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사상 - 제1장 원상론 (原相論) - 9

2010. 1. 6. 17:01참사랑 영원까지/통일사상

(2) 로고스


1) 로고스란 무엇인가


로고스(Logos)란, 統一原理에 의하면 말씀 또는 이법(理法)을 뜻한다(원리강론, 1987, p. 222).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만물이 창조되었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태초(太初)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한 1:1~3)


통일사상에서 보면, 로고스를 말씀이라고 할 때의 그 말씀은, 하나님의 사고(思考), 구상(構想), 계획(計劃)을 뜻하며, 또 로고스를 이법(理法)이라고 할 때의 그 이법은 이성(理性)과 법칙(法則)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의 이성은 본성상내의 내적성상의 지적기능(知的機能)에 속하는 이성을 뜻함은 물론이지만, 만물을 창조한 로고스의 일부인 이성은 인간의 이성과는 차원이 다르다. 인간의 이성은 자유성을 지닌 지적능력(知的能力)인 동시에 개념화(槪念化)의 능력 또는 보편적 진리 추구의 능력이지만, 로고스內의 이성은 단순한 자유성, 사고력, 지적능력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로고스의 또 하나의 측면인 법칙은 자유성이나 목적성이 배제된 순수한 기능성(機械性), 필연성(必然性)만을 지닌 규칙을 뜻함은 물론이다. 즉 때와 장소를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똑같이 나타나는 규칙적인 현상이 법칙이다. 마치 기계장치인 시계의 시침(時針)이나 분침(分針)이, 언제 어디서나 똑같이 일치하는 시간을 가리키는 것과 같은 것이 법칙의 규칙성(規則性), 기능성(機械性)인 것이다.


2) 로고스는 이법(理法)이다.


이법(理法)이란, 이러한 이성과 법칙(法則)의 통일을 뜻한다. 이리하여 여기서는 이러한 이법으로서의 로고스를 주로 다루려고 한다.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이 로고스에서 또 하나의 현실문제 의 해결의 기준을 찾아세우기 위해서이다. 그 현실문제란, 오늘날 사회의 대혼란(大混亂)의 원인이 되고 있는 가치관(價値觀)의 붕괴를 어떻게 수습하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원리강론에는 로고스가 하나님의 대상인 동시에 이성성상을 지닌 것(로고스의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다(원리강론, 1966, p. 229. 同 1987, p. 222). 이것은 로고스가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은 일종의 피조물이며 신생체임을 뜻하는 것으로서, 성상과 형상의 합성체(合性體)와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로고스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구상(構想)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 말씀에 의해서 만물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로고스 그 자체가 만물과 똑같은 피조물일 수는 없다. 실제의 피조물이 아니면서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은 하나님의 대상은, 사고(思考)의 결과물일 수밖에 없다. 즉 그것은 완성(完成)된 구상(構想)을 뜻하는 것이며, 마음(본성상(本性相))에 그려진 일종의 설계도인 것이다. 건물을 세울 때 먼저 그 건물에 대한 상세한 설계도를 작성하듯이,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함에 있어서도 만물 하나 하나의 창조에 관한 구체적인 청사진(靑寫眞) 또는 계획안(計劃案)이 먼저 세워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로고스이다.


그런데 설계도는 비록 건물은 아닐지라도, 설계도 그 자체는 제작물(製作物) 즉 결과물임에 틀림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로고스도 구상(構想)이요 설계도인 이상 그것 역시 결과물이며, 따라서 신생체요 일종의 피조물(被造物)인 것이다. 피조물은 모두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아서 존재한다. 그러면 신생체로서의 로고스는 하나님의 무엇을 닮았을 것인가? 그것이 바로 본성상(本性相)안의 내적성상(內的性相)과 내적형상(內的形狀)이다.11)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내적성상(內的性相)과 내적형상(內的形狀)이 일정한 목적을 중심하고 통일되어 있는 상태가 바로 로고스의 이성성상인 것이다. 마치 하나님에 있어서, 본성상과 본형상이 中和(통일)를 이룬 상태가 신상인 것과 같다. 그런데 로고스는 말씀인 동시에 이법(理法)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로고스를 이법(理法)으로만 이해할 때 로고스의 이성성상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그것이 바로 이성과 법칙(法則)이다. 따라서 이성과 법칙의 관계는 바로 내적성상과 내적형상의 관계와 같다. 그런데 내적성상과 내적형상의 상호관계는 후술(後述)하는 바와 같이 주체와 대상의 관계이기 때문에, 이성과 법칙(法則)의 관계는 주체와 대상의 관계인 것이다.


