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사상 - 제9장 인식론 (認識論) - 4

2010. 1. 6. 16:10참사랑 영원까지/통일사상

三. 통일사상에서 본 칸트와 마르크스주의(主義)의 인식론


다음은 종래의 방법(方法)에서 본 인식론 중, 대표적인 칸트의 인식론과 마르크스주의(主義)의 인식론을 통일사상의 입장에서 비판해 보기로 한다.


1. 칸트의 인식론 비판


(1) 선험적방법(先驗的方法)에 대한 비판


칸트는 인식의 주체(주관(主觀))에는 선천적(先天的)인 사유형식(카테고리)이 갖추어져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칸트가 말하는 사유형식을 잘 검토해 보면 객관적인 존재형식이기도 하다. 예컨대, 객관세계의 모든 사물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 위에서 존재하고, 운동한다. 또 과학자는 객관세계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 위에서 일정한 현상을 인위적(人爲的)으로 일으키기도 한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의 형식은 주관적일 뿐만 아니라 객관적인 형식이기도 하다.


인과성(因果性)의 형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과학자는 자연계의 현상속에서 많은 인과관계(因果關係)를 발견하고, 그 인과관계에 따라 같은 현상을 실제로 일으키기도 한다. 이것은 객관세계에 실제로 인과관계(因果關係)가 있다는 사실을 표시한다.


또 칸트는 주관(주체)의 형식과 대상으로부터의 내용이 결합함으로써 인식이 구성(構成)된다고 하였으나, 통일사상에서 보면 주체(인간)도 대상(만물(萬物, 자연))도 내용과 형식을 모두 갖추고 있다. 즉 주체가 갖추고 있는 것은 칸트가 말한 선천적(先天的)인 형식뿐만 아니라 내용과 형식이 통일된 선재성(先在性)의 원형(複合原型)이며, 또 대상으로부터 오는 것은 혼돈(混沌)된 감각의 다양(多樣)이 아니고 존재형식에 의해서 질서가 잡혀진 감성적 내용을 갖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주체(인간)와 대상(만물)은 상대적인 관계에 있으면서 상사성(相似性, 서로 닮음)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주관이 대상을 구성함으로써 인식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주체가 가지고 있는 내용과 형식(形式)(원형(原型))과 대상이 지니고 있는 내용과 형식과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조합(照合)되어 판단됨으로써 인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2) 불가지론(不可知論)에 대한 비판


칸트는 현상세계에 있어서의 자연과학적인 지식만을 참된 인식이라고 하면서 물자체(物自體)의 세계(叡智界)는 이를 인식할 수 없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감성계와 예지계를 전적으로 분리해 놓았다. 그것은 순수이성(純粹理性과 실천이성(實踐理性)의 분리를 의미하며 과학과 종교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통일사상에서 볼 때 물자체는 사물의 성상(性相)이며, 이에 대하여 감성적내용은 형상(形狀)이다. 사물에 있어서 성상과 형상은 통일되어 있으며, 게다가 성상은 형상을 통하여 표현되므로 우리들은 형상을 통하여 그 사물의 성상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통일사상에 의하면 인간은 만물의 주관주이며, 만물은 인간의 기쁨의 대상으로서 인간을 닮도록 창조된 것이다. 만물이 인간을 닮도록 지어졌다는 것은 구조와 요소에 있어서 인간과 만물이 닮고 있다는 것, 따라서 내용과 형식도 닮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인식에 있어서 주체(인간)가 지니는 내용과 형식과 대상(만물)이 지니는 내용과 형식은 상사성(相似性, 서로 닮음)을 이루고 있어서 서로 조합(照合)될 수 있는 것이며, 게다가 그 내용(感性的내용)을 통하여 물자체(物自體), 즉 대상의 성상이 표현되므로, 주체는 대상의 형상(感性的내용과 형식) 뿐만 아니라 성상(물자체)까지도 완전히 인식할 수가 있는 것이다. 칸트는 인간과 만물의 원리적(原理的)인 관계를 몰랐기 때문에, 또 인간이 영인체(靈人體)와 육신의 통일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불가지론(不可知論)에 빠져 버렸던 것이다.


