히 상대방에게 전해지는 것이다.


예컨대, 누군가가 화재를 보고 불이다!라고 외칠 때, 이것은 문법적으로 보면 이것이 불이다라는 의미인지, 지금 화재가 났다라는 의미인지 모른다. 그러나 절박한 경우에 긴급히 도움을 구하는 호소의 감정이 거기에 담겨져 있다면, 그 말에 문법적(文法的)인 정확성이 없더라도 그 의미는 곧 알게 된다.


인간은 본래 로고스와 파토스의 통일체(統一體)이다. 로고스만을 따른다면 인간으로서는 반쪽의 가치밖에 없다. 이성적(理性的)인 것만으로는 인간성이 부족하며, 정적(情的)인 측면을 함께 갖춤으로써 비로소 온전한 인간다움이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부정확(不正確)한 언어가 오히려 인간다운 경우도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의 사고에는 엄밀을 요하는 면도 있으나 반드시 언제나 정확히, 논리적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은 세워질 수 없는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성경)을 보더라도 비논리적인 면이 많이 있음을 본다. 그런데 그 말씀이 왜 위대한가. 그것은 그 말씀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언어가 정확하게 논리에 맞지 않더라도, 그 속에 파토스적인 요소가 적절히 포함되어 있다면, 그 뜻하는 바는 충분히 상대방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5) 선험적논리학(先驗的論理學)


칸트는 대상으로부터의 감성적(感性的)내용과 인간 오성(悟性)의 선천적인 사유형식이 결합되어 인식의 대상이 구성됨으로써 비로소 인식과 사고가 성립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 볼 때 인식의 대상에는 내용(감성적(感性的)내용) 뿐만 아니라 형식(존재형식(存在形式))도 있고, 인식의 주체에도 형식(사유형식(思惟形式)) 뿐만 아니라 내용(내용像)도 있다. 칸트가 말하는 선천적인 형식과 감성적인 내용만으로는 대상에 대한 사고의 진리성(眞理性)이 보증되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통일사상에서는 인간과 만물의 필연적 관계에서 사고의 법칙 혹은 형식과 객관세계의 법칙 혹은 형식의 대응성(對應性)이 도출되고, 대상에 대한 사고의 진리성이 보증되는 것이다.


(6) 통일논리학(統一論理學)과 종래의 논리학(論理學)의 비교(比較)


마지막으로 통일논리학, 형식논리학, 변증법적논리학, 선험적논리학을 비교하여 그 특징을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그림 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