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사상 - 제3장 본성론(本性論) - 3

2010. 1. 6. 16:49참사랑 영원까지/통일사상

二. 신성적존재(神性的存在)


인간은 또 하나님의 신성(神性)도 닮고 있다. 하나님의 신성(神性)에는 전지(全知), 전능(全能), 심정(心情)(사랑), 무소부재(無所不在), 생명(生命), 진(眞)-선(善)-미(美), 정의(正義), 로고스, 창조성(創造性)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중에서 중요한 것 3가지만을 다루고자 한다. 이 세 가지는 현실문제 해결에 특히 중요한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심정(心情), 로고스, 창조성(創造性)이다. 따라서 이러한 세 가지의 신성(神性)을 닮고 있다는 측면에서 인간을 바라볼 때 인간은 심정적(心情的) 존재(存在)요, 로고스적 존재요, 창조적 존재이다. 이에 관해서 다음에 상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1) 심정적존재(心情的存在)


여기의 심정(心情)은 원상론에서 밝힌 바와 같이 사랑을 통해서 기쁘고자 하는 정적(情的)인 충동(衝動)이다. 심정(心情)은 사랑의 원천이며 사랑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정적(情的)인 충동이기도 한 것으로서 원상(原相)의 핵심(核心)을 이루고 있으며, 따라서 성상(性相)의 핵심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심정은 하나님에 있어서 인격(人格)의 핵심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 5:48)고 하신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인격(人格), 즉 하나님의 심정(心情)을 닮으라는 가르침이다. 인간에 있어서도 심정은 인격의 핵심이 되게 되어 있었다. 인간에 있어서 인격의 완성은 이러한 하나님의 심정(心情)을 체휼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함으로써 인격(人格)을 완성한 인간이 바로 심정적존재(心情的存在)인 것이다.


이러한 인간이 하나님의 심정을 계속적으로 체휼하면 드디어 하나님의 심정을 완전히 상속받게 된다. 그러한 인간은 사람이나 만물을 사랑하고 싶어 한다. 사랑하지 않으면 도리어 마음이 괴롭기 때문이다. 타락인간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어렵게 느끼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심정(心情)과 일치된 자리에 이르게 되면 생활 그 자체가 사랑의 생활이 되는 것이다. 사랑이 있으면, 가진 자(者)는 갖지 못한 者에게 베풀면서 살게 된다. 사랑은 자기중심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빈부(貧富)의 차(差, 차이)나 착취 등은 자연히 소멸하게 된다. 이러한 사랑의 효과(效果)는 사랑의 평준화(平準化)작용(作用)에 기인한다. 이와 같이 인간이 심정적 존재라는 말은 인간이 사랑의 생활을 하는 존재(存在)임을 뜻한다. 따라서 인간은 애적인간(愛的人間; homo amans)이 되는 것이다.


심정(心情)은 인격의 핵심이 되기 때문에, 인간이 심정적존재라는 말은 인격적 존재임을 또한 뜻한다. 그것은 심정을 중심으로 하여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이 원만한 수수작용(授受作用)을 하게 됨을 뜻하며 또한 심정을 중심으로 지-정-의의 기능이 균형적(均衡的)으로 발달하게 됨을 의미한다.


타락(墮落)한 인간에 있어서는 생심(生心)의 기능이 약해서 생심(生心)이 육심(肉心)에 주관당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이성(知的能力)이 대단히 발달해 있으면서도 정적(情的)으로 미숙(未熟)하거나 선(善)을 행하려고 하는 의지력이 부족한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심정을 상속받아서 심정적존재(心情的存在)가 되면 지-정-의는 균형적(均衡的)으로 발달하고, 또 생심(生心)이 주체의 입장에서 육심(肉心)을 주관하면서 육심과 함께 원만한 수수작용(授受作用)을 행하게 된다.


