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론(1) : 부활의 의의와 부활의 기쁨

2013. 1. 30. 01:30참사랑 영원까지/원리강론

기독교에서는 해마다 4월을 부활의 달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부활절을 기념하는 이유>

부활절은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부활의 기쁨으로 승화되었음을 선포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부활절은 해마다 그 날이 다릅니다. 계산상 가장 빠른 부활절은 3월 22일(서기 2285년), 가장 늦은 부활절은 4월 25(서기 2038년)일 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탄절과 달리 부활절은 왜 해마다 날짜가 바뀔까요? 그것은 부활절이 음력을 기준으로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음력을 기준으로 하는 우리의 설날이나 추석이 매년 날짜가 바뀌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음력을 사용하는 유대인의 유월절 직후에 일어났는데, 유월절은 우리의 정월 대보름보다 대략 한 달이 늦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기독교가 지키는 부활주일은 춘분 다음에 오는 만월 후의 첫 주일입니다. 만약에 만월이 주일일 경우에는 그 다음 주일이 부활주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성도들에게 있어서 4월은 매우 중요한 달 입니다.

<문선명 총재님께도 4월은 매우 중요하다>

또한 통일원리를 선포하신 문총재님의 생애노정에도 4월은 대단히 중요한 달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4월 달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셨기 때문입니다.

그 날에 바로 1935년 4월 17일 새벽입니다. 선생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묘두산 꼭대기에서 밤새도록 눈물을 흘리시면서 기도하시던 중에 예수님을 만나 섭리의 사명을 인계 받으셨다고 합니다.

문총재님께서는 늘 "무지에는 완성이 없다" 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한다고 하더라도 진정한 부활의 의의를 알지 못한다면 신앙의 목적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을 통해서 부활의 의의가 무엇인가를 확실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부활의 의의는 무엇인가>

성경말씀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시리라." (설전4:16-) 고 하셨고,

마태복음 27/52에는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리라.” 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성서의 예언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이미 흙속에 파묻혀 삭아져버린 모든 성도들의 육신이 다시 원상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나올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적인 입장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현대인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 결국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커다란 혼란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의 진정한 내용을 해명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가끔 죽은 성도를 부활시킨다고 특별한 종교의식을 하는 성도가 있어 사회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는 성경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고 부활을 위한 의식을 하고 있었는데 세상사람들이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그들을 일러 광신도라고 합니다.

어째서 성경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으면 광신도 취급을 받게 될까요? 그 이유는 부활의 성서적인 개념을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의의를 알려면 먼저 성서가 말하는 생과 사의 개념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부활을 알려면 생사의 성서적 개념을 알아야>

누가복음 9장 60절을 보면 , 부친을 장사하기 위하여 자기 집에 가려고 하는 제자에게 예수님은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하여금 장사하게 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죽음과 삶에 각각 서로 뜻을 달리하는 두 가지의 개념이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장사를 치러야할 부친과 같이 육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죽음에 대한 생사의 개념이요,

둘째는 그 부친을 장사하기 위하여 모여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을 지적하여 말하는 [죽음]에 대한 생사의 개념입니다.

그렇다면 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을 죽은 자라고 했을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사탄주관권내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죽음은 육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죽음이 아니라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품을 떠나 사탄주관권 내에 떨어진 것을 의미하는 죽음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죽음에 대한 삶의 뜻은 하나님의 주관권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육신이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탄주관권내에 있으면 그는 죽은 자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에는 "네가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되 죽은 자로다"(계3:1)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육신의 목숨이 끊어진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의 영인체가 영계의 천상천국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주관권 내에 거하고 있다면 그는 어디까지나 살아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육신의 생명이 끊어지는 죽음은 영원한 생명에 아무런 영향을 가져 오지 못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죽음은 인간 창조본연의 가치를 잃어버린 죽음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시계를 놓고도 죽었다. 살았다 하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시계가 잘 돌아가면 "시계가 살았다" 고 말하는 데 멈추어 있으면 "저 시계가 죽었구나" 하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창조본연의 가치를 나타내는 사람은 산 사람이지만 타락한 인간은 죽은 자인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죽음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죽음은 어떤 죽음일까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타락으로 인한 죽음은 육신의 죽음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창조원리에 의하면 하나님은 원래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노쇠하면 그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도록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육신은 영인체의 옷과 같아서 옷이 더러워지면 벗어버리듯이 육신이 노쇠하면 벗어버리고 그 영인체만이 무형세계에 가서 영원히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통일원리에는 다음과 같은 결론적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일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지상인들은 같은 지상인들 사이에서와 마찬가지로 영인들과도 자유로이 만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육신을 벗는 것이 결코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뿐만 아니라 인간이 지상에서 완성되어 생활하다가 노쇠한 후에 육신을 벗고 가게되는 그 영인의 세계가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 것인가 하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면, 외외려 육신을 벗고 그 세계로 갈 수 있는 날을 그리워하며 고대하게 될 것이다."

