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인물을|韓민족위인

2009. 6. 18. 17:48삶이 깃든 이야기/문화유산

1. 계백 ( ? ~ 660 )

 

백제 말기의 장군, 벼슬이 달솔에 이르렀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 20년(660년)에 김유신과 소정방의 나당 연합군이 쳐들어오자, 5000명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황산벌에서 신라 군사를 맞아 네 차례나 싸워 이겼다. 이에 신라군이 사기를 잃고 있을 즈음, 신라 장군 품일이 16세의 어린 아들 관창으로하여금 나가서 싸우게 하였다. 관창이 사로잡혀 오자 계백은 어린 나이에 용전했음을 기특히 여겨 살려 보냈으나, 다시 붙잡혀 오자 관창의 목을 잘라 그의 말 안장에 묶어 신라 군중으로 돌려 보냈다. 관창의 죽음에 자극되어 파도처럼 밀려드는 신라 군사의 총공격을 받고, 그는 결사대 전원과 더불어 장렬한 최후를 맞쳤다. 싸움터에 나가기 전에 ‘적의 노비가 되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하여 처자식을 자기 손으로 죽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2. 경순왕 ( ? ~ 978 )

 

신라의 마지막(제 56대) 왕(재위 927~935년).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부(傅)이다.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후백제의 견훤에게 습격을 받아 자살한 뒤, 견훤의 힘으로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있는 동안 후백제의 잦은 침략과 약탈로 국력은 차차 쇠퇴해져 갔다. 거기에다 백성들의 마음도 이미 고려로 기울어, 마침내 935년에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넘겨 주고 말았다. 그 뒤 왕건의 딸인 낙랑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고 정승에 봉해지는 한편, 경주의 사심관에 임명됨으로써 고려 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능은 장단에 있다.

 

3. 경애왕 ( ? ~ 927)

 

신라의 제 55대 왕(재위 924~927년). 성은 박씨이고 이름은 위응이며, 선덕왕의 아들이다. 신라 말의 혼란기에 형인 경명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의 세력이 날로 커져 나라의 힘을 펴지 못하였다. 포악한 견훤의 세력을 누르고자 왕건과 손을 잡기도 하였으나, 포석정에서 잔치를 벌이던 중 견훤의 습격을 받고 자살을 강요당해 죽었다.

 

4. 고종 (1852~1919)

 

조선의 제 26대 왕. 대한 제국의 초대 황제(재위 1863~1907년). 이름은 형이다. 흥선 대원군의 둘째 아들로 세자가 없던 철종의 뒤를 이어 11세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자기의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이 정치에 간여하였으므로 10년 동안이나 실권을 잡지 못한 채 왕으로만 지냈다. 대원군은 세도 정치의 배제와 당파를 초월한 인재의 등용, 비변사의 폐지 및 삼군부의 설치, 양반들의 세력 억제 등 과감한 정치를 폈으나, 경복궁을 다시 수리하는 일로 인한 백성들의 과중한 부담과 천주교 탄압, 쇄국 정책으로 인한 근대화의 방해 등 어두운 정치적 자취를 남겼다. 1873년(고종 10년)에 민비 등의 계책에 따라 흥선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직접 정치를 하게 되자, 이 때부터 민비 일족이 세도 정치를 시작하였다. 고종은 대원군의 쇄국 정책을 폐지하고 여러 나라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신사 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하여 여러 가지 문물을 시찰하게 하였으며, 일본식 군사 훈련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1882년의 임오군란, 1884년의 갑신정변, 1894년의 동학 농민 혁명으로 인해 청일 전쟁이 일어나자, 김홍집 등 개화당 내각이 정권을 잡아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1897년에는 나라 이름을 대한 제국이라 고치고, 왕의 칭호를 황제라 하였다. 1905년에 을사 조약이 맺어지자, 이 조약의 부당성과 일본의 침략성을 세계에 호소하기 위해, 1907년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이준 등 밀사를 보냈으나 일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1910년 우리 나라의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긴 뒤에는 이태왕으로 불리었으며, 일본의 음모로 독살당하였다. 능은 경기도 남양주의 홍릉이고, 저서로 <주연집>이 있다.

 

5. 공민왕 ( 1330 ~ 1374 )

 

고려의 제 31대 왕(재위 1351~1374년). 이름은 전이고, 충숙왕의 둘째 아들이다. 12세 때 원나라에 볼모로 잡혀 가, 약소국의 슬픔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글을 익히고 문물을 배웠다. 거기서 위왕의 딸 노국 대장 공주와 결혼하고, 1351년에 고려에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왕이 되자 원나라 왕실과 인척을 맺고 횡포를 부리던 기철의 일족을 없애고, 몽고식 풍속을 모두 금지시키는 등의 반원 정책을 썼다. 이어 원나라의 쌍성총관부를 쳐 없애고, 영흥 이북 땅을 되찾았다. 또 원나라식 연호와 관제를 고치는 한편, 승려 신돈을 뽑아 써서 귀족이 빼앗았던 토지를 주인에게 돌려주는 등 내정 개혁에서 힘썼다. 그러나 말년에는 홍건적 · 왜구의 잦은 침략과 신돈의 횡포로 나라가 어지러워져 최만생 · 홍유 일당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특히 그림과 글에 뛰어나 <천산대렵도> <노국대장공주전> <석가출산상> 등의 미술 작품을 남겼는데, 지금은 <천산대렵도>만이 국립 현대 미술관에 전한다. 능은 현릉이다.

 

6. 공양왕 (1345~1394)

 

고려의 마지막 왕(재위 1389~1392). 이름은 요이고, 신종의 7대손이다. 당시 중국은 원(元) 나라에서 명(明) 나라로 바뀔 때였으므로, 조정에서는 친원파와 친명파의 대립이 격심했는데, 공양왕은  1389년에 친명파인 이성계가 쫓아낸 창왕을 이어 왕위에 올랐다. 성품이 과단성이 없어 이성계와 정몽주의 신구 세력 사이에서 그 주장만을 따랐다. 재위 4년만에 역시 이성계에 의해 왕위에서 밀려나 뒤에 삼척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공양왕이 왕위에서 물러남으로써 고려는 제 34대 475년 만에 망하였다.

 

7. 광해군 (1575~1641)

 

조선의 제 15대 왕(재위 1608~1623). 이름은 혼이다. 선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중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뒤에 인목 왕후에게서 영창 대군 의가 태어나자, 그를 세자로 세우려는 소북과 자기를 세자로 지지하는 대북간의 정권 다툼에 휘말렸다. 1608년에 왕위에 오르자 대북의 득세 아래 임해군 · 영창 대군 등 여러 왕자를 죽이고, 인목 대비를 서인으로 격을 내려 서궁에 가두는 등 정치를 어지럽혔다. 이에 참다 못한 이귀 등이 1623년에 능양군 종(倧)을 받들어 인조 반정을 일으킴으로써 광해군은 강화에 귀양가게 되었다. 뒤에 다시 제주도로 옮겨져 1641년(인조 19년)에 죽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왕위에 있을 때 문화 사업에 힘써 <신중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였고, <동의보감> 등을 간행하였으며, 경덕궁 · 인경궁 등의 건축물을 세우는 등 업적이 있었다. 또 대외적으로는 국경을 지키는 일과 외교에도 힘을 기울였다.

 

8. 권율 ( 1537~1599 )

 

조선 중기 문관 출신의 명장. 호는 만취당이고, 시호는 충장이다. 젊어서는 벼슬에 뜻이 없어 책만 읽다가, 1582년 (선조 15년) 45세 때에야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좌랑 · 호조 정랑을 지냈다. 1592년 (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 목사로 있으면서 의병을 모아 방어사 곽영의 지휘 아래 싸웠다. 나중에 전라도 순찰사가 되어 적이 서부 방면으로 쳐들어오는 것을 막았고, 수원 독왕산성에서는 유격전으로 적의 대군을 물리쳤다. 1593년에는 행주산성에 진을 쳤는데, 그는 이 때 군사들에게 돌을 운반하기에 편리한 앞치마를 입게 하였고, 3만 명의 대군으로 공격해 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왜군을 크게 물리쳤다. 이 싸움이 유명한 ‘행주 대첩’이다. 이 공으로 도원수가 되어 전군을 지휘하였다. 죽은 뒤에 영의정 벼슬이 내려졌으며, 바다의 이순신 장군과 더불어 임진왜란 때의 2대 명장으로 손꼽힌다. 행주산성의 옛 터에는 행주대첩비가 세워져 있다.

 

9. 근초고왕 ( ? ~375)

 

벡제의 제 13대 왕 (재위 346~375년). 초고왕이라고도 한다. 비류왕의 둘째 아들로 왕위에 올라 마한을 병합하고,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대방의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이어 371년에는 고구려의 평양성을 쳐서 세력을 크게 떨치고,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밖으로는 중국의 동진과 국교를 열러 남조 문화를 받아들이는 한편, 아직기와 왕인을 일본에 보내어 한문을 전하였다. 그 밖에 서울을 한산(지금의 서울)으로 옮기고, 고흥에게 백제의 역사 <서기>를 쓰게 하였으며, 왕위 세습 제도를 확립했다.

 

10. 김구 ( 1876~1949)

 

독립 운동가·정치가, 호는 백범이다.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18세 때 동학당에 가입, 접주가 되어 이듬해 고향에서 동학군을 지휘하였다. 1896년에 일본군 중위 쓰치다를 죽이고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고종의 특명으로 감형된 뒤에 탈옥하였다. 1910년 고일제의 주권 침탈 후 신민회의 간부로 활약하였으며, 이듬해에는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받았다가 감형되어 1914년에 풀려났다. 1919년 3·1 운동 후에는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 정부 조직에 참여, 경무 국장 ·경무령 · 주석으로 있으면서 이봉창 · 윤봉길 의사의 의거 등을 지휘하였다. 또 장제스의 국민 정부와 긴밀한 유대를 맺고, 광복군을 조직하여 항일 투쟁에 온 힘을 기울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귀각하여 우리 나라에 대한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전개했으며,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협상을 주장하였다, 이어 김규식과 함께 북한에 가서 정치 회담을 가졌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민족 양심에 호소하여 민족 통일의 원칙을 게속 주장하던 중 1949년에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였다. 저서에 <백범일지>가 있다.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지금의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11. 김대건 (1822~1846)

 

우리 나라 최초의 신부, 세례명은 안드레아이다. 충남 내포의 독실한 천주교도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주교의 교리를 익혔다. 1836년(헌종 2년)에 프랑스 신부 모방에게서 영세를 받고, 그의 소개로 1837년에 중국으로 건너가서 마카오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고국을 떠난 지 8년 만인 1845년에 홀로 국경을 넘어 서울에 들어오는 데 성공하여, 신부로서 교세를 피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 해에 파리 외방 전교회의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쪽배로 상하이로 건너갔다가, 금가항 신학교에서 탁덕으로 승품되어 23세의 젊은 나이에 우리 나라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귀국 후 1846년 선교사의 입국과 중국에 있는 파리 외방 전교회와의 연락을 위해 백령도 부근을 탐사하다가 붙잡히어 서울로 끌려와 새남터에서 순교, 미산리에 안장되었다. 1925년 7월 5일에 ㄹ마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에 한국 카톨릭 교 200주년 기념 식전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위에 올랐다.

 

12. 김부식 (1075~1151)

 

고려 인종 때의 문신 · 학자, 호는 뇌천이고, 시호는 문열이다. 당대의 권세 있는 집안에 태어났으며, 벼슬은 평장사를 거쳐 수사공에 이르렀다. 학식이 높아 왕에게 <주역> <상서> 등을 강의하면서 정치의 바른 도리를 역설하였고, 정극영 등과 함께 <예종실록>을 편찬하였다. 1134년 (인종 12년) 묘청이 도참설(장래의 길흥을 예언한 책의 주장)을 이용하여 서울을 서경(평양)으로 옮기려 할 때 강력히 반대하여 중지시켰다. 이에 묘청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원수로서 이를 평정하여 정국 공신이 되었다. 1145년에는 인종의 명을 받아 <삼국사기> 50권을 완성하였다. 이는 우리 나라 최초의 정사(正史)로서 고대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3. 김수로왕 ( ?~199)

 

가락국의 시조, 42년에 가락국의 북쪽 귀지봉에 6개의 알이 든 금 상자가 있었는데, 이 알이 깨어서 6가야국의 왕이 되었다. 수로는 그 가운데의 한 사람으로 키가 9척이나 되며, 제일 먼저 사람으로 변했기 때문에 수로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한다. 금관 가야국의 왕이 되어 인도 아유타 국의 공주인 허황옥을 왕비로 맞았다고 하며, 김해 김씨의 시조이다. 능은 경남 김해에 있다.

 

14. 김유신 ( 595~673)

 

신라의 명장. 김수로왕의 12대손이며, 김서현 장군의 아들이다. 15세에 화랑이 되었고, 태종 무열왕을 도와 삼국통일을 이룩했다. 용맹과 지모가 뛰어나 여러 차례 백제 · 고구려와 싸워서 이겼고, 647년 (진덕 여왕 1년)에 왕족인 신하 비담과 염종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 반란군을 토벌하였다. 654년에 여왕이 후사 없이 죽자 재상 알천과 의논하여 김춘추(태종 무열왕)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660년(태종 무열왕 7년)에 상대등에 올랐고,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의 13만 대군과 연합하여 5만의 정예군으로 백제를 멸망시켰다. 668년(문무왕 8년)에는 나당 연합군 총사령관이 되어 금성(지금의 부여)에 남고, 김인문 · 김흠순을 보내어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 뒤에는 당나라 군사를 몰아내는 데 힘써, 대동강 이남의 땅을 되찾아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다졌다. 673년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는 흥무대왕의 칭호를 올렸다.

 

15. 김윤식 (1835~1922)

 

조선 말기의 문신 · 학자, 호는 운양이다. 1874년에 문과에 급제한 뒤 영선사로 청나라를 자주 왕래하였으며, 임오군란 ㅍ 갑신정변 때에는 청군을 청해 오는 데 큰 구실을 하였다. 1887년에 민비의 친러 정책에 반대하여 미움을 샀으나, 1895년에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자 외무 대신이 되었다. 일본이 우리의 주권을 침탈한 이후 자작 벼슬을 받았으나, 뒤에 ‘대동학회’ ‘기호 학회’등을 조직하고 대종교에 들어가 민족 운동에 참여하였다. 석학이자 문장가로도 이름이 높았다. 저서에 <운양집> <천진담초> <음청사> 등이 있다.

 

16. 김정호 (  ? ~ 1864)

 

조선 고종 때의 지리학자. 호는 고산자이며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우리 나라의 정밀 지도를 제작하는 데 뜻을 두어, 30여 년 간 전국을 누비며 힘 쓴 끝에 순조 말년에 <청구도> 2첩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전국을 답사하여 1861년에 <대동여지도>를 완성하였다. 이어서 그는 전국 각 지방의 연혁 · 풍속 · 산수 · 인물 · 지리를 기록한 <대동지지> 32권 15책을 펴내기도 하였다. 그가 손수 목판에 새겨 박아 낸 <대동여지도> 1벌을 흥선대원군에게 바치자, 대원군은 국가의 기밀을 누설하였다는 죄명을 씌워 그를 옥에 가두고 목각판은 불태워 버렸다. 그 뒤 그는 심한 고문을 당한 끝에 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17. 김좌진 ( 1889~1930)

 

독립 운동가. 호는 백야이다.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따. 진취적 사상이 뚜렷하여 15세 때 집안의 종들을 해방시키고, 농지를 소작인에게 나누어 주었다. 을사 조약이 체결되자 국권 회복에 뜻을 두고 활약하다가 1913년에 대한 광복단에 가입하였다. 1917년에 만주로 망명, 1919년 3·1 운동 때 중국 동북 지방으로 가서 북로 군정서를 조직하여 총사령관이 되고, 사관 양성소를 세워 군사를 훈련시켰다. 1920년에 청산리에서 나중소 · 이범석 등과 함께 일본군과 싸워 크게 이겼는데, 이것이 유명한 "청산리 싸움"이다. 이듬해 대한 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일본의 보복을 피하여 군사들을 이끌고 소련 땅으로 갔으나, 소련군과의 충돌로 많은 전사자를 내고 다시 북만주로 돌아왔다. 그 후, 성동 사관 학교를 세워 독립군 간부 양성에 힘쓰는 한편, 1929년에 한족 연합회를 결성하는 등 동포의 단결을 호소하다가 고려 공산 청년회의 박상실에게 암살당하였다. 1962년에 대한 민국 건국 훈장 중장(지금의 건국 훈장 대만 민국장)을 받았다.

 

18. 김홍도 (1745~?)

 

조선 정조 때의 화가. 호는 단원 · 단구 · 서호 이다. 우리 나라 근세 화단에 독특한 화풍을 열어 솔거 이래의 천재 화가로 일컬어진다. 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김응환에게서 어릴 때부터 그림을 배우고 강세황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 그는 곧 왕실의 전속 화가가 되어 왕의 초상화를 그리는 등 많은 활약을 하였다. 사실적 기법의 산수화와 서민적인 풍속화에 뛰어났고, 신선화 · 인물화 · 불화 등을 두루 잘 그렸다. 안견 · 장승엽과 함께 조선 시대 3대 화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소림명월도> <군선도> <쌍치도> <낭구도> <청앵도> 및 <풍속화첩> 등 수많은 명작이 남아 전한다.

 

19. 김홍집 (1842~1896)

 

조선 후기의 정치가, 호는 도원, 또는 이정학재이고, 시호는 충헌이다. 1867년(고종 4년)에 문과에 급제, 평양 현감을 거쳐 예조 참의가 되었다. 1880년에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중국인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을 가져와 소개하고, 개화 정책 추진에 히믈 기울였다 1882년 임오군란 후 이유원과 함께 일본과 제물포 조약을 맺었다. 1894년에 동학 농민 혁명이 일어나자 제 1차 김홍집 내각을 조직, 총리 대신이 되었다. 이어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친일파로 구성된 제 2차 김홍집 내각을 조직하였고, 1895년에 제 3차 김홍집 내각을 세워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성급한 단발령과 일본인들이 민비를 죽인 사건으로 민심을 잃은데다가, 고종 황제가 거처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아관 파천) 후 친러시아파에서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 저서에 <이정학재일록>이 있다.

 

20. 나대용 (1556~?)

 

조선 선조 때 수군의 장군, 일찍이 글을 배웠으나 나라의 방비가 급함을 깨닫고 무관이 되었다. 임진왜란 전해인 1591년에 전라 좌수영 수사로 있던 이순신 장군을 찾아가, 그 동안 연구해 온 거북선의 설계도를 보이고 나라의 방비책을 건의하였다. 이후 충무공 밑에서 병선 건조 책임을 맡고, 옥포 · 당포 · 사천 등 여러 해전에도 참가하여 왜적을 무찌르는 데 공이 컸다.

 

21. 나석주 (1889~1926)

 

독립 운동가.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났다. 23세 때 만주로 망명하여 4년 간 신흥 무관 학교에서 군사 훈련을 받고 귀국하여 항일 공작원으로 활동하였다. 3·1 운동 후에는 군자금을 모아 상하이 임시 정부에 보내고, 동지들을 모아 일본 관헌을 죽인 뒤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그 뒤 김구가 이끄는 의열단에 들어가, 우리 나라를 착취하기 위해 일본인이 만든 동양 척식 회사와 식산 은행을 파괴할 임무를 띠고 1925년에 몰래 귀국하였다. 이듬해 식산 은행에 폭탄을 던지고, 일본인들을 쏘아 죽인 뒤 총격전 끝에 자결하였다. 1962년에 대한 민국 건국 공로 ㅎ누장 복장(지금의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22. 낙랑 공주(?~32)

 

낙랑 태수 최이의 딸,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 왕자와의 사랑 떄문에, 무기고에 들어 있던 자명고(적의 침입이 있을 때 스스로 울어서 대비하게 하였다는 북)을 찢어서 낙랑을 고구려에게 정복당하게 하였는데, 그로 인해 그녀는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하였다고 전한다.

