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사상 - 제3장 본성론(本性論) - 4

2010. 1. 6. 16:48참사랑 영원까지/통일사상

. 격위적존재(格位的存在)


한편 인간은 원상(原相)의 주체와 대상의 관계성을 닮아서 주체격위와 대상격위를 지니게 되어 있다. 인간은 먼저 부모 앞에 대상으로서 출생(出生)하며, 성장한 다음에는 부모(父母)가 되어서 자식을 낳고, 그 子息에 대하여 주체의 위치에 서게 된다. 또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서도, 하위의 대상의 직급에서 출발하여 점차 상위의 주체의 직급으로 올라간다. 따라서 인간은 먼저 대상격위에 머물러 있다가 점차로 주체격위로 옮아가게 된다.


(1) 대상격위(對象格位)와 주체(主體)


대상격위는 주체의 주관을 받는 입장(格位)인 동시에 주체에게 기쁨을 돌려주는 데에 그 존재의 의의(意義)가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으로 지음받았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해서 대상격위에 있는 인간생활의 제1차적인 의의(意義)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데에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은 먼저 하나님에 대하여 대상의 위치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여러 대신(代身) 위치에 대해서도 대상격위에 서게 된다.


여기서 하나님의 대신 위치란 예컨대 다음과 같다. 즉 백성에 대한 대통령이나 국왕, 자식에 대한 부모, 제자에 대한 스승, 부하에 대한 상관, 그리고 개인에 대한 전체 등이 그것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대상(對象)인 것처럼, 국민(百姓)은 대통령이나 국왕의 대상이요, 자식은 부모의 대상이며, 제자는 스승의 대상이요, 부하는 상관의 대상이며, 개인은 전체의 대상인 것이다.


인간은 여러 주체들과 연관을 맺으면서 살아가게 되는데 대상격위(對象格位)에 있는 인간은 주체의 주관을 받는 입장이기 때문에 대상으로서 주체에 대한 일정한 심적태도(心的態度)가 요구된다. 이것이 대상의식이다. 먼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대상의식은 하나님을 모시는 마음, 즉 시봉심(侍奉心) 혹은 충성심(忠誠心)이며, 국가에 대한 국민의 대상의식도 충성심(忠誠心)이다. 자식의 부모에 대한 대상의식은 효성심(孝誠心)이며, 스승에 대한 제자들의 대상의식은 존경심(尊敬心) 혹은 복종심(服從心)이다. 또 상관에 대한 부하의 대상의식은 복종심(服從心)이며, 전체(全體)에 대한 개인의 대상의식은 봉사심(奉仕心)이다. 여기에서 각각의 주체에 대한 대상들의 공통적인 대상의식은 온유와 겸손, 그리고 위하고자 하는 마음(爲他心)인 것이다.


그런데 타락세계에 있어서는 역사상, 많은 독재자(獨裁者)가 나타나서 대중들의 대상의식을 이용(利用)하여 마치 참다운 주체인 것 같이 행동함으로써 국민의 존경(尊敬)이나 지지(支持)를 받아 왔다. 예컨대 히틀러, 스탈린, 모택동, 차우체스크(Ceausescu 루마니아 독재자)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그러나 거짓 주체들이 비록 일시적으로 대중들로부터 환영을 받는다 하더라도 결국에 가서는 대중의 지지(支持)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子女로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시봉(侍奉)하고, 충성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대상의식을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대상의식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치고자 하는 마음까지를 유발(誘發)하게 된다. 종교인들의 순교(殉敎)정신(精神)이 바로 그 예이다. 위대한 지도자의 추종자(追從者) 중에 때때로 그 지도자를 위해서라면 생명(生命)까지 기꺼이 바치는 예가 가끔 있음을 보는데, 이러한 예들은 참주체(하나님 대신입장)에 대한 대상의식이 극한적으로 발로(發露)된 예이다. 그런데 일반대중은 누가 참주체인가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리하여 독재자(獨裁者)와 같은 거짓주체를 참 주체(主體)로 착각하고 그를 맹목적(盲目的)으로 따름으로써 인류사회에 해악(害惡)을 끼치는 일에 도움을 주는 결과를 낳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했다. 이리하여 참된 주체를 찾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대단히 필요(必要)한 일이다.


