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사상 - 제8장 역사론 (歷史論) - 6|

2010. 1. 6. 16:16참사랑 영원까지/통일사상

五. 종래의 역사관(觀)

 

다음은 종래의 대표적인 역사관의 요점을 소개하고자 한다. 종래의 역사관(觀)과 통일사관(統一史觀)과의 비교에 참고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1) 순환사관(循環史觀)(운명(運命)史觀)


그리스인들은 춘하추동(春夏秋冬)이 해마다 반복되고 순환되는 것처럼 역사도 순환적으로 변화(變化)한다고 생각하였다. 역사적인 사건의 발생과 소멸은 운명적인 것으로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역사에는 의미(意味)도 목표(目標)도 없다고 보는 입장이 순환사관(循環史觀) 또는 운명사관(運命史觀)의 입장이다. 대표적인 역사가는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면서 역사(Historiai)를 쓴 헤로도토스(Herodotos, B. C. 484~425)와 펠로폰네소스전쟁사(戰爭史)를 쓴 투키디데스(Thukydides, B.C. 460~400)이다. 운명론자(運命論者)인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전쟁(戰爭)의 줄거리를 이야기식으로 서술했으며,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전쟁(戰爭)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충실히 사실적으로 서술했다. 그러나 양자에 다같이 공통적인 것은, 역사는 반복한다는 사고방식(思考方式)이었다.


순환사관(循環史觀)은 역사의 경과(經過)를 필연적(運命的)인 것으로만 이해하였으며, 인간의 노력(努力) 여하에 따라서 역사의 동향(動向)이 좌우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또 역사에는 목표가 없으므로 미래상(未來像)도 제시될 수가 없었다.


  (2) 섭리사관(攝理史觀)


역사는 처음도 끝도 목표도 없으며, 순환운동을 반복할 뿐이라고 보는 그리스의 역사관에 대하여, 기독교는 역사에는 처음이 있으며 일정한 목표를 향하여 직선적(直線的)으로 진행한다는 등 순환사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역사관을 제시했다. 즉 역사는 인간의 창조와 타락으로부터 시작하여 최후의 심판에 이르는 구원의 역사이며, 역사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신(神)의 섭리라고 주장한다. 이것을 섭리사관 또는 기독교사관이라고 한다.


기독교사관(基督敎史觀)을 체계화(體系化)한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가 쓴 신국론(神國論; The City of God)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는 신국(神國; Civitas Dei)과 악마에 유혹(誘惑)된 사람들이 사는 지상국(地上國; Civitas terrena)과의 투쟁의 역사로 보았으며, 끝날에 가서는 신국(神國)이 승리하여 영원한 평안을 얻는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의 진행은 하나님이 미리 정한 계획에 따른다는 것이다.


그는 타락(墮落)에서 구원에 이르기까지의 인류역사를 다음의 여섯 단계로 구분했다. (1)아담에서 노아홍수까지 (2)노아에서 아브라함까지 (3)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4)다윗에서 바빌론포로까지 (5)바빌론포로에서 그리스도의 탄생까지 (6)그리스도의 초림(初臨)에서 재림(再臨)까지가 그것이다. 그런데 여섯번째의 최후의 기간이 얼마나 계속되는가는 밝히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은 기독교사관에 의하여 역사는 목표를 지향하는 의미있는 역사로 비춰지고 있으나,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움직이는 도구적(道具的) 존재(存在)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역사관의 내용은 신비적(神秘的)인 것을 내포하고 있고, 논리성이나 법칙성이 결여(缺如)되어 있어서, 오늘날에 이르러 사회과학으로서 받아들이기는 어렵게 되어 있다.


  (3) 정신사관(精神史觀; 진보사관(進步史觀))


르네상스시대(時代)에 들어오면서 신학적(神學的)인 역사관은 점차 모습을 감추게 되었으며, 18세기(世紀)의 계몽주의시대에 이르러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신(神)의 섭리가 아니고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새로운 역사관이 출현하였다. 이것은 역사가 인간의 정신(精神)의 진보에 따라 거의 일직선(一直線)으로, 그리고 필연적(必然的)으로 진보해 간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러한 사관(史觀)을 정신사관(精神史觀) 또는 진보사관(進步史觀)이라고 한다.


