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韓민족위인

2009. 6. 20. 17:57삶이 깃든 이야기/문화유산

세종대왕



조선 제4대 왕(재위 1418~50),휘, 도, 자 원정, 시호, 장헌

태종의 셋째 아들로 원경왕후 민씨 소생.

비 는 청천부원군 심온의 딸 소헌왕후,1

408년(태종 8)충녕군에 봉군, 13년(태종 13)에 대군이 되고 18년에 왕세자에 책봉,

동년 8월에 22세 나이로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즉위 후 정치, 경제 ,문화면에 훌륭한 치적을 쌓아 수준 높은 민족문화의 창달과 조선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다.

재위 기간 동안 유교 정치의 기틀을 확립하고, 공업을 시행하는 등 각종 제도를 정비해 조선 왕조의 기반을 굳건히 하였다.

또한 한글 창제를 비롯하여 조선 시대 문화의 융성에 이바지하고 과학 기술을 크게 발전시키는 한편 축적된 국력을 바탕으로 국토를 넓혔다.

1420년에 설치된 집현전은 젊고 유능한 학자들을 육성하는 동시에 왕과 세자에 대한 학문적인 자문과 교육과 각종 학술 연구, 서적 편찬을 담당하는 기구였다.



그는 정치적으로 중앙집권 체제를 운영하기 위하여 20년에 집현전을 설치하고 황희, 맹사성, 허조, 등의 청백리를 등용하여 왕권과 신권의 조화에 노력하여 의정부의 독주를 견제했고,

왕립 학술기관으로 확장하여 변계량, 신숙주, 정인지, 성삼문, 최항 등 장년층의 학자를 등용하여 정치자문, 왕실 교육, 서적 편찬 등 이상적 유교정치를 구현하였다.
그리고 궁내에 정음청을 설치, 성삼문, 신숙주, 최항 등으로 하여금 43년(세종 25)한글을 창제하게 하고 46년 이를 반포하였다. "훈민정음" 28자를 제정하여 반포하는 한편 정음청을 두어 유교 전적. 음운서 등의 국문 출간을 담당하게 했으며,

학문의 장려에 힘쓰면서 "효행록", "삼강행실", "오례의", "자치통감훈의", "치평요람", "용비어천가", "고려사", "역대 병요", "동국정운",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의방유취" 등 각종 서적을 편찬하게 했다.

또한 이천에게 명하여 경인자, 갑인자, 병진자 등을 제작하게 하였는데, 그 중에서 갑인자는 정교하기로 유명한 활자이다.



초기에는 억불책을 써서 5교 양종을 선종과 교종의 2종으로 통합하여 각 18개 사찰만 인정하고 경행을 금지했으나,

말년에는 궁중에 내불당을 짓고 승과제도, 경해을 인정하는 등 왕실 불교로 장려하여 불교 발달에도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음악에도 관심을 기울여 25년 관습도감을 설치하고 박연으로 하여금 아악을 정리하게 하여 음악을 장려하였다.

박연에게 명하여 아악기를 개조하여 고래의 아악, 당악, 향악의 모든 악기, 악곡, 악보 등을 종합 정리하게 했으며,

"정대업", "보태평" 등 저명한 악곡을 제작하게 하였다.


또한 실록 보관을 위하여 춘추관, 충주, 전주, 성주에 4대 사고를 설치했는데,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불타버렸다.

과학기술에 대한 업적은 42년 이천 ,장영실로 하여금 우량을 분포 측정기인 측우기를 제작하게 했는데,

이는 1639년 이탈리아의 B.가스텔리가 발명한 측우기보다 약 20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그리고 궁중에 과학관인 흠경각을 설치하고 과학기구를 비치하도록 했고, 훈천의, 해시계, 물시계 등 각종 과학기구를 발명하였다.
김담, 이순지 등을 시켜 중국 원 나라의 수시력, 명나라의 대통력을 참작하고 아라비아의 회회력을 빌어 역서인 칠정산내외편을 편찬했고, 천문, 역법, 의상등에 관한 지식을 종합한 <제가역상집>을 이순지가 펴냈다.