심정은 또 성상(性相)의 핵심으로서 지(知)-정(情)-의(意)의 기능을 자극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그리고 지(知)-정(情)-의(意)는 각각 진(眞)-선(善)-미(美)라는 가치를 추구하는 기능이기도 하다. 즉 지(知)는 인식하는 능력으로서 眞의 가치를 추구하며, 정(情)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느끼는 능력으로서 美의 가치를 추구하며, 의(意)는 결의(決意)하는 능력으로서 선(善)의 가치를 추구한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 추구는 모두 심정을 동기로 하고 이루어지고 있다. 지적활동(知的活動)에 의해서 진리를 추구할 때 그 성과는 과학, 철학 등의 학문으로 나타나며, 정적활동(情的活動)에 의해 미(美)를 추구할 때 그 성과는 예술로 나타나며, 의적활동(意的活動)에 의해 선(善)을 추구할 때, 그 성과는 도덕(道德)-윤리 등으로 나타난다.


정치, 경제, 법률, 언론, 스포츠 등도 모두 지(知)-정(情)-의(意)의 활동의 성과인 것이다. 따라서 심정은 지(知)-정(情)-의(意)를 중심한 전체 문화활동의 원동력(原動力)이 되고 있으며, 특히 예술활동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지?정?의의 활동의 성과의 총화(總和)가 바로 문화이며, 본연(本然)의 세계에 있어서는 심정적(心情的) 인간(사랑의 인간)이 문화활동의 주역이 된다. 이 내용을 도표로 표시하면 그림 3-1과 같다.


이와 같이 심정(心情)은 본래 문화활동(文化活動)의 원동력이다. 따라서 인간이 이룩했어야할 문화는 본래 심정문화(心情文化)였다. 이것이 참다운 문화이며 하나님이 아담을 통해서 실현하고자 했던 아담문화이다. 그러나 아담과 해와의 타락으로 심정문화(心情文化)는 실현되지 않았으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기심(利己心)을 기반으로 한 문화, 즉 지적활동(知的活動), 정적활동(情的活動), 의적활동(意的活動)이 통일을 이루지 못한 문화, 따라서 분열(分裂)된 문화가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


예컨대 경제생활(經濟活動)에 있어서 인간은 오늘날까지 돈 버는 것만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아 왔다. 그러나 본연의 세계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가난한 생활을 하는데, 자기만이 유복(裕福)한 생활을 하게 되면 마음에 괴로움을 느끼게 된다. 그 때문에 돈을 많이 모으면 이웃이나 사회에 베풀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즉 기업활동(企業活動)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하게 되는 것이다. 경제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영역(領域)에서도 사람들은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이렇게 될 때, 여기에 심정문화(心情文化), 사랑의 문화가 세워지게 된다. 이때 지적활동, 정적활동, 의적활동은 사랑을 중심하고 통일되게 된다. 이것이 통일문화이다. 따라서 사랑의 문화는 바로 통일문화이다.


오늘날까지 인류는 참다운 문화, 항구적(恒久的)인 문화를 실현하려고 수없이 시도했으나 결국은 실패(失敗)로 끝나고 말았다. 인류역사에 있어서 여러 문화가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거듭한 사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것은 참다운 문화, 항구적(恒久的)인 문화가 어떠한 것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중국(中國)에 있어서 공산주의식 문화운동인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도 그 일례(一例)였다. 유물변증법을 근거로 하여 노동을 기반으로 한 문화가 참된 문화인 줄 알고 일으킨 문화혁명이었으나, 그 결과는 인간성(人間性)의 억압(抑壓)과 근대화의 지연(遲延)과 경제의 파탄을 초래했을 뿐이었다. 참다운 문화란 심정을 중심으로 한 문화 즉 심정문화(心情文化)로서, 문선생님이 주창하고 계시는 신문화혁명은 바로 심정문화의 건설운동인 것이다.


