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사상 - 제11장 방법론 (方法論) - 3

2010. 1. 6. 16:03참사랑 영원까지/통일사상

三. 통일방법론에서 본 종래의 방법론


以上의 통일방법론을 가지고 종래의 방법론을 평가해 보고자 한다.


(1) 헤라클레이토스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萬物, 자연)은 유전(流轉)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피조세계에 있어서의 발전적인 측면만을 파악함으로써, 자기동일적(自己同一的)인 측면을 경시했거나 간과했다고 할 수 있다. 또 그는 투쟁(鬪爭)은 만물의 아버지이다라고 함으로써 만물의 발전의 원인을 대립물의 투쟁에서 구하고 있으나, 만물은 상대물의 조화적인 수수작용에 의해 발전한다는 것이 통일방법론의 입장이다.


(2) 제논


우선 제논의 비시정지론(飛矢靜止論)에 대해서 고찰해 보자. 날으는 화살이 어느 지점에 정지하고 있다고 할 때, 그것은 공간을 갖지 않는 수학적인 점을 의미한다고밖에 볼 수 없는데, 화살의 실제의 운동은 시간, 공간속에서 행해지고 있다. 물체가 운동하는 속도(V)는 공간중의 거리(S)를 시간(T)로 나눈 것으로서 V=ST로 표시된다. 그러므로 물체의 운동은 일정한 시간과 일정한 거리를 가지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위치만 있고 공간이 없는 점(수학적인 점)에 있어서의 물체의 운동은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느 지점에 있어서의 물체의 운동을 말할 때에는 그 점이 아무리 미소(微小)하더라도 일정한 공간의 기반위에서 생각해야 하며, 또 어떤 순간에 있어서의 운동을 말할 때에는 그 순간이 아무리 미소(微小)하더라도 일정한 시간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볼 때 운동하고 있는 물체는 정지(靜止)하지 않고 어느 지점을 통과한다는 것을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하여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은, 물체는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 있으면서 동시에 없다고 주장하면서, 제논의 파라독스와 함께 운동의 문제를 해결해냈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이것도 제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궤변(詭辯)에 지나지 않는다. 운동하고 있는 물체의 위치는 시간의 함수로 표시되며, 일정(一定)한 순간에는 반드시 일정(一定)한 장소가 이에 一對一로 대응한다. 따라서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 있으면서 동시에 없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국 운동하고 있는 물체는 1)정지(靜止)하지 않고 일정한 공간을 통과하고 있으며 2)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서 운동하면서 있는것이다. 다음은 아킬레스와 거북에 관한 것인데, 제논은 시간을 무시한 채 공간만을 논의함으로써 아킬레스가 거북을 앞지르지 못한다고 하는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일정한 시간의 경과에서 보면 아킬레스는 확실히 거북을 앞지르게 되어 있는 것이다. 제논은 모든 것이 불변부동(不變不動)이며,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는 것을 논증하려고 하였다. 그 때문에 궤변(詭辯)까지 써 가면서 운동이나 생멸(生滅)을 부정하려 하였다. 제논은 헤라클레이토스와는 반대로 사물의 발전적(發展的)측면을 무시하고 자기동일적(自己同一的)측면만을 파악했던 것이다.


(3)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사람과 사람이 겸허한 마음으로 대화함으로써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사람(A)과 사람(B) 사이의 외적발전적수수작용(發展的授受作用)에 의한 진리의 증식이다. 소크라테스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올바른 수수작용의 자세를 설명한 것이다(그림 11-4).


(4) 플라톤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에 대해서 연구하였다. 원상론에서 원상(原相)의 내적형상(內的形狀)에는 여러 가지 관념?개념이 있음을 밝혔는데, 플라톤은 이러한 개념의 세계를 이데아界로서 파악하고 분석과 종합의 방법으로 이데아界의 계급(階級; hierarchy)구조를 명백히 하려고 하였다. 개념(槪念)의 분석이나 종합은 개념과 개념을 비교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것은 대비형(對比型)의 수수작용으로서 인간의 마음속에서 행해지므로 내적수수작용(授受作用)이다. 결국 플라톤의 이데아論은 대비형(對比型)의 내적수수작용(授受作用)의 한 측면을 설명(說明)한 이론이었다(그림 11-5).