경제, 사회 정책면은 36년 공법상정소를 설치하고 각 도의 토지를 비척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세율을 달리하는 안을 실시했으나 결함이 많았으므로 43년에 공법상정소의 안을 시정하기 위하여 전제상정소를 설치하고 풍흉에 따라 연분 9등법과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전분6등법에 의한 수등이척법으로 조세의 공평화를 도모했으며,

전국의 토지를 20년 마다 측량하여 양안을 작성하도록 했다. 그리고 의창, 의료제도, 금부삼복법을 제정했고, 노비에 D대한 지위등을 개선, 사형을 금하도록 했다.



대외정책면에서는 국가의 주권 확립과 영토확장에 진력한 치적을 들 수 있다.

명나라와의 관계를 보면, 처녀진헌을 폐지하는 한편, 당나라에 보내던 금, 은의 조공물을 폐지하고 마, 포로 대신하도록 했다. 그리고 여진과의 관계는 무력을 강경책을 쓰거나 회유하는 화존 양변책을 썼는데,

두만강 유역의 여진은 김종서로 하여금 구축하도록 하고 6진을 개척하여 국토를 확장하였다.

압록강 유역의 여진은 최윤덕, 이천등으로 하여금 구축하게 하고, 4군을 설치하였다.

이 때의 국경선이 압록강으로부터 두만강까지 확보되어 이 곳에 사민정책을 실시하는 등 국토의 균형된 발정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일보고는 19년(세종1) 이종무로 하여금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섬을 정벌하게 했으며, 이후 쓰시마 도주소 사다모리가 사죄하고 통상을 간청해오자, 26년 삼포를 개항하였다.

이후 왜인의 출입이 증가하자 43년 왜인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하여 신숙주의 교섭으로 변효문과 소 사다모리 사이에 계해조약을 체결하게 하여 1년 동안에 입항할수 있는 세견선을 50척으로 제한했고,

세사미를 200섬으로 제한하는 한편, 반드시 수도서인에 한하여 왕래하도록 무역과 출입을 통제하였다.



능은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있는 영름인데 처음에는 광주에 있었으나, 69년(예종 1)에 이곳으로 옮겼다.

세종조는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유교 정치, 찬란한 문화가 이룩된 시대이다.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적인 기틀을 잡은 시기였다.

집현전을 통하여 많은 인재를 길렀고, 유교 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나아가 겨레 문화를 높이는 데에 기본이 된 훈민정음의 창제, 방대한 편찬 사업, 농업과 과학 기술의 발전, 의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국토의 확장 등 수많은 업적으로 나라의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훈민정음



세종대왕님의 업적중에서도 가장 큰 업적은 무엇중에도 한글이죠.



`훈민정음'이라는 위대한 문화적 창조의 동기와 목적에 관하여는 '훈민정음' 가운데서 세종대왕이몸소 말씀하였다.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국지어음 이호중국 여문자불상유통)

故愚民 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 多矣
(고우민 유소욕언 이종부득신기정자다의)

予 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
(여위차민연 신제이십팔자 욕사인인이습 편어일용이)


(우리 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잘 통하지 아니한다.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것을 가엽게 생각하여 새로 스물 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쉬이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훈민저음 머리글 풀이-)

이 말씀이 지극히 간단하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 속에 우리가 알고자 하는 바가 다 들어 있음을 알겠다. 곧,

① 우리 나라에는 독특한 배달말이 있으니, 이 말을 적어 내기에 알맞은 글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에 알려진 모든 다른 나라가 각각 제 나라 말에 알맞은 글자가 있는데, 우리 나라만은 글자가 없어, 남의 나라의 글자, 한문을 빌려 쓰니, 이는 안타까운 일이다

② 남의 글자 한문은 우리말과 서로 통하지 않는 글자일 뿐더러, 본디 어렵기 짝이 없는 글자이기 때문에, 우리 배달 겨레에게는 이중으로 어려워, 백성들이 다 배워 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세종대왕은 하늘이 내린 성인이로되, 한학에 정통하는 데는 많은 노력과 세월을 허비하였을 것이니, 시간과 경제의 여유가 없는 일반 대중이야 얼마나 그것이 어려운 일인가 함을 아프게 느낀 것으로 보인다.

