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사상의 출현배경 - 이상헌원장

2010. 1. 6. 15:54참사랑 영원까지/통일사상

통일사상의 출현배경

 

 

本人이 統一敎會에 入敎하여 어떤 動機에서 그리고 어떻게 文鮮明선생님의 思想인 統一思想을 執筆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小題目을 가지고 干證하기로 합니다.

① 草創期時代의 命令의 方式

② 入敎까지의 個人의 路程

③ 入敎 當時의 선생님의 모습과 나의 決心

④ 勝共理論 實力養成의 指示와 使命의 自覺

⑤ 執筆과 單行本의 發行

⑥ 學界의 公認

 

1) 草創期時代의 命令의 方式

 

나는 1956년 5월에 統一敎會에 입교했습니다. 그 때는 바로 統一敎會의 草創期에 해당합니다. 入敎 當時에 느낀 것이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중의 하나는, 文先生님(以下「先生님」)은 절대로 個人을 향해서 命令하시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매우 印象的이었던 것입니다.「金某 이렇게 하시오. 李某 이렇게 하시오.」라고는 절대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命令하실 것이 있으면, 集會나 禮拜때에 대중을 향하여「統一의 食口들은 이렇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식으로 하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直接 명령한다는 것은, 直接主管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미완성의 단계에 있는 사람이므로 이런 미완성의 사람은 직접주관하지 않는다는 原理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실제적인 면에서는 직접 명령하여 그 사람이 명령대로 행하면 되지만, 만일 그대로 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條件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즉 하늘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는 조건에 걸려서 그것이 一生동안 지워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將來 悔改하여 나아졌다 하더라도 復歸上 하늘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는 汚點의 흔적이 남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위해서도 직접주관은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일 命令하시고 싶은 일이 있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象徵的 표현을 하십니다. 그 一例를 들겠습니다. 어느 날, 대학교수가 入會하여 자기의 훌륭함을 여러 가지로 자랑하였습니다. 그때는 밤이었습니다. 先生님은 컵에 밀가루를 가득히 넣고 거기에다가 물을 붓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물은 모두 밖으로 넘쳐흘렀습니다. 왜 선생님은 저런 일을 하시는가 하고 모두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릇은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으면 다른 것은 더 넣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眞理를 받으려면 마음 속을 전부 비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비우지 않고 자기의 지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아무리 훌륭한 하늘의 眞理라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것을 직접 말해서는 듣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에 象徵的으로 표시하여 알 수 있는 사람만이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스스로 깨닫게 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또 假言的, 未來的인 표현도 자주하셨습니다. 그것은「만일 …… 이라면」하는 표현 방식인 것으로서 英語의「if……」에 해당합니다. 예컨대, 金某란 권사에게 선생님이 명령하시는데, 어떻게 하시느냐 하면,「金 권사가 만일 傳道를 나간다면, 훌륭히 해낼 것이야」라고 합니다. 이것 자체는 명령은 아닙니다. 후에 나는 그 金권사를 만나, 선생님은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가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는「그것은 전도하라는 명령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象徵的으로 혹은 假言的으로 또 未來的으로 말씀하시지만, 이것은 미래에 이렇게 될 것이므로 이에 대해서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뜻합니다.

 

왜 본인이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統一思想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未來的인 표현으로 명령하신 것을, 처음에는 몰랐다는 것을 고백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1958년 群山(나의 入敎地)에 순회오셨을 때, 7~8명의 식구가 모인 장소에서「未來에 統一主義時代가 온다」,「統一思想의 時代가 온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사상에 대해서는 특별히 관심이 있었으므로 다른 사람도 물론 들었을 것이지만 여하간 그 말씀이 나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그 후부터 나는 그 말씀대로 그러한 時代가 반드시 온다는 것을 믿고 있었으나, 나는 그 당시 지방에 있었으므로 서울 協會本部에서 간부님들이 전부 하나가 되어 선생님의 指導下에 열심히 노력하여 그러한 統一主義時代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 자신에 직접 관련된 事項이라고는 전연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2) 入敎까지의 個人路程

 

나는 儒敎의 家庭에 태어났습니다. 나의 先親은 유교학자였는데 3·1運動때의 萬歲사건으로 日本 관헌에게 逮捕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五~六개월쯤 후에 출옥하였습니다. 그때 나는 滿 5세였습니다. 출옥한 先親은 다분히 분해하는 얼굴로 日本人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갔다 나왔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기 시작하였을 때, 한국의 皇帝 高宗은 和蘭의 헤이그에서 개최되고 있던 國際平和會議에 李俊이라는 밀사를 보내서 일본의 침략이 不法이라는 것을 공개하려고 하였는데, 日本의 방해로 성사하지 못하자 그 밀사는 거기서 激墳하여 자살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선친은 그 후에도 가끔 나에게 民族的敎育, 反日敎育을 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幼年時부터 反日思想으로 굳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10세 때 國民學校(그 당시의 公立普通學校)에 들어갔습니다. 나의 큰 兄은 나보다 十歲 年上이었으나 선친은 日本의 지식은 배울 필요가 없다고 하여 兄을 중국의 北京大學에 留學시켰습니다. 나는 國民學校를 졸업하고 16세 때, 高等普通學校(지금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합친 것과 같은 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거기서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올라갈 때에 光州學生事件이 일어났습니다.