비코(G. Vico, 1668~1744)는 역사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했으나 세속의 세계는 인간이 만든 것이라고 하면서, 역사는 하나님의 의지(意志)를 가지고서만 설명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역사의 파악에 있어서 하나님은 역사의 배후(背後)에 숨게 되고 인간이 전면에 나오게 되었다.13)


볼테르(Voltaire, 1694~1778)는 역사에 작용한 신(神)의 힘을 배제(排除)했다. 즉 역사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신(神)이 아니고 높은 교육을 받은 자들로서 과학을 받아들인 사람들 즉, 계몽사상가들이라고 하였다.


콩도르세(Condorcet, 1743~1794)는, 인간의 이성이 각성하면 역사는 과학적으로나 윤리적(倫理的)으로 조화를 이루면서 진보(進步)한다고 주장했다.


칸트(I. Kant, 1724~1804)는, 역사의 목적은 인간의 모든 고귀(高貴)한 재능의, 여러민족(諸民族)의 결합체(結合體)에서의 실현이라고 하면서, 세계시민적(世界市民的) 의도(意圖)에 있어서의 인류의 역사를 제언(提言)하였다.


낭만주의(浪漫主義)의 철학자 헤르더(J. G. Herder, 1744~1803)는 인간성의 발전이 역사의 목표라고 하였다.


헤겔(Hegel, 1770~1831)은 역사를 정신(精神)의 자기실현(自己實現) 혹은 이념(理念)의 자기실현(自己實現)으로 보았다. 이성이 세계를 지배하고 세계사는 이성적(理性的)으로 진행한다는 견해로서,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이성을 그는 세계정신이라고 불렀다.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이성은 인간을 조종하면서 활동하고 있다고 보고 이것을 이성의 간계(奸計)라고 하였다. 헤겔의 역사관은 특히 정신사관(精神史觀) 또는 관념사관(觀念史觀)이라고도 불리운다.


헤겔은 프러시아에서 자유의 이념이 실현된 이성국가(國家)가 도래한다고 보고 있었으나 실제는 그렇게 되지 않았고 도리어 착취나 인간소외(疎外) 등의 反이성적(理性的)인 사회문제가 심화(深化)되어 갔던 것이다. 이러한 헤겔의 역사철학에 반기를 들고 나타난 것이 마르크스의 유물사관(唯物史觀)이었다.

 

  (4) 유물사관(唯物史觀)


헤겔은 이념(理念)이 역사를 움직이고 있다는 정신사관을 주장한데 대하여 마르크스는 역사를 움직이고 있는 원동력(原動力)은 물질적인 힘이라고 주장하면서 유물사관(唯物史觀; 革命史觀이라고도 함)을 제시하였다.

 

유물사관에 의하면, 역사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이념(理念)이나 정신(精神)의 발전이 아니라 생산력의 발전이다. 생산력의 발전에 상응(相應)하여 일정한 생산관계가 성립되며, 생산관계가 일단 성립되면 그것은 곧 고정화(固定化)됨으로써 드디어는 생산력의 발전에 대해서 질곡화(桎梏化)한다. 여기에서 낡은 생산관계를 유지(維持)하려고 하는 계급(支配階級)과 새로운 생산관계를 희구(希求)하는 계급(被支配階級)과의 사이에 계급투쟁이 전개된다. 따라서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가 될 수 밖에 없으며, 자본주의 사회속에서 계급투쟁이 그 극에 달하여 피지배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계급인 부르주아지를 타도(打倒)함으로써 드디어 계급이 없는 자유의 왕국(王國) 곧 공산주의사회가 실현된다는 것이다.