③ 일반 서민이 글자를 깨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그 뜻을 펴지 못한다 함이다. 곧 아랫사람의 뜻이 위에 사무치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에게 억울한 일이 많아 정치가 명랑하지 못하니, 어진 정치의 이상에 위반함이라고 생각함이다. 정인지의 꼬리글에서도 이를

治獄者病其曲折之難通, ……以是聽訟, 可以得其情
(치욕자병기곡절지난통........이시청송, 가이득기정: 옥사를 다스리는 이는 그 곡절의 통하기 어려움을 괴로워 하고 있다....<중간 생략>.... 이로서 송사를 들으면 그 속사정을 알 수 있다)

④ 이 새 글은 상하 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쉽게 익혀서 일상 생활에 편리하게 쓰도록 하고자 하는 것이라 하였다. 곧 민중 문화의 보급과 생활의 향상을 꾀함에 그 목적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위에 든 이유 밖에, 또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원인을 들 수 있지 아니할까 생각된다.

① 고려 오백 년간에 끊임없이 다른 겨레들로 더불어 겨루는 살림을 하여 오다가, 끝장에는 몽골에게 큰 곤욕을 당하기까지 하였으니, 겨레 의식이 눈뜨게 되었음은 당연한 일이며,

② 원 나라, 명 나라의 갈음에 즈음하여, 왕조를 세운 조선 왕실에서는 저절로 자아 의식이 생기게 되었으며,

③ 세종대왕이 동북으로 `육진'을 개척하고, 서북으로 `사군'을 차려 놓고, 남쪽 백성들을 옮겨 심었으니, 자아 충실의 필요감이 강렬하게 되었으며,④ 세종대왕이 전제, 세제를 개혁하여, 백성과 나라의 부강을 꾀하였으니, 경제적 및 사회적 발전에는 백성들의 지식의 보급이 앞서는 조건이 됨을 실감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사회적 원인에서, 만인을 뛰어넘는 밝은 지혜와 통찰력을 가진 세종대왕은 제 겨레 특유의 말씨에 알맞고, 만백성이 깨치기 쉬운 민중의 글자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 할 만하다.

훈민정음'의 창제와 반포의 때를 적되 날짜는 밝히지 아니하였음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 창제의 날은 꼭 적기 어렵다 하더라도, 그 반포의 날은 분명한 것이었을 터인데, 이를 밝혀 적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오백 년 뒤 우리들로 하여금 쓸데없는 모색과 시비를 하게 하였다. 그러나 상고한 바에 따르면 그 해의 9월이 작은 달이었으므로, 위에 적은 `훈민정음' 반포의 기사는 음 9월 29일로 미루어 볼 수 있다. 그래서 조선어 연구회(1908년 창립, 1931년에 조선어 학회로, 1949년에 다시 한글 학회로 개칭함)에서는 음 9월 29일(양력 10월 29일)로써, `훈민정음' 반포 기념일, 곧 한글날(처음에는 `가갸날')로 정하고 이를 해마다 기념하게 되었으니, 이는 한글 반포 제8주갑인 병인년(1926)에 비롯된 일이다.




세종대왕의 약력



-> 세종의 성명은 `이도`이며 자는 원정(元正)이고, 시호는 '세종 장헌 영문 예무 인성 명효 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다.



1397년(1세) 4월 10일(양력 5월15일) 태종의 셋째 아들로 한양에서 탄생하다.

1408년(12세) 2월 충녕군에 책봉되고 결혼하다.

1412년(16세) 5월 충녕대군에 진봉되다.

1418년(22세) 6월 왕세자로 책봉된다.

1418년(22세) 8월 10일 왕위에 오르다.

1419년(23세, 세종 원년) 6월 대마도를 정벌하다.

1420년(24세, 세종 2년) 3월 집현전의 기구를 확장, 궁중에 설치하다.

