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사상 - 제1장 원상론 (原相論) - 10

2010. 1. 6. 17:00참사랑 영원까지/통일사상

(3) 창조성(創造性)


1) 창조성(創造性)이란 무엇인가


창조성은 일반적으로 새 것을 만드는 성질(性質)이라고 정의(定義)되고 있다. 통일원리에서도 창조성을 일반적인 뜻으로도 해석하고 있지만, 그보다는 창조의 능력(能力)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것은 원리강론에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能力)과 하나님의 창조성(創造性)을,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음(1987, p. 65)을 보아서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성을 이와 같이 창조의 성질이나 창조의 능력(能力)으로만 이해한다면 그것은 정확한 이해라 할 수 없다. 이미 여러 번 밝힌 바와 같이 하나님의 속성을 이해하는 목적은 현실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데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 관한 모든 이해(理解)가 정확하고 구체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창조성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창조에 관한 상식적인 이해만 가지고서는 하나님의 창조성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창조의 특성(特性) 또는 요건(要件)이 밝혀질 필요가 있게 된다. 하나님의 창조는 우발적(偶發的)인 것이 아니며, 자연발생적인 것은 더욱 아니다. 그것은 억제불능(抑制不能)의 필연적 동기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명백한 합목적적인 의도(意圖)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창조가 이른바 심정(心情)을 동기(動機)로 한 창조심정동기설(心情動機說)로서 이 창조에는 창조목적을 중심한, 내적 및 외적인 사위기대(四位基臺) 또는 수수작용(授受作用)(후술)이 반드시 형성되어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성을 구체적으로는 목적을 중심한 내적 및 외적인 사위기대 형성의 능력으로 정의(定義)하게 된다. 이것을 인간의 창조(新品目의 製造)의 경우를 비유해서 설명한다면, 내적사위기대의 형성은 구상(構想)하는 것, 또는 새로운 아이디어의 개발(따라서 청사진(靑寫眞)의 작성)을 뜻하며, 외적사위기대의 형성은 그 청사진에 따라서 인간(主體)이 기계와 원료(對象)를 적절히 사용(수수작용)해서, 청사진대로의 신제품(신생체(新生體))을 만들어 냄을 뜻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속성(屬性)에 있어서 주체와 대상(후술(後述))은 각각 성상과 형상이다. 따라서 하나님에 있어서 내적사위기대의 형성은 상기(上記)한 목적중심의 로고스를 형성하는 것이며, 외적사위기대의 형성은 목적 중심한 성상(性相)(주체)과 형상(形狀)(대상)이 수수작용을 하여 신생체(만물)를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성은 이와 같은 내용을 갖춘 내적 및 외적사위기대 형성의 능력으로서,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로고스 형성에 이어서 신생체를 형성하는 능력이 하나님의 창조성(創造性)이다. 하나님의 창조성의 개념(槪念)을 이처럼 상세히 다루는 것은, 창조와 관련된 여러 가지의 현실적 문제(예컨대 공해문제(公害問題), 군비제한(軍備制限) 내지 철폐문제(撤廢問題), 과학과 예술의 방향성(方向性) 문제 등) 해결의 근본적 기준을 정립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2) 인간의 창조성(創造性)