 

23. 남건 (? ~ ?)

 

고구려 때의 재상. 천남건이라고도 한다. 명장 연개소문의 둘째 아들이다. 665년(보장왕 24년)에 아버지가 죽자 형 남생을 몰아내고 막리지가 되었다. 667년에 형 남생이 당나라와 손을 잡고 고구려에 쳐들어왔을 때 압록강에서 그들을 막아 싸웠다. 668년에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평양이 함락되자, 왕은 항복했으나 남건은 굽히지 않고 게속 싸우다가 부하의 밀고로 잡혀, 당나라로 끌려가 검주에 유배되었다.

 

24. 남생 (?~679)

 

고구려 말기의 재상. 연개소문의 맏아들이다. 665년(보장왕 24년)에 아버지가 죽자, 그 뒤를 이어 막리지가 되어 삼군 대장군을 겸하고, 후에 대막리지에 올랐다. 두 아우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여러 성을 순시하러 나간 사이에, 형제간을 이간시키려는 자의 무고를 믿은 아우 남건 · 남산의 공격을 받았다. 이에 쫓겨서 국내성으로 피신하였다가 여러 성을 당나라에 바치고 당나라의 벼슬을 얻었다. 667년에 당나라 군대와 함께 고구려를 치고, 이듬해에는 신라군과 연합하여 평양성을 빼앗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의 묘는 아우 남산의 묘와 함께 중국 뤄양 남쪽에서 발견되었는데, 지석에는 관직 · 품계 및 조상에 관한 사적이 기록되어 있어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25. 내물왕(?~402)

 

신라의 제 17대 왕(재위 356~402). 성은 김씨이다. 왕위에 있는 동안에 고대 왕국으로서의 체제를 두루 갖추었다. 왜구와 말갈의 침입이 잦았으나, 364년에는 부현 동쪽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렀다. 381년에 위두를 중국의 전진에 보냄으로써 교류가 생기고 고구려를 통해 중국 문화가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한자가 사용된 것도 이 무렵부터 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26. 논개 (?~1593)

 

조선 선조 떄의 의로운 기생. 성은 주씨이며, 전라도 장수에서 태어났다 1593년(선조 26년)에 진주성을 함락시킨 왜장들이 촉석루에서 술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 왜장 게야무라를 꾀어 촉석루 아래 바위에서 그를 껴안고 남강에 뛰어들어 죽였다. 뒷날 논개의 의로운 정신을 기리어 그 바위를 의암(義巖)이라 부르고, 남강 가에 사당을 세워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또한 논개의 순절을 기리어, 그녀의 고향인 장수에는 정문이 세워졌다.

 

27. 눌지왕 (?~458)

 

신라의 제 19대 왕(재위 417~458). 성은 김씨이다. 내물왕 (제 17대)의 아들인데, 실성왕(제 18대)이 그를 죽이려 하자 먼저 손을 써 실성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418년에 박제상을 시켜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동생 미사흔을 귀국시켰다. 433년에는 백제와 나제 동맹을 맺어, 455년에 고구려의 침공을 받은 백제를 구하였다. 눌지왕이 왕위에 있을 때에 고구려에서 온 묵호자가 신라에 불교를 전하였다.

 

28. 단군(?~?)

 

우리 겨레(한민족)의 시조로 받드는 고조선(단군 조선)의 첫 임금. <삼국유사>에 따르면, 단군은 천제(天帝)인 환인의 아들 환웅과 웅녀(熊女)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단군 왕검은 기원전 2333년에 평양성을 도읍으로 정하여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다. 이후 다시 백악산 아사달로 도읍을 옮겨 1500년 동안 조선을 다스리다가 기자를 임금으로 삼아 조선을 다스리게 한 다음,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로 돌아와 산신이 되었다. 그 때 단군의 나이가 1908세였다 한다.

이후 오늘날까지 단군을 겨레의 시조로 받드는 한편, 환인이 환웅을 인간 세상에 보낼 때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할 만한다(弘益人間).’고 판단한 것을 건국 이념으로 새기며, 오늘날 교육의 기본 정신으로 삼고 있다.

 

29. 단종 (1441~1457)

 

조선의 제 6대 왕(재위 1452~1455). 이름은 홍위이다. 문종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11세 때 왕위에 올랐으나, 숙부인 수양 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겨 상왕으로 밀려났다. 1456년(세조 2년)에 성삼문 · 박팽년 · 하위지 · 이개 · 유응부 · 유성권 등의 ‘사육신’이 단종을 다시 왕위에 앉히려다 실패한 일을 계기로, 이듬해에 단종은 노산군으로 낮추어지고 강원도 영월로 귀양가게 되었다. 이 해 가을에 수양 대군의 동생인 금성 대군이 다시 단종을 왕위에 올리려다 잡혀 죽자, 단종은 평민으로 낮추어진 뒤 살해되었다. 세상을 떠난 뒤 241년 만에 다시 임금으로 복위되었고, ‘단종’이라는 묘호(임금의 시호)가 내려졌다. 능은 강원도 영월에 있는 장릉이다.

 

30. 대조영 (?~719)

 

발해의 시조(재위 699~719년). 왕호는 고왕이다. 668년에 고구려가 망한 뒤 당나라의 대장군 이해고의 군사를 천문령에서 크게 쳐부수고, 고구려와 말갈의 유민들을 모아 읍루의 동모산(지금의 지린 성 둔화 부근)에 홀한성을 쌓고 나라를 세웠다(699년), 스스로 왕이 되어 국호를 진(震)이라 하였으며, 후에 발해로 고쳤다. 동쪽은 바다, 서쪽은 거란, 남쪽은 신라에 이웃한, 5천 리에 걸친 큰 나라로 고구려의 옛 땅을 거의 회복하여 ‘해동성국’을 이룩하였다. 당나라의 화의를 받아들이고 신라와도 국교를 맺었다.

 

31. 덕종 (1016~1034)

 

고려의 제 9대 왕(재위 1031~1034). 현종의 맏아들로 이름은 흠이고, 시호는 경강이다. 왕위에 오르자 새 과거 제도인 ‘국자감시’를 만들고 거란에 억류된 고려인을 돌려 줄 것을 요구하였다. 거란이 이를 거절하였으므로, 유소에게 압록강 어귀로부터 동해안의 도련포(지금의 광포)에 이르는 천리 장성을 쌓게 하였다. 또 현종 때에 시작한 국사 편찬 사업도 완성하였다. 능은 개성에 있는 숙릉이다.

 

32. 명성황후 (1851~1895)

 

조선 제 26대 고종의 비, 흔히 민비라 불린다. 9세 때 부모를 여의고 가난하게 자랐다. 1866년에 흥선 대원군의 부인 민씨의 추천으로 왕비에 책봉되었으나, 섭정으로 정치의 실권을 쥐고 있던 시아버지인 흥선 대원군과 치열한 정치 싸움을 벌이면서 여러 외국 세력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민씨 문중의 사람들을 중요한 직위에 앉혀 민씨 일파의 세도 정치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1882년에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여 이를 평정한 다음, 대원군을 청나라로 잡혀 가게 하였다. 청일 전쟁이 일어나자 러시아의 힘을 배경으로 친일 세력을 물리치려 하였다. 이에 일본은 1895년에 을미사변을 일으켰는데, 민비는 이 때 일본 공사 미우라가 조종하는 일본 자객에게 암살당하였다. 1897년에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지고 경기도 양주군 홍릉에 묻혔다.

 

33. 명종 (1131~1202)

 

고려의 제 19대 왕(재위 1170~1197). 이름은 호이고 시호는 광효이다. 친형인 의종을 몰아낸 정중부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있는 동안 정중부를 죽이려는 김보당의 난, 조위총의 난, 농민 반란과 무신들의 싸움이 잇달아 일어나 나라 안이 매우 어지러웠다. 1197년에 당시의 실권자인 최충헌에 의해 왕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능은 경기도 개풍군에 있는 지릉이다.

 

33. 명종 (1534~1567)

 

조선의 제 13대 왕(재위 1545~1567). 이름은 환이고, 시호는 공헌이다. 중종의 둘째 아들로 11세 때에 왕위에 올랐다. 초기에 어머니 문정 왕후가 섭정을 하게 되자, 윤원형 일파가 을미사화를 일으켜서 많은 선비를 죽게하고 정권을 잡았다. 그 뒤 문정 왕후가 죽자 명종은 윤원형 일당을 처형하고 정국을 바로 잡고, 중 보우를 처단한 뒤 불교를 탄압하는 정책을 폈다. 한편 수자와 전쟁 군함을 만들고 <속무정보감>을 간행하는 등 국방과 문화 토지를 몰수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좋은 정치를 베풀었다. 능은 서울시 도봉구 공릉동에 있는 강릉이다.

 

34. 무령왕(?~523)

 

백제의 제 25대 왕(재위 501~523). 이름은 사마 · 융 · 여륭이다.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서 501년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고구려 · 말갈족과 대치하여 방비를 튼튼히 하고, 중국의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그 문화를 받아들였다. 523년에는 인우 · 사오 등에게 명령하여 쌍현성을 다시 튼튼히 쌓아 외국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1971년에 무령왕과 왕비가 함께 묻힌 능이 충남 공주에서 발견되었다.

 

35. 무왕 (?~641)

 

백제의 제 30대 왕(재위 600~641). 이름은 장이며, 별명은 서동이다. 아버지인 법왕의 뒤를 이어 600년에 왕위에 올랐다. 신라의 서쪽 국경을 여러 번 침공하였고, 고구려를 눌러 두기 위해 중국의 수나라, 이어 당나라와 가까이하였다. 627년에는 군사를 일으켜 신라에 빼앗긴 땅을 찾으려고 하였으나, 당나라가 화친을 권하여 하는 수 없이 그만두었다. 그 밖에도 일본에 관륵을 보내어 천문 · 지리 · 역법에 관한 서적과 불교를 전하는 등 많은 일을 하였으나, 군비와 잦은 토목 공사, 그리고 사치에 국력을 소모하여 뒷날 백제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

 

36. 무학대사(1327~1405)

 

고려 말, 조선 초기의 고승, 무학은 호이며, 속성은 박씨, 이름은 자초이다. 18세 때 승려가 되어 용문산에 가서 혜명으로부터 불교의 깊은 전리를 배웠다. 1353년에 원나라에 유학하여 그 곳에 가있던 혜근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귀국 후에는 그로부터 법을 이어받았다. 조선 태조(이성계)는 무학의 예언대로 나라를 세우자 그를 왕사로 봉하고 그가 도를 닦던 설봉산 토굴터에 석왕사를 세웠다. 왕위에 오른 이성계는 나랏일을 항상 대사와 의논하였으며, 대사 역시 슬기로운 판단으로 좋은 충고를 주어 조선 건국 사업에 큰 공적을 세웠다. 서울을 한양으로 정한 것도 대사의 제언에 따른 것이다.

 

37. 문무왕 (?~681)

 

신라의 제 30대 왕(재위 661~681). 이름은 법민이며, 태종 무열왕의 맏아들이다. 650년(진덕 여왕 4년)에 왕명을 받아 당나라에 가서 대부경의 벼슬을 받고 귀국하여 병부령이 되었다가 655년에 태자에 책봉되었다. 661년에 왕위에 오르자, 삼국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무열왕의 뜻을 이어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제 1차 정벌에는 실패하였으나, 668년에 다시 나당 연합군으로 공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677년에는 백제 · 고구려의 옛땅을 차지하려는 당나라 세력을 대동강 이북으로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끝내 이루었다. 뒤에 당나라의 제도와 문물을 들여와 국가 발전의 기틀을 다지는 데도 힘썼다. 왕은 왜구의 침입을 막아 나라를 지키겠다는 염원에서 유언으로 자신의 유골을 동해에 묻게 하였다고 한다. 1967년에는 경북 월성군 감은사 절터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이 문무왕의 해중 왕릉임이 밝혀졌다.

 

38. 문익점 (1329~1398)

 

고려 말기의 학자 · 문신, 호는 삼우당이고 시호는 충선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나 11세 때 이름난 학자인 이곡의 제자가 되었다. 1360년(공민왕 9년)에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벼슬을 거쳐 1363년에 사신의 한 사람으로 원나라에 갔다. 그 곳에서 처음으로 목화밭을 보았고, 솜에서 실을 뽑아 무명 옷감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원나라에서는 목화를 인도에서 들여온 지 오래지 않은 터여서, 목화씨나 그 재배 방법이 나라 밖으로 흘러나가지 못하도록 국법으로 막고 있었다. 그런데 문익점은 위험을 무릅쓰고 목화씨를 붓두껍에 숨겨 가지고 돌아와, 정성껏 심어 가꾸어 그 재배에 성공하였다. 벼슬이 좌사의대부까지 올랐으나 이성계가 추진하는 농지 개혁에 반대하다가 쫓겨났다. 세상을 떠난 뒤 1440년(세종 22년)에 영의정 벼슬이 내렸다.

 

39. 문자왕(?~519)

 

고구려의 제 21대 왕(재위 491~519년). 이름은 나운이며 문자명왕· 명치호왕이라고도 한다. 장수왕의 손자로, 태자였던 그의 아버지가 일찍 죽자 장수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494년에 부여를 쳐서 멸망시켰고, 신라 · 백제를 자주 침공하여 영토 확장에 힘썼다. 광개토왕 이래 세력이 강해지기 시작한 고구려는 장수왕 때를 거쳐 문자왕 때에 이르는동안 관도가 더욱 넓어지고 세력이 더욱 강성한 나라로 발전하였다.

 

40. 문정왕후 (1501~1565)

 

조선 제 11대 중종의 왕비. 파평 윤씨로 1517년에 왕비가 되었다. 1545년에 인종에 이어 아들 명종이 11세로 왕위에 오르자 섭정으로 정사를 보살폈고, 아우인 소윤파의 윤원형에게 권력을 잡게 하여 대윤파인 윤임 등 많은 선비를 역적으로 몰아 죽인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한편 불교를 독실하게 믿어 보우를 신임하여 불교를 크게 일으켰고, 과거에 승과를 두어 나라에서 승려를 임명하도록 하였다. 1553년에 형식상 명종에게 정권을 돌려 주었으나, 소윤파와 함께 오래도록 그 실권을 쥐고 있어서 폐해가 컸다. 능은 서울시 도봉구 공릉동에 있는 태릉이다.

 

41. 문종 (1019~1083)

 

고려의 제 11대 왕(재위 1046~1083). 이름은 휘이다. 현종의 셋째 아들로 형 정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고려의 문화를 찬란히 꽃피웠다. 사형죄에 대해 세번 재판을 받게 하는 삼원 신수법, 농토의 세율을 정하는 야전 보수법 등 여러 법률을 제정하여 정치의 기초를 다졌으며, 절을 세우고 사학을 일으키는 등 불교와 유학을 숭상하였다. 또 국방 · 외교에도 힘써 북쪽의 여진족을 회유책으로 달래고, 송나라와 국교를 맺어 앞선 문화를 받아들였다. 학문을 좋아하였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능은 경기도 장단에 있는 경릉이다.

 

42. 문종 (1414~1452)

 

조선의 제 5대 왕(재위 1450~1452). 이름은 향이고, 시호는 공순이다. 세종의 맏아들로 20년간 세자로 있으면서 문신과 무신을 고르게 쓰도록 하고, 올바른 말을 할 수 있게 하여 민심을 파악하는 등 세종을 크게 도왔다. 1450년에 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있는 동안 <동국병감> <고려사> <고려사절요>등을 간행하게 하였고, 군사 제도도 개혁하였다. 학문을 좋아하여 유학을 비롯한 천문 · 역법 · 산술 등을 두루 잘 알았고, 초서 · 예서를 잘 썼다.

몸이 허약하여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있는 현릉이다.

 

43. 문주왕 ( ? ~ 477)

 

백제의 제 22대 왕(재위 475~477년). 개로왕의 아들로 왕이 되기 전에는 상좌평으로서 아버지를 도왔다. 475년에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아 수도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전사하자 왕위에 올랐다 그는 서울을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옮기고 대두산성을 쌓는 등 국방에 힘썼으며 476년에는 탐라국으로부터 조공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뒤에 병관 좌평인 해구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암살당했다.

 

44. 미천왕(?~331)

 

고구려의 제 15대 왕(재위 300~331년). 호양왕이라고도 하며, 성은 고씨, 이름은 을불, 또는 우불이라고 한다. 서천왕의 손자이고, 고추가를 지낸 돌고의 아들이다. 왕위에 오르자 영토를 넓히기에 힘써 302년에 현도군을 쳤고, 311년에는 요동의 서안평을 점령하였다. 이어 313년에는 낙랑군을, 이듬해에는 대방굼을 점령하여 한나라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대동강 유역까지 진출하였다.

 

45. 미추왕 (?~284)

 

신라의 제 13대 왕(재위 262~284). 본래의 칭호는 미추 이사금이다.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미조 또는 미소이다. 구도의 아들로서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6대손이다. 신라의 제 12대 왕인 점해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대신들의 추대를 받고 왕위에 올랐다. 여러 차례에 걸친 백제의 침입을 잘 막았을 뿐만 아니라, 농업을 장려하고, 좋은 정치를 폈다. 경북 경주시 황남동에 있는 그의 능은 죽릉, 또는 죽장릉이라 불린다.

 

46. 민영환(1861~1905)

 

구한 말의 문신, 호는 계정이고, 시호는 충정이며, 민겸호의 아들이다. 17세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임오군란 때 아버지가 살해되자 한때 관직을 물러났으나, 뒤에 다시 병조 판서와 한성 부윤 등을 지냈다. 1896년에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길에 일본 · 미국 · 영국 등을 둘러보았다. 이듬해에 다시 유럽 6개ㅜㄱ의 특명 전권 공사로 임명되어 유럽을 여행함으로써 새 문물에 일찍 눈떳다. 귀국하여 민권 신장과 정치 · 경제 등의 전체적인 제도 개혁을 주장하였으며,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 폐기를 상소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국민과 각국 공사에게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1962년에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지금의 건국 훈장 대한 민국장)을 받았다.

 

47. 박문수 (1691~1756)

 

조선 영조 떄의 문신, 호는 기은이고, 시호는 충헌이다. 172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이 되고, 그 이듬해에 병조 정랑에 올랐으나 노론이 정권을 잡자 벼슬에서 물러났다. 1727년에 소론이 다시 정권을 잡자 사서로 임명되어, 영남 지방의 암행 어사로 나가 부정한 관리들을 잡아 내어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 주었다. ‘이인좌의 난’ 때에는 종사관으로 출전하여 공을 세워 영성군에 봉해졌다. 진주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도승지 · 병조 판서 등을 지냈다. 군정과 세정에 밝았고, 벼슬자리에 있으면서도 어려운 백성을 많이 구제하여 함흥 만세교 옆에 송덕비가 세워졌다. 암행 어사 때의 그의 일화가 많이 전해진다. 저서에 <탁지정례> <국혼정례> 등이 있다.

