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사상 - 제3장 본성론(本性論) - 5

2010. 1. 6. 16:47참사랑 영원까지/통일사상

五. 통일사상에서 본 실존주의(實存主義) 인간관(人間觀)


인간의 본래의 모습을 추구(追求)한 대표적인 철학자들이 실존주의자(實存主義者)들이다. 실존주의자들에 의하면 인간은 현실사회 속에서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절망하거나 불안에 사로잡혀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인간이 어떻게 해야 그러한 절망이나 불안에서 해방(解放)될 수 있는가를 생애(生涯)를 바쳐서 찾았던 것이다. 여기서 5명의 대표적인 실존주의(實存主義) 철학자(哲學者)들의 주장을 간단히 소개하면서 통일사상의 인간관과 비교해 보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본성론의 이해를 보다 깊게 할 수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1) 키에르케고르


1) 키에르케고르의 인간관(人間觀)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 1813~1855)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자문(自問)하고 인간은 정신(精神)이다. 정신이란 무엇인가? 정신이란 자기이다. 자기란 무엇인가? 자기란 자기 자신에 관한 하나의 관계이다.'8)라고 대답하고 있다. 그러면 이와 같은 관계를 조정(措定)한 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자기 이외의 제3자(第三者)가 아니면 안 된다. 그것을 곧 신(神)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본래적인 자기란 신(神) 앞에 서있는 자기(自己)이다.


그런데 본래 신(神)과 관계를 맺고 살지 않으면 안되는 인간이 신(神)으로부터 떠나버렸다. 그 경위는 불안(不安)의 개념(槪念)이라는 책속에서 성서 창세기의 이야기를 분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처음에 아담은 평화와 안식의 상태에 있었으나 동시에 불안(Angst)한 상태에 있었다. 신(神)이 아담에게 선악(善惡)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으면 안 된다고 알려주었을 때, 아담속에 자유의 가능성이 자각(自覺)되었으며 이 자유의 가능성이 아담을 불안(不安)에 빠뜨렸다. 그리고 아담이 자유의 심연(深淵)을 들여다 봄으로써 현기증(Schwindel)을 느껴 자기(自己)에게 집착(執着)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원죄(原罪)가 성립한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은 자기자신(自己自身)에 대한 관계 속에 분열이 일어나 절망(絶望; Verzweifelung)에 떨어져 버렸다. 그런데 인간은 이 절망을 위로부터 자기를 내리 누르는 어떤 무엇인 것처럼 착각하고, 자기 자신의 힘으로 그 절망을 제거(除去)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으로는 결코 절망이 제거되지 않는다. 신앙에 의해서 신(神)과의 관계를 회복(回復)함으로써만 본래의 자기의 관계를 되찾을 수가 있고, 절망에서 피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는 공중(公衆)은 일절(一切)이며, 무(無)이다. 모든 세력중에서 가장 위험(危險)한 것, 그리고 가장 무의미한 것이다."9)라고 하면서 대중(大衆)의 무책임성과 양심(良心)이 없음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인간이 참다운 인간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비인간적(非人間的)인 대중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단독자로서 단지 홀로 신(神)앞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인간이 본래的인 자기에로 돌아가는 단계를 실존(實存)의 3단계라고 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p. 265


첫째의 단계는 미적(美的) 실존(實存)의 단계이다. 이 단계의 인간은 단지 직접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감성적(感性的)인 욕구(欲求)에 따라 기지(機智)를 가지고 살려고 하며, 이 단계의 인간들에게 있어서 인생의 목적은 향락(享樂)이다. 이것은 에로스적 사랑을 추구하는 심미가(審美家), 유혹자(誘惑者)의 입장이다. 그러나 향락의 순간은 계속해서 반복되기 어려우며, 결국은 권태와 불안에 사로잡히게 된다. 여기서 인간은 좌절(좌절(挫折))하고 절망한다. 그러나 결단에 의해 다음의 단계로 옮아간다.


둘째의 단계는 윤리적(倫理的) 실존(實存)의 단계이다. 이 단계의 인간은 양심(良心)을 선악(善惡)의 판단기준으로 삼고 살려고 한다. 즉 책임감과 의무감을 가지고 선량(善良)한 시민으로서 살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노력(努力)해도 전적으로 양심에 따라 살 수는 없다. 그래서 그는 다시 좌절하고 절망한다. 그리고 새로운 결단에 의해 다음의 단계로 넘어간다.


셋째의 단계는 종교적(宗敎的) 실존(實存)의 단계이다. 신앙을 가지고 신(神) 앞에 홀로 서는 단계이며, 이 단계에서 비로소 인간은 참다운 실존(實存)이 된다. 이 단계에 이르려면 비약(飛躍)이 필요하다. 그것은 지성(知性)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는 역설(逆說)(Paradox)을 믿음으로써 가능하다. 예컨대 인륜(人倫)에 반하는 신(神)의 명령에 복종하여 자식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의 신앙이나, 영원(永遠)한 신(神)이 유한(有限)한 시간(時間)속에서 수육(受肉, 육신을 쓰고)하여 인간(예수)이 되어 나타났다고 하는 비합리적(非合理的)인 사실을 믿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을 그는 역설(逆說)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비약을 통하여 비로소 신(神)과의 관계를 회복(回復)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인륜(人倫)에 반하는 신(神)의 명령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복종하여 자식 이삭을 제물로서 바치려고 한 행위를 키에르케고르는 종교적인 삶의 전형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신(神)을 중심으로 한 실존(實存), 즉 본래의 자기가 된 인간이 자기(自己)를 사랑하는 것같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신(神)을 매개(媒介)로 한 사랑으로 서로 사랑을 주고 받을 때, 그와 같은 사랑의 행위에 의해서 참된 사회가 성립(成立)될 수가 있다고 그는 보았던 것이다.