(5)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역법(演繹法)은 삼단논법(三段論法)이다. 먼저 보편적진리를 세운 다음 거기에서 특정한 개별적인 진리를 결론으로 이끌어냈다. 앞에서 든 예와 같이 모든 인간은 죽는다라는 대전제(大前提)와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라는 소전제(小前提)를 대비(對比)하여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라고 하는 결론을 내린다. 이것은 명제와 명제간의 대비형(對比型)의 수수작용이다. 더욱이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라는 명제(命題) 자체도 소크라테스와 인간을 대비(對比)하여 얻어지므로 이것도 대비형(對比型)의 수수작용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역법(演繹法)은 플라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대비형(對比型)의 내적수수작용(授受作用)에 의한 진리추구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6) 베이컨


베이컨은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偏見(Idola)을 버리고 실험과 관찰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A, B, C......... 의 실험의 결과가 모두 P이면, P라는 결론을 일반적법칙으로서 삼는다고 하는 것이 歸納法이다. 귀납법(歸納法)은 인간과 만물(자연(自然))과의 외적수수작용(授受作用)에 따라 진리를 얻으려고 하는 입장이다. 또 실험과 관찰에 의해서 얻어진 많은 사실들을 대비(對比)하여 결론을 얻었으므로, 귀납법은 대비형의 수수작용이기도 하다. 따라서 베이컨의 귀납법(歸納法)은 대비형의 외적수수작용(授受作用)에 의한 진리추구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그림 11-6).


(7) 데카르트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疑心)함으로써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存在)한다.라고 하는 확실한 제1원리(第一原理)에 도달했다고 한다. 여기서 데카르트가 일절(一切)의 사물을 의심했다는 것은, 모든 만물과 모든 현상에 대하여 이를 부정(否定)했음을 의미하며, 따라서 통일사상에서 보면, 하나님의 우주(宇宙) 창조(創造) 이전(以前)단계로 소급(遡及)한 것과 같은 입장에 서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상황(狀況)에서 나는 생각한다는 말은 우주 창조 직전의 하나님의 구상(構想), 하나님의 생각에 해당한다. 여기서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있다.라고 생각하기 전에 나는 왜 생각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졌어야 한다. 그랬더라면 그의 이성론은 나중에 그의 후계자(後繼者)들에 의해서 독단론(獨斷論)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여하간에 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있다.라는 자각(自覺)을 통일사상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내적수수작용(授受作用)을 확실히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데카르트는 위의 제1원리(第一原理)에서 우리들이 명석(明晳)-판단(判明)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참이다라는 일반적인 진리의 기준을 도출해 냈는데, 이것은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의 형성에 의한 진리의 증식을 긍정(肯定)하는 명제인 것이다(그림 11-7).

 


(8) 흄


흄은 인과성(因果性)을 주관적인 신념에 불과하다고 하였으나, 인과성은 흄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주관적인 것만이 아니며, 주관적임과 동시에 객관적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이미 인식론에서 밝힌 바 그대로이다. 흄은 또 물질적인 실체를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精神的)인 실체(자아(自我))도 부정했으며, 존재(存在)하는 것은 관념의 묶음 뿐이라고 하였다. 통일사상에서 보면, 그는 내적형상(內的形狀)(관념(觀念))만을 확실한 것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흄은 심적(心的現象)을 분석함으로써 철학의 완전한 체계를 수립하고자 했으나 흩어진 인상이나 관념만으로 그것을 해결하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9) 칸트


칸트는 대상으로부터 오는 혼돈(混沌)된 감성적내용이, 주관(主體)이 지닌 선천적형식(先天的形式)에 의해 구성됨으로써 인식이 성립한다고 주장하였다. 인간 주체(主體(主觀))와 대상의 상대관계에 의해 인식이 성립한다고 하는 점에서는 통일사상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 보면, 주체는 형식(思惟形式)뿐만 아니라 내용(영상(映像))도 함께 구비하고 있으며, 이 양자를 합쳐서 원형(原型)이라고 한다. 또 대상으로부터 오는 것은 혼돈된 감성적(感性的)내용이 아니고 존재형식을 가진 내용이다. 칸트의 구성론에 대하여 통일사상은 조합(照合)論을 주장한다. 칸트의 先驗的方法에 의한 구성론은, 통일사상의 수수법에 의한 조합(照合)論을 칸트의 입장에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0) 헤겔


헤겔은 개념의 발전과 세계(宇宙)의 발전을 모순의 지양과 통일의 과정으로서 또는 정반합(正反合)의 과정으로서 파악하였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 볼 때 발전은 모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발전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 있는 상대물(相對物)이 목적을 중심하고 수수작용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 때 正은 목적을, 分은 상대물을, 合은 합성체 또는 번식체를 의미한다. 헤겔이 말한 바와 같이 개념이 개념자체의 모순에 의해서 홀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내적성상(內的性相)인 지정의(知情意)의 기능이 내적형상(관념, 개념 등)에 작용하여 새로운 개념을 형성하면서 사고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것은 이미 논리학(論理學)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사고의 나선형(螺旋形)의 발전에 해당한다. 통일사상이 주장하는 상대물의 수수작용에 의한 발전을, 헤겔은 대립(對立)하는 요소의 상호작용이라는 입장에서 잘못 파악했던 것이다.