3) 로고스는 이성과 법칙(法則)의 통일체(統一體)


이와 같은 이성(理性)과 법칙(法則)의 통일로서의 로고스에 의해서 만물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피조물에는 모두 이성적요소(理性的要素)와 법칙적요소(法則的要素)가 통일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그리하여 만물이 존재하거나 운동함에 있어서 반드시 이 양자가 통일적으로 작용한다. 단 저차원의 만물일수록 법칙적인 요소가 더 많이 작용하고, 고차원의 만물 일수록 이성적인 요소가 더 많이 작용한다.


그리하여 가장 低차원인 광물에는 법칙적요소만이 작용하고 이성적요소는 전연 없는 것 같고, 가장 고차원(高차원)인 인간에는 이성적요소만이 작용하고 법칙적요소는 전연 없는 것 같지만, 양자의 모두에 이성적요소(理性的要素) 및 법칙(法則)的 요소(要素)가 함께 통일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만물의 존재와 운동은 자유성과 필연성의 통일이며, 목적성(目的性)과 기능성(機械性)의 통일인 것이다. 즉 필연성속에 자유성이 작용하고, 기계성속에 목적성이 작용한다. 필연(必然)과 자유의 관계가 종래에는 이율배반(二律背反)의 관계인 것처럼 이해되어 왔다. 그것은 마치 구속(拘束) 과 해방(解放)이 정반대의 개념인 것처럼, 필연과 자유도 정반대의 개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일사상은 로고스의 개념(槪念)(이법(理法))에 관한 한, 이성과 법칙을 이율배반(二律背反)의 관계로 보지 않고 도리어 통일의 관계로 본다. 이것은 비유컨대 기차가 레일(rail) 위를 달리는 현상과 같다할 것이다. 기차가 레일 위를 달리는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법칙(法則))이며, 만일 그 레일을 벗어나면 기차 자체의 파괴뿐 아니라 인근(隣近)의 인명이나 건물에 피해를 준다. 기차는 반드시 레일 위만을 달려야 한다. 그런 점에서 기차의 운행은 준법적인 것이며, 따라서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레일 위를 달린다 하더라도, 빨리 달리고 천천히 달리는 것은 기관차(기관사)의 자유이다. 따라서 기차의 운행은 전적으로 필연적(必然的)인 것 같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자유성과 필연성의 통일인 것이다.


또 하나의 비유를 들어 보자. 교통신호를 지키는 자동차 운전자의 예가 그것이다. 운전자는 청신호 때에는 전진하고, 적신호 때에는 정지한다. 이것은 교통법규로서 누구나 지켜야 할 필연성이다. 그러나 일단 청신호가 켜진 뒤에는 교통안전에 지장이 되지 않는 한 속도는 자유로이 조정할 수가 있다. 따라서 자동차 운전도 자유성과 필연성의 통일이다.12) p.68


이상(以上)으로 기차의 운행이나 자동차의 운전에 있어서 필연성과 자유성의 관계가 통일의 관계임을 밝혔는데, 로고스에 있어서의 이성과 법칙(法則)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통일의 관계이다. 이로써 로고스의 이성성상으로서의 이성(자유성)과 법칙(필연성)은 이율배반(二律背反)이 아니라 통일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로고스가 이성(자유성)과 법칙(法則)(必然性)의 통일이기 때문에 로고스에 의해서 창조된 만물은 크게는 천체(天體)로부터 작게는 원자(原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예외없이 이성(자유성)과 법칙(法則)(필연성)의 통일적 존재이다. 즉 만물은 반드시 그 내부(內部)에 이성과 법칙, 자유성과 필연성, 목적성과 기계성의 통일에 의해서 존재하고 운동하고 발전한다.