2) 통일사상에서 본 키에르케고르의 인간관(人間觀)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신(神)에서 떠남으로써 자기자신(自己自身)에 관한 관계에 분열이 생겨서 불안과 절망에 빠졌다고 하였는데, 자기자신에 관한 관계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를 그는 밝히지 않고 있다. 통일사상에서 보면 이것은 마음과 몸 또는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의 관계라고 가상(假想)할 수 있다. 그리하여 여기서는 이 가상을 전제로 하고 그의 자기(自己) 자신에 관한 관계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그러면 이런 전제(前提)에서 볼 때, 자기 자신에 관한 관계에 분열(分裂)이 생겼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이 신(神)을 떠남으로써 마음과 몸이 분열된 것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본래적인 자기에 있어서는 신(神)을 중심으로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 타락으로 마음과 몸이 갈라졌음을 뜻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하고, 인간의 생심과 육심이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회복하여 원만한 수수작용(授受作用)을 함으로써 가능하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은 단독자(單獨者)로서 신(神) 앞에 서게 될 때, 절대자(神)에 대하여 절대적인 관계에 선다고 하였다. 이 단독자는 통일사상에서의 인간본성의 개성체(個性體)에 해당하는 개념(槪念)이다. 그러나 그는 단독자가 왜 절대적인가를 설명하지 않고 있다. 통일사상에서 보면, 인간의 개성체(個性體)가 절대적인 것은 인간이 절대자인 하나님의 개별상(個別相)을 닮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키에르케고르의 관계성과 단독성은 통일사상의 마음과 몸의 통일적관계(統一的關係)와 개성체(個性體)의 개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 볼 때 이러한 이해(理解)는 인간본성(本性) 전체에 대한 이해는 아니다. 인간 본성의 가장 본질적인 측면은 심정적존재(心情的存在)이다. 또 인간이 단독자로서 즉 개성체(個性體)로서 신(神) 앞에 선다고 보는 것은 불완전한 인간파악이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부부(夫婦)로서 신(神)앞에 설 때 비로소 인간은 완전한 인간이 된다. 인간은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의 조화체(調和體)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또 로고스적 존재이며 창조적 존재이기도 하다. 또한 주체성(主體性)과 대상성(對象性)을 함께 구비한 격위적 존재이기도 하다. 단독자로서 홀로 신(神)앞에 선다는 그의 인간관은 진지(眞摯)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의 인간은 고독하고 쓸쓸한 것이 되고 말았다.


인간은 왜 신(神)으로부터 떠나게 되었을까. 그 원인이 명백해지지 않는 한 본래의 자기 즉 신(神)의 지음을 받은 대로의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키에르케고르는 아담이 자유의 가능성(可能性)에서 오는 불안 때문에 죄(罪)에 떨어졌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통일원리에 의하면 자유나 불안이 타락의 원인은 아니다. 인간 시조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천사장(天使長)의 유혹에 의하여 사랑의 방향성(方向性)을 잘못 잡았던 것이다. 즉 그들은 비원리적인 사랑의 힘에 의해서 타락한 것이다.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탈선(脫線)하려고 할 때 그들의 본심의 자유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데 대한 불안감을 일으켰으며, 이 불안감은 오히려 그들이 탈선(脫線)하지 않도록 작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비원리적인 사랑의 힘은 이 불안감을 누르고 그들로 하여금 타락(墮落)線을 넘게 하였다. 이 타락의 결과로 인류는 신(神)으로부터 떠나게 되었으며, 이 때문에 계명을 어긴 데에 대한 죄책감과 하나님으로부터의 사랑의 단절(斷切)로 인하여 불안과 절망에 빠지게 되었다. 따라서 타락의 문제가 올바르게 해결되지 않는 한, 인간의 불안과 절망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신(神)의 사랑에 관한 개념도 막연하다. 하나님의 사랑은 온정(溫情)을 가지고 대상을 무한히 위해 주고자 하는 정적(情的) 충동인 심정으로서, 그 하나님의 사랑이 지상(地上)에 나타날 때에는 방향성(方向性)을 갖추고 나타난다. 즉 먼저 가정을 기반으로 하여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 형제의 사랑과 같은 분성적(分性的)인 사랑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다시 여러 방향으로 확대되어서 인류애(人類愛), 민족애(民族愛), 린인애(隣人愛, 이웃사랑), 동물(動物)에의 사랑, 자연에의 사랑 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에는 구체적인 내용과 방향성이 있으며, 막연한 사랑을 신(神)의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본래의 모습을 회복(回復)하기 위해서는, 대중이 허위(虛僞)와 싸워서 신(神)에게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외쳤다. 이것은 사회의 박해(迫害)와 조소를 참으면서 신(神)을 뵈려고 한 그 자신의 발걸음을 반영(反映)한 것이며, 진실한 신앙인의 모습을 갖도록 당시의 종교인(宗敎人)들에게 경각심을 일으키려는 충고이기도 한 것으로서 높이 평가해야 마땅하다.


