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사상 - 제6장 윤리론(倫理論) - 5

2010. 1. 6. 16:31참사랑 영원까지/통일사상

四. 통일윤리론(倫理論)에서 본 종래의 윤리관

 


마지막으로 기존(旣存)의 윤리관 중에서, 근대를 대표하는 것으로서 칸트와 벤담의 윤리관을, 또 현대를 대표하는 것으로서 분석철학(分析哲學)과 프래그머티즘의 윤리관의 요점을 소개하고 통일사상의 입장에서 그 내용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1) 칸트

 


   1) 칸트의 윤리관

 


칸트(I. Kant, 1724~1804)는 『실천이성비판(實踐理性批判)』에서 참다운 도덕률은 어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라라는 가언명법(假言命法; hypothetischer Imperativ)이어서는 안되며, 무조건적으로 무엇 무엇을 하라라는 정언명법(定言命法; kategorisher Imperativ)이 아니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훌륭한 사람으로 불려지기 위해서는 정직(正直)하라라는 조건부의 명법(命法)이 아니라, 정직(正直)하라라고 하는 무조건적인 명법이 아니면 안 된다고 했다. 정언명법(定言命法)은 실천(實踐)이성에 의해서 세워지는 것이다. 이 실천이성이 우리들의 의지에 명령하는 것이다(이와 같은 실천(實踐)이성을 입법자(立法者)라고 한다). 이 실천(實踐)이성의 명령을 받은 의지가 선의지(善意志)이다. 그리고 이 선의지가 행동을 촉진시킨다는 것이다.

 


칸트는 도덕의 근본법칙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즉 네 의지의 격율(格率)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하도록 행위하라가 그것이다.3) 여기서 격률(格率; Maxime)이란 개개인이 주관적으로 정하는 실천의 원칙(原則)을 말하는 것으로서 칸트에 의하면, 그와 같은 주관적인 원칙(즉 格率)이 보편성을 띤 것이 되도독 행동하라는 것이었다. 칸트는 마치 자연법칙과 같이 모순(矛盾)이 없는 보편타당한 것을 선(善)으로, 그렇지 않는 것을 악(惡)으로 규정했다.

 


칸트는 인간 안에 있는 도덕률은 의무(義務)의 소리로서 우리들에게 다가오고 있다고 말했다. 의무(義務)여, 네 숭고하고 위대한 이름이여, 이 이름을 띤 너는 아첨하며 여러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아무도 갖고 있지 않는데도 오로지 복종(服從)을 요구한다. ...... 자연히 사람의 마음에 들어와서 싫어도 정의를 획득(獲得)할 수 있는 법칙을 세우는 것뿐이다.'4)와 같이 칸트가 주장한 도덕은 의무(義務)의 도덕이었다.

 


또 칸트는 선의지(善意志)가 어떤 것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유가 요청되지 않으면 안되며, 불완전한 인간이 선(善)을 완전히 실현코자 하는 한 영혼의 불멸(不滅)이 요청되지 않으면 안 되며, 또 완전한 선(善) 즉 최고선을 추구할 때, 그것이 행복과의 일치가 가능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요청해야 한다고 했다. 이리하여 칸트는 영혼(靈魂)의 존재와 하나님의 존재를 실천(實踐)이성의 요청(Postulat)으로서 인정하였다.

 


   2) 통일사상에서 본 칸트의 윤리관

 


칸트는 純粹理性(이론이성)과 실천(實踐)이성을 구별했다. 순수이성이란 인식을 위한 이성이며, 실천이성이란 의지를 규정하고 행위를 인도하는 이성이다. 칸트에 있어서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정언명법(定言命法)에 의한 행위가 왜 선(善)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행위가 선(善)인가 아닌가를 결정해야 할 경우, 그 행위의 결과를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칸트는 결과가 어떻든지 간에 `무엇 무엇을 하라'라는 정언명법(定言命法)에 따른 행위라야 선(善)이라고 하였다.

 


가령 A라는 사람이 노상(路上)에서 육신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B라는 사람을 만나 `B를 도우라'는 내부로 부터의 정언명법(定言命法)에 의하여 A는 그 B를 병원으로 데려가고 싶어 했다고 하자. 그런데 그 B는 남에게 신세지기를 원치 않는 사람일 경우도 있으며, 따라서 B는 그 도움을 사양하고 단독으로 병원에 가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움을 주고자 하는 A는 실천(實踐)이성이 내린 정언명법(定言命法)에 의해서 행동하고 있으므로 그것으로써 만족할 것이다. 즉 A의 행동은 A에게는 무조건 선(善)이 되겠지만, B에게는 달갑지 않은 친절이 되어서 선(善)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결과를 확인하지 않고 동기만 좋으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입장이 되어버린 것이 칸트의 입장이어서, 상식적인 선(善)의 개념에는 부합되지 않는다. 이것은 칸트가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을, 즉 인식과 실천을 분리했기 때문에 생긴 아포리아(難点)이다. 사실상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은 둘로 나누어진 것이 아니다. 이성은 하나이며, 그 하나의 이성에 따라서 결과를 확인하면서 행동하는 것이 실제의 실천인 것이다.