 

48. 박정희 (1917~1979)

 

우리 나라의 제 5~9대 대통령(재임 1963~1979). 경북 선산에서 태어나 1937년에 대구 사범 학교를 졸업하고, 국민 학교 교사를 지내다가 만주 군관 학교와 일본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하였다. 8·15 광복 후에는 한국 국군 창설에 참여하였다. 이후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포병 학교장 · 제2군 사령관 등 군의 요직을 두루 지냈다. 1961년에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하자 국가 재건 최고 회의 의장이 되었다가 제 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7년에 제 6대 대통령, 1971년에 7대 대통령, 1972년에 8대 대통령, 1978년에 9대 대통령에 잇달아 당선되었다.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 평화 통일과 민족 중흥을 이룩한다는 명분 아래 1972년 10월에 유신 헌법을 마련하였고, 제 1,2,3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한편 ‘새마을 운동’을 전개하여 조국 근대화와 경제 발전에 힘썼다. 대외적으로는 남북 대화의 문을 열었으며, 6·23 평화 통일 외교 정책과 평화 통일 3대 원칙 등을 선언하여 조국 통일 방안을 제시하였다. 1979년 10월에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절명했다. 국장으로 국립 묘지에 묻혔다. 저서에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 <민족의 저력> 등이 있다.

 

49. 박지원 (1737~1805)

 

조선 정조 때의 문인·실학자, 호는 연암이다. 16세 때 처음으로 처삼촌에게서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20대에는 뛰어난 글재주를 보였다. 당시 형식적인 예절과 도덕만을 중요시하는 현실을 살피고는, 학문은 실생활에 보템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실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1780년에 친족형 박명원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함께 청나라의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와서 그 곳에서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열하일기>로 엮었다. <열하일기>를 통해 청나라의 문물 제도와 생활 풍습을 소개하고, 조선의 뒤는 또 벼슬아치와 양반들의 생활을 폭로 · 풍자한 한문 소설 <허생전> <호질> 등을 지어 세태를 비평하기도 하였다. 50세에 처음으로 벼슬길에 올라 몇몇 관직을 거쳤고, 늘그막에 <과농소초>라는 농업 연구서를 지어 정조에게 바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박제가 · 이덕무 · 유득공 · 이서구 등이 그를 스승으로 받들었으며, 세상을 떠난 뒤에 정경대부라는 벼슬이 내려졌다.

 

50. 박혁거세 (기원전60~기원후4)

 

신라의 시조, 왕호는 거서간이며 박씨의 시조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옛날에 지금의 경주 지방에 여섯 마을이 흩어져 살았는데, 하루는 양산 산기슭에서 말이 울어 대기에 고허촌장 소벌공이 가보니 큰 알이 있어, 그것을 깨어 보니 옥동자가 나왔다. 그 알이 매우 커서 박과 같다 하여 성을 박이라 하였다. 아이가 13세에 이르자 기골이 빼어나고 매우 영특하여 여섯 마을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받들었다 한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 나라 이름을 ‘서나벌:(<삼국사기>의 기록, <삼국유사>에는 서라벌로 기록되어 있음)’이라 하고, 서울을 ‘금성’이라 하여 그 곳에 궁궐을 지었다 한다. 기원전 53년에 왕비를 맞아들여 왕비와 함께 여러 마을을 순시하면서 농사와 누에치기를 장려하고 어진 정치를 베풀었다 한다.

 

51. 방정환(1899~1931)

 

아동 문학가 · 소년 운동가. 호는 소파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선린 중학교를 중퇴하고 틈틈히 책을 읽고 글을 지었다. 1916년에 잡지 <청춘>에 그의 글이 뽑힌 뒤부터 문학에 대한 정열을 불태우기 시작하였다.

보성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아동 문학을 공부하다가, 1921년에 서울로 돌아와 ‘천도교 소년회’를 조직하는 한편, 어린이들을 존중하여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만들어 썼다.

1922년에 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엮었고, 이듬해에 잡지 <어린이>를 발행하였다. 이어 윤극영 · 손진태 등과 ‘색동회’를 조직하고 그해 5월 1일을 첫 ‘어린이날’로 정하는 등 어린이 보호 운동에 온 힘을 기울였다. 1931년에 월간 잡지 <혜성>을 발간하였으나, 병을 얻어 7월 23일에 32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정신을 길이 빛내기 위하여 1957년에 새싹회에서 ‘소파상’이 제정되었다. 저서에 <소파전집>이 있다.

 

52. 백결 선생(?~?)

 

신라 자비왕 때의 거문고의 명수, 서울인 금성(지금의 경주)에 살면서 매우 가난하여 옷을 누덕누덕 기워 입은 데서 ‘백결 선생’이라 불리었다. 그는 기쁨이나 슬픔의 모든 감정을 거문고 가락에 실어 표현하였는데, 어느 해 섣달 그믐날, 쌀이 없어 떡을 하지 못해 걱정하고 있는 아내에게 거문고로 떡방아 찧는 소리를 내어 위로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53. 백낙신 (?~?)

 

조선 철종 때의 무신. 1861년 (철종 12년)에 경상 우도 병마 절도사가 되어 진주에 부임한 뒤, 나랏돈을 가로채고 백성들을 괴롭혀 마침내 이듬해 진주 민란(임술민란)을 일으키는 원인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강진 고금도에 유배되고 재산을 몰수 당하였다. 1865년 (고종 2년)에 풀려나 이듬해 영종진 첨절제사가 되었으며,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영종진과 행주에서 프랑스 군대를 막아 내었다.

 

54. 법흥왕(?~540)

 

신라의 제 23대 왕(재위 514~540년). 지증왕의 아들로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원종이다. 왕위에 오르자 시법을 제정하고 병부를 설치했으며, 관리의 공복을 정하였다. 521년에는 중국 양나라와 국교를 맺고, 남부 지방을 순시하며 황무지를 개척하였다. 527년에는 불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여 삼국 통일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536년에는 처음으로 연호를 정하여 건원이라 하였다.

 

55. 비류 (?~?)

 

고구려 시조 동명왕의 둘째 아들, 북부여에서 내려온 형 유리가 고구려의 태자가 되자, 동생 온조와 함께 부하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지금의 경기도 광주)에, 비류는 미추홀(지금의 인천)에 도읍을 정하였으나 미추홀이 살기에 적당하지 않으므로 백성들이 등을 돌리고 흩어지자 아우 온조에게 부끄럽게 여긴 나머지 자살하였다고 전한다.

 

56. 선덕 여왕(?~647)

 

신라 제 27대 왕(재위 632~647년). 선덕은 시호이며, 성은 김씨, 이름은 덕만이다. 호는 성조황고이다. 진평왕의 맏딸로 태어났으며, 진평왕이 대를 이을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백성들이 그를 왕으로 받들었다. 634년에 연호를 인평으로 고치고 분황사를 지었다. 638년에 고구려군을 물리쳤고, 642년에 백제에게 40여 성을 빼앗기게 되자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어 구원을 청하기도 하였다. 647년에는 임종과 비담 등이 반역을 꾀했으나 곧 진압하였다. 그는 왕위에 있으면서 어진 정치를 베풀어 백성들의 생활 안정을 꾀하였고, 당나라의 문화와 불교를 들여왔으며, 첨성대를 세우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57. 선조 (1552~1608)

 

조선의 제 14대 왕(재위 1567~1608년). 이름은 균, 또는 공이고 시호는 소경이다. 1567년에 명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이황 · 이이 등 훌륭한 인재를 뽑아 써서 어진 정치를 펴기에 힘썼다. 또한 <유선록> <근사록> <실경> <삼강행실> 등을 펴내어 유학을 장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선조의 그러한 노력과는 달리 신하들 사이에는 붕당간의 치열한 정권 다툼이 벌어져 나라의 정치 기강은 날로 어지러워져 갔다. 국정이 어지러워 뚜렷한 국방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마침내는 야인(만주족)의 침입과 임진왜란을 당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중 의주까지 피란해야 하는 등 고통을 겪었으나, 명나라의 군사 원조와 이순신의 활약으로 왜적을 몰리칠 수 있었다. 1597년에 다시 왜군이 쳐들어와 7년간에 걸친 전쟁으로 국가 재정은 극도로 계속되어 시달림을 받다가 왕위를 광해군에게 물려주었다. 글을 잘 썼으며 그림 솜씨도 뛰어났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목릉이다.

 

58. 선종 (1049~1094)

 

고려 제 13대 왕(재위 1083~1094). 이름은 운, 시호는 사효이며 문종의 둘째 아들이다. 어려서 총명하여 경사에 밝았으며, 중서령을 거쳐 수태사와 상서령을 지내고,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대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1084년에 처음으로 승과를 설치하고 법흥사에 교장도감을 두어 책을 펴내는 등 불교 발전에 힘썼다. 능은 개성에 있는 인릉이다.

 

59. 설총 (655~?)

 

통일 신라 경덕왕 떄의 학자. 호는 빙월당이며, 경주 설씨의 시조이다. 원효 대사와 요석 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신라의 10대 현인의 한 사람으로 불리었다. 벼슬은 한림을 지냈고, 주로 임금 가까이에서 정치에 대한 자문 구실을 하였다. 유학과 문학에 조예가 깊었으므로 일찍이 국학에 들어가 학생들을 가르치고, 이두를 정리하여 체계를 세웠으며, 한문에 토를 다는 방법을 창안하여 당시 중국의 한문을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되게 하였다. 또 <화왕계>를 지어 신문왕을 충고한 일화가 유명하다. 강수 · 최치원과 더불어 신라의 3대 문장가로 일컬어지고 있다.

 

60. 성해응(1760~1839)

 

조선 시대의 실학자. 호는 연경재이다. 1783년에 진사에 급제하여 1788년에 규장각 검서관이 되었다. 벼슬은 부사에 머물렀으나 영조와 정조 시대의 대표적인 실학자로서 경학에 정통했으며, 이덕무 · 유득공 · 박제가 등과 친하게 지냈다. 저서로는 <동국명신록> <주한잡사고> <동국명산기> 등이 있다.

 

61. 성혼(1535~1598)

 

조선 선조 때의 성리학자, 호는 우계 또는 묵암이고, 시호는 문간이다. 병으로 과거를 단념하고 백인걸의 제자가 되어 경학 공부에 힘썼다. 선조 초에 현감 등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중 세자의 부름을 받고 좌참찬에 올랐으나 유성룡과 함께 일본과의 화의를 주장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고향인 파주로 돌아갔다. 일찍이 이이와 친근하게 사귀었으나,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지지하여 1572년부터 6년간 이이와 ‘사단 칠정’에 대한 논쟁을 벌여 화제가 되었다. 그는 글에 뛰어났으며, 세상을 떠난 뒤에 좌의정 ㅕ슬이 내려졌다. 저서에 <우계집> <주문지결> 등이 있다.

 

62. 세조 (1417~1468)

 

조선의 제 7대 왕(재위 1455~1468년). 이름은 유이고, 시호는 혜장이다. 세종의 둘째 아들이며 문종의 아우로서 1428년에 수양 대군으로 봉해졌다. 대군 시절에 세종의 명을 받아 <석보상절>을 지었으며,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452년에 조카 단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단종을 가까이 모시던 황보인 · 김종서 등을 죽이고 아우인 안평 대군을 강화로 귀양 보낸 다음 스스로 영의정에 올랐다. 실권을 잡은 그는 단종에게 왕위를 내놓게 하여 1455년에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뒤 단종 복위를 꾀하는 여러 신하들을 처형했으나, 정치면에서는 많은 업적을 쌓았다. 집권 초기에 왕권을 강화하여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이룩하였고, 국방에도 힘써 4군을 없애고 야인을 정벌하여 서북 방면을 개척하였다. 경제 정책면에서는 과전법의 모순을 바로잡아 직전법을 실시하였으며, 농업 기술 서적을 펴내어 농업을 장려하였다. 특히 그는 불교를 숭상하여 1461년에는 간경도감을 설치, 불경과 연해본들을 간행하였고, 1465년에는 서울에 대원각사를 세웠다. 그 밖에 <역학계몽요해> <병사십장> 등을 손수 지어 널리 펴고 <국조보감> <동국통감> <경국대전> 등을 편찬하게 하였다. 능은 경기도 남양주군에 있는 광릉이다.

 

63. 세종(1397~1450)

 

조선의 제 4대 왕(재위 1418~1450년). 이름은 도, 시호는 장헌이다. 태종의 셋째 아들로 충녕 대군으로 있다가 22세 때 왕세자로 책봉되고 곧 이어 왕위에 올랐다. 1420년에 집현전을 설치하고, 청렴한 인재를 등용하여 정치에 대한 자문과 왕실의 교육을 맡아 보게 하였다. 그리고 경자자 · 갑인자 · 병자자 등의 활자를 만들게 하여 <고려사> <농사직설> <의방유취> <팔도지리지> 등의 책을 펴내었다. 또 궁중에 정음청을 두어 1443년에는 성삼문 · 신숙주 · 최항 등과 훈민정음을 창제, 1446년에 반포하였다. 한편 관습도감을 두어 박연으로 하여금 아악을 정리하게 하였다. 또 과학 기술 부문에도 관심을 가져 장영실로하여금 측우기를 만들게 하고, 궁중에 흠경각을 세워 과학 기구들을 비치하게 했다. 그 밖에 혼천의 · 해시게 · 물시계 등을 발명 제작하여 천체를 관측하고, 역서를 만들기도 하였다. 경제면에서는 전제 상정소를 두어 전제와 세제를 정비했고, 농업을 장려했다. 대외적으로는 국가의 주권 확립과 영토 확장에 힘썼는데, 북방 변경 지방을 개척하여 6진을 설치하고, 압록강 상류에는 4군을 설치하고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일본과는 제포 · 염포 · 부산포의 3포를 열어 무역을 허락하는 등 회유책을 써서 국교를 지속하였다. 능은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있는 영릉이다.

 

64. 소수림왕 (?~384)

 

고구려의 제 17대 왕(재위 371~384). 소해주류왕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구부이며, 고국원왕의 아들이다. 고국원왕이 평양에서 백제의 근초고왕과 싸우다 전사하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372년에 전진의 왕인 부견이 보낸 승려 순도가 불상과 경문을 가지고 오자,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불교가 들어오게 되었다. 또 그 해에 태학을 설립하고, 이듬해에 율령을 반포하였다. 375년에 순도를 위하여 초문사를 지었으며 또한 승려 아도를 위하여 이불란사를 지어 주지로 삼기도 하였다. 377년에는 3만 대군으로 침공해 온 백제군을 물리쳤다.

 

65. 송시열 (1607~1689)

 

조선 중기의 학자 · 문신, 호는 우암 또는 화양동주이며, 시호는 문정이다.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에게서 학문을 배운 뒤, 1633년에 생원 시험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경릉 참봉을 거쳐서 봉림 대군의 스승이 되었다. 그 뒤 효종 · 현종에게 등용되어 이조판서 · 우의정 · 좌의정에 올랐다. 서인의 거두로 있으면서 남인과 예론에 대하여 서로 다투기도 하였다. 한때 남인에게 몰렸다가 다시 정계에 나와 이름을 떨쳤으며, 서인이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자 노론의 우두머리가 되엇다. 1689년 숙종 때 왕세자 책봉에 반대 상소를 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제주도로 귀양갔다. 그 뒤 서울로 심문을 받으러 오던 도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주자학의 대가로서 이이의 학통을 이어 받아 기호 학파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여 뒤에 송자(宋子)라는 성인의 칭호를 받았다. 성격이 과격하여 만흔 정적을 두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훌륭한 제자를 많이 길러냈다. 저서로는 <송자대전> <우암집> <주자대전차의> 등이 있다.

 

66. 송순 (1493~1583)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면앙정 또는 기촌이며 시호는 숙정이다. 1519년(중종 14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1547년(명종 2년)에 주문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개성부 유수를 지냈다. 1550년에 이조 장판으로 있을 대 죄인의 자식을 등용한 것이 문제가 되어 귀양살이를 했다. 그 뒤 대사헌 · 한성부 판윤 · 우참찬 등을 지냈다. 늘그막에 벼슬에서 물러나 담양에 석림 정사 면양정을 지어놓고 독서와 시조를 지으며 여생을 보냈다. 저서로는 <기촌집> <면앙집>이 있고, 작품으로는 <면앙정가> 등이 전한다.

 

67. 송상현 (1551~1592)

 

조선 중기의 지사, 호는 천곡이며, 시호는 충렬이다. 1576년에 문과 시험에 급제하여 경성 판관 등을 거쳐 종계 변무사의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임진왜란 때 동래 부사로 있었는데 동래성이 왜적이 쳐들어오자 용감히 맞서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자 조복을 입고 앉은 채로 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적장은 그의 시체를 동문 밖에 묻고, 그의 충성심을 찬양하는 시를 지었다. 세상을 떠난 뒤에 이조 판서 및 찬성 벼슬이 내려졌다.

 

68. 송준길 (1606~1672)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호는 동춘당이고ㅡ 시호는 문정이다. 어릴 때 이이 밑에서 공부하고 20세 때 김장생의 제자가 되었다. 1624년 (인조 2년)에 진사가 된 뒤 세마로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계속 학문에만 힘썼다. 1649년에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사헌부 집의에 임명되어 당시 정치를 어지럽히던 재상 김자점을 규탄하여 벼슬에서 몰아냈다. 1659년에는 병조 판서과 되어 송시열 등과 함께 노론파의 주요 인물이 되었으나, 효종이 죽자 자의 대비의 상복을 입는 문제로 윤휴 등 남인파와 싸우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는 예학에 밝았고 이이의 학설을 찬성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송시열 · 송규렴과 함께 "3송"으로 불린다. 죽은 뒤 영의정의 벼슬이 내렸다.

 

69. 송여종 (1553~1609)

 

조선 선조 때의 무신. 무예를 익혔으나 과거 시험에 여러 번 낙방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 밑에 들어가 한산도 싸움에서 공을 세웠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이 왕에게 올리는 보고문을 가지고 적진을 통과하여 행재소에 전달한 공으로 녹도 만호 벼슬에 올랐다. 1594년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그 뒤 단성 현감 · 사복시정 · 홍양 현감을 거쳐 1607년에 경상 좌도 수군우후가 되었다.

 

70. 송익필 (1534~1599)

 

조선 중기의 학자, 호는 귀봉 · 현승이고 시호는 문경이다. 서자라 하여 벼슬을 하지 못했으나 이이 · 성혼 등과 사귀며 성리학을 연구하였고, 예학에 밝았다. 시문에도 뛰어나 이산해 · 최경창 · 백광홍 · 최입 · 이순인 · 윤탁연 · 하응림 등과 함께 "8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고양의 귀봉산 기슭에서 후진 양성에 힘써 문하에서 김장생 · 김집 · 정엽 등 많은 학자가 나왔는데 김장생은 예학의 대가가 되었다. 저서로는 <귀봉집>이 있다.

 

71. 송진우 (1889~1945)

 

정치가·독립운동가, 호는 고하이며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한학과 신학문을 배웠다. 1915년에 일본 메이지 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돌아와 독립 운동에 참여하였다. 1917년에 중앙 중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교육 사업에 이바지하였다. 3·1 운동 때에는 민족 대표 48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 운동을 지도하다가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1921년에 동아 일보 사장에 취임하였으나, 일제의 압력으로 물러나 만국 기독교 청년회가 주최하는 태평양 회의에 대표로 참석하였다. 광복 후 한국 민주당을 조직하여 정부 수립을 위해 활동하다가 서울 종로구 원서동 자택에서 암살당하였다.

 

72. 송흥록 (1801~1863)

 

조선 말기의 판소리의 명창, 전북 운봉에서 태어났다. 8명창의 한 사람으로 가왕이라 불리었다. 그는 판소리의 중시조 격으로서 그의 매부인 김성옥이 새로 만들어 낸 진양조를 자신의 노래에 도입하여 완성하였으며, 소리가 웅건하고 청담한 동편조 창법을 이룩하였다. 특히 <춘향가> 중의 <옥중가>와 <변강쇠타령>  <적벽가>에 뛰어났다.