그는 27세때 레기네 오르센과 약혼(約婚)하였으나 결혼으로 그녀를 불행(不幸)에 빠뜨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 때문에, 또 연애보다도 차원이 높은 이상적(理想的) 사랑을 실현해 보고자 일방적(一方的)으로 약혼을 파기(破棄)하였다. 그 때문에 그는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게 되었지만 통일사상으로 볼 때 그는 무의식중에 인격(人格)을 완성한 터 위에서, 신(神)을 중심한 참다운 남녀(男女)의 사랑을 실현할 것을 원했다고 볼 수 있다. 본래의 인간상(像)을 찾아 나아가는 키에르케고르의 방향성(方向性)은 기본적으로 통일사상의 입장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2) 니 체


1) 니체의 인간관(人間觀)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신(神)앞에 설 때 본래的자기(自己)가 된다고 하였으나 니체(Nietsche, Friedrich Wilhelm, 1844~1900)는 그와 반대로 신(神)에 대한 신앙에서 해방될 때, 인간은 비로소 본래적 자기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니체는 당시 유럽사회에서의 인간의 수평화(水平化), 왜소화(矮小化)를 개탄(慨歎)하고, 그 원인이 기독교의 인간관에 있다고 보았다. 기독교는 生(生命)을 부정하고 금욕주의(禁慾主義)를 주장하면서 인간의 가치를 피안(彼岸)에 두었다. 또 만인은 신(神)앞에 평등하다고 말했다. 그 결과 인간의 활발한 생명력(生命力)을 소실(消失)시키고 강(强)한 인간을 끌어내리어 인간을 평균화하였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신(神)은 죽었다(Gott ist tot)라고 선언(宣言)하면서 기독교를 공격(攻擊)했다. 기독교의 도덕은 신(神)이나 영혼(靈魂)이라는 개념으로 生과 육체를 억압하고, 生의 현실을 부정적(否定的)으로 봄으로써 강한 인간에의 길을 막았으며, 약자(弱者)나 고생하는 자를 후원하고 있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이와 같은 기독교의 도덕을 그는 노예도덕(奴隷道德))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기독교적인 사랑의 생활, 정신적(精神的)인 생활을 물리치고 본능에 의한 생활, 생명이 욕구하는 대로의 생활을 전면적으로 긍정(肯定)하였다.


생명(生命)이란 성장(成長)하려고 하는 힘이며, 발전하려는 힘이다. 그는 대체로 살아 있는 자를 발견하는 곳에서 나는 권력에의 의지도 발견하였다. 그리고 복종(服從)하며 봉사하는 자의 의지 속에서도 나는 주인이 되려고 하는 의지를 발견하였다"10)라고 하였으며, 인간의 모든 행위의 근저(根底)에는 보다 강대해지고자 하는 권력(權力)에의 의지(意志)(Wille zur Macht)가 존재(存在)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기독교의 노예도덕(奴隷道德)을 대신하여 권력의 크기를 가치기준으로 하는 군주도덕(英雄道德)을 수립했다. 그는 선(善)과 악(惡)의 기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선(善)이란 무엇인가?-권력(權力)의 감정을, 권력에의 의지(意志)를, 권력자체를 인간에게 높이는 모든 것이다. 악(惡)이란 무엇인가?-나약으로부터 유래하는 모든 것이다. 행복(幸福)이란 무엇인가?-권력이 성장한다는 것, 저항(抵抗)을 이겨낸다는 것의 감정(感情),... ... ... 약자(弱者)나 잘못된 것 등은 철저(徹底)하게 몰락(沒落)해야 한다. 이것이 즉 우리들의 인간愛의 제일명제(第一命題)이다. 그리고 그들의 철저한 몰락(沒落)을 도와 주어야 한다. 어떠한 배덕(背德, 배은망덕)보다도 유해(有害)한 것은 무엇인가? 모든 잘못된 것과 모든 약자에 대하여 아주 불쌍히 여기는 것, 이것이 기독교이다.11)


그의 군주도덕(君主道德)에 의한 이상적 인간상(像)은초인(超人)(Ubermensch)이다. 초인이란 인간의 가능성을 극한(極限)에까지 실현한 존재로서 권력의지(權力意志)의 체현자(體現者)이다. 초인의 가능성은 모든 生의 고통을 견디고 生을 절대적으로 긍정(肯定)하는데 있다. 生을 절대적으로 긍정한다는 것은 모든 것은 가고, 모든 것은 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돌고 있다"12라는 영겁회귀(永劫回歸)의 사상, 즉 세계는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이 영원히 반복(反復)한다는 사상을 견뎌내는 것이다. 그것은 어떠한 운명(運命)도 이를 인내(忍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필연적(必然的)인 것을 아름다움으로 보는 것, 운명(運命)을 사랑하는 것으로 가능하다고 하면서 운명애(運命愛)(amor fati)를 주장하였다.


2) 통일사상에서 본 니체의 인간관(人間觀)


기독교의 극단적(極端的)인 내세주의(來世主義)에 의하여, 인간은 현실의 생활을 존중(尊重)할 수가 없게 되어서 약체화(弱體化)하였다고 니체는 생각하였으나, 인간의 본성(本性)을 회복(回復)하려고 고뇌(苦惱)한 그의 진격(眞擊)한 노력은 그 나름대로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할 것이다. 니체의 주장은 기독교에 대한 하나의 참소요, 경고였다. 즉 기독교가 그 본래의 정신(精神)에서 이탈(離脫)하고 있다고 니체는 생각하였다. 니체가 본 기독교의 하나님은 높은 곳에 앉아서 좋은 일을 한 사람에게는 사후(死後)의 부활(復活)을 약속하고, 나쁜 일을 한 사람에게는 벌(罰)을 준다는 심판의 신(神)이고, 피안(彼岸)的인 신(神)이었다. 그러나 니체가 비난한 것은 예수의 가르침 그 자체가 아니고 예수의 가르침을 피안주의(彼岸主義)로 변화시킨 바울이었다.13)