 


또 칸트의 도덕률(道德律)에 있어서 주관적인 격률(格率)을 보편화시키는 경우 그 기준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해서 그와 같은 보편화가 가능한가 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또 칸트는, 한편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완전히 도덕적인 인간이 되면 그것으로 행복이 실현될 것이라고 말하고, 또 한편으로는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는 가언적(假言的)이므로 선(善)이라고 할 수 없다고도 하였다. 인간이 행복을 희구(希求)하고 있음을 알면서 행복을 목적으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을 요청(要請)하여 완전히 선(善)을 행하면 그 상태가 행복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칸트의 여러 문제점들은 모두 그가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을 모르는데 기인(基因)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목적이라면 무조건 자애적(自愛的), 이기적(利己的)인 것으로만 생각했다. 통일사상에서 보면 창조목적에는 전체(全體)목적과 개체(個體)목적이 있고, 인간은 전체목적을 앞세우면서 개체목적을 추구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는 목적이라면 모두 개체목적으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 결과 그는 모든 목적을 否定해 버렸고, 그의 도덕률(道德律)은 그 기준이 애매한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편으로, 칸트는 도덕률(道德律)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영혼(靈魂)의 불멸과 하나님의 존재가 요청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순수이성비판(純粹理性批判)'에서 밝힌 바와 같이 신(神)이나 영혼(靈魂)은 감각적 내용이 없으므로 인식이 불가능하다고 하여 이들을 배제(排除)해 버렸다. 여기에도 칸트철학(哲學)의 아포리아가 있다. 칸트는 하나님을 요청(要請)한다고 했지만 그것은 가정적(假定的)인 신(神)일 뿐, 참다운 신(神)이거나 실존(實存)하는 신(神)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신(神)은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칸트는 실천(實踐)이성에 근거하는 의무감만을 선(善)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의무 그 자체는 차가운 것이다. 따라서 칸트가 말한 선(善)의 세계는 차가운 의무의 세계, 냉랭한 규율만을 지켜야 하는 병영(兵營)과 같은 세계인 것이다. 통일사상에서 보면 의무나 규율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목적은 참된 사랑의 실현에 있으며, 의무나 규율은 참사랑의 실현을 위한 방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 벤담

 


   1) 벤담의 윤리론(倫理論)

 


벤담(J. Bentham, 1748~1832)의 선악관(善惡觀)은 다음과 같은 전제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자연(自然)은 인류를 고통(苦痛)과 쾌락(快樂)이라는 두 주권자(主權者)의 지배 아래에 두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게 될 것인가를 (우리에게) 지시하고, 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까를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쾌락(快樂)과 고통(苦痛) 뿐이다."5) 이 전제에서 벤담은 쾌락(快樂, pleasure)과 고통(苦痛)(pain)을 선악(善惡)의 기준으로 하는 `공리성의 원리(功利性 原理, principle of utility)‘를 주창하였다.

 


벤담은 쾌락과 고통을 양적(量的)으로 계산하여, 가장 많은 쾌락을 가져오는 행위를 선(善)으로 보고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最大多數의 最大幸福); the greatest happiness of the greatest number)‘을 그 원리로 삼았다. 그는 인간에게 쾌락과 고통을 가져오는 것으로 네 개로 구별되는 원천(源泉)이 있으며 그것들은... ... 물리적(物理的), 정치적(政治的), 도덕적(道德的) 및 종교적(宗敎的)인 원천이라고 불려지고 있다"6)고 하였고, 그 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것은 물리적인 원천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물리적인 쾌락과 고통만이 객관적으로 계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이 균등(均等)하게 물질적인 부(富)를 얻는 것을 가장 소망스럽게 생각하였다.

