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편 참만물 - 제1장 만물 창조와 그 의미_ 3절

2013. 3. 6. 13:56참사랑 영원까지/천성경

 

   


 천성경증보판 - 제6편 참만물 - 제1장 만물 창조와 그 의미

 

3절 자연 탐구와 자연이 주는 교훈

1 선생님은 어릴 때 활동 범위가 크고 넓었습니다. 보이는 들이나 산꼭대기, 안 가 본 데가 없습니다. 그 산 너머까지도 가 봐야 됩니다. 그래야 아침 햇빛에 보이는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다는 것이 머리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에나 앉아 있을 때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선생님이 신앙적인 정서를 길렀던 고향산천입니다. 고향 물이요, 고향 나무요, 고향 땅이요, 고향 봄바람입니다. 지난 모든 것이 생생히 살아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있었던 이야기도 생생히 살아 있습니다.


자연에 몰입했던 어린 시절

2 내가 어렸을 때 산에 다니면서 꽃이라는 꽃은 안 건드린 것이 없습니다. 모르는 꽃이 없습니다. 자연이 너무 좋아서 집에도 안 들어가고, 해가 지도록 자연과 어울려 돌아다니다가 피곤해서 엎드려 자다 보니 밤 12시가 되어 어머니 아버지가 찾으러 와서 데리고 갈 때가 많았습니다. 자연을 그렇게 좋아했습니다.


3 산에서 보이는 모든 새들은 내가 다 감정했습니다. 철새가 오면 수놈 암놈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은데 그것을 알 수 있는 책자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할 수 없이 철새를 찾아가 연구하는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밥을 안 먹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새들이 나타나면 그것을 따라가서 구멍을 찾고, 둥지를 찾아 알을 깐 것을 보고는 ‘아, 저 새는 저런 알을 낳고 사는구나.’라고 확인합니다. 그래야만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4 우리 집 앞뜰에는 큰 나무가 있었습니다. 상당히 큰 나무였는데 거기에 까치둥지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까치가 알을 낳는데 매일같이 그것이 궁금했습니다. 그것을 확실히 알기까지는 밤잠을 못 잡니다. 저녁에 까치집에 올라가 보고 또 새벽부터 까치가 나오기 전에 올라가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올라가 보면 한 알 낳고 두 알 낳고 세 알 낳고, 매일 알이 불어나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오르내리다 보니 까치와 친해졌습니다. 처음에는 죽겠다고 깍깍거리며 야단을 했지만, 매일같이 올라와도 지장이 없으니까 조용해졌습니다. 그래서 새끼에게 무엇을 잡아 먹이고 무엇을 하는가를 관찰했습니다.


5 까치는 나뭇가지로 둥지를 크게 틉니다. 안에는 공고하게 감탕(진흙)을 발라 놓고 바람이 부는 방향을 다 알고 구멍도 뚫어 놓습니다. 맨 처음 그 둥지에 올라갈 때는 얼마나 야단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 번 올라가고 두 번 올라가고 해서 알 낳는 것을 보았습니다. 매일같이 아침과 점심때, 하루에 두 번은 올라가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는 죽겠다고 야단하지만, 일주일을 그렇게 올라가더라도 자기에게 무슨 해를 입히지 않으니까 가만히 있습니다. 그런데 비 오는 날은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비 오는 날이 이틀 사흘이 되어 올라가지 못하다가 맑은 날이 되어 올라가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깍깍깍 깍깍깍’ 하며 올라오라고 신호하는 것입니다. 친하면 통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보다도 하나님이 지은 물건을 더 사랑하면 어떻겠습니까? 작가가 만든 물건이나 제품, 그림이라든가 하는 미술품을 보고 작가보다 더 사랑하게 되면 그 주인도 끌려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자연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렇게 됐다.’라는 것을 전부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자연이 그렇게 귀한 것입니다.


6 선생님이 어렸을 때 내가 있는 방 앞에 감나무가 있었습니다. 변소 앞에 있던 큰 감나무인데, 그 빛이 얼마나 청청했는지 모릅니다. 감나무 잎이 유난히 윤기가 나는 것입니다. 거기에 쓰르라미가 있는데, 동네에서는 거기가 제일 높은 곳입니다. 그 쓰르라미가 높은 곳에서 울어야 된다는 것을 다 아는 것입니다. 높은 데서 울어야 그 효과가 나는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들으면 어떤 때는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얼마나 시원한지 한번 들어 보세요. 거기에는 바느질하는 아낙네들이 더위를 잊고 바느질을 멈추면서 끌려 들어갈 수 있는 경지가 있습니다.