 

일본의 男學生이 한국의 여학생을 희롱한 것이 導火線이 됐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전국적으로 학생들의 스트라이크가 확산되었습니다. 이때 학교마다 학생그룹이 있어 가지고 스트라이크를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나도 그 학생 그룹에 들어가서 삐라를 뿌리면서 데모에 가담했습니다. 말을 타고 칼을 찬 일본의 경찰관은 위세를 부리면서 순찰하였으나 쉽사리 데모를 저지시키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運動은 民族主義者와 共産主義者의 쌍방에 의해서 지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것을 학생들은 몰랐습니다. 특히, 슬로건이 서로 같은 反日이었습니다. 그런데 민족주의자는 組織力이 弱하고 공산주의자는 조직력이 强하였기 때문에 나는 결국 공산주의자의 그룹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나는「共産主義=民族主義」라는 느낌이 들어 공산주의 속에만 民族이 사는 길이 있는 것 같이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공산주의를 위해서 싸우는 것이 민족을 救하는 길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는 언제나 反日의 정열에 불타있었으므로 스트라이크 때 마다 참가하였으며 드디어 학교에서 退學을 당하였습니다. 할 수 없이 다른 학교에 補缺試驗을 쳐서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또 左翼運動을 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결국은 또 퇴학을 당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에 몇 번이나 逮捕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당시 일본의 경찰은 세계에서 가장 심한 拷問을 한다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고문을 받으면서 죽어간 사람도 상당히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일본과 싸우다가 25~26세쯤 되어 고문에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情熱的으로 싸우는 사람들은 대체로 30세 미만의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은 결코 꺾이지 않았습니다. 고문으로 말미암아 너무 괴로울 때에는 벽에 머리를 부딪치거나 혀를 깨물고 죽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民族의 獨立을 위해서 싸우는 길은 죽는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몸을 몽둥이로 쳐서 어느 정도 고문에 견딜 수가 있는지 시험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만큼 심각하였던 것입니다.

 

그 당시 나는 共産主義를 상당히 높이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공산주의 책을 열심히 읽어서 資本主義社會의 缺點이나 問題點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점점 反日的이 되었고, 鬪爭的이 되어갔습니다. 그 때문에 나의 이름은 형사들의 블랙리스트에 올라서 감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내가 서울에서 하숙생활을 하고 있을 때, 형사가 일주간에 한번이나 두 번, 하등의 예고도 없이 와서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와 不穩文書나 書籍이 있지 않나 하고 검색했습니다. 내가 학교에 가고 없을 때에도 나의 책상이나 장롱을 열고 전부 뒤졌습니다.

 

세 번째로 들어간 학교는 普成高等普通學校였습니다. 그곳의 교장이나 교원은 전부 民族主義者로서 나와 같이 다른 학교에서 퇴학당한 학생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고마운 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또 체포되어 몇 개월간 경찰서의 생활을 하다가 석방되어 그럭저럭 그 학교를 졸업하고 22세 때에 세브란스 醫科大學에 들어갔습니다.

 

나의 심경은 대학입학 전에 20세부터 조금씩 변해갔습니다. 당시 나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民族愛와 人類愛였습니다. 그것은 나의 마음을 항상 뜨겁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民族을 위해 싸우다가 죽는다」,「人類를 위해서 죽는다」라는 구호가 나의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후에「民族愛란 무엇인가, 人類愛란 무엇인가, 사랑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라는 의문이 솟아나는 것이었습니다. 唯物論에 의하면 인간은 원숭이에서 進化한 것입니다.

 

그러나, 원숭이로부터 진화된 인간에게서 민족애나 인류애가 나올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나의 마음을 대단히 괴롭히기 시작한 것입니다. 민족애나 인류애의 當爲性이 論理的으로 명백해지면 그 사랑을 위해서 싸우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의 出處가 애매하기 때문에 싸우지 않아도 좋을 것을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공산주의가 참으로 옳은 것일까? 나는 고민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民族愛. 人類愛는 唯物論에서는 合理化되지 않습니다. 동물에도 사랑은 있으나, 자기의 生命까지 희생하면서 다른 동물을 살리는 사랑은 없는 것 같았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살리는 前提條件下에서 다른 動物(예컨대 자기의 새끼동물)도 살리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생명을 희생하면서 他人을 위하는 인간의 사랑은 동물의 사랑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랑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가 하는 것이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唯物論 혹은 공산주의에 대하여 회의를 갖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 人間을 동물로 規定하고 있는 공산주의는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공산주의를 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唯物論으로써는 사랑의 근본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사랑의 根源을 알기 위해서 종교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나 유교나 불교에 관한 책도 읽어 보았으나 어떤 종교의 敎理도 이 문제에 올바른 해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또 여러 가지 思想이나 哲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여러 가지 의문이 구름같이 떠올랐습니다. 무엇을 보아도 의문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산다는 문제(「生」의 問題)입니다. 인간은 왜 살아야 하는가, 만물은 왜 살고 있는가, 새를 볼 때, 새는 왜 살고 있는가, 벌레나 곤충을 보면, 이 벌레나 곤충은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라는 따위의 의문이 끝없이 솟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산다는 것은 무슨 意義가 있는 것일까, 거지를 보면, 그는 왜 거지가 되었으며, 그 거지의 신세이면서 왜 살려고 하는 것일까.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生物을 살리고 있는 生命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밤하늘의 별을 보고도 어린아이처럼 별은 왜 있을까하고 자문해보곤 하였습니다. 宇宙 속에서 地球는 대단히 작은 별인데 그 작은 별인 지구의 存在理由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보다 더 작은 인간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동물에는 存在이유가 있을 것 같지 않았으며, 따라서 동물에서 進化한 것이 人間이라면 인간의 존재이유도 없지 않은가. 또 하나의 의문은 이성의 문제입니다. 왜 인간에게는 男性과 女性이 있으며, 동물에게는 수컷과 암컷이 있는가. 부부가 되는 것, 결혼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남녀의 결합 때문에 수많은 가정의 비극이 생기고 있는데, 왜 그러한 결혼을 해야 하는가, 결국 비극을 낳기 위한 결혼이 아닌가. 아이를 낳는 것도 결국 悲劇의 주인공, 고통의 주인공을 낳는 것이 아닌가.

