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사상 - 제10장 논리학 (論理學) - 3|

2010. 1. 6. 16:06참사랑 영원까지/통일사상

二. 통일논리학(統一論理學)


1. 기본입장


(1) 사고(思考)의 출발점과 방향


종래의 논리학은 사고의 법칙이나 형식을 다루고 있지만, 통일논리학(統一論理學)은 먼저 `사고의 출발점'에 대하여 생각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즉 `왜 사고가 필요한가'라는 데서부터 출발하며, 그 다음에 사고의 법칙이나 형식에 대해서 살펴보자.


인간은 왜 생각하는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이 우주 창조에 앞서서 먼저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에 앞서, 심정을 동기로 하여 사랑을 실현코자 하는 목적을 세워가지고, 그 목적에 부합되는 내용을 마음속에 구상하신 것이다. 이것이 생각이요, 로고스(말씀)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닮도록 창조된 인간도 심정(心情)을 동기로 하여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목적을 세워 놓고, 그 목적 달성을 위해서 생각하는 것이 본연의 생각의 자세이다. 여기의 목적이란, 피조물에 있어서는 피조목적이며, 여기에는 전체목적과 개체목적이 있다.


전체목적이란 사랑을 통하여 가족이나 이웃, 민족, 인류 등 전체에 대하여 봉사하면서 그 전체를 기쁘게 하는 것이며, 나아가서 하나님께 봉사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고, 개체목적이란 자기의 이기적(利己的)인 욕망을 만족시키려는 목적이다. 결국 이 두 가지의 목적이 인간이 사는 목적이며, 이 목적 달성을 위해서 인간은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전체목적과 개체목적에 있어서 전체목적이 우선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인간의 사고(思考)는 일차적(一次的)으로 전체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행해야 하며, 2차적으로는 개체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행해야 한다. 그런데 개체목적도 결국 전체목적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은 본래 자기이익을 중심으로 하여 생각하는 것이 아니며, 타인(他人)을 사랑하기 위하여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본래의 사고의 출발점이요 방향이다.


(2) 사고(思考)의 기준(基準)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기준(基準)이 되는 생각일까? 존재론이나 인식론에서도 그러했듯이 통일사상은 어떠한 부문(部門)도 그 논리전개의 근거를 모두 원상(原相)에 두고 있다. 그러므로 사고(思考)의 기준도 원상(原相)에 있으며 그것은 원상(原相)의 논리적 구조(構造)이다. 즉 그것은 원상에 있어서 로고스(구상(構想))가 새로 생겨날 때 형성되는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이다. 이것은 심정이나 사랑을 기반으로 한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중심하고, 내적성상(內的性相)과 내적형상(內的形狀)間에 이루어지는 원만하고 조화로운 수수작용을 말한다. 이러한 원상의 논리적구조가 사고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3) 관련분야(關聯分野)


통일논리학의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또 하나 언급해 두고자 하는 것은 논리학(論理學)의 관련분야(關聯分野)이다. 형식논리학은 다른 분야(領域)와의 관련된 부분을 다루지 않고 있다. 그 때문에 그 대안으로서 변증법적논리학(辨證法的論理學)이나 인식논리학(認識論理學)이 출현했던 것이다. 통일논리학(統一論理學)에 있어서의 사고의 출발점은 하나님의 사랑을 터로 하는 창조목적(創造目的)의 실현(實現)에 있고, 그 기준은 원상(原相)의 논리구조(論理構造)에 있기 때문에 관련분야(關聯分野)는 대단히 넓다. 왜냐하면 사고(思考)의 기원(起源)은 하나님의 말씀(構想) 곧 로고스이며, 문화분야(文化分野)치고 어느 것 하나 구상(構想)(思考없이 운영되는 분야(分野)가 없기 때문이다.