(11) 마르크스


마르크스는 물질적인 존재의 본연의 존재방식을 기초로 하여 정신작용은 그 반영(反映)이라고 하였으나, 통일사상에서 보면 성상(性相)(정신)과 형상(形狀)(물질)은 주체와 대상의 상대적인 관계에 있으므로, 정신적인 법칙(價値法則)과 물질적인 법칙에는 대응관계가 있는 것이다. 양(量)의 질(質)에의 전화(轉化)의 법칙에 대하여 통일사상은 질(質)과 양(量)의 균형적발전의 법칙을 대안으로서 제시한다. 양(量)에서 질(質)로가 아니다. 또 양적변화(量的變化)가 어느 한 점에 도달할 때, 비약적인 질적변화가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질(質)과 양(量)의 관계는 성상-형상의 관계이며, 질(質)과 양(量)은 동시적, 점진적, 단계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대립물(對立物)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에 대하여 통일사상은 상대물의 수수작용의 법칙을 대안으로서 제시한다. 대립물의 투쟁은 파괴(破壞)와 파멸(破滅)을 발생시킬 뿐, 결코 발전을 가져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물은 공통목적을 중심으로 한 상대물의 조화로운 수수작용에 의하여 발전하는 것이다. 否定의 否定의 법칙에 대하여 통일사상은 긍정적발전(肯定的發展)의 법칙을 대안으로서 제시한다. 자연이나 사회는 그것을 이루고 있는 주체와 대상의 상대적요소가 원만한 수수작용을 함으로써 긍정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자연계에 있어서 무생물은 공간적원환운동을 하며, 생물은 시간적원환운동(螺旋形運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까지의 방법론中에서 마르크스의 유물변증법처럼 커다란 영향력을 가진 것은 없었다. 마르크스가 제시한 변증법이 자연의 발전에 있어서도 유효(有效)하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엥겔스는 8년간 자연과학을 연구한 결과, 자연은 변증법(辨證法)의 검증이다'7)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유물변증법의 오류는 명백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자연현상의 내용을 잘 검토해 보면 변증법(辨證法)의 검증(檢證)이 아니라 변증법의 부정(否定)이며, 오히려 수수법(授受法)의 검증임을 깨닫게 된다(그림 11-8).


(12) 훗서얼 ( E. Husserl 1859 ~1938)

훗서얼은 먼저 자연계의 사물에서 출발하고 있는데, 사물이란, 통일사상에서 보면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통일체이다. 그리고 형상적환원(形相的還元)에 의해 본질직관(本質直觀)을 행한다고 하였는데, 본질은 존재자의 성상에 해당한다. 훗서얼은 판단을 중지한후 의식(意識)(순수 의식)을 분석해 보면 노에시스와 노에마의 구조가 있다고 했는데, 이것을 통일사상에서 보면 성상(마음)의 내부구조인 내적성상과 내적형상에 각각 해당한다. 홋서얼의 현상학적방법을 통일사상의 관점에서 보면 그림 11-9와 같이 된다. 훗서얼도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무의식중(無意識中)에 통일사상의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에 관한 내용을 중요시하고, 그 분석에 의해 학문을 통일하고자 했다고 말할 수 있다.

 

(13) 분석철학(分析哲學)

언어는 내적발전적수수작용(發展的授受作用)에 의해 형성되는데, 내적수수작용에는 이성을 중심으로 한 지적(知的)인 면(로고스的 측면)과 정감(情感)을 중심으로 한 정적(情的)인 면(파토스的 측면)이 있다. 분석철학은 그 중 로고스적 측면만을 포착하여 논리성(論理性)만을 추구한 것이다. 통일사상에서 볼 때 언어는 본래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것으로서, 언어의 논리구조는 사랑의 실현을 위해 필요한 하나의 조건에 불과하다.

그런데 언어(言語)의 효과(效用)은 사상의 형성에 있으며, 그것은 일종의 창조활동이다. 창조활동의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은 심정(心情)이다. 따라서 사랑을 중심으로 하는 정적(情的)인 요소가 사상 형성에 있어서 주체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분석철학은 시종일관 언어의 논리적인 분석에만 치중한 나머지, 언어를 통하여 나타나는 사상의 창조적 측면이나 심정적, 가치적 측면은 무시한 결과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