통일사상에서 보면, 하나님은 현세(現世)를 부정하고 높은 곳에만 계시는 피안적인 신(神)만은 아니다. 신(神)의 창조목적은 사후(死後)의 세계에 있어서의 천국이 아니라 지상천국(地上天國)의 실현이었다. 그리고 지상에 천국이 실현되었을 때, 지상에서 천국생활을 체험한 사람들이 사후(死後)에 천상천국(天上天國)에 들어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명(使命)도 본래는 지상천국(地上天國)의 실현이었다.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울이 피안주의(彼岸主義)로 변질시켰다고 하는 니체의 주장에는 일리(一理)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태민족(猶太民族)의 불(不)신앙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림으로써 구원(救援)은 영적(靈的)인 구원이 되었고 현세에 있어서의 인간은 항상 악(惡)의 주체인 사탄의 침입(侵入)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바울을 비난(非難)한 나머지 기독교 그 자체를 부정하고 신(神)의 죽음까지 선언(宣言)한 것은 잘못이었다.


다음은 모든 생명을 지닌 존재에는 권력의지(權力意志)가 있다는 니체의 주장에 대하여 검토하고자 한다. 창세기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다스리라하는 축복(祝福)을 주셨다. 즉 신은 인간에게 주관성(主管性)을 주신 것이다. 따라서 지배욕(주관욕) 그 자체는 신(神)으로부터 주어진 인간의 본성의 하나이다. 이 지배(주관)의 위치는 통일사상에서 볼 때, 인간의 본성의 하나인 주체격위(主體格位)에 해당한다. 그런데 주체격위의 항목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본래의 주관(主管)은 사랑에 의한 주관이지 힘에 의한 주관은 아닌 것이다. 즉 주관성을 발휘(發揮)하는 전제조건으로서 인간은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하여 인격(人格)을 완성하고 가정생활에 있어서 사랑의 윤리를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와 같은 기대위에서 참다운 주관성이 발휘되는 것이다. 그런데 니체는 그와 같은 기반을 무시(無視)하고 단지 권력의지(權力意志)만을 전면(前面)에 내세웠으니 거기에 니체의 또 하나의 잘못이 있다 하겠다.


니체는 기독교의 도덕(道德)이 강자(强者)를 부정하는 약자(弱者)의 도덕이라고 하였으나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이 참다운 주관성을 발휘(發揮)하도록 하기 위해서 기독교가 참사랑을 가르쳤으며, 또 가르쳐야만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은 육신의 본능적 욕망을 통하여 작용하는 악(惡)의 힘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육신의 본능적(本能的) 욕망(欲望) 그 자체가 악은 아니지만 타락인간은 육신을 주관해야 할 영인체(靈人體)의 심령기준이 미완성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러한 인간이 육신의 본능적 욕망에 따라 살면 악(사탄)의 힘에 지배(支配)되고 만다. 영인체의 심령기준이 높아져서 육신을 주관하게 될 때, 즉 생심(生心)이 육심(肉心)을 주관하게 될 때 비로소 육신의 움직임은 선(善)하게 된다.


그런데 니체는 정신(精神), 사랑, 이성을 무시하고 육체(肉體), 본능(本能), 생명(生命)을 중시(重視)하라고 외쳤다. 이것은 인간의 영인체를 무시해 버린 것이다. 인간에게서 영인체를 무시할 경우 무엇이 남을 것인가. 동물적인 육신만이 남는다. 즉 니체는 인간을 동물의 격위에까지 격하(格下)시킨 결과를 초래했다. 따라서 인간에 대해서 강대해지라고 하는 것은 맹수가 되라고 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이것은 신(神)이 창조하려고 한 참다운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인간을 본래의 모습으로 인도(引導)하고자 한 그의 노력은 높이 평가해야 할 일이지만 그 방법이 전혀 잘못되어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통일체로서 성상이 주체요 형상이 대상인데도 불구하고, 니체는 인간의 형상적인 면만을 중시(重視)하고 성상적인 면을 무시(無視)했던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기독교人들이, 예수님이 지상천국(地上天國)을 실현코자 오셨던 사실을 망각하고 지상의 생활을 자칫 경시(輕視)하려는 경향에 대해서 경고를 발한 점은 높이 평가되어도 좋을 것이다.


(3) 야스퍼스


1) 야스퍼스의 인간관(人間觀)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에 있어서의 실존(實存)이란 개체로서의 자기 자신의 참모습을 깨달은 자아(自我)를 말한다. 그는 실존(實存)이란 결코 객관(客觀)이 될 수 없는 것이고, 내가 그것에 근거하여 생각하고, 또 행동하는 근원(根源)이며…… 실존(實存)이란 자기자신에 관련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초월자(超越者)에 관계하는 것(그 무엇)이다"14)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키에르케고르와 같은 사고방식(思考方式)이다.


그는 초월자(Transzendenz) 또는 포괄자(包括者; Das Umgreifende)를 아직 만나지 아니한 실존 즉 본래적 존재를 찾아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실존을 가능적 실존(mogliche Existenz)이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여러가지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 가능적(可能的) 실존(實存)이며, 그러한 상황에 대처해 가면서 능동적으로 살아갈 수가 있다. 그러나 야스퍼스는 죽음(Tod), 고뇌(苦惱)(Leiden), 투쟁(鬪爭; Kampf), 부채(負債; Schuld) 등 우리들이 넘을 수도 없고 변경(變更)할 수도 없는 상황이 존재(存在)한다'15)라고 지적하고 이것을 한계상황(限界狀況)(Grenzsituation)이라고 하였다. 인간은 영원(永遠)히 사는 것을 원하지만 누구나 죽음을 면할 수는 없다. 죽음은 자기의 존재의 부정이다. 또 인간에게는 육체적인 고통, 질병, 노쇠, 기아 등의 고뇌가 있다. 또 인간이 살아있는 한 투쟁은 피할 수 없으며, 자기라는 존재가 다른 사람을 배척한다고 하는 빚(負債)을 지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한계상황(限界狀況)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함으로써 절망하거나 좌절(挫折)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때 이 좌절(挫折)을 어떻게 경험하느냐에 따라서 인간이 어떤 존재가 되느냐가 결정된다. 한계상황을 도피하지 않고 좌절을 직시(直視)하며 묵묵히 그리고 성실히 그것을 수용(受容)할 때, 존재세계(世界存在)를 넘어서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것(그 무엇)이 느껴지게 된다'16)는 것이다.