 


칸트는 목적이나 물질적 이익에 구애되지 않는 순수한 선(善)을 주장했지만, 벤담은 선(善)의 행위는 인간에게 최대의 행복을 가져다 주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특히 물질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것에 대하여 적극적(積極的)으로 긍정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의 사상은 영국의 산업혁명(産業革命)을 그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그의 사상은 사회주의운동가(社會主義運動家) 로버트 오웬(R. Owen, 1771~1858) 등에 영향을 주었다. 오웬은 벤담이 말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最大多數의 最大幸福)'을 자기의 사상의 기초로 삼으면서, 프랑스의 계몽주의사상(啓蒙主義思想)과 유물론(唯物論)의 영향 하에 환경의 개선운동을 전개하였다. 인간은 환경의 산물이므로 환경을 좋게 하면 인간의 성격은 선량(善良)하게 되고 행복한 사회가 실현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러한 이상(理想)을 실현하기 위해서 미국의 인디애나주에 `뉴 하모니 평등(平等)村'을 건설했지만, 그의 노력은 동료들 간의 내부분열(內部分裂)에 의해 실패하고 말았다.

 


그와 같은 사회주의운동의 영향하에서 공리주의자(功利主義者)들은 사회개혁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즉 선거법(選擧法)의 개정, 빈민법(貧民法)의 개정, 소송수속(訴訟手續)의 간소화, 곡물조례(穀物條例)의 폐지, 식민지의 노예해방(奴隷解放), 참정권의 확대, 노동자들의 생활조건의 개선 등등의 운동을 추진함으로써 자본주의사회의 모순(矛盾)의 개혁에 크게 기여(寄與)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2) 통일사상에서 본 벤담의 윤리관

 


벤담은 칸트가 주장한 `의무(義務)로서의 선(善)'이 아니라 선(善)의 행위 그 자체가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선(善)을 주장했는데, 그 점에 관한한 통일사상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행복을 물질적인 쾌락에 있다고 본 그의 견해는 통일사상과 다르다. 물질적인 쾌락에 의해서는 인간의 참된 행복이 실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늘날 선진국(先進國)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 번영을 누리고 있지만 스스로 행복(幸福)하다고 자인하고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왜냐하면 물질적 번영과 함께 사회혼란과 각종 범죄가 증대하고 있어서,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공리주의(功利主義)에 의해 참된 행복이 실현될 수 없음을 증명(證明)하는 것이다.

 


통일사상에서 본 벤담의 사상은 환경복귀(環境復歸)를 위한 사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상사회(理想社會)의 실현을 위해서는 인간 복귀와 함께 환경 복귀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섭리적으로 볼 때, 재림(再臨)의 때가 가까워 옴에 따라서 이와 같은 사상의 출현은 필연적이었던 것이다.

 


벤담과는 대조적(對照的)으로 칸트의 경우는, 인간 복귀를 위한 사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공리주의사상(功利主義思想)도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불충분한 것이어서 인간의 행복을 실현할 수는 없었다. 그 후 나타난 공산주의도 환경 복귀를 위한 사상(思想)이었으나 폭력혁명이라는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그 결과 행복한 사회가 실현되기는 커녕 오히려 비참(悲慘)한 사회를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정신적(精神的) 행복과 물질적(物質的) 행복이 통일되어야 하는데, 인간이 안고 있는 정신적문제와 물질적문제를 통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선(善)의 기준이 세워질 때 비로소 참된 행복은 실현(實現)될 수 있는 것이다.

 


  (3) 분석철학(分析哲學)

 


   1) 분석철학(分析哲學)의 윤리관

 


철학의 임무(任務)는 일정한 세계관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언어의 논리적분석(論理的分析)을 통하여 철학을 일종의 과학적인 학문으로 삼고자 한 것이 분석철학이다. 무어(G. E. Moore, 1873~1958), 러셀(B. Russell, 1872~1970),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 1889~1951) 등의 케임브리지 분석학파와 슈릭(M. Schlick, 1882~1936), 카르납(R. Carnap, 1891~1971), 에이어(A. J. Ayer, 1910~1971) 등의 빈학파(學派) 혹은 논리실증주의(論理實證主義; logical positivism), 그리고 현대 영국의 일상언어학파(日常言語學派) 등을 총칭한 것이 분석철학(分析哲學)이다.

 


분석철학중에서 윤리학설의 대표적인 것들을 들자면 무어의 직각설(直覺說; intuitionism)과 슈릭, 에이어의 정서설(情緖說; emotive theory) 등이 있다.

 


무어에 의하면, 선(善)이란 정의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선(善)이란 황금(黃金)이 단순한 관념인 것과 같이 역시 단순한 관념이라는 것, 그리고 황색(黃色)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이미 황색(黃色)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어떠한 방법에 의해서도 설명할 수(도, 대답할 수도)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善)이란 무엇인 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도...... 설명할 수(도, 대답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7) 그리고, 그는 선(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나의 대답(對答)은 선(善)이란 선(善)이다라는 것이고, 그것으로 끝이다"8)라고 하여 선(善)이란 직각(直覺; intuition)에 의해서 파악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무어에 있어서의 가치판단은 사실판단과 완전히 독립한 것이었다.