원상(原相)에 있어서 로고스가 형성(形成)되는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는 모든 만물이 창조되는 창조의 2단구조(構造)의 일부이다. 따라서 로고스는 말씀인 동시에 우주(宇宙)의 법칙(法則)으로서, 만물 모두를 망라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로고스(思考)의 학문으로서의 논리학도 모든 다른 영역과 더욱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는 외적발전적사위기대(發展的四位基臺)와 더불어 창조의 2단구조(構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창조의 2단구조(構造)에 있어서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는 논리구조(論理構造)가 되며, 외적사위기대(四位基臺)는 인식구조(認識構造)나 주관구조(主管構造)가 된다. 인식구조(認識構造)란 만물로부터 인식(認識)을 얻는 경우의 사위기대로서, 주로 과학(자연과학)연구의 경우에 조성되는 사위기대이며, 주관구조(主管構造)는 생산이나 실천, 즉 산업, 정치, 경제, 교육, 예술 등의 경우에 조성되는 사위기대이다. 따라서 논리구조(論理構造)를 기반으로 하는 논리학(論理學)은 인식구조(認識構造)나 주관구조(主管構造)를 기반으로 하는 모든 문화영역(領域)과 밀접(密接)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4) 원상구조(原相構造)


여기서 원상구조(原相構造)에 대해서 좀 더 언급해 보고자 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원상구조(原相構造)는 안 밖 2단의 사위기대로 되어 있다. 이것을 원상(原相)의 2단구조(構造)라고 한다. 이것을 닮은 피조물(被造物)의 이단구조를 존재(存在)의 2단구조(構造)라고 한다. 그런데 원상구조(原相構造)에 있어서 안 밖의 사위기대(四位基臺)는 심정중심의 자동성(自同性)과 목적중심의 발전성(發展性)을 각각 지니게 되어 자동적(自同的) 및 발전적사위기대(發展的四位基臺)가 된다. 이 경우 안 밖의 사위기대(四位基臺)가 모두 발전적기대(發展的基臺)가 되는 경우의 원상구조를 창조(創造)의 2단구조(構造)라고 한다.


피조물(被造物)은 예외없이 모두 이 2종의 2단구조(構造)를 닮아서 지어졌기 때문에, 각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는 모두 존재(存在)의 2단구조(構造)와 창조(創造)의 2단구조(構造)(생물의 경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인간에 있어서 논리구조(論理構造), 인식구조(認識構造), 존재구조(存在構造), 주관구조(主管構造) 등은 모두 각각 2단구조(構造)이다. 따라서 일상생활에 있어서 인간이 관련된 모든 사위기대(四位基臺)는 반드시 2단의 사위기대(四位基臺), 즉 이단구조(二段構造))이다.


이것은 또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 형성(形成)에 중점을 두는 영역(領域)과 외적사위기대(四位基臺)형성(形成)에 중점을 두는 영역(領域)과는 서로 보완관계에 있음을 의미한다. 例를 들면, 내적구조(構造)(사위기대)에 중점을 두는 논리학(論理學)이나 외적구조(構造)에 중점을 두면서 주관활동의 한 분야를 다루는 교육론(敎育論) 등은 상호 보완관계에 있다. 이것을 요약하면 인간사회의 모든 2단구조(構造)는 원상(原相)의 2단구조(構造)에서 유래하므로 모두 상호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그림 10-10).


2. 원상(原相)의 논리적(論理的) 구조(構造)


이상으로 통일논리학(統一論理學)의 서론에 해당하는 기본입장의 항목을 마치고 이제부터 통일논리학(統一論理學)의 본론에 들어가고자 한다. 먼저 원상의 논리적구조에 관해서 살펴보자.


(1) 로고스형성(形成)의 구조와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논리학(論理學)은 사고(思考)의 법칙(法則)과 형식(形式)에 관한 학문이다. 그런데 통일논리학(統一論理學)의 근거는 원상의 본성상(本性相內)의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 특히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에 있다. 따라서 논리학(論理學)이 사고를 취급하는 학문인 이상, 이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에서 어떻게 사고(思考)가 발생하는가를 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원상론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도 원상(原相)의 이와 같은 논리구조(論理構造)를 본받아서, 사랑의 목적을 실현(實現)하기 위한 내적사위기대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거기에서 사랑을 지향(指向)하는 사고(思考)가 생겨나게 된다.