즉 그 때까지 무의미(無意味)한 것으로 생각되던 자연의 배후에, 역사의 배후에, 철학의 배후에, 예술의 배후에 초월자 즉 신(神)이 있어서 우리들을 포옹(抱擁)하고, 무엇인가를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음을 홀연히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 때 초월자는 직접적(直接的)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암호로써 나타난다. 초월자는 자연이나 역사, 철학이나 예술 등을 통하여 암호(暗號)로 나타나서 인간에게 말을 건네 오는 것이다. 그리고 한계 상황 속에서 좌절을 체험한 자가 그 암호를 풀 수가 있다. 이것을암호해독(暗號解讀)(Chiffredeutung)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하여 인간은 암호를 해독함으로써 다만 혼자서 초월자를 향하여 서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참된 자기의 실존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하나님을 만난 다음부터 인간은 타인과의 사귐(交際)을 통하여 사랑을 실천한다. 서로 대등(對等)한 입장에 서서 각자(各自)의 자립성(自立性)을 인정하면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본래 인간의 삶이며, 타인과의 교제를 통하여 실존(實存)이 완성되는 것이다. 야스퍼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절(一切)의 목적의 의미에 최종적인 근거를 주는 철학의 목적, 즉 존재(存在)를 내적으로 각지(覺知, 지각)하고 사랑을 개명(開明)하며 평안을 완성한다는 목적은 사귐에 있어서만 비로소 달성되는 것이다."17) 실존(實存)의 사귐은 긴장(緊張)의 관계이며 사랑의 싸움이다."18)


2) 통일사상에서 본 야스퍼스의 인간관(人間觀)


야스퍼스는, 인간은 보통 초월자(超越者)를 발견하지 못한 가능적실존(可能的實存)이지만 한계상황을 통과함으로써 초월자에 관계되는 실존(實存), 즉 본래의 자기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왜 인간은 보통, 가능적 실존으로서 초월자로부터 떨어지게 되었는가? 또 왜 인간은 한계상황을 통과할 때에 초월자를 만나게 되는가? 야스퍼스는 이에 대해서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명백히 밝혀지지 않는 한, 본래의 자기는 무엇인가, 또 어떻게 해야 본래의 자기를 회복(回復)하는가 하는 것 등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통일원리(統一原理)에 의하면 인간은 창조목적을 완성하도록 지음받았다. 창조목적의 완성이란 삼대축복(三大祝福)의 완성, 즉 인격의 완성, 가정의 완성, 주관성의 완성을 뜻한다. 그런데 인간시조(人間始祖)인 아담과 해와는 성장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인격이 미완성한 채 타락했으며 비원리적인 사랑을 중심으로 부부(夫婦)가 되어 가지고 죄(罪)의 자녀를 번식(繁殖)하게 되었다. 그 결과 전인류(全人類)는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비원리적인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하고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하는 것이, 본래적인 자기를 회복하는 길이다.


인간의 본성은 인간이 창조목적을 실현할 때 나타나게 되어 있다. 야스퍼스는 키에르케고르와 마찬가지로 자기자신(自己自身)에 관계하면서 초월자에 관계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 실존이라고 했으나, 이것은 통일사상으로 볼 때 3대축복(三大祝福)중의 제1축복(第一祝福)인 인격완성만을 다룬 입장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통일사상이 말하는 인간본성의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통일체에 해당한다. 야스퍼스는 타인과의 사귐을 통하여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으나, 이 사랑 역시 키에르케고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막연하다.


참된 사랑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온정(溫情)을 가지고 대상을 한없이 위해 주고자 하는 정적인 충동으로서, 이 사랑이 가정을 통하여 4대상(四對象)을 향하는 사랑(부모(父母)에 대한 子女의 사랑, 부부(夫婦)의 사랑, 子女에 대한 부모(父母)의 사랑, 자녀 상호간의 사랑)으로서 분성적으로 나타난다. 이 4대상(四對象)에의 사랑을 기본으로 할 때 타인과의 교제에 있어서의 사랑이 원만해지게 된다. 야스퍼스는 실존(實存)의 사귐은 긴장(緊張)의 관계이고 사랑의 싸움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 볼 때, 사랑의 본질은 기쁨이다. 따라서 본래의 사랑은 긴장이나 싸움으로 표현될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니다.


