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편 신앙생활과 수련 - 제1장 신앙생활은 무엇인가_ 3절

2013. 3. 6. 13:25참사랑 영원까지/천성경

3절 신앙생활의 길

1 인간은 타락한 인류시조의 후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타락의 고개를 넘지 않으면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길이 없고,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조차 없습니다. 또 타락성을 지닌 존재로 떨어진 인간으로서는 타락했던 고개를 되넘어갈 수 있는 길을 모색했댔자 자체로서는 불가능합니다. 타락했던 고개를 되넘는 데는 반드시 내 힘이 아닌 제삼자의 힘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 오늘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우리인데, 고맙게도 하늘이 우리를 버려두지 않고 타락의 고개를 넘게 하기 위해 지금까지 역사를 통해서 수난을 당하면서 그 책임을 짊어지고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길
2 참된 신앙의 길이라 할 때 참이란 하나밖에 없습니다. 신앙의 대상은 누구냐? 절대적인 하나님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뜻에 맞게끔 하나님이 원하는 소원의 목적지를 찾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세계적인 신앙계가 혼란이 벌어지는 것은 신앙의 목적이 자기를 중심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임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벌어졌습니다.

3 모든 것이 자기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완성하는 것도 자신에게 달려 있고, 완성을 못하는 것도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성공하는 것도 자신에게 달려 있고, 성공을 못하는 것도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일평생 같은 신앙생활을 하지만, 원래 양심을 중심삼고 최고의 목표에 도달하고 싶다는 것은 만민 공통입니다. 그러나 최고의 기준에 도달한다고 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최후에는 점점 적어집니다. 최후에는 하나면 전체가 완성한다고 하는 결론을 내지만, 그 하나에 도달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양심은 선한 목적을 향해 지금까지 역사를 통해 왔지만 인간으로서 원하는 곳을 완성한다는 것은 여간한 일이 아닙니다.

4 생활 가운데 어떠한 자리에서 하늘과 동행할 것인가 하는 평가의 기준을 키워 나가는 생활이 통일교회의 신앙생활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저나라에 갔을 때 재산이 되고, 앞으로 새로운 세대에서 역사의 주인공이 되느냐 아니면 낙오자가 되느냐를 결정하는 경계선이 되는 것입니다.

5 우리에게는 승리적 기준이 필요합니다.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출발의 기점이 필요합니다. 이 말은 자기가 주체적 입장에서 승리적 기준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목적하는 바를 실현시킬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논리입니다. 그러면 승리적 기준을 어디에 세우느냐? 그것은 나 자신에 세워야 됩니다.

6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하나님의 전체 사명을 대신 짊어지고 천주에서 벌어진 이 싸움을 완결하기 위한 책임자로 섰을 때 언제나 문제시했던 것이 하나님과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천주의 중심이 되어야 하고 자신은 실체의 중심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것을 언제나 염두에 두고 나갔습니다. 만약 여기에서 간격이 벌어지고 하나의 목적 기준을 중심삼고 상충이 벌어지게 될 때는 승리의 방향으로 전진할 수 없는 것입니다.

7 예수님이 언제나 심중으로 깊이 생각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은 언제나 하나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승리적 주체인 하나님을 중심삼고 내가 땅에 있어서 주체적인 입장에서 승리적 기반을 갖추기 위해서는 먼저 내 마음에 하나님을 모셔야 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일러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한 말이 성립됩니다. 결국 승리적 기준이라는 것은 땅에서 하나님의 실체 되는 예수님을 중심삼고 성전과 같은 입장에서 일체가 되는 기반입니다. 즉 승리적 기준을 결정짓는다는 것을 표준 하지 않고는 복귀의 완결이라든가, 혹은 그 당시 예수님의 사명을 종결지을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신앙 기준을 세워 출발하지 않고는,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했고, 아무리 어려운 노정을 경과했다고 하더라도 승리의 기준을 갖춘 입장에 섰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일 큰 문제는 승리의 기준을 자기 자체 내에서 먼저 결정지을 수 있는 한때를 가져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8 여러분이 참을 찾으려 할 때에는 참을 찾을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껴야 될 것이며, 하늘과 땅이 즐길 수 있는 진리를 찾고자 원할 때에는 여러분의 몸이 스스로 참된 몸이 될 수 있는 참의 상대기준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됩니다. 참되신 하나님과 참된 진리와 참된 인간은 각각 그 존재방식이 다르지만, 내적 기준에 있어서는 같은 방향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진리는 같은 방향을 향해 영원히 실존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바라보며 누구든지 이 세상이 참된 세상이 되지 못한 것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또 자기 자신을 반성해 보며 참된 자신이 되지 못한 것을 한탄하고 있으며, 우리가 신앙의 길을 걸어 나가면서 참된 하나님을 찾고자 원하되 참된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을 또한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자들의 고통입니다.