다음은 인간의 창조성에 관하여 설명코자 한다. 인간에게도 새것을 만드는 능력(能力), 즉 창조성(創造性)이 있음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성이 닮기의 법칙에 따라서 인간에게 부여된 것이다. 그런데 원래 인간은 닮기의 법칙(法則)에 의해서 지은 바 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창조성도 하나님의 창조성을 완전히 닮기로, 또는 이어받기로 되어 있었으나(원리강론 1987, pp. 65, 93, 208), 타락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창조성을 불완전하게밖에 닮지 못하였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사실상 인간의 창조성은 하나님의 창조성을 완전히 닮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창조성이 하나님의 창조성을 닮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성을 인간에게 부여(賦與)하는 것을 뜻한다.(同上 pp. 108, 218)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인간에게 자신의 창조성을 부여하시고자 하였을까?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만물(萬物, 자연)世界에 대한 창조주의 입장에 서게 하여서(同上 p. 107), 만물에 대한 주관(主管) 자격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同上. pp. 94, 108)였던 것이다. 여기서 만물주관이란 만물을 아끼고 소중히 하면서, 그 만물을 마음대로 다루는 것을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이 사랑의 마음을 갖고 여러 가지의 사물을 다루는 것을 만물주관(萬物主管)이라 하며, 여기에는 인간 생활의 거의 모든 영역(領域)이 포함된다. 예컨대 경제, 산업, 과학, 예술 등이 모두 만물주관의 개념에 포함된다. 지상의 인간은 육신을 쓰고 살기 때문에 거의 모든 생활영역에서 물질을 다루고 있다. 따라서 인간생활 전체가 만물주관의 생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본연(本然)의 만물주관은 하나님의 창조성을 이어 받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본연의 주관(主管)이란 사랑을 가지고 창의적으로 사물을 다루는 것, 즉 사랑을 가지고 창의적으로 행하는 행위, 예컨대 경작, 제작, 생산, 개조, 건설, 발명, 보관, 운송, 저장, 예술창작 등의 행위를 말한다. 이러한 경제, 산업, 과학, 예술 등의 활동 뿐 아니라 심지어 종교생활, 정치생활도 그것이 사랑을 가지고 물건을 다루는 한에 있어서 본연의 만물주관에 포함된다. 이와 같은 본연의 인간에 있어서 사물을 다루는 데는, 사랑과 함께 새로운 창안(구상(構想))이 부단히 요구되기 때문에, 본연의 주관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창조성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창조성을 인간은 타락하지 않았다면 완전히 닮을 수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본연의 만물주관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 조상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렸으며, 따라서 이러한 인간이 이어받은 창조성은 불완전한 것이 되어버렸으며, 만물주관도 불완전하고 비원리적(非原理的)인 것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길는지 모른다. 즉 하나님이 닮기의 법칙에 의해서 인간을 창조했다면, 인간은 날 때부터 본연의 창조성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타락과는 관계없이 그 창조성은 지속되었을 것 아닌가? 실지로 오늘날 과학기술자들은 훌륭한 창조(創造)의 능력(창조성)을 발휘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의문이다.


3) 닮기의 창조(創造)


여기서 잠깐 닮기의 창조(創造)가 시공(時空)의 세계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설명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창조란 요컨대 피조물 즉 하나 하나의 만물이, 시공의 세계(時間)을 포함한 四차원의 세계)에 출현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창조가 하나님의 구상(構想)의 단계에서는 초시간(超時間), 초공간(超空間的)으로 이루어졌더라도, 그 피조물이 시공세계에 출현하는데 있어서는 소형(小形), 미숙(未熟) 또는 유소(幼少)의 단계에서부터 출발하여, 일정한 시간적 경과를 거쳐서 일정한 크기까지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일정한 크기의 단계에까지 완성한 후에야 하나님의 구상(構想) 또는 속성(屬性)을 완전히 닮게 된다. 그때까지의 기간은 미완성단계이며,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 나아가는 과정적 기간으로서, 통일원리는 이 기간을 성장기간(成長期間)이라고 하여 소생기(蘇生期), 장성기(長成期), 완성기(完成期)의 삼단계(3단계;질서적 3단계)의 기간으로 구분하고 있다(원리강론 1987, p. 62). 인간은 이러한 성장과정인 장성기의 완성급 단계에서 타락했던 것이다(同上 p. 64).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성을 이어받음에 있어서도 본연의 창조성의 2/3정도만을 이어받았던 것이니, 과학자들이 아무리 천재적(天才的)인 창조력을 발휘한다 하더라도 본래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고자 했던 창조성에 비하면 크게 못 미쳐 있다고 아니 할 수 없다.


그런데 피조물중에서 타락한 것은 인간뿐이다. 만물은 타락하지 않고 모두 완성하여 하나님의 속성(屬性)을 각자의 차원에서 닮고 있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또 생길 것이다. 즉 만물의 영장(靈長)이라고 일컬어지는 인간이 왜 영장(靈長)답지 않게 타락했는가 하는 의문이다. 그것은 만물이 원리 자체의 주관성 또는 자율성에 의해서만 성장하게 되어 있는데 대하여, 인간은 성장(成長)에 있어서 이 원리의 자율성(自律性), 주관성(主管性) 외에 자신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4) 창조성(創造性)과 책임분담(責任分擔)