대상의식(對象意識)은 윤리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오늘날 대상의식이 거의 마비됨으로써 주체의 권위가 무시를 당하고 여기에 주체와 대상의 질서가 사라져서 그로 말미암아 사회가 혼란상태(混亂狀態)에 빠지게 되어 윤리부재(倫理不在)의 상태가 되고만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윤리의 확립을 위해서는 확고한 대상의식을 앞세우게 하는 의식의 개혁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2) 주체격위(主體格位)와 대상(對象)


주체격위는 대상을 주관하는 위치이다. 본래 인간이 성장하여 완성하면 만물에 대해서 주체의 위치 즉 주체격위에 서게 된다. 즉 만물을 주관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그런데 여기의 주체격위는 인간 대 인간관계(關係)에 있어서의 주체의 위치를 말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인간생활에 있어서 주체의 예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가정에서 부모는 자녀에 대하여 주체이며, 학교에서 교사는 학생에 대하여 주체이다. 사회(社會)에서 상사(上司)는 부하(部下)에 대하여 주체(主體)이며, 국가에서 정부(政府)는 국민(國民)에 대하여 주체이다. 또 전체는 개인에 대하여 주체이다.


그런데 주체가 대상을 주관하는데 있어서도 일정(一定)한 심적태도(心的態度)가 요구된다. 이것이 주체의식이다. 그것은 첫째로, 대상에 대해서 부단한 관심을 갖는 일이다. 그 동안 인간 소외문제가 사회적으로 심각하게 제기되어 왔는데, 그것은 여러 주체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말단(末端)의 대상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데에 기인한 것이다. 대상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주체가 그 대상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대상은 주체에게 불신(不信)을 품게 되고, 그 주체를 따르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주체는 주관의 대상에 대하여 망각지대(忘却地帶)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둘째로, 주체는 대상을 사랑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상관이 부하(部下)에게 명령하거나 대상을 지배하는 것이 주체의식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참주관(主管)은 대상을 능동적(能動的)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은 행복(幸福)과 이상(理想), 기쁨과 생명의 원천이 되기 때문에 주체(主體)가 대상(對象)을 사랑할 때 대상은 주체에게 충성하고 복종하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이 대상인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과 같이 주체는 대상을 사랑해야 한다.


셋째로, 주체는 적당한 권위(權威)를 지녀야 한다. 주체가 사랑을 가지고 부하를 주관(統率)할 때, 일정한 권위가 없이 동정심(同情心)만 베푼다면 부하는 믿음직한 상관(上官)이라는 이미지가 흐려짐과 동시에 긴장감(緊張感)이 풀어져서 일하고자 하는 의욕이 저하된다. 따라서 주체는 적당한 권위를 지니면서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랑에는 봄날과 같은 따뜻한 사랑도 있으나 겨울의 차가움과 같은 엄격(嚴格)한 사랑도 필요한 것이다. 이와 같은 권위(權威)를 갖춘 엄격한 사랑은 대상들의 주체에 대한 신뢰도(信賴度)와 소속감을 제고(提高)시키며, 상관(上官)에의 복종심과 일에 대한 의욕(意欲)을 앙양시킨다. 여기의 권위를 갖춘 엄격한 사랑이란 사랑을 내포(內包)한 엄격한 명령(命令)을 말한다.


이와 같이 주체에게는 일정한 권위가 필요하나, 과다한 권위의식은 도리어 금물이다. 그런 권위에는 사랑이 깃들 수 없기 때문이다. 권위가 지나치게 강하게 작용하면 부하는 위축되어 창조성(創造性)을 발휘하기가 어렵게 된다. 상사가 부하를 꾸짖어도 부하가 감사함을 느끼면서 그 질책(叱責)에 순종할 수 있도록 하는 권위가 참권위(權威)이며, 바로 사랑을 내포한 권위(權威)인 것이다.