(2) 본래의 인간의 모습


따라서 본래 인간의 사고(思考)에 있어서는, 그 사고(思考)의 동기(動機)가 심정(心情) 또는 사랑이 아니면 안 된다. 인간의 사고(思考)는 사랑의 실천(實踐)을 위한 사고(思考)이며, 인간에게 자유가 주어져 있는 것도 사랑의 실천(實踐)을 위해서인 것이다. 자유를 가지고 악(惡)을 행하거나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자유의 남용(濫用)이다. 사랑의 실현(實現)이란 요컨대 사랑의 세계의 실현(實現)이며, 창조이상세계(創造理想世界)의 실현이다. 사랑을 지향(指向)하는 사고를 많은 인간이 가지면 가질수록 사랑의 세계(世界)는 보다 빨리 실현(實現)될 것이다.


(3) 창조(創造)의 2단구조(構造)


창조의 이단구조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번 언급했지만 여기서는 同 2단구조(構造)와 논리학(論理學)과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한다. 창조(創造)의 2단구조(構造)란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와 외적발전적사위기대(發展的四位基臺)가 연속적으로 형성(形成)되는 것을 말한다. 이 경우,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에서 로고스가 형성되는데, 이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가 바로 논리구조(論理構造)이다.


그러면 이때의 외적발전적사위기대는 논리학(論理學)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즉 논리학(論理學)에 대하여 외적발전적사위기대(發展的四位基臺)는 과연 필요한 것인가. 그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왜냐하면 통일논리학(統一論理學)에 있어서 사고(思考)는 창조목적(創造目的)의 실현(實現) 또는 사랑의 실현을 지향(指向)하며, 따라서 사랑의 실천(實踐)을 전제(前提)로 하기 때문이다. 실천(實踐)한다는 것은 마음에 생각한 것을 외부(外部)에 대하여 실제(實際)로 行하는 것이며, 바로 외적사위기대(四位基臺)의 형성(形成)을 뜻한다. 실천의 대상은 만물이며 인간이다. 즉 사랑의 실천이란 만물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통일논리학(統一論理學)에 있어서 사고(思考)한다는 것은 거기에 반드시 동기(動機)와 목적과 方向이 있으므로, 반드시 실천(實踐)에 연결되고 행동(行動)과 결부되어야한다(그림10-12).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구상하시고, 로고스를 만들고, 창조를 개시(開始)하셨다. 그래서 창조(創造)의 2단구조(構造)라는 개념(槪念)이 성립한 것이다. 형식논리학(形式論理學)에 있어서는 사고(思考) 그 자체만의 형식(形式)이나 법칙(法則)을 취급하지만, 통일논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잘못은 아니더라도 불충분(不充分)한 것이다.


보통 지행일치(知行一致)라든가 이론과 실천(實踐)의 통일을 자주 말하는 것은, 그 논리적(論理的) 근거(根據)가 이 창조(創造)의 2단구조(構造)에 있었기 때문이다.


3. 사고과정(思考過程)의 2단계(二段階)와 사위기대(四位基臺) 형성(形成)


(1) 오성적(悟性的)단계와 이성적(理性的)단계


인식에는 감성적단계, 오성적단계, 이성적단계의 3단계가 있다. 이것은 인식이 통일원리의 삼단계완성의 법칙에 따르기 때문이다. 감성적단계는 외부에서 정보가 들어오는 창구이므로 인식의 소생적단계이며, 장성적인 오성적단계와 완성적인 이성적단계에서는 사고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중 오성적단계의 사고는 외부로부터 들어온 정보에 영향을 받지만, 이성적단계에 이르면 사고(思考)는 외부와 관계없이 자유로이 이루어진다.