이 사실은 오늘날의 일부 과학자의 이론과도 일치한다. 예컨대 검류계(檢流計; 폴리그라프)의 부착실험에 의한 식물심리의 확인(Backster 效果)13)과 샤론(Geun E. Charon)博士의 복합상대론(複素相對論; Complex Relativity)에 있어서의 전자(電子), 광자(光子)內의 기억과 사고의 메카니즘의 확인14)등이 그것이다. 즉 식물에 마음이 있고, 전자에 사고(思考)의 메카니즘이 있다는 사실은 모든 피조물 속에 이성과 법칙(法則), 자유성과 필연성이 함께 작용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p. 69


4) 로고스 및 자유와 방종


다음은 로고스와 관련해서 자유와 방종의 참 뜻을 밝히고자 한다. 자유와 방종에 관한 바른 인식(認識)에 의해서 또 하나의 현실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유의 이름 밑에 자행되는 갖가지의 질서파괴(秩序破壞) 행위와, 이에 따르는 사회혼란에 대한 효과적인 대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먼저 자유와 방종(放縱)의 참 뜻이 밝혀져야 한다.


原理(원리강론)에는 원리를 벗어난 자유는 없으며(1987, p. 103), 책임없는 자유는 없으며(同上), 실적없는 자유는 없다(同上)라고 적혀 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자유의 조건은 원리 안에 있을 것, 책임을 질 것, 실적을 올릴 것의 세 가지가 된다. 여기서 원리를 벗어난다는 것은 原則 즉 법칙을 벗어난다는 뜻이며, '책임'이란 각자의 책임분담 완수를 뜻하는 동시에 창조목적의 완성을 의미하며, '실적'이란 창조목적을 완성하여(同上), '선의 결과를 가져옴'을 뜻한다(同上). 그런데 책임분담의 완수나, 창조목적의 완성이나, 선(善)의 결과를 가져옴은 모두 넓은 의미의 원리요, 인간이 따라야 하는 천도(天道)이며, 법칙(法則; 가치법칙, 규범법칙)이다.


따라서 자유에 관한 세 가지 요건 즉 '원리 안에 있을 것', '책임을 질 것', '실적을 올릴 것'등은 한마디로 '자유는 원리안에서의 자유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으로서, 참 자유는 결국 법칙성(法則性), 필연성(必然性)과의 통일에 있어서만 성립한다는 결론이 된다. 여기서 법칙이란, 자연에 있어서는 자연법칙이요, 인간생활에 있어서는 가치법칙(규범법칙)이다. 가치니 규범이니 하는 것은 질서 하에서만 성립된다. 규범을 무시하거나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는, 본연의 세계에서는 결코 자유가 아니다.


자유는 엄격한 의미에서 선택(選擇)의 자유이며, 이 선택은 이성에 의한 선택이다. 따라서 자유는 이성에서 출발하여 실천으로 옮겨진다. 이때 자유를 실천하려는 마음이 생기는데, 이것이 자유의지이며, 이 의지(意志)에 의해서 자유가 일단 실천되면 그 실천행위가 자유행동이 된다. 이것이 원리강론에 보이는 자유의지, 자유행동(同上 p.103) 등의 개념(槪念)의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성의 자유에 의한 선택이나, 자유의지나, 자유행동은 모두 자의적(恣意的)인 것이어서는 안되며, 반드시 원리 안에서 즉 법칙(價値法則)과 질서의 테두리 안에서 필연성과 통일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본래 자유는 이성의 자유이며, 이성은 법칙과의 통일하에서만 작용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연의 자유는 '이법(理法)' 즉 '로고스'안에서만 성립할 수 있으며, 로고스를 떠난 자유는 존립(存立)할 수 없다. 흔히 법칙은 자유를 구속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이것은 법칙과 자유의 원리적인 의미를 모르는 데서 오는 착각인 것이다. 본연의 법칙이나 자유는 모두 사랑의 실현을 위한 것이며, 사랑 안에서의 법칙이며 자유이다. 참사랑은 생명(生命)과 기쁨의 원천(源泉)이다. 따라서 본연의 세계에서는 기쁨 속에서 법칙을 따라서 자유를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로고스가 심정(心情)을 터로 하고 형성(形成)되기 때문이다.