 

73. 숙종(1661~1720)

 

조선 제 19대 왕(재위 1674~1720). 이름은 순이고 시호는 현의이다. 1667년에 왕세자가 되고 1674년에 즉위하였는데, 왕위에 있는 동안 남인과 서인간의 정권 다툼이 그칠 날이 없었다. 또 희빈 장씨를 왕비에 책봉하였으며, 왕비 민씨를 폐위시키는 사건이 일어나 그에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화를 입는 등 내환이 잦았다. 그러나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왕은 대동법을 실시하여 성과를 거두었고, 토지 개혁을 완성하였으며 화폐를 만들어 널리 쓰이게 하였다. 1691년에는 노산군을 단종으로 복위시키고, 사육신에게 벼슬을 다시 내렸다. 1712년에는 백두산 정상에 정계비를 세워 국경선을 확정하였고, 군사 제도를 새로이 정비하였다. 한편 편찬 사업으로는 <선원록> <대명집례> 등을 간행하고, <대전속록>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도록 하였다. 특히 그가 왕위에 있는 동안에는 뛰어난 학자들이 많이 나와 성리학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능은 경기도 고양군에 있는 명릉이다.

 

74. 순조 (1790~1834)

 

조선의 제 23대 왕)재위 1800~1834년). 이름은 공, 호는 순재이며 정조의 둘째 아들이다. 1800년 1월에 세자로 책봉된 뒤 그 해 6월에 정조가 병으로 죽자 10세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나이가 어려 영조의 왕비인 정순 대비가 정권을 잡고, 1801년에 2백여 명의 교인을 학살한 ‘신유사옥’을 일으켰다. 1804년부터 직접 나랏일을 돌보게 된 순조는, 계속 천주교를 탄압하여 1815년에 ‘을해박해’를 일으켰고, 1827년에는 3차레에 걸친 대탄압을 강행하였다. 한편 김조순을 중심으로 안동 김씨가 권세를 잡고 어지러운 정치를 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매우 어려웠다. 그러한 틈을 타서 1811년에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고, 그 밖에도 많은 반란 사건이 일어났다. 순조는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아 조씨의 일문을 중용하여 안동 김씨의 세도를 누르려 하였으나, 세자가 일찍 죽음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능은 서울시 강남구 내곡동에 있는 인릉이다.

 

75. 순종 (1874~1926)

 

조선의 제 27대 왕(재위 1907~1910년). 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이름은 척이며 고종의 둘째 아들이다. 1875년(고종 12년)에 세자로 책봉되고, 1897년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일본의 압력으로 고종이 왕위에서 물러나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가 왕위에 오른 해에 한일 신협약이 맺어졌고, 통감부가 설치 되어 일제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그 해 8월에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한국 군대를 해산했고, 1908년에 동양 척식 회사의 설립을 허가하였다. 이듬해에는 사법권마저 빼앗기고, 군부와 법부를 폐지하였다. 1910(융희 4년)에 이른바 ‘한일 합병 조약’을 맺음으로써 조선 왕조는 27대 518년 만에 망하여 일제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순종은 일제의 압력으로 정치를 제대로 펴지 못하고 창덕궁에서 지냈다. 능은 경기도 남양주군에 있는 유릉이다.

 

76. 신규식 (1879~1922)

 

독립운동가, 호는 예관이다. 청주에서 태어나 1899년에 관립 한어 학교를 거쳐 육군 무관 학교를 나와 부위에 올랐다. 1905년에 을사조약을 죽음으로 반대하려고 자살하려다 실패하고 오른쪽 눈이 실명되었다. 그 뒤에 대한 자강회 · 대한 협회 등에서 활동하다가 중국으로 망명하여 신해혁명에 가담하였다. 1915년에 박은식 등과 대동 보국단을 조직하여 잡지 <진단>을 발간하였으며, 1919년에 임시 정부가 수립되자 법무 총장이 되었다. 1920년에는 국무 총리 겸 외무 총장이 되어 이듬해에 광둥(지금의 광저우)에 가서 신생 중화 민국 정부로부터 임시 정부를 승인받기도 했다. 1922년에 임시 정부 안에 분열이 일어나자 조국의 장래를 걱정한 나머지 단식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저서에 <한국혼> <아목루> 등이 있다. 1962년에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지금의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77. 신돈 (?~1371)

 

고려 말기의 승려. 호는 청한거사이고 법명은 편조이다. 어려서 스님이 되어 여러 곳으로 돌아다니다가 김원명의 추천으로 공민왕을 만나고부터 나랏일을 맡았다. 1365년에 진평후라는 작위를 받았다. 1366년에 전민변정도감이라는 관청을 설치하여 문란하던 토지 제도를 개혁하고, 농민의 권리 보호에 힘쓰며 국가 재정을 잘 다스렸다. 그러나 왕의 두터운 신임을 이용하여 권력을 함부로 휘둘렀으며, 1367년에는 귀족의 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도읍을 충주로 옮길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왕과 신하들의 반대로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반란을 일으키려다 탄로나 수원으로 귀양가 죽었다.

 

78. 신돌석 (?~1906)

 

구한 말의 의병장, 경북 영덕에서 태어났다. 을사조약이 맺어진 이듬해에 울진군 평해면에서 의병을 일으켜 많은 일본군을 죽임으로써 이름이 알려졋다. 일본군은 그를 체포하기 위하여 현상금을 내걸었는데, 현상금을 탐낸 고종사촌 김자성이 그를 자기 집에 불러 독한 술을 먹인 뒤 도끼로 무참하게 살해하였다. 1963년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지금의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79. 신무왕 (?~839)

 

신라 제 45대 왕. 섬은 김, 이름은 우징이며 원성왕의 증손이다. 836년에 흥덕왕이 죽고 희강왕이 왕위를 탐내자 아버지를 왕으로 추대하여 싸웠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839년(민애왕 2년) 4월에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지원을 받아 대군을 이끌고 경주로 쳐들어가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나, 그 해 7월에 병으로 죽었다. 능은 경주 제형산에 있다.

 

80. 신문왕 (?~692)

 

신라 제 31대 왕(재위 681~692년). 문무왕의 맏아들로서 이름은 정명 또는 명지이다. 682년 에 위화부령 2명을 두어 선거의 사무를 맡게 하고, 국학을 창설하여 학문을 장려하였다. 685년에는 9주를 정비하고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봉성사 · 망덕사를 창건하고, 이듬해 당나라로부터 예기 · 문장에 관한 책 50여 권을 들여왔다.

 

81. 신사임당 (1504~1551)

 

조선 중기의 여류 문인·서화가, 사임당은 호이며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자수·바느질 솜씨가 좋았으며, 특히 시와 그림에 뛰어났다. 유명한 화가인 안견의 영향을 받아 그림이 섬세하여 산수 · 포도 · 풀 · 벌레 등을 잘 그렸고, 자녀 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예술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훌륭한 어머니로서, 어진 아내로서 우리 나라 여성의 모범이 되어 존경을 받고 있다. 작품으로는 시에 <유대관령망친정> <사친>, 그림에 <산수도 > <자리도> <초충도> 등이 있다.

 

82. 신석구 (1875~1950)

 

독립 운동가. 호는 은재이다.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어려서 한학을 배우다가 크리스트 교에 입교, 협성 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가 되었다. 서울 · 개성 · 춘천 · 원산 · 남포 등지에서 종교 운동을 벌였다. 3·1  운동 때에는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 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감옥에서 나온 후에도 신사 참배와 전승 기념 예배 등을 거부하다가 여러 번 감옥에 갇혔다. 1949년에 남포에서 반동 비밀 결사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체포되어 복역하다가 6·25전쟁 때 북한 공산주의자들에게 총살당했다. 1963년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지금의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83. 신숙주 (1417~1475)

 

조선 초기의 학자·문신, 호는 보한재 · 희현당이고, 시호는 문충이다. 1439년에 문과 시험에 급제하여 집현전 부수차늘 지내면서 훈민정음 창제에 이바지하였다. 세조가 즉위하자 일등 공신이 되어 예문관 대제학으로 국가의 중요한 일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그러나 세조가 어린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았을 때 의리를 저버리고 이에 가담했다 하여 비난을 받았다. 우의정에 있으면서 북방의 야인들을 물리쳐 영의정에 올랐으며, 그 뒤 예종 · 성종 때에도 높은 벼슬에 있으면서 왕을 도왔다. 그는 뛰어난 학식과 재능으로 6대 임금을 섬기면서 <국조오례의> <세조실록> <동국정운> <영모록>을 편찬하는 등 큰 업ㅈ3ㅓㄱ을 남겼다. 저서에 시문집인 <보한재집>, 한자 음운서인 <사성통고> , 그 밖에 <해동제국기>등이 있다.

 

84. 신숭겸 (?~927)

 

고려 시대의 명장. 처음 이름은 능산이고, 시호는 장절이다. 평산 신씨의 시조로 광해주(지금의 춘천)에서 태어났다. 918년에 태봉의 기장으로 배현경 · 홍유 · 복지겸 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왕위에 앉혀 고려를 세우는 데 공이 커서 개국 벽상 공신이 되었다. 927년 태조가 공산에서 견훤의 군대에게 포위되자 이를 구출하고 죽었다. 1120년에 고려의 예종은 신숭겸과 김낙을 추모하여 <도이장가>라는 향가를 지었다.

 

85. 신위 (1769~1847)

 

조선 말기의 문신 · 시인 · 서화가, 호는 자하, 또는 경수당이다. 1799년에 문과 시험에 급제하여 도승지와 이조 · 병조 · 호조 참판을 지냈다. 그는 시 · 서 · 화에 뛰어나 3절이라 불리었으며, 후세의 시인들도 그의 작시법을 본받았다. 또한 필법과 화풍이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작품에는 <경수당전고> <신자하 시집>과, 시조 40수를 한시로 번역한 <소악부> 등이 있다.

 

86. 신윤복 (1758 ?~?)

 

조선 시대의 화가, 호는 혜원이다. 그림에 뛰어난 3원 중의 한 사람으로, 김홍도와 함께 조선의 대표적 풍속 화가로 손꼽힌다. 화원으로서 첨정 벼슬을 지냈다. 그림은 주로 농촌 마을의 서민적인 풍속을 많이 그렸으며, 특히 기생 · 무당 · 술집 등의 풍속도를 잘 그렸다. 그가 현실 인간 사회의 높은 도덕만을 중요시하던 양반 사회를 꼬집기 위한 것이었다. <주막도> <미인도> <주유도> <산수도> <단오 풍정도> <심계유목도>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87. 신익희 (1892~1956)

 

독립 운동가·정치가, 호는 혜공이다.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1910년에 한성 외국어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고,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였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내무 총장 · 법무 총장 · 문교 부장 등을 지냈다. 8·15 광복 후 귀국하여 대한 독립 촉성회 부위원장이 되고, 자유 신문 사장 · 국민 대학 학장 등을 지냈다. 1948년에 제헌 국회위원으로 야당을 이끌었으며, 1956년 대통령에 입후보하여 유세하러 가는 도중에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지금의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88. 신입 ( 1546~1592)

 

조선 선조 때의 무장 시호는 충장이다. 1567년에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을 거쳐 도총부 도사 · 진주 판관이 되었다. 1583년에는 온성 부사가 되어 북쪽 국경에 침입한 니탕개를 물리치고, 두만강을 건너가 오랑캐를 소탕하여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 삼도 도순변사가 다ㅚ어 충주탄금대에서 왜적과 싸우다 패하자, 부하 장수 김여물과 함께 강물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뒤에 영의정의 벼슬을 받았다.

 

89. 신채호 (1880~1936)

 

독립 운동가·사학자·언론인, 호는 단재, 또는 단생이다.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었으며, 20세 때에는 성균관 박사가 되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에 논설을 쓰고, 영웅전과 역사책을 저술하여 민족 정신과 독립 정신을 북돋우기에 힘썼다. 1907년에는 신민회에 가입하고 국채 보상 운동에 참가하였다. 그 뒤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상하이와 베이징에 가서 독립 운동을 했으며, 옛 고구려 땅을 답사하여 국사 연구와 저술에도 힘썼다. 1926년에 ‘동방 무정부주의자 연맹’에 가입하였다가 체포되어 10년 징역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다 세상을 떠났다. 저서에 <조선 상고사> <조선 상고 문화사> <조선사 연구초> <조선사론> <이순신전> <을지문덕전> 등이 있다.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지금의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90. 신헌 (1810~1888)

 

조선 말기의 무신·외교가, 호는 위당이고 시호는 장숙이다. 1866년 병인양요 때 총융사가 되어 강화의 임장을 수비하였다. 난이 끝난 후 좌참찬 겸 훈련대장을 지내고, 행지삼군부사 등을 거쳐 공조 판서에 올랐다. 1875년에 운요 호 사건이 일어나자 관중추부사로서 일본의 전권 대사인 구로다와 강화도 조약을 맺었다. 1882년에는 경리통리기무아문사로 전권 대관이 되어 미국의 슈펠트와 한미 수호 통상 조약을 맺고, 판삼군부사가 되었다. 그림과 글씨에도 뛰어났고, 특히 예서를 잘 썼다.

 

91. 신홍식 (1872~1937)

 

독립 운동가,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30세에 크리스트 교에 입교하였다. 1913년에 협성 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가 되어 신앙 생활과 민족 단결을 호소하였다. 3·1 운동 때에는 평양 남산현 교회 목사로서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 선언서에 서명하여 체포되었으며, 풀려난 후에도 인천 · 원주 등지에서 종교 운동과 독립 운동을 계속하였다.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지금의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92. 신후담 (1702~1761)

 

조선 시대의 학자·문신, 호는 하빈이다. 이익의 문인으로 20세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은 하지 않고 학문에만 힘썼다. 당시 서양의 학문이 중국을 통하여 들어오자 <서학변>을 지어 이를 비평하였다. 한편 소설 문학에도 관심을 가져 <속열선전> <태평유기 <금회외편> <남흥기사> 등의 한문 소설을 많이 썼다. 그 밖에도 100여 권의 저술을 남겼다.

 

93. 신흠 (1566~1628)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호는 상촌 또는 현헌이고, 시호는 문정이다. 158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감찰 · 병조 좌랑등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 양재도찰방으로 신입을 따라 조령 싸움에 참가하였다. 그 뒤 도승지 · 병조판서 · 대사헌의 벼슬을 지냈다. 선조로부터 영창 대군을 잘 보살피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벼슬에서 쫓겨나 춘천으로 귀양갔다. 1621년에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이조판서 · 우의정 · 좌의정에 올랐다.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세자를 전주에 피신시키고 돌아와 영의정에 올랐다.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고, 장유 · 이식과 함께 조선 중기 한문학의 대가로 일컫어지며, 또 글씨에도 뛰어났다. 저서로는 <상촌집> <야언구정록> <산중독언> 등이 있다.

 

94. 신흥우 (1883~1959)

 

정치가, 배재학당을 졸업한 뒤, 1896년에 서재필 · 이승만 등과 협성회를 조직, 근대화 운동을 벌였다. 그 후 미국에 가서 남캐롤라이나 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와 1911년에 배재 학당에 제 3대 교장이 되고, YMCA 간부로서 기독교를 통한 민족 운동에 나섰다. 1920년에 조선 체육회 창립 발기인으로 참가, 제 7대 조선 체육회장에 선임되었으며, 1927년에 이상재 등과 신간회를 조직하여 민족 운동을 지도했다. 광복 후 특명 전권 대사 겸 주일 대표부 대사를 지내고, 1949년에 대한 체육회장을 지냈다.

 

95. 심사정 (1707~1769)

 

조선 중기의 화가, 호는 현재이다. 일찍이 정선에게서 그림 공부를 하다가, 뒤에 중국의 남화와 북화를 종합, 새로운 화풍을 이루어 김홍도와 함께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화가가 되었다. 그는 특히 산수화와 새 · 벌레 · 짐승 등을 잘 그렸다. 작품에 <강상야박도> <하경산수도> <모란도> <맹호도> <초충도> 등이 있다.

 

96. 심의겸 (1535~1587)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손암 · 황재이다. 이황의 문인으로, 1562년에 문과에 급제한 뒤 병조 좌랑을 거쳐 부수찬 · 교리 등을 지냈다. 1572년에 김종직의 제자인 김효원이 이조 정랑으로 뽑히는 것을 반대하였는데, 이듬해에는 자기의 아우가 이조 정랑으로 추천된 것을 김효원이 반대하여 두 사람이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동인 · 서인의 붕당이 이루어졌는데,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구세력을 서인이라 하고,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젊은 선비들의 세력을 동인이라 하였다. 1584년 (선조 17년)에 부제학으로 있었으나 동인의 세력에 밀려나 물러났다.

 

97. 심정 (1471~1531)

 

조선 시대의 문신, 호는 소요정이고 시호는 문정이다. 1502년(연산군 8년)에 문과에 급제, 1506년에 중종 반정에 참가하여 정국 공신 3등으로 화천군에 봉해졌다. 그 뒤 형조 판서에 올랐다가 신진 조광조 일파의 탄핵으로 벼슬에서 쫓겨나자 이에 원한을 품고 남곤 · 홍경주 등과 기묘사화를 일으켜 젊은 선비들을 모조리 죽였다. 1527년에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되었으나 김안로의 탄핵으로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

 

98. 심충겸 (1545~1594)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사양당이고 시호는 충익이다. 심의겸의 동생으로 1572년(선조 5년)에 문과에 급제, 예조 좌랑을 거쳐 부제학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병조 참판으로 선조를 모시고 평양에 피란하였으며 이어 세자인 광해군을 모시고 성천까지 가면서 왜군과 싸웠다. 1594년에 병조판서에 오르고, 1604년에 호성 공신 2등으로 청림군에 봉해졌다. 글씨에 뛰었났다.

 

99. 안견 (1418~?)

 

조선 초기의 화가. 호는 현동자, 또는 주경이다. 도화원의 화원으로서 호군이라는 벼슬을 지냈다. 1447년 안평 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고 <몽유도원도>를 그렸다 하며, 이듬해에 <의장도>를 그렸다. 중국 송나라 · 원나라 시대의 그림 경향을 북종화에 가까운 수법으로 그렸는데, 특히 산수화에 뛰어나 많은 작품을 남겼다. 덕수궁 현대 미술관에 <적벽도> <다경산수도> 등이 소장되어 있고, <몽유도원도>는 일본 덴리 대학 도서관이 소장 되어 있다.

 

100. 안민영 (1816~?)

 

조선 시대의 명창, 호는 주옹이다 1876년에 스승인 박효관과 함께 조선 역대 시가집인 <가곡원류>를 편찬 간행하여 시조 문학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가곡원류> 속에는 그가 지은 시조 <영매가> 외에 26수가 실려있다. 그 밖의 저서로 <금옥총서> <주옹만필> 등이 있다.

 

101. 안방준 ( 1573~1654)

 

조선 중기의 학자, 호는 은봉 · 우산이고 시호는 문강이다. 1591년에 성혼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싸웠다. 광해군 때 이이첨이 그의 명성을 듣고 기용하려 하였으나 이를 거절하고, 우산에 들어가 후진 교육에 힘썼다. 정묘호란 · 병자호란 때에는 다시 의병을 일으켜 나가 싸웠다. 성리학에 정통했으며, 정몽주 · 조헌 등을 가장 숭배하였다. 저서에 <은봉전집>이 있다. 죽은 뒤 이조 판서의 벼슬이 내렸다.