<타락으로 인한 죽음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볼 때 두 가지의 죽음의 개념가운데서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죽음은 육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죽음이 아니라 , 죄를 지음으로 사탄주관권에 떨어진 죽음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에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 3:14)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영생이니라"(롬6:23)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소망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6)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이를 믿는 자는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고 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인 말씀을 보면 에스겔서 3장 21절에 "범죄치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범죄 때문에 죽는 죽음인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자는 죄 짓는 것을 가장 두려워 합니다. 죄는 영혼을 죽이는 독약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죄를 지으면 반드시 엄청난 댓가를 치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보면 죄를 지었을 때에 가장 처절한 고난을 당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제물을 잘못드린 죄, 광야에서 모세를 불신한 이스라엘 민족의 죄, 예수님을 불신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죄에 대한 무서운 탕감의 역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부활은 복귀되어 가는 과정적인 현상>

그렇기 때문에 부활의 의의는 “인간이 그의 타락으로 초래된 죽음 즉 사탄주관권내에 떨어진 입장으로부터 복귀섭리에 의하여 하나님의 직접주관권 내로 복귀되어 나아가는 그 과정적인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5장 24절에 “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부활은 육체적인 변화가 아니라 심령의 변화다>

따라서 부활은 외적인 육체적인 변화가 아니라 심령의 변화입니다.

그러므로 아담 해와의 타락전후도 육체적으로는 무화과 나뭇잎으로 하체를 가린 정도의 변화가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신약성서에는 육체부활로 보이는 성귀가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마태복음 27장 52절에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만약에 이 말씀이 문자 그대로 이루어 졌다면 당시에 부활한 선지자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부활은 순간이 아니라 영생입니다. 그러므로 영생하는 선지자들의 활동기록이 있어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의 부활과 동시에 기독교인들의 수난의 역사는 종지부를 찍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절을 기념하고 완전한 기독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 후에도 오랜세월동안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와 처형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 성경의 내용은 육안으로 본 것을 기록한 것이 아니고 영안으로 보고 기록한 내용인 것입니다.

<부활의 기쁨은 이 세상 최고의 기쁨>

우리는 부활의 의의를 알았습니다.

부활의 의의를 안 다음에는 사탄주관권을 벗어나 하나님 주관권 내로 복귀 되어가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하나님 주관권으로 조금이라도 더 옮겨지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불신에서 믿음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미움에서 사랑으로, 무지에서 지에로, 무정에서 심정으로, 악에서 선으로, 이기주의에서 이타주의로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생활을 해야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부활을 간절히 기다리시는 하나님꼐서는 말할수 없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얼마 전 탤런트 이광기 씨가 신종풀루로 사랑하는 아들 석규를 잃었습니다. 비틀걸음으로 "석규야!. 석규야!" 하면서 울부짖는 아빠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만약에 그 석규가 부활한다면 아빠 엄마가 얼마나 좋아할까요? 모든 것을 다 바쳐도 아깝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지방에서 목회를 하고 있을 때 한번은 아주 어려운 교회에 발령을 받았습니다. 식구는 많지 않고 좋지 않은 소문은 온 동네에 무성한 교회였습니다.

나는 매일같이 전단지를 들고 가정을 방문하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하나 통일교회 전도사인 나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언덕바지에 있는 작은 집 한쪽 구석 단칸방에 세 들어 사는 가난한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방에는 창백한 얼굴로 숨을 몰아쉬는 아저씨가 앉아 계셨습니다. 통일교회 전도사라고 소개하였더니 "어서 오시라" 면서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말씀을 줄 수 있는 대상을 만난 나는 신이 나서 날마다 찾아가 심방강의를 하고 기도를 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사람이 자기스스로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그 사람은 폐병 말기 환자였습니다. 요즘 같으면 산소 호흡기를 끼고 중환자실에 있을 처지인데 , 병원에 갈 돈이 없어서 어짜피 죽을 몸이라며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지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수수깡처럼 마른 몸으로 허수아비처럼 몸을 흔들면서 기관지에서 나는 쉿소리와 함께 예배를 드리러 온 것입니다.

