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주론(6) : 세례요한의 불신이 예수님을 죽였다

2013. 1. 30. 01:29참사랑 영원까지/원리강론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가리켜서, 그가 바로 유대인들이 고대하고 있는 엘리야라 하셨고(마태복음 11장 14절), 이와 정 반대로 세례요한 자신은 이미 이 사실을 부인하여 버렸습니다.

이런 엇갈린 주장 속에서 유대민족은 누구의 말을 곧이듣고 따라 갔을까요?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당시의 유대인들의 눈에,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두 분 가운데서 누가 더 믿을 수 있는 인물로 비쳐졌던가 하는 데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민족의 입장에서 본 예수님의 모습>

예수님은 빈천한 목수의 가정에서 생장한 하나의 배우지 못한 청년이었습니다.

이런 청년이 이름 없이 일어나 스스로 안식일의 주인이라 칭하면서 유대인들이 생명과 같이 여기는 안식일을 범하였습니다(마태복음 12장 1 - 8절).

따라서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는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었던 것입니다(마태복음 5장 17절).

그 결과 예수님은 유대인의 지도자들에게 몰리고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는 수 없이 갈릴리 바닷가를 두루 도시며 어부를 불러 제자를 삼으시고,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마태복음 11장 19절).

그러면서 예수님은 유대교의 지도자들인 제사상 교법사 서기관 바리새인들보다도, 세리들과 창기들이 먼저 천국에 들어간다고(마태복음 21장 31절)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시 유대교인들의 윤리적인 잣대로 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여인이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털로 씻은 후에, 그의 발에 입을 맞추고 값진 기름을 부은 일이 있었습니다(누가복음 7장 37 - 38절). 아무리 존경하는 종교지도자에 대한 행동이라도 현대사회에 있어서도 용납되기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하물며 음행 하는 여인을 잡아 재판절차를 거치지 않고 돌로 쳐 죽여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당시 유대인의 엄격한 윤리사회에서 어떻게 이러한 일들이 허용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을 용납하셨을 뿐 아니라 그 여인의 태도를 비난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시고, 도리어 그 여인의 행위를 칭찬하셨던 것입니다(누가복음 7장 44 - 50절, 마태복음 26장 7 - 13절).

한편 또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면서 당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입장에 세우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요한복음 14장 9절).

그리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자가 없다고 주장하시기도 하셨습니다.(요한복음 14장 6절) 또한 당신을 그들의 부모나 형제나 처자나 무엇보다도 더 사랑해야 된다고 강조하셨습니다(마태복음 10장 37절, 누가복음 14장 26절).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본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그를 '마귀'의 왕 바알세불이 접한 사람이라고 비난하며 조소하였던 것입니다(마태복음 12장 24절).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전후 사정을 종합하여 볼 때, 당시의 유대인들의 눈에 비친 예수님은 결코 믿기 어려운 분이셨던 것입니다.

<유대민족의 입장에서 본 세례 요한의 모습>

세례 요한은 당시의 명문가인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누가복음 1장 13절).

태어날 때에도 이적기사를 동반하였습니다.

그의 부친이 지성소에서 분향하고 있을 때에, 그 아내가 아들을 잉태하리라는 천사의 말을 전해 들었지만 곧이듣지 않음으로 벙어리가 되었다가, 요한이 출생한 후 그 이름을 서판에 쓰자마자 그 입이 열린 이적기사로 인하여, 온 유대고을 사람들이 크게 놀랐던 것입니다(누가복음 1장 9 - 66절).

그 뿐만 아니라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으로 연명하면서 수도생활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의 빛나는 신앙생활을 보고, 일반 유대인들은 물론 제사장들까지도 그에게 혹 당신이 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물어볼 정도로 훌륭하게 보였던 것입니다(누가복음 3장 15절, 요한복음 1장 20절).

<누구의 말을 더 믿을 수 있었겠는가?>

이상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은 그 당시의 사정을 놓고 과연 누구의 말을 더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세례 요한의 말이었을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을 엘리야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증언보다도, 자기는 엘리야가 아니라고 부인한 세례 요한의 말을 더 믿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의 말을 더 믿게 되었고, 예수님의 엘리야의 재림자가 세례요한이라고 한 말씀은 메시아로 자처하기 위한 일종의 위증이 되고 말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연히 망언자로 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대한 세례요한의 불신과 무지>

당시의 제사장이나 전 유대인들이 세례 요한을 우러르던 마음은, 그를 메시아로 생각하는 데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누가복음 3장 15절, 요한복음 1장 20절).

그러한 때에 만일 세례요한이, 자기가 바로 예수님이 증언하신 그대로의 엘리야라는 것을 선포하고 나섰더라면, 메시아를 맞기 위하여 엘리야를 고대하고 있었던 전 유대인들은, 이러한 세례 요한의 증언을 믿게 되어 모두 예수님 앞으로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끝내 자기는 엘리야가 아니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의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무지는 유대인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던 주요한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일찍이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자기 뒤에 오시는 이(예수님)는 불과 성신으로 세례를 주시기 때문에, 자기는 그의 신들매를 매기에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증거하였습니다(마태복음 3장 11절).