칸트도 역시 3단계의 인식과정에 대해서 論하고 있다. 외계에서 들어오는 감성적내용을, 직관형식(直觀形式)을 통하여 수용(受容)하는 단계가 감성적단계이며, 다시 사유형식(思惟形式(오성형식))을 가지고 사고하는 단계가 오성적단계이며, 오성적인식을 통일 내지 통제해 가는 과정이 이성적단계이다.


마르크스주의의 경우에는, 감성적내용이 뇌(腦)에 반영되는 것이 감성적단계이다. 그 다음 단계는 논리적단계 또는 이성적단계로서 거기에서 판단이나 추리가 행하여진다. 또 그 다음 단계로서 실천에 의해서 확인하는 실천의 단계가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경우, 사유형식(思惟形式)은 외계의 존재형식이 의식에 반영(反映)된 것이다.


대뇌생리학(大腦生理學)의 관점에서 보면, 인식론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감성적단계의 인식은 감각중추(感覺中樞)에서, 오성적단계의 인식은 두정연합야(頭頂聯合野)에서, 그리고 이성적단계의 인식은 전두정연합야(前頭聯合野)에서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오성적(悟性的)단계와 이성적(理性的)단계에서 원상구조와 비슷한 논리구조가 형성된다. 오성적단계에 있어서 사고는 외계로부터 들어오는 감성적요소(내용)에 의해서 규정(規定)된다. 즉 외계의 내용과 내계의 원형(原型)이 조합(照合)되어서 인식이 일단 완결된다. 그 때 인식구조 또는 논리구조로서 내적인 완결적(自同的)사위기대(四位基臺)가 형성된다. 그런데 이성적단계에서는 오성적단계에서 얻어진 지식을 터로 하여, 자유로이 추리를 진행시켜 새로운 구상(構想)(신생체(新生體))을 세우기도 한다. 이때의 사고의 구조는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이다.


인식에 있어서의 대뇌의 생리과정(生理過程)을, 내객(來客, 손님)을 맞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다. 내객이 처음 들어서는 현관(玄關)은 감각중추(감성(感性))에 해당되고, 주인을 만나는 응접실은 두정연합야(頭頂聯合野(悟性))에 해당되며, 거실이나 서재는 전두연합야(前頭聯合野(이성))에 해당된다. 하인(下人)으로부터 현관에 손님이 왔다는 전언을 받으면, 주인은 응접실에 나와서 그 손님을 맞이한 후 대화를 나눈다. 주인은 손님을 상대하면서 그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 때 주인은 제멋대로의 생각을 할 수는 없다. 손님과의 대화에 필요한 말을 해야되기 때문에 자기의 생각은 상대의 말 여하에 좌우된다. 이것은 오성적단계에서 벌어지는 인식의 비유이다. 대화가 끝나면 주인은 손님과 작별한 뒤 자기의 거실이나 서재에서 손님의 말을 참고하면서 자유로이 생각할 수가 있다. 이것이 이성적(理性的)단계의 사고의 비유이다.


(2) 이성적(理性的)단계에 있어서의 사고(思考)의 발전


이성적(理性的)단계에 있어서의 사고는 어떻게 해서 발전해 가는 것일까. 사고(思考)란 내적성상(內的性相)과 내적형상(內的形狀)의 수수작용이었다. 그리하여 먼저 내적성상과 내적형상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제일(第一)단계의 로고스 즉 사고의 결론으로서의 구상(신생체(新生體))이 형성된다. 그것으로 사고가 일단 끝나는 경우도 있으나, 대개의 경우 그 사고의 결론(구상) 여하에 따라서는 다음 단계의 로고스(구상(構想))가 필요하게 된다. 그때 第一단계에서 형성된 로고스는 사고의 소재(素材)인 하나의 개념 또는 관념이 되어서, 내적형상속에 비축된 후 2단계(第2段階)의 사고(思考) 때 다른 많은 소재(관념, 개념)와 더불어 동원된다. 이와 같이 하여 2단계(第2段階)의 로고스가 생기게 되며, 그것이 또 필요에 따라서 내적형상에 이행(移行)되어서 다음 사고 때 동원된다. 이리하여 3단계(第3段階)의 로고스가 형성(形成)된다. 같은 방식으로 제4(第四), 제5(第五)의 단계에로 사고가 계속될 수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비록 하나의 사항(事項)에 관한 사고일지라도 일회만(一回限)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수가 많다. 이것이 이성적(理性的)단계에 있어서의 사위기대 형성의 과정이며, 이것을 사고의 나선형의 발전이라고 한다(그림 10-13).