 

102. 안병찬 (1854~1921)

 

독립 운동가 · 변호사, 호는 규당이다. 1894년(고종 31년)에 홍주 교임이 되고, 이듬해 단발령이 내리자 김한복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1905년에 법부 주사로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반대하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 후 변호사가 되어 1909년(융희 3년) 안중근 의사 재판 때 무료로 변호를 맡았다. 3·1 운동 후에는 만주로 망명, 안동현에서 대한 청년단을 조직하였으나 체포되어 평양으로 이송되었다. 그 뒤 병보석으로 감옥에서 나와 1920년에 상하이로 가서 임시 정부 법무 차장을 지냈다. 1963년에 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지금의 건국 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103. 안수길(1911~1977)

 

소설가, 호는 남석이다.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간도에서 살았다. 와세다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여 시인 김동명의 지도를 받다가, 1935년 <조선 문단>에 <적십자 병원장>이 당선 되어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1936년에 간도 일보사에 근무하며 많은 작품을 썼다. 1953년에 <제3인간형>을 발표, 아시아 자유 문학상을 받았으며, 1959년부터는 <사상계>지에 <북간도>를 발표하기 시작하여 1967년에 완성하였다. 작품으로는 <새벽> <북향보> <풍속> <배신> 등이 있다.

 

104. 안승 (?~?)

 

고구려 부흥 운동 때 추대된 왕, 안순이라고도 한다. 고구려가 망하자 부흥 운동을 벌이던 검모잠에 의하여 670년에 왕으로 추대되었다. 신라에서는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서 안승을 고구려 왕에 봉하여 금마저(지금의 익산)에 머물게 하였다. 이 때 당나라가 쳐들어오자 안승은 신라로 망명하여 보덕왕에 봉해지고, 문무왕의 누이를 아내로 맞이하였따. 683년에 소판이란 벼슬을 받고, 김씨의 성을 받아 신라의 귀족이 되었다.

 

105. 안용복 (?~?)

 

조선 숙종 때의 민간 외교가,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들어와 고기를 잡고 나무를 함부로 베어 가자, 1693년(숙종 19년)에 울릉도로 건너가 일본인들을 모두 몰아냈다. 1696년(숙종 22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스스로 울릉도 · 우도의 감세관이라 일컫고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의 땅임을 주장한 후 그들의 잘못을 엄하게 따져 끝내 사과를 받고 돌아왔다. 이듬해 일본 막부는 쓰시마 도주를 통하여 다시는 일본인이 울릉도와 독도에 침범하지 않겠다는 통지를 공식으로 보내 왔다.

 

106. 안위 (1563~?)

 

조선 선조 때의 무관, 무과 시험에 합격하여 찰방 벼슬에 있다가 이향복의 천거로 거제 현령이 되어 이순신 장군을 도와 벽파진 싸움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그 뒤 병마 절도사에 오르고 원종 공신에 봉해졌으나, 1601년에 반란을 꾀한 정여립의 조카라는 이유로 벼슬에서 쫓겨났따.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73세의 몸으로 왕을 모시기 위해서 서울로 오는 도중 화의가 성립되어 되돌아갔다.

 

107. 안익태 (1905~1965)

 

작곡가·지휘자, 평양에서 태어나 평양 숭실 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구니타치 음악 학교를 졸업하였다. 이어서 미국 필라델피아 커티스 음악 학교에서 첼로와 작곡을 공부하는 한편, 신시내티 교향 악단의 제 1첼로 연주자로 활약하였다. 1936년에는 유럽에 건너가 작곡을 공부하였고, 1937년에 우리 나라 국가인 <애국가>를 작곡하였다. 그 뒤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이름 있는 교향악단을 지휘하는 등 큰 활약을 보였으며, 결혼한 뒤에는 마드리드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가 되었다. 여러 번 귀국하였으며, 3회에 걸쳐 서울에서 국제 음악제를 개최하였다. 그는 생전에 영국의 로열 필하모닉 등 세계의 2백여 교향악단을 지휘함으로써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지휘자로 이름을 떨쳤다. 1965년에 문화 훈장 대통령장을 받았으며 에스파냐에 있던 그의 유해는 1977년에 우리 나라로 옮겨져 국립 묘지에 안장되었다. <한국 환상곡> <강천성악> 등의 작품이 있다.

 

108. 안재홍 (1891~1965)

 

정치가·독립운동가·사학자, 호는 민세이다.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나 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였다. 그 뒤 상하이로 망명하였다가 3·1 운동 당시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이어 대한 청년 외교단을 조직하여 임시 정부와 연락을 취하다가 붙잡혀 3년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1923년에 <시대일보>를 창간하여 논설 위원을 지내고, 조선 일보 사장 등을 지냈다. 1942년에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다시 1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신채호의 영향을 받아 국사를 깊이 연구하였는데, 특히 고대사 연구에 몰두, 일제 관학자들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고자 노력하였고, 이른바 "신민족주의론"을 내세우기도 하였다. 8·15 광복 후에는 건국 준비 위원회 부위원장, 국민당 당수, 한성 일보 사장, 민주 의원, 민정 장관 등을 지냈다. 1950년 평택에서 제 2대 국회 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 전쟁 때 북괴군에 납치되었다. 1989년에 대한민국 건국 훈장 대통령장이 주어졌다.

 

109. 안정복 (1712~1791)

 

조선 정조 때의 학자, 호는 순암 · 상헌 · 우이자이고 시호는 문숙이다. 학문은 깊었으나 과거에 나아가지 않았다. 추천으로 벼슬에 올라 감찰 · 세손사부 등을 거쳐 통청 대부 · 동지중추부사에 올라 광성군에 봉해졌다. 이황을 매우 숭배하여 그의 학문을 본받으려고 애썼으며, 이익의 밑에서 학문을 연구하였다. 특히 역사를 깊이 연구하여 <동사강목>을 지어 그 당시의 역사와 지리학을 비판하였으며, 카톨릭 교를 반대하였다. 저서로는 <열조통기> <순암집> <상헌수필>등이 있다.

 

110. 안중근 (1879~1910)

 

구한 말의 의사(義士). 어릴 떄의 이름은 응칠이다.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한문과 무술을 익히고, 1895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카톨릭 교에 입교하여 신학문과 프랑스 어를 배우기도 하였다.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자신이 경영하던 상점을 팔아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다가 1907년 한일 신협약이 맺어지고 우리 나라 군대가 해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였다. 1908년에 대한 의군 참모장이 되어 의병을 이끌고 함경 북도 경흥까지 쳐들어가 일본군과 싸웠다 1909년 동지 11명과 죽음으로써 구국 투쟁을 벌일 거슬 손가락을 끊어 맹세, 그 해 10월 일제 침략자의 우두머리인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의 재무상과 회담하기 위하여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사실키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우덕순 · 조도선 · 우동하 등과 이강의 도움을 받아 일인(日人)으로 가장하고 하얼빈 역으로 들어가 기차에서 내린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쏘아 죽이고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 뒤 일본 관헌에 넘겨져 6회에 걸친 재판을 받았으나, 의연한 자세로 일본의 침략 행위를 캐어 따지다가 이듬해 뤼순 감옥에서 사형당하였다. 글솜씨에 뛰어나 많은 묵서를 남겼으며 저서로 옥중에서 쓴 <동양 평화론>이 있다.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지금의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111. 안중식 ( 1861~1919)

 

조선 말기의 화가, 호는 심전이다. 도화서 화원을 거쳐 양천 · 통진 군수를 지냈다. 일찍이 조석진과 함께 관비생으로 중국에 유학하였고 1918년에는 서화협회를 조직, 회장이 되어 후진 양성에 힘썼다. 산수 · 인물 · 화조 그림에 뛰어났으며, 글도 잘 썼다. 작품으로 <천보구여도> <산수도> <군작도> 등이 있다.

 

112. 안지 ( 1377~1464)

 

조선 초기의 문신, 호는 고은이고 시호는 문정이다. 1414년에 문과에 급제, 성균관 박사 · 예문관 제학을 지냈으며, 공조 참판으로 있을 때 정인지와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어 바쳤다. 1446년에 호조 참판으로 정조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공조 판서 · 예문관 대제학 · 영중추원사를 지냈다. 성품이 청렴하였으며, 시에 뛰어나고 글을 잘 써 세종의 명으로 태종을 위해 <금자법화경>을 썼다.

 

113. 안창남(1900~1930)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 서울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휘문고보를 중퇴하였다. 1918년에 일본에 건너가 오사카 자동차 학교를 거쳐 오쿠리 비행 학교를 졸업하고 곧 그 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1921년에 비행사 시험에 합격하고 도쿄 오사카 간 우편 비행기의 조종사가 되었다. 이듬해 12월에 동아 일보사의 후원으로 고국 방문 비행을 하여 온 국민의 환영을 받았다. 그 뒤 독립 운동에 참가하기 위하여 상하이로 가서 여운형의 소개로 타이위안 비행 학교 교관이 되었으나, 중국의 혁명 전선에 참가하였다가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114. 안창호 (1878~1938)

 

독립 운동가·교육자, 호는 도산이며 평남 강서 출생이다. 11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1895년(고종 32년)에 서울에 올라와 구세 학당에 입학하였다. 1897년에 독립 협회에 가입하여 이승만 · 이상재 · 윤치호 등과 만민 공동회를 열어 피끓는 연설로 많은 청중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1899년에 고향 강서에 점진 학교(우리 나라 최초의 남녀 공학)를 세우는 한편 황무지 개척 사업을 벌였고 1902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한인 공동 협회’를 만들어 교포들의 생활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귀국하여 1907년 이갑 · 양기탁 · 신채호 등과 함께 비밀 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하고,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발행하는 등 독립 운동을 벌였다. 또 평양에 대성 학교, 정주에 오산 학교를 세우고 청년 학우회를 조직하여 민족의 지도적 인재를 양성하였다. 1913년에 다시 미국으로 가서 홍사단을 조직했으며, 3·1 운동때에는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 정부의 내무 총장 · 국무 총리 서리 · 노동 총장 등을 지냈다. 그 뒤 독립 운동의 근거지가 될 이상촌 건설에 뜻을 두고 이를 추진하다가, 윤봉길 의사의 거사 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2년 6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1937년에 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병보석으로 입원 치료를 받던 중 세상을 떠났다. 그는 평생을 오직 나라와 겨레를 위해 바쳤는데, 그가 부르짖었던 홍사단 정신(무실·역행·충의·용감)은 오늘날까지도 큰 교훈을 주고 있다.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지금의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115. 안축 (1287~1348)

 

고려 말기의 문신, 호는 근재이고 시호는 문정이다. 문과에 급제한 뒤 사헌규정과 단양부 주부를 지냈다. 1324년(충숙왕 11년)에 원나라 제과에 급제, 요양로 개주 찬판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고려에 돌아와서 충혜왕 때 강릉도 안렴사가 되었다. 이 때 <관동와주>를 저술하였다. 후에 민지가 엮은 <편년강목>을 이제현 등과 함께 고쳐 편찬하였으며, 충렬 · 충선 · 충숙 3왕조의 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또한 경기체가인 <관동별곡> <죽계별곡>을 남겨 이름을 떨쳤다.

 

116. 안평대군 (1418~1453)

 

조선 세종의 셋째 아들, 이름은 용이고 호는 비해당 · 낭각거사 · 매죽헌이며 시호는 장소이다. 1428년 안평 대군에 봉해졌고, 1430년에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쌓았다. 서문 · 서화 · 가야금 등에 능했고, 특히 글에 뛰어나 그 무렵의 명필로 손꼽힌다. 수양 대군에 의해 김종서 등이 화를 입을 때 강화도로 귀양 갔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 <세종 영릉 신도비>와 <청원 부원군 심온 묘표>에 그의 글씨가 전한다.

 

117. 안향 (1243~1306)

 

고려 충렬왕 때의 문신·학자, 호는 회헌이고 시호는 문성이다. 1260년에 문과에 급제한 뒤 교서랑·감찰어사가 되었다. 상주 판관으로 있을 때 민중을 현혹시키는 무당을 엄중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하였다. 그 뒤 원나라에 건너가 그 곳의 교육 기관을 두루 살피고, 주자학의 서적을 가져다 연구하여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주자학을 전하였다. 또한 국학 대성전을 짓고, ‘섬학전’이라는 육영 재단을 설치하였으며, 많은 서적을 사들여 교육 자료를 갖추게 함으로써 교육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가 죽은 뒤 1318년(충숙왕 5년)에 왕은 원나라 화가에게 그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는데, 그의 초상화는 이제현의 초상화와 함께 가장 오래 된 고려 시대의 것으로 귀중한 가치를 가진다.

 

118. 애왕 (?~?)

 

발해의 마지막왕(재위 901~926년). 이름은 대인선이며, 경왕의 아들이다. 926년에 거란의 예뤼 아바오지가 대군을 이끌고 발해에 침입하여 부여부를 점령하고 이어 수도인 홀한성(동경성)을 공격하자 항복하고 말았다. 애왕은 포로로 잡혀 가고, 이로써 발해는 15대 228년 만에 멸망하였다. 그의 아들 대광현과 장군 신덕 등은 고려에 귀순하였다.

 

119. 양규 (?~1011)

 

고려 시대의 무신, 목종 때 등용되었고, 도순검사가 되어 1010년(현종 1년)에 거란군에게 포위된 홍화진(지금의 의주)을 끝까지 지켰다. 그 뒤 거란군이 물러갈 때 귀주 방면에서 지키고 있다가 기습 공격하여 적 550여 명을 죽이고, 그들에게 잡혀 가던 백성 3만여 명을 구해 내었다. 이어 다시 적의 선봉을 애전에서 기습하여 적 1000여 명을 죽이는 전과를 세웠으나, 갑자기 쳐들어오는 성종의 군대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뒤에 공부상서와 삼한후벽상공신의 벼슬이 내렸다.

 

120. 양기탁(1871~1938)

 

독립 운동가, 어릴때 이름은 의종, 호는 운강이며 평양에서 태어났다. 1904년에 영국인 베셀과 영자 신문(코리아 타임스)를 발간하고, 이듬해 국한문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여 주필로 있으면서 국민들에게 항일 사상을 심어 주었다. 1907년에 안창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여 민족 운동에 앞장섰으며 1911년에는 ‘105인 사건’으로 4년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 1920년에는 <동아일보>의 고문에 취임하는 한편, 화흥 중학교 · 화성 의숙 · 동명 의숙을 세워 혁명 간부 양성에 힘썼고, 잡지 <전후>와 <대동민보>를 발행하여 만주에 사는 교포들에게 독립 정신을 심어 주는 데 힘을 기울였다. 1926년에는 고려 혁명당을 조직하여 위원장이 되었다. 그 뒤 1930년에 상하이 임시 정부 국무령에 추대되었으나 사퇴하고, 항일 운동을 계속하다가 장쑤 성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지금의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121. 양녕대군 (1394~1462)

 

조선 태종의 맏아들이며, 세종의 형. 이름은 "제"이고, 시호는 강정이다. 1404년 태종 4년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품행이 좋지 못하다 하여 폐위되어 양녕 대군으로 봉해지고 그 대신 아우 충녕 대군(뒤의 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 때부터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풍류객들과 어울리다 일생을 마쳤다. 세종은 항상 그에게 따뜻한 배려를 아끼지 않아 형제의 우의가 매우 두터웠다. 시에 뛰어나고 글을 잘 썼으며, 서울 남대문의 편액(글씨나 그림을 그린 액자) ‘숭례문’은 그의 글씨라고 한다.

 

122. 양만춘 (?~?)

 

고구려 때의 장군, 645년(보장왕 4년) 당나라 태종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에 쳐들어왔을 때, 안시성 성주로 있던 그는 60여일 동안 용감히 싸워 적을 물리쳐 승리하였다고 전한다. 야사에만 전해지는 인물이다.

 

123. 양사언 (1517~1584)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봉래 · 완구 · 창해이다. 1546년에 문과 시험에 급제하고 함흥부사 · 강릉부사 · 철원군수를 지냈다. 그는 자연을 사랑하여 희양 군수로 있을때 금강산에 자주 올랐는데, 그 때 만폭동 바위에 "봉래풍악원화동천"이라 새긴 그의 글씨가 아직도 남아 있다. 시에 뛰어났으며, 특히 초서와 큰 글자를 잘 써서 안평 대군 · 김구 · 한호와 함께 조선 전기의 4대 명필로 불렸다. 저서에 <봉래시집>이 있고, 작품 중에 널리 알려진 시조 ‘ 태산이 높다 하디 하늘 아래 뫼이로다.‥‥’ 등이 전한다.

 

124. 양성지(1415~1482)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 호는 눌재, 또는 송파이며, 시호는 문양이다. 1441년(세종 23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 주부를 거쳐 집현전에 들어가 부수찬 · 교리 등을 지냈다. 또한 춘추관 기주관 겸 고려사 수사관으로 있으면서 <고려사> 편찬에 참여하였다. 1453년(단종 1년)에 왕의 명령으로 <조선도도> <팔도각도>를 만들었으며, 이듬해에는 <황극치평도>를 지었다. 1455년(세조 1년)에는 <팔도지리지>를 편찬하고, 1463년에 <동국지도>를 만들었다. 이조 판서에 오른후 <오륜록>을 지어 바쳤으며, <해동성씨록> <세조실록> <예종실록> <동국여지승람> 등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학문이 깊고 문장에 뛰어나 세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저서로 <눌재집> <시정기> <삼강사략> 등이 있다.

 

125. 양전백 (1869~1923)

 

독립 운동가, 호는 격헌이다. 평북 의주에서 태어나 어릴적에는 한학을 배우고, 26세 때 크리스트 교에 들어가서 1897년에 예수교 장로회 전도사가 되었다. 1907년에는 평양 신학교를 졸업하여 우리 나라 최초의 목사의 한 사람으로 선천에서 전도와 교육 사업에 힘썼다. 1911년에 105인 사건으로 2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1916년에는 예수교 장로회 총회장이 되었고, 3·1 운동 때에는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 선언서에 서명하여 2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평생을 전도 사업과 독립 운동으로 보냈다.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지금의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126. 양주동 (1903~1977)

 

시인·국문학자·영문학자, 호는 무애이다.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나 황해도 장연에서 자랐다. 5~6년간 한학 공부를 하다가 3·1 운동 이듬해 서울로 올라와 중동 중학 고등 속성과에 입학하여 1년간에 중학 전과정을 마치고 이듬해 일본 와세다 대학 예과 불문학과에 입학, 1925년에 그 대학 영문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재학중에 시 동인지 <금성>을 발간하여, 시 <기몽> <영원한 비밀>을 발표했다. 졸업 후 24세에 평양의 숭실 전문 학교 교수가 되었으며, <향가 해독>을 발표하여 학계에 큰 자극을 주었고, 마침내 <조선 고가 연구>를 간행하였다. 광복 후에는 동국 대학교와 연세 대학교를 비롯하여 여러 대학교 교수를 지냈고, 1954년 학술원 종신 회원에 선임되었다. 1962년에 문화 훈장 대통령장, 1970년에는 대한민국 구민 훈장 무궁화장 등을 받았다. 저서로 <국학 연구 논고> <여요전주>, 시집에 <조선의 맥박>, 번역서에 <T.S.엘리엇 전집> <영시 백선> 등이 있다.

 

127. 양지 (?~?)

 

신라 선덕 여왕 때의 승려, 경주 부근의 석장사에 있었다. 조각 · 글씨에 능하여 여러 절의 불상과 팔부신장 등을 만들고 현관을 썼는데, 영묘사의 장육 삼존상, 천왕상과 천왕사 탑 아래에 있는 팔부신장 등이 유명하다. 영묘사 · 범림사 두 절의 현관 글씨도 써서 남겼다.