1421년(25세, 세종 3년) 3월 주자를 만들어 인쇄술을 개량하다.

1423년(27세, 세종 5년) 9월 조선통보 화폐제를 창설하다.

1430년(34세, 세종 12년) 12월 [농사직설]을 전국에 펴내다.

1430년(34세, 세종 12년) 12월 아악보를 이룩하다.

1431년(35세, 세종 13년) 3월 [태종실록] 편찬을 마치다.

1431년(35세, 세종 13년) 4월 광화문을 세우다.

1432년(36세, 세종 14년) 1월 [팔도 지리지]를 편찬하다.

1432년(36세, 세종 14년) 6월 [삼강 행실도]를 편찬하다.

1433년(37세, 세종 15년) 6월 사군을 설치하여 국경이 압록강에 이르게 하다.

1433년(37세, 세종 15년) 8월 혼천의(천체 측정기)를 제작하다.

1434년(38세, 세종 16년) 7월 동활자 갑인자와 물시계(새로운 자격루)를 사용하다.

1434년(38세, 세종 16년) 10월 앙부일구(해시계)를 제작하다.

1435년(39세, 세종 17년) 7월 경복궁 안에 주자소를 설치하다.

1437년(41세, 세종 19년) 4월 일성정시의(주야측우기)를 만들다.

1437년(41세, 세종 19년) 9월 야인(여진)을 정벌하고 6진을 설치하여 국경이 동북으로 두만강에 이르게 하다.

1441년(45세, 세종 23년) 8월 측우기를 제작하여 이듬해 5월에 측우하는 제도를 정하여 실시하다.

1442년(46세, 세종 24년) 8월 [고려사]를 편찬하다.

1443년(47세, 세종 25년) 11월 전제를 정하는 관서(전제 상정소)를 설치하다.

1443년(47세, 세종 25년) 12월 [훈민정음](한글)을 창제하고 언문청을 설치하다.

1445년(49세, 세종 27년) 4월 [용비어천가]를 짓다.

1446년(50세, 세종 28년) 9월(양력 10월 9일) [훈민정음](한글)을 반포하다.

1447년(51세, 세종 29년) 7월 [석보상절],[월인천강지곡]을 편찬하다.

1447년(51세, 세종 29년) 8월 숭례문(남대문)을 개축하다.

1447년(51세, 세종 29년) 9월 [동국정운]을 편찬하다.

1448년(52세, 세종 30년) 7월 궁 안에 불당을 건립하다.

1449년(53세, 세종 31년) 12월 [석보상절],[월인천강지곡]을 간행하다.

1450년(54세, 세종 32년) 2월 17일(양력 4월 8일) 승하하다.




-천문학의 발전-



천문학을 주과하던 곳은 서운관이었다. 서운관에는 조선 초에 이미 천문을 관측하기 위해 두 곳의 간의대가 설치된 바 있었지만 미흡한 점이 많아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1431년부터 시작된 대규모 천문의상 제작과 2년 뒤에 이루어진 석축간의대 준공에 의해 본격적인 천문 연구에 돌입할 수 있었다.



석축간의대: 경복궁의 경회루 북쪽에 설치되었으며 높이 6.3미터, 길이 9.1미터, 넓이 6.6제곱미터 규모의 천문관측대 였다. 이 간의대에는 혼천의, 혼상 그리고 규표와 방위지정표인 정방안 등이 설치되었다. 이 간의대와 주변 시설 물들은 중국과 이슬람 양식에다 조선의 전통 양식을 혼합한 것이었는데, 1438년(세종20년) 3월부터 이 간의대에서 서운관 관원들이 매일 밤 천문을 관측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혼천의: 천체 관측 기계로, 문헌에는 1432년 6월에 최초로 만들어졌으며 두 달 뒤에 또 하나가 만들어졌다고 기 록되어 있다. 이는 장영실을 중심으로 한 기술 제작진이 정초 등의 고서 연구를 바탕으로 고안한 것이다. 이 혼천의는 천구의와 함께 물레바퀴를 동력으로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연결된 것으로서 일종의 천문시계 기능을 하고 있었다.