2. 마르크스주의(主義) 인식론의 비판


(1) 반영론(反映論)의 비판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아무리 외계가 의식에 반영된다 하더라도, 판단의 기준(척도)으로서 인식의 주체속에 외계의 사물에 대응하는 원형이 없으면 인식은 성립될 수 없다. 더욱이 인식은 주체와 대상의 수수작용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주체가 대상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외계의 대상이 주체의 의식에 반영되었다 하더라도 주체가 대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인식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반영(反映)이라는 수동적인 물질적 과정만으로 인식은 성립되지 않으며, 적극적인 심적과정(대상에의 관심이나 조합의 기능)이 관여함으로써 비로소 인식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2) 감성적인식(感性的認識), 이성적인식(理性的認識), 실천(實踐)에의 비판


마르크스主義 인식론에 있어서의 인식과정은 감성적인식, 이성적인식(논리적인식), 그리고 실천(혁명적실천)의 3단계로 되어 있다. 여기서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뇌(腦)의 산물 혹은 뇌의 기능이면서 객관적실재를 반영한다는 의식이 어떻게 해서 논리적인 인식(추상, 판단, 추리) 등을 행할 수 있으며, 또 어떻게 해서 실천을 지령(指令)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외계를 반영하는 수동적(受動的)인 과정과 논리적인 인식이나 능동적인 실천의 과정과의 사이에는 대단히 큰 갭(gap)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합리적(合理的)인 설명이 없다. 즉 논리가 비약하고 있는 것이다.


통일사상에서 볼 때 논리적인 인식이나 실천은, 뇌(腦)에 있어서의 생리적 과정만으로는 결코 설명되지 않는다. 인식작용은 마음(정신(精神))과 뇌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즉 논리적인 인식이나 실천은 오성(悟性)이나 이성의 작용을 가진 마음과 뇌가 수수작용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된다.


다음에 문제가 되는 것은 인식에 있어서의 실천의 역할이다. 레닌은, 인식은 실천으로 이행(移行)한다고 보았으며, 모택동(毛澤東, 마오쩌뚱)은 인식과 실천의 불가분성(不可分性)을 주장했는데, 그 점에 대하여 통일사상은 아무런 이론(異論)이 없다. 만물은 인간의 기쁨의 대상으로서 창조된 것이며, 인간은 창조목적에 따라 만물을 주관(실천)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은 주관을 위하여 만물을 인식하게 된다. 인식과 실천은 인간과 만물의 수수작용의 상대적(相對的)인 회로를 이루고 있어서(그림 9-12), 실천(實踐)(주관)을 떠난 인식은 없으며, 인식을 떠난 실천(주관) 또한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가 주장해온 실천은, 최종적으로는 혁명(革命)을 목표(目標)로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대하여 통일사상은 인식과 실천이 혁명을 목적으로 행해져서는 결코 안 되며, 창조목적의 실현을 위하여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창조목적의 실현이란,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함으로써 기뻐하시고, 인간은 만물을 사랑으로 주관함으로써 기쁨을 얻는, 그와 같은 세계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식이나 실천도 사랑을 통한 기쁨의 실현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다.


(3) 절대적진리(絶對的眞理)와 상대적진리(相對的眞理)에 대한 비판


레닌과 모택동은 절대적진리의 존재를 승인하고, 인간은 인식과 실천을 되풀이함으로써 절대적진리에 한없이 가까워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절대적진리에 있어서의 절대(絶對)의 개념은 애매하다. 레닌은 상대적진리의 총화(總和)가 절대적진리라고 했다. 그러나 상대적진리를 아무리 총화(總和)해도 그것은 총화된 상대적진리일 뿐 절대적인 진리는 될 수 없다.


절대적진리란 보편적이면서 영원성을 띤 진리를 말한다. 따라서 절대자를 기준으로 하지 않으면 절대라는 개념이 성립되지 않는다. 절대적진리는 가치론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과 표리일체(表裏一體)가 되고 있다. 마치 태양에 있어서 빛의 따뜻함과 밝음이 표리일체(表裏一體)여서 나눌 수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떠나서 절대적진리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할 때 인간은 비로소 만물의 창조목적을 이해하고, 만물에 대한 참다운 지식을 얻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을 부정하고 아무리 실천한다고 해도 절대적진리는 얻어질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