로고스를 떠난 자의적(恣意的) 사고(思考)나 자의적 행동은 사이비(似而非) 자유로서 이것이 바로 방종(放縱)이다. 따라서 자유와 방종은 그 뜻이 전연 다르다. 자유는 선(善)의 결과를 가져오는 건설적인 개념(槪念)이지만, 방종은 악(惡)의 결과를 가져오는 파괴적(破壞的)인 개념이다. 이와 같이 자유와 방종은 엄격히 구별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흔히 혼동되거나 착각되고 있다. 이것은 자유의 참 근거(根據)로서의 로고스에 관한 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로고스의 뜻을 바르게만 이해한다면 자유의 참 뜻을 알게 되고, 따라서 자유라는 이름하의 온갖 방종이 방지(防止)될 수 있으며, 마침내는 사회혼란의 수습도 가능해 질 것이다. 이것으로 로고스에 관한 이론도 현실문제 해결의 또 하나의 기준이 된다는 것을 밝혔다.


5) 로고스 및 심정(心情)과 사랑


마지막으로 로고스와 심정 및 사랑과의 관계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이미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로고스는 말씀, 구상(構想)인 동시에 이법(理法)이었다. 그런데 말씀(構想)과 이법이 별개의 것이 아니며, 말씀 속에 그 말씀의 일부로서 이법(理法)이 포함되어 있다. 마치 생물을 다루는 생물학 속에 그 일분과로서, 생물의 生理學(生理作用)의 學)이 포함되어 있는 것과 같다. 생물학에는 해부학(解剖學), 생화학(生化學), 생태학(生態學), 발생학(發生學), 분석학(分析學), 생리학(生理學) 등 여러 분과로 분류되지만 그 중의 一分科가 생리학인 것처럼, 창조에 관한 하나님의 무한대한 양과 종류를 내용으로 하는 말씀(構想)中의, 적은 일부분이 이법(理法)(로고스)으로서, 말씀중의 만물의 상호작용(相互作用) 또는 상호관계(相互關係)의 기준에 관한 부분인 것이다. 따라서 말씀과 이법(理法)은 별개의 것이 결코 아닐 뿐 아니라, 말씀의 터전이 되고 있는 심정은 동시에 이법(理法), 로고스의 터전도 되는 것이다. 마치 유기체(有機體)의 생활현상의 연구가 생물학의 모든 분과의 공통항목인 것처럼,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심정(心情)이 구상과 이법의 공통기반이 되고 있다.


심정(心情)은 사랑을 통해서 기쁘고자 하는 정적(情的)인 충동이었다. 이와 같은 심정이 창조에 있어서 구상과 이법의 터전이 되고 있다는 것은, 피조물 전체의 구조(構造), 존재(存在), 변화(變化), 발전(發展) 등 모든 우주현상이 사랑의 충동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법(理法)도 자연법칙이건 가치법칙이건 간에, 그 배후에 사랑이 반드시 작용하고 있고, 또 작용해야 한다. 자연법칙은 일반적으로 물리화학적(物理化學的) 법칙(法則)으로만 이해되고 있는데 이것은 불완전한 이해이며, 비록 차원은 다를망정 거기에 반드시 사랑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상호간의 가치법칙(價値法則), 규범법칙(規範法則)에는 이 사랑이 더욱 더 현저하게 작용해야 할 것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앞에서 로고스 즉 이법의 해설에 있어서 이성과 법칙(法則), 따라서 자유성과 필연성에 관해서만 주로 다루었지만, 이법의 작용에 있어서는 이법 그 자체 못지않게 사랑이 중요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중요도에 있어서 사랑은 이법을 능가하기조차 하는 것이다.


사랑이 없는 이법(理法)만의 생활은 규율(規律) 속에서만 사는 병영(兵營)처럼 냉랭해지기 쉽고, 알맹이 없는 쭉정이처럼 시들기 쉬운 것이다. 따뜻한 사랑 속에 지켜지는 이법의 생활에서만 비로소 백화가 만발하고, 봉접(蜂蝶; 벌과 나비) 이 군무(群舞; 무리지어 춤추는)하는 봄동산의 평화가 찾아드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가정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는 참된 방안(方案)이 무엇인가 하는, 또 하나의 현실문제 해결의 기준(基準)이 된다. 즉 심정을 터전으로 하는 로고스(이법(理法))의 이론은 가정에의 참된 평화 수립의 방안(方案)도 되는 것이다. 이상으로 로고스에 관한 설명을 모두 마치고 다음은 창조성(創造性)에 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