-시계의 발명-



해시계: 해시계를 일구라고 한 것은 이것이 모두 해그림자로 시간을 알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 일구들은 모양과 기 능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뉘는데 우리 나라 최초의 공중시계인 혜정교와 종묘 남쪽 거리에 설치됐던 앙부일구는 그 모양이 '솔을 받쳐놓은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이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그리고 현주일구와 천평일구는 규모가 작은 일종의 휴대용 시계였고 정남일구는 시계바늘 끝이 항상 '남쪽을 가리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릉이다. 장영실 등이 만든 앙부일구는 단순히 해시계를 발명했다는 측면 외에 더 중요한 과학적 사실들이 내포되어 있다. 다른 나라의 해시계가 단순히 시간만을 알 수 있게 해준 데 반해 앙부일구는 바늘의 그림자 끝만 따라가면 시간 과 절기를 동시에 알게 해주는 다기능 시계였다. 또한 앙부일구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반구로 된 해시계였다. 앙부 일구가 반구로 된 점에 착안해서 그 제작 과정을 연구해보면 놀라운 사실 하나가 발견되는데, 그것은 당시 사람들 이 해의 움직임 뿐만 아니라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물시계: 물시계로는 자격루와 옥루가 있었다. 자동으로 시간을 알리게 하는 자동시보장치가 달린 이 물시계는 일종의 자 명종이다. 1434년 세종의 명을 받아 장영실, 이천,김조 등이 고안한 자격루는 시, 경, 점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종, 북, 징을 쳐서 시간을 알리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1437년에는 장영실이 독자적으로 천상시계인 옥루를 발명 해 경복궁 천추전 서쪽에 흠경각을 지어 설치했다. 옥루는 중국 송, 원 시대의 모든 자동시계와, 중국에 전해진 아 라비아 물시계에 관한 문헌들을 철저히 연구한 끝에 고안한 독창적인 것으로서 당시의 중국이나 아라비아의 것보다도 뛰어났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측우기: 측우기는 1441년에 발명되어 조선시대의 관상감과 각 도의 감영 등에서 강우량 측정용으로 쓰인 관측장비로, 현대적인 강우량 계측기 에 해당된다. 이는 갈릴레오의 온도계 발명이나, 토리첼리의 수은기압계 발명보다 200년이나 앞선 세계 최초의 기 상 관측 장비였다. 측우기의 발명으로 조선은 새로운 강우량 측정 제도를 마련할 수 있었고, 이를 농업에 응용하게 되어 농업 기상학에서 괄목할 만한 진전을 이룩하였다. 이 측우기의 발명으로 정확한 강우량을 파악할 수 있게 되어 홍수 예방에도 도움이 되었다.





-음악-



모든 음체계의 바탕이 되는 기본율관(음관)을 제정하고, 앙상블에 필요한 미비된 악기들을 새로 만들어내고, 새로운 음악을 만들고, 음악을 기록하는 악보를 처음으로 창안해낸 사실들이 곧 그의 중요한 업적의 내용들이다.



나는 이 글에서 그의 음악적 업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몇몇 항목들을 개괄해 봄으로써 실로 세종대왕이 한국음악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지대한가를 다시 한번 확인해 보고자 한다.