여기서 문화와 문명(文明)의 개념에 관해서 살펴보자. 지(知)-정(情)-의(意)의 활동에 대한 성과의 총화를 과학과 기술 등의 물질적 측면에서 볼 때 그것을 문명(文明)이라 하고, 특히 종교, 예술 등의 정신적(精神的)측면에서 볼 때 그것을 문화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활동의 성과를 정신적(精神的)인 면과 물질적인 면으로 명확히 구별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문화와 문명(文明)은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통일사상에 있어서도 일반의 예(例)에 따라서 문화와 문명을 동일한 뜻으로 사용할 때가 많다.


(2) 로고스的 존재(存在)


로고스라는 말은 원상론에서 밝힌 대로 원상내(原相內)에 있어서 창조목적을 중심으로 한 내적수수작용(授受作用)의 산물, 즉 신생체(新生體)를 의미한다. 여기의 창조목적은 심정(心情)(혹은 사랑)을 터로 하고 있기 때문에 로고스도 심정이 그 터가 되고 있다.


우주(宇宙)는 이러한 로고스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로고스에 따라 운행하고 있으며, 이 로고스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다. 인간도 로고스에 의해 창조되었고 로고스에 따라서 살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로고스的 존재이다.


로고스란 이미 언급한 대로 원상(原相)의 성상(性相)에 있어서 목적을 중심하고 내적성상(內的性相)과 내적형상(內的形狀)이 수수작용을 하여 생긴 신생체(新生體)로서, 내적성상(內的性相)속의 이성과 내적형상(內的形狀)속의 법칙이 특히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에 로고스는 이성과 법칙의 통일체(統一體), 즉 이법(理法)이 된다. 따라서 인간이 로고스적 존재라 함은 인간이 이법적존재(理法的存在)임을 뜻한다. 여기서 이성과 법칙의 특성은 각각 자유성(自由性)과 필연성(必然性)이므로 로고스적 존재라는 말은 자유성과 필연성을 통일적으로 갖고 있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즉 인간은 자유의지(意志)에 따라 행동하는 이성적 존재이면서 또한 法則(規範)에 따라 살아가는 규범적 존재이다.


오늘날, 인간은 자유성을 갖고 있으므로 法則(規範)에 따르는 것을 일종(一種)의 속박(束縛)으로 알고 거부하는 사고방식(思考方式)이 만연되어 있다. 그러나 참다운 자유는 법칙을 따르는 데 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스스로 지키는 데에 있다. 법칙(法則)을 무시한 자유는 방종(放縱)이어서 파멸을 가져올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기차는 궤도(軌道)위에 있으므로 빨리 달리거나 늦게 달리거나 할 수도 있고, 또 전진(前進)하거나 후진(後進)할 수도 있다. 그러나 궤도(軌道)를 벗어나면 기차는 전혀 달릴 수 없게 된다. 즉 기차는 궤도 위에 있을 때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며, 궤도를 떠나면 기차 자체도 파괴되고, 인간이나 가옥에도 막대한 피해를 주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규범(規範)에 따라 살 때에 참다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공자(孔子)는 논어(論語)에서 70이 되니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하더라도 법도(法道)를 넘는 일이 없었다.2)라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70세가 되어서 드디어 자유의지와 법칙이 통일된 완전한 로고스적 존재가 될 수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인간은 로고스的 존재이므로 법칙을 따르고자 하는 것이 본래의 모습이다. 인간이 지켜야 할 법칙이란 우주에 작용하고 있는 법칙, 즉 수수작용(授受作用)의 법칙을 말한다. 그런데 원상(原相)에서 로고스가 형성될 때, 그 동기는 심정(心情)이다. 따라서 우주의 법칙은 사랑(心情)이 그 동기가 되었고 사랑의 실현이 그 목적이 되었던 것이다. 존재론(存在論)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가정은 우주의 질서체계의 축소체이다. 즉 우주에 종적(縱的)?횡적(橫的)인 질서가 있는 것과 같이, 가정에 있어서도 종적(縱的)-횡적(橫的)인 질서가 있다.