그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1장 33절을 보면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 이(하나님)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그리스도)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였노라"고 한 세례 요한의 고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세례 요한에게 정확하게 직접 계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 자신도 또 그렇게 증거하였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장 23절을 보면, 자기는 그의 길을 곧게 하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왔다고 하였고, 요한복음 3장 28절에는, 자신이 그리스도에 앞서 보내심을 받은 자임을 말한 기록이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두가지 섭리적 사명>

첫번째는 증거자의 사명입니다.

사실상 세례요한은 예수님에게 세례를 주고 그를 메시아로 증거 함으로써, 메시아의 증거자로서의 사명은 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 번 증거하는 것만으로 사명을 다 했다고 보기에는 미흡한 면이 있습니다. 그 때로부터 종신토록 증거하고 다녔어야 진정한 증거자의 사명을 다 했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일단 증거는 하였기 때문에 증거자의 사명을 다 했다고 한다면 그 후의 사명은 무엇이겠습니까?

두번째는 모시고 섬기는 사명입니다.

세례요한 잉태시에 그의 부친 사가랴는 성령에 감동되어 아직 복중에 있었던 세례 요한을 에게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누가복음 1장 75절)고, 그의 사명을 분명히 예언하였습니다.

따라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증거한 후에는, 제자의 입장에서 그를 모시고 섬겨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후에 예수님과 분리되어서 따로 세례를 주고 다녔기 때문에, 누가복음 3장 15절을 보면 유대인들은 도리어 세례 요한을 메시아로 혼동하였고, 한편 또 요한복음 1장 20절을 보면 제사장까지도 그렇게 혼동하였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과 세례요한의 제자가, 서로 자기의 선생이 세례를 많이 준다고, 세례를 중심하고 다툰 일까지 있었습니다(요한복음 3장 25절).

그리고 요한복음 3장 30절에, 세례 요한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한 것을 보더라도, 세례요한은 예수님과 흥망성쇠의 운명을 같이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세례요한은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고, 마침내 예수님을 위하여 바쳐야 할 그의 목숨마저 별로 가치도 없는 일에 희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요한과 타락한 인간 세례요한>

세례요한은 성령에 감동되어 그 중심이 하늘편에 있었을 때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증거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서 하늘의 역사가 끊어지고 인간 세례요한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 보았을 때에는 도저히 메시아로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세례요한은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태복음 11장 3절)하고 질문하면서 그 의심을 풀어 보려 하였습니다.

이러한 세례 요한의 질문을 받게 된 예수님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태복음 11장 4 - 5절)고 완곡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한다고(마태복음 11장 5절) 하신 말씀에는, 세례요한과 유대인들의 불신에 대한 예수님의 비감한 심정이 어리어 있는 것입니다.

선민으로 부름을 받았던 유대민족, 그 중에서도 특히 세례요한은 하늘의 사랑을 넘치도록 받은 부유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배반하였으므로, 예수님은 갈릴리 바닷가를 헤매시고 사마리아 땅을 두루 도시면서 가난한 자 가운데서 복음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을 찾으셨던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불학무식한 어부들과 세리와 창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지상천국을 건설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은 따라 다니는 천명보다도 먼저 천명을 영도할 수 있는 한 사람이 더욱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늘이 예비한 능력 있는 무리들을 찾으시려고, 제일 먼저 성전으로 들어가 제사장과 교법사들에게 복음말씀을 전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예비한 잔치에 청함을 받은 손님들은 하나도 응해 오지 않았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거리에 나가 방황하는 거지떼를 불러 모아야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었어야할 세례요한>

그러므로 예수님은 드디어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태복음 11장 6절)라고 하는 심판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메시아를 위하여 복중에서부터 택함을 받았고, 광야에서 어려운 수도생활을 하여 온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잘 모시기만 했더라면, 그는 틀림없이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모시는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으므로, 예수님의 수제자의 자리는 침노한 베드로에게 빼앗긴 바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지혜롭게 행동하였더라면, 예수님의 무릎 밑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요, 따라서 그의 행적은 영원히 의로서 남아질 것이었는데, 불행히도 그는 무지하였기 때문에, 자신은 물론이어니와 유대인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마저 모두 막아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볼 때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 길을 가게 된 큰 요인이 세례요한에게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서를 대하는 신앙인의 올바른 태도>

우리는 성서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예수님에 대한 세례요한의 무지와 불신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게 된 원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기막힌 하늘의 비밀을 밝힌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세례요한을 무조건 위대한 선지자라고 단정하는 견지에서 습관적으로만 성서를 보아왔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습관적인 신앙관념과 고루한 신앙태도를 과감하게 벗어 버리고, 신령과 진리면에서 항상 올바른 신앙을 가져야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주의 재림기를 맞이한 우리들도 세례요한과 같이 주님을 불신하고 실족하여 영원을 두고 슬피 울며 탄식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