9 우리가 생명을 걸어 놓고 신앙하는 것을 두고 볼 때도 한낱 흘러가는 세파와 더불어 흘러가 버리기를 바라고 신앙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생애를 걸어 놓고 심각한 입장에서 신앙하면 할수록, 그 문제가 중하면 중할수록 그것이 깊게 넓게, 혹은 길이 남아지기를 누구나 원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여 바라보게 될 때에 심각한 하나님이라면 그 누구보다도 심각한 관점에서 자기를 보아 주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의 소원일 것입니다. 또 자기가 연유되어서 세계에 그 무엇이 남아질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신앙자로서 그 누구나 갖지 않을 수 없는 태도입니다.

10 신앙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소원은 우리가 먹고 자고 하는 일상생활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다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마라. 그것은 다 이방 사람이 원하는 것이다. 너희는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11 환경을 극복하여 하나의 새로운 면의 돌파구를 이루어서 매일같이 방향을 달리하는 길을 찾아가지 않고는 하나님이 원하는 세계로 갈 수 없는 것이 신앙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신앙길을 가기 위해서는, 내 힘이 부족하고 나 자신이 하나님을 중심삼은 어떠한 습관적 기준, 생활적 기준을 갖지 못함으로써 이것이 변하기 쉬우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표준으로 해서 오늘의 생활을 조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타락성을 벗어 가는 길
12 인간은 원래 위할 수 있는 한 중심과 연결되어 자기 생을 출발하게 되어 있었는데, 타락으로 인하여 그 누구를 위하는 데에서부터 자기 생을 출발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위하는 데에서부터 생을 출발하게 되었고,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만 생각하고 인연맺으려 하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자유와 평화를 목표하고 나아가는 우리는 모든 것을 자기를 위한 일에 귀결시키려는 타락성을 벗어 버리고 자기를 넘어서 먼저 그 누구를 위할 수 있는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13 우리는 자신을 자랑하기에 앞서 타락의 종족임을 자인해야 됩니다. 자신의 무엇을 나타내기에 앞서 타락성에 물든 죄악 역사를 드러내고 죄악의 본성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런 입장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자리를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고 있습니다. 하늘은 기필코 역사적으로 물든 죄상을 청산해야 되고, 혈통적으로 맺혀져 내려오는 죄악의 원한을 풀어야 됩니다.

14 동료 간이나 사제 간에 있어서, 혹은 가정에 있어서 나와 관계맺은 사람들 가운데 변명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 보십시오. 여러분은 자기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누구도 어떻고 어떻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을 끌고 들어가려고 합니다. 누구도 그랬는데, 동생도 그랬는데 왜 나만 나무라느냐고 합니다. 이것은 거짓입니다. 자기가 잘못했으면 솔직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을 물고 들어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솔직해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더더욱 솔직해지라는 것입니다.

15 완전한 물건이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결합하게 될 때 완성된 물건이 됩니다. 하나의 집이 완성되려면 문짝이라든가 거기에 소속되는 일체의 부속품이 완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의 집이 완성됩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완전한 개체를 추구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복음 5장 48절에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들도 온전하라.’라고 했습니다. 그 표준이 하늘의 완전함과 같이 너희도 완전해지라는 것입니다. 절대에 가까운 대상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두말할 것이 없습니다. 절대자 앞에 대상으로 서기에 부끄럽지 않은 완전품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생활에서부터 분석해야 됩니다. 생활을 전부 헤쳐야 합니다. 우리 생각도 전부 헤쳐 버려야 됩니다. 우리 사지백체, 우리 감각기관까지도 분석해야 됩니다. 내가 느끼는 것도 전부 옛날과 달라져야 되는 것입니다.

16 타락한 인간 앞에 긍정적인 요인이 남아 있을 때는 타락성을 지니고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렇게 볼 때 완전 분해해야 합니다. 그 형태와 그 요소를 그냥 연결시키는 자리에는 타락성 요인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완전 분해, 완전부정이 아닙니다. 완전 분해라는 것은 완전부정입니다. 참다운 인간 본연의 이상적인 소원성취의 길은 타락한 인간에게 있는 긍정적인 요인을 가지고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까지 결론을 짓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신이 종교를 통해서 그의 섭리 목적을 추구하고 계시다면, 그 신이 주장하는 행로, 노정은 긍정이 아니라 절대부정입니다. 절대부정으로 출발한 기준이 나오지 않고는 타락한 인간 앞에 절대자의 상대이념을 성취시킬 수 있는 길은 있을 수 없습니다.