주지하다시피 불교를 숭상했던 고려왕조와는 달리 유교를 통치철학으로 삼았던 조선왕조에서는 당연히 음악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유교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음악이 필수불가결한 요소요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유교에서 음악이란 인격을 완성하고, 사회와 풍습을 순화시키며, 정치를 고르게 하여 국가를 잘 다스리는데 있어서 더없이 좋은 수단이요 매체로 간주되었다.
매체요 수단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좋은 음악의 실천은 곧 유교이념의 궁극적 실현에 다름 아니었다.
그만큼 유교에서 음악은 중시되었으며 비중이 컸다.
조선초기의 세종대왕이 음악을 중시하고 훌륭한 음악정비사업을 벌인 것도 유교를 국시로 삼은 조선조의 통치철학과도 맥이 닿는 것이다.
유교의 음악관(音樂觀)에서는 나쁜 음악이 유행하면 사회가 혼란해지고 급기야는 나라가 망한다고 생각했다.
사회분위기를 건전하게 조성해갈 좋은 음악 즉 *예악(禮樂)*을 장려하고 망국지음(亡國之音)이라고 생각하는 음란하고 번잡한 음악을 배제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또한 음란한 음악이 유행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유가적 음악관에 입각해볼 때 고려왕조가 망했다는 것은 적어도 상징적으로는 음악정책이 잘못되었다는 말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중국에서도 왕조가 바뀌면 음악제도를 먼저 바꾸려고 노력했듯이, 한국의 세종대왕 또한 이 같은 유가적 전통에서 볼 때 서둘러 음악정비와 개혁에 앞장서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고 하겠다.
중요한 사실은 적어도 세종왕조 때만 해도 음악을 오늘과 같이 한낱 오락적인 기능이나 순수예술의 장르로만 생각하지 않고 풍속과 민심을 바꾸고 국가의 성쇠와도 직결되는 중차대한 대상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이 같은 당시의 시대사상이나 음악적 의미망을 이해할 때 우리는 세종의 음악적 업적을 한층 바른 시각으로 이해함은 물론 그 같은 업적의 궁극적 본질과 의도도 비로서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세종의 음악적 업적 중에서 먼저 거론될 사항은 12음 중에서 기본이 되는 황종(黃鐘: 서양의 12음의 기본인 C음)음의 정확한(가장 우주적인 섭리에 알맞은 바람직한) 음고(音高: pitch)를 확정하기 위해서 수차에 걸쳐서 황종율관(황종음을 내는 세로 관대)을 제작한 사실이다.
서양음악에서도 서로 다른 음높이(pitch)의 악기들이 일정한 A음의 높이를 기준으로 서로 음높이를 통일시켜야 합주가 가능하듯이, 어느 나라 음악에서든 특정한 기준치의 음을 바르게 정한다는 것은 여간 중요한 일이 아니다.
특히 서양에서는 서로 합주를 하기 위해서 음높이의 통일이 필요했지만, 옛날 중국을 위시한 한국의 음악에서는 음악합주의 실용적 필요성만이 아니라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에서 기본음이 정확한 음높이는 대단한 의미망을 지녔었다.
우선 앞서도 언급했듯이 음악이 올바르지 않으면 풍속이 문란해지고 나라까지 만하게 된다.
그 같은 나쁜 음악은 모든 음의 기둥이 되는 기본음의 높이가 잘못 정해진 데서 출발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기본음의 높이를 얼마로 정하느냐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당시에는 기본음을 내는 율관(대나무 관악기 튜브)의 길이는 일상생활에서 길이를 재는 자(尺)의 기준이 되고, 그 대나무관의 빈 공간에 가득히 채워지는 기장(곡식의 일종)의 량은 부피를 재는 량(量)의 척도가 되며, 그 기장의 무게는 곧 모든 물건을 다는 무게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황종"이라는 기본음을 만들어내는 죽관(竹管)은 소리를 내는 기능만이 아니라 백성들의 일상생활을 좌지우지하는 도량형(度量衡)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황종음을 내는 기본율관의 길이를 얼마로 정하느냐의 문제는 단지 음악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의 차원에서도 더없이 막중한 일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처럼 중요하고도 근원적인 문제를 세종은 심혈을 기울여 정리했으니 이 점만으로도 그의 음악적 업적은 더없이 크다고 하겠다.