이와 같이 이성적(理性的)단계에서 사고가 무한히 발전을 계속하는 것은 이 단계가 발전적사위기대(發展的四位基臺)의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발전을 계속한다 하더라도, 하나의 사항(事項)에 관한 사고가 일단 끝난 후 새로운 사고가 나타난다고 보기 때문에, 이러한 사고의 발전은 완결적(完結的)인 사위 기대형성의 연속인 것이다. 따라서 사고는 완결적(完結的)단계를 반복하면서 발전하게 된다.


(3) 사고(思考)의 기본형식(基本形式)


오성적(悟性的)단계에 있어서의 사고(또는 인식)는 목적을 중심으로 하여 감성적내용과 원형이 수수작용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래서 목적은 먼저 바르게 세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 바른 목적이란,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심정(사랑)을 기반으로 한 창조목적을 말한다. 인식론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세포나 조직의 원의식(原意識)에서 형성된 원영상(原映像)과 형식상(形式像)이 말초신경을 통하여 하위중추(下位中樞)의 잠재의식에 이르러 통합되어서 그곳에 머물러 있게된다. 이것이 인간이 선천적(先天的)으로 가지고 있는 원형(先天的原型)이다. 그 중에서 형식상이 인식 또는 사고에 일정한 규정을 부여하는 사유형식(思惟形式; 사고형식(思考形式)이 되게 된다.


다음은 하위중추(下位中樞)의 잠재의식이 일정한 형식상(形式像)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겠다. 예컨대 맹장염에 걸린 경우를 생각해 보자. 원의식을 통합하고 있는 하위중추(下位中樞)에서는 맹장의 고유한 성상과 형상(기능과 구조)에 관한 정보가 수시로 전달되고 있다. 따라서 맹장염에 걸리면 하위중추(下位中樞)는 곧 그 이상(異常)을 안다. 그리고 그 맹장이 본래의 상태를 회복하도록 적절한 지시(指示)를 보낸다.


또 위(胃)의 운동이 지나치게 강하게 되면 위경련이 되는 경우가 있고, 너무 약해지면 위하수(胃下垂)가 되는 수가 있는데, 그와 같은 위(胃)의 운동의 강약에 관한 정보도 하위중추(下位中樞)는 알고 있다. 그래서 위(胃)의 운동이 지나치게 강해지거나 약해지면 이것을 적당히 조절한다. 하위중추(下位中樞)의 잠재의식이 가지고 있는 이와 같은 정보는 양성(陽性), 음성(陰性)에 관한 것이다.


세포는 핵(核)과 세포질로 되어 있는데, 핵이 세포질을 컨트롤한다. 핵과 세포질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 있다. 하위중추(下位中樞)의 잠재의식은 이와 같이 세포에 있어서의 주체와 대상의 정보도 가지고 있다.


잠재의식(潛在意識)은 또 시간과 공간의 감각을 가지고 있다. 즉 체내(體內)의 어디엔가에 또 어느 일정한 시간에 염증이 있으면 적시에 그곳으로 백혈구를 보낸 후 염증을 고치려고 한다. 유한(有限)과 무한(無限)의 관계에 대해서도 잠재의식은 이것을 알고 있다. 예컨대, 적혈구는 어느 일정한 기간동안 생명을 유지하다가 파괴되고 새로운 적혈구가 生成된다. 이와 같이 체내(體內)에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세포가 생기고 낡은 세포가 소멸되는데, 잠재의식은 그것(有限性)을 알고 있다.