17 타락성을 완전히 해탈해야 됩니다. 타락성을 완전히 해탈하기 위해서는 자기 개인에서부터 해탈해야 됩니다. 그리하여 개인에서 승리해야 되고, 가정에서 승리해야 되고, 민족·국가·세계·천주까지 승리해야 됩니다. 이것이 타락성 해탈권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상대적 자기를 발견하게 될 때는 대번에 하나님이 주관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과 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18 여러분이 하늘 앞에 설 때에, 부족한 자기 자신을 발견해야 되고 죄인 아닌 죄인임을 인식해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진흙과 같이, 흙덩이와 같이 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있다는 것을, 자신을 인정해 놓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는 말이 거기서 성립됩니다. 이 눈이 타락성을 갖고 있고, 이 귀가 타락성을 갖고 있고, 이 입이 타락성을 갖고 있고, 이 몸이 타락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완전히 배제해 버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렇게 빚으면 이렇게 가고, 저렇게 빚으면 저렇게 가고, 내밀라 하면 내밀고, 후퇴하라면 후퇴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야 됩니다.

19 인식이나 의식을 바꾼다는 것은 무섭고 어려운 것입니다. 한번 습관을 잘못 들이면 고치기 힘듭니다. 그래서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수십년이 되었어도 사회에서 살던 습관성이 근절 안 됐다는 것입니다. ‘뜻을 위해서 희생하라, 희생하라.’라는 말은 하지만 진짜 희생했느냐? 희생할 수 있는 자리와 희생 안 하고 갈 수 있는 자리를 택하라면, 희생할 수 있는 자리에 가겠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못 되어 있습니다. 생활하는 인간의 역사적 전통을 따라 습관성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 같은 사람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사망에서 나를 누가 해방하리요.’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습관성 때문입니다. 두 법이 있어서 마음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 몸은 사탄의 법을 따르는 그 중간에 자기 자신이 놓여 있기 때문에 ‘오호라!’ 하면서 탄식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망의 그늘에서 누가 해방할 것이냐고 말입니다.

20 생애의 몇 년간에 걸쳐서 붙여진 습관성을 없애기 위해서는 죽기까지 노력해도 오히려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몇 백만년이나 계속되어 온 습관성과 타락성을 빼낸다고 하는 것은 몇 세기의 인생노정을 가지고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이론적입니다. 이것은 심각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타락성에 대해서 그저 막연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먹어서 얻은 습관이 아닙니다. 골육을 받아 계승하고, 혈통을 받아 계승한 것입니다. 그리고 혈육을 섞어서 된 습관성입니다. 거기에 사람의 힘으로는 빼낼 수 없는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세계 만민을 안을 것 같은 커다란 나무와 같이 된 것입니다.

21 타락성에 대한 자각, 타락의 한에 대한 자각을 해야 됩니다. 에덴에서 쫓겨나 눈물을 흘린 아담 해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을 회상하는 것입니다. 그 이상 간곡하게 부모를 붙들고 하나되기 위한 마음이 사무쳐서 천년만년 죽음의 고개가 있더라도 그것을 넘고 넘어가겠다는 마음이 앞서야 됩니다. 그래서 몸 마음이 하나될 수 있는 자리를 찾지 않고는 승리의 패권 기반이 지상에 횡적으로 전개되더라도 나와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본연의 나를 찾는 길
22 여러분은 찾아야 할 본연의 나를 놓고 기뻐하지 못하는 자신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슬픔에 처해 있는 자신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떠한 세계를 보고 슬퍼할 것이 아닙니다. 고통을 느끼더라도 어떠한 상대적인 세계에서 벌어지는 고통을 느껴서는 안 됩니다. 슬픔과 고통을 느낀다고 한다면 참된 나를 찾지 못한 슬픔, 참된 나를 찾지 못한 고통을 느껴야 합니다. 세상에 슬픔과 고통이 많이 있다 할지라도 참된 나를 찾지 못한 슬픔과 고통보다 더한 고통과 슬픔은 없습니다. 그러면 창조주 하나님이 지금까지 누구를 찾아 내려오고 계십니까? 여러분 자체, 즉 나를 찾아오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내가 완전히 결정되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할 때 완전히 하나의 실체를 중심삼은 참된 가정, 참된 가정을 중심삼은 사회, 국가, 더 나아가 국가를 단위로 한 세계, 세계를 단위로 한 천주와는 인연을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내가 되는 것이 모든 단계의 제일 기준이 됩니다.