예배를 드린 후에 그 분께서 말씀하시기를 "목사님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서 다섯걸음을 걷고 5분 쉬면서 찾아 왔습니다"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목회를 해 왔지만 그 분처럼 힘들고 간절한 마음으로 제단을 찾아 온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몇 주가 지난 뒤 새벽에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죽어서 장사를 지내고 있는 데 칠성판에 시체를 뉘이고 하얀 이불보를 씌워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이불보가 흔들리면서 죽은 시체가 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모두들 놀래서 " 000아버지가 살아났다" 소리를 지르며 동네잔치가 벌어지는 꿈을 꾸고 깨었습니다. 예감이 이상해서 찾아가 보았더니 이미 죽어서 장사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야말로 "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11:25) 라는 성경말씀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육신은 죽었으되 영은 부활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 사람이 부활했을 때 하나님이 얼마나 좋아했겠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그 사람을 부활시킨 교회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내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 냉냉했던 교회는 따뜻한 분위기가 돌고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시키는 교회는 성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는 사람이나 부활시키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체휼하게 됩니다.

<부활의 맛을 보았던 통일교회 초창기 신앙생활>

초창기에 통일교회식구들에게 내렸던 부활의 은혜를 문총재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이 맨 처음 통일교회에 들어 왔을 때는 누구나 한바탕 좋아했던 때가 있습니다. ‘ 왠지 모르게 교회에 오고 싶어서 죽겠다. 교회에 가고 싶어서 죽겠다’ 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교회문을 닫아 버려도 문을 타고 넘어 오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교회 구석에서라도 하룻밤 자는 것이 소원이었다는 것입니다.--- 또 교회에서 밥을 먹으면 밥이 왜 그렇게 맛이 있는 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도깨비가 붙은 것도 아니고 다른 밥과 똑 같은 밥인데 별미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은혜에 취해 보세요 . 세상이 왕궁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시궁창 안에 들어가 있어도 그 자리가 왕궁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말씀선집 36권 118면)

<부활한 사람이 느끼는 식구의 정>

"옛날에는 그랬다구요 임지에 나가 전도할 때에 , 서로가 갑.을 지역에 떨어져 있으면 만났다가 헤어질 때, 보고 싶어서 서로가 바래다 주기 위해서 저기까지 갔다 또다시 바래 주기 위해서 왔다가, 갔다가 왔다가 하면서 밤을 새우는 일도 있었어요. 형제끼리도 그런다구요. 동생이 가는 어려운 길을 걱정하면서 먹을 것이 있으면 그걸 먹지 못하고 싸 가지고 오십리 길이 멀다 하지 않고 줄달음을 쳐서 갖다 주곤 했어요 . --- 형제 이상의 정이 여러분들 사이에 맺어지지 않고서는 천국에 못갑니다."(말씀선집 49권 229면)

<말씀 앞에 은혜의 눈물바다를 이룬 식구들>

"여러분이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처음 말씀을 들으면 눈물바다를 이룸니다. 심지어는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립니다. 자기 집에 가는 것은 죽는 것 만큼 싫고, 교회에 오는 것은 참 기분 좋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것을 느껴 봤어요?. 모든 것은 뿌린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 말씀선집 35권 67면)

<거룩한 은혜를 소낙비처럼 내리는 부활의 은사>

그 때부터 지금까지 통일교회 식구들은 [동산의 노래]를 즐겨 부릅니다.

주님 자기 동산에 오셨네 그 좋은 향기 진동해 백합화 번성해 백합화 번성해

거룩한 은혜 주님이 내려 주시니 죽은자 다시사네 죽은자 다시사네

가물어서 메마른 이 땅에 신선한 샘물 대 주사 옥토가 되었네 옥토가 되었네

주님이 원수 이기사 이 세상 꽃밭화하고 한나라 이루었네 한나라 이루었네

주를 믿는 형제 자매어 이 복된 말씀 들으라. 임 뒤를 따르세 임 뒤를 따르세

여기서 시련 고통이 저기서 복이 되리라 본향에 이르르면 본향에 이르르면

부활의 맛을 보지 못한 사람은 이 성가의 맛을 모를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가가 주는 힘 즉 모든 사망의 기운을 이기는 힘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부활의 시작은 받는 것으로 이루어지지만. 부활의 완성은 주는 것으로 완성됩니다.

<부활은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목적이요, 복귀섭리의 끝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타락한 인간에 대한 섭리의 목적은 부활에 있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는 타락한 인간의 삶은 영적으로 보면 무덤 속과 같습니다.

부활이 없는 생활 내용은 짐승보다 못한 영원한 죽음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길은 타락한 인간으로서 반드시 이루어야 할 목표입니다. 만약에 살아서 못 이루면 죽어서도 가야할 길이 바로 부활의 길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