기본음을 정하는 "황종" 율관을 정한 후에, 당연한 순서이겠지만 세종은 여러 가지 미비한 악기들을 만들어서 *법도에 맞는* 음악합주를 할 수 있게 했다.
동양철학적인 관념의 세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옛날 한국의 궁정음악인 "아악"에 사용되는 악기들은 모두 8가지 재료로 만든 8가지 종류로 구분되었다.
동양철학인 음양(yin yang)사상이나 주역(周易: Book of changes)의 사상에 뿌리를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몽고의 침입이나 왕조의 교체 등을 거치면서 많은 악기들이 분실되고 흩어져서, 조선초기에는 동양적 악론에 걸맞는 악기편성을 할 수 없을 만큼 부족한 악기들이 많았었다.
이 같은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세종은 악기제작을 명령하여 법도에 맞는 합주를 할 수 있을 만큼 여러 악기들을 새로 만들어 냈다.
"아악"에 사용되는 8가지의 악기 중에는 쇠로 만드는 편종(編鐘)과 돌로 만드는 편경(編磬)같은 악기가 있는데, 특히 편경을 만드는 재료인 돌은 보통의 것은 안되고 특수한 돌이어야하기 때문에 편경악기는 만들고 싶어도 마음대로 만들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마침 세종대왕 때에 서울근교의 한 지방에서 편경을 만드는 돌이 발견되어 결국 세종이 편경을 만들 수 있었는데, 이를 두고 당시의 기록들은 세종같은 훌륭한 왕이 음악을 정비하고 발전시키려고 뜻을 세우니 하늘도 감복하여 기꺼이 도와준 결과라고 적고 있다.
편종은 돌을 일정한 모양과 크기로 깎고 단지 두께만을 달리해서 여러 가지 높이의 음들을 내게 하는 타악기(percussion Instrument)이다.
한번은 신하가 이 편종 한틀(set)을 만들어 세종 앞에서 연주를 했는데, 세종께서는 그 중의 어느 음이 높이(pitch)가 아주 조금 높다고 지적했다.
신하가 그 음을 내는 돌을 자세히 살피니 석공이 돌을 덜 깎아내어 아직 돌에 깎아내도록 지정해준 먹줄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 먹줄을 다시 깎아낸 후에 연주를 하니 음높이가 정확히 들어맞았다. 세종의 음악적인 귀가 그만큼 밝았음을 짐작케 하는 일화이다.



세종은 악기제작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음악을 제작케 했거나 손수 만들어낸 탁월한 음악가이기도 했다.
당시에 사용하는 여러 가지 음악을 법도에 맞게 재정리하기도 했지만 특히 세종이 직적 참여하여 만든 신작음악으로는 "정대업", "보태평", "발상", "봉래의"등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노래와 춤과 기악음악이 어우러지는 종합예술적인 성격을 지니는 규모 큰 음악들이다.
"정대업"과 "보태평"은 각기 11곡으로 이뤄진 대곡이고 "봉래의"는 7파트로 구성된 대곡이다.
특히 "봉래의" 속의 한곡인 "여민락"은 오늘도 한국의 전통음악연주회에서 중요한 레퍼터리를 이루고 있으며, "정대업"과 "보태평"은 조선왕가의 역대 왕들을 제사지내는 종묘제례악으로 지금까지 면면히 사용되어 오고 있다.
더욱이 5백 수십 년을 이어오는 이들 종묘(宗廟: 조선조 왕들을 제사하는 사당) 제례악은 최근에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문화재로 지정되어 한결 그 독보적인 진가를 인정받고 있다.
이처럼 5백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악곡들이 현재까지도 한국 전통음악 연주회의 기본적인 레퍼터리로 널리, 그리고 자주 연주되고 있다는 사실은 기실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고 하겠다.
서양음악으로 말하면 네덜란드 악파(Netherland school)가 활약하던 15세기 르네상스 초기의 음악이 현재의 서구 고전음악의 중추적 레퍼터리를 이루고 있는 경우와 흡사한 보기 드문 예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에 대한 음악적 평가-



세종의 업적은 당시의 사회전반, 문화전반에 걸친 것이었듯이, 음악분야만 하더라도 그의 배려와 업적은 어느 한 모퉁이에 국한되지 않았다.
음악이론을 바로 세우고, 악비를 보완하고, 음악체제를 정비하고, 신곡을 만들어 내었으니, 이제는 이들 음악을 기록할 악보를 만들어 내는 일을 착안하지 않으리 없었다.
우리는 세종에게 음악적으로 많은 은혜를 입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그가 창안한 악보로 인해서 많은 음악이 지금까지 생명력을 잃지않고 있다는 사실은 가장 큰 은혜요 고마움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창안한 "정간보(井間譜)"라는 일종의 유량악보(mensural notation)는 오늘도 한국음악계에서는 서양의 5선보(5 staves notion)와 함께 널리 사용되고 있다.