다음의 문제는 왜 한계상황을 통과함으로써 인간이 초월자를 만날 수 있게 되는가라는 것이다. 야스퍼스는 인간이 한계상황에 직면하여 좌절을 직시(直視)하고 성실히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을 만난다고 했다. 그러나 한계상황에 직면(直面)하여 좌절을 성실하게 받아들인 사람 중에는, 니체와 같이 신(神)으로부터 더욱 멀어진 사람도 있고, 키에르케고르처럼 신(神)에게 더욱 가까워진 사람도 있다. 왜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 이유가 야스퍼스의 철학에서는 명백하지 않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버렸으며 악(惡)의 주체인 사탄의 주관하에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무조건(無條件) 하나님에게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떠한 속죄(贖罪)의 조건-탕감(蕩減)조건(條件)-을 세우고서만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야스퍼스의 한계상황(限界狀況)에서의 절망과 좌절은 탕감조건에 해당하는 것이며 그 조건을 뜻 맞게 세움으로써 인간은 하나님앞에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와 같은 한계상황에 있어서 고통(苦痛)을 견디어 내면서도 救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마태 7:7)라고 한 것같이 자기중심을 버리고 절대적인 주체(하나님)를 찾으려고 하는 대상의식(對象意識)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自己)중심적(中心的)인 주체의식만을 가지고 있거나, 원념(怨念, 원한)이나 복수심을 품고 있는 한, 아무리 한계상황을 통과해도 신(神)을 만날 수는 없는 것이다.


야스퍼스는 좌절의 암호(暗號)를 해독함으로써 인간은 초월자를 만난다고 하였으나, 암호해독(暗號解讀)으로 알려진 신(神)은 상징적인 신(神)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것만으로는 신(神)의 참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 신(神)의 창조목적과 인간타락(墮落)의 사실을 알고, 신앙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3대축복(三大祝福)의 실현을 위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하나님의 심정(心情)을 체휼할 수가 있고 참다운 실존(본연의 자아(自我))이 될 수 있는 것이다.


(4) 하이데거


1) 하이데거의 인간관(人間觀)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99~1976)는 인간을 현존재(現存在)(Dasein)라고 규정했으나 근대 철학이 말한 인간 처럼 세계를 향해 서있는 자아(自我)로 보지는 않았다. 그것(現存在)은 현재(現在) 거기에 있는 개개의 인간의 존재(Sein)를 의미한다. 현존재는 세계 속에 있으면서 다른 존재자와 관계를 맺고 있으며, 관심을 가지고 자기의 주변을 살피고 타인(他人)에게 마음을 쓰면서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現存在)의 이와 같은 근본적인 존재방식(存在方式)을세계내존재(世界內存在)(In-der-Welt-Sein)라고 하였다. 세계 속에 있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주사위처럼 세상 속에 던져져 있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이 지상에 태어나려고 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나중에 정신을 차려보니 주사위처럼 이 세상에 던져져 있음을 깨닫게 됨을 뜻한다. 이러한 상태(狀態)를 피투성(被投性; Geworfenheit) 또는 사실성(事實性)(Faktizitat)이라고 하였다.


인간은 보통 일상생활에 있어서, 주위의 의견이나 사정에 자신을 맞추어 가는 동안에 자기의 주체성을 상실(喪失)하게 된다. 이것이 본래의 자기를 상실한 이른바 속인(俗人)(Das Man)의 입장이다.19) 속인(俗人)은 일상생활에서 잡담으로 소일하거나 호기심(好奇心)에 사로잡혀서 애매함속에 안주하고 있다. 이것을 현존재(現存在)의 퇴락(頹落; Verfallen)이라고 한다.


이유도 없이 세계 속에 던져져 있는 현존재는 불안(不安; Angst)속에 있으나 그 불안의 유래(由來)를 더듬어 보면 결국 죽음에의 불안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불안속에서 막연히 미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어차피 죽음에의 존재(存在)(Sein zum Tode)임을 적극적(積極的)으로 인정하고 진지하게 미래를 향하여 결의(決意)하고 살아갈 때, 본래의 자기를 지향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인간은 미래를 향하여 자기자신을 던지게 된다. 즉 자신의 미래를 기획(企劃)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투기(투기(投企); Entwurf)라고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현존재(現存在)의 성질을 실존성(實存性; Existenz)이라고 한다.


이 때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자기를 던지는 것일까. 그것이 양심의 소리이다. 양심의 소리(Ruf)란 퇴락(頹落)한 자기에서 본래의 자기로 돌아갈 것을 바라는 내적인 호소이다. 하이데거는 양심의 소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소리는 틀림없이 세계속에서, 나와 함께 있는 타인(他人)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다. 양심(良心)의 소리는 나의 속에서 그러면서도, 나를 넘은 곳으로부터 나타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또 인간의 현존재(現存在)의 존재의 의미를 시간성(時間性; Zeitlichkeit) 에서 파악하기도 한다. 현존재(現存在)의 존재방식은 던진다는 면(앞으로 기획(企劃)한다는 면)에서 보면 자기(自己)에 앞서 있음(未來에 있음)이며 던져져 있다는 面(과거에 이미 던짐을 받았다는 면)에서 보면 이미 속에 있음(세계 속에 던져져 있음)이며 관심을 가지고 환경을 살피며 타인에게 마음을 쓰고 있다는 面에서 보면 존재자(存在者)의 옆에 있음이다. 이들 세 가지 계기(契機)를 시간성에 비추어보면 각각 미래(未來; Zukunft), 기존(旣存)(과거(過去; Gewesenheit), 현재(現在; Gegenwart)에 해당한다.


인간은 세계에서 떠난, 고립(孤立)된 자기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를 인수(引受)하면서 현재의 퇴락(頹落)에서 자기를 구제하기 위하여, 미래의 가능성을 향하여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이데거의 시간성(時間性)에서 본 인간관이다.