또 체내에서는 지속성, 영원성, 순환성을 유지하면서 그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 세포나 기관도 있다. 이것은 하위중추(下位中樞)가 그러한 세포(細胞)나 기관의 기능의 무한성을 알고 있는 증거이다. 이와 같이 하위중추(下位中樞)의 잠재의식은 성상과 형상, 양성과 음성, 주체와 대상, 시간과 공간, 유한과 무한 등의 형식을 알고 있는 것이다. 잠재의식에 반영된 이들의 상대적관계의 상(像)이 형식상(形式像)인 바, 그 형식상(形式像)이 결국 대뇌의 피질중추에 보내어진 후 사고에 있어서의 사유형식(思惟形式)이 되는 것이다.


사유형식이 사고에서 하고 있는 역할을 축구시합에 비유하여 설명할 수가 있다. 축구시합을 할 때 선수들은 자기 마음대로 뛰거나 차거나 하지만, 일정한 규칙을 지키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아무렇게나 함부로 차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이성은 자유로이 사고를 진행시키고 있으나, 형식상의 영향을 받은 사고는 일정한 형식을 취하면서, 즉 규칙을 지키면서 행하게 된다.


사유형식(思惟形式)은 범주(範疇)이다. 범주란 최고의 유개념(類槪念) 또는 가장 중요한 유개념을 말하는 것으로서, 통일사상에 있어서는 사위기대 및 수수작용의 원리를 기반으로 하여 범주가 세워진다. 사위기대(四位基臺)와 수수작용(授受作用)이 통일사상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10가지의 기본적인 범주가 세워지게 되는데, 개개의 범주의 의미는 인식론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지금까지 많은 사상가들이 여러 가지의 범주(範疇)를 세웠지만, 그중에는 통일사상의 범주와 관련된 것도 적지 않다. 예컨대 본질(本質)과 현상(現象)이라는 범주는 통일사상의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에 해당한다.


그래서 통일사상의 범주(範疇)를 제1범주(第一範疇)와 제2범주(第二範疇)로 구분하고자 한다. 제1범주(第一範疇)는 통일사상의 특유한 10가지의 기본적인 형식이다. 제2범주(第二範疇)는 제1범주(第一範疇)를 기초로 하여 전개한 것으로서, 거기에는 종래 철학의 범주에 해당하는 것도 포함된다. 제1범주(第一範疇)와 제2범주(第二範疇)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특히 제2범주(第二範疇)의 수(數)는 제한이 없는데 여기서는 그 일부만을 열거하겠다.


제1범주(第一範疇)의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은 제2범주(第二範疇)의 본질(本質)과 현상(現象)이나 내용과 형식(形式)과 비슷한 데도 불구하고, 왜 이와 같이 일반화되지 않은 특이한 용어를 사용하는가. 통일사상의 기본이 되고 있는 것은 사위기대, 정분합작용, 수수작용 등의 개념이다. 이것들을 빼면, 통일사상은 골격이 빠져버린 것과 같게 된다. 따라서 통일사상의 범주(範疇)로서는 이것들과 관련한 개념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범주와 사상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범주를 보면 사상을 알 수 있고, 사상을 보면 범주를 알게 된다. 범주는 사상의 간판(看板, 얼굴)이다. 통일사상은 새로운 사상이므로 거기에 알맞는 새로운 용어의 범주가 당연히 세워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사상에는 마르크스적인 범주가 있고, 칸트의 사상에는 칸트적인 범주가 있고, 헤겔사상에는 헤겔적인 범주가 있다. 마찬가지로 통일사상의 범주도 통일사상의 특징을 표시하지 않으면 안되며, 그것이 제1범주(第一範疇)로서의 10가지의 기본적인 개념이다.