이 유물사관이 잘못이었다는 것은 오늘의 공산주의의 종언(終焉; 끝났음)이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이론的인 면에서 보더라도 유물사관의 법칙이라는 것은 전부 독단적(獨斷的)인 주장에 불과한 것이었다. 예컨대 유물사관은 생산력의 발전을 물질적인 발전으로 보았는데, 생산력이 어떻게 해서 발전하는가에 대해서는 유물변증법적인 해명이 되어 있지 않다. 또 인류역사는 계급투쟁에 의한 사회변혁의 역사라고 말하고 있으나 그것은 말 뿐이며, 실제로 계급투쟁에 의해서 사회가 변혁(變革)된 예는 한번도 없었다. 이와 같이 유물사관의 이론은 전부가 허구(虛構)의 이론이었던 것이다.


  (5) `생(生)의 철학(哲學)'의 사관(史觀)

 

딜타이(W. Dilthey, 1833~1911)와 짐멜(T. Simmel, 1858~1918)은 生의 성장(成長)과 더불어 역사는 성장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을 `生의 철학(哲學)'의 사관이라고 한다. 딜타이에 의하면, 생(生)이란 인간적인 체험이며, 체험은 반드시 표현되어서 외부 세계에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렇게 나타난 것이 역사의 세계요 문화의 세계이다. 따라서 종교, 철학, 예술, 과학, 정치, 법률 등의 인간의 문화체계(文化體系)는 生이 객관화된 것이다.


짐멜도 마찬가지로 역사란 生의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生이란 무한히 계속되는 유동(流動)이다. 그리고 `生(精神的인 生)'의 생성(生成)의 흐름이 역사가 된다.14) 그런데 `生의 철학(哲學)'의 사관은, 역사상에 나타나는 인간의 고통이나 불행은 生의 성장(成長)에 부수적(附隨的)으로 나타나는 불가피(不可避)한 현상이라고 간주한다. 따라서 인간이 어떻게 해야 고통이나 불행에서 해방되는가 하는 문제는, 이 철학으로써는 해결할 수 없게 되어 있다.


  (6) 문화사관(史觀)


제1차 세계대전 전(世界大戰 前)까지 유럽에 있어서 역사의 진보(進步)나 발전(發展)에 대한 신뢰(信賴)는 기본적으로 흔들리지 않고 있었으며, 역사는 유럽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하고 있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그와 같은 직선적(直線的)이며 유럽 중심적인 역사상(像)을 깨뜨린 사람이 슈펭글러(O. Spengler, 1880~1936)였다.


슈펭글러는 역사의 기초를 문화라고 하면서 문화사관을 주창하였다. 그는 문화를 유기체(有機體)로 보았으며, 유기체인 이상(以上) 탄생과 함께 성장하고는 멸망(滅亡)하게 되어 있어서 문화의 사멸은 불가피(不可避)한 운명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로마의 몰락에 대응(對應)하는 몰락의 징후(徵候)를 서양문명에서 발견하여 서양의 몰락을 예언했다. 이러한 서양의 몰락을 예지(豫知)하면서도 페시미즘에 빠지거나 불가피(不可避)한 운명(運命)에 움추리지 말고, 받아들이면서 살아갈 것을 역설(力說)했다. 거기에는 니체와의 강한 연결이 있었다. 슈펭글러의 역사관은 결정론적이다.


슈펭글러의 영향을 받으면서 독자적(獨自的)인 문화사관을 수립(樹立)한 사람이 토인비(A. J. Toynbee, 1889~1975)이다. 토인비에 의하면, 세계사를 구성(構成)하는 구극(究極)적인 단위는 지역도 민족도 국가도 아니며 개개의 문명이었다. 그리고 문명은 출생(出生; genesis), 성장(成長; growth), 좌절(挫折; breakdown), 해체(解體; disintegration), 소멸(消滅; dissolution)의 단계를 거친다고 하였다.


