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과 한글|韓민족위인

2009. 6. 21. 18:00삶이 깃든 이야기/문화유산

세종 임금은 서기 1397년 5월 15일 (태조 6년 음력 4월 10일) 한성부 준수방 (지금의 서울 통인동 137번지 일대로 여겨짐: 경복궁 서쪽 영추문 맞은편)에서 조선 3대 임금인 태종(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휘(이름)는 도, 자는 원정이다. 세종 임금은 1418년 8월 10일(음력) 아버지 태종의 내선을 받아 조선 제 4대 임금에 올랐다. 천성이 어질고 부지런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취미와 재능이 여러 방면에 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정사를 펼침에 있어 국민을 사랑하고, 국민의 어려운 생활에 깊은 관심을 가져, 국민을 근본으로 한 왕도 정치를 베풀었다. 집현전을 두어 학문을 장려하고 많은 인재를 길렀다. 특히 우리 겨레 문화를 높이는 데 기본이 된, 찬란한 문화 유산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세종대왕약력
1397년(태조 6년) 4월10일 이방원(후일 태종)의 셋째 아들로 출생
1400년 11월 태종 즉위
1418년(태종 18년, 22세) 6월 세자로 책봉, 8월10일 즉위
1419년(세종 1년, 23세) 6월 이종무 대마도 정벌
1420년(2년, 24세) 3월 집현전 확장, 영전사 대제학 직제학 직제설치
1421년(3년, 25세) 3월 금속활자 경자자 완성, 인쇄법 개량 10월 맏아들 향(후일 문종) 세자로 책봉
1424년(6년, 28세) 4월 불교종파를 선. 교 악종 36개 사찰로 통합
1427년(9년, 31세) 2월 박 연 편경제작
1430년(12년, 34세) 2월 농법 소개서 [농사직설] 반포
1432년(14년, 36세) 7월 함길도(지금의 함경도)에 경성도호부 설치
1433년(15년, 37세) 4월 최윤덕 압록강 이북 여진족 토벌
1440년(22년, 44세) 11월 함길도에 온성군 설치
1441년(23년, 45세) 8월 측우기 제작
1442년(24년, 46세) 3월 압록강, 두만강 일대에 성. 보 축조
1443년(25년, 47세) 12월 훈민정음 창제
1445년(27년, 49세) 10월 세계최대 한의학 백과사전 의방유취 편찬
1450년(32년, 54세) 2월 17일(양력 4월8일) 54세를 일기로 별세

* 창제의 동기와 목적
`훈민정음'이란 위대한 문화적 창조의 동기와 목적에 관하여는 `훈민정음' 가운데에서 세종대왕이 몸소 말씀하였다.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 有所欲言,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 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

이 말씀이 지극히 간단하나 자세히 살펴보면,그 속에 우리가 알고자 하는 바가 다 들어 있음을 알겠다. 곧,

① 우리 나라에는 독특한 배달말이 있으니, 이 말을 적어 내기에 알맞은 글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에 알려진 모든 다른 나라가 각각 제 나라 말에 알맞은 글자가 있는데, 우리 나라만은 글자가 없어, 남의 나라의 글자, 한문을 빌려 쓰니, 이는 안타까운 일이다

② 남의 글자 한문은 우리말과 서로 통하지 않는 글자일 뿐더러, 본디 어렵기 짝없는 글자이기 때문에, 우리 배달 겨레에게는 이중으로 어려워, 백성들이 다 배워 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세종대왕은 하늘이 내린 성인이로되, 한학에 정통하는 데는 많은 노력과 세월을 허비하였을 것이니, 시간과 경제의 여유가 없는 일반 대중이야 얼마나 그것이어려운 일인가 함을 아프게 느낀 것으로 보인다.

③ 일반 서민이 글자를 깨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뜻을 펴지 못한다 함이다. 곧 아랫사람의 뜻이 위에 사무치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이 억울한 일이 많아 정치가 명랑하지 못하니, 어진 정치의 이상에 위반함이라고 생각함이다. 정인지의 꼬리글에서도 이를

治獄者病其曲折之難通, ……以是聽訟, 可以得其情

이라고 하였다.

④ 이 새 글은 상하 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쉽게 익혀서 일상 생활에 편리하게 쓰도록 하고자 하는 것이라 하였다. 곧 민중 문화의 보급과 생활의 향상을 꾀함에 그 목적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위에 든 이유 밖에, 또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원인을 들 수 있지 아니할까 생각된다

① 고려 오백 년간에 끊임없이 다른 겨레들로 더불어 겨루는 살림을 하여 오다가, 끝장에는 몽골에게 큰 곤욕을 당하기까지 하였으니, 겨레 의식이 눈뜨게 되었음은 당연한 일이며,

② 원 나라, 명 나라의 갈음에 즈음하여, 왕조를 세운 조선 왕실에서는 저절로 자아 의식이 생기게 되었으며,

③ 세종대왕이 동북으로 `육진'을 개척하고, 서북으로 `사군'을 차려 놓고, 남쪽 백성들을 옮겨 심었으니, 자아 충실의 필요감이 강렬하게 되었으며,

④ 세종대왕이 전제, 세제를 개혁하여, 백성과 나라의 부강을 꾀하였으니, 경제적 및 사회적 발전에는 백성들의 지식의 보급이 앞서는 조건이 됨을 실감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사회적 원인에서, 만인을 뛰어넘는 밝은 지혜와 통찰력을 가진 세종대왕 은 제 겨레 특유의 말씨에 알맞고, 만백성이 깨치기 쉬운 민중의 글자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할 만하다.