 

128. 양한묵 (1862~1919)

 

항일 독립 운동가, 호는 지강이며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다. 1894년에 탁지부 주사가 되어 능주에서 세무 관리로 있다가 그만두고, 중국 베이징 등지로 여행하였다. 1902년에 손병희 · 오세창 등의 권유로 동학에 입교하여 진보회를 조직하고 민족 운동을 지도했다. 1905년에 이용구 등이 친일파가 되자 이에 대항하여 이준 · 윤효정과 헌정 연구회를 조직했으며, 이듬해에 손병희 · 권동진 등과 천도교 중앙 총부를 결성했다. 1919년 3·1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 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지금의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129. 양헌수 (1816~1888)

 

조선 말기의 무신. 시호는 충장이다. 이항로의 제자로 1848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철종 때 참상에 올랐다.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 정족산에 침입한 프랑스 함대를 쳐부수고, 많은 무기를 빼앗은 공으로 한성부 좌윤에 특진되었다. 그 뒤 신임을 얻어 어영대장 · 포도대장 등을 거쳐 형조판서 · 공조판서를 지냈다.

 

130. 어몽룡 (1564~?)

 

조선 중기의 화가. 호는 설곡이다. 1604년(선조 37년)에 진천 현감이 되고 전의 현감을 지냈다. 그림은 매화를 잘 그렸는데, 황집중의 포도, 이정의 대와 함께 삼절로 불리었다. 작품에 <흑매도>가 있다.

 

131. 어숙권 (?~?)

 

조선 중기의 학자, 호는 야족당이다. 최세진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한때 아이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문과 중국어에 능하여 1525년(중종 20년)에 이문학관이 되었다. 시평 · 시론에도 뛰어났다. 편저에 <패관잡기> <고사촬요> 등이 있다.

 

132. 어윤중 (1848~1896)

 

조선 말기의 문신, 호는 일재이고 시호는 충숙이다. 186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 · 군수 · 전라도 암행어사 등의 벼슬을 지냈다. 1881년에 신사 유람단의 한 사람으로 일본의 문물 제도를 시찰한 후, 청나라로 가서 텐진에서 이홍장을 만나고 왔다. 1893년에 양호 순무사가 되어 보은의 동학 교도들을 해산시키고, 이듬해 김홍집 내각의 탁지부 대신이 되었다. 1896년 아관파천 때 고향으로 피신해 가다가 용인에서 잡혀 죽었다. 1910년에 규장각 대제학의 벼슬이 내렸다. 저서로는 <종정연표> 등을 남겼다.

 

133. 어재순 (?~1871)

 

조선 고종 떄의 무장, 힘이 무척 세었으며, 형 재연을 따라 군직에 종사했다.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도 광성진에서 미국 군인과 용감히 싸우다 전사했다. 뒤에 이조참의의 벼슬이 내렸다.

 

134. 어재연 (?~1871)

 

조선 말기의 무장, 시호는 충장이다. 1866(고종 3년)에 공충도 병마절도사와 회령부사의 벼슬을 지냈고, 그 해 병인양요가 일어나 우선봉으로 강화도의 광성진을 지켰다. 1871년에 신미양요가 일어나자 다시 광성진을 지키며 미국 군인과 싸우다 아우 재순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했다. 뒤에 병조판서 겸 지삼군부사의 벼슬을 내렸다.

 

135. 여옥 (?~?)

 

고조선 떄의 여류 음악가,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뱃사공인 곽리자고의 아내로서 악곡<공후인>을 지었다고 한다. 한치윤의 <해동역사>에는, ‘어느 날 곽리자고가 물가에 이르자 한 미친 늙은이가 물로 뛰어들었다. 뒤이어 달려온 미친이의 아내가 말릴 겨를도 없이 그는 빠져 죽고 말았다. 그러자 그 여인은 슬피 울며<공무도허가>를 부르고 남편을 따라 물에 빠져 죽었다. 곽리자고가 집에 돌아와 아내 여옥에게 그 이야기를 하니 여옥이 슬퍼하며 그 아내가 불렀다는 노래를 공후(옛 현악기)에 얹어 불렀다.’는 설화가 실려 전한다.

 

136. 여운형 (1885~1947)

 

독립 운동가·정치가, 호는 몽양이다.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나 우무 학당을 졸업하고 1907년 고향집에 광동 학교를 세워 청소년을 가르쳤다. 1908년 기독교에 입교한 뒤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4년에 중국으로 건너가 난징 진링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다가 상하이로 가서 1919년에 신한 청년당을 조직하고, 그 해 상하이에 임시 정부가 조직되자 임시 의정원 의원이 되었다. 광복 후에는 안재홍 등과 함께 건국 준비 위원회를 조직하고 정치 활동을 활발히 벌였으나, 중간 좌익 세력을 규합하던 중 1947년에 암살당하였다.

 

137. 여운홍 (1891~1973)

 

정치가,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나 1918년에 미국 오하이오 주 우스터 대학을 졸업하였다. 1919년에 상하이 임시 정부에 가담하여 의정원 의원이 되었고, 그 해 파리 평화 회의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광복이 되자 사민당을 창당하여 당수에 취임하였다. 그 뒤 입법 의원에 뽑히고, 민의원 · 참의원을 거쳐 1963년에 공화당 고문이 되었다. 저서 <영문법> <몽양 여운형> 등이 있다.

 

138. 역도산 (1925~1963)

 

프로 레슬링 선수, 본래 이름은 김광호이다. 함남에서 태어나 1939년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역도사니라는 이름으로 씨름을 시작하였다. 1951년에 세계적인 프로 레슬링 선수 보비 브란스가 일본에 원정 온 때를 기회로 레슬링으로 전향하여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강인한 체력과 우수한 태권도 실력으로 세계의 강적들을 차례로 꺾었으며, 1958년에는 세계 선수권자인 루테스를 물리쳐 헤비급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 그 뒤 막대한 재산을 모아 일본 굴지의 부호가 되어 여러 곳에 체육관을 세워 후배를 기르기에 힘쓰다가 1963년에 도쿄에서 일본 청년의 칼레 찔려 복막염으로 목숨을 잃었다.

 

139. 연개소문 (?~665)

 

고구려 말기의 재상·장군, 천개소문이라고도 한다. 15세 때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부 대인(부족장)이 되었다. 642년에 당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북방에 천리 장성을 쌓았다. 그 해 대인들이 자신을 죽이려는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대인들과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추대한 뒤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정권을 잡았다. 그는 백제와 힘을 합쳐 신라의 당항성을 빼앗고, 신라와 화해하기를 권고하는 당나라 태종의 요구를 들어 주지 않았다. 이에 격분한 당 태종이 645년에 17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안시성에서 이를 맞아 물리쳤으며, 그 뒤에도 4차례나 그들의 침입을 막아내었다. 한편 643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도쿄의 도사와 노자의 <도덕경>을 들여오게 하는 등 문화적으로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그의 아들들이 세력 다툼을 벌여서 고구려가 멸망하는 원인이 되었다.

 

140. 연산군 (1476~1506)

 

조선의 제 10대 왕(재위 1494~1506), 이름은 융이며, 성종의 맏아들이다. 1494년에 왕위에 올랐으나 점차 사치한 생활과 포악한 정치로 기울어져, 마침내 1498년에 사초를 문제삼아 김종직 등 많은 신진 선비들을 죽이는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1504년에는 어머니인 폐비 윤씨가 성종의 후궁인 정씨 · 엄씨의 모함으로 내쫓겨 죽은 사실을 알고는 손수 두 후궁을 죽이는 한편, 김굉필 등의 신하들을 살해하는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또 자신의 난폭한 행동을 비방하는 언문(한글) 투서가 있자 한글 교습을 중단시키고, 언문 구결을 모조리 거두어 불태웠다. 이에 참다못한 성희안 · 박원종 등이 1506년에 군사를 일으켜 왕을 폐위시키고,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 대군(중종)을 왕위에 앉히었다. 이를 중종 반정이라고 한다. 이로써 그는 폐왕이 되어 강화 교동으로 쫓겨나고, 연산군으로 강봉되어 그 해에 병으로 죽었다.

 

141. 연정토(?~?)

 

고구려 말기의 대신, 연개소문의 동생이다. 665년(보장왕 24년)에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아들 3형제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 안팎의 형세가 불리함을 깨닫고, 666년에 12성의 고구려 백성들을 데리고 신라에 항복하였다. 신라 문무왕으로부터 생활 보장을 받고 도성 주변에서 살다가 668년 사신으로 당나라에 건너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142. 염상섭 (1897~1963)

 

소설가, 본래 이름은 상섭이고, 호는 횡보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보성 고보를 거쳐 일본 게이오 대학 문학부를 중퇴한 뒤, 1920년에 김억 · 남궁벽 · 오상순 등과<폐허> 동인으로 참가,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1921년에 <개벽>지에 그의 대표작인 <표번실의 청개구리>를 발표하고, 그 뒤 <시대일보>와 <매일신보> 기자로 있으면서 창작 활동을 계속하였다. 8·15 광복 후에는 <경향신문> 편집국장, 6·25 전쟁 때에는 해군 소령으로 정훈국에 복무하였고, 1953년에 서울 특별시 문화상을 받았다. 1955년에는 서라벌 예술 대학 학장을 지냈으며, 1962년에 3·1 문학상 예술 부문 본상을 받았다. 그는 한국 근대 문학 운동의 중심 인물로 자연주의 및 사실주의를 표방한 소설을 많이 썼다. 작품에 <만세전> <삼대> <임종> <짖지 않는 개> <두 파산> 등이 있다.

 

143. 영규 (?~1592)

 

조선 중기의 승병장, 호는 기허이며 속성은 박씨이다. 휴정 대사의 가장 아끼는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공주 청련암에서 도를 닦으로 무예를 익혔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백명의 승병을 모아 의병장 조헌과 함께 청주를 되찾고, 이어 금산에 이르러 왜군과의 격전 끝에 7백여 명의 의사(義士)와 더불어 순국하였다. 금산의 칠백 의총에 묻혔다.

 

144. 영류왕 (?~642)

 

고구려의 제 27대 왕(재위 618~642). 이름은 건무이며 영양왕의 이복 동생이다. 왕위에 오르자 당나라와 화친을 맺고 수양제의 고구려 침공 때 포로가 된 한인과 중국에 잡혀 있는 고구려 사람들을 교환하였다. 624년에 당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고조로부터 고구려왕에 봉해졌다. 631년에 동북쪽의 부여성에서 동남쪽 바다에 이르는 천리 장성의 축조를 시작하였는데, 연개소문에게 공사의 감독을 맡겼다가 그의 반역으로 642년에 살해되었다.

 

145. 영양왕 (?~618)

 

고구려 제 26대 왕(재위 590~618년). 이름은 원(元), 또는 대원이다, 왕위에 오르자 수나라의 침략을 미리 막기 위하여 수나라와 화친을 꾀하다가, 598년에 말갈의 군사를 이끌고 요서를 공격했다. 이에 수나라 문제가 30만 대군으로 고구려에 쳐들어오자 이를 물리쳤다. 600년에는 태학 박사 이문진에게 전에 편찬된 <유기> 1백 권을 다시 정리하여 <신집> 5권을 만들게 하였다. 612년에 수나라 양제가 수륙 대군으로 고구려에 다시 쳐들어왔으나 을지문덕 장군을 시켜 살수에서 크게 무찔렀다.

 

146. 영조 (1694~1776)

 

조선 제 21대 왕( 재위 1724~1776). 숙종의 넷째 아들로 이름은 금이고 호는 양성헌이다. 1699년에 연잉군에 봉해졌다가 이복 형인 경종에게 아들이 없자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왕위에 오르자 붕당간의 정권 다툼을 없애기 위하여 탕평책을 쓰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였다. 한편 가혹한 형벌을 없애고 인권을 존중하였으며, 신문고를 부활하여 백성들이 억울함을 직접 알리도록 하였다 또한 사치와 낭비 생활을 고치고, 농업을 장려하여 백성들의 생활 안정에 힘쓰는 한편, 균역법을 실시하여 세금을 공평하게 거두도록 하고, 군사 훈련과 총을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 학문에도 힘써 <속대전> <속오례의> <해동악장> <동국문헌비고> 등의 많은 책을 편찬하게 하였다. 재위 기간중에 이인좌의 난과 사도 세자의 비극도 있었으나, 사회 · 경제 · 문화 · 풍속 등 각 방면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의 원릉이다.

 

147. 영창대군(1606~1614)

 

조선 제 14대 왕 선조의 아들, 선조의 14명의 아들 중 정비인 인목왕후가 나흔 유일한 아들이다. 왕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영창대군은 이미 세자가 되어 있던 광해군 대신 세자가 될 가능성이 많았으나 선조가 갑자기 죽어 뜻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영창대군은 왕위를 위협하는 인물이라 하여 강화에 귀양가게 되었고, 이듬해인 1614년 드디어 강화 부사 정항에 의해 참혹하게 죽었다.

 

148. 예종 (1450~1469)

 

조선 제 8대 왕(재위 1468~1469). 이름은 광이고 시호는 양도이다. 1457년(세조 3년)에 왕세자에 봉해졌으며, 1468년에 즉위했으나 재위 13개월 만에 죽었다. 재위 중 직전 수조법을 재정하여 둔전을 백성들이 경작하도록 하였고, 세조 때부터 시작한 <경국대전>의 편찬에 힘썼다. 능은 경기도 고양군의 창릉이다.

 

149. 오경석 (1831~1879)

 

조선 말기의 통역관·서화가, 호는 역매 또는 진재이다. 3·1 운동 때 33인 중의 한 사람인 오세창의 아버지이다. 서울의 중인 출신으로 통역관이 되어 청나라에 왕래하면서 신학문에 눈을 떠, <해국도지> <영환지략> 등의 책을 들여와 친구인 유대치에게 읽게 하였다. 또한 김옥균  · 박영효 · 홍영식 등의 젊은 정치인들에게 개화 사상을 불어넣었으며, 1876년 박규수와 함께 개국을 주장했다. 한편 금석학에 대한 관심도 커서 역대 중국의 금석문을 많이 모아, 김정희 이후 최대의 금석학자로 꼽힌다.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났다. 편지에 <삼한금석록>이 있다.

 

150. 오긍선(1878~1963)

 

의학자·교육가·사회 사업가, 호는 해관이다.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1901년에 배재 학당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1909년에 루이스빌 의과 대학 졸업과 동시에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해 귀국하여 군산 아소교 병원 원장에 취임하였고, 1916년에 일본에 건너가 도쿄 제국 대학에서 피부과를 연구하고 돌아왔다. 1919년에 경성 보육원을 세웠으며, 1929년에 세브란스 의학 전문 학교 학감을 거쳐 부교장으로 구미 시찰을 하였다. 1931년에 경성 양로원을 설립하고, 이후 사회 사업에 힘써 1952년에는 한국 사회 사업 연합회의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지금의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151. 오기호 (?~?)

 

독립 운동가, 1905년에 나인영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천황 및 이토 히로부미 등에게 한국의 독립과 통감 정치의 학정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내는 등 국권 회복에 힘썼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귀국하여 이완용 등 을사 5적을 암살하기 위한 결사대를 조직하고, 자신은 박제순을 맡았으나 실패하였다. 동지들이 체포되자 자수하여 5년형의 옥살이를 하다가 병으로 석방되었다.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단장(지금의 건국 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152. 오달제(1609~1637)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추담이며, 3학사(병자호란 때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한 세 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1634년(인조 12년)에 문과에 급제한 뒤 1635년에 정언 · 지평이 되고, 이듬해에 수찬을 거쳐 부교리가 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들어가 청나라의 화의를 적극 반대하였다. 인조가 청군에 항복한 뒤 적진에 보내졌으나, 적의 심문에 끝까지 굽히지 않아 윤집 · 홍익환과 함께 피살되었다. 뒤에 영의정의 벼슬이 내렸다. 저서로는 ㅡ충렬공유고>가 있다.

 

153. 오상순 (1894~1963)

 

시인, 호는 공초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경신 학교를 거쳐 일본 도시샤 대학 종교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920년에 김억 · 남궁벽 · 염상섭 · 황석우 등과 함께 <폐허> 동인으로 문단에 나와 초창기 시단의 선구자가 되었고, 이어 <아시아의 마지막 풍경> 등의 장시를 발표하였다. 그의 시는 처음에는 동양적 허무의 사상이 짙게 깔려 있었으나 점차 종교인다운 의자가 나타났다. 1924년에 보성 고보 교사, 1930년에 불교 중앙 학림 교수를 지냈으나 대부분의 세월을 방랑과 참선, 고독으로 보냈다. 1954년에 예술원 종신 회원에 선출되었고, 1956년에 예술원상, 1962년에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다. 주요 작품으로 <방랑의 마음> <해바라기> 등이 있다.

 

154. 오세창 (1864~1953)

 

독립 운동가·언론인·서예가, 호는 위창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1886년에 박문국 주사로 공직 생활에 첫발을 내딛고, <한성순보> 기자를 겸하고 있었다. 1902년에 ‘개화당’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하여 손병희 · 양한묵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하였다. 5년 후에 귀국하여 만세보사와 대한 민보사 사장이 되었다. 1919년 3·1 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후 3년간 옥고를 치렀다. 8·15 광복 후에는 서울 신문사의 명예 사장,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 회장, 전국 애국 단체 총연합회장 등을 지냈다. 글씨는 특히 전서와 예서에 뛰어났으며, 서화 감식에 조예가 깊었다.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지금의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155. 오영수 (1914~1980)

 

소설가, 호는 월주이다. 경남 울주에서 태어나 일본의 도교 국민 예술원에서 공부하였다. 8·15 광복 후 귀국하여 교사로 있으면서 시를 쓰다가, 1949년에 단편 소설 <남이와 엿장수>를 발표하면서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1950년 <서울신문>에 <머루>가 당선되고, 이어 <갯마을> <명암> <메아리> 등 많은 작품을 썼다. 서민 생활의 기쁨과 슬픔을 다룬 그의 작품 세계는 현대 사회에서 잃어 가고 있는 인간성 회복을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1959년에 아시아 자유 문학상을 받았다. 작품집으로 <오영수 전집> 5권이 있다.

 

156. 오영진 (1916~1974)

 

극작가, 호는 우천이다. 평양에서 태어나 경성 제대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일본에 건너가 영화를 연구하였다. 광복 후 평양에서 조만식 등과 조선 민주당 창당에 참여했으나 공산당의 박해를 피하여 월남, 6·25 전쟁 때 피란지인 부산에서 월남 문인들로 북한 문총을 조직하였다. 그 후 잡지 <문학 예술>을 발간하는 한편, 출판사 중앙 문화사를 설립하는 등 폭넓은 문화 사업을 벌였다. 1942년에는 <배뱅이굿> <맹진사댁 경사>를 발표하여 향토적인 소재에 한국적인 해학을 담는 데 성공하였다. 그 밖에도 많은 시나리오와 방송극이 있다.

 

157. 오천석 (1901~1987)

 

교육학자, 평남 강서에서 태어나 1925년에 미국 코널 대학, 1927년에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을 졸업하고, 1931년에 컬럼비아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2년에 보성 전문 학교 교수가 되었고, 그 후 이화 여대 대학원장, 대한 교육 연합회 회장 등을 거쳐 1960년에 문교부 장관이 되었다. 1976년에는 학술원 회원에 선출되었다. 저서로 <교육 사상 전집> 전 10권이 있다.

 

158. 오화영 ( 1880~?)