 

나에게는 兄이 둘이 있었으나 둘 다 16세 때에 결혼하였습니다. 나도 17세가 되었을 때, 부모가 結婚이야기를 꺼냈지만 그 때는 공산주의의 영향도 있고 해서 早婚엔 반대한다고 하였습니다. 20세가 되어 人生을 고민하기 시작할 때에 부모가 또 결혼 말을 꺼냈기 때문에 이번에는 결혼의 不必要性을 강력히 고집하면서 「絶對로 結婚하지 않겠습니다!」고 하면서 단호하게 父母에 반대하였습니다. 그 때는 공산주의를 버렸을 때였습니다.

 

여하간에 이 시기는 나에게 있어서는 方向감각을 완전히 상실한 채, 고민과 고통만이 연속되는 暗黑의 期間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地獄과 같았습니다. 장시일에 걸친 고뇌의 기간은 건강을 해치고 신경은 극도로 쇠약해졌습니다. 너무도 괴로워서 자살을 기도한 적도 있었습니다. 산다는 것이 정말로 고통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심장의 고동은 격심해지고, 두통이 심해 잠이 오지 않았으며, 식욕도 없고, 소화도 되지 않았습니다. 체력도 날마다 쇠약해져 갔습니다. 너무나 괴로워서 過量의 수면제 약을 항상 갖고 다녔습니다. 언제든지 필요할 때는 먹고 죽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는 意義가 없을 바엔 가는 곳은 어차피 墓地이므로 빨리 가는 것이 合理的이라는 思考方式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하나의 固定觀念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괴로워하는 것 그 자체가 꼭 찾을 수 있는 것을 못 찾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죽는 것은 언제나 할 수 있으므로 더 찾아보기 위해서 죽는 것을 좀 더 保留하고, 살아보자는 觀念이 나의 生命을 하루하루 연장시킨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동안에 세월이 흘러, 대학에 들어간 것입니다. 대학생활에서 心境이 좀 변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해 주시던 父母가 대단히 불쌍하게 생각되어졌습니다. 부모에게 너무 불효를 해서 미안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부모를 위로해 드리기 위해서 부모가 그렇게도 바라시던 結婚을 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나는 宗敎에 本格的으로 매달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暗黑期를 거쳐 求道期에 들어서게 된 셈입니다. 人生問題의 해결에 있어서 宗敎(기독교, 유교, 불교)나 哲學의 無力함을 개탄하고 있었던 나는 우연한 기회에 丈人으로부터 생명의 實相(日本의 新興宗敎「生長의 집」의 경전)이라는 책을 入手하였습니다. 丈人이 내가 인생문제 때문에 고민하는 것을 알고 꼭 읽어보도록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의외로 많은 인생문제를 풀 수 있었습니다. 나의 기쁨은 컸습니다. 그리하여 바로「生長의 집」에 입회하였습니다.

 

그리하여「生命의 實相」의 12권짜리 全帙과 매월 발행된 잡지「생장의 집」도 구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인간은 서로 하나님의 아들로 보라는 가르침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거기에는 역사관이 없었습니다. 공산주의에는 역사관이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반드시 공산주의사회가 온다는 것을 역사관으로써 論證하고 있어서, 젊은이들은 정열을 불태우면서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이미 버렸기 때문에 思想的 기반이 사라졌으니 大地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허전한 느낌이 들어 매우 불안하였습니다. 그러한 사상의 不在狀態에서 여러 가지를 고민하면서 종교를 찾기도 하였지만 종교 교리만으로써는 만족할 수 없었으며 나에게는 역시 歷史觀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共産主義는 지상에 공산주의사회가 반드시 실현된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종교도 언젠가 지상에 理想世界가 到來한다는 약속이라도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되어졌지만, 기독교에도 불교에도 유교에도 그런 역사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생장의 집」은 지상에 神國이 실현된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나에게는 큰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거기에는 역사관이 없습니다. 즉 역사가 그 방향을 향해서 必然的으로 발전되어 왔다는 論理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그렇더라도 생장의 집은 나에게 그때까지의 최고의 宗敎라고 생각되어졌습니다. 기독교나 불교나 유교에서는 아무도 장담 못하는 지상의 理想世界의 실현을「생장의 집」은 신념을 가지고 약속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地上의 神國이었습니다. 나는 여기에 희망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生長의 집」에도 하나의 문제점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장래, 일본의 천황을 중심으로 해서 세계를 統一한다는 것입니다. 나에겐 그 점이 受容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罪 나 惡은 본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죄에 대한 불교적인 認識이었습니다만,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해결의 回避로 보였던 것입니다. 罪는 반드시 그 起源이 밝혀져야만 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은 죄의 세계를 만들지 않았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왜 죄의 세계가 나타나게 되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罪는 본래 없다」고만 주장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 외의 주장은 대부분 肯定的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 敎祖인 谷口先生은 언제나 그리스도가 靈的으로 再臨한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즉 인간의 마음속에 재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惡에서 떠나면 그때에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재림하셔서 인간은 神과 같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래서 사람을 나쁘게 보지 말고 신의 아들로 보고 숭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것을 나는 그대로 받아들여, 정말로 사람을 숭배하는 마음을 갖도록 노력하였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소위 大東亞戰爭에서 패하기 직전에「생장의 집」이라는 잡지가 廢刊되었습니다. 출판하려해도 종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폐간되는 마지막 號「생장의 집」의 서두에 비장한 권두언이 실려 있었습니다.

 

「잡지가 출판되지 않더라도 信仰만을 잊지 말라」고 호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놀랄만한 말 한마디가 들어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肉體를 가지고 오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 말한 바와는 전혀 다른 再臨觀이었습니다. 그 말 한마디는 나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谷口先生의 말을 믿어온 나로서 이 肉體的인 再臨도 믿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후 시일이 흐르는 동안에 그러한 肉身再臨의 문제는 뇌리에서 사라져 갔습니다.