(4) 사고(思考)의 기본법칙


형식논리학에 있어서 사고의 근본원리는 동일률(同一律), 모순율(矛盾律), 배중률(排中律), 충족이유율(充足理由律)이었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 볼 때 그보다 더욱 기본적인 법칙이 있다. 그것이 수수법(授受法)이다. 이 수수법(授受法)은 논리학(論理學)의 법칙일 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領域)의 법칙(法則)이다. 정치, 경제, 사회, 과학, 역사, 예술, 종교, 교육, 윤리, 도덕, 언론, 법률, 스포츠, 기업 그리고 모든 자연과학(自然科學)의 학문(學問)(물리학, 화학, 생리학, 천문학 등) 등 실로 모든 영역을 지배하는 법칙(法則)이다.


뿐만 아니라 전피조세계, 즉 전지상세계(宇宙)와 전영계(全靈界)를 지배해온 법칙(法則)이다. 그리고 논리학과 직접관계가 있는 인식론의 법칙이기도 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수수법(授受法)이 왜 이와같이 광범위하게 작용하느냐 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創造)의 법칙(法則)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근원은 하나님의 속성(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간에 작용한 수수작용(授受作用)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하나님 자신의 속성간의 수수작용을 모방하여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피조세계(被造世界)에 있어서는 그것이 법칙(法則)이 된 것이다.


이것은 수수법(授受法)이 모든 다른 법칙까지도 지배하는 가장 기본적(基本的)인 법칙(法則)인 것을 의미한다. 물리적(物理的) 법칙(法則)이나 화학적(化學的) 법칙(法則)이나 천문학적(天文學的) 법칙(法則)도 그 기반이 되고 있는 것은 수수법(授受法)이다. 따라서 형식논리학(形式論理學)을 비롯해서 다른 논리학(論理學)의 법칙(法則)이나 형식(形式)도 실은 그 근거가 이 수수법(授受法)에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논리학(論理學)에 있어서도 다른 영역(領域)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이 수수법(授受法)은 사고(思考)의 기본법칙(基本法則)인 것이다. 여기에서 그 예로서 3단논법과 수수법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


1) 삼단논법(三段論法)과 수수법(授受法)


삼단논법(三段論法)은 형식논리학(形式論理學)의 형식(形式)의 하나인 추리형식(推理形式)이다. 수수법(授受法)이 형식논리학의 형식이나 법칙의 근거가 된다는 것을 이 삼단논법을 실례로 들어서 밝히기로 한다.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여기에서 대전제(大前提)와 소전제(小前提)로부터 도출된 결론(結論)은, 목적을 중심으로 한 대전제(大前提)와 소전제(小前提)와의 수수작용(對比)의 결과이다. 즉 여기에 인용(引用)된 삼단논법(三段論法)은 소크라테스의 생사(生死)에 관한 정보를 알고 싶다는 목적이 삼단논법(三段論法)의 배후에 잠재하고 있다.


그리고 대전제(大前提)와 소전제(小前提)를 대치시킨 것은, 사람은 죽는다와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의 두 명제(命題)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그림 10-14, 10-15). 마치 미터(meter)와 피트(feet)를 비교하는 것과 같다. 그것을 예를들면, ⓐ 1m는 3.28ft이다. ⓑ 이 책의 세로의 길이는 1ft이다. ⓒ 그러므로, 이 책의 세로의 길이는 0.328meter이다.


이 경우의 결론 ⓒ는 ⓐ명제(命題)(의 數字)와 ⓑ명제(命題)(의 數字)를 대비(수수작용(授受作用))하여 얻은 결과(合性體, 數字)이다. 마찬가지로 처음의 삼단논법(三段論法)의 결론도 대전제와 소전제를 대비해서 얻어진 수수작용의 결과이다. 다음은 형식논리학의 법칙중의 하나인 동일률(同一律)과 수수법(授受法)에 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2) 동일률(同一律)과 수수법(授受法)


동일률(同一律)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A는 A이다에서 이 꽃은 장미꽃이다라고 하는 명제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 명제(命題)는 이 꽃과 장미꽃을 마음속에서 비교해 보고, 두 꽃이 일치하였으므로 ~은 …… 이다라고 판단한 것이다. 비교한다는 것은 대비형(對比型)의 수수작용을 뜻한다. 따라서 동일률(同一律)도 수수법(授受法)을 터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모순율(矛盾律)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으로 형식논리학(形式論理學)의 형식(形式)이나 법칙(法則)은 모두 수수법(授受法)의 기반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이 명백해 졌으리라 생각한다.