 


또, 슈릭이나 에이어에 의하면 선(善)이란 주관적(主觀的)인 정서(情緖)를 표현하는 말에 불과하고 객관적(客觀的)으로 검증할 수 없는 의사개념(疑似槪念)이었다. 따라서, `돈을 훔치는 것은 나쁘다'고 하는 윤리적(倫理的)명제(命題)는 발언자의 도덕적 불찬성의 감정(感情) 혹은 기분(氣分)의 표명에 지나지 않고, 참도 거짓도 아니라는 입장이다.

 


   2) 통일사상에서 본 분석철학(分析哲學)의 윤리관

 


첫째로, 분석철학자들의 윤리관의 특징은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을 분리(分離)했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 볼 때, 사실판단이나 가치판단은 어느 쪽이나 객관적인 것으로서 일체(一體)가 되어 있다고 본다. 단지 사실판단은 누구나 감각(感覺)에 의해 인정할 수 있는 현상에 관한 판단이므로 쉽게 객관성(客觀性)이 인정되는데 대하여, 가치판단은 한정된 종교나 철학자들에 의해서 주장된 것이므로 일반적으로 누구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주관적(主觀的)인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심령기준(心靈基準)이 높아져서 우주에 일관(一貫)되게 작용하고 있는 가치법칙을 만인이 정확히 파악하게 된다면 가치판단(價値判斷)도 보편타당성을 띠게 될 것이다.

 


자연과학은 오늘날까지 사실판단(事實判斷)만을 다루어 옴으로써 사물의 인과관계(因果關係)를 추구해 왔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 자연과학자들은 인과관계(因果關係)의 추구로는 자연현상을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시점에 도달하게 되었으며, 자연현상의 의미나 그 이유를 의문으로 삼게 됨으로써 사실판단과 더불어 가치판단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사실(事實)과 가치(價値), 즉 과학(科學)과 윤리는 통일된 과제로서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통일사상의 견해이다.

 


둘째로 분석(分析)철학자(哲學者)들의 윤리관의 특징은 선(善)이란 정의할 수 없는 것, 혹은 의사개념(疑似槪念))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 볼 때 선(善)은 명확히 정의할 수 있다. 즉 인간은 가정적사위기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한다는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그 목적에 적합한 사랑의 행위를 마음의 의적기능(意的機能)으로 평가한 것이 선(善)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선(善)은 현실적인 사실(행위)에 대한 평가이므로 가치와 사실은 분리(分離)할 수 없는 것이다.

 


  (4) 프래그머티즘

 


   1) 프래그머티즘의 윤리관

 


형이상학(形而上學)을 배제하고 경험적(經驗的), 과학적(科學的) 인식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프래그머티즘도 분석철학과 동일한 기반 위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퍼어스(C. S. Peirce, 1839~1914)에 의해서 제창된 프래그머티즘은 제임스(W. James, 1842~1910)에 의해서 일반화되었다.

 


제임스는 유효(有效)한 것(It works)이 진리이다라고 했다. 예컨대 누군가가 현관에 와서 계십니까하고 기척을 낼 때, 주인은 방안에서 그를 보기 전에 그 찾는 음성만을 듣고서 그가 K씨라고 생각했다고 하자. 그리고 나서 현관에 나가 보고 그가 실제로 K씨였음이 확인되었다면, 주인은 자신이 생각한 것을 진리(眞理)라고 간주하게 된다. 즉 행위를 통하여 검증된 지식(知識)이 진리인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진리란 작업가치(作業價値; working value)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의 개념(槪念)에 대한 진리란 그 개념에 내속(內屬)해 있는 고정(固定)된 성질이 아니다. …… 사건(일의 결과)에 의해서 참(眞)이 되는 것이다. 진리의 참(眞)이성은 사실에 있어서 하나의 사건, 하나의 과정인 데에 있다. 즉 진리(眞理性)가 자기 자신을 진리화해 가는 과정, 진리의 진리화의 과정인 데에 있다. 진리의 효력(效力)이란 진리의 효력화(效力化)의 과정인 것이다.9) p.412

 


이와 같이 진리의 기준 그대로가 가치의 기준, 선(善)의 기준이 된다. 그리고 어떤 윤리적 명제는 이론적으로 논증(論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마음의 만족이나 평안함을 준다는 점에서 진리이며, 또 선(善)이다. 따라서 선(善)이란 절대불변의 것이 아니며, 인류전체의 경험에 의해서 날마다 새로이 수정(修正), 개선(改善)되어 가는 것이다.