7 아카시아 꽃에 벌이 앉아서 머리를 처박고 꽁무니는 위로 쳐들고 들이빨아댈 때는 핀셋으로 꽁무니를 잡아당기면 그 꽁무니가 떨어지더라도 안 놓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지독합니까? 몸뚱이가 떨어지도록 당기는 녀석도 지독하지만, 그 맛을 알고 못 놓는 것이 더 지독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보고 ‘야! 이거 나도 배웠다. 나도 요렇게 해야 되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8 바다에 가면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습니다. 바다 밑에는 무슨 게들이 살고 있고, 무슨 고기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바다가 선생님 고향에서 멀기 때문에 바다를 배우기 위해서 방학 같은 때 매일같이 바다로 나가는 것입니다. 뱀장어를 잡기도 하고 게도 잡습니다. 그러면서 별의별 곳을 다 뒤지고 다닙니다. 그렇게 훤히 알고, 그다음에는 낚시를 하는 것입니다. 어떤 고기가 어디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고기를 잡는 것입니다. 뱀장어 같은 것을 잡는 데는 선생님이 챔피언입니다.


9 여름방학 때는 매일 하루에 뱀장어 40마리 이상은 잡았습니다. 뱀장어는 깊은 물속에 있습니다. 그냥 엎뎌 있는 것은 싫어합니다.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구멍을 찾아들어 갑니다. 대가리나 꽁지는 나와 있더라도 몸뚱이는 가릴 수 있어야 안정감을 느낍니다. 생리적으로, 생태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게 구멍 같은 데를 보면 거기에 있습니다. 그런 구멍을 쓱 보게 되면 아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벌써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10 암탉이 병아리를 까기 위해 알을 품는 것을 보면, 눈을 심각하게 뜨고 발로 알을 굴리면서 하루 종일 앉아 있습니다. 나중에는 배에 나 있는 털이 다 빠질 정도가 됩니다. 털이 빠지도록 앉아 있는데 그것이 기분 좋아서 앉아 있겠습니까, 기분 나빠서 앉아 있겠습니까? 선생님은 어릴 때 관심이 참 많았습니다. 그것을 매일 들여다봤습니다. 처음에는 쫓으려 하더니 하루에 세 번 이상 들여다보니까 으레 그러려니 하고 쫓지도 않았습니다. 단단한 알을 품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자세는 ‘천하에 누가 건드리기만 해봐라.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하는 모습입니다.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그 누구도 용서할 수 없는 대왕지권을 갖고 살피는 것입니다. 암탉의 권위에는 수탉도 마음대로 못합니다. 수탉에게 그 알을 품으라고 하면 세 시간도 안 가서 도망갈 것입니다. 암탉이 알을 품고 있는 것은 사랑의 힘입니다.


11 큰 나무에는 틀림없이 까치둥지가 있습니다. 까치는 길조라고 합니다. 까치가 ‘깍깍깍’ 하면 기쁜 소식이 온다고 합니다. 까치의 생리를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까치둥지를 보면 ‘아, 금년에는 바람이 어디에서 어디로 불겠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풍이 불 것 같으면 들락날락거리면서 거기에 대비해서 구멍을 딱 내놓습니다. 또 나뭇가지를 끌어다가 둥지를 치는 것을 보면 누가 가르쳐 주었는지 걸작품을 만들어 놓습니다. 이것은 나뭇가지로 엮어서 만들었기 때문에 비도 새고 그럴 것 아닙니까? 그러니 나중에는 진흙으로 전부 바릅니다. 바람이 안 들어오게 해 놓고, 비가 오면 빗물이 집으로 떨어지지 않고 한 곳으로 흐르게끔 나뭇가지 끄트머리를 해 놓습니다. 끄트머리를 될 수 있는 대로 그렇게 모아 놓아 가지고 비가 내리면 빗물이 둥지 바깥쪽으로 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가르쳐 주었는지 참 대단한 솜씨입니다.


자연이 주는 참사랑의 교훈

12 만물을 생각해 보면 참부모와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날 수 있는 그때를 위해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광물도 사랑하고 식물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나비와 벌, 동물 등 전부가 사랑을 중심삼고 엉켜 있습니다. 향기를 내고, 꽃을 피우고, 소리를 내는 모든 것이 만물의 사랑을 위한 상징적 표시입니다. 나비와 꽃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나비는 꽃을 찾아다니고 꽃은 아름다움을 만물 앞에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주에 박자를 맞추기 위한 놀이를 하면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을 중심삼고 이러한 우주를 창조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나를 위해서 이렇게 만들어진 그 정원과 조화된 박물관이 얼마나 멋지냐는 것입니다. 여름에 매미가 쌍쌍으로 소리를 내어 울고 박자를 맞추는 것은 사랑 노래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부 교과서입니다.