종적질서와 횡적질서에 대응하는 가치관이 종적규범(종적가치관)과 횡적규범(횡적가치관)이다. 가정에서의 종적가치관이란 부모(父母)와 子女間에 있어서의 규범이며, 횡적가치관이란 형제자매(兄弟姉妹)의 관계 및 부부의 관계에서의 규범(規範)이다. 또 인간에게는 개인으로서 지켜야 할 가치관 즉 개인적(個人的) 규범(規範)도 있다. 그것은 개인으로서의 인격(人格)을 완성하거나 유지하기 위한 규범이다(이들 종적규범, 횡적규범, 개인적규범에 대해서는 가치론과 윤리론에서 상세히 설명하고자 함).


가정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규범(規範)은 사회나 국가에 그대로 확대 적용된다. 결국 가정의 규범은 사회나 국가가 지켜야 할 규범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로고스적 존재가 되지 못하였다. 그 결과 사회도 국가도 혼란상태(混亂狀態)에 놓여지게 되었다. 인간이 로고스적 존재로서의 본성(本性)을 회복할 때, 비로소 가정도 국가도 본래의 질서(秩序)를 갖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3) 창조적존재(創造的存在)


하나님은 그의 창조의 능력(能力) 즉 창조성(創造性)으로써 우주를 창조했으며 그 창조성(創造性)을 인간에게도 부여하셨다. 그리하여 인간은 부여받은 이 창조성을 발휘하여 오늘날까지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켜 왔다. 그런데 여기의 창조성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하나님의 창조성은 심정(心情)을 기반으로 한 창조의 능력이다. 이미 원상론에서 밝힌 바와 같이 우주 창조에 있어서 원상내부(原相內部)에는 다음과 같은 2단계(二段階)의 수수작용이 행하여졌는바, 그 첫째는 내적수수작용이요 둘째는 외적수수작용이었다.