2) 통일사상에서 본 하이데거의 인간관(人間觀)


하이데거는, 인간은 세계내존재(世界內存在)이며, 본래의 자기를 상실한 속인(俗人)이며 그 특성은 불안(不安)이라 하였다. 그러나 왜 인간은 본래의 자기를 상실하였는가, 또 본래의 자기는 어떤 것인가를 그는 명백히 밝히지 않고 있다. 본래의 자기를 향하여 자신을 던진다고 하나 그 목표로 삼아야 할 인간상(像)이 불분명(不分明)하면, 똑 바로 본래의 자기로 향하고 있는가를 확인할 수가 없다. 그는 양심(良心)의 소리가 인간에게 본래의 자기로 돌아오도록 인도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의 해결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인간이 양심에 따라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것이며, 이 상식적인 것을 철학적으로 표현한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신(神)을 인정하지 않는 세계에서는 결국 니체와 같이 본능적(本能的)인 생명에 따라 사느냐, 하이데거와 같이 양심(良心)에 따라 사느냐의 어느 한 쪽을 택할 수밖에 없다.


통일사상에서 볼 때, 양심에 따라 사는 것만으로는 불충분(不充分)하다. 인간은 본심에 따라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양심은 각자가 선(善)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 양심의 기준이 다르다. 따라서 양심에 따라 살 때 그것이 본래의 자기를 지향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아무도 확언(確言)할 수가 없다.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는 본심(本心)에 따라 살 때, 인간은 비로소 본래의 자기를 향하여 가게 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막연히 미래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미래를 향하여 결의(決意)할 때, 불안(不安)에서부터 구제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본래의 자기모습이 명백하지 않은데 어떻게 불안(不安)에서 구제될 수가 있을 것인가. 통일사상에서 보면 불안의 원인은 신(神)의 사랑에서 떠난 데에 있다. 따라서 인간은 신(神)께로 되돌아가서 신(神)의 심정(心情)을 체휼하여 심정적 존재가 될 때, 비로소 불안에서 해방되고 평안과 기쁨이 넘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죽음도 결의(決意)된 죽음으로서 받아들일 때, 죽음에의 불안을 초월(超越)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으로 죽음에 대한 불안을 해결했다고는 할 수 없다. 통일사상에서 보면 인간은 영인체(靈人體)와 육신의 통일체, 즉 성상과 형상의 통일체이며, 육신을 토대로 하여 영인체가 성숙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이 지상의 육신생활을 통하여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하면 성숙된 영인체(靈人體)는 육신의 死後, 영계에서 영원히 산다. 인간은 죽음에의 존재(存在)가 아니고 영생(永生)의 존재(存在)이다. 따라서 육신의 죽음은 곤충의 탈피(脫皮)에 해당하는 현상에 불과하다. 죽음의 불안은 죽음의 의의(意義)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것이며, 또 자기의 미완성을 의식적(意識的)으로나 무의식적(無意識的)으로 느끼는 데서 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또 인간(현존재(現存在))이 시간성을 가진다고 하였다. 즉 인간은 과거(過去)를 인수받고 현재의 퇴락(頹落)에서 떠나 미래를 향하여 투기(投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명백하지 않다. 통일원리(統一原理)에 의하면, 인간은 아담과 해와의 타락이래(墮落以來) 혈통적으로 원죄(原罪)를 계승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상이 범한 유전죄(遺傳罪)나, 인류나 민족이 공통적으로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되는 연대죄(連帶罪)를 짊어지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이러한 죄(罪)를 청산하기 위한 조건(條件, 탕감조건)을 세우면서 본래의 자기와 본래의 세계를 복귀하는 과업을 사명으로서 부여(附與)받고 있는 것이다.


이 과업은 인간 1대(一代)에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자자손손(子子孫孫) 바톤을 계승하면서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즉 인간은 과거의 조상들이 다하지 못하고 남겨놓은 탕감조건을 인수(引受)해서 현재의 내가 그것을 청산하고 또 미래의 자손에게 복귀(復歸)의 터전을 물려주는 것이다. 이것이 통일사상에서 바라본, 인간이 시간성을 가진다는 것에 대한 참된 의미이다.


(5) 사르트르


1) 사르트르의 인간관(人間觀)


일찍이 도스토예프스키는 만일 하나님이 존재(存在)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일이라도 가능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는데,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의 철학은 바로 이러한 신(神)의 실존에 대한 부정에서부터 출발했다. 하이데거는 신(神)이 없는 실존을 주장했지만 사르트르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신(神)을 부정하는 실존(實存)을 말하였다. 그는 이 사실을 실존(實存)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로써 표현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실존(實存)이 본질에 앞선다는 것은……… 인간은 우선 존재하고 세계 속에서 만나고, 세계 내에 별안간 모습을 나타내고 그 후에 정의(定義)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실존주의자(實存主義者)가 생각하는 인간이 정의(定義) 불가능한 것은, 인간이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후에 이르러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이며 인간은 자신에 의해서 만들어지게 된다. 이와 같이 인간의 본성은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그의 본성(本性)을 생각하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21)


도구(道具)는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그 제작자(製作者)에 의해서 그 용도(用途)나 목적, 즉 본질이 결정된다. 따라서 본질이 존재에 선행(先行)한다. 마찬가지로 만일 하나님이 존재하고, 하나님의 관념(觀念)에 따라 인간이 만들어졌다고 한다면, 인간에 있어서도 본질이 존재(存在)에 선행(先行)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르트르에 있어서, 인간의 본질은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지 않다. 인간은 본질에서가 아니라 無에서 출현한 것이다.