하나님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 동시에 권위의 하나님이시다. 예컨대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비둘기와 양과 암소의 헌제에 실패하였을 때, 그의 자식인 이삭을 제물로 바치도록 명령하셨다. 아브라함이 그 명령에 순종(順從)하여 이삭을 헌제로 바치고자 했을 때, 하나님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내가 아노라"5)고 하셨다. 이것은 이때까지 너는 내가 두려운 권위의 하나님인 것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 네 아들을 제물로 바치도록 한 것이다라는 뜻이 내포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해서, 안이(安易)하게 생각하거나 함부로 대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시며 도리어 두렵게 여기는 것을 원(願)하고 계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권위의 하나님이신 것이다.


마지막으로 만물에 대한 인간의 주체격위(主體格位)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사랑은 심정(心情)을 터로 하고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간이 완성해서 하나님의 심정을 상속(相續)받으면, 심정을 터로 한 하나님의 창조성을 발휘(發揮)하여 만물을 주관하게 된다. 즉 하나님의 사랑(참사랑)을 가지고 만물을 주관(主管)하게 된다. 그 때, 인간은 참된 의미에서 만물에 대한 주체격위에 서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에 마르크스主義는 생산수단(生産手段)을 국유화(國有化)하고 계획경제를 실시하게 되면, 인간은 자연에 대한 참다운 의식적(意識的)인 주인이 된다6)고 하였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主義)는 인간이 계획경제를 실시함으로써 만물주관의 주체격위(主體格位)에 서게 된다고 보고 있음을 뜻한다. 사랑에 의해서가 아니라 경제의 개혁(계획경제의 실시)에 의해서 인간이 만물주관의 격위(格位)에 서게 된다는 뜻이다. 과거 수십 년 동안 소련(蘇聯)이나 중국(中國) 등에서 경제정책이 실패하고, 생산성의 정체(停滯) 등으로 경제가 파탄된 것은 공산주의가 만물주관에 완전히 실패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마르크스主義의 물질주의적(物質主義的) 인간관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으로서 물질적인 인간은 만물에 대해서 참다운 주체격위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3) 연체의식(聯體意識)과 민주주의(民主主義)


인간은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실제로는 주체격위와 대상격위에 함께 서있다. 이것은 인간이 연체(聯體)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주체격위와 대상격위를 겸비(兼備)한 존재, 즉 이중격위(二重格位)를 가진 존재이다. 이것을 연체격위(聯體格位)라고 한다. 연체격위는 이중(二重)목적, 즉 전체(全體)목적과 개체(個體)목적을 지닌다. 예컨대 어느 직장에 있어서 한 부서(部署)의 장(예: 과장, 부장)은 부하(部下)에 대하여 주체격위에 있으나 동시에 상사(上司)에 대하여 대상격위에 처해 있다. 그 회사에 있어서 최고의 주체입장에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에 대해서는 대상격위에 있으므로 인간은 누구나 엄격히 말해서 모두 연체격이(聯體格位)에 있는 것이다. 연체격위에 있어서 취해야할 마음의 자세는 대상의식과 주체의식을 겸비하는 것으로서 이것을 연체의식(聯體意識)이라고 한다.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인간은 먼저 대상격위에 있다가 다음에 주체격위에도 서게 된다. 따라서 연체의식에 있어서는 대상의식이 우선(優先)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주체의식은 대상의식의 기반위에 세워지는 것이 본연의 모습이다. 그런데 타락인간에 있어서 인간이 주체의 위치에 설 때, 대체로 주체의식을 우선(優先)하게 된다. 그 전형적(典型的)인 예가 독재자(獨裁者)들이다. 독재자들은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고 무엇이든지 자기의 뜻대로 하려고 한다. 그러나 본연의 사회에서의 지도자는 비록 최고의 위치에 있다고 하더라도 항상 하나님 앞에 대상의 위치에 있음을 의식하고 겸손성(謙遜性)을 잃지 않는다.