13 선생님이 댄버리 교도소에 있을 때, 비탈진 고지대를 불도저로 정지작업을 하여 운동장을 만들려고 자갈 같은 것을 주워 내고 하는 공사를 하다가 비가 와서 미처 끝내지 못하고 남은 곳이 있었습니다. 그 우기에 물새들이 와서 거기에 알을 낳고 새끼를 깠습니다. 그때는 비가 오는 우기이기 때문에 사람이 다니지 않아서 안전할 줄 알았는데, 우기가 지나고 나니까 그곳을 다니는 사람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 새끼를 깐 둥지가 산책로와 불과 2미터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이 그걸 모르고 지나갈 때는 어미가 가만히 있습니다. 그런데 눈만 마주치게 되면 움직이면서 ‘와와와’ 야단합니다. 한 발짝만 더 가려고 하면 ‘왁!’ 하고 덤벼들려고 합니다. 아주 조그마한 녀석인데 덩치가 큰 사람이 가면 자폭하려고 합니다. 자폭을 해도 멋진 자폭을 하려고 합니다. 그것을 누가 가르쳐 줬을까요? 어떤 학설을 통한 계획적인 교육제도에 의해 가르쳐 줬습니까? 사랑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교육이 필요 없습니다.


14 고기 가운데 수놈 암놈이 사랑하는 데 있어서 제일 모범적인 것이 연어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연어를 참 사랑합니다. 이들은 자기가 태어난 자리를 떠나 5천 마일 이상 오대양을 돌다가 4년이 되면 고향을 찾아옵니다. 알래스카는 날씨가 차기 때문에 곤충도 없어 이들 새끼가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미들이 죽은 뒤에 자신의 몸을 새끼가 먹게 하면서 키운다는 것입니다. 만물의 영장이 고기만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동물세계가 그렇습니다. 사랑이 그런 위대한 힘을 갖고 있는데 만물의 영장인 인간들은 어떻습니까? 인간은 참사랑의 주인입니다. 어떻게 고차원적인 부부의 사랑을 이루느냐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원리의 모든 것을 발견한 것도 성경에서가 아닙니다. 자연 가운데서 발견했습니다.


15 연어는 알을 낳고는 죽습니다. 그것을 보면 죽을 날이 정해진 사형수의 입장에서 부부가 사랑하는 것 이상의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암놈이 알을 낳게 되면 수놈은 땅을 파서 알을 보호해 줍니다. 그야말로 이상적인 한 쌍입니다. 그리고 알을 낳게 되면 두 놈은 죽습니다. 죽어 가는 암놈 수놈의 모양을 볼 때, 선생님은 참으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어미의 몸은 새끼들의 먹이가 됩니다. 창조주가 있다면 왜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그것을 보면 새끼가 얼마나 중요한가,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이 최고의 것이요 새끼가 최고의 것이라는 걸 보여 주기 위한 하나의 표본으로 연어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이론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생명을 버리더라도 사랑과 자식을 위해서 가야 됩니다.


16 연어는 4천 마일에서 6천 마일의 먼 대양에 가더라도 4년간 표류하다가 냄새를 맡아서 자기 고향을 찾아갑니다. 사람보다 낫지요? 그렇게 힘들게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끼치기를 합니다. 그리고 암놈과 수놈 둘이 한 번 만나 알을 낳아 놓고는 죽습니다. 그렇게 죽으면 그 새끼들이 어미 아비의 살을 먹고 자라납니다. 사랑의 위대함, 사랑을 통한 자녀의 위대함이 거기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는 부모 생명의 대신 존재라는 것입니다. 자녀는 한 단계 남보다도 전진해서 높은 사랑에 접할 수 있는 후계자입니다. 그렇게 사랑이 높아지게 될 경우 종내에는 하나님의 사랑권 내로 들어가야 됩니다.


17 모든 존재는 계열이 다르고, 그다음에 정착지, 사는 기반이 다릅니다. 강물은 바다로 흘러갑니다. 바다로 갔다가 다시 공중으로 올라가 구름이 됩니다. 다시 기후 변화로 인해 물이 되는 것입니다. 물이 다시 눈으로 바뀌고, 우박이 되어 떨어집니다. 평안도 말로 그것을 무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새들이 고기를 잡아먹고, 고기들이 새도 잡아먹습니다. 식물과 동물 전체가 먹이사슬로 얽혀 있습니다. 동물은 식물을 먹을 수 있고, 식물도 동물을 잡아먹을 수 있습니다. 플랑크톤에는 식물성 플랑크톤과 동물성 플랑크톤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바다의 모든 곤충과 미물의 바이러스, 균까지 먹여 살립니다. 그것을 뜯어먹고 사는 것입니다.