여기서 원리 자체의 자율성이란 유기체(有機體)의 생명력을 말하며, 주관성은 같은 생명력(生命力)의 환경에 대한 영향성을 말한다. 한 그루의 나무가 성장하는 것은 그 내부의 생명력 때문이며, 주관성은 그 나무(生命力)가 주위에 미치는 영향력(影響力)을 말한다. 그런데 인간의 성장의 경우에도 이 원리 자체의 자율성과 주관성이 작용(作用)한다. 그러나 인간에 있어서는 육신만이 자율성과 주관성에 의해서 성장하며, 인간의 영인체는 그렇지 않다. 영인체의 성장에는 다른 차원의 조건(條件)이 요구된다. 그것이 책임분담 즉 분담(分擔)책임의 완수인 것이다.


여기서 밝혀둘 것은 영인체(靈人體)의 성장이란 육신처럼 영인체의 신장이 커짐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영인체는 육신에 밀착(密着)되어 있기 때문에 육신의 성장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커지게 되어 있다. 여기의 영인체의 성장이란 영인체의 령성의 성숙과 인격의 향상을 뜻한다. 또한 심정 수준의 향상을 뜻한다. 요컨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마음 자세의 성장이 바로 영인체의 성장인 것이다.


이러한 영인체의 성장은 다만 책임분담의 완수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여기의 책임분담이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견지(堅持; 굳건히 지키면서)하고 계명(誡命)을 준수(遵守)하는 가운데서,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아니하고 내적 외적으로 가해지는 수많은 시련을, 스스로의 판단(判斷)과 결정하(決定下)에 극복해 나아가면서, 사랑의 실천을 계속함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도 간섭할 수 없는 상황(狀況)에서, 육신의 부모마저 없는 여건하에 이같은 책임분담을 다 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만, 아담은 그 책임을 다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이와 같은 책임분담을 다 하지 못하고 결국, 사탄의 꼬임에 빠져서 타락(墮落)하고 말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실패할 수도 있는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아담에게 메웠을까? 만물처럼 쉽게 성장하게 할 수도 있었을 것 아닌가?


그것은 인간을 만물의 주관(主管)位에 세우기 위해서였으며(창 1:28, 원리강론 1987, p. 108) 만물에 대한 주관자격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同上). 주관은 자기의 소유물(所有物)이나 자기가 창조한 것(제작물(製作物))만을 주관하는 것이 원칙이며, 타인의 소유나 타인의 창조물은 주관(主管)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또한 아담은 만물보다 뒤에 창조되었기 때문에, 만물의 소유자도 창조자도 될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아들에게 자신의 창조주(創造主)의 자격을 물려주어서 주관주(主管主)로 세우고 싶었기 때문에(창 1:28), 일정한 조건을 세우게 하여 그것으로 아담도 하나님의 우주 창조에 동참했다는 것으로 인정해 주려(쳐 주려) 했던 것이다.


5) 인간의 완성과 책임분담(責任分擔)


그 조건(條件)은 아담이 자기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즉 아무의 도움도 받지 아니하고 자기를 완성시키면, 그것으로써 우주를 창조한 것과 같은 자격(資格)으로 쳐주려 하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가치로 볼 때, 인간 하나의 가치는 전체 우주의 가치와 같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우주(天宙)를 총합한 실체상(實體相)이며(원리강론 1966, pp. 48~49, p. 54), 소우주(小宇宙)(同上 p. 54)이기 때문이요, 또 인간의 완성으로써만 우주 창조도 완성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태 16:26)고 하신 것도 그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아담이 스스로 자신을 완성시키면, 가치로 보아서 아담이 우주를 창조한 것과 동등한 입장에 서는 셈이 된다.