3) 사고(思考)와 자유


여기에서 사고와 자유에 대하여 한마디 하고자 한다. 논리학은 사고(思考)의 형식(形式)이나 법칙(法則)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생각하는 것까지 일일이 법칙(法則)이나 형식(形式)의 간섭(干涉)을 받아야만 하는가?, 법칙(法則)이나 형식(形式)과 같은 까다로운 룰(rule)에 지배받고 싶지 않다, 어떠한 간섭도 받지 않고 자유로이 생각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고(思考)에 규칙(規則)이나 형식(形式)이 있음은, 사실은 사고에 자유를 주기 위한 것이다. 법칙(法則)이나 형식(形式)없이 사고는 한걸음도 전진할 수가 없다. 그것은 마치 철도가 없으면 기차가 조금도 전진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인간의 몸이나 마음은 모두 법칙(法則)에 따라 살 때 비로소 그 정상적인 기능을 유지(維持)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몸을 볼 때, 몸의 모든 생리작용(生理作用)은 법칙(法則)의 지배를 받고 있다. 호흡도, 소화작용도, 혈액순환(血液循環)도, 신경의 전달작용(傳達作用)도 모두가 일정한 생리(生理)의 법칙(法則)下에서 영위되고 있다. 만일 이들의 생리작용(生理作用)이 법칙(法則)을 이탈하면 즉시 병에 걸린다. 이것은 인간의 사고작용(思考作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A는 A이다라고 하는 동일률에서 ~은 …… 이다의 논리어(論理語)를 사용하지 않고, 예컨대 이 꽃은 장미꽃이다라고 하지 않고 이 꽃, 장미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형식(形式)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전칭긍정판단(全稱肯定判斷)이라는 판단형식(모든 S는 P이다)에 있어서 모든 인간은 동물이다라는 판단을 예로 들어보자. 이 경우, 모든 ~은 …… 이다라는 형식(形式)을 제거하면 단지 인간, 동물만이 남게 되어 역시 무슨 의미인지 전연 알 수 없다. 타인(他人)이 알 수 없음은 물론, 시간이 흐른 뒤에는 자신도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리하여 사고(思考)에는 반드시 일정한 법칙(法則)과 형식(形式)이 필요하다. 그러면 순수하고도 자유로운 사고란 있을 수 없는 것인가? 즉 법칙(法則)이나 형식(形式)을 떠난 자유는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역시 사고(思考)에 자유가 있다. 그것은 사고(思考)의 선택의 자유이다. 법칙이나 형식을 따르면서도, 즉 그 법칙이나 형식을 이탈하지 않으면서도 선택(選擇)의 자유가 있다. 가령 사랑의 실현에 관한 사고를 예로 든다면, 사랑의 실현이라는 공통목적 공통방향을 지향하면서도, 그 구체적(具體的) 실현(實現)에 있어서는 개인에 따라서 개별적(個別的)인 목적이나 방향(方向)이 서로 다른 것을 본다. 이것은 선택의 자유 때문이다. 즉 선택의 자유에 의해서 각자가 필요한 목적이나 방향(方向)을 자유로이 결정하는 것이다.


목적이나 방향(方向)에 관한 선택의 자유의 경우, 자유로운 사고가 어떻게 해서 행하여지는가 하면, 사고(내적수수작용(授受作用))에 있어서 영적통각(靈的統覺)이 내적형상(內的形狀)內의 관념(觀念) 또는 개념(槪念)의 복합(複合)이나 연합(聯合)을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서, 바로 구상(構想)의 자유이다. 이 구상(사고)의 자유는 이성의 자유성(自由性)에 기인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