 

求道期를 그렇게 지낸 후 약 10년간 여러 난문제를 지닌 채 自立期라고 할 수 있는 기간을 거쳐 통일교회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1956년, 42세에 傳道되어 입교하였습니다. (註)

 

入敎할 때까지 그동안 지니고 있던 중요한 문제점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입교 당시 나는 병원을 개업하고 있었지만 돈벌이는 제2의 문제였습니다. 그 당시의 나에게는 內部로부터의 누를 수 없는 所願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생문제를 함께 고뇌하고, 함께 對話할 수 있는 동지를 찾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왕진을 부탁받으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기꺼이 찾아갔습니다.

 

거기의 환자의 주변에 내가 찾고 있는 진정한 人生의 同志가 혹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환자가 부르거나 知人이 부르거나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기꺼이 그 부름에 응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만나서 談話하고 나면 항상 실망하곤 하였습니다. 전부 돈 벌려는 이야기이며, 財産, 名譽, 出世 등에 관한 이야기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넓은데 人生行路의 同志는 이렇게도 찾기 힘든 것인가 하고 혼자서 탄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생활을 하고 있다가 1956년에 傳道되어 統一敎會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 무렵 新聞에는 통일교회의 評判이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 교회에 내가 입교한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신문을 보고 소문이 문제가 아니라 가르침 그 자체가 眞理이냐, 아니냐가 문제다 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人生의 깊은 진리를 가르친다는 전도자의 말을 듣고 통일교회를 찾은 것입니다.

 

統一敎會 本部에 안내되어 劉孝元 協會長으로부터 통일원리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나는 一方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싫었으므로「이제 劉선생 말을 들었으니 나에게도 나름대로의 理論이 있으니 나의 말도 좀 들어주시오」라고 하면서 상대방이 5분정도 말하면 나도 그것에 대하여 나의 意見을 말하곤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강의가 잘 진행되지 않게 되자 劉협회장은「李先生, 잠깐 내 말을 들어주세요, 이선생도 宗敎에 대해서 一家見을 갖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여기에 무엇 때문에 오셨습니까? 統一原理를 듣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까?」「그렇다면 전부 들어보신 뒤에 좋고 나쁘고를 결정하면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의심이 나더라도 끝까지 들어주십시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그 말에 同意하고 그 날은 밤 3시까지 그의 강의를 들었던 것입니다. 그 후 5일간 통일원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세 번 들었습니다. 그 당시는 原理講論이라는 책이 없었고, 일부의 식구들이 100面 程度의 노트에 펜으로 필사한 원리를 갖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것이 經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청강 기간 중 나는 그 노트를 갖고 있는 한 식구에게서 그것을 빌려서 소중히 다루면서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 原理는 참으로 훌륭하였습니다. 원리를 다 듣고 3일쯤 되었을 때, 벌써 나의 대부분의 難問題가 해결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唯物史觀을 알고 있었으므로 復歸原理를 들으면서 이것이 통일원리의 역사관임을 직감하였습니다. 이만 저만 기쁜 것이 아니었습니다. 너무나 기뻐서 춤을 추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도 바라던 歷史觀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3) 入敎 當時의 선생님의 모습과 나의 決心

 

그와 같이 하여 나는 통일교회의 식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難問題들의 기본 骨格은 모두 해결되었지만 여러 가지 세부적인 문제는 原理만으로는 충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가끔 선생님에게 직접 질문하여 해답을 받기도 하고, 또는 집회 때나 私席에서의 가르침을 통하여 해답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때에는 식구들이 선생님을 모시고 방에 모여 있을 때 전체를 향하여 말씀하시면서 실은 나의 疑問을 풀어주시는 말씀을 하시는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 때는 그 내용이 思想的인 말씀이므로 일반 식구는 잘 모르지만 나는 잘 알 수 있었습니다. 또 그런 자리에서 내가 직접 질문하면, 그 질문에 대해서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하여 주시기도 하였습니다. 예컨대 授受作用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여 주시기도 하였습니다. 너무도 상세하였기 때문에 나의 기쁨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나는 授受作用에도 여러 가지 形態가 있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 후 그것을 統一思想에다 실제로 體系化한 것이, 授受法의 第一型, 第二型, 第三型, 第四型, 第五型입니다.

 