내적수수작용은 심정에 의해 세워진 목적을 중심하고 내적성상(內的性相)과 내적형상(內的形狀) 사이에 벌어진 수수작용으로서 이 수수작용에 의해서 로고스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외적수수작용은 동일한 목적을 중심하고, 同로고스와 형상(본형상(本形狀)) 사이에 벌어진 수수작용으로서 이 수수작용에 의해서 피조물이 生成되었던 것이다. 이 2단계(二段階)의 수수작용(授受作用)은 바로 2단계(二段階)의 발전적사위기대의 형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성이란 결국 이 2단계(二段階)의 발전적사위기대 형성의 능력, 즉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 및 외적발전적(發展的)사위기대(四位基臺) 형성(形成)의 능력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어떤 것을 만들 때 먼저 목적을 세우고 설계를 하거나 구상을 한다. 즉 내적수수작용을 한다. 그리고 그 구상에 따라 물건을 만들게 된다. 즉 외적수수작용을 행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창조성(創造性)을 주신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심정을 터로 한 사랑으로써 만물을 주관토록 하기 위함이었다. 주관이란 物的對象(自然萬物, 자연), 재화(財貨) 등)과 인적대상(人的對象)을 다루거나 다스리는 것을 뜻하며, 특히 만물 주관은 물질을 다루는 것, 즉 물질의 취급, 관리, 처리, 보존 등을 의미한다. 산업활동(産業活動)(一次産業, 二次産業, 三次産業), 정치(政治), 경제(經濟), 과학(科學), 예술(藝術) 등 물질을 취급하는 일절(一切)의 활동이 모두 이러한 만물주관에 포함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갖고 이러한 주관활동을 하는 것이 본연(本然)의 주관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성을 완전히 계승(繼承)했더라면 이들 활동은 모두 하나님의 심정이나 사랑을 중심으로 하여 영위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다스리라(창1:28), 즉 주관(主管)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만물을 주관(主管)하려면 만물(萬物, 자연)을 주관할 수 있는 주관주(主管主)로서의 자격(資格)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은 大주관주(主管主)이시기 때문에 인간을 주관하실 수 있는 자격으로서 창조성(創造性)을 갖추고 계신 것과 같이, 인간도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주관주로서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창조성(創造性)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성(創造性)을 지니도록 하기 위해서 성장기간(成長期間)을 두시고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완수함으로써 인격적으로 완성되도록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러한 성장과정(成長過程)을 통하여 완성됨으로써만 하나님의 창조성을 부여받아 가지고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그런데 주관은 본래 자기가 만든 것(자기 것)만을 주관하게 되어 있지, 타인(他人)이 만든 것(타인 것)을 함부로 주관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인간은 만물 창조가 끝난 뒤에 지음받았기 때문에 만물을 주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딸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그리고 자식은 자라서 부모의 권한(權限)을 상속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로 하여금 주관권을 상속받을 수 있는 조건(條件)을 세우도록 하기 위해서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면서 성장하도록 명령(命令)하셨던 것이다. 그 조건(조건(條件))이란, 인간도 우주의 창조위업(創造偉業)에 가담한 것과 동일한 가치의 조건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것이 바로 인간(아담과 해와)이 자기의 책임분담(責任分擔)하에 자신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인간은 만물을 총합(總合)한 실체상(實體相)이며, 소우주이기 때문에 인간 한 사람의 가치는 우주의 가치에 맞먹는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책임분담으로 자기를 완성(完成)시킨다면 그 노력은 우주를 완성시킨 것(창조한 것)과 동일(同一)한 가치(價値)의 노력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에게 책임분담을 다하게 하신 이유였다. 즉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도 하나님의 창조위업에 가담했다는 조건을 세우도록 하기 위해서 책임분담에 의해서 완성토록 하셨다. 이러한 이유(理由)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에게 성장기간 동안에는 선악(善惡)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원리강론 1987, p. 85:性的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는 계명(誡命)을 주신 이후, 그들의 행위에 대하여 일체 간섭(干涉)하지 않으셨다. 만일 간섭하게 되면 인간 책임분담(責任分擔)을 하나님 스스로 무시하는 입장이 되며, 미완성한 아담과 해와로 하여금 만물을 주관하게 하는 모순을 초래(招來)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담 해와는 그 계명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만물을 주관하는 자격(資格)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성을 계승할 수가 없게 되었으며, 자기(自己)중심적(中心的)인 이성에 의한 창조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개인(個人)레벨의 창조일 경우에는 자기이익을 먼저 생각하게 되었고, 가정레벨의 창조일 경우에는 자기가정의 이익(利益)만을 생각하게 되었으며, 국가레벨의 경우에는 자기 국가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창조활동(創造活動)은 거의 자기중심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또 인간은 오랫동안 자연은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사고방식을 지속(持續)해 왔다. 그 결과 자연파괴나 공해, 살육병기(殺戮兵器)의 개발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야기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심정을 중심으로 한 본래의 창조성(創造性)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심정이 창조성의 기반이 된다는 것은 사랑을 동기로 하여 창조가 이루어져야 함을 뜻하며 올바른 가치(價値)觀에 따라 창조활동이 행하여져야 함을 뜻한다. 따라서 과학자는 과학자이기 전에 먼저 가치적인 인간, 즉 인격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하면 윤리가 자연과학의 기반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근대이후(近代以後), 과학자(科學者)들은 객관적인 사실만을 탐구(探求)하면서 일체의 가치관을 배제해 왔다. 그 결과 오늘날과 같은 혼란상태(混亂狀態)가 오게 되었다. 국제과학통일회의가 개최될 때마다 문선생님이 과학자들에게 가치관을 다루도록 강조한 것은 과학자들로 하여금 참다운 창조성(創造性)을 회복(回復)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즉 자연(自然)을 사랑하고 인간의 가치(價値)를 재검토(再檢討)하고, 인간 상호간의 사랑 그리고 사랑의 근본(根本)인 하나님을 찾음'으로써 참된 창조성을 지닐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