다음에 민주주의에 있어서의 연체의식에 대해서 살펴보자.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는 다수결주의(多數決主義)와 권리평등(權利平等)의 사상으로서 이 권리평등의 사상은 로크(J. Locke, 1632~1704)의 `자연권(自然權)의 평등' 사상에 근거하고 있다. 홉스(T. Hobbes, 1588~1679)에 있어서는 인간의 자연상태는 만인(萬人)의 만인에 대한 투쟁(鬪爭)이었으나 로크는 자연상태(自然狀態)에 있어서 자연법이 존재하고 있으므로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상태에 있다고 언명(言明)하면서, 자연상태에 있어서의 인간은 자연(自然)의 권리(權利)-생명(生命), 자유, 재산(財産)에 대한 평등한 권리(權利)-를 가진다고 하였다.7) 이 자연권(自然權) 사상의 토대가 되는 것은 고대(그리스시대)로부터의 자연법 사상이었다. 이 자연법 사상에 근거한 권리평등의 사상이 근대민주주의(近代民主主義) 원칙의 성립의 동기가 되었다. 여기의 권리평등이란 개인 개인의 권리(權利)의 평등을 뜻함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 자연법에 근거한 권리평등의 사상을 정확히 말한다면 기독교의 하나님 앞에서의 平等의 사상에서 온 것이다. 즉 존 로크의 자연권(權利平等)사상은 인간의 平等한 자연권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며, 국가로부터 부여받은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의 평등권사상(平等權思想)이 근대민주주의 성립의 참된 근거였다. 따라서 평등사상(平等思想)은 하나님앞에 대상으로서의 인간의 평등을 뜻하는 것으로서 본래 평등사상은 대상의식의 사상(思想)이며, 따라서 질서의식의 사상이었다. 즉 민주주의는 본래 대상의식을 기반으로 하여 출발했던 것이다.


그런데 민주주의가 발달함에 따라서 하나님의 모습은 점점 대중의 관심권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개인의 권리주장(權利主張)이 지나치게 강조됨으로써 대상의식이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늘에 이르러 개인은 본래대로의 대상의식이나 연체의식을 가질 수 없게 되었으며, 주로 주체의식만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주체의식(主體意識)만을 지닌 인간의 관계, 즉 주체와 주체의 관계로 변질(變質)되었으며 이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질서부재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이다. 주체와 주체의 관계는 본질(本質)상 상극적(相剋的)인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은 민주주의는 그 성립(成立)된 이후 상당한 기간 동안에는 비교적 건전한 발전을 계속하였다. 그것은 기독교 정신에 의해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의 대상의식(對象意識)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후, 과학의 발달과 유물사상(唯物思想)의 확산(擴散)의 영향을 받아서 기독교는 세속화되어 갔으며, 따라서 인류의 정신지도의 능력(能力) 또한 사라져 갔던 것이다. 게다가 사회는 급속히 산업사회로 화하였고 가치관은 다원화(多元化)되어 갔다.


이러한 사회환경의 변천과 함께 민주주의의 권리평등의 사상은 하나님 앞에서의 대상(對象)의 평등에서 法 앞에서의 주체의 권리평등사상으로 변질(變質)되어 갔으며, 그 결과 본래부터 지니고 있던 민주주의의 모순 즉 주체와 주체의 상극적(相剋的)인 요인이 드디어 표면화되면서 여러 가지의 사회적 혼란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주체와 주체의 상호관계는 서로 상극(相剋)의 관계이다. +전기와 +전기가 서로 배척(排斥)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주체)의 권리평등의 사상은 기독교의 사랑과 같은 조절기능이 없는 한 필연적(必然的)으로 상충현상을 빚어내기 마련이다.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紛爭), 충돌(衝突), 전쟁(戰爭), 상호증오(相互憎惡) 등을 비롯하여 갖가지의 불화현상은 모두 이 주체와 주체간의 상극작용의 표현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민주주의의 권리평등(權利平等) 사상은 시초부터 상극요인을 안고 출발하였으며, 따라서 때가 이르면 그 상극작용은 반드시 표면화(表面化)될 숙명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그 때가 당도하자 잠재(潛在)해 왔던 상극작용이 표면화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전체 민주주의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인(殺人), 강도(强盜), 방화(放火), 테러, 파괴, 마약중독, 부정부패, 性도덕(道德)의 퇴폐, 이혼율(離婚率)의 증대, 가정(家庭)의 붕괴, 에이즈(AIDS)의 확산, 성범죄(性犯罪)의 만연 등도 실은 모두 이 민주주의의 상극적 요인(要因)을 바탕으로 하고 일어나고 있는 가치관의 붕괴현상의 결과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사회의 가치관의 붕괴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인간의 머리에 다시 본래의 대상의식(對象意識)을 부활시키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인류의 참된 주체인 하나님을 다시 맞아들여야 하며 민주주의가 출발할 때의 본래의 정신(精神) 즉 인간이 하나님 앞에 평등하다는 사상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현대인들이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나님의 실재(實在)를 합리적(合理的)으로 증명(證明)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믿게 되면 자기의 상위자를 존경하게 되고, 또 상위자는 하위자를 사랑으로 지도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국민을 사랑하게 되고, 국민은 정부에게 충성을 다하게 된다. 이리하여 하나님을 잃어버렸던 민주주의가 하나님을 중심한 민주주의가 될 때, 오늘날의 민주주의의 병폐(病弊)는 근본적으로 해결되게 된다. 통일사상은 하나님을 중심한 민주주의를 천부(天父) 중심의 형제주의 라고도 한다. 이것을 간단히 천부주의 또는 형제주의라고도 부른다. 부모없는 형제가 있을 수 없고 형제를 떠난 부모 또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전인류(全人類)는 참부모(父母)인 하나님의 참사랑을 중심하고 사랑의 형제자매(兄弟姉妹)가 되기 때문이다.