그 외에도 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를 배웠으며 그 때마다「이분에게는 이런 훌륭한 次元높은 思想이 있구나」하면서 감탄하였습니다. 그렇게도 어려운 미해결의 문제를, 이렇게 명쾌히 해결해 주시는데 대하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 個人的 指導를 자주 받은 것입니다. 감격한 것은 인생의 난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여 주시는 것뿐만은 아닙니다. 民族이나 人類에 대하여 또 역사상의 많은 聖人이나 義人, 豫言者들에 대하여 한없는 憐憫의 사랑을 지니고 계시는데 대해서도 감격하였습니다. 예컨대, 설교 중에 말씀이 민족이나 인류에 미칠 때, 또는 迫害로 고통 받는 義人들에 미칠 때, 그 憐憫의 情이 극에 달하여 통곡하시곤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6천 년간 인류를 救援하기 위하여 고생하여 오신 하나님을 품으시고, 통곡하시는 모습도 자주 뵈었습니다. 역사 이래 가장 비참하고 불쌍한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선생님의 이러한 모습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山川草木 등 모든 만물들까지도 그것들의 모습을 불쌍히 여겨 슬퍼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깨닫고 보니 天上 天下에 충만되어 있는 모든 慘狀과 悲劇은 인간의 타락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민족과 인류와 만물을 그리고 하나님까지도 救하기 위하여 全生命을 바쳐가면서 저렇게도 수고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의 눈에 비친 선생님의 모습은 이 세상의 인간의 모습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 분은 놀라운 智慧의 寶庫와 한없는 憐憫의 사랑을 지니고 계시는 성자이며 受肉된 神이며 인류를 구하러 오신 메시아였던 것입니다. 그 가르침의 한마디 한마디는 실로 구슬처럼 보배로웠습니다. 이 귀한 구슬들을 그냥 두면 흩어져버릴 것 같았습니다. 구슬은 꿰어야 보배라는 말대로 나는 선생님의 사상을 체계화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959년의 어느 날 선생님께「先生님의 사상을 배우면서 硏究하고자 합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이와 같이 몰래 결심하였던 것은 첫째로 이 분의 사상을 체계화하여 세계에 알려서 이 분이 메시아이심을 증거하기 위함이고, 둘째로 나와 같이 인생을 고민하는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인생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내가 고민에서 해방되었으니 이러한 사람들도 빨리 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느껴졌던 것입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해서든지 구슬을 꿰듯이 記錄으로 남겨서 나와 같이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또는 장차 고민할 사람들에게 전해서「이 思想으로 고민을 푸십시오」라고 하고 싶은 충동을 抑制할 수 없었습니다. 셋째로, 통일원리와 선생님의 사상을 체계화함으로써 통일교회의 出現의 目的達成에 寄與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당시 통일원리를 상세히 배움으로써 통일교회가 다음과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나타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첫째로 聖書의 難問題를 명백히 해결함으로써 기독교의 全敎派들의 派爭을 和解시키는 것, 둘째로 모든 종교를 화해시키는 것, 셋째로 宗敎와 科學을 통일하는 것, 넷째로 모든 사상을 化合統一시키는 것, 다섯째로 많은 문명을 화해시켜서 통일하는 것, 여섯째로 地上世界와 영계를 통일하는 것 등입니다. 통일교회가 이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통일원리 뿐만 아니라 통일원리에 나타나 있지 않은 많은 선생님의 그 놀라운 思想을 체계화하여 일반에게 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나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를 위해서라는 사명감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또 선생님이 나에게 이렇게 상세히 가르쳐 주시는 것도 나를 통하여 人類에게 眞理를 전하게 하시기 위함일 것이라는 생각도 드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것은 나뿐만아니라 他人에게도 해당됨은 물론입니다. 그리하여 가르침을 들을 때는 머리에 하나하나 메모하여 새기곤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입교 후 수년이 지나서 나 나름대로 은밀한 가운데 선생님의 사상의 체계화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이 장래 統一思想을 선생님의 직접 명령으로 이와 같이 발표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4) 勝共理論 實力養成의 指示와 使命의 自覺

 

나는 1956년에 入敎한 후 6년 동안 선생님으로부터 반공이니 승공이니 하는 말은 들어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분이 인류를 구하기 위하여 오신 순수한 종교지도자라고만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공이라는 말은 한 마디도 안 하셨기 때문에 이 분을 반공지도자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나대로 共産主義運動을 하나 나의 과거에 대하여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또 그럴 생각도, 필요성도 없었습니다.

 

자기의 과거의 경험을 완전히 덮어버리고, 信仰生活에만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60년, 음력 1월 6일 선생님의 탄신일축하연에서 선생님은 많은 食口들 앞에서 나에게 干證을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때는 그날 오후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오전 중 예감이 이상해서「부디 나에게만은 干證을 시키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마음으로 기도한 바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간증을 시키셨기 때문입니다. 나로서는 타인의 간증을 듣는 것은 대단히 恩惠스러웠지만 자기가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를 자랑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이전부터 그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날 오전 중에는 몇 명의 은혜스러운 간증을 듣고, 오후가 되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다시 모였을 때, 뜻밖에도「이상헌, 일어서」라고 말씀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반사적으로 일어섰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21일간의 禁食을 干證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순종하는 의미에서 간단히 간증을 하였습니다. 21일간의 禁食이란 1959년 12월 1일부터 행한 금식으로서 하나님의 心情을 體驗하기 위하여 어떤 식구의 권유에 의하여 한 것입니다. 당시 선생님은 자주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지 않으면 天國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강조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어떤 식구는 나와 같은 비판적인 인간은 담판기도를 하지 않으면 쉽사리 하나님의 심정의 체험이 어렵다고 하기에 결사적으로 금식을 행하여 본 것입니다.

 

담판기도란 죽을 각오를 하고 하나님의 응답이 올 때까지 금식기도하는 것이라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21일째 되는 날 밤, 나는 한없는 사랑을 가지시면서 인류를 救하기 위해서 한없이 고생하고 슬퍼하시는 불쌍한 하나님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으며, 나는 이 체험을 통해서 역사상의 하나님의 심정은 한없는 슬픔과 한없는 고통의 심정임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이런 하나님을 처음으로 발견하고 그 하나님이 너무나 불쌍해서 痛哭하였습니다. 또 人類나 萬物도 대단히 불쌍하게 보였습니다. 나는 그 때에 비로소 선생님이 왜 그토록 슬프게 痛哭하시는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밤에 또 부르시기에 일어섰더니「過去에 共産主義運動을 하였지, 그것을 干證하라」고 지시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다시 여러 식구들 앞에서 간단히 간증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내가 공산주의운동을 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선생님은 그와 같은 간증을 나에게 시키신 것일까, 그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疑問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선생님은 절대로 攝理와 관계없는 일을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까지 나는 선생님의 言行에 관해서 많은 것을 연구하여 왔습니다. 硏究하여 보니 선생님은 그 분 마음대로 하시는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여도 그것은 전부 그때 그때의 하나님의 攝理와 관계가 있는 말씀뿐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섭리적으로 意義가 없는 무의미한 말씀이나 行爲는 결코 하시지 않는다는 것이 내가 얻은 결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두 번씩이나 干證을 시킨 이상, 무엇인가 섭리적인 意義와 內容이 있을 것인데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의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까지는 내가 공산주의운동을 하였다는 것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감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선생님은 어떻게 아시게 되었는지 그리고 나에게 그것을 干證시킨 理由는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그 후 계속 뇌리에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2년 후 1962년, 先生님의 탄신일 前夜의 일입니다. 밤 12시(0시)부터 탄신일이 시작됨과 함께 선생님의 말씀이 시작되었습니다. 1시부터 2시 사이에 36家庭이 모인 가운데서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 중에「이제부터 幹部들은 共産主義理論을 이길 수 있는 실력을 養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때 비로소 선생님에게 反共的인 측면도 있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 큰 衝擊이었습니다. 나는 전부터 사물을 여러모로 생각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아무리 共産主義가 나쁘다 하더라도 宗敎家로서 과연 공산주의를 미워해서 좋을 것인가」라고 항상 생각해 온 터였습니다. 이런 생각은 통일교회에 입교한 뒤 더 뚜렷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앞으로는 反共도 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기 때문에 이것이 나에게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공산주의자일지라도 그들을 미워하는 것은 宗敎의 精神에 위배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무슨 까닭이 있을 것으로 알고 原理的으로 그 이유를 나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던 것입니다.