 


프래그머티즘의 완성자는 듀이(J. Dewey, 1859~1952)였다. 듀이는 지성(知性)은 미래의 경험에 대해서 도구적(道具的)으로 작용하는 것, 즉 지성(知性)은 여러 문제를 유효하게 처리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도구주의(道具主義; instrumentalism)를 주장했다. 제임스의 경우는 종교적인 진리도 인정했지만, 듀이는 일상생활의 입장에 서서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사고를 완전히 배제(排除)하였다.

 


이와 같은 듀이의 사고방식은 인간을 하나의 생명체(生命體) 또는 유기체(有機體)로 보는 인간관에서 유래(由來)한다. 생명체(生命體)는 항상 환경과 상호작용하에 있으나 불안정한 상태에 빠지면, 거기에서 벗어나서 안정된 상태로 옮아가고자 한다. 그 때, 도구(道具)로써 활용되는 것이 지성(知性)이며, 이러한 지성을 터로 하고 풍요(豊饒)한 사회,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선(善)한 행위라고 보았다.

 


듀이는 과학적인식과 가치인식을 동질적(同質的)인 것으로 보았다. 지성을 사용하여 합리적(合理的)으로 행동하기만 하면 반드시 좋은 상태가 도래(到來)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사실과 가치의 분열(分裂)은 없다. 선(善)이란, 욕망이 충족(充足)되도록 생활의 요구에 따라 한 걸음 한걸음(一步一步) 인식을 성장시키면서 실현해 가는 것으로서, 일거(一擧)에 인식되는 것 같은 궁극적(究極的)인 선(善)을 부정했다. 선(善)의 개념도 문제를 유효하게 처리하기 위한 도구(道具)요, 수단에 불과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도덕적(道德的) 원리(原理)란 일정한 방법으로 행동을 하라든가, 행동하는 것을 보류(保留)하라는 식의 명령(命令)은 아니다. 원리는 어떤 특별한 상황을 분석하기 위한 도구이며, 정사(正邪; 바르고 어긋남)는 규제 그 자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체로서의 상황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다.10) p.414

 


   2) 통일사상에서 본 프래그머티즘의 윤리관

 


제임스는 유효(有效)한 것, 유용한 것이 진리이며 가치라고 했다. 이것은 일상생활에 지식이나 가치를 종속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 볼 때, 일상적인 의(衣)?식(食)?주(住)의 생활에 지식이나 가치를 종속(從屬)시키는 것은 전도(轉倒)된 사고방식이다. 의식주의 일상생활은 진(眞)-선(善)-미(美)의 가치를 기준으로 해야 하며, 진(眞)-선(善)-미(美)의 가치는 창조목적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 창조목적이란 참된 사랑(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목적에 일치하는 행위가 선(善)이 되는 것이지, 생활에 유용한 행위가 반드시 선(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생활에 유용한 행위가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적합(適合)하면 선(善)이 된다. 제임스는 생활에 유용(有用)한 것을 진리와 선(善)의 기준으로 삼았지만 생활은 무엇 때문에 있는가, 인간은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인가 라는 것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듀이에 의하면, 선(善)의 개념을 포함한 지성(知性)은 도구(道具)이다. 그러나 지성이 도구라는 주장은 과연 올바른 것일까. 통일사상에서 보면 심정(心情, 사랑) 혹은 목적을 중심으로 내적성상(內的性相)과 내적형상(內的形狀)이 수수작용함으로써 로고스(사상)가 형성된다. 내적성상은 지(知)-정(情)-의(意)의 기능이고, 내적형상은 관념, 개념, 수리, 원칙 등이다. 여기서 내적성상과 내적형상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 있으므로, 내적형상은 내적성상의 도구(道具)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내적성상인 지(知)-정(情)-의(意)의 기능도 사랑의 실현을 위한 도구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듀이의 경우, 지성(知性)도 선(善)의 개념도 모두 사회개량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였다.

 


듀이가 말하는 도구설(道具說)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면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단순히 일상생활의 풍부(豊富)함을 목적으로 하는 한, 그것은 옳지 않다. 선(善)의 개념들 속에는 생활의 목적은 될지언정 그 수단으로는 될 수 없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선(善)의 개념(槪念)은 바로 생활의 수단이 아니고 목적인 것이다.

 


또, 듀이는 사회를 개선(改善)하기 위하여 과학을 발전시키면, 그것은 그대로 가치와 일치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이 그대로 가치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이 창조목적의 실현-하나님의 사랑의 실현-을 목표로 하게 될 때 비로소 사실과 가치는 일치하게 된다.