끝으로 만물에 대한 인간의 주관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3대축복(三大祝福)의 하나로서 만물주관을 명하셨다. 그리하여 인간이 타락하지 않고 완성했더라면 만물의 주관격위에 설 수 있었을 것이다. 만물주관이란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인간이 만물을 단순히 지배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산업(제1차, 2차, 3차산업)활동을 위시한 모든 경제활동과 제조활동, 기술활동이 모두 이 주관에 속한다. 그러면 이러한 만물주관에 대한 인간의 심적태도(心的態度)는 어떠해야 하는가? 그것은 만물에 대해서 사랑의 마음을 지니는 것이다. 만물에 대한 사랑이란, 온정(溫情)을 가지고 만물을 소중히 다루면서 위해 주는 것이다. 즉 사랑을 터로 하고 만물을 다루고 다스리는 것이다. 이러한 주관은 천도(天道)에 따르는 주관이기 때문에 만물(萬物, 자연)도 기뻐한다.


四. 결론(結論)


이상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인간은 본래 신상적존재(神相的存在)요, 신성적존재(神性的存在)요, 격위적존재(格位的存在)이다. 이것이 고래(古來)로부터의 철학적인 물음, 즉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통일사상의 대답인 것이다. 결론으로서 이상의 인간 본성(本性)에 관한 이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인간은 신상을 닮은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통일체(統一體)이다. (2) 인간은 신상을 닮은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의 조화체(調和體)이다. (3) 인간은 신상을 닮은 개성체(個性體)이다. (4) 인간은 신성(神性)을 닮은 심정적존재(心情的存在)이며, 사랑을 실천(實踐)하는 인격(人格)的 존재(存在), 즉 애적인간(愛的人間; homo amans)이다. (5) 인간은 신성(神性)을 닮은 로고스的 존재(存在)요, 천도(天道)에 따라 사 는 규범(規範)的존재(存在)이다. (6) 인간은 신성(神性)을 닮은 창조적존재(創造的存在)요, 심정(心情)을 중심으로 한 만물의 주관주이다. (7) 인간은 이중(二重)목적과 연체의식(聯體意識)을 지닌 격위적존재(格位的存在)이다.


위와 같이 엄청난 내용을 가진 귀(貴)하고 성(聖)스러운 존재(存在)가 인간의 본래의 모습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본질(本質)적인 인간의 본성을 든다면, 그것은 심정적존재(心情的存在)이다. 오늘날까지 대표적인 인간관(人間觀)으로서는 이성을 인간의 본성(本性)이라고 하는 지성인(지성(知性)人)(homo sapiens)이나 도구(道具)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을 인간의 본성(本性)으로 하는 공작인(工作人)(homo faber)등이 있었다. 전자(前者)에 속하는 인간관(人間觀)이 그리스철학이나 근대 합리주의 철학(哲學)이며 후자(後者)에 속하는 인간관(人間觀)이 마르크스주의나 프래그머티즘이다. 이에 대하여 통일사상은 인간의 본질(本質)이 심정(心情) 또는 사랑이라는 뜻의 애적인간(愛的人間; homo amans)임을 주장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