 

즉 원리적으로 볼 때, 歷史의 종말에 있어서는 반드시 가인·아벨의 對立關係가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 관계는 결국,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이다. 그런데 민주주의에는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는 思想이나 理念이 없다. 통일교회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선생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地上에 실현하시는 분이심으로 공산주의까지도 사랑하심이 틀림없지만 하나님의 攝理를 지상에서 이루기 위해서는, 부득이 공산주의와 사상적으로 싸워서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共産主義者에 대한 사랑의 문제와 공산주의와의 사상싸움의 문제는 別個의 問題다」라고 나 나름대로 정리하였던 것입니다.

 

그날 밤은 거의 徹夜를 하고 좀 쉬었다가 아침에 일어났는데 劉協會長이 나에게 「어제 밤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은 李先生밖에 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선생은 이전에 공산주의운동을 하여 공산주의에 대하여 잘 알고 있을 터이므로 勝共關係는 역시 이선생이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선생님이 2년 전에 나에게 간증을 시킨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나에게 간증을 시켜서 모든 사람들이 내가 공산주의자의 經歷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고, 그 前提 위에서 공산주의 비판을 간접적으로 명령하셨다고 생각되어졌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선생님은 절대로 개인적으로 직접적인 명령을 하시지 않습니다. 一般人에게 하는 것처럼 말씀하시고 그 개인이 자기의 責任分擔이라고 느끼고 깨닫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하시는 것이 당시의 攝理의 施行方法입니다. 최초로 간증을 시켜서 유협회장 등의 간부들이 나의 履歷을 알도록 해놓고 그런 여건 하에 승공의 실력을 양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전원에 대하여, 즉 一般人(36家庭)에게 대하여 하시는 말씀으로서 이것을 들은 사람, 특히 유협회장은 책임자로서 이 명령을 施行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執筆하지 않으면 안되니 누구에게 시킬까, 이선생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되어진 것입니다. 나에게 선생님이 간증을 시킨 것은 역시 그와 같은 결과를 가져오게 하기 위한 攝理였다는 것을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4년 전인 1958년경「未來에 統一思想 시대가 온다」고 하신 것도 결국 나에 대한 명령이 아니었던가 하고, 그 때서야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미래적으로 명령하신 것으로 알고 그 때부터 분명한 사명감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가 책임을 지고 책을 쓰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입니다.

5) 執筆과 單行本의 發行

 

그리하여 共産主義의 批判에 대한 집필을 시작하려고 하였으나 공산주의에 관한 책이 한권도 없었습니다. 韓國은 당시 5·16혁명이 일어나서 반공이 제일의 國是가 되고 있어서, 공산주의적인 요소를 일체 없애는 시대였으므로, 공산주의 책은 쉽사리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국의 해방직후에는 공산당원들이 상당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한국전쟁 후) 共産黨은 非合法化되어 한국에 공산주의자는 법적으로 한 사람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내가 공산주의 비판을 위해서 공산주의 서적을 찾고 있다는 것을 어떤 사람이 알고 책 두 권을 건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레닌의「唯物論과 經驗批判論」과「哲學辭典」이었습니다. 이것은 전쟁도중 어떤 공산주의자가 도망갈 때에 땅속에 숨겨둔 것을 우연히 찾아낸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것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가서 여러 서점을 돌다가 尹元求氏의 「마르크스主義의 批判的克服」이라는 책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자본론의 가치론만을 비판한 것이었는데 그것을 사서 또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것을 읽어 보니 以前에 알고 있던 내용들이 많이 마음에 소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勞動價値說은 비교적 상세히 적혀있으나 唯物論과 辨證法이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협회장에게 부탁하여 日本에 있던 어느 식구를 통하여 겨우「모리스 콘포스」의「唯物論과 辨證法」,「史的 唯物論」,「認識論」등을 입수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이외에는 책이 없었으므로 그 정도의 책들을 읽으면서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해 12월에 선생님께서 대전에 오셨습니다. 그때 가서 찾아뵙고 反共理論을 구상중이라고 말씀드렸더니 빨리 써서 책을 내라」고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개인에게 직접 명령하시지 않음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벌써 나의 마음이 결정되어 있었으므로 그것을 아시고, 直接的으로 지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1963년 8월 1일부터 본격적으로 執筆하기 시작하여 1964년 3월 20일에 脫稿했습니다. 그리고 3월 20일에 원고를 선생님께 드렸습니다.