*창제 결과
실록에는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및 반포에 관한 극히 간단한 기사 만이 있을 뿐이다. 이렇듯 완미한 과학적 짜임을 가진 글자가 하루 아침에 되었을 리가 만무하니, 필연코 오랜 동안을 두고 고심 연구한 결과로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고심 연구의 경과에 관한 기록이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다만, 이 문화적 대발명을 반대한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의 상소문 가운데에,

且今 情州椒水之幸 特慮年斂 扈從諸事 務從簡約 比之前日
十減八九 至於啓達公務 亦委政府 若夫諺文
非國家緩急不得已及期之事 何獨於行在而汲汲爲之
以煩聖躬調攝之時乎

라 한 것은, 위대한 창작에 지성을 다하신 성덕의 한 끝을 보여 주는 재료가 된다. 곧 세종이 한글의 창제에 밤낮으로 애썼기 때문에 안질이 나서, 이를 치료하기 위하여, 청주 초정에 거동하실새, 특히 연사가 나쁜 것을 염려하사, 시종이며 모든 절차를 열에 아홉은 덜고, 정무까지도 다 정부에 맏겨 버리게 되었는데, `훈민정음'의 연구 발명의 일만은 요양을 위주하는 행재소에까지 가지고 가서, 쉬지 않고 그 연구에 골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한 지성을 다하신 공으로 말미암아, `훈민정음'이 25년 계해 겨울에 다 되었으니, 오늘날 우리로서 상상하게 한다면, 그 때의 조야 민심은 이를 크게 반기고 기뻐하여, 세종대왕의 성덕의 가이없음을 우러러 기리어 마지아니하였을 것 같지마는, 사실은 이와 반대로, 곧 반대의 의논이 크게 일어났으니, 그 반포 시행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의 파란 곡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 창제는 언제?
세종실록'에 의하면, 그 창제는 세종 25년 계해 12월이요, 그 반포는 그보다 3년 뒤인 28년 병인 9월이다. 곧 `세종실록'(권 102) 25년 계해 12월 졸가리에, <

是月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 乃成字 凡千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雖簡要 轉換無窮 是訓民正音

이라고 하고, 또 정인지의 꼬리글 가운데에,

癸亥冬 我殿下創制二十八字

라 하였으니, 그 창제의 때를 알겠으며, 같은 책(권 113) 28년 병인 9월 졸가리에,

是月訓民正音成 御製曰 國之語音異乎中國……

라 하여, `훈민정음' 전문을 적어 놓았으니, 이로써 그 완성하고 반포한 때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이, `훈민정음'의 창제와 반포의 때를 적되 날짜는 밝히지 아니하였음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 창제의 날은 꼭 적기 어렵다 하더라도, 그 반포의 날은 분명한 것 이었을 터인데, 이를 밝혀 적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오백 년 뒤 우리들로 하여금 쓸데없는 모색과 시비를 하게 하였다. 그러나 상고한 바에 따르면 그 해의 9월이 작은 달이었으므로, 위에 적은 `훈민정음' 반포의 기사는 음 9월 29일로 미루어 볼 수 있다. 그래서 조선어 연구회(1908년 창립, 1931년에 조선어 학회로, 1949년에 다시 한글 학회로 개칭함)에서는 음 9월 29일(양력 10월 29일)로써, `훈민정음' 반포 기념일, 곧 한글날(처음에는 `가갸날')로 정하고 이를 해마다 기념하게 되었으니, 이는 한글 반포 제8주갑인 병인년(1926)에 비롯된 일이다. 그러다가 1940년에 발견된 진정한 `훈민정음' 원본의 꼬리글 끝에

"正統十一年九月上浣, 資憲大夫禮曹判書集賢殿大堤學知春秋館事,
世子右賓客臣鄭麟趾, 拜手稽首謹書"

란 말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정통 11년은 세종 28년 병인에 해당하고, `상한'은 곧 `상순'인즉, 늦어도 10일에는 반포된 것으로 생각되므로 9월 10일로써 그 반포일이라 할 만하다. 그래서, 이를 양력으로 환산하면, 10월 9일이 되니, 1940년에 조선어 학회(한글 학회) 에서는 10월 9일로써 한글날로 개정하였다.
재미있는 사실.

"한글"이란 이름은 누가 지어준 것인가
우리 겨레가 사용하는 글자의 이름을 말하며, 겨레의 가장 빛나는 문화유산이다. 세종(조선 제 4대 임금)이 1443년(세종 25년)에 창제하여 1446년(세종 28년)에 "훈민정음"이란 이름으로 반포한 글이다. 훈민정음은 발음기관과 삼재(하늘, 땅, 사람)를 본떠서 만든 독창적인 글자이다. 처음에는 28 글자였으나 현재는 "ㆍㆆㅿㆁ" 등 4 글자는 쓰지 않고 24 글자만 쓴다. 한글은 낱소리 글자이면서 음절 글자의 특징도 아울러 지닌 세계에서 으뜸가는 과학적인 글자로 인정되고 있다. 또한 이 지구에는 여러 종류의 글자가 쓰이고 있지만, 이러한 여러 글자 가운데 훈민정음과 같이 만든 목적과 만든 사람이 분명한 글자는 흔치 않다. "한글"이란 이름은 주시경 선생이 1913년에 만든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출처 : [기타] http://myhome.naver.com/michard/

출처:네이버지식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