다음에 그는 실존(實存)은 주체성(主體性)이다라고 하였다. 인간은 無에서 출현한 우연적존재(偶然的存在)이며 누구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방식(存在方式)을 계획(計劃)하고, 자신을 선택(選擇)한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주체성의 의미이다. 즉 공산당원(共産黨員)이 되거나 기독교도가 되거나 결혼을 하거나 자기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선택하는 것이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이와 같은 실존(實存)의 근본적 성격을 불안(不安)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자신을 선택하나 그것은 동시에 각인(各人)은 자신을 선택함으로써 전인류(全人類)를 선택한다"22)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자기를 선택한다는 것은 전인류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는 것을 뜻하며 여기에 우리들의 불안(不安)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불안(不安)은 행동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행동의 조건(條件) 그 자체이며, 행동 그 자체의 일부라고 한다.


인간은 또 자유로운 존재이다. 실존(實存)이 본질에 앞서는 인간은 무엇에 의해서도 결정되지 않으며, 어떠한 일도 허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롭다는 것은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일체의 책임이 자기에게 있음을 뜻하며 그러한 의미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인간에 있어서 무거운 짐이며, 인간은 자유로워지도록 저주받고 있는 것"23)이다. 즉 인간은 자유롭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은 자유이다. 인간은 자유 그 자체이다. 만일 한편에 있어서 하나님이 존재(存在)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들은 자기의 행위를 정당화(正當化)하는 가치나 명령을 눈앞에서 발견할 수가 없다. 이리하여 우리들은 우리들의 배후에도, 또 전방(前方)에도, 명백한 가치의 영역(領域)에 정당화를 위한 이유도, 핑계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들은 핑계도 없어 고독(孤獨)하다. 그것을 나는 인간이 자유의 刑에 처해져 있다고 표현하고 싶다.


인간이 주체성(主體性)이라고 하면 인간은 그 주체성을 발휘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주관받아야 할 대상이 없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존재에는 즉자존재(卽自存在)(etre-en-soi)〕와 대자존재(對自存在)(etre-pour-soi)가 있다. 즉자존재(卽自存在)는 그 자체로서 있는 만물이며, 대자존재(對自存在)는 자기의식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다. 그런데 인간이 주체성을 발휘함에 있어서 즉자존재(卽自存在)(만물)를 대상으로 할 때에는 문제가 없지만, 대자존재(對自存在)(인간)를 대상으로 할 때에는 문제가 발생한다. 내가 주체성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타인(他人)도 또한 주체성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대하고 있을 때, 그 인간존재(存在)를 대타존재(對他存在)'(etre-pour-autrui) 즉 다른 사람을 대하고 있는 존재라고 한다. 대타존재(對他存在)의 근본적구조(상호관계)는 視線을 보내는 者가 되거나 시선을 받는 者가 되거나 혹은 다른 사람이 나의 대상이거나 내가 다른 사람의 대상이거나 하는 관계이다.25) 즉 인간관계는 끊임없는 상극관계(相剋關係)가 되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존재는 타인(他人)을 초월하거나 혹은 타인(他人)에 의해 초월되거나 하는 이 딜레마에서 탈출하려고 시도하려 해도 소용이 없다. 의식개체(意識個體)의 상호간의 관계의 본질은 공동(共同) 존재(存在)(Mitsein)가 아니고, 상극(相剋; conflict)이다."26)


2) 통일사상에서 본 사르트르의 인간관(人間觀)


사르트르는 인간에 있어서 실존(實存)이 본질에 앞선다고 말하고, 인간은 자신을 만든다고 하였다. 하이데거도 마찬가지로 인간은 미래를 향하여 투기(投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으나 그의 경우에 있어서의 양심(良心)의 소리는 막연하지만 인간을 본래의 자기에게로 인도하였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경우에 있어서 본래의 자기라는 것은 완전히 부정되어 버린다. 이것은 신(神)으로부터 완전히 떠나버린 데서 오는 당연한 결과이다. 만일 사르트르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인간에 있어서 선악(善惡)의 기준은 완전히 없어질 것이다. 어떠한 행위를 하더라도 자기의 책임으로 결단했다면 그것만으로 합리화(合理化)되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사회는 윤리부재(倫理不在)의 사회가 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사르트르는 또 인간은 주체성(主體性)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하여 통일사상은 인간은 주체성인 동시에 대상성(對象性)이다라는 것, 즉 인간의 본성은 주체격위(主體格位)인 동시에 대상격위(對象格位)라는 것을 주장한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주체성이란 자유로이 자기를 선택한다는 것을 말하며 또 다른 사람을 대상화(對象化)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통일사상이 말하는 주체성은 사랑으로써 대상을 주관하는 능력을 말한다. 참다운 주체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먼저 대상성을 확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먼저 대상격위에 서있으면서 대상의식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대상격위의 단계를 거쳐서 성장 또는 승진하여 드디어 주체격위에 서서 주체성(主體性)을 발휘하게 된다. 또한 사르트르에 의하면 인간 상호간의 관계는 주체성과 주체성의 상극의 관계 혹은 자유와 자유의 상극의 관계이다. 이것은 홉스의 만인(萬人)의 만인(萬人)에 대한 투쟁(鬪爭)에 통하는 사상으로서 분명히 잘못된 주체관이며 잘못된 자유관이다. 이러한 주체관이나 자유관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민주주의(民主主義)사회(社會)의 혼란을 해결할 수 없다. 인간은 주체성과 대상성의 양면(兩面)을 갖추어야 하며, 동시에 그 양면(兩面)의 기능이 원만한 수수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 때에 비로소 평화의 세계가 실현되는 것이다.


또한 사르트르는 인간이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 보면 자유란 저주받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원리(原理)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으며, 원리(原理)는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규범(規範)인 것이다. 따라서 참된 자유는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자유인 동시에 규범 안에서의 자유이다. 규범을 떠난 자유는 실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放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