지금까지 개관해 본 바와 같이 세종대왕은 많은 음악적인 업적을 남겼으며 한국음악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여기서 우리는 이 같은 많은 업적을 남기기까지 세종의 음악에 대해서 어떠한 정신적 태도를 견지했나 하는 것을 알아보는 것도 그의 음악적 공적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세종의 음악적 정신세계는 한마디로 주체적 문화관과 애민(愛民)사상으로 요약된다고 하겠다.
널리 알려졌듯이 조선조에는 중국(당시 명나라) 문화에 대한 선망의식이 높았었다.
국가의 통치이념도 중국에서 발전한 유교에 바탕을 두었으며, 여러 가지 문물제도나 예술행위도 중국의 그것을 모델로 삼기 일수였다.
음악 또한 중국의 전범(典範)을 따르는 것을 최고선으로 삼았다.
그래서 세종이 음악제도를 정비하고 악기를 새로 만들 때도 중국의 제도를 많이 참작했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도 세종은 주체적인 문화의식을 버리지 않고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시책을 펼치기도 했다.
그 중의 좋은 예가 죽은 선조들을 제사하는 음악에서 중국음악이 아닌 한국 고래(古來)의 음악을 사용하도록 지시한 사실이다.
세종은 이렇게 말했다. *선조들이 살아계실 때는 한국음악을 좋아하고 즐겼는데, 돌아가셔서는 중국인이 좋아하는 중국의 음악을 연주해드린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평소에 즐기던 한국음악으로 대체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간단한 일화이지만 세종의 주체적 문화안목을 엿볼 수 있는 좋은 단서라고 하겠다.
특히 이 같은 세종의 주체적 안목은 수백 년이 흐른 오늘의 한국사회에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고 하겠다.
왜냐햐면 20세기 후반의 한국음악계는 여타의 분야가 그러하듯이 서구음악 일변도로 일관하고 있으며 한국음악의 비중이나 이에 대한 일반의 관심은 상대적으로 미미하고 왜소한 형국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주객이 바뀌고 본말이 바뀐 불균형한 오늘의 한국음악풍토 속에서 세종의 이 같은 주체적 문화인식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 준다고 하겠다.


한편 세종의 음악업적 배면에는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신이 충만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세종이 약자의 불편함과 힘없는 백성들의 고충을 늘 살폈듯이, 음악을 만들어도 일반백성이 함께 이해하고 줄길 수 있는 방향으로 자상하게 배려를 했다.
그 좋은 예가 앞서 거론된 "여민락"이라는 음악일 것이다.
"여민락(與民樂)이라는 음악의 곡명은 *백성과 더불어 함께 즐긴다*는 뜻을 지닌 이름이다.
항상 국민들의 입장에서 국민들의 불편함을 살펴가며 이를 해소하려 노력했던 세종은 음악의 곡명에서까지도 백성들을 자상하게 배려하는 애민정신을 발휘했던 것이다.
비단 음악에서만 아니라 세종이 일반국민을 사랑했던 또 다른 좋은 예로는 세계가 주목하는 과학적인 문자인 한국의 고유한 문자 한글을 만든 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세종의 애민정신은 여러 가지 그의 치적 속에 두루 배어 있으며 음악적 업적 속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결론적으로 세종대왕은 애민정신과 주체적 문화인식을 바탕으로 해서 한국의 음악문화에 지대한 공로를 남긴 불세출의 선각자요 박식한 인문주의자이며 훌륭한 통치자였다.

 

 

세종대왕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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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기타] 우리말 배움터 , 김성수의세종대왕

출처:네이버지식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