18 창조의 근본 기준은 뭐냐? 하나님이 아무리 절대적인 분이라고 해도 사랑의 상대자를 찾아 나오십니다. 그것이 창조의 시작입니다. 사랑의 상대를 찾기 전에 먼저 환경을 만드신 것입니다. 환경은 그 상대자가 그것을 영양분으로 취하여 자라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영양분을 취하는 것도 강제적이 아닙니다. 그 상대자가 참사랑의 주체 자리에 서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만물 전체가 그에 따라 절대 순응해 감으로써 일체가 되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창조의 주류 근본정신입니다.


19 우주에 가득 찬 모든 존재는 자기 수준에서 상대와 더불어 존재하지만, 결국 더 높은 사랑의 차원으로 흡수되어 상승하게 되는 원칙을 따릅니다. 즉 광물은 식물에, 식물은 동물에, 결국은 사람에게 모두 흡수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잡아먹히거나 흡수되어 더 높은 사랑의 차원으로 올라가 마침내는 사랑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의 가장 가까운 사랑을 받는 자리에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모든 존재들이 궁극의 목적지로 삼는 것은 바로 참사랑의 본질입니다. 다윈의 약육강식이라는 말은 이러한 참사랑의 논리로 다시 해석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개미나 미물들마저도 참사랑을 원할 뿐만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는 주인한테 가서 죽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원칙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가장 높은 대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모든 만물을 다 먹고 취할 수 있는 입장에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다 먹고 취하되, 이들을 지으신 하나님의 참사랑을 대신하는 마음으로 먹고 취해야 됩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우주는 존립할 수 없습니다.


20 남극의 펭귄 같은 새들은 바닷가에다 새끼를 치게 됩니다. 알을 낳을 때가 되면 펭귄은 무리를 지어 백 마일 이상 먼 지역으로 가서 새끼를 치는 것들도 있습니다. 폭풍이 불더라도 휩쓸리지 않고 그 먼 거리를 그 발로 갑니다. 전부 얼음산입니다. 암컷은 알을 낳아서 그것을 자기 발등에 놓고 품습니다. 발을 움직이면서 털로 비벼 온기를 보존해서 새끼를 까는데, 몇 개월 동안 먹지도 않고 그럽니다. 그래서 그것을 수컷에게 전달하면 수컷은 먹이를 실컷 먹었다가 새끼에게 먹여 줍니다. 아이를 밴 여인보다 배가 더 불렀을지 모릅니다. 암놈하고 바꿔쳐서 부화되어 새끼가 나올 때까지 참는 것입니다. 그런 공을 들인 가운데 사랑의 열매로 태어난 새끼는 먹이사슬을 중심삼고 고맙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21 보다 큰 것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보다 작은 것이 희생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원칙입니다. 사람이 풀을 먹고 소를 잡아먹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것은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보호하기 위해서 희생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발전입니다. 작은 데서부터의 비약입니다. 풀의 세포가 됐던 것이 사람의 세포가 되면 얼마나 비약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접할 수 있는 분야가 넓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약육강식의 개념을 말하고 인간이 진화됐다는 개념을 말합니다. 이것을 투쟁의 개념으로, 계급 개념으로 엮어 냈습니다. 상하관계는 주체대상관계인데 여기에는 주체 대상의 개념이 없습니다.


22 약육강식은 투쟁의 개념입니다. 우주의 만물세계는 투쟁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랑이상의 큰 목적을 중심삼고 우주를 동원해서 하나님의 이상적 생명체의 근원을 조성한다는 개념이 없다는 것입니다. 타락으로 그렇게 됐습니다. 그런데 투쟁해서 하나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희랍철학에서는 자연계를 적이라는 개념으로 보았습니다. 거기에서 적자생존의 논리가 나왔습니다. 적절한 환경에서 남지 않으면 생존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타락한 결과입니다. 마르크스나 레닌은 결과적인 것만 본 것입니다. 만물의 근본인 인간의 마음세계를 보더라도 투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투쟁의 개념이 만물 가운데서 벌어졌다고 봤으니 그렇게밖에 결론을 내릴 수 없습니다. 사랑이상의 완결체를 넘어서 하늘나라의 가정 완성과 하늘나라의 왕권을 중심삼고 하늘땅의 통일적 하나님의 안식 기반을 꾸리기 위한 그런 개념을 모르기 때문에 투쟁의 개념으로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