 

독립 운동가, 호는 국사이며, 이름을 하영이라고도 부른다. 서울에서 태어나 18세 때 만주로 가서 감리교 신학 전문 학교를 졸업하고, 원산 감리 교회 목사 · 원산 광성 소학교 부교장 등을 지냈다. 1919년 3·1 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 선언서에 서명하여 2년 6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그 후 감옥에서 풀려나 신앙 부흥 운동을 하며, 신간회 간부와 중앙 기독교 청년회 간사 등을 지냈다. 8·15 광복 후 조선 민족당 당수와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1950년에 서울 종로구에서 제 2대 민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 전쟁 때 납북되었다. 1989년에 대한민국 건국 훈장 대통령장이 주어졌다.

 

159. 옥보고 (?~?)

 

신라 경덕왕 때의 거문고의 대가. <삼국사기>에 따르면, 지리산에 들어가 50년 동안 거문고 기법을 닦고, 새로운 거문고 가락 30곡을 지었으며, 속명득에게 그 기법을 전해 주었다고 한다. 금오산의 금송정은 그가 거문고를 타던 곳이라 전한다.

 

160. 온달 (?~590)

 

고구려 평원왕 때의 장수, 몹시 가난하여 밥을 빌어다가 어머니를 봉양하였고, 얼굴이 못생겨 사람들에게 ‘바보 온달’로 불리었다. 그러나 뒤에 왕의 반대를 물리치고 그를 찾아온 평강 공주와 결혼한 뒤 글과 무술을 배우고 익혔다. 그 후 중국 후주(後周)의 무제가 고구려에 쳐들어오자, 이를 무찔러 큰 공을 세워 대형(大兄)의 벼슬에 올랐다. 590년(영양왕 1년)에 온달은 신라에 빼앗긴 한강 이북의 땅을 되찾으려고 자원하여 싸움터에 나갔다가 아차산성(서울 광나루 북쪽)에서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161. 온조왕 (?~28)

 

백제의 시조(재위 기원전 18~기원후 28년).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의 셋째 아들로 동명왕의 전처의 아들 유리가 고구려의 태자가 되자, 형인 비류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와 비류는 미추홀(지금의 인천), 온조는 위례성(지금의 경기도 광주)에 자리잡고 나라를 세웠다. 처음에 나라 이름을 십제라 했고, 비류가 죽은 뒤 나라를 합쳐 국호를 백제로 고쳤다. 왕위에 오르자 동명왕묘를 세워 나라의 안녕을 빌고, 기원전 5년에 서울을 남한산성으로 옮겼으며, 9년에는 마한을 멸망시켜 영토를 넓혔다.

 

162. 왕방연 (?~?)

 

조선 초기의 문신, 세조 때 의금부 도사로 있었다. 사육신 사건이 있은 뒤 세조의 명을 받고 강원도 영월로 귀양가는 어린 단종을 호송했다. 그가 당시의 괴로운 심정을 읊은 시조 1수가 전한다.

 

163. 왕산악 (?~?)

 

고구려 말기의 거문고의 대가. 552년(양원왕 8년)에 중국 진(晋)나라에서 들어온 칠현금을 고쳐 거문고를 만들고, 1백 여 악곡을 지어 연주할 때 현학이 날아와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에 연유하여 그가 고쳐 만든 칠현금을 현학금, 또는 현금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64. 왕인 (?~?)

 

백제 때의 학자, 근구수왕 때 일본에서 학자와 책 등을 보내 주기를 요청하자, 왕의 손자인 진손왕과 함께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거기서 그는 오진 천황의 태자에게 글을 가르쳐 일본에 한문학을 일으키게 했다. 그의 이름은 일본의 역사책에도 기록되어 있다.

 

165. 요극일 (?~?)

 

신라 시대의 서예가, 벼슬은 시중 겸 시서학사에 이르렀으며, 구양순의 필법을 터득하여 김생 다음 가는 명필로 알려졌다. <삼국사기>에는 그가 665년 (문무왕 5년)에 삼랑사의 옛 비문을 썼다는 기록이 있으나, <필원잡기> <지봉유설>에는 고려 때의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어 그가 살던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166. 우거왕 (?~기원전 108)

 

고조선의 마지막 왕, 위만의 손자이다. 왕위에 오르자 중국 한(漢)나라의 유랑민들을 받아들이는 한편, 남쪽의 진(辰)나라가 한나라에 왕래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이러한 때에 교섭차 왔던 한나라 사신 섭하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던 길에 고조선의 장수를 죽이고 그 공으로 벼슬에 오르자, 우거왕은 그를 습격하여 죽였다. 그 후 한나라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화의를 맺자고 주장하는 신하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싸움을 벌이다가, 부하인 참(參)에게 살해되었다. 이어 참이 적군에게 항복함으로써 고조선은 멸망하였다.

 

167. 우덕순 (1876~?)

 

독립 운동가, 충북 제천 출신으로 일찍이 일제의 통감 정치에 불만을 품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이름을 연준이라 바꾼 뒤 항일 운동을 폈다. 1908년에 안중근이 지휘하는 독립군에 들어가 경흥 · 회령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탈출,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 그 후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안중근 등과 이토의 암살을 결의, 모든 계획을 함께 추진하고 관성자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안중근이 거사한 후 잡혀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지금의 건국 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168. 우륵 (?~?)

 

신라 진흥왕 때의 음악가, 왕산악 · 박연과 함께 우리 나라 3대 악성의 한 사람이다. 본래 가야 사람으로 가실왕의 명을 받아 12줄의 가야금을 만들고, <상가야> <하가야> 등 12곡을 작곡하였다. 551년(진흥왕 12년)에 우륵은 제자 이문과 함께 신라로 가서 낭성에서 음악과 벗하면서 살았다. 진흥왕은 우륵의 재능과 가야금의 솜씨를 전해듣고 하림궁으로 불러 연주하게 하였다. 그의 연주에 감탄한 진흥왕은 그를 국원(지금의 충주)에 있게 하고, 계고 · 법지 · 만덕 등에게 가야금 · 노래 · 춤 등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그 뒤 진흥왕에 의하여 가야금곡이 궁중 음악으로 되었고, 하림조 · 눈죽조의 두 조가 생겨 모두 185곡이 만들어졌다. 충주 대문산 기슭의 금휴포와 탄금대는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곳이라 한다.

 

169. 우왕 (1364~1389)

 

고려 제 32대 왕(재위 1375~1388). 공민왕과 신돈의 시녀 반야와의 사이에서 태어나 신돈이 죽은 뒤 궁중에서 자랐다. 공민왕이 죽자 10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이무방 · 권중화 등으로부터 학문을 배우고, 명덕 태후의 훈계를 받으며 나랏일을 잘 처리하였다. 그러나 명덕 태후가 죽은 뒤부터 사냥 · 술 · 춤으로 방탕한 생활을 하며 정치를 잘 돌보지 않아 백성들의 신망을 잃었다. 1388년에 우왕은 왕족의 혈통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는 이성계의 주장에 따라 강릉으로 귀양가 그의 아들 창왕과 함께 살해되었다. 우왕과 창왕은 모두 폐위되었기 때문에 왕으로서의 시호를 주지 않아 폐왕 우, 폐왕 창으로 기록되었다.

 

170. 우장춘 (1898~1959)

 

농학자, 일보네서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4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고아원에서 자랐다.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1919년에 도쿄 제국 대학 농학실과를 졸업하였다. 그 뒤 1936년에 다윈의 진화론을 수정 내지는 보완한 "종(種)의 합성설"이라고 일컫는 유명한 논문으로 농학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피튜니아의 겹꽃 종자의 육종 방법을 밝힌 논문도 유명하다. 1950년에 귀국하여 한국 농업 연구소장에 취임하고 학술원 추천 회원이 되었다. 그 후 채소 우량 종자 및 무균 씨감자의 생산 체계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또 "씨 없는 수박"의 국내 실험에 성공하였으며, 벼의 1식 2수작 연구에도 히믈 기울여 세계적인 농학자로 널리 알려졌다. 1957년에 부산시 제 1회 문화상 과학 부문상, 1959년 대한민국 문화 포장을 받았다. 죽은 뒤 사회장으로 치러져 수원 농촌 진흥청 뒷산에 묻혔다.

 

171. 우탁(1263~1342)

 

고려의 학자, 호는 역동이고, 시호는 문희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영해사록으로 있을 때, 백성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귀신을 믿는 사당을 없애 버렸다. 1308년에 충선왕의 잘못을 충고하고는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 후 충숙왕이 즉위하여 그의 충선스런 뜻을 깨닫고 여러 번 벼슬을 내렸으나 받지 않고 글을 쓰며 지냈다. 그 때 원나라로부터 정주학에 관한 책이 들어왔는데, 뜻을 아는 사람이 없자, 우탁은 한 달 동안 연구하여 그 뜻을 밝혀 내고 후진을 가르쳤다. 시조 2수가 전해온다.

 

172. 원광(542~640)

 

신라 진평왕 때의 승려, 속성은 박(朴)이다. 어릴 때부터 사서 삼경을 읽고 열심히 불경을 공부하여 566년에 승려가 되었다. 578년에 중국 진(陳)나라에 가서 경전을 연구한 뒤 불경을 강의하여 이름이 높았다. 589년 수나라에 가서도 <열반경> 등의 경전을 공부하고 600년에 돌아와 새로운 불교 지식을 신라에 전하였다. 특히 화랑인 귀산과 추항 등에게 ‘세속 오계’를 지어 주었는데, 이것이 후에 신라 화랑도의 기본 이념이 되었다. 608년에는 왕명으로 수나라 군사의 도움을 부탁하는 <걸사표>를 지었다.

 

173. 원균 (?~1597)

 

조선 시대의 무신, 문과 시험에 급제한 후 조산 만호를 거쳐 경산 우도 수군 절도사를 지냈다. 1592년의 임진왜란 때 왜군이 침입하자, 전함과 무기를 버리고 1만 명의 수군을 해산시킨 뒤 전함 3척을 이끌고 왜군을 피해다녔다. 그 때 옥포만호 이운룡이 항의하자 이순신에게 도움을 청해 군사를 모아 옥포 앞바다에서 왜선 30여 척을 무찔러 공을 세우고 이어 곤양과 사천에서도 승리했다. 이듬해 이순신이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임명되자 못마땅하게 여기고 계속 이순신을 모함하여 옥에 갇히게 하고, 1597년 정유재란 때 수군 통제사가 되었다. 그러나 술과 놀이를 좋아하여 군사들의 신임을 받지 못하였으며, 칠천도 싸움에서 패하여 도망하다가 왜병에게 잡혀 죽었다. 1603년에 좌찬성의 벼슬이 내리고, 원릉군으로 봉하여졌다.

 

174. 원성왕 (?~798)

 

신라 제 38대 왕(재위 785~798). 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경신이다. 780년에 김양상과 함께 김지정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선덕왕이 왕위에 오를 때 상대등의 벼슬에 올랐다. 그 후 선덕왕이 죽고 왕의 친척인 주원이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비가 많이 내려서 오지 못하자 대신들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788년에 독서 출신과를 두어 인재들을 널리 등용하였다. 790년에는 벽골제(전라북도 김제에 있던 저수지 둑)를 다시 쌓고 농사를 장려하였다. 그가 죽은 뒤 유언에 따라 화장하여 봉덕사 남쪽에 묻혔다.

 

175. 원술 (?~?)

 

신라 시대의 무신, 김유신의 둘째 아들이다. 삼국 통일 후인 672년(문무왕 12년) 당나라가 신라를 공격해 왔을 때 용감하게 싸웠으나 불리하여 후퇴했다. 기뮤신은 왕에게 그의 아들 원술이 싸움에 패하고 살아서 돌아왔다고 하여 목을 벨 것을 청하고 그를 만나 주지 않았다. 이에 원술은 부끄러움을 못 이겨 태백산에 들어가 숨어 살다가, 675년에 당나라군이 다시 쳐들어오자 싸움터에 나아가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어머니를 찾아갔으나 그래도 용서를 받지 못하자, 세상을 비관하여 벼슬을 버리고 일생을 숨어서 살았다.

 

176. 원종(1219~1274)

 

고려 제 24대 왕(재위 1259~1274년). 이름은 식, 시호는 순효이며 고종의 맏아들이다. 1259년(고종 46년)에 왕을 대신하여 몽고에 갔다가 그 해에 고종이 세상을 떠나자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개경에 궁궐을 짓는다는 핑계로 강화에 계속 머물러 있다가 원나라로부터 개경 천도를 거듭 독촉받자 태자를 두 번씩이나 원나라로 보내어 친원 정책을 폈다. 1269년(원종 10년)에 임연에 의해 왕위를 동생인 안경공 창에게 빼앗겼으나 원나라의 도움으로 다시 왕위에 올랐다. 그 뒤 삼별초의 항쟁이 전개되자 1273년에 고려 · 원의 연합군으로 이를 진압했고, 남편 없는 여자 140명을 뽑아 원나라에 보낸 일로 백성들의 원망을 사기도 했다.

 

177. 원천석 (?~?)

 

고려 말 조선 초기의 학자, 호는 운곡이다. 고려 말기에 정치가 어지러워짐을 보고 치악산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섬기고 사는 한편, 이색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나랏일을 걱정하였다 그는 일찍이 이방원(조선의 태종)을 가르친 일이 있는데,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에게 여러 번 벼슬을 내렸으나 거절하였다. 작품에 망한 고려를 회상하며 쓴 <회고가>가 있으며, <야사> 6권을 지었으나 국사(정사)에 저촉되는 점이 많아 후손들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불태웠다고 한다.

 

178. 원측 (613~696)

 

신라 때의 승려, 이름은 문아이고 원측은 자(字)이다. 신라의 왕손으로 일찍이 중국 당나라에 가서 불법을 공부하였는데 중국어 · 범어에 능통하여 범어로 된 불경을 번역하는 등 불교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삼장 법사 현장 밑에서 공부하여 세계적인 학자가 되어 신라의 이름을 떨쳤으나, 현장의 제자인 자은이 원측의 명성을 시기하여 모략을 하고 그의 저서를 많이 없애 버렸기 때문에 현재는 몇 권밖에 전하여 오지 않는다. 저서로는 <성유식론소> <유가론소> 등이 있다.

 

179. 원호 (?~?)

 

조선 시대의 생육신의 한 사람. 호는 무항 또는 관란이고, 시호는 정간이다. 142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벼슬을 거쳐 집현전 직제학에 올랐다. 단종 때 수양 대군이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하자 벼슬을 내놓고 고향인 원조로 내려가 숨어 지냈으며, 단종이 죽자 영월에 가서 삼년상을 지냈다. 그 뒤 세조가 호조 참의에 임명하였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죽은 뒤에 그의 고향에 정문이 세워졌으며, 1782년(정조 6년)에 이조 판서의 벼슬이 내렸다.

 

180. 원효 (617~686)

 

신라 때의 승려, 속성은 설(薛), 이름은 서당이며 원효는 법명이다. 648년에 황룡사에 들어가 승려가 되어 불도를 닦았으며, 자기 집을 헐어 초개사라는 절을 세웠다. 661년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가던 길에 당항성 옛 무덤에서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으며, 사물 자체에는 정도 부정도 없다.’는 큰 깨달음을 얻고 되돌아왔다. 그 뒤 태종 무열왕의 딸 요석 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이 태어나자, 이 때부터 승복을 벗고 전국을 돌며 백성들에게 직접 불법을 전하였다. 그리고 당나라로부터 들어온 <금강 삼매경>을 왕과 고승들에게 강론하여 존경을 받았다. 말년에는 절에 들어가 참선과 저술을 하면서, 당시 불교의 여러 파의 학설을 연구 비판하여 하나의 원리로 통일된 고유한 한국 불교를 이룩하였다. 그리하여 한국 불교사상 가장 위대한 고승의 한 사람으로 존경받고 있다. 저서에는 <대혜도경종요> <법화경종요> <화엄경소> <대승기신론소> 등이 있다.

 

181. 월명사 (?~?)

 

신라 때의 승려·향가 작가, 760년(경덕왕 19년)에 해가 둘이 나타나 10일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자, 왕의 명을 받고 <도솔가>를 지어 불렀더니 해가 하나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이어 죽은 누이를 위해 <재망매가>를 지어 부름으로써 그 영혼을 달랬다. 또 피리를 잘 불어 사천왕사에 있을 때 달밤에 피리를 불면 달이 길을 밝혀 주어서 그 길을 월명리라 하고, 그의 이름도 월명이라 하였다 한다. 그의 향가 작품들이 <삼국유사>에 실려 전한다.

 

182. 월산대군 (1454~1488)

 

조선의 왕족, 이름은 정이며, 호는 풍월정, 시호는 효문이다. 덕종의 맏아들이자 세조의 손자로 사랑을 받으며 자라 7세 때  월산군에 책봉, 1471년(성종 2년)에 대군이 되었다. 아우인 성종과 우애가 깊어 정자 이름을 풍월정이라 지어 주었다. 고향의 북촌에 있는 별장에서 자연에 묻혀 평생을 지냈다. 저서에 <풍월정집>이 있다.

 

183. 유경 (1211~1298)

 

고려 시대의 공신. 시호는 문정이다. 문과 시험에 급제하여 고종 때 대사성을 지냈다. 이 때는 최씨가 무단 정치를 하던 시대여서 오랫동안 정방에 있으면서 최항의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최항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 최의가 권력을 한손에 잡고 행패가 심하자 1258년(고종 45년) 별장 김준 등과 협력하여 최의를 죽이고 정권을 왕실에 돌려 주었다. 그 공으로 좌우위 상장군에 오르고, 추성위사공신의 호를 받고, 문장에 뛰어나 신종 · 희종 · 강종 · 고종 등 4대의 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여러 번 지공거를 지냈다. 그의 문하에서는 이존비 · 안향 등 많은 인재가 나왔다.

 

184. 유관 (1346~1433)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 호는 하정이고, 시호는 문간이다. 1371년(공민왕 20년)에 문과에 급제, 전리 정랑 등을 지내고 조선 건국 후 개국 원종 공신이 되었다. 1397년(태조 6년) 대사성에 이어 태종 초에 대사헌 · 계림 부윤을 지냈다. 1409년에 예문관 대제학으로 지춘추관사를 겸직하였고, 이듬해 <태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424년에는 우의정에 올라 <고려사>를 수교(다른 것과 비교하여 고침)하여 편찬하였다. 세종 때 청백리에 뽑혀 수록되었다.

 

185. 유관순 (1904~1920)

 

3·1 운동 때의 순국 열사. 충남 천안에서 태어나 미국인 여선교사의 소개로 이화 학당에 입학하였다. 1919년에 3·1 운동이 일어나자 학생들과 함께 거리로 뛰쳐나가 만세 시위를 벌였고, 학교가 문을 닫자 고향으로 내려가 천안 · 연기 · 청주 · 진천 등의 학교와 교회를 방문하며 만세 운동에 참가할 것을 호소하였다. 드디어 1919년 음력 3월 1일(4월 2일) 정오, 유관순은 아오내 장터에 모인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앞장서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결국 출동한 일본 헌병대에 의해 체포되었고, 이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본 헌병에게 살해되었다. 그 뒤 공주 검사국으로 옮겨져 그 곳에서 영명 학교의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끌려온 오빠 관옥을 만났으며, 3년형을 선고받자 항소하여 서울로 다시 옮겨졌다. 서울의 법정에서는 재판을 받다가 일본인 검사에게 걸상을 던져 법정 모독죄가 가산되어 7년형을 선고받았다. 서대문 감옥에서 복역중 계속 독립 만세를 외쳐 동지들을 격려하다가 갖은 악형을 받고 끝내 순국했다.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지금의 건국 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186. 유광렬 (1898~1981)

 

언론인 · 정치가,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나 어려서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고, 보성 법률 상업 학교를 다니다 중퇴하였다. 소파 방정환과 알게 되어 ‘청년 구락부’를 조직하여 애국 운동을 벌였다. 1919년에 <매일신보>와 <만주일보> 기자를 지내고, 이듬해에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였다. 그 뒤 <조선일보> 사회학부장과 <매일신보> 편집국장 등을 지내며 계속 언론에 종사하였다. 1949년에 국회의장 비서실장, 1960년에는 5대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1961년에는 <한국일보> 논설 위원이 되었고, 이듬해에 문화 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저서에 <기자 반세기> 등이 있다.