 

文獻引用이나 자료의 수집이 대단히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攝理의 時宜에 맞추기 위해서 선생님은 1966년 8월에 柳光烈 文化部長에게 그 출판을 명령하셨습니다. 그 후 1년 6개월만인 1968년에「새 共産主義비판」이라는 이름으로 드디어 출판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오는 데는 일이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統一原理가 아무리 위대하여도 지금까지 역사상에 나타난 사상 중에 제일 우수하다고 看做되어온 공산주의의 思想體系를 批判하여 代案까지 낸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비상한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병원도 운영하고 있는 의사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환자의 진료를 등한히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환자에 치중하면 집필의 시간을 낼 수 없기 때문에 환자를 되돌려 보내는 일도 가끔 있었습니다. 더욱 어려웠던 일은 비판이나 대안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앞이 캄캄하여 전연 방도를 모를 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럴 때는 하늘에 매달려 기도하였습니다. 그러고 나면 直感的으로나 靈感的으로 착상이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면 즉시 메모를 하곤 하였습니다. 그때 무렵에는 매일 아침 4시 또는 5시에 일어나 성지에 가서 기도하곤 하였는데 기도할 때에 비판이나 대안 등의 문제점을 가지고 기도한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그래도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서울까지 가서 선생님을 직접 뵙고 질문을 하여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병원을 운영하기 때문에 서울 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만 서울에 가더라도 항상 바쁘신 선생님을 뵙는다는 것은 더욱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간신히 시간을 얻어서 뵈옵고 말씀드리면, 시간을 쪼개서 여러 가지로 또 상세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리하여 선생님은「기도에는 靈的으로, 질문에는 實體的으로」지도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 같은 곡절을 거쳐서 원고는 거의 완료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고를 최종적으로 완료하는데 있어서 또 하나 提起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本人으로서는 이것이 선생님의 사상을 터로 한 것이 분명하고 또 영적으로나 실체적으로나 선생님께서 인도해주신 것이 분명하지만 第三者가 그것을 인정해 줄 것인가가 문제였습니다. 첫째로 식구들이 그것을 인정해 줄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비록 식구들이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 다음에 일반 사회의 知性人들이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나는 선생님의 간증을 들으면서 깨달은 것입니다. 언젠가 지방에 오셔서 선생님이 자신을 간증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의 요점은 이 원리(原理講論)의 내용은 하나님의 啓示로서 깨달은 人生과 우주의 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계시는 象徵과 比喩에 의한 계시였기 때문에 올바른 해석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해석은 아무리 지식으로서는 바른 해석인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그 내용은 반드시 영계의 여러 敎祖들(예수, 공자, 석가, 마호멧 등)의 공인을 받고 최종에는 하나님의 공인까지 받아야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40일간 금식하시면서 영인체로서 영계에 가서 뭇 靈人 (敎祖)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받은 그「啓示의 해석」의 내용을「옳습니다」라고 공인을 받는데 성공했으며 나중에는 하나님 앞에까지 나아간 후, 루시엘(사탄)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공인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地上에서 통일원리를 전파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후에 이 干證을 상기하고「선생님으부터 배운 眞理도 이것을 應用할 경우에는 第三者의 證據가 필요하다」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승공이론도 타인으로부터 인정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즉 먼저 식구들이 인정하고, 다음에는 일반 사회인들이, 그리고 나중에는 外國의 교수들까지도 인정해주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증거를 얻지 못하면, 하늘이 認定하고 싶어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하늘의 사정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冊을 출판하기 이전에 나는 원고를 프린트하여 十數人의 原理講師들에게 보내서 원리로 보아서 잘못된 곳이 있으면 꼭 지적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두 강사가 이러한 점은 이렇게 고치면 좋겠다는 화답이 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의견을 모두 原稿에 수용했습니다. 하여간 식구들이 인정하였다는 조건이 일단 세워진 셈입니다. 비록 선생님이「책을 출판하라」고 말씀하셨다고 하여도 그것은 출판되어서 실지로 세계적으로 읽혀질 것인지 아닌지는 별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서 원고를 여러 차례 재검토하였던 것입니다. 만일 잘못되어서 하늘이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면 내가 죄를 범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參考書籍도 다시 읽어보면서 그 精髓를 정확하게 파악하였는가를 점검하곤 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드디어 1968년 2월에 승공이론 책이 출판된 것입니다. 그 후 이 승공이론은 통일식구들의 승공운동에 있어서 뿐 아니라 이 책을 읽은 많은 反共關係의 인사들에 의해서 그 설득력이 입증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승공이론은 실제로 통일사상의 骨格이 어느 정도 갖추어지고 그 기분위에 쓰여진 것입니다. 그래서 승공이론이 출판된 후에 이번에는 통일사상을 정리하여 체계화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1972년 8월에 일본에서 韓日敎授親善세미나가 있었는데 그때 선생님의 명령으로 나도 참가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세미나에 참가하는 目的뿐이 아니고 일본에 가서 일본 간부들에게 통일사상을 傳한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에 도착하였더니 마침 統一思想에 관심이 깊은 4~5명의 멤버가 모여 있었기에 그들에게 강의를 하였습니다.

 

그 때의 강의는 存在論, 本性論, 認識論, 價値論, 倫理論, 敎育論, 歷史論, 藝術論 등이었습니다(倫理論도 되어 있었으나 그때는 강의하지 않았음). 그러므로 통일사상의 골격은 거의 그때 이미 체계화 되고 있었습니다. 學生時代부터 오랫동안 여러 가지 문제를 지니면서 모든 것에 회의적이었던 나는 내용이 텅 빈 그릇만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그릇에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통일사상을 전부 담은 것이 통일사상의 體系化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용은 선생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작업도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李相憲이가 자기의 사상을 선생님의 사상인 것처럼 가장하고 있지 않는가하고 이렇게 오해한 식구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오해에 대하여 나는 何等의 변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이상헌의 사상에 불과하다면 하늘은 이것을 使用하지 않을 것이고, 이것이 정말 선생님의 사상이라면, 반드시 하늘은 이것을 채택하실 것이므로 굳이 변명할 필요가 없으며, 가만히 시간을 기다리면서 열심히 일만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 가서 강의를 해보니 식구들은 대단히 기뻐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크게 鼓舞되어서, 돌아와 선생님께 보고 드렸습니다. 일본에서「講義해보았더니 대단히 기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식구들은 이것을 일본어로 빨리 출판하고 싶다고 합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선생님은 한국에서 먼저 출판하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동시에 統一思想硏究院을 창립하라는 명령도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열심히 원고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1973년 3월말에 집필을 완료하고, 同年 6월 1일에「統一思想要綱」第一版을 발간하였습니다. 일본에선 한국어판을 번역하여 그 다음해의 2월에 일본어판의「통일사상요강」이 출판되었던 것입니다.