그런데 창조는 창조자(創造者) 자신의 자기 책임 하에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한 것은 하나님 자신의 책임 하에서였다. 마찬가지로 아담이 자신을 완성시키는 일(창조(創造))도 아담 자신의 책임분담이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해와에게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메웠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100% 책임을 아담에게 메운 것은 아니다. 인간 성장의 대부분의 책임은 하나님이 지시고, 아담-해와에게는 극히 적은 부분의 책임(책임;5% 책임)분담(分擔)을 메워, 그 5%의 책임분담을 다하기만 하면 100% 책임 전체를 아담이 다 해낸 것으로 쳐주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크신 특혜에도 불구하고 아담-해와는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고 타락(墮落)하고 말았으며, 그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창조성을 온전히 이어받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만일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즉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성을 온전히 이어받았더라면 어떠한 결과가 되었을 것인가. 인간이 타락하지 않고 완성했더라면 먼저 하나님의 심정 즉 사랑을 통해서 기쁨을 얻으려는 정적(情的)인 충동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인 것처럼 인간은 사랑의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모든 주관활동(主管活動)이 심정을 터전으로 하는 사랑 중심의 활동이 되게 됨을 뜻한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마찬가지로 정치, 경제, 산업, 과학, 예술, 종교 등이 물질을 다루는 한에 있어서 모두 주관활동(主管活動)인데, 이러한 활동이 하나님으로부터 이어받은 창조성(創造性; 온전한 창조성)을 터로 한 사랑의 주관활동으로 변모(變貌)하게 된다.15) P.81


6) 본연(本然)의 창조성(創造性)과 문화활동


상기(上記)의 심정(心情)의 항목에서, 심정의 충동력을 동기로 하는 지적(知的), 정적(情的), 의적활동(意的活動)의 총화가 문화(心情文化)라고 했는데, 여기의 지적활동, 정적활동, 의적활동이 모두 물질을 다룬다는 점에서 공통이기 때문에 이 문화활동도 따지고 보면 본연(本然)의 창조성에 의한 주관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문화(文化)라는 관점에서 오늘의 세계를 바라볼 때, 세계문화는 급속히 몰락(沒落)되어가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과학, 예술, 교육, 언론, 윤리, 도덕, 종교 등이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혼란의 와중(渦中)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다. 여기에서 획기적인 어떠한 방안이 세워지지 않는 한, 이 몰락해 가는 문화를 다시 구출한다는 것은 거의 절망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혹자는 다년간 철의 장막으로 가린 채 강력한 기반을 유지해 온 공산독재 체제가 자본주의 체제와 대결하다가 오늘날 개방을 계기로 하여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자본주의 방식의 도입을 서두르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고 자본주의의 경제체제와 과학기술의 우월성(優越性)을 자랑할는지 모르나, 그것은 근시안적 인식착오(認識錯誤)인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경제의 구조적 모순에 의한 노사분규(勞使紛糾) 및 빈부(貧富)의 격차의 심화와 이에 반드시 따라다니는 가치관의 붕괴현상과 사회적 범죄의 범람, 그리고 과학기술의 첨단화(尖端化)에 따르는 범죄기술의 첨단화, 산업의 발달에 따르는 공해의 증대 등은 자본주의의 고질적(痼疾的)인 병폐로서 미구에 반드시 자본주의를 쇠망시키는 요인이 될 줄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만물주관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문화적 위기의 근본원인은 멀리 인류역사(人類歷史)의 시발에까지 소급(遡及)하여 거기서 찾아야 하며, 그것이 바로 인간조상의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성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심정(心情)과 사랑을 온전히 이어받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자기중심적인 존재가 되고 이기주의(利己主義)가 팽배하게 된 데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문화를 위기(危機)에서 구출하는 유일한 길은 자기중심주의(中心主義), 이기주의(利己主義)를 청산하고 모든 창조활동, 주관활동을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하고 전개하는 것이다. 즉 세계의 각계각층의 지도자들이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하고 행동하게 될 때, 오늘날의 정치, 경제, 사회, 교육, 과학, 종교, 사상, 예술, 언론 등 여러 문화영역(文化領域)의 얽히고 설킨 난문제(難問題)들이 근본적으로 그리고 통일적으로 해결되어, 여기에 새로운 참된 평화의 문화가 꽃피게 될 것이다. 이것은 공산주의문화도 아니요, 자본주의문화도 아닌 새로운 형태의 문화이니 그것이 바로 심정문화(心情文化), 사랑의 문화라고도 불리우는 중화문화(中和文化)인 것이다.


이상으로 하나님의 창조성에 관한 이론도 또한 현실문제 해결의 기준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으로 창조성에 관한 설명을 마친다. 동시에 하나님의 신성(神性), 더 나아가서 원상(原相)의 내용에 관한 설명도 이것으로 마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