문명발생(文明發生)의 원인은 자연환경(自然環境)이나 사회환경으로부터의 도전(挑戰; challenge)에 대한 인간의 응전(應戰; response)에 있다. 창조적(創造的) 소수자(少數者)가 대중을 인도하면서 문명을 성장시켜 가지만, 머지 않아 창조적 소수자가 창조성을 상실(喪失)하게 되어서 문명은 좌절한다. 이때 창조적 소수자는 지배적 소수자로 전화(轉化)하며, 문명의 내부에서는 내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주변에는 외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생겨서 지배적 소수자에게서 이반(離反)한다. 그리하여 세상이 어지러워지면서 혼란기를 맞게 되지만, 머지않아 지배적 소수자 중의 최강자에 의해 세계국가(世界國家)가 수립되면서 혼란기는 끝난다. 세계국가에 의한 압정하(壓政下)에서 내적 프롤레타리아트는 고등종교(高等宗敎)를 키우고, 외적 프롤레타리아트(주변의 만족(蠻族)는 전투집단(戰鬪集團)(침략세력)을 형성한다. 그리하여 세계국가(世界國家), 고등종교(高等宗敎), 전투집단(戰鬪集團)의 3자(三者)가 정립(鼎立)한다. 얼마 안가서 고등종교는 지배층을 개종시킴으로써 세계종교가 되지만, 세계국가는 곧 붕괴되고 그와 더불어 문명은 죽음을 맞게 된다.


이리하여 하나의 문명이 소멸한 후, 외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침입(侵入)하는데, 이 외적 프롤레타리아트가 고등종교로 개종됨으로써 다음 대(次代)의 문명을 탄생시킨다. 이 문명의 계승(繼承)을 친자관계(親子關係)라고 한다. 세계사속에서 발생하여 충분히 성장한 문명은 21개인데, 현존(現存)하는 문명은 모두 그 3대(三代)째에 속하며 기독교문명(서양과 그리스正敎 圈)), 回敎문명(文明), 힌두교문명, 극동문명의 네가지 系譜로 나누어져 있다고 한다. 토인비가 주장한 3대에 걸친 문명의 계승은 통일사관에서의 복귀기대섭리시대(復歸基臺攝理時代), 복귀섭리시대(復歸攝理時代), 복귀섭리연장시대(復歸攝理延長時代)라는 三代의 섭리적동시성(攝理的同時性)에 대응(對應)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토인비의 역사관의 특징은 결정론(決定論)을 배제하고, 비결정론(非決定論), 자유의지론(意志論)을 주장한데 있다. 즉 도전(挑戰)에 대하여 어떻게 응전(應戰)하는가 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가 나아갈 길은 결코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인간이 미래(未來)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토인비는 인류역사의 미래상(未來像)으로서 명백히 신국(神國; Civitas Dei)을 그리고 있으나, 비결정론(非決定論)의 입장에서 신(神)의 나라냐 어둠의 나라냐 하는 미래의 선택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려있다고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나님 자신의 존재(存在)의 법(法)인 사랑의 법 아래에서, 하나님의 자기희생은 인간 앞에 영적완성(靈的完成)이라고 하는 이상을 목표로 세워 놓고 인간에게 도전(挑戰)하고 있다. 그리고 인류에 있어서 이 도전(挑戰)을 수용할 것인가, 혹은 거부할 것인가는 완전히 자유인 것이다. 사랑의 법(法)은 인간이 죄인(罪人)이 될 것인가, 성인(聖人)이 될 것인가를 인류의 자유에 맡기고 있다. 즉 사랑의 법(法)은 인간의 개인적(個人的) 및 사회적(社會的) 생활을 하나님의 나라로의 전진 방안으로 삼든지 어둠의 나라로의 전진 방안으로 삼든지, 그 선택은 인류의 자유에 일임(一任)하고 있는 것이다.


토인비 역사관의 또 하나 특징은 근대사회가 망각(忘却)한 것처럼 보였던 하나님을 역사관속에 다시 도입(導入)했다는 점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역사란, 진지하게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섭리에 의해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모습의, 희미하고도 불완전한 영상(影像)에 불과하다고 본다.