 

187. 유길준 (1856~1914)

 

구한 말 정치가 · 개화 운동가, 호는 구당이며, 서울에서 태어났다 1881년(고종 18년)에 일본에 유학하고, 이어 전권 대사 민영익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보스턴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그 후 유럽 여러 곳을 돌아보고 귀국한 뒤 개화당으로 몰려 구금되어 있는 동안 <서유견문>을 썼는데, 이 책은 한글과 한문을 섞어 쓴 것으로, 우리 나라 언문 일치 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1892년에 옥에서 풀려나와 1894년 갑오개혁 때에는 외무 참의가 되고, 2년 후에 내부 대신이 되어 종두법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내각이 무너지자 일본으로 망명했다. 1907년에 순종 황제의 특사령으로 귀국한 후 홍사단에 참여하고, 교육 사업과 저술에 힘썼다. 1910년 대한제국의 훈1등 태극 대수장을 받았고, 일본 정부가 주는 남작의 작위는 거절하였다. 저서에 문법책인 <대한문전> 및 <구당시초> <노동야학독본> <평화 광복책> <이탈리아 독립전서> 등이 있다.

 

188. 유동열 (1878~?)

 

독립 운동가, 일본 육사를 나와 구한국 군대 간부가 되었다. 1906년에 군대가 해산되자 안창호를 중심으로 신민회를 조직하여 독립 운동을 폈다. 3·1 운동 후 중국에 건너가 상하이 임시 정부 참모총장으로 있으면서 광복군 양성에 힘쓰고, 1935년 난징에서 김규식 ·지청천 등과 민족 혁명당을 조직, 구국 투쟁에 전력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국군 창설에 힘쓰다가 공산군에 의하여 납북되었다. 1989년에 대한민국 건국 훈장 대통령장이 주어졌다.

 

189. 유득공 (1749~?)

 

조선 시대의 실학자, 호는 냉재 또는 냉암이다. 1779년에 이덕무 · 박제가 · 서이수 등과 규장각 검서로 뽑혔다. 그 뒤 포천과 제천 등의 군수를 지내고, 말년에는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풍천 부사를 지냈다. 복학파에 속하는 학자로서 박제가 · 이덕무 · 이서구와 더불어 한시 4대가로 일컫어졌다. 회고시와 기행문을 잘 썼다. 저서에 <냉재집> <발해고> 등이 있으며, <냉재집>에 실려 있는 한시로 된 서사시 <이십일도 회고시>가 특히 유명하다.

 

190. 유리왕(?~18)

 

고구려 제 2대 왕(재위 기원전 19~기원후 18년). 이름은 유리 · 유류 · 주류이며, 동명왕의 맏아들이다. 아버지를 찾아 부여에서 고구려에 들어와 주몽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기원전 17년에 <황조가>를 지었고, 기원전 9년에는 선비족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다. 3년에는 도읍을 국내성으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아 부여가 침공해 왔을 때 이를 물리쳤다. 14년에는 군사 2만 명으로 양맥을 치게 하고, 이어 한나라의 고구려현(현도군)을 빼앗았다.

 

191. 유몽인 (1559~1623)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어우당이고 시호는 의정이다. 1589년에 문과에 장원 급제한 후 황해도 관찰사와 도승지를 거쳐 이조 참판에 올랐다. 문장에 뛰어났으나 성격이 좋지 못해 스승인 성흔의 가르침에 따르지 않아 쫓겨나자, 이이첨 등 대북파 무리와 사귀며 지냈다. 인조가 왕위에 오른 뒤, 이괄과 내통하여 반란을 일으킬 인물이라고 하여 잡혀 살해되었다. 정조 때 혐의가 풀러 이조판서의 벼슬을 받았다. 그는 조선 중기의 설화 문학의 대가로 글씨에도 뛰어났다. 저서에 <어우야담> <어우집>이 있다.

 

192. 유성룡 (1542~1607)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호는 서애이고, 시호는 문충이다. 퇴계 이황의 제자로서 156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와 이조 좌랑을 거쳐 부제학에 올랐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로 있으면서 이순신 · 권율 등의 장군을 추천하여 나라를 구하는 데 힘썼다. 왕의 신임을 받아 영의정에 올라서 위험을 무릅쓰고 왕을 모시고 피란하였으나 반대파의 모함으로 한때 영의정에서 물러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뒤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기르고 무기를 만들어 성을 쌓는 등 국방을 철저히 하였다. 1604년에 호성 공신 2등이 되고, 풍원 부원군에 봉해졌다. 문장 · 글씨 · 덕행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특히 영남 지방 학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저서로 <서애집> <장비록> <난후잡록> 등이 있다.

 

193. 유성원 (?~1456)

 

조선 초기의 문신,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호는 낭간, 시호는 충경이다. 1444년 문과에 급제하고, 이듬해 <의방유취> 편찬에 참여했으며, 집현전 학사로 올라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50년에 문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벼슬이 사경 · 수찬 · 대교에 이르렀다. 1453년에 김종서 · 황보인 등을 죽이고 수양 대군을 도운 정란 공신들의 공을 적는 교서를 억지로 썼으나, 뒤에 성삼문 · 박팽년 등과 다시 단종을 왕위에 오르게 하는 계획을 꾸미다 실패하자 자결하였다. 영조 때 이조판서의 벼슬이 내렸다. 시조 1수가 <가곡원류>에 실려 전한다.

 

194. 유소 (?~1038)

 

고려의 공신, 정주 유씨의 시조이며, 시호는 양의이다. 현종 때 전중시어사 · 동지중추언사를 지냈다. 1029년에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서북면 판병마사로 나가 홍화진 쪽의 오래 된 성을 다시 쌓고, 위원진 · 정융진을 설치하여 영주와 평주의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였다. 1033년에 덕종의 명을 받고 압록강 어귀에서 위원 · 홍화 등 13성을 거쳐 함경 남도 영흥에 이르는 천리 장성을 쌓았다. 그 공으로 추충척경 공신이 된 후 문하 시랑 평장사에 이르렀다.

 

195. 유수원 (1694~1755)

 

조선 시대의 실학자, 호는 농암 또는 농객이다. 1718년에 변서 사건에 관련되었다 하여 사형되었다. 최근에 와서 유형원 · 이익 · 정약용 등과 함께 실학자의 한 사람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저서에 <우서>가 있다.

 

196. 유신 (?~1104)

 

고려 시대의 문신·서예가, 시호는 충신이다. 어려서 문과에 급제하여 기거사인· 청주목사를 지냈다. 1093년 공부 시랑 벼슬에 있을 때 사신으로 송나라에 가서 <책부원귀>를 얻어 가지고 왔다. 1101년에 예부 상서가 되고 이듬해에는 이부상서 · 서북면 병마사를 거쳐 상서 우복야에 올랐다. 글씨를 잘 써 신라의 김생, 고려의 탄연· 최우 다음가는 명필로 꼽혔다. 순천 송광사의 불일보조국사탑비의 글씨는 그가 쓴 것이라 한다. 죽은 뒤에 참지정사 벼슬이 내렸다.

 

197. 유여대 (1878~1937)

 

독립 운동가·목사, 호는 낙포이다. 평북 의주에서 태어나 어려서 한문을 배우고 18세 때에 서당을 세워 아동들을 가르쳤다. 1900년에 의주에 양실 학교를 세운 뒤 크리스트 교를 믿고 전도 활동에 힘썼다. 1909년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한 후 목사가 되었다. 3·1 운동 때에는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다음 의주에서 만세를 선창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2년간의 옥살이를 하였다. 그 뒤에도 계속하여 종교 운동과 교육 사업에 힘썼다. 저서에 <면무식> <위인기담 등이 있다.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지금의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198. 유윤겸 (1420~?)

 

조선 초기의 문신·시인, 시인인 아버지에게서 두보의 시를 배워 이에 정통했다. 1462년(세조 8년)에 문과에 급제, 1480(성종 11년)에 젊은 문신들에게 두시를 가르쳤으며, 이듬해 왕명으로 조위 등과 함께 <분류두공부시 언해> 25권을 완성 간행하여 국문학사상 큰 업적을 남겼다. 1482년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이듬해 공조 참의가 되고, 서거정 · 노사신 등과 함께 <연주시격>과 <황산곡시집>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벼슬은 돈령부 도정에 이르렀다.

 

199. 유응부 (?~1456)

 

조선 시대의 사육신의 한 사람. 호는 벽량이고, 시호는 충목이다. 무과 시험에 급제한 후 벼슬길에 올라 세종과 문종의 총애를 받았다. 첨지중추원사 · 평안도 절제사를 거쳐 1455년 동지중추원사에 이르렀다. 같은 해 성삼문 · 박팽년 등과 단종을 다시 왕위에 오르게 하려고 계획을 세우다가 김질의 배신으로 탄로나 고문 끝에 죽었다. 학문이 깊어 절의파 학자로 알려졌고, 활쏘기에 뛰어났다. 시조 3수가 전하며, 숙종 때에 병조판서의 벼슬이 내렸다.

 

200. 유인석 (1841~1915)

 

조선 말기의 의병장. 호는 의암이다. 1876년(고종 13년) 강화도 조약을 맺을 때 왕에게 글을 올려 적극 반대하였다. 1894년에 갑오경장이 일어나자 김홍집의 친일 내각에 반대하여 충주 · 제천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관군에 패하여 만주로 건너가 서간도를 중심으로 독립 운동을 벌였다. 1909년(융희 3년)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3도 의군 도총재로 받들어져, 이상설 등과 두만강 연안으로 쳐들어오려고 하다가 러시아 관헌에 붙잡혔으나, 뒤에 석방되었다. 1910년 일제의 주권 침탈 이후에도 독립 운동을 계속하다가 봉천에서 병으로 죽었다.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지금의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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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입니다.;; 퍼온거에요.

 

단군: 고조선을 세우신 분.(연대 : ? ~ ?)안 나오더군요...

 

동명왕: 동명성왕. 고주몽. 고구려의 시조(연대 : BC 58 ~ BC 19)

 

온조왕: 백제의 시조.(연대 : ? ~ BC 28)

 

혁거세: 박혁거세. 알에서 나왔다는 설화가 있으며 신라의 시조.(연대 : BC 69 ~ AD 4)

 

광개토대왕: 사상 최대의 영토를 가진 고구려의 대왕.(연대 : 375년 ~ 413년)

 

이사부: 우산국(울릉도)를 정복하고 국사를 편찬한 신라의 장군.(연대 : ? ~ ?)

 

백결선생: 방아타령을 만든 거문고의 명수(연대 ? ~ ?)

 

의자왕: 삼천궁녀를 거느렸던 백제의 마지막 왕(연대 : ? ~ 660)

 

계백: 황산벌에서 목숨을 잃은 백제의 충신(연대 : ? ~ 660)

 

관창: 신라의 어린 화랑.(연대 : 645 ~ 660)

 

김유신: 신라시대의 장군. 기생집에 발을 끊은 후 말 등에 앉아서 조는 틈에 그곳을 찾아간 준마의 목을 베었다는 일화가 있음(연대 : 595 ~ 673)

 

문무왕: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룬 왕.( 연대 : 626 ~ 681)

 

원효대사: 신라의 고승. 해골 물에 관한 이야기 역시 너무나 유명하죠.( 연대 : 617년 ~ 686년)

 

혜초: 인도를 여행하고 왕오천축국전을 지은 신라의 고승(연대 : 704 ~ 787)

 

장보고: 신라의 장군이며 청해진을 만들어 바다를 지킨 말 그대로 바다의 왕자.

(연대 : ? ~ 846)

 

대조영: 발해를 건국한 고구려의 유민(연대 : ? ~ 719)

 

강감찬: 귀주대첩으로 유명한 고려의 명장.(연대 : 948 ~ 1031)

 

서희: 외교로 거란족을 물리친 고려의 뛰어난 외교가이자 장군.(연대 : 942 ~ 998)

 

정중부: 고려 무신정권 쿠데타의 주인공.(연대 : 1106 ~ 1179)

 

최무선: 우리나라 사상 최초로 화포를 제작한 기술자.(연대 : ? ~ 1395)

 

죽림칠현: 세상에 등을 돌리고 대나무 숲에서 산 일곱명의 선비라는 뜻. 임춘(? ~ ?), 오세재(1133 ~ ?), 이인로(1152 ~ 1220), 조통(? ~ ?), 황보항( ? ~ ?], 이담지( ? ~ ?), 함순( ? ~ ?). 중국 죽림칠현과 구별해서 강좌칠현(江左七賢), 해좌칠현(海左七賢)이라고도 함.

 

김부식: 삼국사기를 편찬한 고려의 학자이자 정치가 (연대 : 1075 ∼ 1151)

 

지눌국사: 조계종의 창시자.(연대 : 1158 ~ 1210)

 

의천: 천태종의 창시자.(연대 : 1055 ~ 1101)

 

이종무: 대마도를 정벌한 고려 장군.(연대 : 1360 ~ 1425)

 

정몽주: 단심가를 지은 고려 말의 충신.(연대 : 1337 ~ 1392)

 

문익점: 우리나라에 최초로 목화씨를 들여왔음.(연대 : 1329년 ~ 1398년)

 

최충: 고려의 문신. 자세한 설명은 없는 것도 같고 많은 것도 같고..?(연대 : 984 ~ 1068)

 

일연: 삼국유사를 지은 스님.(연대 : 1206년 ~ 1289년)

 

최영: 고려의 명장.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이후 억울하게 죽음당한 충신.(연대 : 1316 ~ 1388)

 

황희: 황희정승. 고려 말 ~ 조선 초의 문신. (18년간 영의정 재임) (연대 : 1363 ~ 1452)

 

맹사성: 고려 말, 조선 초의 명재상. (연대 : 1360 ~ 1438)

 

장영실: 자격루, 옥루 등의 각종 발명을 한 세종 때의 과학자.(연대 : ? ~ ?)

 

신숙주(1417 ~ 1475), 한명회(1415 ~ 1487): 수양대군(세조)의 계유정난에 참여한 반정공신.

 

이율곡: 이이. 왜란을 예견해 십만양병을 주장한 문신이자 학자.(연대 : 1536 ~ 1584)

 

이퇴계: 이황. 이언적의 '주리설'을 계승한 학자이자 문신.(연대 : 1501년 ~ 1570년)

 

신사임당: 율곡 이이의 어머니. 현모양처의 귀감이자 여류 문학자.(연대 : 1504 ~ 1551)

 

곽재우(1552년 ~ 1617년), 조헌(1544 ~ 1592), 김시민(1554 ~ 1592) : 왜란 중의 의병장들

 

이순신: 조선 선조 때의 장군.(연대 : 1545년 ~ 1598년)

 

태정태세문단세: 태조(1335년 ~ 1408년), 정종(1357 ~ 1419), 태종(1367 ~ 1422), 세종(1397년 ~ 1450년), 문종(1414 ~ 1452), 단종(1441 ~ 1457), 세조(1417 ~ 1468) 로 이어지는 조선 초기의 왕들.

 

사육신: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죽임당한 6충신. 성삼문(1418 ~ 1456), 박팽년(1417 ~ 1456), 하위지(1387 ~ 1456), 이개(1417 ~ 1456), 유응부(? ~ 1456), 유성원(? ~ 1456).

 

생육신: 사육신의 대칭으로 단종을 위해 벼슬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6충신. 김시습(1435 ~ 1493), 원호(? ~ ?), 이맹전(1392 ~ 1480), 조려(1420 ~ 1489), 성담수(? ~ ?), 남효온(1454 ~ 1492).

 

논개: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몸을 던진 기생.(연대 : 1574년 ~ 1593년) 

 

권율: 행주대첩의 명장. 행주치마에 대한 이야기에는 많은 이설이 있음.(연대 : 1537 ~ 1599)

 

홍길동: 우리나라 최초 언문소설(허균 저) 홍길동전의 주인공. 후에 실존인물이었음이 밝혀짐.(연대 : 1967년 ~ 지금까지)

 

임꺽정: 백정 출신의 의적이었으나 체포되어 처형됨.(연대 : ? ~ 1562)

 

삼학사: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화의를 반대한 세 학사. 홍익한(1586 ~ 1637), 윤집(1606 ~ 1637), 오달제(1609 ~ 1637)

 

박문수: 암행어사로 유명한 조선시대 문신.(연대 : 1691 ~ 1756)

 

한석봉: 삼년공부와 어머니와의 일화로 유명한 조선시대 명필.(연대 : 1543 ~ 1605)

 

단원: 김홍도(1745 ~ ?). 풍속도를 많이 그렸음.

 

김삿갓: 김립. 방랑하며 시를 지었음.(연대 : 1807 ~ 1863)

 

김정호: 대동여지도를 만든 지도 제작자.(연대 : ? ~ 1864)

 

영조대왕: 신문고를 만들었음.(연대 : 1694년 ~ 1776년)

 

정조: 규장각을 설치, 역대 국왕의 친필과 시문을 보관 관리.(연대 : 1752년 ~ 1800년)

 

정약용: 목민심서를 지은 실학자.(연대 : 1762년 ~ 1836년)

 

전봉준: 녹두장군 동학 운동을 지도했으며 체포되어 처형당함.(연대 : ? ~ ?)

 

김대건: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순교자.(연대 : 1822 ~ 1846)

 

황진이: 서화와 가무에 능한 유명한 기생.(연대 : ? ~ ?)

 

홍경래: 19세기 초 평안도 농민반란의 지도자.(연대 : 1771 ~ 1812)

 

김옥균: 갑신정변을 일으킨 삼일천하의 주인공. 자객 홍종우에게 살해당함.(연대 : 1851년 ~ 1894년)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항일의사.(연대 : 1879년 ~ 1910년)

 

이완용: 역사에 남을 매국노(왜 나왔는지는 궁금. 제목은 한국을 빛낸 위인인데....) (연대 : 1858년 ~ 1926년)

 

윤동주: '별을 헤는 밤'을 지은 시인. 사상범으로 투옥되어 옥사함.(연대 : 1917년 ~ 1945년)

 

지석영: 종두법을 우리나라에 처음 들여온 의사이자 국문학자.(연대 : 1855년 ~ 1935년)

 

손병희: 3.1운동을 주도한 삼십삼인의 일원이자 천도교의 지도자.(연대 : 1861년 ~ 1922년)

 

유관순: 반일항쟁을 하다 옥사한 유관순 열사.(연대 : 1902년 ~ 1920년)

 

안창호: 호는 도산. 만민공동회, 신민회 등을 조직한 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연대 : 1878년 ~ 1938년)

 

방정환: '사랑의 선물'을 짓고 어린이라는 말을 만든 아동문학가.(연대 : 1899년 ~ 1931년)

 

이수일(1942년 ~ 2005년)과 심순애(나오질 않네요..): 일본작가 오자키 고요의 '금색야차(金色夜叉)'를 번안한 '장한몽'의 주인공. 악극으로 더 유명함.

 

김두한: 김좌진 장군의 아들로서 주먹왕이자 정치가.(연대 : 1918년 ~ 1972년)

 

이상: 본명 김해경으로 건축과 출신의 불운한 천재시인이자 소설가.(연대 : 1910년 ~ 1937년)

 

이중섭: 소 그림으로 유명한 현대화가(연대 : 1916년 ~ 1956년)

 

 

 

출처:네이버지식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