 

6) 學界의 公認

 

1973년부터 大學敎授를 대상으로 통일사상세미나를 실시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대단히 감명되어서「통일사상이 없으면 미래세계는 救援될 수 없다」,「韓國을 위해서도 세계를 위해서도 이것은 꼭 필요하다」는 감상문이 참가자로부터 많이 제출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한국의 교수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外國敎授들까지도 받아들여서 증거해 주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내가 아는 외국교수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시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해인 1974년 일본에 가서 40일간에 걸쳐 전국을 순회하면서 교회의 식구들에게 통일사상을 강의한 일이 있었습니다. 강의를 마치고 동경에 돌아오니 어떤 분이 한 老學者가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전갈을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노학자는 富土山의 산록에 살면서 仙人으로 알려진「仲小路彰」이라는 분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소개인과 함께 그곳에 가서 그를 만났더니 그는 키도 적은 백발의 노인이었으나 얼굴은 紅顔이고, 대단히 靈的이라는 느낌이 드는 분이었습니다.

 

그는 철학과 종교를 30년간 연구한 학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새 共産主義批判」과 「統一思想要綱」을 내놓고「이것을 당신이 썼습니까. 대단히 잘되었습니다. 이 내용이 모두 그대로 일본에서 성취됩니다. 또 세계에서도 성취됩니다. 세계는 하나님의 이름하에 반드시 통일됩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나는 引用文이나 參考書籍도 대단히 불충분해서 학술로서는 빈약합니다」고 했더니 그는「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용이 훌륭합니다」라고 하면서 격려하여 주셨습니다. 나는 정말로 기뻤습니다.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이것은 文선생님의 사상이라는 것을 알리면서 선생님이 감옥에서 출발하신 초기시대의 상황 등을 간증해 주었습니다.

 

그는 심각하게 듣고 있었습니다. 그때 동행인 하나가「李先生은 21일간 禁食하였다」고 알렸더니 「그러면 그 말씀도 꼭 들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금식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그는 열심히 경청하고 있었습니다. 간증을 끝냈는데도「좀 더 할 말씀이 없습니까」라고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우리들은 모두 교회식구와 같은 분위기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저녁을 함께 마치고 어두워질 때까지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때 나는 이분이 선생님의 사상을 증거하는 세례요한격인 인물과 같이 느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성가를 부르고 내가 기도하고 헤어졌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뜻과 연결시키고자하는 기분으로 기도한 것입니다.

 

이리하여 日本의 한 學者로부터 증거를 받은 것입니다. 다음은 미국에서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證據하는 사람이 나와 주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78년 7월 한국에서 超敎派基督敎協會가 주관하는 국제세미나가 있었을 때에「마제크」라는 神學者가 同세미나에 참가하여, 한 分科의 강연에서 통일사상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통일사상의 훌륭함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강조하면서 신학의 통일이나 사상의 통일은 반드시 統一思想이어야 한다고 선전하고 있었습니다. 이때의 나의 기쁨은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통일사상이 이제야 條件的으로나마 세계적으로 공인되기에 이른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최후로 선생님께서 공적으로 승인하시는 여부의 문제뿐이었습니다. 그런데 1979년 11월 4월에 소집되었던 한국간부의 合同會議席上에서「전 세계의 統一食口는 전부 統一原理와 統一思想, 勝共理論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으로 통일사상에 대한 하늘의 공적인 확인이 이루어진 것으로 나는 확신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 후 명령에 의하여 한국과 일본의 간부 및 일부 서양의 간부들에게 승공이론과 통일사상에 대한 특별강의가 正式으로 개시되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또 하나 명백히 하여 둘 것은 선생님의 勝共理念이나 統一思想 그 자체는 완벽하지만 그 體系化는 반드시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장래 훌륭한 學者나 後輩가 나타나서 先生님의 사상을 선생님의 지도아래 보다 더 완전히 體系化하여 주실 것을 절실히 바라마지 않으며 이 사실을 先生님께 이미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以上으로 統一思想의 執筆의 動機와 배경을 모두 끝마칩니다. *

 

 

(註)

入敎 前 1955년 12월 31일 밤, 나는 밤을 새면서 고민하였습니다. 언제까지 나는 기다려야 하는가? 나에게 있어서 人生問題의 해결은 영영 不可能한 것인가?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 無意味한 생애를 언제까지 계속해야만 할 것인가? 이렇게 밤새 괴로워하다가 새벽녘에야 잠깐 잠이 들었습니다. 두 시간쯤 후에 아내의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여보! 오래간만에 닭이 알을 일곱 개나 낳았어요!」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번쩍 잠을 깨어보니 1956년 1월 1일이 된 것입니다. 밖을 내다보니 간밤에 흐렸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개이고 있었습니다. 마음은 한없이 상쾌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때 마음의 구름까지 활짝 개이고, 幸運이 곧바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금년에 어떤 聖者를 만나서 나의 問題가 풀릴 것 같은」예감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나도 모르게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습니다.「7數 完成數다. 오늘부터 나에게 새날이 온다」라고 (「生命의 實相」에서 7數를 完成數로 보고 있었음), 이때의 감격적인 벅찬 희망을 붓으로 남기기 위하여「직원에게 告함」이라는 글을 써서 소책자를 만들어서 직원에게 배포까지 하였습니다. 그 후 1개월쯤 지나서「李先生이 고민하는 인생문제, 철학문제, 종교문제를 상세히 풀어주는 한 指導者가 있으니 꼭 와서 들어보시라」는 내용의 편지 한 장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통일교회의 한 전도자의 편지였습니다. 이것이 機緣이 되어서 결국 나는 同年 5월 21일 統一敎會에 入敎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