23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반한 까닭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렸고, 하나님의 실체를 잃어버렸고,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의 심정은 어떠했으며, 실체를 지을 때의 심정은 어떠했으며, 그 실체를 통하여 자랑하고자 하던 하나님의 내적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린 자요, 본연의 실체를 잃어버린 자요, 하나님의 이념 동산을 움직여 낼 수 있는 사랑의 실체를 잃어버린 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나를 세워 자랑할 수 없는 죄인인 것을 깨달아야 됩니다. 또한 내 실체를 세워 주도적인 행사를 일으킬 수 없는 존재요, 내 마음을 세워 안식의 터전을 찾을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24 마음은 가는 길을 자꾸 막습니다. ‘돌아서라. 옛것으로 돌아가라. 마음 깊은 데로 돌아가라.’라고 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참선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본연의 나를, 본연의 마음을 찾아 들어가야 하는 것은 서러운 이 땅 위의 생활이요 오늘날 이 땅 위의 현실이지만, 옛것으로 돌아가서 이것을 청산한 후에는 꿈에라도 과거를 생각한다는 일은 지긋지긋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없애 버리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러니 새로운 이상세계와 새로운 소망에 취하여 살아야 합니다.

25 세상 사람이 요구하는 것은 좋은 것을 먹으려고 하고, 좋은 것을 입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도의 길을 가는 사람은 나쁜 것을 먹으려고 하는 것이 본질이 되어야 합니다. 반대입니다. 좋은 것을 못 먹고, 좋은 것을 못 입고, 못살더라도 본연의 인연을 찾아 영원히 나를 품어 줄 수 있는 그 사랑을 찾아가는 것이 도인들의 생활목적이요 생활방편입니다. 가는 길이 이렇게 다르다는 것입니다.

26 뜻의 본연의 자리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뜻의 본연의 자리는 거룩한 것입니다. 그곳은 만유의 모든 단계를 초월해 가지고 사방에서 측정하더라도 자기 위치가 몇 도라는 것이 확실히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틀리게 될 때는, 내가 볼 때 180도인데 그 원점 기준이 다른 데에 가 있으니 돌려서 맞추기 전에는 180도를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한 결과에 부딪히는 것이 역사과정이 타락권 내에 있다고 하는 개념 아래에서는 불가피한 결론입니다. 사방으로 나를 조준해서 영점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찾는 데는 본연의 영점 자리를 중심삼고 원기의 모든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된다는 것을 알고, 그 이론에 일치시킬 때 나도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찾기 전에는, 우리 자체가 제2의 결과적 존재로서 출발할 수 있는 뜻의 일치점의 자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론적으로 맞습니다. 이의가 없는것입니다.

27 아담 해와를 지을 때 본래의 인연을 중심삼고 온갖 정성을 다한 것과 같이, 타락한 이 고장 난 물건을 고치기 위해서는 천년 역사에서 창조하던 것의 몇 십배 이상의 힘을 들여서 본연의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몇 백번, 몇 백번, 몇 백번 이렇게 해서 자리 잡아 나오려니까 수천년 수만년의 복귀역사가 걸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28 인간은 악마의 주관권, 사탄의 주관권 내에서 본성의 마음에 반대되는 사탄의 사랑권에 의해 치리 받음으로써 양심과 몸이 투쟁하게 되었습니다. 이 투쟁을 어떻게 정비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을 정비하는 데는 나 혼자 개인 사정을 정비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중심삼고 사탄권 세계의 환경을 정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환경이 자신과 상충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환경이 나에게 순응하고 그 환경 자체가 나를 따라올 수 있게 만들어 놓아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본연의 마음이 지향하는 곳으로 찾아갈 수 없습니다.

29 나는 어떤 존재냐? 이 우주사적인 존재로서, 최후의 인생행로에서 승리의 면류관을 맞아 천지의 만우주를, 만유의 존재물을 상속받을 수 있는 거룩한 왕자입니다. 이러한 존재들이 떨어져 밥 한 덩이에 팔려가고, 어느 무가치한 악당 무리한테 농락을 당해야 되겠습니까? 그것을 용허할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찾아야 됩니다. 우리가 복귀의 사명을 감당하여 인간의 본성을 회복시켜야 합니다. 본연의 나는 어디 있습니까? 나를 찾기 위해 헤매고 있고, 본연의 나 자신을 알아서 거기에 인연맺어 살려는 소망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기원과 통하여 있고, 역사적인 기원에만 통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는 천지의 법도와 연결돼 있고, 현실과 연결돼 있고, 앞으로 오는 미래와 연결돼 있는 나를 찾아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