  (7) 역사관(觀)의 변천(變遷)과 통일사관(統一史觀)


이상으로 종래 역사관의 개요(槪要)에 대하여 설명하였는데, 여기서 종래의 역사관과 통일사관을 비교(比較)하여, 통일사관이 종래의 역사관을 통일할 수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첫째로, 역사를 원환운동으로 보는가 직선운동으로 보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그리스의 순환사관(循環史觀), 슈펭글러의 문화사관(文化史觀)은 역사를 원환운동으로 파악했으며, 기독교사관(基督敎史觀)이나 진보사관(進步史觀), 유물사관(唯物史觀)은 역사를 직선운동으로 파악했다. 한편 生의 철학사관(哲學史觀)은 유동(流動)하는 生의 성장과 더불어 역사는 발전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진보사관의 변형(變形)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직선운동(直線運動)으로 파악하면 역사의 발전에 희망을 가질 수 있으나, 인류역사에 있어서의 좌절(挫折)과 부흥(復興)의 의미(意味)를 이해할 수가 없다. 한편, 역사를 원환운동으로 파악할 때, 국가나 문화의 멸망은 운명적인 것이 되어 희망을 발견할 수가 없다.


통일사관은 재창조(再創造)와 복귀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역사를 전진운동과 원환운동이라는 양면(兩面)을 가진 나선형운동(螺旋形運動)으로서 파악한다. 즉 역사는 목표(目標)-창조이상세계의 실현-를 향하여 발전해 간다는 전진적성격(前進的性格)과 더불어, 섭리적인물을 세워서 탕감법칙에 따라 잃어버린 창조이상세계를 복귀한다는 원환운동의 성격을 함께 지닌 나선형운동(螺旋形運動)의 역사라고 보는 것이다.


둘째로, 결정론(決定論)이냐 비결정론(非決定論)이냐 하는 문제가 있다. 역사는 운명에 따라 필연적으로 운동한다는 그리스의 운명사관(運命史觀)과 슈펭글러의 문화사관(文化史觀)은 결정론(決定論)이다.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진행한다는 섭리사관도 결정론이다. 이성 또는 세계정신이 역사를 움직이고 있다고 하는 헤겔의 정신사관(精神史觀)이나, 역사는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필연적으로 공산주의사회에 도달한다고 하는 유물사관도 결정론이다. 이것들은 모두 인간을 초월(超越)한 어떤 힘이 역사를 움직인다고 하는 견해인 것이다. 이와 같은 결정론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은 언제나 역사의 힘이나 법칙에 끌려다니는 피동적(被動的) 존재(存在)에 불과하며, 인간이 자유의지에 의한 노력에 의해서 역사를 개혁(改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어있다.


한편 토인비는 자유의지론(意志論)의 입장에서 비결정론(非決定論)을 주장했다. 즉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역사가 가는 길이 선택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토인비의 비결정론(非決定論)의 입장에서 볼 때 역사의 미래상은 불분명(不分明)하며, 따라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가 없게 된다.


이에 대해서 통일사관은, 역사의 목표는 결정적(決定的)이지만 섭리적인 사건의 성취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책임분담 외에 인간의 책임분담 수행(遂行)이 필요하다는 관점에서 역사의 과정은 비결정론이라고 본다. 즉 통일사관은 결정론과 비결정론의 양(兩)측면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이론을 책임분담론(責任分擔論)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종래의 역사관과 통일사관을 비교해 볼 때 종래의 역사관은 각각 통일사관의 한 측면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음과 동시에 통일사관이 총합적(總合的), 통일적(統一的)인 역사관이라는 것도 알게된다. 그런데 토인비의 역사관에는 통일사관을 닮은 내용이 많이 있다. 섭리적으로 볼 때, 토인비의 역사관은 통일사관이 출현하기 위한 전단계를 준비한 史觀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토인비의 사관은 종래의 역사관과 통일사관을 연결하는 교량의 구실을 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